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인의 평화찾기’의 연재가 2년을 넘고, 교체 시기가 되었다고 한다. 공교롭게 일본의 한국 제재 문제가 불거졌다. 애독에 감사하고, 또 뵙기를 기약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오만과 몰락을 상징하는 말에 ‘폭지응징’이 있다. 이 말은 ‘폭려지나응징’을 줄인 말로,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이다. 1937년 7월7일의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그해 8월15일 고노에 총리는 “포악한 중국을 상대 않겠다”고 내뱉고, 전면적 중국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일제는 만주 침략 후에 화북지방을 잠식하고 중국 조야의 열화와 같은 항의에 ‘적반하장’으로 ‘폭지응징’이라는 구호로 중국 멸시와 침략의식을 일본 국민에게 고취하여, ‘난징대학살’ ‘삼광(三光)작전’ 등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 일제의 광기는, ‘천황 숭배, 서양 모방, 아시아 멸시’로 군국주의를 세워 아시아를 침략한 명치국가의 본질에서 유래된다. 중국을 침략하고도, 그 책임을 중국에 뒤집어씌우는 강도의 논리가 ‘폭지응징’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폭한응징”이라는 말이 자주 뜬다. 2015년 ‘12·28 한·일 발표’에 의한 ‘화해·치유재단’의 해체, 소녀상 건립, 자위대 레이더 조준, 징용공 배상의 대법 판결을 가지고, 한국에 국제법을 어겼다고 뒤집어씌워,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근본을 다지자면 일제가 양성한 박정희와 체결한 한일기본조약도, 그 딸 박근혜와 뒷거래를 한 ‘12·28 한·일 발표’도 민의를 억압하거나 속이고 일본 측의 요구에 영합한 결과이므로 도의적 절차적 정당성이 없다.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억지로 차용증을 쓰게 해놓고 “법대로 갚아라”고 빚 추달하는 꼴이다. 아베의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 통보는 일제의 안하무인 강도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능멸은 문재인 정부 발족 당시부터 ‘친북좌익’ 정권이라고 적대시하고, ‘문 대통령 탄핵’을 제재 철회의 조건으로 거는 몰상식에 이르고 있다. 국민주권, 민주화, 남북 화해와 평화를 내걸고, 박근혜를 타도한 촛불민심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아베의 증오는 광명을 두려워하는 저승사자처럼 악마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군국주의 해체를 맡은 미군이 냉전이 시작하자 A급 전범 석방, 자위대 창설, 군수산업 부활, ‘레드 퍼지’, 헌법 9조 무력화 등으로 방향을 틀고, 과거청산이 유실되는 가운데, 일제침략의 피해자인 조선, 중국, 오키나와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뿌리가 남았다.

일본은 군사·외교주권을 미국에 빼앗기고 대신 미군의 핵우산과 미·일 안보조약에 의한 주일미군의 무력에 보호받는 ‘평화국가’가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도 전쟁에서 겪은 고통의 기억과 반성이 남아 있었으며, ‘전범국가’에 대한 주위의 눈총도 있어서 일본열도에 갇힌 ‘단일민족국가’의 허상에 안주하고, 대외 파병의 야욕을 드러내지 못했다. 1990년대 냉전과 버블이 붕괴되어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면서 경제대국으로서의 자신 상실과 신자유주의의 압도 속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빈곤과 격차’로 증오범죄와 이웃 나라들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우경화가 진행되었다. 먼저 납치 문제로 북한에 대한 거국적인 증오 캠페인이 시작되고, 중국의 대국화에 대한 질투와 공포로 이어지고, 일본군 합법화로 일제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아베 정권이 등장했다. 

균형이 없는 선거제도 덕에 인구의 20~30%에 불과한 지지자 수에 걸맞지 않은 3분의 2 가까운 의석수를 차지한 아베의 10년 집권으로 일본 국민의 평화의식도 희박해지고, 이기주의적이고, 자고자대의 일본 민족주의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 아베의 제재조치는 군국주의 청산을 못한 일본과 전쟁 후 해방된 동아시아 나라들의 미제의 과거청산을 둘러싼 역사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의 청산이라는 원칙을 견지하면 승패는 정해진다. 절대 감정적으로 대처할 필요 없이 냉정하게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설득해야 한다. 역사의 정의와 필연성은 우리 편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일심단결하면 우리는 이긴다. 일본은 일찍이 멸망의 길을 걸었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일본의 능멸에 대해서 무자각적으로 일본에 빠져든 기왕의 풍조를 자숙하는 것은 당연하나, 거짓과 조작으로 일본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아베와 일본 국민을 일체화시켜 볼 필요는 없으니,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나 관광 보이콧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히려 청년학생 외교사절단을 모집해서,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대담하게 교류하고 소통하며 한류 문화행사도 기획하고, 일본 사람에게 역사의 진실과 아시아 평화의 길을 설득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해 온 한국에서 국민주권을 무시하는 도전과 능멸을 당해도 그 책임을 문 대통령에게 돌리려는 매국적인 세력들이 있다. 이번 기회에 국민들 사이에 일본과 친일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공유하고, 촛불정신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지난 남·북·미 회담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외교안보주권이 결여되어 있는가 알게 되었으며, 이번에는 경제주권의 부재가 드러났다. 이번 사태를 국민주권, 국가주권, 경제주권을 제대로 세우고 민족주권을 확립할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서승 | 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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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돌 반지가 없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돌 반지를 건네주던 마음들을 차곡차곡 담아 아이가 성년이 되어 스스로 삶을 꾸릴 때 주리라 다짐했다.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가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도, 무보험차 교통사고로 병원비 압박을 받을 때도 유혹을 견뎠다. 그런데 우습게도 외환위기 ‘금 모으기’ 운동 때 우리 집을 떠났다. 순진하게도 나는 국가가 살아야 아이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고 기꺼이 돌 반지를 내놓았다. 국가를 믿고 아이의 미래를 의탁했다. 당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국민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은 2.87%로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경제가 너무 안 좋고, 2년간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으며, 소상공인·영세자영업자들이 힘들어 하니 고통을 분담하자고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런데 왜 어려울 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것은 늘 그 많은 국민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인가? 왜 국가는 늘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그들의 곳간은 지켜주며 오늘 벌어 오늘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는가?

말이 ‘최저임금’이지 그것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임금이 되는 사람들의 삶을 국가는 아는가? 국가는 임금이 유일한 생계수단이고 자산일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일상을 아는가? 그들은 매월 들어오는 돈으로 월세를 내고, 학자금 등 대출금 이자를 내고 원금도 갚아야 하며, 병원도 가고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한다. 6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던 식당은 거의 사라지고 이젠 8000~9000원은 줘야 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장바구니 물가도 많이 올랐다. 편의점 진열대 앞에서 ‘컵라면’을 바라보며 통장의 잔액을 떠올리고 한참을 고민한다. 정말 눈물겹다. 이들의 모습이 내가 국가에 의탁한 아이의 미래라는 사실이 참담하다. 

2년 연속 최저임금이 올랐다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실질임금이 하락한 사람들도 많다. 2018년 임금구조를 합리화한다며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했다. 그동안 임금이 낮은 직종들에는 교통비, 식대라는 명목으로 적은 임금을 보존해주는 장치가 있었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던 교통비, 식대 등 복리후생비가 최저임금에 포함되었다. 결과적으로 최저임금은 올랐지만 실질임금은 하락하는 불이익이 발생한 것이다. 급식조리사 등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최저임금은 10.9% 올랐으나 기존의 복리후생비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포함되어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월 6만7840원(연 81만4000원)이 줄었다. 이들에게 연 80만원은 정말 큰 액수다. 그런데 2020년 최저임금이 꼴랑 240원 올랐다. 이는 이미 발생한 손해도 만회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불이익, 손해를 대부분 여성들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성별 임금격차 세계 1위’ 국가의 오명을 벗기 위한 정책 중 하나가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그만큼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리화’나 ‘고통분담’을 이유로 또다시 여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것은 정의도 상생도 아니다. ‘성별 임금격차 세계 1위’ 국가다운 성차별정책일 뿐이다. 아직 재심이 남아있다. 정부는 다른 보완책 마련을 공언하지만 성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8590원은 안된다. 반드시 다시 논의해야 한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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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관계란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우월적으로 지배하는 관계다. 권력은 곳곳에 있다. 정치판에서, 관청에서, 법정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람들은 권력을 행사하고 권력에 지배당한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권력자가 되고 싶은가? 여기 아주 효과적인 길이 있다.

전국시대의 송나라 강왕은 형의 왕위를 찬탈한 자이고 포악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가 재상인 당앙에게 물었다. “과인이 살육한 자들이 많은데도 군신들이 갈수록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당앙이 대답한다. “왕께서 죄를 물은 것은 모두 좋지 않은 자들입니다. 좋지 않은 자들만 죄를 물으니, 좋은 자들은 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께서 군신들이 모두 두려워하기를 바라신다면 좋은 자와 좋지 않은 자를 가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죄를 물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군신들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얼마 안 있어 강왕이 당앙을 죽였다. <여씨춘추> 중 ‘음사’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야기 끝에 “당앙이 대답한 것은 대답하지 않은 것만 못하였다”라고 하여 악한 자의 말로를 논하였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법치주의와 관련하여 가지는 함의다. 순자는 강왕이 당앙에 의하여 나쁘게 ‘물들여졌다’고 한 바 있다. 그렇게 실컷 나쁜 짓을 가르치긴 했으나 그래도 선생인데, 배운 자가 배운 걸 써먹는다고 가르친 자를 죽인 것이다. 그만하면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강왕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잘해도 죽고 잘못해도 죽는 세상, 살길은 왕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길밖에 없다. 법 따위는 소용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 법학에서 말하는 법적 안정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송나라에 남은 것은 벌거벗은 권력의 횡포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나라는 강왕의 대에 망했다.

두려운 권력자가 되는 방법은 또 있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들쭉날쭉하여 상대가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전국시대의 진나라 효공 치하에서 좌서장 상앙은 변법(變法)으로 법치를 확립한 사람이다. 태자가 법을 어기자 법에 따라 그의 스승인 공자 건의 코를 베어냈다. 같은 스승인 공자 공손가는 살에 먹실로 죄명을 써 넣는 형을 당했다. 상앙의 법 집행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한번은 석 장 길이의 나무 한 그루를 도시 남문에 세우고 이것을 북문으로 옮긴 백성에게 십금을 주겠다고 방을 걸었다, 아무도 감히 옮기는 자가 없자, 이번에는 오십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누군가 나무를 옮기자 그에게 약속한 오십금을 주었다. <사기>의 ‘상군열전’이 보고하는 유명한 이목지신(移木之信)의 고사다. 이것은 백성이 권력자의 약속을 믿게 하려는 처사다. 그 후 진나라는 융성하여 결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권력 강화의 관점으로만 치자면, 상앙을 쓴 효공은 수가 얕았다. 상앙이 오십금을 주는 데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다음날 상앙과 상금을 받은 자의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서 이렇게 호령한다. “겨우 나무 한 그루 옮기는 일에 오십금을 준다는 것은 본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벼슬자리에 앉아 이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내걸어 백성의 인심을 얻어 보려 한 자의 죄가 크다. 그걸 받은 자의 죄도 작지 않다.” 이쯤 되면 다음날부터 백성들은 관의 약속 따위는 믿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볼 것이다. 약속의 신뢰성 따위는 더 이상 따져볼 일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막 나가는 것, 이중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서운 권력자가 되는 길 중 제일이다. 

이 시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밉보이면 그 자의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하고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죄상을 만들어 내어,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걸 만천하가 알게 한다. 같은 죄를 놓고도 반대 진영에서 저지르면 득달같이 밝혀내고 권력자에 가까운 사람이 하면 조사하는 둥 마는 둥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래야 권력 무서운 줄 안다. 이쯤 되어야 모두들 법이란 것이 누구에게는 호랑이 같고 다른 누구에게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아, 오직 전전긍긍하며 권력자를 두려워할 것이다.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바다 건너 서양에서 온 법치주의는 권력의 일탈과 남용에 대한 견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과서의 설명은 퍽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풀이하면 권력의 행사를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권력자가 “법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말의 진의는 때로 “너 죽었다”라는 말과 같았다. 다만 벌하는 수단과 방법이 법이란 뜻이다. 피치자의 “법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은 그나마 법대로 해 달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남과 다르게 또는 전과 다르게 취급하지 말아 달라거나, 법이 정하는 대로 하면 내게 죄가 없다거나, 법에 정한 만큼만 벌을 받겠다는 말이다. 법치주의의 요체는 후자에 가깝다. 즉 법의 집행에서 이중의 기준을 쓰지 않는 것이다. 법이란 것이 일관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폭력이나 부패나 아부나 ‘떼법’이다.

당앙의 길과 상앙의 길, 어디로 갈 것인가? 당앙의 불행은 권력의 행사에 백성이 믿음을 가질 것을 꾀하기보다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가 가져올 위화적 효과만을 노린 데 기인한 것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라. 형정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단순한 언명에 코웃음치다가는 어느 날 권력자 자신이 당앙의 꼴이 될지 모른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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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향신문에 ‘다문화가족 가정폭력, 인권위의 엉터리 통계’라는 제목으로 설동훈 교수의 기고문이 게재되었다.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있는 기고문이었다. 설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는 비확률표집 방법인 ‘눈덩이 표집’ 방법을 활용해 표본을 수집했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통계는 “어떤 형태의 일반화도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눈덩이 표집’ 방법으로 작성된 설 교수의 학위논문에 나와 있는 통계도 “어떤 형태의 일반화도 불가능한 엉터리 통계”인가? 

설 교수는, 결혼이주여성의 절반에 가까운(42.1%) 사람이 가정폭력을 경험하였고 ‘폭력위협’ 피해율이 38.0%에 달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보고서(이하 ‘인권위보고서’) 통계가, 여성가족부의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이하 ‘여가부보고서’)에서 국내 여성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이 3.3%라거나 다른 조사에서 도출된 통계 수치에 비해 “유독 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권위보고서가 엉터리라고 한다. 

출처:경향신문DB

그러나 설 교수는 ‘비교의 등가성’을 유지하지 않은 채 두 조사결과를 비교하였다. 여가부보고서에서는 가정폭력을 신체적 폭력과 정서적 폭력 등으로 분류하면서 ‘때리려고 위협하는 행동’과 ‘상대방의 물건을 부수는 행동’을 정서적 폭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반면 인권위보고서에서는 “나를 때리거나 때릴 것처럼 위협을 가했다”는 내용의 설문 문항을 ‘폭력위협’으로 분석하였다. 두 보고서의 통계를 제대로 비교해 보려면, 인권위보고서상의 ‘폭력위협’ 문항의 통계 수치를, 여가부보고서상의 ‘중한 신체적 폭력’, ‘경한 신체적 폭력’, ‘때리려고 위협하는 행동’, ‘상대방의 물건을 부수는 행동’ 문항의 수치를 모두 더한 수치와 비교해야 등가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비교의 등가성’과 관련해 또 다른 흠결은, 가정폭력 경험기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인권위보고서에서는 “한국 체류 중” 남편이나 남편 가족들이 행한 ‘폭력위협’ 문항에 대한 답변을 통계로 잡았다. 반면 여가부보고서에서는 ‘지난 1년간’의 가정폭력 경험 통계 외에 ‘1년 이전’ 시기의 통계가 별도로 도출돼 있다. 그런데 설 교수는 여가부보고서상의 ‘지난 1년간’의 ‘신체적 폭력’ 문항의 통계만 콕 집어서 3.3%라고 인용하고 있다. 

두 보고서상 폭력의 분류 범위와 경험시기를 비슷한 조건으로 환산한다면, 국내 여성들의 ‘폭력위협’률도 33.7%로 높아진다. 설 교수 기고문에서 인용한 다른 2개의 조사보고서의 통계 수치도 ‘비교의 등가성’이 확보되지 않는 ‘견강부회’성 통계 인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권위보고서의 통계 수치가 “유독 튀”는 수치라는 설 교수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 아닌가? ‘비교의 등가성’이 상실된 통계비교에 터잡은 설 교수의 기고문이 엉터리라는 추론이 도출되는 것 아닌가? 

결혼이주여성의 가정폭력 피해 상황은 실제로 매우 심각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다문화가정 내 폭행으로 검거된 사람이 전년도에 비해 약 46% 증가했고, 올해도 계속 증가 추세다. 그런데도 설 교수는 이주인권단체들이 피해 상황을 과장하고 있다고 섣불리 단정하고 있다. 설 교수에게 기대한다.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로 인해 상처 입게 된 결혼이주여성들과 이주인권단체 활동가들, 국가인권위원회에 공개 사과하는 용기를 발휘할 것을.

<석원정 |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위한모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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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보복이 철저한 계산에 따른 기습공격이며 한국은 준비 없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인식은 문제가 있다. 특별한 근거가 없다면 미리 이런 식의 추정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잘못된 계산을 한 가장 대표적 사례다. 1942년 당시 일본은 승승장구 중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일부, 위만주국, 동남아의 여러 섬을 장악해 소뿔처럼 휜 제국 판도를 그리고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으로 뻗어나올 기세를 보이자 미국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석유 수출을 금지시킨 것이다. 석유의 대미의존도가 50% 이상이었던지라 배신감을 느낀 도쿄 권력의 최상층부는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 인구 팽창과 도시 집중으로 주거와 식량, 임금 등 여러 사회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군국주의적 팽창에 모든 걸 쏟아붓다보니 내부 살림에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 자원이 많은 필리핀이 특히 탐스럽게 여겨졌다. 그때 미국이 많이 먹었으니 그만 먹으라고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욱일승천 중이던 쇼와 군부는 강공을 택했다. 히틀러와 손잡고 전쟁을 준비하면서 대미 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런 이중 행보가 몇 번이나 탐지되면서 미국 또한 협상의 문턱을 더 높여버렸다. 히로히토 천황은 어떻게든 외교적 해결을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내각과 군부는 격론 끝에 ‘전쟁만이 답이다’로 달려갔다. 마치 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이들처럼 화친론자들을 몰아부쳤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일본 정치의 시스템적 문제다. 

당시 일본 정치는 군부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문민정부라 할 고노에 내각이 협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이런 저자세는 옳지 않다고 보는 젊은 장교들에게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았다. 또한 고노에 내각은 육군장관 공석 작전에 발목이 잡혔다. 내각에서 육군의 견해에 반한 결정이 나면 육군장관이 사임하는 식이다. 새로운 인물을 불러 앉히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모두들 자리를 고사했다. 육군장관이 공석인 채로는 내각회의가 열릴 수 없었고 중요한 결정을 승인할 수 없는 시스템상의 허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결국 고노에는 사임하고 도조 내각이 들어섰다. 도조 히데키는 매우 국수적인 군인으로 내각총리대신을 맡아 나라를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방법은 기습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기습을 통해 초반에 러시아 함대를 무력화 했던 일본은 이번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미국의 앞마당이라 할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강습한 뒤 타이완과 필리핀에서 미군의 반격을 손쉽게  물리치는 등 초반 전세는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괴물 같은 생산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진주만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를 파괴하고 초반에 승부를 결정지으면 미국이 협상의 자세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태평양 너머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항공모함과 비행기와 탱크와 화염방사기가 건너왔다. 동남아 쪽을 줄줄이 잃기 시작한 일본은 1945년 들어 해군력과 공군력이 전부 파괴돼 제로베이스가 되었고 미 B-29 폭격기는 아무 견제도 받지 않고 도쿄의 국회의사당 위를 날아 도심에 소이탄을 퍼부었다. 이 대화재로 10만명이 넘는 이들이 죽었지만 군부는 1억 총옥쇄로 산산이 부서지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그러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고 그 이후의 결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지금 일본의 아베와 내각의 주요 인물들은 이성적이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들어보이고 힘을 과시하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자신들이 옳았다고 믿는 것일까? 하지만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것을 외교적으로 풀어 제자리에 다시 채우지 않는 한 부작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달콤한 소프트웨어로 국제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있는 일본은 사실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이중잣대의 나라다. 이것이 태평양전쟁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시민사회는 하나의 당이 장기집권하며 병들어가도 선거라는 수단으로 그 권력의 공고함을 허물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해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감각이 약하다. 늙은 나라이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나라다. 이번 기회에 무역전쟁을 제대로 치러낸다면 국제사회에 이런 일본의 면모가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산업 생산성을 예측하지 못했지만, 작금에는 동아시아 각국이 과거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기억은 약해질 수 있지만 폭력과 불의 앞에선 다시 살아나 연대할 수도 있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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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와 특목고가 늘어나면서 교육 생태계 파괴는 물론이고 사회 공동체의 신뢰관계가 무너졌다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먼저, 낙담의 시기가 빨라졌다.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라’는 과거의 나쁜 조언은 더 악랄해져, ‘이상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큰일 난다’는 협박이 부유한 지 오래다. 이는 특별한 곳에 가니 마니가 중학교 교실에서 가려진다는 말이니,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느끼는 개인들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성인들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하는 ‘실패자’라는 오명을 열다섯 살 남짓한 청소년들이 마주하면서 “대학 가기 글렀다. 내 인생은 망했다”면서 자조하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낙담의 조기화만큼 일반고는 달라졌다. 과학과나 외고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의 삶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 학교들은 동네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천재들이나 발탁되어 따로 공부하는 곳 정도로 이해되었다. 당연히 고교 입시에 집착하는 중학생들도 드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일반고는 좋은 곳에 ‘못 간’ 사람들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덩달아 명문대 진학은 자신의 그릇이 아니라는 체념이 늘면서 ‘우리 주제를 알자’는 공기가 학교에 팽배해졌다.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했던 과거의 학교가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고교 입시 실패’라는 말이 빈번해지면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자신의 생애를 불합격으로 규정하는 지금이 이상하다는 말이다. 이 지경이니 일반고 중에는 ‘우리 학교는 특목고에 아쉽게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다’면서 어떻게든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특별함을 인정받으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쪽과 반대편에서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해야만 하는 집단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사실은 자녀가 명문대에 가길 원한다면 명문고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강박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문제는 이 난리가 딱 그 학교 정원만큼의 가정에서 벌어지겠는가. ‘자사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특목고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권고는 사람 가려 전달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니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은 일상이 되고, 집착의 세월이 길고 두꺼운 만큼 개인이 체감하는 실패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관문을 잘 넘어간 이들이 좋은 리더가 되면 다행이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분류된, 그러니까 삶의 궤적이 유사한 엘리트끼리 모인 집단의 ‘합의된 결정’은 위험천만하다. 공동체 안에 다양한 계층이 존재함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께 들었던 대로만 세상 이치를 이해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이가 ‘결정권자’라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은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자리에 이르렀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정치인, 법조인, 교육자, 언론인이 되어 여론을 생산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게다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자들은 사람을 철저히 가려내는 이 틀을 유지하려고 한다. ‘어떤’ 고등학교라는 무기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다. 학교 야구잠바를 입으면서 특정한 무리들은 출신 고등학교 이름을 옆면에 새긴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구조를 고치려고 하자 여기저기서 반대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소모적인 논쟁이 지난한 가운데 자사고 학생들이 문화제를 열어 직접 공연을 한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자신들이 입시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지라고 일부 언론에서는 해석하기 바쁘다. 그렇다면 더 의문이다. 왜 그 좋은 과정을 모든 학생이 배우지 못한다 말인가? 다양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청소년의 권리인데, 이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맞춤형 학원을 다녔기에 중학교 교과 성적이 우수할 수밖에 없는 일부만이 향유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말로 철폐 사유 아닌가.

오찬호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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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에 대한 비판은 되도록 피하려 했다. 한국당 앞날을 마음속으로 응원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안쓰러워서 그랬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국정농단을 저질러 몰락하고도 반성은커녕 퇴행만 거듭하는 한국당을 구구절절 비판하는 자체가 낭비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몇몇 비정상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이번에는 한국당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무엇보다 한국당 막말은 듣기 괴롭다. 이제서야 돌아보면 홍준표 전 대표의 막말은 일종의 ‘자해개그’ 같았다. 여권보다 오히려 당내 반대자들을 겨눴던 그의 언어들은 지나치게 걸쭉했지만, 아주 가끔 ‘피식’ 하는 웃음을 줬다. 그런데 지금 한국당에서 나오는 막말들은 그냥 공해 수준이다.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등 우리 사회 상처로 남은 사건들을 정치적 의도로 헤집고, 모욕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듣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건 소음 공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두 사건 모두 한국당 집권 때 벌어진 일 아닌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 들어서며 대화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자정 기능도 없다. 막말 전력자가 2명이나 있는 지도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종북좌파들이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했던 김순례 의원은 22일 드디어 최고위에 복귀해 마이크를 잡고 소회를 밝힐 것이다. 정미경 최고위원은 지난 15일 최고위에서 인터넷 댓글을 인용한다면서 “세월호 한 척 갖고 이긴 문재인 대통령이 (이순신보다) 낫다더라”라고 했고, 17일엔 “세월호라는 단어만 들어가기만 하면 막말인가”라고 했다. 두 사람은 최고위에서 한 테이블에 앉게 된다. 이 장면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막말당 이미지는 더 굳어질 것이다.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판단력은 흐려졌다. 막말만 비판하면 ‘좌파언론’ ‘관제언론’이라고 한다. 황교안 대표는 지난 6월27일 “언론이 좌파에 장악되어 있다. 우리가 실수하면 크게 보도가 된다”고 했다. 당 미디어국은 정 최고위원 발언 논란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막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당의 입장”이라며 “관련 보도 30여건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보도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한국당이 막말이 아니라고 규정하면 그대로 받아쓰라는 말인가. 그러나 한국당 막말은 보수신문들도 비판한다. 한국당이 여권일 때 어떤 언론환경을 누렸는지도 되돌아보길 권한다. 보수언론에 종편을 안기고, 공중파 장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심판받지 않았나. 정말 좌파언론의 왜곡이 심각하다면 여론이 알아서 거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황 대표 리더십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황 대표는 지난 6월5일 “국민 마음에 상처 주고 국민 신뢰를 떨어뜨리는 언행이 나온다면 엄정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지만 6월11일 “아무거나 막말이라고 말하는 그 말이 바로 막말”이라고 태도를 바꿨다. 며칠 만에 막말에 대한 철학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태극기세력 반발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하튼 막말의 둑은 이 때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지도자급 정치인이라면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황 대표는 어물쩍 넘기려고만 한다. 아들 스펙에 대한 거짓말을 두고 “어떤 취지로 말했는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외국인에게 똑같이 임금수준을 유지해줘야 한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는 발언으로 차별·혐오 논란이 일자, 취지에 대한 해명 없이 “정말 터무니없는 비난”이라고만 했다. 막말에 대한 최근 답변은 “그 말 그대로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회식은 상징적이다. 황 대표는 50분간 달게 졸았다. 얼마나 피곤했길래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행사에서 외교적 결례까지 무릅썼을까. 그런데 이 졸음에 한국당 현실이 투영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기가 충만했었다면 그는 내리누르는 눈꺼풀에 굴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웰빙당 한국당의 DNA가 그의 몸속에 새겨진 것은 아닐까.

한국당은 틈만 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든다. 실제 일본의 무역보복, 미·중 무역전쟁, 경제난 등 문재인 정부가 처한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부 대응에 문제가 없는지 분명하게 점검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당을 대안세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회의적이다. 한국당이 던지는 비판들은 아무 말 잔치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당의 비상식적 행태를 볼 때마다 혼잣말을 하게 된다. “쯧쯧, 어쩌다가.” 막말로 들리는가. 막말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공식 입장이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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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승효상은 ‘길이 도시의 핏줄이라면 광장은 정신’이라고 했다. 

광장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agora)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로 항구 옆에 시장터로 발생한 아고라는 종교·정치·사법·상업·사교가 행해지는 사회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아고라처럼 ‘기능’이 아니라 ‘넓게 비어 있는 공간’으로 광장이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의 포럼(forum)이다. 로마제국은 유럽 지배지에 맨 먼저 ‘레기온’으로 불리는 군단 주둔 캠프를 설치했다. 로마에서 오는 길과 직교하는 길을 새로 만들고 그 교차점에 포럼을 두어 군단캠프의 중심공간으로 삼았다. 로마군단 캠프가 지속되어 도시로 발전한 것이 오늘날 유럽의 파리, 런던, 빈, 프랑크푸르트 등이다. 이들 도시의 원도심인 시테섬, 시티지역, 그라벤 거리, 뢰머광장이 모두 로마군단의 포럼이었다. 

서구에서는 도시 조성과 발달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광장의 위치나 형식, 지위로 도시의 성격이 규정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코 만쿠조는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이 광장이라고 했다.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발언하려는 시민들의 점유로 도시의 ‘빈 공간’은 비로소 정치공간이자 살아 있는 광장이 된다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1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과 레드카드를 들고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2000년대 발생한 효순·미선 촛불집회, 월드컵 거리응원, 광우병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비로소 “사회적·공동체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장소”로서 광장이 살아났다. 절정이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 정치적, 축제적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광화문광장이다. 광장은 시민에 의해 성장하며, 시민을 성장시키는 순환적인 성질을 지닌다는 것을 확인했다. 드디어 광장은 밀실에서 소곤대던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울려퍼질 수 있는 열린 거실이 되었다.

광화문광장에 주둔지를 설치하려는 우리공화당의 ‘천막 게릴라전’이 집요하다. 불법을 따지기에 앞서 광장에서 추방된 ‘탄핵 대통령’의 부활에 목매다는 극우 정당의 광장 침탈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광장의 주인공은 어느 권력자가 아닌 시민, ‘권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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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엔 늘 잠이 모자랐다

학교 늦을라, 흔들어 깨우는

엄마가 미웠다 군용 모포 끌어당기는

기상나팔도 출근 재촉하는

알람도 싫었다 더 자고 싶었다

아예 깨고 싶지 않은 꽃잠도 있었다

꿈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새벽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꽃잎도 사금파리도 아스라한 별똥별인데

속절없이 깨어나 은하의 기슭

뒤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어쩌다 돋는

꿈 한 촉도 오래 정박하지 못했다

꿈의 잔해가 부스럭거렸다



굽 낮은 튜바의 음색이었다


장문석(195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리고 젊은 나이에는 잠이 많아 늘 잠이 부족했는데 예순이 되니 잠이 없어졌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새벽이면 일어나 “은하의 기슭”을 이리저리 헤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순의 나이는 장중한 저음(低音)을 내는 금관악기인 튜바의 음색이라고 소회를 밝힌다. 예순이 와서 잠은 사라졌지만 뭔가 이승에서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또 말씨와 행동이 정중하게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 예순 살이 되니 “산등성을 물들이는 노을빛이 고즈넉했다”라고 느끼게 되었고, 또 “삶이란 더불어 밥 먹을 인연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이라고 알게 되었다고 썼다.

공자는 예순 살을 ‘이순(耳順)’이라고 불렀다. 귀가 순해지고 생각하는 것이 원만해져 들으면 곧 이해가 되는 때가 예순의 때라고 했다. 모난 데가 없이 부드럽고 너그럽고 속이 깊고 조용한 때라는 뜻일 게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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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와 에이즈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가 친절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는 신체 내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원인 병원체이고 HIV에 감염된 사람이 적절한 관리를 하지 않을 경우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환자가 될 수 있다. 즉 에이즈는 HIV 감염에 의한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을 말하며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HIV에 감염되었다고 바로 환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이제는 감염 이후에도 30년 이상 생존 가능한 ‘만성질환’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HIV 감염인은 미국 프로농구 선수였던 매직 존슨일 것이다. LA 레이커스에서 12년 동안 뛰면서 MVP를 세 차례 수상했던 그는 1991년 HIV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발표와 함께 급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슨은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2년에는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고, 1996년에는 현역으로 잠깐 복귀해서 32경기에 출전했다. 그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했던 조던이나 바클리 등은 매직 존슨과 함께 땀을 흘리며 농구를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함께 운동하고 샤워한다고 해서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는 많이 다른 듯하다. 일단 에이즈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5년 실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에이즈는 제대로 치료하면 20년 이상 생존할 수 있다”라는 항목이 맞다고 답한 정답 응답자는 56%에 그쳤고, “에이즈 감염인과 키스를 하는 것만으로도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 “모기에 물리는 것만으로도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라는 항목이 틀렸다고 옳게 답한 비율도 각각 51%와 48%에 그쳤다. 같은 내용의 2012년 조사에서는 정답자가 각각 61%, 61%, 43%였으니 에이즈 관련 지식이 나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HIV는 인체를 벗어나면 곧바로 비활성화되거나 사멸한다. 심지어 보균자와의 한 차례 성관계로 HIV에 감염될 확률도 0.01~0.1% 정도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한국인은 HIV 감염인과의 악수조차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12일, 프로축구단 대전시티즌은 한 브라질 1부 리그 선수의 영입을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했다. 메디컬테스트 과정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단의 설명이었다. 발표만 보면 마치 중증 에이즈 환자인 것 같다.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를 구별하지 못한 발표였다. 위법 소지마저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따르면 HIV 검진 결과는 오직 본인에게만 알릴 수 있지만 구단은 그 결과를 입수해서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감염인의 진단에 참여했거나 기록을 관리하는 사람은 감염인 정보를 누설하지 못하게 돼있다.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구단(사용자)은 진단 결과를 이유로 선수(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는 문구도 명문화돼있다. 뒤늦게 위법 소지를 깨달았는지 다른 변명을 했으나, 제대로 된 사과는 없었다.

에이즈에 대한 무지와 인권에 대한 무딘 감수성을 보인 것은 대전시티즌 구단이었으나,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도 무책임하기는 뒤지지 않았다. 일부 매체는 해당 선수의 이름과 사진까지 내걸었고, 대부분 이를 ‘해프닝’처럼 보도하는 데에 그쳤다. 왜 매직 존슨은 되는데 이 축구 선수는 안 되는가? 왜 브라질에서는 뛰는데 한국에서는 불가한가? 구단은 어떻게 HIV 검사 결과를 입수했나? 해당 정보는 누가 누출했는가? 이 질문들을 진지하게 던지고 성실하게 답한 보도는 없었다. 하긴 소나무 재선충병을 ‘소나무 에이즈’라 부르며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앞장서서 강화시켜온 것이 우리나라 미디어였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의 사람들도 에이즈에 대한 편견 확대에 앞장서곤 한다. 2016년 자료에 따르면 감염 원인을 ‘동성 간 성접촉’이라고 보고한 사람의 비율은 28.3% (‘이성 간 성접촉’이라고 답한 이는 35.8%, 나머지는 무응답)였지만, 에이즈를 ‘남성 동성애 병’으로 정의한 후 이를 격렬하게 공격하거나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보수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인, 종교인, 교육자들이 차고 넘친다. 우리나라의 HIV 감염인들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심각한 비난과 배제를 견디며 살고 있다. 자살 충동, 소문에 대한 두려움 등 강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HIV 감염인의 비율은 독일보다 세 배 이상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편견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우스갯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 영화 대사처럼, 인간은 못 되더라도 괴물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전구단과 언론사들의 사과부터 시작할 일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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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최근 ‘일본 수출규제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화학물질 규제 일부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인허가 기간을 줄이고, 신속한 출시를 도와 일본이 수출규제한 소재·부품의 국산화를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정부 대책에는 연구·개발 분야 등의 특별연장근로 인정·금융지원·세액공제 등의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대책은 일본이 우리 경제의 아픈 곳을 집중 공격하고 그에 따른 충격이 작지 않은 상황에서 규제를 풀어서라도 어려움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그러나 화학물질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화학물질이 가진 독성만큼이나 위험하다. 정부의 규제완화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을 겨냥한다. 화평법 등은 경북 구미 불산 누출사고 등을 계기로 제·개정된 뒤 2015년부터 시행 중이다. 정부는 신규 또는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되는 화학물질의 등록과 유해성 심사를 의무화했다. 2030년이면 1t 이상 화학물질 정보관리가 가능해진다. 안전 기준도 79개에서 400여개로 늘렸다. 기업들은 법 시행 후 기준 충족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법의 제·개정 취지인 국민의 건강·환경 보호는 정착돼 가고 있다. 그런데 애써 만든 법을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빌미 삼아 무력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을 두고 “여러 차례 전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에도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화학물질사고는 한번 발생하면 결과는 치명적이다. 2012년 구미4공단 불산 누출사고 당시 노동자 5명이 숨졌고, 소방관 18명이 부상했다. 고통을 호소한 주민만 1만2000여명이었다. 2011년 경북 칠곡 ‘미군기지 캠프 캐럴 고엽제 매립사건’의 피해는 가늠조차 어렵다. 화학물질사고는 가습기 살균제처럼 예고 없이 찾아와 엄청난 재앙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국내에 유통 중인 화학물질 4만3000여개 중 상당수는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화학물질 규제가 완화되면 국민 불안은 더 커지고 관리체계와 기업의 안전의식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올해 초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SDI 연구원 황모씨처럼 지금의 규제에도 노동자들의 억울한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규제를 푸는 대신 소재 개발을 위한 기업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 기업도 노동자 안전에 더 많은 투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다.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소재·부품의 국산화를 반대할 국민은 없다. 그렇다고 국민과 노동자의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판까지 허물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여우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점을 정부와 기업은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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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 혐의로 고소한 사건 가운데 84.1%가 불기소 처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소가 이뤄진 사건 중에서도 15.5%는 무죄 선고가 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결론적으로, 전체 고소 사건 가운데 최종 유죄까지 이르는 경우는 6.4%에 불과하다. 무고 혐의로 고소당한 피해자 100명 중 94명은 성폭력 피해에다 무고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며 이중의 피해에 시달리는 셈이다. 대검찰청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19일 양성정책평등포럼을 열고 이 같은 결과를 공개했다.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이후 일부에선 성범죄에 대한 허위고소가 많다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성폭력 무고가 전체 무고 사건의 40%’라며 무고죄 형량 강화를 요구하는 글이 올라올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구체적 사건처리 결과를 토대로 성폭력 무고 통계가 공개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역고소’를 남용하고 있음이 실증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강도나 폭력을 비롯한 대부분 범죄의 피해자들은 지지와 공감을 받는다. 유독 성범죄 피해자들만 ‘원인을 제공한 것 아니냐’는 피해자 책임론, ‘꽃뱀 아니냐’는 불신에 시달린다. 나아가 무고죄나 명예훼손죄 등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고소함으로써 역공을 가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교묘하게 이동시킨다. 가해자가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강자일 경우 약자인 피해자는 위축돼 대응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대법원은 최근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당했다”고 주장했다가 무고죄로 고소당해 1·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여성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여성이 제기했던 성폭력 혐의에 형사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이를 무고죄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들의 역고소 남용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검경은 성폭력 무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가해자의 고소가 외려 ‘무고 가능성’은 없는지 판단할 필요도 있다. 법원은 성폭력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때 무고죄 고소 사실이 있었다면 양형에 반영해야 옳다. 변호사업계도 무분별한 역고소를 부추기는 일이 변호사 윤리에 어긋남을 인식하기 바란다. 진실은 가려져야 하지만,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행태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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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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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연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을 통해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난 18일부터 사흘간 무려 17건의 글을 내보냈는데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전한 경우도 있지만 조 수석 자신이 국내 정치권과 언론의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도 상당수 있다. 조 수석의 여론전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은 비단 비판받는 쪽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 수석이 직접 나선 배경은 이해한다. 일본 언론이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까지 거론한 것에 시민으로서 분노한다. 국내 일부 정치권과 언론의 태도도 아쉽다. 겉으로는 초당 외교를 외치면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 실패를 부각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부와 청와대에는 시민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바로잡을 책무도 있다. 하지만 조 수석은 거기서 더 나갔다. 조 수석은 21일 국익수호를 위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강조하면서 “(이런 와중에) 일본의 궤변을 반박하기는커녕 이에 노골적·암묵적으로 동조하며 한국 대법원과 문재인 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서는 일부 한국 정치인과 언론의 정략적 행태가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했다. 전날에는 “대법원 판결을 부정·비난·왜곡·매도하는 것은 정확히 일본 정부 입장이며, 이런 주장을 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대단히 위험한 이분법이다. 지난 18일에는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매국’이냐 ‘이적’이냐다”라고 했다. 정부에 반대되는 의견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모르지 않을 조 수석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조 수석 자신이 비판하는 세력 쪽에서 ‘일본과의 갈등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청와대는 국정의 최후 보루로 민감한 현안에 전면에 나서는 일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발언에 따른 역풍이 고스란히 청와대로 돌아와 국정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참모들이 할 일은 진두에서 칼을 빼들고 독전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공세를 이겨낼 면밀한 전략을 세우고 무섭도록 침착하게 실행에 옮기는 일이다. 내부 결속을 다지는 일은 여당의 몫이다. 조 수석은 언행을 더욱 무겁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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