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동남아 여행 중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유적을 찾기 위해 씨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색안경을 낀 어떤 청년이 음악에 맞추어 처음 보는 이상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강남 스타일’이라는 자막도 떴는데 말로만 듣던 ‘말춤’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캄보디아에 이어 미얀마를 찾았다. 수도였던 양곤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이 우리말을 제법 잘 구사해서 어떻게 배웠는지를 물었다. 주로 한국 TV 연속극을 통해서 배웠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생소한 한국 드라마의 제목을 줄줄이 댔다.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시작된 이른바 ‘한류’는 이제 미국은 물론 유럽에까지 상륙해서 한국 문화산업의 성공적인 진출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방탄소년단(BTS)’이라는 K팝 그룹이 최근 자주 이야기되기에 나의 젊은 시절 세계를 휩쓸었던 장발의 비틀스를 떠올리며 작년에 베를린에서 있었다는 그들의 공연 동영상을 보았다. 각자 여러 가지 색깔로 머리칼을 물들인 한국 청년 일곱 명이 무대 위에서 율동에 따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말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도 독일 젊은 여성팬들은 꽤 열성적으로 함께 환호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장면을 보면서 1960년대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까지 흘리며 열광했던 당시의 젊은 여성들 모습도 떠올렸다. 그러나 비틀스의 음악이 기반을 두었던 당시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구조는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생산된 LP판을 통해서 유통되거나 대형 공연장에서 음악의 내용이 전달된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문화와 기술을 구별하기 힘든 디지털 매체가 사회관계망을 통해서 확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한 대중음악 세계에 변방의 대중음악이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시사해준다. 그러나 그런 음악세계에 낯선 나에게는 이 아이돌 그룹의 성공신화가 얼마나 지속될지가 먼저 궁금해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했던 미국은 이른바 대중문화의 분야에서도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대중문화가 실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만든 문화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나치독일 때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 대신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거대한 독점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계속 창출할 수 있는 문화상품을 적극 개발하고 문화에 있어서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를 구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 속에서 그러한 문화산업은 계몽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는 반계몽적인 ‘대중사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 오늘날 글로벌 정보사회의 핵심 중 하나인 문화산업은 TV수상기를 ‘바보상자’라고 불렀던 시절의 문화산업에 비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미국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스콧 레시는 기본적으로 문화와 기술이 맺는 관계양식이 다른 데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문화가 산업의 종속변수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산업이 문화를 뒤쫓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품 생산에 있어서 디자인에 쏟는 엄청난 투자를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차이와 함께 과거의 문화산업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문화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용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를 따르면 글로벌 사회관계망으로 연결된 팬들의 열성적인 참여가 방탄소년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이라는 점도 설명해준다.

그러나 글로벌 문화산업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신자유주의의 맥락 속에서 이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견해는 여전히 있다. 공적인 의무를 방기하고 이미 퇴각한 공공기관의 자리를 차지한 각종의 문화 스폰서링은 문화가 자본과 시장에 더욱 종속되게 만들고 있고, 이는 결국 인간의 자율성을 훼손하기 마련이라고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비판한다. 70년 전에 이미 제기되었던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을 다시 상기시키는 주장이다. 아도르노와 부르디외의 문화산업에 대한 이런 비판은 그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부터도 기인한다. 스스로 현대음악을 작곡했던 아도르노나 계급과 계층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는 심미적 판단력에 깊은 관심을 돌렸던 부르디외의 문화나 예술 이해가 엘리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문화산업에 대한 이런저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은 문화는 이미 다양화하고 다원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문화가 서로 만나면서 갈등도 생기지만 동시에 상호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방탄소년단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 주위에 2015년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해서 현재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성진의 이름은 알지만 방탄소년단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다. 글로벌 문화산업과 연관된 한국적인 코드는 다양하다.

그러나 빌보드 차트 1위나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1위가 대서특필되고 그래서 이런 쾌거가 단지 국위선양으로만 간주된다면 오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화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에서는 그런 경사스러운 사건도 실은 미국이나 유럽 문화산업이 주변부의 문화를 그들의 주위에 묶어 놓는 전략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편에서는 이를 주변부의 문화가 중심부의 그것과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 긍정적인 발전으로 해석한다. 어떤 경우든 문화적인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반성 없이는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산업이 규범화하고 전형화한 틀로부터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와는 달리 베를린에도 이제 한국식당이 제법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인 식단으로 손님을 맞는다. 한국적인 미각을 살리면서 다른 음식문화와도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식단의 개발이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상상력이 결핍된 것처럼 보이는 베를린의 한 식당의 이름처럼 ‘밥과 김치’가 우리 음식문화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같이 호흡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세계를 찾는 ‘역동역이(亦同亦異)’의 긴장이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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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지정 평가 및 탈락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학생 선택권 강화와 교육 다양화를 위한다는 설립 취지와는 달리, 자사고가 ‘입시학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교 서열의 최상에 군림하면서 우수 학생들을 빨아들여 왔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정신을 상실했기에 자사고 지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따라서 자사고의 비교육적 결과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고교교육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첫째,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자사고 제도는 자녀의 입시 성공을 선점하려는 일부 학부모의 욕구를 수용하여 이를 다양화로 포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교육의 다양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사고의 특성화 프로그램은 자사고의 견학이념을 구현하지 못했다. 고유하고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하지 않아 ‘부유층 우수 학생 유치를 위한’ 학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9일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박건호 교육정책국장(가운데) 등 교육청 관계자들이 관내 자립형사립고(자사고) 13개교에 대한 운영평가 결과와 자사고 지정 취소 관련 청문 대상 학교를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둘째, 고교교육이 자사고로 편중됨으로써 일반고를 황폐화시켰다. 자사고가 주변 학군이 좋지 않아 갈 곳이 없어 ‘가야만 하는’, 즉 ‘덜 험한 학생들이 오는 학교’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훈육이 쉬운 학생’들이 모이고, ‘지원해서 선발되었다’는 이유로 자부심, 즉 구별짓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서울의 경우 지역별 학교선택제의 약점, 자사고 선발방식의 맹점으로 학생들의 대이동이 야기됐다. 자사고 미달 사태가 발생하면, 충원하기 위한 2차 모집도 했다. ‘후기 자사고’ 현상이 일어났다. 지역의 교육 생태계가 파괴됐다. 

셋째, 자사고 평가는 학교에 대한 평가보다는 자사고 정책과 제도에 대한 평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자사고 평가는 공교육 환경에 주는 효과를 고려하여 점검되어야 한다. 초기 자사고들에서 입시위주 교육과정 편성 등이 논란이 되자, 많은 자사고들이 평가에 대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 즉 입시와 연계된 다양한 봉사활동, 자율동아리, 비교과 탐구활동, 학생 간 멘토·멘티 등을 도입한 것은 자사고의 본래 목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이는 자사고의 생존을 위한 소극적 차원의 ‘자사고 살리기’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자사고는 설립 목적과 달리 자립성도 취약하다. 자사고의 재정전입금 평가 기준이 5%에 지나지 않고 연간 100억원이 넘는 돈을 학부모가 부담하는 학교가 되어버렸다. 현재 자사고가 보장받는 자율성과 지원의 대가로 사회적 배려자 전형을 하도록 되어 있으나, 사회격차 해소 재원인 사회적 배려자 장학금이 국고에서 지급되는 것은 기회균등의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 일반고 3배 이상의 등록금을 저소득층 장학금으로 충당한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대부분의 자사고가 중학교 내신 성적을 기준으로 입학 성적우수자 장학금을 지급한 것도 문제다. 

자사고 제도는 평가 방식의 문제를 넘어 근본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검토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자율학교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입시교육을 규제하는 미봉적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자사고를 폐지한다는 것은 곧 비정상적 고교교육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이제 자사고의 폐지는 일반고 살리기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고교체계는 학벌사회 문제, 일류대학 문제, 입시개혁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할 우리 교육의 최대 과제이다. 고교체계 개편을 통해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구현하여 모든 학생들이 평등한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심성보 |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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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9월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했다. 굳이 3·1운동 10주년을 맞아 이 행사를 기획한 데에는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인의 ‘자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진행된 이 박람회를 관람한 인원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100만명이 훨씬 넘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발간한 한 잡지는 한 촌로(村老)의 소감을 이렇게 소개했다. “거 참 흉악한 놈들일세, 조선 사람의 흉거리란 흉거리는 다 모아 놓았네 그려.” 

이 촌로의 말대로, 조선박람회는 ‘조선의 모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흉거리’를 전시한 행사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박람회를 이용해 열등한 조선인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은 미몽(迷夢)에 불과하며, 일본인의 계도 아래 문명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을 조선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새겨 놓으려 했다. 천도교계에서 발간하던 잡지 ‘별건곤’은 이에 맞서 ‘조선의 자랑’이라는 특집란을 만들었다. 일본이 보여주는 것만이 조선의 전부가 아니며, 조선인에게는 자랑거리도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잡지 지면이 장대한 스펙터클에 맞설 수는 없었다. 박람회가 끝난 뒤 ‘별건곤’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종로 네거리 우리 동포들의 상점지대로부터 북촌(서울의 조선인 거주지) 일대의 휑뎅그렁하며 빈 듯하며 어둠침침한 그것에 비하여 모든 사람의 눈을 현혹케 하여 마지않는 남촌(서울의 일본인 거주지)의 광경에 우리 정신까지도 전부 거기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 동포들이 한 번 이곳을 구경하고 이 땅을 밟을 때에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이 놀람과 찬탄이 드디어 부러움과 동경(憧憬)의 표적으로 변하여 그네들의 머릿속에다 깊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조선박람회장뿐 아니라 행사장이 자리 잡은 서울 경관 전체가 조선인에게 일본을 향한 동경과 자기 모멸의식을 심어주고 확산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이원적 경관조차도 민족 차별적 도시 행정의 소산이었다.

어느 나라나 근대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과 담론을 동원하여 자민족의 우수성과 자국사의 특별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자국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타국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국사를 ‘독창적이고 선진적이며 위대한’ 역사로 꾸미기 위해 인접국인 한국 역사를 ‘사대주의적이고 후진적이며 미개한’ 역사로 정리했다. 메이지유신 무렵부터 일본의 신문·잡지들에는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실렸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이나 기생이었다. 반면 일본인의 대표 이미지는 양복 입은 장년 남성이었다. 이런 텍스트와 이미지를 수없이 접하면서, 일본인들의 의식 안에는 문명개화에 성공한 건장한 일본인이 미개하고 노쇠하며 연약한 조선인을 계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리 잡았다. 한국인을 멸시하는 의식, 즉 ‘혐한의식’은 일본인들을 근대 국민으로 묶어 준 밧줄이었다.

일본인들의 혐한의식은 한국을 강점한 후 더 강해지고 정교해졌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선입견에 따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 풍속 등을 조사, 정리했다.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조선인은 이기적이고 나약하며 독립심과 책임감, 공익 관념이 없고, 배은망덕하며 나태하다는 담론이 진실인 것처럼 유포되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진행된 민족별 계층 분리 현상은 ‘빈곤의 속성’을 ‘민족의 고유 습성’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담론은 각종 매체, 특히 교과서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이식되었다. 많은 조선 지식인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 자체가 이 담론의 진실성을 담보한다고 믿었다. 조선 지식인들 스스로 조선인의 악습과 악덕을 개조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개조할 것인가? 그들에게는 일본이 모델이었고 일본인이 스승이었다. “스승을 미워하면 배울 수 없다.” 그들에게 ‘반일’은 배움을 가로막는 악덕이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린애 같은 자존심’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혐한의식도 종종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1923년의 관동대학살은 물론, 동학농민혁명, 의병전쟁, 경신참변 등 일본군의 학살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및 일본군 성노예 학대에도 혐한의식은 여지없이 작동했다.

패전 후 일본 평화헌법은 국가 간 대등관계를 명시했고 일본인 사이에서도 근거 없는 민족 우월의식과 주변 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청산하자는 문화운동이 벌어졌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1980년대 말, 경쟁 만능의 신자유주의 사조가 확산하자,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 시대를 반성하기보다는 영광으로 기억하자는 담론이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일본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 반성할 이유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자, 잠재해 있던 ‘혐한의식’도 다시 표출되었다. 일본 도처에서 혐한시위가 벌어지고 한국인 학교 학생들이 폭행당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국 지식인 일부는 이식된 혐한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인들이 자기 모멸의식에서 벗어난 ‘정체성’ 담론에 익숙해진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세계사적 지각 변동에 따른 ‘힘 만능주의’의 부활은, 한국인에게 이식되었던 혐한의식까지 소생시켰다. 대일관계에서 늘 ‘우리 탓’을 하는 태도는, 우리 안에 잔존한 혐한의식의 소산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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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쏟아지는 조명과 광활한 축구장을 가득 채운 함성. 뜨거운 공기 속을 유영하는 카메라는 출전을 앞두고 있는 선수들을 비추고, 그들 사이로 잔뜩 긴장한 플레이어 에스코트의 얼굴이 보인다. 경기장까지 선수를 배웅한 에스코트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몸을 돌려 빠져나오려 한다. 그때,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11번 선수가 말한다. “아직 안 끝났어.” 이때부터 한 소녀의 FIFA 월드컵 모험이 시작된다. 

지난 7월8일 폐막한 2019년 프랑스 여자 월드컵을 기념해 나이키가 내놓은 광고 ‘그 이상을 꿈꿔라(Dream Further)’의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한 10대 축구선수 마케나 쿡은 구릿빛 피부를 빛내며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는 에스코트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광고는 축구 꿈나무가 이름 있는 선수들, 그리고 심판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쿡의 짧은 환상이었던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지금 그라운드를 뛰는 선배의 모습이 이후 후배의 커리어를 견인하는 힘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광고의 끝에 쿡은 자신이 에스코트하는 선수에게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는다. “준비 됐죠?”

“너 자신이 되어라”거나 “당신의 가능성을 믿는다”라던 나이키는 이제 세대를 이어가며 쌓이는 여자들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이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하지만 현실 속의 나이키는 성차별적인 스폰서 정책과 고용차별로 문제가 되고 있다. 

2019년 5월, 미국 육상 선수인 앨리손 펠릭스를 비롯한 3명의 선수는 임신 때문에 나이키로부터 계약상 불이익을 당했다고 밝혔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한다. “임신은 프로 선수의 경력 중 일부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이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는 날을 꿈꾼다.” 출산 후 경기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후원금을 삭감하는 것은 편견에 따른 차별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나이키에 대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고발자들에 따르면 나이키는 동일임금법을 위반하고,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다. 가해자를 승진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의 관리를 받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여성의 지위와 평등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나이키의 광고 메시지와는 사뭇 다른 결정들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나이키는 기본적으로 가부장제적 성별분업에 기대고 있는 기업이다. 여성학자 신시아 인로는 나이키가 여성이 경제적으로 가장 소외된 나라를 아웃소싱 국가로 선호한다고 지적했다. 나이키는 여성의 입지가 취약한 나라에 스웨트숍(SWEATSHOP·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으면서 노동하는 작업장)을 세우고 이를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인로에 따르면 과거 한국에 나이키 스웨트숍이 들어섰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군부독재가 노동조합을 억압하는 데 열심이었고, 둘째 “열심히 일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여성의 도덕’으로 여겨지는 문화 덕분에 여성 노동자를 쉽게 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런 착취 산업은 상황이 더 안 좋은 나라들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후였다. 이런 이동이 일어나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은 나이키가 친여성적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아시아 지역 스웨트숍에 대한 비판이 나이키의 이미지를 잠식하는 시점이었던 셈이다.

나이키 페미니즘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고의 상상력은 여성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의 가능성을 해방시키고 그 운신의 폭을 넓힐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와 삶은 뭉개면서 그의 지갑만을 찬양할 때, 여성은 ‘부당한 대우와 착취-시발비용 탕진-부당한 대우와 착취’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 갇힐지도 모른다. 물론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값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며 착취당하는 스웨트숍 노동자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우리가 소비자로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 말하고 움직일 때에야 비로소, 나이키 페미니즘을 발판으로 현실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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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과월호를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이가 직접 책을 가지러 오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택배로도 보내주는 책을 굳이 가지러 오다니, 무거울 텐데. 게다가 지방에서 서울까지. 들른 김에 차 한 잔 할 수 있느냐고, 머뭇머뭇하는 목소리에서 하고픈 말이 아주 많은 마음이 읽혀 여유 있는 날로 약속을 잡았다.  

찾아온 그는 앳된 얼굴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교대를 졸업하고 발령받은 지 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아이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교실에서 자신의 역할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통제하는 사람, 해야 할 것을 놓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며. 나는 흔히들 학교를 파놉티콘에 비유하고 교사를 간수 역할에 비유하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일면 사실이기도 했다. 많은 시도를 하고 있지만 한국 공교육이 ‘입시’와 ‘성적’이라는 목적을 바꾸지 못하는 한 교사의 역할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신념에 차 있는 사람보다 갈등 속에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다”는 우치다 다쓰루(<교사를 춤추게 하라>, 박동섭 옮김, 민들레)의 말을 인용하며, 이제 겨우 첫발을 뗐으니 학교가 어떤 곳인지, 그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알 때까지 더 견뎌보시라 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들을 찾아 고민을 나누시라고도 했다.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은 좀 내려놓고 내 교실만이라도 덜 불행하게 꾸려보겠다는 작은 목표로 1인 교육혁신 프로젝트를 시작해보시는 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조언을 건네면서도 사실 자신은 없었다. 학교를 더 오래 경험하는 것이 그에게 좋을지, 오래 머무른다고 지금과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을지, 본인이 원하는 대안의 길을 공교육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다만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하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의 교직 생활을 응원하고 싶었다. 질문을 던지며 갈등하는 그가 고마웠다. 

교사란 무엇인가. 새삼스러운 그 질문에 답을 찾으며 아이들 곁에 있는 이는, 적어도 내가 알기엔 많지 않다. 사범대학이 임용고시 대비 학원으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던 대학생이나 교장 눈치, 학부모 눈치에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젊은 교사들을 흔히 보아온 탓이다. 

제일 불행한 교사는 ‘아이들을 싫어하는 교사’다. 싫어하는 존재들과 인생의 긴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불행한 일은 없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니, 그 예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좀 더 힘을 내보시라”며 도움이 될 만한 교사단체나 교사 연수프로그램 등을 알려주면서 그를 힘껏 설득했다. 

두 시간 남짓한 얘기 끝에 같이 점심을 먹고,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돌아서는 젊은 선생님 가방에 잡지 과월호와 함께 책 몇 권을 찔러 넣었다. 고민이 있을 때 언제든 또 들르시라는 말과 함께. 그가 학교를 그만두지 못하게 붙잡고 싶었던 건, 갈등하는 교사일수록 더욱 아이들 곁에 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모른 채 위험하게 질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 있는지 고민하는 교사라면 ‘어른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내느라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는 아이들에게 분명 다른 삶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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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삼복(三伏)에 들었으니 여름이 한창입니다. 우리나라는 계절마다 불어오는 바람 방향이 다릅니다. 봄에는 동쪽에서 샛바람, 여름에는 남쪽에서 마파람, 가을에는 서쪽에서 하늬바람, 겨울에는 북쪽에서 된바람이 불어옵니다. 여름 바람 남풍, 마파람은 앞에서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네마다 앞산을 남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남향집에서 바라보면 앞이 남쪽이고, 경복궁에서도 경주 시내에서도 남산이 보입니다. 그래서 남풍은 앞에서 부는 바람, 마주 부는 바람, 맞바람, 마파람이 됩니다.

급하게 먹어치우거나 행동이 재빠르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고 합니다. 누군가 면전에서 바람을 훅 불거나 무서운 것이 눈앞에 있을 때 저도 모르게 눈 질끈 감습니다. 게 역시 홱 바람이 불거나 위험하다 여기면 세웠던 눈을 빠르게 접습니다. 그런데 재빠르다 하면 보통 ‘눈 깜작할 새’를 써야 할 텐데 왜 ‘게 눈’을 가지고 표현했을까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은 원래 ‘무언가를 빠르게 먹어치우는 모양’을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가만 보면 게의 눈은 숟가락같이 생겼습니다. 눈알은 동그랗고 그 아래 기름한 자루는 가느니까요. 또한 게가 눈 자루를 접었다 펴는 모양은 그릇째 들고 숟가락으로 밥 퍼먹는 동작과 같습니다. 그 동작이 속도로까지 널리 쓰이게 된 것이지요. 손도 숟가락처럼 팔보다 폭이 넓습니다. 숟가락 댈 것도 없이 연신 양손으로 허겁지겁 집어먹는 사람은 쉴 새 없이 개펄 집어먹는 게와 다름없이 보였을 겁니다(숟가락 같은 게의 눈은 덤이고요). 

또다시 바닷바람 여름입니다. 근육량 증가와 칼로리 소비 없이 사둔 수영복만 바라보며 쫄쫄 굶겠지요. 그렇게 매번 게 눈 감추듯 정신없이 비워버린 양푼과 자책의 한숨만 남기면서요. 과학적이지 않은 허겁지겁 다이어트는 자학인데 말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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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어 비를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갖고 있던 머플러를 머리에 둘렀다. 한참을 가는데 옆을 지나가던 차 한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청년 둘셋이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제스처를 섞어가며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지나가며 외친 말이지만 혐오 발언이 분명했다.

10년 전 이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오롯이 ‘이방인’이 되는 순간에 느낀 공포 때문이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현지인, 나는 유학생, 그러니까 이주자였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남성, 나는 여성이었다. 소리를 지른 이들의 종교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복장이었다. 

당시 유학을 하던 곳은 몇 년 전 벌어진 큰 테러로 특정 종교나 인종을 향한 분노와 거부감이 큰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진 밑도 끝도 없는 공격이 제대로 설명되진 않는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공포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성이자 이주자이자 동남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한 여성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는 뉴스를 보자 그때가 생각났다. 남편이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 등의 이유로 부인을 폭행했다는 것은, ‘다름’을 이유로 폭력이 행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 여성을 향해 ‘폭행 유도’, ‘의도적 촬영’이라거나 ‘유부남과 교제한 내연녀’ 등의 비판이 쏟아지며 ‘폭행 피해자’라는 본질이 흐려지는 상황도 벌어졌다.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A(36)씨가 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을 통한 이주를 선택한 여성들의 경우 제도적으로 배우자인 남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신원보증서 제출 규정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국적 취득 전 체류 연장을 위해선 남편의 동행이 요구되는 등 사실상 ‘신원보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급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주여성은 버티고 참아낸다. 양육권 문제도 걸려 있다. 이번에 폭행을 당한 여성은 베트남 언론에 “이혼한 뒤 아이의 양육권을 갖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부에선 이주여성들이 ‘국적 취득을 위해 접근한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한다.

노동현장의 여성 이주노동자도 폭력에 취약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에선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사도우미들이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거나 표백제를 강제로 먹는 등의 수난을 겪은 일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성폭력에도 노출돼 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11.7%였고, 피해 상황에서도 ‘말로 대응하거나 그냥 참았다’고 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차별과 폭행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2009년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을 향해 “냄새나는 XX”라고 했던 남성이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모욕죄 유죄를 선고받은 경우도 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이번 폭행 사례가 알려지자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성명에서 “한국 사회에는 아시아 개발도상국 이주여성에 대한 성·인종 차별적인 인식이 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는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의 책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에 더한 글에서 이 같은 모순을 ‘GDP 인종주의’라고 표현했다.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패밀리’이고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가정’”이라는 대목은 곱씹어봄 직하다.

‘선’ 하나를 넘으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기에 아무도 ‘이방인’일 수 없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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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실사(實寫)영화 <알라딘> 관객 수가 지난 14일 1000만명을 돌파했다. 해외 영화 중에선 역대 7번째다. 인기는 극장 밖에서도 실감된다. 카페에 들어가든 택시를 타든 자스민 공주(나오미 스콧)가 열창하는 ‘스피치리스(Speechless·말을 못 하는)’가 흘러나온다. 자스민은 술탄의 ‘안사람’이 되기를 거부했다. 직접 술탄이 되고자 했다.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며 왕자와의 결혼을 압박하는 아버지에게 “다른 나라 왕자가 나보다 더 이 왕국을 사랑하겠느냐”며 술탄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철권을 휘두르는 실력자가 화초처럼 가만히 있으라 하자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투쟁을 통해 마침내 술탄을 쟁취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원작 애니메이션보다 진화한, 강인하고 진취적인 자스민의 매력을 주요 흥행 요인으로 꼽는다.

영화 ‘알라딘’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는 ‘걸크러시(여성이 다른 여성의 동경·찬양 대상이 됨)’의 전시장이다. 포털업계 고위직 여성인 배타미(임수정)·송가경(전혜진)·차현(이다희)은 각자 성공이란 욕망을 향해 질주한다. 경쟁하는 이도, 협력하는 이도 여성이다. 이른바 ‘민폐녀’ 캐릭터나 백마 타고 온 왕자는 없다. <검블유>는 지상파·케이블·종합편성채널을 모두 망라한 ‘드라마 화제성 지수’(굿데이터코퍼레이션·7월1주)에서 3위에 올랐다.

전통적으로 욕망은 남성의 언어였다. 남성이 권력을 욕망하면 ‘권력의지’로 상찬되는데, 여성이 같은 걸 꿈꾸면 ‘권력욕’으로 폄훼되기 일쑤였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도록 가정과 사회에서 압력을 받아온 여성들은 ‘무슨 여자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란 비난 앞에 맥없이 무릎이 꺾이곤 했다.

문화상품은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예민하고 영리한 촉수 없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금세 낙오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영화와 드라마가, 지금 대세는 ‘욕망에 솔직한’ 여성들임을 말한다. 자스민과 배타미는 현실에도 존재한다. 최근 폐막한 2019 프랑스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한 미국 대표팀의 주장 메건 래피노다.

래피노는 네덜란드와의 결승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미국의 2연패, 통산 4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골든부트(득점왕)와 골든볼(최우수선수)까지 휩쓸었다. 하지만 부와 명예에 만족하는 대신 더 큰 욕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미 여자축구대표팀은 지난 3월 미 축구협회를 상대로 남녀대표팀의 임금·포상 차별에 항의하는 소송을 냈다. 여자대표팀 대변인은 “우리 팀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더 높은 TV시청률을 올리고 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적은 보수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선 여자축구가 남자축구에 비해 국제대회 성적은 물론 인기도 앞선다. 대중도 미 여자축구대표팀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여자월드컵 시상식과 대표팀의 뉴욕 카퍼레이드에서 군중은 “동일 임금(Equal pay)”을 연호했다.

세계 최고의 여자축구 스타가 된 래피노는 방송이나 광고 출연만으로도 천문학적 수입을 올릴 수 있다. 개인적 공격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어젠다에 굳이 눈 돌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확장해 시스템을 바꾸려 한다. 자스민이 주저앉지 않고 술탄이 되었기에 그의 딸과 손녀도 술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래피노가 동일운동·동일임금(Equal play·Equal pay) 소송에서 승소한다면 축구는 물론 다른 종목의 선수들까지 성별과 무관하게 공정한 대우를 받는 길이 열릴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소탈하고 포용적인 ‘무티(엄마) 리더십’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을 통해 이 자리에 이르렀다. 1991년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 출신 과학자 메르켈을 통일 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하며 “나의 소녀”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정치적 부녀 관계로 각인됐다. 그러나 1998년 콜 총리와 소속 기독교민주당(CDU)이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로 위기에 빠지자 메르켈은 “콜의 시대는 갔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메르켈은 2000년 CDU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고, 다시 5년 후엔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올랐다. 메르켈은 자스민이었다.

욕망에 솔직한 여자들, 도전을 겁내지 않는 여자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여자들만 그래선 안된다. 청년과 장애인과 서민과 노동자도 ‘스피치리스’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욕망을 표출하고 추구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야 한다. 더 많은 여성·청년·장애인·서민·노동자가 강요된 침묵에서 깨어날수록 세상은 더 평등해지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바로 ‘A Whole New World’(알라딘 주제곡·완전히 새로운 세상)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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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납작하게 산다. 나무처럼 자라고, 꽃같이 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날이 납작하고 납작해져서 그림자보다도 더 아래로 몸을 숨기는 게 사람의 일생이겠다. 세속의 일상은 이 납작에 저항하는 자세이다. 머리맡의 찬물이 미지근해지는 것처럼 자꾸 납작해지는 그 삶 속에서 큰 고비를 하나 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죽음은/머리도 가슴도 발목이 아닌/ 뒷덜미를 통해 올 것이다// 산 정상 바로 아래 어디쯤/ 불각시에 산불이라도 났을 때 대비하는 헬기장// 햇빛이 바글바글 놀고 있는 공터/ 웬만한 산의 뒷덜미쯤에 있는 공터// 수피가 튼튼한 참나무/ 겨드랑이를 긁고 발목에 쌓인 낙엽을 청소하려고/ 마른 기운을 모을 때// 공중에서/ 턱/ 소방 헬리콥터가 난데없이 나타나듯// 나의 죽음은/ 나의 뒷덜미에 소리없이 착륙하는 것”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설악산에 오르는 길. 한계령에서 끝청을 지나 중청 대피소에서 한숨을 돌리고 대청으로 오르는 데 헬기장이 나타났다. 최근의 그 메모를 떠올리며 설악의 꼭대기를 향하여 남은 힘을 짜낸다. 중청서 대청까지의 짧은 구간은 여간 범상치가 않다. 얼마나 무거운 하늘인가, 잘록하게 늘어진 곡선. 공중의 밑바닥과 설악의 어깨가 만나는 접면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판인데 계절에 따라 진귀한 꽃들이 밭밑에 자욱하다. 우리 딛고 사는 세상을 바다로부터 일으켜 세우는 게 산이라면 그 설악을 이렇게 마지막으로 맵시 있게 마무리하는 건 바로 이 연약한 꽃들.

많은 꽃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바람꽃에 내 마음을 포갠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의 변산바람꽃에서 여름에서 여름의 한 중앙을 지키는 바람꽃까지, 책 한 권을 쓸 만큼 바람꽃 가족은 그 종류가 많다. 이런저런 바람꽃들이 차례로 다녀가는 걸 지켜보다가 아주 높은 곳에서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바람꽃. 설악의 높이에 내 키를 더한다 한들 바람꽃이 빚어내는 이 깊이에 필적할 수 있으랴. 험상궂은 얼굴 모양의 바위 앞에 앉아 첩첩산중의 저 아래를 무정하게 바라보는 바람꽃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바람꽃,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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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베 정부의 계산된 공격은 아프다. 누군가는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도 했다. 동의한다. 일본은 분명히 선을 넘었다. 물론 일본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한국이 계속해서 일본을 자극했고 거듭된 대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 갈등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일본이다. 분노한 국민들은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외교의 실패를 지적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의 외교라인은 무엇을 했느냐는 질책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잘 언급되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오다가 이제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의 취약성이다. 등에 칼을 맞았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등을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드러낸 취약성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은 과감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나.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한 발언을 하는동안 김상조 정책실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일본이 이번에 수출규제 목록에 올린 것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이렇게 세 가지이다. 하나같이 우리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부품들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수출 증가분 중에서 반도체가 차지한 것이 무려 92%이고 경상수지 흑자의 80% 이상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분석을 내놓으면서 반도체 단일 품목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는 마치 산유국의 석유 의존도 수준이라고 했다. 우리는 중동의 산유국을 운 좋은 나라라며 부러워하기는 할지언정 선진국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신문의 비유가 아픈 이유이다. 

반도체가 수출 증가의 거의 모든 것인데,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받게 된다면 우리 경제가 입을 타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낙관적으로 전망해서 7월21일 일본 참의원 선거 이후 사태가 빠르게 수습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여파가 최소 금년 4분기까지는 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인데, 당장 금년도 경제성장률의 하향 조정은 불가피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도 작년 1년 내내 소득주도성장 논란에 휩싸였다가 이제서야 간신히 진정 국면을 바라보던 문재인 정부는 또 하나의 악재에 부딪혔다. 게다가 내년 총선은 우울한 경제 성적표를 들고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돌발변수가 생겼다.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상품사슬과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세계시장이 받을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고 특히 한국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도 간단치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8년 GDP 대비 무역량은 일본이 35%, 한국이 83%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2.5배 정도 더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이고, 따라서 외부 취약성도 더 크며, 무역전쟁에 돌입한다면 일본보다 우리가 입을 피해가 더 크다.

블룸버그는 또 하나의 아픈 현실을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실질적인 냉전관계를 유지해왔음이 경제 통계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 수출의 7.5%만이 일본에 대한 것이고, 일본 수출의 5.8%만이 한국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해외 직접투자 중 일본에 대한 것은 1.8%로 캐나다, 베트남, 인도에 못 미치고, 일본의 해외 직접투자 중 한국에 대한 것은 2.5%로 브라질, 태국, 싱가포르에 못 미친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한국, 일본과 더불어 2차대전 이후 제조업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을 보자. 독일의 수출 대상국 1위에서 15위를 보면 미국이 8.6%, 중국이 7.1%, 러시아가 2%를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면 수출의 50% 이상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엮여있다. 미국도 나프타 회원국인 캐나다 및 멕시코에 대한 수출이 30%를 차지한다. 그들은 서로 칼을 꽂을 수 없는 경제적 이유가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경우에 따라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일본은 뜬금없이 전략물자의 북한 유출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일본도 선거 때면 으레 북한 변수를 활용하곤 했다고 하지만, 6자회담 당사국 중 유일하게 동북아 정세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판을 바꿔보려는 의도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야 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미·일동맹을 위해 우리는 미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가 될 것이고, 결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세 가지가 우리의 취약성을 키웠고, 결국 등을 보였다. 하나같이 뻔히 알면서 오랫동안 바꾸지 못했던 것들이다. 산업구조 업그레이드, 무역 다변화, 동북아 협력관계 구축이다. 지나간 여러 정부가 5년짜리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느라 손을 놓아버린 분야들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정부들이 알면서도 미뤄두었던 근본적·장기적 과제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촛불로 탄생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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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보복의 파고가 가팔라지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간 회동이 조만간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경제보복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문 대통령과 어떤 형태의 회담에도 응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황 대표는 “실질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면, 대승적 차원에서 어떤 회담이라도 수용하겠다”고 회담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줄곧 ‘일대일’ 회동만을 고집하고, 특히 지난주까지도 일본 수출규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담을 ‘들러리 세우기’라며 거부하던 황 대표가 뒤늦게나마 입장을 선회한 셈이다. 정부 대응의 허물을 따지는 데만 골몰하던 정략적 태도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인 것은 실로 다행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을 두고 “여러 차례 전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앞서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일본의 수출규제 등을 다루기 위한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을 제안한 터여서 구체적인 의제 등만 조율되면 청와대 회동이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의 터무니없는 보복 조치가 야기한 위기상황이 등떠민 측면이 있지만, 문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동은 무려 1년4개월 만에 이뤄지는 것이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동이 이토록 어렵게, 오랜만에 열린다는 것 자체가 ‘나쁜 정치’의 극단을 드러내는 일이다. 혹여 이번에도 지엽적인 문제로 기싸움을 벌이다 물실호기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태의 위중함을 직시한다면 청와대와 여당의 대승적 접근이 절실하고, 한국당도 황교안 대표의 다짐대로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이 지혜를 모아 난국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실행으로 보여줘야 한다.

정치 공방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비상하다.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를 공식화하는 지경에 이른 일본의 공세는 경제적 타격은 물론 한·일관계, 나아가 동북아 안보질서를 뿌리째 위협한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나 국회의 대응은 치밀하고도 의연해야 하며, 특히 초당적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긴요하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대응에서조차 정략적 이해에 매몰되어 협력하지 못한다면 정치권의 존재 이유가 없다. 문 대통령과 5당 대표가 ‘일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한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울림 있는 메시지가 된다. 여야 지도자가 한목소리로 일본의 졸렬한 경제보복을 비판하고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실효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과 5당 대표는 하루라도 빨리 마주 앉아 초당적 대처에 뜻을 모으는 광경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 자체로도 불안과 위기감이 커지는 국민에게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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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내용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16일부터 시행된다. 지위나 ‘갑을관계’를 앞세워 노동자에게 업무상 적정한 범위를 넘어 신체·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의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한 것이다. 음주·회식 참여 강요, 욕설·폭언, 개인사 소문내기 등 16가지 유형이 법으로 금지된다. 업무지시라도 ‘그럴 만하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괴롭힘에 해당될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기업은 조사 후 가해자에 대해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신고·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처우는 금지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그동안 형법 등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직장 내 괴롭힘을 구체화하고 신고와 처벌 절차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 법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조치나 처벌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고 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것이다. ‘업무상 적정 범위’가 무엇인지 등 모호한 기준도 많다. 법 적용대상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한정하면서 특수고용노동자 등 상당수 노동자는 법의 사각에 방치됐다. 익명 신고가 법으로 보장되지 않고, 피해 입증도 피해자가 해야 한다. 정부는 제기된 문제점들을 살펴 잘못된 것들은 바로잡아야 한다. 직장인들도 괴롭힘에 대해 적극 대응해야 한다. 한 시민단체 조사결과를 보면 직장인들의 갑질감수성은 평균 68점으로 D학점 수준이었다. 갑질 피해를 당하고도 그것이 괴롭힘인지 모르거나 참는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직장갑질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직장 내 갑질은 참고 견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과 숨진 송명빈 전 마커그룹 대표,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드러냈다. 간호사들의 잇단 죽음의 원인이 된 ‘태움’은 직장 내 괴롭힘의 다른 표현이다. 드러나지 않은 직장갑질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직장인 10명 중 2명 정도가 지난 1년 사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은 일터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부도덕한 범죄행위다. 인간의 존엄·가치·행복추구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사회악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직장갑질’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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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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