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훈 교수는 지난 7월24일자 경향신문에 ‘석원정 소장의 반박에 대한 재반론-“다시 살펴봐도 다문화 가정폭력 통계엔 오류가 있다”’는 기고문을 실었다. 앞서 7월11일 설 교수의 ‘다문화가족 가정폭력, 인권위의 엉터리 통계’에 대한 나의 반론 기고문에 대한 설 교수의 재반론문이다. 나는 결혼이주여성의 42.1%가 가정폭력을 경험했다는 국가인권위의 조사 방식이 엉터리였다는 그의 최초 기고문과 이후 재반론문의 문제점에 대해 재반박하고자 한다. 

재반론문에서 설 교수는 “질문 문항과 선택지가 아예 다른 경우 비교를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설 교수 자신도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방식, 즉 서로 다른 문항과 선택지로 조사된 보고서의 피해율을 단순 비교 후, 그에 터잡아 인권위의 다문화가정폭력 통계에 오류가 있다고 단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게 나를 포함한 이주인권 활동가들의 시각이다.

더욱이 맨 처음 기고문에서 설 교수는 “그 조사가 엉터리라면, 조사결과가 ‘피해자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해 다문화가족 구성원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키웠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최근 언론에 보도된 결혼이주여성의 폭력피해 상황은 과장된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그의 핵심적 주장이다. 하지만 조사연구 설계 시 목적과 조사대상의 특성에 따라 비확률표본 방식 또는 확률표본 방식 중 적절한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조사결과는 각각 나름의 특징과 의미가 있다. 따라서 조사방법론과 피해율을 놓고 논쟁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핵심은 실제 결혼이주여성이 겪는 폭력피해가 현재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오래된 인권과제다. 게다가 가정폭력 피해는 증가하는 추세다. 보고 사례를 보면 폭력의 양상은 물론 가해자도 남편만이 아닌 시가 식구 등 다양하다. 사망에 이른 피해자도 적지 않다.

또 많은 이주여성들이 체류자격에 발목이 잡혀 가정폭력을 견디거나 숨기려 한다. 심지어 자신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 출신 한 이주여성은 남편이 식칼을 들고 와 식탁에 꽂아놓고 겁을 주는 일이 빈번하자 견디지 못하고 양육비도 포기한 채 이혼한 후 딸을 데리고 나와 살고 있다. 그럼에도 결혼생활 파탄의 원인을 물으면 “문화 차이”라고 답한다. 현실이 이렇기에 현장의 이주인권 활동가들은 가정폭력 관련 통계수치가 현실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통계수치의 높고 낮음을 떠나 가정폭력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폭력이 계속 발생하는 원인과 배경에 대해 주목하고 올바른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과 아동에 대한 참혹한 폭력행위 영상이 공개되면서 이주여성의 인권 증진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 시점은, 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을 근절할 대책을 세울 좋은 기회다. 이미 작년 기준 15만9000명에 달하는 결혼이주여성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언제까지 비문명적인 가정폭력에 이들을 방치하면서, 통계방법론만 논하고 있을 것인가?

<석원정 |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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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국 지린(吉林)에서 왔다. 그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척박한 땅을 개척한 수십만명의 조선인 중 하나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지린에 닿았을 때 그곳은 일본 괴뢰군이 세운 만주국의 땅이었다. 

조선일보 기자였고, 친일문예지 ‘조광’의 편집자였던 친일 문인 함대훈이 만주국의 여러 지역을 돌고는 ‘만주국이 건국한 지 6년. 그동안 여기 이 높고 큰 건물과 넓고 긴 도로가 질서정연히 째였다. 이 건설이 만주인도 아니오 조선인도 아니오 일본인이다. 일본인의 위력은 이만치 크다’(<일제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 민족문화연구소)는 글을 발표했을 무렵, 만주 땅의 모든 학교에서는 조선어가 금지되었다. 학교 안에서 조선말을 하는 학생은 괘패라는 것을 줬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괘패의 수를 세서 벌을 받았다(<기억 속의 만주국Ⅰ>, 강대민 외). 

조선인이 아니라 황국신민이라 말하길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만주국일 때도 중국일 때도 굳건히 우리말과 문화를 지켜냈다.

지린에서 온 그는 자신의 가족이 지린에 뿌리를 내리게 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20대에 혼자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떠났던 땅으로 돌아와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철근을 나르며 오래전 이 땅을 떠났던 이들의 절박하고도 쓸쓸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꽤 열심히 일했고, 몇 년 전에는 건축자재를 만드는 작은 공장 하나를 인수했다. 지린에 있던 부모님과 동생이 와서 공장 일을 도왔다. 며칠 전 그는 아버지 칠순을 맞아 식당을 빌려 잔치를 했다. 아직 조선족들은 칠순잔치를 한다는 그의 말대로 대림동에서 꽤 유명한 중국식당은 방마다 성대한 칠순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곱게 한복을 입은 노인이 트로트를 열창하는 며느리와 아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뭉클했다. 노인의 희미한 웃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으며, 그리고 지켜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역사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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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외교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한국의 평화와 번영은 주변국과의 화해·협력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운명이다.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한국은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로부터 전 방위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평소 경쟁하고 대립하던 정치세력들이라도 이런 때는 힘을 합치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없다. 한국의 창의적인 정치인들은 이때야말로 상대를 몰아붙일 좋은 기회로 여기며, 공동의 적을 잊은 채 서로를 적이라고 부른다. 

여야는 지금 결투로 승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팽팽히 대치하고 있지만 뜯어보면 외교정책 차이는 크지 않다. 일정한 재임 기간을 갖는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정책의 폭은 제한적이고, 대격변이 닥치지 않는 한 누가 집권해도 국익에 관한 정의, 동원 가능한 자원, 협상 수단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정학의 지배를 받는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당은 외교정책을 전면 폐기하라고 정부를 공격하지만, 그들이 집권한들 말대로 하기는 어렵다. 외교정책만큼 집권세력에 대해 비탄력적인 것이 없다. 

일본의 무역보복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너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야당이 대책이라며 내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특사 파견, 한·일 정상회담 개최, 한·미·일 공조 복원이다. 문제의 핵심과 무관한, 협상 전술에 관한 것으로 정부에 맡기면 될 일이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에 더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야당이니까 하는 말에 불과하다. 야당이 집권했다 해도 주변국 모두와 동시에 대립을 심화시키는 행동은 하지 못한다. 

여야 간 차이가 커 보이는 게 있기는 하다. 대북정책이 대표적이다. 자유한국당은 정부의 비핵 평화정책 전면 수정,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합의 파기를 주장한다. 그건 남북관계에 파국을 부르는 일이다.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그저, 자기 이념의 표현, 차별성·존재감 과시를 위해 대북정책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차이는 대북정책 방향이 아닌, 특정 현안과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이 초당 외교 거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게 초당 외교다. 초당적 대응과 협력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외교 실책이 있으면, 야당으로서 당연히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면한 외교 현안을 해소해야 할 시급성·중요성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당파성이 필요하다 한들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굳이 나서서 대통령을 ‘적’이니, ‘안보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니 비난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끌겠다고 준비하는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대외관계의 난제를 헤쳐 나가야 할 대통령을 흔들어 나무에서 떨어뜨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이다. 정부·여당 또한 야당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내려 노력했어야 한다. 야당 존중 없는 초당 외교는 가능하지 않다. 정부·여당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야당이 알아서 도와주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초당 협력은 야당에 대한 청구권이 아니다. 대야 압박 수단도 아니다. 대야 압박 공세와 초당 협력은 병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권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이분법으로 제1야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격적 언어를 구사했다. 한국당이 남북 화해·협력 문제를 친북이냐 반북이냐 이념 문제로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접근법이다. 정부가 초당적 지원을 받으며 일본의 도발에 대처해야 한다는 건 반일이 아니라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교 문제를 정당 정체성 혹은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게 내부 정치 싸움에 효과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외교 현안 해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사람들은 외교 문제가 국내 갈등을 초래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국내 갈등의 불쏘시개로 외교 문제가 동원됐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무엇이든 끌어들여 충돌을 일으키는 게 한국의 정치 공간이다. 외교 문제 해결의 중심축이 굳게 세워지는 대신 반일과 친일, 애국과 이적, 여와 야의 대립 축이 우뚝 서 있는게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이다. 

외교 문제가 내부 문제로 수렴되고, 모두가 내부 투쟁에서의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안정한 대외 정세에도 한국인의 시선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 있다. 모두 ‘한국 정치’ 때문이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놔야 한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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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면장을 하지.” 면장(面長) 노릇을 하는 데에도 식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와전되어 사용되는 속담이다. “배우지 않으면 장(牆)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lt;서경&gt; 구절에서 유래한 ‘면장(面牆)’이 무지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여왔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면면장(免面牆)’이 ‘면장을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牆)은 보통 담벼락으로 풀이되는데,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세워둔 가림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깨달음을 위해 좌선하는 선사가 아니고서는, 앞이 꽉 막힌 곳에 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면장을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자신의 눈앞에 가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림막에 막혀 살면서도 그게 가림막인 줄 몰랐다면, 요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림막에 온갖 정보가 난무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그 가림막 너머 혹은 바깥에 무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수의 일방적인 대중매체에서 정보를 얻던 때에 비해서 무궁하게 선택 가능한 쌍방향의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오늘, 오히려 우리 앞의 가림막이 더 견고해지는 면도 있다. 스스로 검색하고 선별했다고 믿는 정보들이 실은 누군가가 거르고 가공한, 혹은 은폐하고 왜곡한 정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과 해석이 혼재된 가운데, 의도적 해석을 거친 사실을 근거로 비타협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저마다 자기 앞의 가림막이 전부인 줄 아는 한, 건강한 토론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일관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견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섣부른 판단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가림막에 비친 정보들이 과연 누군가 덧씌워 놓은 프레임에서 자유로운지 살필 필요가 있다. 면장을 면하려면 먼저 내 눈앞에 가림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림막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조금만 더 품을 팔아서 해석 이전의 사실들에 눈길을 돌리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전문부터 2007년 한일수교회담 백서, 2012년과 2018년의 대법원 판결문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날것의 자료들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가림막을 주체적인 사고의 창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에 면장을 면하는 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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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된 딸(박근혜)은 첫 여름휴가를 그 섬으로 떠났다. 2013년 7월30일 페이스북에 휴가 사진 5장이 공개됐다. 그중 기묘한 사진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서 나뭇가지로 다섯 글자를 모래 위에 쓰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저도의 추억.’ 38년 전 대통령 아버지(박정희)가 이 섬에서 읊은 시의 제목이다. 대통령 첫해 여름휴가지에서 아버지를 소환하며 ‘추억 정치’를 극적으로 연출한 그 사진들은 최순실이 지휘·감독·선별해 전파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7월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백사장에 '저도의 추억'이라고 쓰고 있다. 출처 : 박근혜 페이스북

대통령 아버지는 풍광이 수려한 남녘의 작은 섬(면적 43만4181㎡)을 사랑했다. 1954년부터 대통령의 여름 휴양지로 이용되던 저도를 1967년 처음 방문한 박정희는 휴가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그러다 1972년 아예 대통령 별장으로 공식 지정했다. 홀로 아름다운 섬의 몸에는 권력의 장치들이 새겨졌다. ‘바다의 청와대’란 뜻의 청해대로 이름 붙여진 별장이 증개축되고 9홀 규모의 골프장도 조성됐다. 은빛 찬란한 섬진강 모래를 운송해 202m의 인공 백사장을 만들었다. 딸 대통령이 ‘저도의 추억’을 새긴 바로 그곳이다. 권력의 공간으로 재구성된 그 섬에서 박정희 가족은 여름마다 ‘추억’을 쌓았다.

부녀 대통령의 추억이 서린 그 섬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픈 추억으로 되새겨진다. 섬 밖으로 밀려난 주민들이다. 저도는 민간인 출입이 원천 금지됐고, 천혜의 어장인 저도 해안에서 고기잡이도 금지됐다. “이제 쫌 돌리도라.” 저도가 속한 장목면 주민들은 30년 넘게 ‘저도 반환’ 운동을 벌여왔다. 장목면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마자 ‘청해대’를 대통령 별장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관리권은 여전히 국방부가 보유했고, 이후에도 대통령들의 휴가지로 계속 이용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대통령 휴양지인 경남 거제 저도의 산책로에서 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저도는 이날 47년 만에 처음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저도를 찾았다. 2017년 대선 당시 공약했던 ‘저도 개방 및 반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과 17개 시·도에서 온 100여명의 탐방단은 47년 만에 열린 ‘금역의 섬’을 밟았다. 앞서 거제시와 행정안전부·국방부가 참여한 ‘저도상생협의체’는 오는 9월부터 1년간 저도를 시범 개방하기로 합의했다. 상시적이고 완전한 개방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빼앗긴 섬과 바다를 “이제는 쫌 돌리도라”.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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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다. 필요한 경우 발명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쓸모를 사용자가 만들어 내기도 한다. 거창하게 명명하자면 발명의 민중화 혹은 이반 일리치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고유한(vernacular)’ 사용법 발명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상공을 날고 있던 한 비행기 조종사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빈병을 내던졌다. 소비자본주의의 관습에 따르면 빈병은 쓰레기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코카콜라 병을 부시맨이 발견하고, 그들은 빈병의 ‘고유한’ 사용법을 발명한다. 코카콜라 병은 악기가 되고, 절구통 방망이가 되고, 밀대가 되고, 망치도 된다. 영화 <부시맨>은 콜라병의 ‘고유한’ 사용법 연대기라고 해도 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유한’ 사용법은 한국에서도 발견된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부잣집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노르웨이 빙하수 생수병을 나는 꽃병으로 쓰고 있다. 소주병은 참기름 병으로 쓰기 딱 알맞다. 스티로폼 박스에 상추를 심는 ‘고유한’ 방법을 한국의 아파트 거주자는 잘 알고 있다. 철지난 잡지는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기에 제격이다. ‘고유한’ 방법은 우리 삶의 양식을 좌우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최소화된 저항일 수도 있다. 일회용품을 여러 번 쓰면 그만큼 소비시장의 규모는 축소되고 자본이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줄어든다. 비록 미약해도 ‘고유한’ 방법이 반복되면 시장 자본주의에 스크래치 정도는 낼 수 있다. 

발명자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용법을 개발해내는 데 있어 자본주의적 시장은 ‘고유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우리보다 민첩하다. 발명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웹은 사용되고 있다. 웹의 발명자는 학문 공유라는 거룩한 이상을 설계했겠지만, 시장은 포르노 유통의 새로운 통로를 웹에서 발견했다. 전화라는 미디어 역시 이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니엘 벨이 전화기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최초 발명자는 안토니오 메우치이다. 메우치는 아파서 집에 누워 있는 아내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대화하려고 전화기를 발명했다고 한다. 전화의 본래 용도는 서로 아는 사람끼리 대화하려는 것이었다.  

전화의 용도는 사용자에 따라 그리고 시장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요즈음 서로 아는 사람조차도 전화를 거는 일이 거의 없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개인과 개인은 음성이 아니라 SNS로 혹은 애플리케이션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사이 소비자본주의는 전화의 새로운 용처를 찾아냈다. ‘콜 센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하루에 수통의 전화를 텔레마케터로부터 받는다. 피자를 주문하려고, 분실한 신용카드를 신고하기 위해,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해서 등등의 사유로 콜 센터에 전화를 걸고 누군지 모르는 상담원과 통화한다. 

전국에는 현재 3만여개의 콜 센터가 있고, 콜 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5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에도 수차례 통화하는 상담원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대체 도시의 어디에 그들의 근무처가 있는지도 우린 알지 못한다. 일상적으로는 접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콜 센터를 한 소설의 안내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피자 프랜차이즈 콜 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했던 작가 김의경은 그곳에서 일하면서 관찰하고 직접 경험한 일을 생생하게 소설 <콜 센터>에 담았다. “똑같은 기계적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싫증나고 단조로운 고역, 이것은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다. 노동이라는 무거운 짐이, 바위처럼, 지쳐빠진 노동자 위에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온다.” 엥겔스가 19세기의 공장 노동자를 묘사한 이 구절은 김의경이 소설에서 묘사한 콜 센터의 풍경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책상이 빼곡하게 놓여 있는 콜 센터에서 상담사는 전화를 받고 또 받으며 거의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전화를 상담사를 괴롭히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상 블랙 컨슈머라 부르지만, 왠지 그 호칭보다는 ‘진상’이 그들에게 어울린다. 진상이 콜 센터 노동자에게 욕설을 하고 성희롱을 늘어놓으면,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상담사는 “귓속으로 파고드는 온갖 배설물을 홀로 외롭게 처리”해야 한다. 

진상이 상담사를 괴롭히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진상은 평범하다. “80%가 대학생과 휴학생 그리고 얼마 안되는 취업준비생”으로 이루어진 비정규직 상담노동자를 전화로 괴롭히는 진상 역시 대개의 경우 약자다. 누군가 그 사람을 화나게 했고, 화나게 한 사람에게 갚아줄 수 없는 처지가 아닌 그 약자는 자신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 진상으로 변신한다. 약자들의 화풀이 폭탄 돌리기 연쇄사슬 중 맨 끝에 있는 콜 센터 노동자의 소원은 단 한 가지라고 김의경은 전한다. “블랙 컨슈머에게 똑같이 욕을 해주는 것, 모든 상담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담노동자는 간절한 소원을 절대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들을 대신하여 말해주고 싶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손님은 그냥 손님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왕이 없다는 뜻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때 왕의 목을 내리쳤다.

<노명우 |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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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말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9.91%가 되었다. 수도권 인구가 50%를 넘어서는 것은 분권과 균형발전을 추진해온 정부 정책이 실패했다는 신호가 될 것이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물리적 인프라(하드웨어) 중심의 혁신뿐만 아니라 교육, 교통, 주거, 문화 등과 관련된 생활양식(소프트웨어)의 혁신도 이룰 수 있도록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제안은 매번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도 획기적인 지방분권과 주민 주도의 마을계획, 주민자치회, 참여예산을 통해 지방자치 혁신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입안자들이 이러한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전북 남원시 산내면을 방문했으면 좋겠다. 산내면은 1998년 실상사귀농학교를 시작으로 꾸준히 귀농·귀촌자가 모여든 지역이다. 전체 마을 인구 2000여명 중 25%인 500여명이 귀농·귀촌자다. 면내 초등학교 학생이 100명이 넘고, 중등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도 있다. 최근에는 대안대학인 ‘생명평화대학’에 젊은 청년들이 함께하고 있다. 

산내면의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첫째, 실상사귀농학교를 통한 집단적 귀농이다. 1998~2010년 이 학교를 졸업한 600명의 졸업생 중 400여명이 산내면에 자리 잡았다. 귀농학교 학생들은 봄·가을 두 차례 3개월간 숙식을 함께하면서 농사와 농촌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기술을 배우고 교류하며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실상사는 집과 땅을 내어주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귀농·귀촌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자치의 문화다. 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은 농촌 과소화의 원인을 일자리 문제로 보고, 농공단지를 조성해 기업을 유치하는 것과 관광산업을 통해 일자리 만드는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산내면에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듣는 질문도 뭐 해서 먹고사는가(일자리)와 심심하지 않은가(문화)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귀농·귀촌자들은 서울 등 도시의 괜찮은 일자리를 뒤로하고 시골에 온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와 문화를 만들었다. 산내마을신문에 따르면 산내면에는 40여개의 각종 자발적 모임이 있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스스로 즐기는 문화도 만들어 가고 있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가 이들이 시골살이를 하는 이유이고,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다시 귀농·귀촌자들이 들어온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기대하듯 예산주기에 맞춰 1년 만에 창업을 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관광객이 산내면 시골 마을을 찾는 이유는 마을마다 만들어진 각종 체험공간이 아니라 잘 보존된 지리산과 그 자락에서 행복하게 사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오관영 |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 이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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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다니는 학교 복장규정을 새로 정하는 데 학부모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교복 길이, 덧입는 옷의 종류, 화장과 머리 모양,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정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참석 여부와 상관없이 의견을 설문으로 제시할 수도 있었으나 사전 논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설문에 반영될 거라서 나는 참석을 택했다. 개선하고 싶은 안이 있었고, 복장과 두발의 자율이라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각각 어떤 입장인지도 궁금했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학생다움’을 강조해 보수적인 결정을 유도하면 적극적으로 아이들 편에 서야지 홀로 투사인 척 그런 오지랖 넓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학교가 보수적일 거라는 건 나의 편견이었다. 특히 교사들의 의견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 세 그룹 중 가장 파격적이었다. 안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원하는 어떤 방향도 동의했다. 어떤 안은 교사들이 낸 것이 가장 파격적이었다. 그렇게 입장이 정해지기까지를 설명하는 교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까지 교사로서 자신들이 지도해 온 ‘학생다움’이 복장과 외모, 태도가 아니었나 생각했다는 것, 그리하여 처음부터 학생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교사에게는 또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해보았다면서 학생에게 학생다움이란 수업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교사에게 교사다움이란 그 수업을 준비하고 도와주는 것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꺼내놓지도 못한 오해를 삼키며 부끄러웠는데, 한편으로 신선한 감동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치마 길이와 명찰, 머리 길이로 인한 체벌이 하루를 시작하는 교육이었던 나는,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밝은 미래를 엿본 기분이었다. 

학생들의 입장은 다소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학급 내의 토의를 거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기성세대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지나침을 배제하려는 어떤 기준이 있었다. 무릎 아래 치렁치렁 늘어진 치마도 싫지만 다리 전체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고, 화장은 하고 싶지만 입술과 피부 정도의 가벼운 화장만 허용하는 게 맞는 거 같고, 액세서리는 나쁠 것 없지만 안전을 위해서 목걸이나 늘어뜨리는 귀걸이는 안될 것 같다고 하고, 실내화는 귀찮지만 청소할 때를 생각하면 구분해서 신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풀어놓는다고 지구 반대편으로 겁 없이 달려 나갈 아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기특하고,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중도의 보수성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궁금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테두리를 검토하고 정해나가려는 자의 자정능력이라면 바람직하지만, 안전한 곳만 골라 디디며 살도록 훈련받은 자의 내성이라면 조금 쓸쓸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아이들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일. 그래도 토론이라는 과정을 거쳤으니 세상의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인지했을 테고,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넓어진 테두리에서 살다 보면 스스로가 결정한 삶을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깨닫게 되겠지 기대해볼 뿐이다. 

복장 규정 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현재의 교육제도 개정에 대해서도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사고 존립 논쟁도, 수시와 정시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자유학년제와 진로탐색체험에 대해서도 각각의 교사 단체와 각각의 학부모 단체만 첨예하게 옳고 그름을 논할 뿐, 지금 그 교육 과정을 겪어내는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불합리한지, 무엇이 부당한지, 어떤 방향을 바라는지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교육에 대한 권리가 복장에 대한 권리만 못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만약 묻는다면 이 아이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도 궁금하다. 학생 50% 이상의 의견이 나오면 교사, 학부모의 의견과 무관하게 무조건 반영하게 되어 있는 복장규정처럼 학생 50% 이상의 의견이 무조건 반영되는 교육제도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현재의 교육제도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지, 나는 그 결과도 농담처럼 궁금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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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고용노동부는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정부 입법안을 31일 입법예고한다. 지난 22일에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87호, 제98호와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제29호 등 ILO 미비준 3개 협약에 대한 비준을 외교부에 의뢰했다. 비준과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기초생활보장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회원들이 3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기준 중위소득의 대폭 인상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부가 예고한 법률개정안은 실업자·해고자의 노동조합 가입, 소방공무원·대학교원 및 퇴직 공무원·교원의 노조 가입 허용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또 노조 전임자 급여 금지 규정을 삭제했다. 다만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 내에서 전임자의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노사분규 때 노동자의 업무시설 점거를 금지하는 조항도 들어있다. 노동부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을 바탕으로 법률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초 공익위원안에 포함된 특수고용노동자의 단결권 보장 방안, 노조설립신고제 폐지 등은 법안에서 빠졌다. 입법안이 공익위원안보다 후퇴한 데에는 재계의 입김이 작용했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ILO 핵심협약은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도록 회원국 노사관계의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자는 게 취지다. 당연히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원칙을 존중하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노동관계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지난해 7월 이후 경사노위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논의를 40차례 이상 개최했다. 그러나 노사 간 견해 차만 확인한 뒤 공익위원안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노동관계법 개정 논의를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풀어가려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정부가 유럽연합(EU)과의 무역마찰을 우려해 서둘러 비준 준비에 나선 것은 다행이다. 

정부 계획대로 비준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르면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비준동의와 함께 관련 노동법 개정이 이뤄진다. 그러나 앞길은 순탄치 않다. 당장 노동계는 정부 개정안이 ILO 핵심협약 기준에 못 미친다며 반발하고 있다. 국회 비준동의와 입법 과정에서 재계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반대할 것은 명백하다. 정부 입법안은 여러모로 불충분하다. 그래도 사업장 내 민주주의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해 ILO 핵심협약 비준은 필요하다. 국회도 관련법 개정 작업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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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정부가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재정의 역할이 강조되는 때라 혹시 세입 확충 계획이 담길까 기대했는데 역시 없었다. 5년간 누적해 총 5000억원의 세입이 감소한다. 최고소득층에 세금을 조금 더 부과하고 기업에 법인세를 깎아 주지만 규모가 미미해 사실상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작년에 발표된 총 2조5000억원의 감세안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다간 (박근혜 정부가 천명했으나 실제로는 증세 정책을 펴서 이루지 못했던) ‘증세 없는 복지’가 문재인 정부에서 구현될 듯하다.

올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세법을 그대로 두고 과감히 지출을 늘리는 방법은 뭘까? 임기 2년은 예상보다 많은 세입이 있었으나 이제 초과세수 행진도 끝났다. 올해 국세 수입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국채로 갈 듯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부채 수준은 외국에 비해 낮아 국채를 발행할 여지가 존재한다. 필자 역시 지출 확대를 위해 국채를 활용하자고 말한다. 정부가 포용국가 복지를 주창하지만 여전히 기초생활보장, 장애인복지, 기초연금, 건강보험, 사회서비스, 공공임대주택 등 핵심 분야에서 추가 지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채가 지니는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 조달된 재정은 일회성, 즉 마중물일 뿐이다. 대체로 사회지출은 비가역적이어서 한두 해는 국채에 의존하더라도 그다음부터는 세입제도에서 지속적으로 재원이 마련돼야 한다. 국채 확대를 추진한다면 증세 계획도 함께 논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대통령은 재작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중산층과 서민들 증세는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못 박았다. 이에 대한 비판이 여당에서도 제기되자 겨우 핀셋 증세로 생색을 내는 데 그쳤다. 시민들의 어려운 가계를 감안한 거라지만 ‘나라다운 나라’의 재정전략과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문재인케어’에선 지난 정부가 물려준 누적적립금이 있다며 법정 국고지원액을 과소지원하고, 국민연금에선 현행 재정불균형을 그대로 놔두는 개편안을 추진하며, 복지 확대 재정은 국채에만 의존하려 하니 참 마음 편한 정부이다.

작년에 3873명을 면접조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세금을 더 거두어 복지를 확대하는 것”에 대하여 4분의 3이 정당하다고 답변했다. 또한 “복지를 늘리기 위해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할 계층”으로 상위 20%만 꼽은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분의 1에 그쳤다. 시민들이 복지를 체험하면서 재정의 책임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통령이 곰곰이 숙독해야 할 대목이다.

복지가 발전하는 만큼 증세도 이야기해야 한다. 중간계층까지 포함하더라도 직접세 구조에서는 누진증세 혹은 부자증세 효과가 발생한다. 특히 세금의 사용처를 사전에 정하는 ‘복지증세’ 방식이면 세금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몇몇 복지단체들이 전체 세목의 개혁 로드맵과 함께 시민의 참여를 이끄는 상징으로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 도입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발표한 1차 사회보장기본계획에서 안정적 재원 방안을 강조하면서 참고사례로 프랑스와 일본의 사회보장세를 소개했다. 보수 정부였지만 복지재정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흔적으로 읽힌다. 반면 문재인 정부가 올해 발표한 2차 기본계획에는 해당 주제의 내용이 거의 복사하듯 1차와 같은데 유독 사회보장세 부문만 빠져 있다.

프랑스에는 복지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별도로 사회보장재원조달법이 존재한다. 근로소득에 부과되는 사회보험료뿐만 아니라 여러 세목들이 복지지출과 연계되는 복지증세 구조이다. 일본 역시 소비세를 올리면서 인상액을 모두 복지에 사용하기로 법에 담았다. 복지 재정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세금이 복지에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세 전략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세를 도입한다면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에 다시 일부 세금을 부가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예전의 방위세, 지금의 교육세와 같은 목적세이기에 지출 항목을 미리 명시하면 가구 유형별로 세금액과 복지급여가 정해진다. 시민들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안내서에서 추가로 내는 세금액과 새로 누리게 될 복지를 알 수 있고, 대다수는 낸 세금보다 더 복지로 돌려받는 ‘재분배’를 확인할 것이다.

무상급식 논란을 계기로 복지 바람이 분 지 10년째다. 이제 시민들은 복지를 경험하고 세금에 대한 책임도 인식해 가고 있다. 복지증세 이야기를 주저하지 말자. 촛불로 만들어진 정부가 ‘증세 없는 포용복지’ 정부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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