전남 영암에서 남편이 베트남 출신 아내를 폭행해 다치게 한,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언론은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결혼이주 여성 9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절반에 가까운 387명(42.1%)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 언론은 여성 결혼이민자의 가정폭력 피해율이 국내 여성의 ‘지난 1년간 가정폭력 피해율’ 12.1%(‘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보다 약 3.5배 높은 수준인 것으로 분석했다.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A(36)씨가 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연 그럴까? 국가인권위원회의 연구용역보고서 ‘결혼이주민의 안정적 체류 보장을 위한 실태조사’(2017)는 “이주민 관련 기관들의 협조를 통한 눈덩이 표집 방법을 활용하여” 표본을 수집했다고 적었다. ‘눈덩이 표집’은 작은 눈뭉치를 굴려 점점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가듯이, 처음 단계에는 표집 대상이 되는 소수의 응답자들을 찾아내 조사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그 응답자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비슷한 속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도록 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비확률표집의 하나다. 그것도 “이주민 관련 기관들”을 통해 조사했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사찰 등에서 사람들의 종교를 조사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의 ‘2010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와 ‘2013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여성 결혼이민자의 가정폭력 피해 실태를 부가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이 두 부가조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이용한 결혼이민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각각 307명과 301명의 표본을 ‘유의추출’했다. ‘유의표집’은 모집단에 대한 연구자의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표본을 추출하는 것으로, 비확률표집의 일종이다.

‘눈덩이 표집’이든 ‘유의표집’이든 비확률표본은 모집단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응답자의 특성을 기술하는 것만 가능할 뿐, 어떤 형태의 일반화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선 2018년 ‘결혼이주 여성 체류실태’라는 인포그래픽을 배포하면서, 비확률표본이라는 점도 밝히지 않았고, 연구용역 수행기관의 결과물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적시하지 않았다. 이 조사결과는 국내 언론 대다수가 인용했다.

그래서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확률표집을 한 조사결과를 찾아보았다. ‘가정폭력 피해율’은 ‘신체적·정서적·경제적·성적 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한 피해자의 비율’로 정의되는데, ‘비교의 등가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만 비교했다.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국내 여성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은 3.3%였고, ‘중한 신체적 폭력’ 피해자 비율은 0.5%였다. ‘2015년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배우자와 다툼 이유’ 중 ‘폭언, 욕설, 신체적인 폭력문제’를 꼽은 사람은 여성 결혼이민자의 1.9%였다. 또 ‘2017년 국제결혼중개업 실태조사 연구’에 응답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 결혼한 지 5년 이내인 여성 결혼이민자가 ‘지난 1년 동안 배우자와 갈등’ 사유로 ‘폭언, 욕설, 신체적인 폭력’을 고른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2.3%였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나타난 ‘신체적 학대’ 유형 중 하나인 ‘폭력 위협’ 피해율은 무려 38.0%였다. 이 조사결과만 유독 튀지 않는가.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한 언론에서 머리기사로 뽑았듯이 “이주여성 40%는 맞고 살아요”가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는 지옥일 것이다. 혹자는 실제 가정폭력 피해율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가들 중 일부가 이런 주장을 편다. 자신의 경험이 보편적이라 판단한 탓이다. 여성 결혼이민자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이 38.0%라면, 별로 드물지 않은 일인데 이번 일처럼 ‘충격적 뉴스거리’가 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가설은 확실히 기각할 수 있다.

둘째, 그 조사가 엉터리라면, 조사결과가 ‘피해자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해 다문화가족 구성원들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키웠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해명해야 한다. 언론이 정정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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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비정규직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친다면 벌써 20년이 넘었다. 당사자와 가족이 아픔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양극화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계급 분화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건널 수 없는 큰 강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희망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희망이 없으니, 한국 사회 특유의 활기도 사라진 느낌이다. 고용 형태의 차이는 꼭 소득만이 아니라, 건강과 수명, 주거와 환경, 교육, 사회적 평판 등 모든 분야에서의 삶의 질을 가른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부터 해결하겠다고 했다.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는 없겠지만, 공공부문부터 모범을 세워 나가겠다는 거다. 공공분야에서 81만개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도 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주.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용어부터 잘못이라고 했다. 비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이라는 거다. 기한을 정하지 않는 계약직으로 사실상 정년까지 보장되니 비정규직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수의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은 맞다. 2007년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마련한 이후, 정부는 같은 방향으로 꾸준하게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새로운 이름 말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화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줄곧 이어졌다. 문제는 실속이 없다는 거다. 노동조건이나 삶의 질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은 “우리는 무기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비정규직이 되었다. 또 하나의 계급이 되었다”(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고 탄식한다. 문재인 정부 역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정규직 전환이라는 허울에만 매달리고 있다. 청와대 상황판에 걸린 정규직 숫자는 늘고 있을지 모르지만, 허울뿐인 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그토록 내세우는 고용안정만 해도 그렇다.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신분은 여전히 불안하다. 해고는 쉽고, 해고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공무원처럼 신분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부처나 엇비슷한 ‘공무직 및 기간제 근로자 관리규정’을 보면, 무기계약직은 해고, 정직, 감봉, 견책 등 네 가지 징계를 받을 수 있다. 공무원에 대한 징계가 파면, 해임, 강등, 정직, 감봉, 견책 등 여섯 가지인 것에 비하면 두 가지나 부족하다. 게다가 징계를 결정하는 단위도 다르다. 무기계약직 노동자는 해당 기관에서 곧바로 징계를 의결할 수 있다. 관계 공무원들이 모여 결정하면 그만이다. 반면 공무원에 대한 징계는 징계위원회를 중앙기관에 둔다. 징계를 받은 다음의 구제절차도 다르다. 무기계약직도 공무원처럼 재심을 청구할 수 있지만, 재심은 1심 위원 중 위원장을 제외한 위원들만 다른 사람들로 바꾸고 진행한다. 상급 기관에서 재심을 하는 게 아니라, 징계를 의결한 그 기관이 재심도 맡는다. 약간의 형식만 달리할 뿐, 1심 결과가 재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거다. 반면 공무원은 인사혁신처 소청심사위원회에서 재심을 다룬다. 인적 구성은 물론 부처까지 다른 곳에서 다른 판단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규정이 이러니, 무기계약직 노동자는 기관장이나 다른 공무원들에게 밉보이면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 최근에 만난 한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사례가 꼭 그랬다. 그는 중앙부처 소속으로 10년 넘게 일했지만, 지난달 해고되었다. 그 노동자가 건넨 징계의결서는 읽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불화를 조성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갈등관계를 조장했다는 등의 혐의가 잔뜩 적혀 있었지만, 대개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계를 박탈하는 의결서치고는 형식과 내용이 모두 엉망이었다. 

무기계약직에 대한 규정은 공무원들이 만든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정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합리적 구분과 차별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무기계약직의 노동조건은 그야말로 차별적이다. 일단 급여 차이가 너무 크다. 9급 공무원과 비교해도 실질임금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공무원과 달리 승진도 승급도 없으니, 그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 30년을 일해도 급여는 호봉만 반영되어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가족수당이나 자녀학비보조수당 등 공무원들이 챙길 수 있는 수당도 받지 못한다. 급여를 받기는 하지만, 이마저 인건비 항목이 아닌 사업비 항목에 편성되어 있다. 예산 편성에 따라 사업비는 얼마든지 줄어들 수도 있다. 노동을 제공하고 받는 임금이 인건비가 아닌 사업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아예 보수 규정조차 없다는 거다. 공무원연금에도 가입할 수 없다. 임금을 사업비가 아닌 인건비로 편성하는 쉬운 일조차 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 

대부분의 무기계약직은 공무원이 하기 싫은 일, 부담스러워하는 일을 맡고 있다. 누군가는 꼭 챙겨야 하는 일들이다. 숙련되어야만 가능한 업무가 대부분이고, 대민 접촉 업무도 많다. 그런데도 무기계약직은 정원에 반영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식의 푸대접은 일상화되어 있다. 

정부 차원의 통일된 규정도 없으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것은 어렵다 쳐도, 방향을 제대로 잡고 관련 규정부터 다듬어 차별을 줄여 나가는 것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이 당하는 노골적인 차별을 공공분야에서부터 줄이는 것이다. 그래야 사영 기업들을 견인할 수 있다.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풀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방향은 옳았다. 문제는 그에 걸맞은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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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늪은 지구상에서 단일 생태계 유형 중 영양물질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당연히 생산성과 생물종다양성이 높다. 이곳을 논으로 만들면 상대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풍부한 수확을 올릴 수 있다. 대략 한 말의 볍씨를 심어 벼 4가마를 수확할 수 있는 면적인 ‘마지기’는 약 150~300평까지 지역마다 다른데, 한 마지기 면적이 150평으로 가장 작은 동네는 오랜 세월 동안 하천이 범람하던 늪지대를 낀 지역이다. 땅에 양분이 풍부하면 벼를 촘촘히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수확하기 위해 늪지를 메워 논경작지로 만드는 일은 국가와 개인 모두 절대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선과제였다. 범람을 거듭하며 수만 년의 에너지가 응축된 늪지에 제방을 쌓아 풍부한 수확을 올려 배고픔을 탈출한 경험은 당시를 산 어르신들이라면 온몸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토건장비들이 여의치 않을 때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말 그대로 순수 노동으로 제방을 쌓아 왔던 어르신들의 헌신으로 그 많던 범람원 늪지대는 빠르게 사라졌다. 어르신들에게 늪지대란 훌륭한 논이 되어야 할 곳이 버려진 안타까운 곳이며, 이곳에 터를 잡은 수많은 새들과 동물들은 곡식을 훔쳐가는 유해조수일 뿐이다. 늪지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배고픔을 기억하는 새마을운동세대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경제적 행위인 것이다. 이미 쌀이 넘쳐나 논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지원금을 주고, 심지어 논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만 해도 돈을 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늪지대를 없애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들여 제방을 쌓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늪지대를 없애는 사업은 4대강사업을 통해 분명 실이 훨씬 큼을 확인했음에도 지금도 멈추지 않고 모든 지천으로 확장되어 늪지대를 없애고 있다.

생산량이 많은 토지는 적은 노력으로 풍부한 먹이를 사냥할 수 있으니 동물 입장에서도 훌륭한 서식처가 된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던 늪지를 사람이 차지했으니 당연히 야생동물은 급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늪지가 주된 서식지인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새마을운동이 활발해질 즈음 한반도에서 사라진,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담긴 처량한 목소리의 주인공 ‘따오기’도 사람과의 경쟁에서 도태된 종 중 하나이다.

늪지를 메우던 새마을운동과 함께 사라진 따오기 40마리가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5월 우포늪 사육장에서 야생으로 날았다. 따오기 서식처인 늪지를 꾸준히 확장하겠다는 창녕군의 의지와 함께 말이다. 야생에서 발견된 지 40년이 넘은 멸종종의 복원이니 창녕군의 노력에 너무 감사하며 이 아이들이 잘 적응하길 바라 본다. 그런데 이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이율배반적 늪지훼손을 다른 이도 아닌, 10년간 따오기를 증식, 방사한 경남 창녕군이 진행하고 있다. 따오기가 새장에서 나오면 곧바로 찾을 것이라 예상한, 우포늪에서 불과 10㎞ 남짓 떨어진 대봉늪 한가운데를 막는, 자연습지를 훼손하는 제방공사가 따오기 방사와 함께 진행 중인 것이다. 제방공사를 위해 축구장 22개 크기의, 나라에서 인정한 몇 안되는 1등급 습지를 단 3시간 만에 조사한 후 환경적 가치가 없다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예상대로 방사한 따오기 중 한 마리는 공사로 인해 훼손돼가는 열악한 여건에도 대봉늪을 찾았고 그곳에는 지금도 다양한 멸종위기종의 서식 흔적이 널려 있다. 발 달린 동물은 그 어떤 개발에도 다른 곳에 가서 잘 산다는 환경영향평가는 대체 왜 하는지? 거짓으로 포장한 늪지대 훼손공사를 멈춰야 하는 이유로 무엇이 더 필요할까?

홍수와 재난을 막기 위해 이미 70년대부터 하천 제방을 제거해 온 독일과는 반대로 지금도 전국 지천의 제방은 높아져만 가고 홍수를 막는, 따오기의 서식처 늪지대는 사라지고 있다. 새장 밖을 나온 따오기를 맞이하는 곳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죽음의 함정이 아니길 바란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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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이 <문장강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39년 2월이었다. 그는 문학잡지 ‘문장’에 9회를 연재한 뒤 이듬해 문장사에서 단행본을 펴냈다. 당시 이태준의 고민은 ‘왜 말은 쉽게 하면서 글은 쉽게 써내지 못하는가’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운문과 산문의 구별, 일기·서간문·기행문 작성법, 퇴고의 요령, 표현 기술 등에서 새로운 문장 작법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요컨대 <문장강화>는 글쓰기 기술에 대한 책이다. 요즘 나온 글쓰기 서적들은 <문장강화>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80년이 흘렀지만, <문장강화>는 ‘글쓰기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이태준에게 글쓰기의 요체는 표현력을 어떻게 높이느냐였다. 그러나 글쓰기의 목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글쓰기에서는 ‘어떻게 쓰는가’에 못지않게 ‘왜 쓰는가’가 중요하다. 글쓰기의 철학과 자세는 문장의 내용과 함께 형식까지 지배하기 때문이다. 작가 조지 오웰이 밝힌 글쓰기의 동기는 기억할 만하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로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 네 가지를 들면서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오웰의 선언은 글쓰기의 지평을 넓혔다. 글쓰기는 더 이상 ‘표현의 기술’이 아니다. 문화, 종교,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수단이다. 단순한 문장 작법이 아니다. 세계를 인식하고 자아를 성찰하는 소통의 통로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는 인간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인문학과 연결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학과 시민강좌에서 글쓰기 교육이 중요하게 다뤄진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들이 최근 글쓰기 과목을 축소·폐지하면서 코딩, 인공지능(AI) 등 소프트웨어 관련 수업을 늘리고 있다. 일부 대학에는 인문학 과목 축소를 비판하는 대자보까지 붙었다고 한다. 4차산업 시대에 컴퓨팅 사고, 빅데이터 통계 등 미래교육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정보화지식이 미래의 모든 것에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정보사회를 분석하고 성찰하는 비판적 사고도 필요하다. 글쓰기와 인문학은 코딩과 AI가 할 수 없는, 또 다른 미래교육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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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우열반 편성을 안 하는 이유가 뭐예요.”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섞어놓으면 학습능률이 떨어지는 건 뻔하잖아요.” “어차피 대학 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된 것이고, 몬가는 학생은 몬가는 기예요.” “보충수업은 어떻게 하실 거죠. 대학생 과외도 허용된 이 마당에 과외를 못할 것도 없지만요, 그래도 어디 대학생들이 선생님들만 하겠어요.” “아니 무슨 체육시간이 일주일에 세 시간이나 돼요. 애들이 피곤해 해요.” “음악, 미술은 시험과목에 없는데 빼는 게 어때요.” “점심시간 50분을 20분으로 줄이고 30분은 자율학습을 시켜주세요.” “도서관 이용은 성적순으로 해주세요.”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한 장면이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성적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교직원들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이들의 요구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영화는 1986년 1월15일 새벽,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중학교 3학년생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전교 1등을 하던 이 학생의 유서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이은주(이미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난 1등 같은 건 싫은데, 난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이 되기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정말 남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슬픈 것을 보면 울 줄도 알고, 재밌는 얘기를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엄만 언제나 내게 말했어,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엄마, 성적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미워해야 하고 성적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미워해야 하는데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나님 왜 이렇게 무서운 세상을 만드셨나요. 선생님 왜 우릴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살게 내버려두셨나요.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서울교육단체협의회, 특권학교폐지촛불시민행동 등 교육,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시교육청 앞에서 이날 발표된 자립형사립고 운영평가 결과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을 성적으로 줄 세우지 말라는, 목숨을 던져 외친 이 중학생의 호소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에 대한 반성도 컸다. 영화가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김대중 정부가 교육부의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꿀 때부터 알아봤다. 사람을 ‘인적자원’이라니. 영화 주인공의 얘기처럼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사람을 인적자원이라고 하는 정부가 ‘줄 세우기’를 없애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한다며 ‘자립형 사립고’라는 것을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이명박 정부는 한술 더 떴다. 교육의 효율성, 자율과 경쟁이라는 명분을 들어 ‘자율형 사립고’를 대거 세웠다.

그래서 결과는. 한국의 경쟁력은 최고 수준이 됐나. 일본이 몇 가지 핵심 부품·소재의 수출을 막았다고 나라 전체에 비상이 걸리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교육은 실패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모두 의대를 가겠다고 하는 현상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공부를 잘하면 당연히 의대를 가야 한다고 해서 온 학생들도 있다”(이재영 서울대 의대 교수)며 대학이 학생들에게 다른 길을 찾아주는 것은 ‘줄 세우기’ 교육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사람들은 만족해 하고 있는가.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세계 12위였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192개국 중 30위로 준수하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경제적 성과에 훨씬 못미친다. 유엔에서 발표한 ‘2019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54개국 가운데 54위다. 싱가포르·일본 등과 함께 1인당 국민총소득 30위권 국가 중에서 행복지수와 차이가 큰 나라에 속했다. 특히 ‘긍정적인 정서’ 순위가 101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왜 우리는 경제수준에 비해 행복지수가 떨어질까. 아마 잘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비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교육 과잉은 개인적으로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면서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입시 명문으로 유명한 특목고에 진학한 자녀가 경쟁에 견디지 못해 가출했다는 지인들의 얘기를 지금도 가끔 듣는다. 학교를 뛰쳐나간 자녀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PC방에서 함께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목적은 1등이 아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막는 것이라면 자사고든 뭐든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어른들의 일이고, 정부의 일이다.

<김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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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형 사립대’(정부책임형 사립대) 시범사업은 왜 절박할까? 얼마 전 교육부는 현재의 대입정원을 기준으로 불과 4년 후인 2023학년도에 부족한 ‘입학자원’이 무려 9만9061명이라고 밝혔다. 입학정원 1500명의 대학을 70개 가까이 없애야 하는 꼴이다. 고등교육법에 따른 4년제 일반대학, 교육대학, 전문대학, 사이버대학 등은 현재 총 357개교이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등 다른 법률에 따른 대학도 15개교가 있지만, 단순계산으로 전체의 20% 안팎에 이르는 대학이 5, 6년 후부터 차례로 사라질 참이다. 하도 어마어마한 사태라서 이 지경이 될 줄 뻔히 알면서 엉뚱한 정책에 매달려온 당국을 비판할 짬도 없다.

이 사태를 시장논리에 맡겨 대학과 학과가 학생을 못 채우면 문 닫는 게 순리라고 하면 그만일까? 지난 7월3일 교육부 사학혁신위원회가 1년5개월의 활동을 마무리하며 낸 백서는 사학에 만연한 비리와 부정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모 대학은 신입생 충원율을 위해 교직원을 동원해 입학 정원 절반을 가짜 학생으로 채웠듯이, 대학 운영권을 쥔 비리집단은 온갖 편법을 통해 학생 등 구성원과 지역사회에 피해를 끼치며 버틸 것이다. 비리사학에 시장의 정상적 작동은 없다. 공영형 사립대의 절박함이 여기에 있다.

공영형 사립대 주창자들은 국제 기준에 따라 대학 예산의 50% 이상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국 모든 사립대에 당장 정부가 예산의 50%를 지원하는 일은 부실비리 대학에 국민 세금을 퍼붓는다는 비판 때문에 불가능하다. 현 정부의 대선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사업 진척이 더딘 가장 큰 이유이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자격을 갖춘 대학들을 몇 곳만이라도 선정하여 그 규모에 따라 100억~300억원을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즉 당장 예산의 50%를 지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회적 공감대가 아직 부족하고 정책 당국의 의지는 더욱 모자란 상황에서 시범사업의 물꼬를 트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오랜 민주화 투쟁 끝에 다시 정상화된 강원도 모 대학의 연 예산은 약 740억원이다. 이 대학에 우선 연 100억원을 지원하고 매년 적절하게 증액한다면 연구와 교육을 위해 이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들을 시작할 수 있다. 또 경기도의 모 대학은 정상화의 기틀을 잡은 교수들이 어려운 학교 재정에도 ‘시간강사 해고 제로’를 다짐하고 있다. 이 대학의 예산은 더욱 적어 연 520억원이다. 내년에 50억원만 지원해도 학교는 활기로 가득 찰 것이다.

시범사업에 대해 회의론도 나올 수 있다. 적절한 정부 지원이 따라도 연구와 교육의 질은 상당한 기간이 지나야 달라진다. 심지어 대학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운 교수와 직원들이 공영형 사립대 지원을 받더라도 학생들을 교양 있는 민주시민이자 유능한 사회인으로 잘 길러낼지는 냉정히 말해 별개의 문제이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다.

그러나 서너 대학이라도 시범사업을 개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리집단을 몰아낸 학교라고 해도 대부분 임시이사체제이며 소위 ‘자율개선대학’ 밑의 ‘역량강화대학’이라 불안정하다. 그 틈을 노린 비리세력은 학교 안팎에서 복귀를 위해 종종 말썽을 일으킨다. 또 노골적인 비리 가담자는 아니어도 대학의 앞날을 확신하지 못해 몸을 사리는 이도 많다. 하지만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대학 발전을 지원할 때, 적폐집단을 더는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일이 한결 쉬워진다.

나아가 시범대학들의 약진을 보며 전국 각지의 사립대, 특히 상대적으로 안정된 신분 위에 현실 변화에 둔감한 교수들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대학 운영자에게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이들이 망가질 위기의 학교를 알뜰하게 살릴 주역으로 다시 태어나야 대학 간 통폐합이나 네트워크화가 효율적이고 내실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촛불의 길에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며,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맙소사, 몇 년 안에 대입 정원 10만명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대학 규모는 줄여도 대학 숫자까지 정원 감축에 맞춰 기계적으로 줄이면 안된다. 지역에 자리한 알찬 소규모 대학 하나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나라의 균형발전에 끼치는 긍정적 역할은 지대하다. 한국 대학이 활력이 넘치는 학문 생태계를 이루도록 향후 10년 동안 연 4조, 5조원 이상을 늘리는 과감한 고등교육 장기투자계획이 나와야 한다. 국제 지표와 우리의 경제 역량에 비춰 하등 무리한 일이 아니며, 그 첫 단추는 공영형 사립대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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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의 소문난 맛집에 가면 어김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 맞이할 때가 있었다.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음식점 주인의 사진을 보자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2016년 탄핵 국면을 지나면서 슬그머니 사진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이 있던 자리는 철 지난 바닷가처럼 한동안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한 맛집에 들렀더니 그 자리를 <백종원의 삼대천왕> 사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박근혜에서 백종원으로!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대구·경북의 모든 음식점에 <백종원의 골목식당> 사진이 걸리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박의 국가언어’로 살던 대구·경북 사람들이 ‘백의 시장언어’로 살아가는 날을 상상해본다.

‘박’은 모든 문제를 중앙정치 탓으로 돌리는 국가언어를 상징한다. 지역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고 투덜대면서도 지역 스스로 해결할 생각 대신 대구·경북 출신의 유력 정치인만 바라본다. 제발 대기업을 유치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모델이다. 고속도로 만들고 중공업에 투자해서 지역경제를 일으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똑같이 해주리라 바랐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이 모든 게 종북좌빨이 방해한 탓이다. 뿌리를 뽑아버려야 할 텐데, 정말 자유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된다.

‘백’은 기업가로 자신을 변화시켜 살아가려는 시장언어를 대표한다. 백종원은 영세식당 주인에게 자기를 교정, 치료, 계발, 혁신해야 할 부실기업으로 보라고 다그친다. 더 나아가 문제투성이인 자신을 우량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자기계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라고 말한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불확실성을 오히려 자유를 실현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기업가적 주체가 되라고 가르친다.

현재 대구·경북에는 박에서 백으로 변화할 징조가 여전히 보잘것없다. 오히려 맛집 행세하며 시장언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십수년 전 대구로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을 때다. 외국에서 살던 친구가 사업차 대구를 방문한 김에 나를 찾아왔다. 회포를 풀러 삼겹살집에 마주앉았다. 2인분을 시켰더니 3인분부터 주문을 받는다는 예상치 못한 응대가 나왔다. 저녁을 먹고 왔으니 안주용으로 2인분만 달라고 호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둘이 오면 2인분 시키는 것이 정상인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다. 1인분 값이 싸기에 밑반찬 생각하면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주인 돈 벌어주기 위해 있는 것인가? 고깃집이 여기밖에 없냐며 호기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다른 곳도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 비슷한 일을 거듭거듭 겪었다. 이제 둘이 삼겹살집에 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3인분을 시킨다. 저항하다가 지역 습속에 젖어든 것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습속은 여전히 막강하다. 어떤 집은 일단 3인분 시켜야 하고, 그 후부터 새로 주문할 때는 무조건 2인분이 기준이다. 더 먹고 싶으면 결국 5인분을 주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가 막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다. 주변의 고깃집에서 항의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습속이란 사실상 막강한 제재를 담고 있는 지역의 담합인 셈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시장이 사회적 유대를 산산이 부수고 시민을 이기주의자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으로 가득하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유용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환 당사자들이 서로 경쟁할 때 시장이 존재하게 된다.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위계’에 의한 내부자거래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습속’에 의한 교환은 경쟁을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그곳에는 시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오로지 시장에서만 교환을 위한 경쟁 과정을 통해 교환 당사자들의 유용성에 대한 욕망이 호혜적으로 충족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위계와 습속을 통해 교환해온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거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의해 포획되었다고 선험적으로 질타하기 전에 대구·경북 일상의 삶을 톺아보아야 할 이유다. 나는 묻는다. ‘박대백’은 과연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 시장언어가 비로소 침투해 들어가는 작은 낌새인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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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패스트트랙 대치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고소·고발된 더불어민주당 의원 4명과 정의당 의원 1명, 자유한국당 의원 9명에 대해 소환통보했다. 앞서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을 의원실에 감금한 혐의로 출석을 요구했지만 소환을 거부한 한국당 의원 4명에게는 2차 소환통보했다. 지난 4월 폭력사태가 벌어진 지 석 달 만에 경찰 조사가 본격화한 것이다. ‘동물국회’라는 오명까지 낳은 폭력사태의 진상이 경찰 조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 대신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보임된 채이배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창문을 통해 인터뷰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점거하면서 채 의원은 6시간 넘게 갇혔다. 연합뉴스

그러나 한국당은 이번에도 ‘표적수사’ ‘야당탄압’ 운운하며 소환 불응 방침을 밝혔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11일 “편협하고 일방적이며 불공정한 사법 잣대를 들이대는 전형적인 정치탄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환에 응하는 것 자체가 국회의 독립성과 자율성 포기이고 야당이 야당이길 포기하는 것”이라며 “한국당은 무책임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이번 수사는 경찰이 기획한 것도 아니고, 여야 의원들이 서로 상대를 처벌해달라며 고소·고발장을 제출해 시작됐다. 그러고 막상 수사가 진행되니 조사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도대체 폭력 의원들에 대한 조사가 국회 독립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일반 시민들이 경찰 소환에 응하는 건 당연하고, 의원들은 국가의 형사사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해도 괜찮다면, 그런 나라를 온전한 법치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국회 패스트트랙은 여야 간 법률안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폭력으로 밀어붙이거나 회의장을 점거하는 야만적 충돌사태를 더 두고볼 수 없다는 반성 끝에 마련한 제도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5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도록 엄격한 처벌규정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국회폭력을 막기 위해 마련한 그 제도마저 폭력으로 짓밟고, 폭력 의원들이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선진화법은 있으나 마나 한 휴지 조각이 되고 말 것이다.

함께 소환통보를 받은 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은 출석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국당 의원들도 경찰 소환에 응해 떳떳이 조사받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마땅하다. 고소 취하 같은 정치적 딜이나 방탄국회에 기대 어물쩍 넘어가려는 생각은 접는 게 낫다. 이번 수사는 단순 폭행이 아니라 국회선진화법이 계속 유지되느냐, 의회민주주의를 지키느냐의 중대 과제가 걸려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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