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요즘 화제다. 책 곳곳에서는 소위 ‘꼰대질’을 하는 기성세대와 자신을 ‘호갱’으로 대하는 기업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 행동, 양태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간단, 재미, 정직이라는 키워드다.

우리 연구소의 20대 연구원도 비슷하다. 관심 없는 내용은 읽지 않고, 3줄 이상의 댓글은 읽지 않는다. SNS에서 큰 이모티콘은 싫어한다. 스마트폰 데이터 비용이 아까운지라 고용량 사진은 사절한다. TV는 보고 싶은 장면만 찾아서 본다. 일상의 대화에서 ‘월급 루팡’(월루)과 같은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고 1990년대 청년들이 어설프고 맥락이 없진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청년들은 우리 사회가 해석해준 대로 살아야 하는 삶을 당당히 거부한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청년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더 많은 변화, 더 넓은 참여, 더 나은 미래’를 실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울청년시민회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2017년 시작되어 3년째다. 올해는 시장 직속의 ‘청년청’과 함께 약 500억원의 청년자율예산제를 논의하는 플랫폼이 되고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지난 6개월간 청년 1000명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자기 목소리를 내온 공간이다. 20대 초반부터 직장인까지 매우 다양한 청년들은 더 나은 변화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학생(193명), 회사원(168명), 청년활동가(97명), 구직 청년(89명), 프리랜서(63명) 등 매우 다양하다. 10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은 왜, 어떤 이유로 한자리에 모였을까. 학교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을 당연시하거나, 공무원시험 준비가 전부인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 바뀌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의 욕구인 것 같다. 아무리 요구해도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섭섭함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학교를 벗어난 청년들에게 자기증명만을 요구했을 뿐, 사회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낼 공간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의 진지함은 1970년생인 내게는 충격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자기 시간을 내면서까지 각자도생의 시대에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로 청년정책을 만들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평등권을 보장하는 작은 참여를 요구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함께 소통하는 길입니다!”라는 무박2일의 워크숍에서 눈에 띈 문구는 청년 감수성을 가늠케 한다.

도시주거, 건강, 교육, 복지안전망, 일자리경제, 민주주의, 평등다양성 등 30여개 분과로 나뉘어 6개월간 청년정책을 만들었다. 일반(45개), 특별기획(9개), 자치구(42개)까지 총 96개 정책이 제안되었다. 프리랜서 안전망부터 안전한 공간, 은둔형 외톨이, 쫓겨나지 않는 도시, 일터 내 민주주의, 중소기업 복리후생 계좌제까지 현실적 정책들이다. 지난 3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분과회의, 소주제회의, 부서 간담회까지 치열한 고민을 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업은 특별기획과 자치구 영역이다. 2개 이상의 영역에 걸쳐 추진돼야 할 특별정책과 지역문제 해결 자치구형 정책을 위해 제안된 것들이다. 특히 서울시 청년자치예산 중 자치구에 5분의 1이 할애됐다. 16곳에 77억원이 배정됐다. 소소한 식탁, 재능 공유 마켓, 마음건강, 1인 가구 기반 조성, 미래직업 양성 등 동네 참여예산의 실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자치구라는 지역을 연결하려는 청년들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정책의 변화’와 ‘시선의 확대’를 느낄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를 시작했던 청년들은 ‘1000개의 필요, 500개의 아이디어, 100개의 정책’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경험도, 언어도, 풍경도 낯설었던 행정조직에서 그들은 어떤 상상력을 펼쳤을까. 8월31일 보편적 권리로서 지방정부의 청년정책을 확인하고 싶다. 공정성이 화두인 요즘, 불평등과 격차해소의 중요성이 논의되면 좋겠다. 이제 우리도 핀란드(주택수당, 마음건강), 오스트리아(교육훈련), 프랑스(자기활동계좌제), 영국(사회자본)의 정책들이 청년들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도입되길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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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맡은 자리와 위치에서 소임과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사회에서 ‘자리’와 ‘위치’라는 것은 일단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사유화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개인이 일군 기업에서 사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 기업이 1인 기업이 아닌 한 그 사장 자리도 기업 내에서 공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권한을 갖게 되지만 그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사장 자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장 자리에 있다고 해서 기업을 자기 마음대로 막 할 수 없다. 교수라는 자리도 대학 내에서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회사에서 과장, 부장, 임원 등의 자리도 모두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공적인 성격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리는 그 자리가 부여된 제도나 기관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교수는 대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고, 사장은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며, 부장, 임원 등도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다. 

너무나 분명하게도 공무원이라는 자리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건 ‘늘공(늘 공무원)’이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와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나 사적인 욕구를 충족하려 하면 안된다. 이런 경우 공사구별이 안된다고 표현한다. 교수가 교수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학생들을 사적으로 부리고, 그 자리를 징검다리로 하여 권력이나 재물을 추구하면 학교라는 곳이 원래의 목적과 취지에 맞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교수는 교수의 원래 기능에 충실해야 하는 자리이다. 즉 연구하고 교육하는 자리이다. 본인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이 되어 회사나 국가의 자문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래 교수의 기능 외적인 부의 영역이지 주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이 주의 영역이 되면 컨설팅 회사나 기업으로 직장을 옮기거나, 공무원으로 빨리 자리를 옮기는 것이 학교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진정한 학문의 발전은 정체되고, 불쌍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내팽개쳐진다. 기업의 과장, 부장, 임원 등의 자리도 각기 맡은 바 소임과 기능이 있다. 그 자리를 이용해 사적인 영리를 기업 안에서 추구하거나, 부하 직원을 회사의 일과 관련이 없는 일로 부리고 괴롭히면, 회사에 해를 끼친다. 회사의 배임과 횡령이 강력하게 처벌되는 이유도, 상사의 부하 직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처벌되는 이유도 모두 자리가 사적으로 이용되어 회사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기자들도 정확한 사실을 취재해서 보도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기자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사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면 이는 언론사뿐만 아니라 언론 전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왜곡된 보도나 선동적인 보도를 통하여 몇몇 사람은 이익을 볼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라는 공간의 정보 유통이 혼탁하고 망가져 사회에 심한 해를 끼치게 된다. 국가 공무원이 자리를 이용하여 개인의 영달과 재물을 추구하면, 공공성이 파괴되어 국가의 기능이 왜곡되고, 심한 경우에는 나라가 흔들린다. 많은 저개발 국가의 부패한 독재정권이 바로 국가의 공적 자리를 이용하여 개인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혁명은 바로 이러한 공사 구별이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에 공공성을 찾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공공성 회복, 즉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로 촛불정신이었다. 정권이 아니라 이권을 잡는 정치세력, 국가를 사랑방으로 만드는 정치세력, 기업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총수들이 존재하는 나라, 공적 자리로 갑질하는 기득권이 활개치는 나라가 아니라 각기 자리에서 맡은 바 공적인 소임을 다하는 그런 전문적이고,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의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라는 권력을 획득하여 사유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리를 통해 제대로 일을 하려는 것이 목적인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런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가? 공적 영역의 가장 큰 그릇인 국가에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맡은 바 소임과 책무를 다해야 할 큰 짐을 떠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가지면 사회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국가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아무리 우리 편이라도 공공의식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모자라면 중요한 곳으로 가면 안된다. 나라가 망가지면 결국 우리 편도 망가진다.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공공의식과 전문성, 그리고 국가가 지향해야 할 공공성의 기준은 이전 정부와의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치를 놓고 절대평가를 해야 한다. 지금 공공성의 회복을 외친 촛불마저도 사유화하려는 세력이 보인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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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정치개혁인 선거제 개혁 작업이 큰 분수령을 넘어섰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활동 종료를 이틀 앞둔 29일 전체회의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선거법 개정안은 지난 4월30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 합의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오른 지 121일 만에 소관 위원회 심사를 마무리하고 법사위로 넘겨지게 됐다. 정개특위 고비마다 각종 지연술을 동원해 시간만 끌어온 한국당이 “날치기”라며 반발하는 것은 공허하다. 정개특위 종료 시한까지 내몰린 마당에 여야 4당만의 표결 처리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내년 4월 총선에 적용될 선거법인 만큼 최소 연말까지는 개정이 완료되어야 한다. 한국당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사위에서 최장 90일간 체계·자구 심사를 하는 만큼, 이를 역산할 때 정개특위의 선거법 의결은 거의 막바지 시점이었다. 최장 180일의 상임위 심사기간을 59일 줄임에 따라 연말 본회의 처리가 가능해진 셈이다. 선거제 개혁의 가장 큰 난관을 넘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개특위 관문을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은 정당득표율과 의석 배분의 비례성을 높이고 다양한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게 핵심이다. 의원정수는 300명을 유지하면서 지역구는 줄이고 비례대표는 늘렸다. 거대 양당에 유리한 현행 승자독식 선거제를 비례성을 강화해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제도로 개혁하자는 취지다. 선거연령을 현행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춘 것도 획기적이다.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주의와 거대 양당의 대결정치를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게 선거제 개혁이다.

선거법 개정안이 정개특위를 통과했다고 그대로 법제화되는 건 아니다. 3개월간의 법사위 숙의기간과 본회의 처리 과정에서 여야의 막바지 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 게임의 규칙인 선거법은 합의 처리가 최선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당을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당은 명분도 실익도 없는 선거제 개혁 저지 방침을 접고 이제라도 개선안을 마련해 협상에 나서야 한다. 선거법이 법사위에 계류되어 있는 동안 여야가 별도 정치협상 채널을 가동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정개특위 통과로 추진력을 얻은 선거제 개혁의 열차는 멈춤 없이 달리게 됐다. 선거구 획정 등 총선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연말 본회의에서 선거제 개혁의 대장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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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등 사건에 대한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34억여원의 ‘말 3필’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여원을 뇌물로 판단했다. 뇌물의 출처가 삼성전자이므로 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에 해당하고, 자금의 성격도 범죄수익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삼성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승계작업을 인정했다. “이 부회장이 강압에 못 이겨 돈을 준 것”이라며 말 3필 등에 대한 뇌물·횡령 혐의를 무죄로 보고, 승계작업은 없었다는 2심 재판이 잘못됐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정치권력과의 부도덕한 거래를 통해 재벌 승계작업을 유리하게 이끌려던 자본권력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국민 누구도 법 앞에 평등함을 보여준 판결인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은 2016년 ‘비선실세’ 최순실씨(본명 최서원)의 국정개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 부회장 등은 최씨 등을 위해 400여억원 상당의 뇌물을 제공하거나 약속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되면서 구속을 면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2심도 파기하고 되돌려보냈다. 공직선거법상 공직자의 뇌물죄는 분리 선고해야 하는데 1·2심 재판부 모두 이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30일 (출처:경향신문DB)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부정한 청탁은 대가관계가 인정되면 구체적으로 특정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 사건에서 영재센터 지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정한 청탁은 장래 발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안도 청탁의 내용이 될 수 있고,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인정된다”고 했다. 공직자에 대한 부정한 청탁에 대한 단죄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당연한 판단이다. 삼성그룹이 이 부회장 승계작업이 없었다면 수십억원을 그냥 주고, 수백억원의 지원을 약속할 리 없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 부회장의 뇌물액수는 90억원 가깝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파기환송심에서 횡령 액수가 50억원 이상 인정되면 이 부회장은 수감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뇌물로 자신과 기업에 유리하게 국가정책까지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그에 상응하는 법의 단죄는 당연하다. 그런데 삼성 측은 이날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움과 성원을 부탁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부회장과 삼성그룹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저지른 죄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국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 앞의 진실이다. 이번 판결로 자칫 ‘재벌 봐주기’로 끝날 뻔했던 사건을 바로잡고, 사법정의도 세울 수 있게 됐다. 다시는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유착하는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잘 살펴 법과 원칙, 논리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국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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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속을 맴도는 불안의 하나는 “나는 내셔널리스트인가” 하는 것이다. 의문이 아니라 불안이다. ‘노 저팬’의 일본 보이콧이 그리 걱정되지도 않고, 일본에 대한 정부의 ‘강 대 강’ 대응이 이상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끈기 있게 이어지는 시민들의 ‘자발’적 불매운동에 감정이 고양되기도 한다.

“애국심은 불한당들의 마지막 피난처”(새뮤얼 존슨)를 되뇌며 정치인의 “애국” 발언을 늘 의심하고, 지금도 한·일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미래를 희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낯설다. 정부가 “관제 민족주의를 동원하고 있다”는 지적엔 멈칫하기도 한다. 그리 신실하지도 않았지만, 오래전 잊어버렸던 젊은 시절 운동권의 세례가 불쑥 튀어나온 것일까.

이런 불안 속을 배회하다 보면 마주하는 질문은 ‘국가’다. 국가의 실체는 있는가. 개인의 가치가 더 중요해진 21세기에도 국가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이다. 세계화·정보화와 함께 국가의 경계란 그저 정치 영역에서만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은 아닌가.

일본의 실천적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현대 세계에서 국가나 국민이라는 단위로 법적·정치적 결정이 이뤄지는 한 국가, 국민 단위의 정치적인 해결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대담집 <책임에 대하여>)고 말한다. 확연히 불온한 징후를 보이는 일본 내셔널리즘을 우려하며 고뇌를 담아 한 말이다. 이처럼 ‘국가’는 진보적 세계주의자들에겐 ‘아포리아(aporia·난관)’와 같은 문제다.

그의 말처럼 국가라는 것이 구성원들의 생활공동체로 공동의 이해관계를 다루는 단위가 되고 있다면 그 유효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근대국가의 목표가 시민의 자유와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듯, 핵심은 구성원의 자유와 민생을 신장할 공동체로서 국가의 역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다.

그 점에서 국가나 민족주의의 한계도 명료하다. 생활공동체로서, 구성원들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것을 넘어 국가나 민족을 절대화하거나 인격화할 때 의미는 상실된다. 구성원의 자생적 의식의 발로가 아닌 정치적 수단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몹시 위험하기도 하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인류를 참화로 몰아넣은 1세기 전이 그러했다.

결국 내셔널리즘적 열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지향하는 내용과 배경, 진로일 것이다. 긍·부정은 여기서 갈린다. 그럼 지금 한국사회의 ‘반일’은 긍정인가, 부정인가.

한·일 충돌의 직접 도화선은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일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모두 매듭짓겠다는 일본은 철저히 그들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배상 책임을 부정한다. 소송을 한 징용 피해자들은 지금 큰 심적 부담을 느낀다. 우리 사회는 두 입장으로 나뉘어 있다. 안보 우려와 함께 정부를 향해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는 입장과 일본의 경제 조치를 부당하다고 보고 불매운동에 나선 입장이다. 어느 것이 더 피해자 개인에게 공감하는 것일까. 전자는 ‘안보를 위해 개인 희생은 일정부분 불가피하다’는 두려움은 아닌가.

일본 조치에 대한 응전이란 점에서 보면 강자의 간섭·억압에 반대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성격이 짙다. 지난 수십년간 정치·경제적 성장으로 고양된 자존감이 민족 단위로 표현되는 것이란 풀이도 들린다. 하지만 ‘반일·불매’를 주도하는 20·30대 젊은 세대들을 생각하면 민족 범주로만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앞선 세대들에 비해 훨씬 개인주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런 그들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민 것은 ‘공정·정의’라는 그들 정체성과 닿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그들의 내셔널리즘을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세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경제적 신냉전’이라 할 불길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일본 도발은 그 한 부분이다. 그들이 정상국가로 주장하는 ‘메이지·쇼와 시대’ 정체성으로 회귀 조짐을 보일 때 예견된 일이다. 실체는 고작 동아시아에서 미국 대리인으로 작은 골목대장 노릇을 하려는 욕망일 테지만….

사실 걱정할 것은 ‘내셔널리스트인가, 아닌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책임 있는 세대로서 이 살벌한 시대를 살아갈 미래 세대의 국가 비전과 전략을 준비조차 못했다는 것일 게다. 굴욕의 100년 전처럼 앞선 세대들이 친미·친중식 세력주의 생존론만 우길 동안 ‘젊은 그들’은 길을 잃었다고 느낀다.

앞선 세대들은 성찰해야 한다. 청년들이 열정을 투사할 국가 정체성의 비전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공동번영, 행복하고 평등한 시민이 조합되는 어떤 지점 위에 있을 것이다. 그걸 젊은 세대의 ‘새로운 민족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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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에서 산불이 한 달째 이어지고 있다. 지구 산소의 20% 이상을 생산하는 ‘지구의 허파’인데 우리 관심이 너무 인색하다. 무려 한 달 가까이 산불이 계속되고 있지만 한국언론재단의 기사 검색 사이트인 빅 카인즈로 검색해보니 한 달간 보도 기사량이 59건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3주째로 접어든 8월22일에나 기사로 등장했다. 지난 4월15일 노트르담 성당 화재 때는 그날부터 한 달간 총 기사량이 1081건이었다. 프랑스를 넘어 인류 문화자산의 파괴문제라 그 정도 보도량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견줘 아마존 산불에 대해선 너무 무심하다. 노트르담 화재 기사량의 0.1%에도 못 미친다.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를 겪고 있다. 발 빠른 대응이 없다면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2014년 제5차 종합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산림파괴를 포함한 토지 이용 변화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가 총 온실가스의 11%에 달한다. 탄소 흡수원을 더 늘려야 하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서울시 면적의 15배, 아마존 열대우림의 15%가량이 한꺼번에 잿더미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었을까? 아마존 우림은 산소를 만들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생물 다양성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27일(현지시간) 브라질 북부 파라주 알타미라의 아마존 열대우림이 불타고 있는 가운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알타미라 _ AFP연합뉴스

브라질은 쇠고기와 닭고기, 대두 생산 세계 2위, 옥수수 생산 세계 3위 국가이자 대두와 육류 제품 세계 최대 수출국이다. 우림의 나무를 없앤 후 소를 방목하거나 가축 사료로 쓸 콩과 옥수수를 생산한다. 식용동물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양은 전체 온실가스의 14%에 달한다. 더 많은 식용동물과 사료 생산을 위해 더 많은 숲들이 불태워진다. 나무를 베어 없애는 건 힘들고 시간이 걸리기에 불을 내서 한꺼번에 태워버린다. 

그래서 아마존 우림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지구 산소 공급이나 이산화탄소 흡수 차원을 넘어서더라도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식품 수입국 중 하나로 브라질 농축산물의 주요 수출 대상국이다. 아직 브라질로부터 쇠고기는 수입하지 않지만 지난해부터 돼지고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닭고기 수입량 중 브라질산이 최고로 많다. 브라질로부터의 수입이 한국 전체 농산품 수입의 5% 정도이지만 옥수수와 콩 자급률이 2016년에 각각 0.8%, 7.0%였으니 갈수록 수입이 늘 것이다.

302만마리, 1127만3000마리, 1억7055만1000마리. 무슨 숫자일까? 우리나라에서 2017년에 키웠던 식용 소와 돼지, 닭의 마릿수다. 우리는 한 사람당 고기를 얼마나 먹을까? 2018년 농림축산식품 주요 통계에 따르면 2017년의 경우 소 11.3㎏, 돼지 24.5㎏, 닭 13.3㎏으로 총 49.1㎏이었다. 2000년에는 각각 8.5㎏, 16.5㎏, 6.9㎏으로 총 31.9㎏이었으니, 그사이 53.9%나 증가한 것이다. 2017년 이 세 육류의 자급률이 66.7%였고 쇠고기는 41.0%로 더 낮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로 2017년 한국인 1인당 총 육류 소비는 58.0㎏, OECD 평균(69.4㎏)보다 낮지만 세계 평균(34.7㎏)보다 월등히 높다. OECD 평균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육류 수입은 갈수록 느는데, 사육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처럼 멀리서 수입해올수록 냉동에도 이동에도 더 많은 에너지가 쓰여서 온실가스 배출이 더 늘어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유럽에선 육류세 도입이 늘고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2016년부터 도입되었고 영국은 도입을 준비 중이다. 독일에서는 육류 제품 판매세 인상 법안이 발의되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함께 국민 건강과 가축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서란다. 우린? 당장은 육류세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지구 환경문제와 우리 삶의 연결성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모두가, 매 끼니, 채식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육식을 피하는 건 어떨까?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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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는 ‘과수원 집’이란 택호를 여전히 쓴다. 1960~70년대에도 ‘특작’이라 우대받으며 돈 좀 만지는 농사는 과수와 축산이었다. 그래서 과수원 집 아들, 딸들은 주머니에 철전이라도 넣고 군것질 좀 할 수 있는 동네 부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해살이 과채보다 과수의 경우 첫 수확에 걸리는 시간도 5년 안팎으로 길고, 기술의 숙련도도 축적돼야 하고, 저장시설 등을 갖추는 등 자본이 많이 투하되는 농업이다.

올해 전국 과수농가들이 마음을 잔뜩 졸였다. 아니 2015년부터 긴장 상태다. ‘과수화상병’이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사과 주산지인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 발생하고 아직도 중부지역에 발생하고 있어서다. 말 그대로 과일나무가 화상을 입듯이 타들어간다는 이 병은 2015년 안성의 배 농가에서 처음 발생하고 올해 177농가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과, 배 등 장미과 식물에 발생하는 병이다. 확산이 빠른 데다 치료법도 없어 치명적이다. 확진 판정을 받으면 반경 100m 내외 과수화상병 기주식물은 매몰해야 한다. 게다가 3년간 그 땅에서 기주식물은 심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기주식물들에 사과, 배, 복숭아, 자두, 딸기까지 포함된다. 폐원 3년 뒤 그 자리에 묘목을 심어 수확하려면 최소 4~5년이 더 보태지므로 7~8년간 농가의 생계는 정지다.

이는 우리를 경악시켰던 구제역의 살처분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오죽하면 ‘과수 구제역’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구제역은 백신이라도 있지만 과수화상병은 그것마저 없으니 ‘과수 아프리카돼지열병’쯤 될 것이다. 다만 가축들은 비명을 지르고 과일나무들은 비명 없이 땅에 묻힌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수 농민들에게는 나무를 매몰하는 장면이 살풍경이지만 도시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던져주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안 먹어도 큰일 안 나는 과일이라 여겨서일지도 모르겠다. ‘디저트’로 분류되는 과일은 굳이 국내산 생과일이 아니어도 대체품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동안 농촌진흥청에서도 예찰과 방제에 대한 농가 교육을 해왔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으로 판단해 ‘소독철저’와 ‘신고철저’라는 아주 기본적인 매뉴얼을 수립했지만, 정작 농민들이 궁금한 건 방제약이 효과가 검증됐느냐다. 검증을 하려면 실험을 해야 하고 그건 예산과 인력의 문제다. 그리고 늘 부족한 것이니 핑계로는 영 궁색하다.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결국 기관의 의지 아닌가. 여하튼 과수화상병 피해규모가 커지자 2015년 첫 발생 이후 올해 들어 예산을 확보하고 약제 실험과 예측모형 및 저항성 품종 개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부디 꼭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얼마 전 충주에서 발생한 과수화상병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다. 작년 과수화상으로 폐원한 뒤, 다른 과수원을 빌려 사과 농사를 짓던 한 농가의 이동경로를 지목했다. 가급적 내부 인력으로만 깨끗이 소독된 작업도구와 장갑을 쓰면서 일하라 하지만 고된 과수원 일은 이주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계절노동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곤충과 바람으로도 전염된다는 과수화상병의 다양한 원인들 속에서 남는 것은 자나 깨나 농민들이 알아서 조심하라는 것뿐이다. 때 이른 추석이라 덜 여문 과일들이라도 쏟아져 나온다. 추석 명절 하나 바라보고 달려왔을 폐원 농민들은 이 장면이 부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디저트여도 농민들에겐 생존 자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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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제기된 의혹과 관련 증거들이 보여주는 심각한 도덕적, 법적 흠결 때문이고, 이러한 흠결을 지닌 장관은 검찰개혁의 기수가 아닌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많은 국민들의 눈에는 명확한데 여권 및 진보 진영 주류의 시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거대한 혼돈에 빠져 있는 듯 보이거나,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마지못해 발언하고 움직이는 듯한 이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진심으로 적극적인 옹호를 펼치는 이들도 있다. 거악에 맞서기 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국 후보자의 흠결이 정도를 넘어섰다고 보는 이들의 시선에선, 국민의 눈높이를 따라가기에 한참 모자란 억지 논리로, 그간 자신들이 내세운 가치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청와대 민정수석 때인 지난달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임명 수여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왼쪽 사진). 조 후보자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이튿날인 28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으로 출근하며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김기남 기자doolee@kyunghyang.com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진보의 역사에 있어 거대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겸허하게 돌아보며 과감하게 구습을 넘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정치 및 진영 논리에 따라 대충 넘어가느냐에 따라 진보의 미래는 비상할 수도, 몰락할 수도 있다. 

‘조국 논란’은 한국 진보의 역사에서 세 번째 단계의 출발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진보는 첫 단계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이로써 민주, 자유, 평등, 정의, 인권의 보편 가치를 일깨웠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민주화 운동 외에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딛고 경제를 비롯한 국가 경영의 모든 일에서도 유능할 수 있는 진보임을 확인시켰다. 

그렇다면 다가올 세 번째 단계에서 진보는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까? 진보 세력에 잠재됐던 문제가 응축돼 표출된 이번 사태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은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개개인에게 내재된 욕망의 섬세한 이해 및 관리 문제다. 

앞의 두 단계에서 진보는 보편 가치를 구현하는 역사를 주로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만들어가는 데 관심을 갖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기에 방점을 두다 보니 개인의 내면 및 의식의 문제는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방치했다. 외부로 주창하는 보편적 가치와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할 경우 그 충돌을 인지하는 감각도 약할 뿐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후자 편에 서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내면의 욕망을 철저히 이해하고 관리하는 일은 자기 수행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얘기를 접하면 문제는 사회 구조에 있을 뿐이고 개인 의식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그런 도학적 군자 같은 얘기는 그만하라며 내치곤 한다. 그러는 사이 갈등과 모순이 쌓이고,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위선은 진보를 향한 보수 세력의 비판적 구호이기도 한데, 이를 단지 반대 진영의 비난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진보가 두 번째 발전 단계에서 무능하다는 보수의 비판을 딛고 일어섰듯이, 세 번째 단계의 진보는 위선이라는 비판을 뼈저리게 돌아보며 이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개개인의 내면 세계를 존재적 차원에서, 보편 가치의 차원에서 돌아보고 관리하는 힘을 기르는 일에 달려 있다. 이제 정치적 삶의 중심에 구도적인 수행을 놓는 진보가 필요한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진보가 이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국민의 신뢰 밖으로 밀려나며 급격히 힘을 잃을 것이다. 이 단계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조국 논란’을, 진보의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구도에서 냉철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나라가 잘되려면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가 양 날개로 서야 한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보수 세력의 안착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현 상황에서, 진보에 대한 희망마저 꺾일까 두렵다.

<황금중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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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2014년 9월부터 이달까지 돈을 주고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사람을 정보원 삼아 수십명의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5년 가까이 그의 보고서에 담긴 사람들은 과거 같은 학생운동조직에 있었던 교수·변호사·기자·노무사·영업사원·농민·시민단체 인사였다. 사찰 정황과 증거 물품도 함께 제시됐다. 사실로 밝혀지면, 민간인 사찰을 끊었다는 문재인 정부 국정원의 다짐과 약속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이다.

국정원에서 ‘김대표’로 불렸다는 정보원의 폭로는 구체적이다. 그는 언론에 “운동권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해 알려주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국정원 경기지부 공안2팀의 ‘사업’ 제안을 받고 응했다고 밝혔다. 매달 기본급 200만원, 보고서 작성 때나 시민단체에서 간부 승격 시 50만~300만원의 성과급까지 줬다고 했다. 녹음 장비가 숨겨진 가방을 국정원이 줬다며 직접 공개했고, 시민단체 활동가와 같이 살라고 얻어준 방엔 ‘몰래카메라’도 설치됐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민간인을 매수해 정보를 수집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국정원은 자발적 협조자를 증거수집에 활용한 것은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보원은 “국정원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할 일은 한다’고 독려했고, 그만두려 할 때마다 돈으로 회유했다”고 반박했다. 정보원이 검찰에 고발할 뜻을 비쳤으니 시시비비를 분명히 밝히고, 사실이라면 돌출행동인지, 어디까지 보고·지시가 이뤄졌는지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보기관의 ‘사찰 DNA’는 시민들의 불신이 깊다. 그 악몽이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부에서 튀어나온 충격은 더 말할 게 없다. 국정원도, 국회 정보위도 진상조사에 머뭇거림이 없어야 한다. 국정원이 2년 전 국내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했지만, ‘보안정보’를 명분 삼는 정보수집이 부활할 소지는 상존했다. 그 분기점이 될 국정원 개혁법안들은 2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다. 정보수집 활동에 대한 국회·사법 통제 장치 논의도 다시 고삐를 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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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다음달 2~3일 열기로 합의한 가운데 증인 채택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조 후보자의 모친과 부인, 자녀, 동생, 동생의 전부인 등 87명에 달하는 증인을 요구했다가 25명으로 압축했다. 거기에도 가족들은 그대로 포함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후보자의 가족을 증언대에 세우는 건 전례 없는 일이라며 맞서고 있다. 

조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사모펀드 약정, 웅동학원 채무변제, 딸의 대학·의학전문대학원 입학, 논문, 장학금 수령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문회는 바로 이런 의혹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다. 한국당이 28일 조 후보자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며 ‘청문회 보이콧’을 논의했다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그렇다면 이제 청문회에서 후보자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들을 포함해 도덕성과 직무수행능력을 차분히 검증하는 게 옳다. 그러지 않고 의혹 부풀리기, 망신과 모욕 주기, 인신공격과 흠집내기를 위한 ‘정치 청문회’가 돼서는 안된다. 한국당이 후보자의 어머니에 부인, 딸까지 청문회장에 부르겠다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치다. 당사자가 나와있는데, 그에 더해 가족까지 불러 무엇을 따지고 무슨 답을 듣겠다는 것인가. 이런 ‘일가족 청문회’는 세인들의 말초적 관심을 한껏 부풀려 조 후보자와 문재인 정권에 최대한 흠집을 내겠다는 정략적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청문회가 예정돼 있고, 검찰 수사가 막 시작된 상황에서 특별검사와 국정조사를 거론하는 것 역시 정략적이다. 지금 조 후보자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이 따갑다고 해서 야당의 무차별 정치공세까지 먹힐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국회 인사청문제도가 2000년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청문회가 열렸다. 여야는 정권교체 때마다 공수를 바꿔 야당은 ‘아니면 말고’식 폭로와 흠집 내기에 집중하고, 여당은 후보자를 무조건 비호하는 악습을 되풀이해오고 있다. 청문회가 본질을 벗어나 정치공방의 장으로 전락한 데 대한 비판은 계속 제기돼 왔지만, 항상 그때만 반짝할 뿐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시민이 적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엄정한 청문회를 진행하는 게 필요하다. 야당은 커다란 정치적 호재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지나치면 역풍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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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에 딸과 산책하러 나갔다. 날이 흐린 탓에 보름달인데도 영 밝지가 않아 입김이 서린 창 너머에 떠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달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고 싶었기에 무슨 표현을 고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산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솥에 든 찐빵 같다거나 야단맞고 나와 시무룩해 보인다는 식의 긴 묘사문들만 떠올랐다. 어쨌든 그럴듯한 비유를 찾아보려 애쓰는데 딸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였다. 아빠, 달이 녹았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혀끝에 맴돌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녹아 버렸다. 그래, 달이 녹았구나. 그보다 더 그럴듯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말이었다.

이토록 간명하고 순진하고 투명한 말을 잃어버린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금 아이들의 말에 놀라는 이유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 내가 보는 세상과 퍽 달라 보여서이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눈에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보다 더 비밀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 앞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말에는 비참한 세상을 실제로 더 아름다워지게 하는 힘이 있고 아이들의 말에도 그와 비슷한 힘이 있다. 아이들의 말은 시인의 말에 가장 가깝고 그건 곧 우리 모두 한때 시인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에 비하자면 정치인의 말은 얼마나 졸렬한가. 일본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 나경원, 황교안, 홍준표 같은 자들의 말을 듣고 읽으면서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막말이다. 거칠고 상스럽다. 그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테고 흐린 날 달을 가리키며 달이 녹았다고 말할 줄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이들의 언어에서 누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언어는 앙상하기 이를 데 없어 혐오의 감정 외에는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언어를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언어로 이 세계가 한결 더 거칠어지고 상스러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모든 막말이 막말인 것만은 아니다. 막말이라고 해서 다 거칠고 상스러운 건 아니다.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어느 시인이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다. 그이의 의원 사무실로 축하문과 축하 꽃다발 등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이질적인 문구가 새겨진 화분 하나도 섞여 있었다. 근조 누구누구 시인. 시인의 동료 시인들이 보낸 화분이었다. 장례식장에 보내는 조화나 다름이 없었으니 축하는커녕 조롱을 넘어 상당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화분이었다. 뒤늦게 화분을 발견한 보좌관이 당장 치우겠다고 하자 시인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놔두시게. 왜냐고 묻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걸 보면서 내가 죽었구나 하며 날마다 되새겨 보겠네. 나는 이 일화를 듣고 시인이 근조라는 막말에서 동료 시인들의 분노와 혐오만을 읽지는 않았음을 알았다. 국회의원 이전에 시인임을 잊지 말라는, 어차피 정치를 하기로 했다면 시인답게 하라는 다정한 질책으로도 받아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내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근조라는 단어 속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근조라는 말은 막말이면서도 막말이 아닌 셈이고 분노와 혐오를 담고 있지만 더 이상 분노와 혐오만은 아닌 셈이다. 그 단어는 진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을 듣고도 웃는 이유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욕설에 담겨 있는 진심을 헤아릴 수 있어서이다. 친한 친구들과 이따금 비속어를 나누는 사람은 친구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 말의 내부에도 있음을 안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비록 시는 아닐지라도 아직 시를 완전히 잃지는 않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기에 진짜 막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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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동>을 보면서 거슬리는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comfort woman.’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영어 표기다. CNN같은 뉴스 매체는 물론 집회를 알리는 영문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나 ‘일본군 성노예’의 영어식 표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왜 서구언론은 위안부 피해자를 ‘comfort woman’이라고 부를까. 결론부터 말하면 ‘위안부’ 연구에서 우리 학계가 일본에 완패했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은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불렀다. 그러나 학계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일본 학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반면 우리는 조용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등 일본학자들이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자료집> 등을 냈을 때 한국 역사학자들은 수수방관했다. 국내에서 관심을 가진 곳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같은 시민단체 정도였다. 일본이 연구를 선취하고 독점하면서 ‘위안부’는 사실상 공식 용어가 됐다. 한국 정부조차도 작은따옴표를 한 ‘위안부’ 명칭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 학계가 한 일은 ‘종군’을 ‘일본군’으로 바꾸고 피해자임을 강조한 게 전부였다.

몇년 전 일본문학 전공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하며 ‘위안부’ 전문가를 자처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내면서 역사가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책과 유튜브를 통해 “위안부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이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고 있는 이들은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징용, 독도 영유권 등에서 일본 우익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학계의 연구가 축적되고, 결과를 대중이 공유했더라면 뉴라이트의 일그러진 역사관은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달 2일 유엔 인권이사회 정기회의에서 발언하는 이우연 위원. 오른쪽 발표자 명단에는 후지키 슌이치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 웹사이트 캡처

어둡고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을 함께 기록하고 기억할 때 바른 역사가 된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항일투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일제가 어떻게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고 군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뿐 아니라 을사늑약·강제합병 같은 망국 역사에 대한 연구도 미진하다. 망국의 책임이 을사오적이나 이완용 등 몇 사람에게만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부는 매년 11월17일을 ‘순국선열의날’로 기리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의한 순국지사들을 생각하자는 뜻이지만, 기념일 명칭만으로는 망국의 단초를 연 사건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다. 어두운 역사를 회피하려는 무의식은 ‘국치일’에 대한 무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국권 침탈일을 기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은 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8월29일과 11월17일을 각각 국치기념일과 순국선열의날로 지정했다. 임시정부가 망국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순국선열의날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1997년 법정기념일로 승격됐다. 그러나 국치일 행사는 임시정부에서 끝났다. 해방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8월29일은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학자 크로체가 했다는 이 말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는 뜻도 있지만, 당대의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겼다. 조선시대 사관들이 썼던 <승정원일기>나 <왕조실록>은 당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백암 박은식이 망국의 전말을 기록한 <한국통사>와 독립투쟁을 담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황현의<매천야록>은 모두 직접 보고 듣고 취재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처럼 당대를 기록하는 전통은 해방 이후 사라졌다.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사>(37권)는 개항에서 끝난다. 이후 역사는 최소 50년 전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묵계가 생겨났다. 당대의 역사가 한국사에서 배제됐고, 현대사 교육은 금기시됐다.

역사가가 더 이상 오래된 과거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당대를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역사 쓰기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역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기억이나 집단적 전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른 역사는 역사가가 제대로 기록할 때 완성된다. 일본의 수출규제, 미·중 무역마찰 등으로 한국을 둘러싼 경제, 외교안보, 군사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시대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책무다. 현실을 외면한 채 상아탑에 갇혀 있으면 <반일 종족주의>와 같은 사이비 역사가 득세한다. 역사가가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황혼 녘에 나선다면 때는 너무 늦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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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소설 <이방인>에는 버스를 타고 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버스를 놓칠까봐 허겁지겁 뛰어갔다. 숨차게 올라탄 뒤끝에다 버스 배기통에서 나는 기름 냄새, 격한 진동, 도로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 그 모든 것들에 혼미해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버스를 타는 내내 졸았다. 깨고 보니 내가 한 군인의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군인은 겸연쩍게 웃으며 어디서 오는 길이냐 물었다. 대답하기 쑥스러워, 가볍게 얼버무렸다.”

지난여름 동안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작곡가이자 가수 김현성 형이랑 음반 녹음작업을 했다. 음반 제목은 ‘심야버스’. 내가 지은 시들에다가 형이 곡을 붙이고 노래를 하는 음반. 우린 20년도 넘은 오랜 인연이다. 우정의 결실 하나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가을에 출시하고 공연도 같이할 예정이다.

이 일로 여러 번 심야버스를 탔다. 서울과 산촌을 오가면서 나도 소설 속 이방인처럼 까무러쳐 졸고는 했다. 심야버스는 늦게까지 수고한 분들이 주 고객이다.

퀘이커 신자들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가면 워너메이커의 동상이 있다. 체신부 장관까지 지낸 워너메이커는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 그는 우리나라 종로 YMCA를 지어주기도 했다. 입만 열면 4가지를 강조했는데, ‘집중해서 생각하라. 서둘러 실행에 옮겨라. 배나 노력하라. 사람이 아닌 신을 섬겨라.’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백화점을 열고 버스도 구입했다. 사람들은 승용차 대신 백화점 버스에 다투어 탔다. 이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유층이었다지.

오늘날 버스, 특히 심야버스는 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가진 게 없고 배운 거 적어도 서로를 믿고 정직하게 사는 이들. 비슷한 거주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향한다. 몰래 한몫 잡아 꿍친 돈도 없다. 자녀들은 집 가까운 동네 학교에 그냥 다닌다. 이웃집 애가 늦으면 같이 발을 동동 구른다. 버스 객석에서, 고단한 머리들 어깨에 나누며 숨소리와 땀내음을 같이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걸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심야버스에 졸던 학생들이 끝으로 내리면 달님도 눈을 감고 잠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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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안 어른이 문제가 생겨 급하게 모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게 됐다. 증상이 심각해 응급병동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됐는데, 이 병동 규칙이 ‘보호자 1명 24시간 상주’였다. 어른의 반려자도 몸이 불편해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행인 것은 노부부에겐 3명의 아들딸이 있었다. 한 명이 반려자를 24시간 돌보고, 나머지 자녀 부부가 번갈아가며 병 수발을 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앞으로 한국의 노인들은 아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병에 따른 고통에 자식 없는 설움까지 더해질 듯싶었다.

합계출산율 0.98명. 통계청이 28일 내놓은 2018년 출생통계 확정치다. 15~49세 여성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출생아 수가 한 명도 안되는 것이다. 올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1명까지 떨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2022년 출생아 수는 20만명대로 주저앉고, 2029년 경제성장률은 0%대에 진입하며, 생산가능인구는 2047년에 현재(3680만명)보다 1000만명이 감소한다고 한다.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다. 늘어나는 노인의 부양부담은 확 줄어들 청년세대가 짊어질 것이 뻔하다.

정부는 최근 10여년간 저출산 극복 대책에 150여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저출산 해소와 직접 연관성이 없는 곳에 쓰였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앞다퉈 수백만~수천만원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했지만 인구 유지에 필요한 출산율(2.1명)을 기록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안이한 대응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빠른 기술의 진보로 미래사회에는 그렇게 많은 인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고 아파서 찾은 병원에서 자녀 대신 ‘로봇 간병인’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을까. 국민의 85%는 출산 대책으로 ‘출산과 양육 지원’을 주문하고 있다.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육아·직장·노동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결혼하고 싶은, 아이 낳아도 힘들지 않게 키울 수 있는 사회’가 저출산 극복의 길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출산·육아는 물론 교육·고용·주거·복지, 양성평등을 아우르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출산율 0점대의 미래는 우리 모두의 미래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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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가소성이다. 가소성이란 신경계의 모양과 활동 특성이 경험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성질을 말한다. 신경세포는 모양도 변하고,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과 연결 세기도 변한다. 신경세포가 분비하는 물질의 종류도 변하고, 신경세포에서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도 변하며, 신경세포의 활동성도 달라진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신경세포가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유전자 발현 양상도 변한다. 신경계에서는 도대체 변하지 않는 게 있기는 할까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변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더욱이 이런 변화가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신경세포들이 인접하여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인 시냅스의 모양은 초 단위로도 변할 수 있다. 시냅스의 모양이 변하면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세기가 변하므로, 신경계의 반응 양상도 달라진다. 시냅스의 세기 변화는 학습과 기억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다. 신경계는 성인이 된 후에는 변하지 않는 태엽 기계라기보다는 구석구석 변해가는 시스템이다.

■ 변수의 개수와 최적화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신경계가 적응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신경계를 최적화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떤 방에 히터만 있다면, 이 방에서는 실내 온도만 조절할 수 있고, 조절 방법도 단순할 것이다. 반면 방에 창문과 커튼, 에어컨, 선풍기, 양초, 히터, 공기청정기,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가 여러 개 있다면, 산소 농도와 온도, 습도, 바람의 세기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장치의 효과가 상호작용하므로 조절 방법도 복잡다양할 것이다. 예컨대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 양초, 에어컨, 창문이 모두 습도를 바꾸고, 양초와 에어컨, 창문은 실내 온도에도 영향을 주므로 목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려면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처럼 조절하는 방법이 다양하면 최적화가 어렵다. 어찌어찌 목표 습도를 맞췄다고 하더라도 가습기와 제습기를 동시에 틀어두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낮에는 선풍기를 틀어야 목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저녁에는 추워질 수도 있다. 신경계에서 최적화의 실패는 각종 질병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이 사건과 조금만 관련된 자극을 접해도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병을 말한다. 이 병도 신경 가소성과 관련이 깊다. 모든 기억은 신경계의 변화를 동반하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지나치게 강하게 기억되고, 비슷하지만 다른 기억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신경계가 변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고, 잊어버려도 큰 문제가 없는 일들은 잊어버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병에 걸리지도 않으면서 살아간다. 뇌 속에 수백 가지의 신경세포가 있고, 이 신경세포들이 각각 모양, 유전자 발현, 연결 세기 등을 바꿀 수 있음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 제약 조건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모든 방향으로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감각회로는 제한된 에너지와 노이즈라는 제약하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도록 동작한다는 이론이 제기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또 신경계는 항상성을 지켜야 한다. 개에게 A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고, B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개는 A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꼬리를 흔들고, B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시큰둥해하면서 두 종소리에 다르게 반응한다. 신경세포도 비슷한 일을 한다. 어느 신경세포 X가 두 개의 신경세포 A와 B로부터 정보를 받는데, 신경세포 A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더 중요하다면 신경세포 A와의 연결이 B와의 연결보다 강해야 한다. 이제 신경세포 A와 X 사이의 연결 세기와 신경세포 B와 X 사이의 연결 세기가 둘 다 3으로 같았지만, 낮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신경세포 A와의 연결 세기가 5로 증가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러면 신경세포 A로부터의 입력이 더 중요해지기는 하지만 연결 세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총 비용이 증가한다. 그래서 A-X 사이의 연결 세기를 4로, B-X 사이의 연결 세기를 2로 줄여서 총 유지 비용은 크게 늘리지 않되, 연결 세기들 간의 차이는 유지하는 과정이 밤에 자는 동안에 일어난다. 이것이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들은 더 잘 기억되고, 어떤 일들은 더 잊혀지는 이유라고 한다.

또한 변하는 환경에 날쌔게 적응하면서 생존에 유용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경세포의 활동량은 강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낮추고, 약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높여 주변 환경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한다. 밝은 곳에 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담쟁이 덩굴이 자라는 돌담처럼

돌담은 담쟁이 덩굴이 벽 안쪽으로 자랄 수 없게 제약한다. 하지만 돌담 덕분에 담쟁이 덩굴이 위로 뻗어갈 수 있다. 지구 환경이 주는 제약 조건도, 생명체라는 제약도 다채로운 가소성을 가진 신경계에는 돌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공지능 컴퓨터에는 아직 생명체가 경험하는 제약에 비견될 만한 제약이 없다. 전기료와 데이터(감각정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를 사람이 제공하니까. 어쩌면 인공지능의 새로운 지평은 로봇 신체라는 제약이 생긴 이후부터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딥러닝 덕분에 ‘인간만의’ 정신 능력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듯, 그 무렵이면 신체에 대한 우리 생각도 바뀌게 될까.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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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진 8월이었다.

광복절 전후로는 <김복동>과 <주전장>을 봤다. <김복동>도 시의적절한 영화였지만, 둘 중 하나만 봐야 한다면 <주전장>을 추천하고 싶다. 

<주전장>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우세력의 주장을 비친 뒤 곧장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수족이 구속되거나 철창 안에 갇혀있지 않았는데 무슨 강제동원된 ‘성노예’냐고 비웃는 극우 인사의 발언 뒤로, 여성들의 자유의지가 침해된 여러 정황들과 ‘노예’라는 언어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법학자의 발언이 뒤따르는 식이다.

방대한 정보와 치고받는 대화(처럼 편집된 각자의 인터뷰)의 끝에 다다른 영화의 결론은, 세계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일본의 우익 세력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방안이며,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굳이 과장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하면 오히려 해가 된다. 위안부가 20만명에 달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큰 숫자일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용한 세력이 있었고, 이는 상대에게 숫자가 허위이므로 위안부 강제동원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빌미를 줬다. 상호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 '주전장' 포스터. 사진제공 시네마달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것도, 직접 영어 내레이션으로 작품을 진행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안’을 몸소 실천하기 위함일지 모른다. <주전장>을 거세게 공격하는 ‘일본회의’는 전략의 효과를 방증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최근 일주일은 EBS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 상영작들에 빠져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자면, 평소 관심사와 닿아있는 <푸시-누가 집값을 올리는가>이다(이번주 토요일까지 ‘디박스(eidf.co.kr/dbox)’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유엔 특별조사위원 레일라니 파르하와 함께 세계를 누비는 카메라는 ‘조물주 위 건물주’가 한국만의 현실은 아님을 드러낸다. 토론토의 미친 집값과 노팅힐의 젠트리피케이션. 동네를 돌아야 할 돈을 해외로 빼내고, ‘우연한 만남’이라는 도시의 즐거움을 빼앗으며 획일적 공간을 양산하는 투기 세력들. 심지어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마저도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국제사모펀드에 잠식됐다. 

이 지점에서 갑자기 한국이 툭 튀어나온다. 악명 높은 사모펀드의 자금 출처 중 하나가 한국의 국민연금이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은퇴 후 복지를 위해 돈을 불린다는 명목으로 연기금을 투자하지만, 그 투자처는 국민들이 은퇴 뒤 살아갈 터전을 박살낸다는 아이러니. 심지어 한국에는 ‘강제퇴거’라는 박살 방식까지 자행된다. 용역들이 누워있던 아내의 배를 찼다는 남편의 증언은 공분하게 만든다. 레일라니는 유엔을 대표해 강제퇴거는 중대한 인권 범죄이므로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래도 영화는 한 줄기 희망을 비춘다. 지방정부 간의 연대와 여성 연대다. 세계 도시의 시장과 부시장들은 모여 노하우를 공유하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사무보조로 고용된 줄리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여성들, 특히 워킹맘들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레이라니는 웃으며 줄리를 사진에 담는다. 여러모로 하고자 하는 말이 많은 다큐멘터리다. 딱 내 취향이야.

문득 생각했다. 올해 유독 다큐멘터리 풍년인가? 그럴 리 없다. 좋은 다큐멘터리들은 언제나 있었고 변한 건 나다. ‘다큐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깬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더욱 진실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감동,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감독과의 내적 토론의 즐거움을. 요즘 다큐멘터리는 미적 성취도 대단하여 시각적 쾌감까지 얻을 수 있다.

관심만 기울인다면 다양성 영화를 접할 기회는 많다. 그것도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시민단체나 지역공동체가 기획하는 상영회는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함께 준비하기도 한다. 나는 같이 보고 함께 얘기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홀로 삭이던 문제도 함께 고민함으로써 해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볼 게 없다”는 말이 맴돈다면 이런 기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더 풍요롭고 튼튼한 문화 생태계를 지닌 한국을 기대한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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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가 나던 해 세밑/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4·19 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완성되지 못했고, 이 땅의 민주주의는 긴 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정점을 이룬 민주화 운동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첫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다. 그 결실들은 정권교체의 뿌리가 됐다. 1980년대 대학생에게는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들이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때 경제는 호황이었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낙관적 경기 전망이 대세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당시 30대를 사람들을 ‘386세대’라 불렀다. 지금은 50대가 됐고, 간단히 86세대라고 한다.

-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들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힘입어 사회 주도세력이 됐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도덕성을 강조한 86세대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진보적 이념을 가진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지칭하는 ‘강남좌파’이면서 촌철살인의 비평과 현실참여로 젊은이들의 멘토가 되기도 했다. 그가 했던 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는 “20대 청년 조국은 부족하고 미흡했다”며 “그러나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아픔과 같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법과 제도 개혁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도 했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소명을 다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양극화로 인한 빈부격차는 점점 커졌다. 괜찮은 일자리는 줄어들어 취업은 힘들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비정규직에게 맡겨졌고 그들의 월급은 정규직에 훨씬 못 미친다. 계층 이동 사다리였던 교육은 이제 계급을 공고히 해주는 성벽이 됐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되면서 부동산과 교육에 탐닉했다. 정의와 평등, 공정을 얘기하던 그들은 대화에서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기득권이 된 그들은 돈과 인맥과 정보로 그들만의 ‘스카이 캐슬’을 만들었다. 2주 인턴 후 제1저자가 된 단국대 논문의 지도교수는 “유학에 도움을 주려 했다”고 밝혔다. 저조한 성적에도 6학기 동안 장학금을 받은 이유는 “면학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기득권을 통한 기회의 대물림이다.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민주화 상징 세대는 이제 아재를 넘어 꼰대가 되었다. 편하게들 의견 좀 내보지라고 말문을 열곤 제멋대로 결론을 내버리는 사장, 무슨 일이든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부터 하는 부서장, 능력은 떨어지면서 평가받을 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노래하는 직장 선배가 바로 예전의 그들이다. ‘민주적’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고 싶어 하지만 실상은 교조적인 풍모를 감추지 못한다(김정훈·심나리·김향기 <386세대 유감>).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86세대에게 현재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불평등의 세대> 저자인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책에서 질 좋은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을 받는 386세대가 공정하고 평등한 분배구조의 실천이라는 사회적 기대를 저버렸다고, 그래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지난 주말 청년들은 분노로 촛불을 들었다. 여론조사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평가가 최근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선’ 광경을 목도하면 ‘고개를 떨구는’ 게 당연하다. 조 후보자를 포장했던 ‘공정과 정의’가 되레 의혹의 출발점이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조국만 문제냐’ ‘불법은 아니다’ ‘절차상 문제없다’는 물론 심지어 ‘보편적 기회’를 잡지 못한 흙수저들을 책망하는 언동조차 서슴지 않았다. 제발 부끄러움만이라도 느껴야 한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의 궤도를 한참 벗어나고 있다. 능력은 있는가. 지난 2분기 소득 상위·하위 20% 간 가처분소득 격차는 역대 최대로 벌어졌다. 노동자는 여전히 일하다 죽고, 청년은 일자리가 없다. 부동산값은 대형 규제책에도 숨만 죽이고 언제 다시 천정부지로 뛸지 가늠할 수 없다. 촛불의 염원은 점점 늪으로 빠지고 있다. 

(※조국 논란을 보며 김광규 시인이 1979년 발표한 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칼럼의 내용은 시인의 생각과 무관하다.)

<박재현 사회에디터 겸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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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 있는 중학교에 강연하러 갔을 때, 교장 선생님의 첫 마디는 “우리 학교 아이들 대개가 집안 형편이 안 좋습니다”였다. 사실 학교에 강연하러 가면 통과 의례처럼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가정형편이 어떠한지 말해준다. 친절한 사람은 학부모의 직업군과 거주 형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얼마나 되는지까지 알려준다. 그러니 강연할 때 고려하라는 것인데, 고작 두 시간 남짓 책 얘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부분을 고려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면 그들은 반드시 보충 설명을 한다. “그러해서 아이들 강연 듣는 태도가 썩 좋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들이 경제 수준으로 아이들을 단박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늘 씁쓸했다.

하여간 서울 변두리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친절한 부류여서 주변 아파트 시세까지 말하면서 덧붙였다. 버스 정류장으로 치면 대여섯 정류장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옆 동네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그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굳이 알려준 뒤 당부했다. “우리 아이들 잘 부탁합니다.” 어른들이 잘 부탁할 필요 없이 아이들은 강연 내내 집중했고, 똘똘하게 질문도 잘했다. 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해줄 때 맨 먼저 달려온 여학생은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인데, 수학을 잘 못해요. 다 틀렸죠.”

그는 수포자는 이생망이라고 했다. 이번 생은 망쳤다고 하는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고작 열세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현재가 초래할 미래를 뻔히 알고 있다. 수학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경제력이 뒷받침되고 정보력을 갖춘 부모가 없다면 꿈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노력의 기회조차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 수준이 미래를 규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체념을 배웠다.

아마도 아이들은 원칙을 지키지 않고 편법을 쓰면서라도 명문대학교에 자식을 보내려고 아등바등한 이를 보면서 또 자조 섞인 말을 할 것이다. 저렇게 할 수 없다면 이번 생은 망한 거구나. 개혁을 말하는 이는 불행히도 우리 사회의 성공과 행복의 경계를 명확히 보여주면서 과연 뭘 개혁하는 것인가 되묻게 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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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햇빛의 도움을 받아 태양광발전에 참여하는 시민을 에너지농부라 부른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2013년 조합원 99명으로 시작한 태양과바람에너지협동조합이 이젠 조합원 400명을 바라본다. 조합원들이 십시일반 출자금을 모아 태양광발전소 5기를 설치해 운영 중이고, 올해 안에 3기의 발전소를 추가 건설할 예정이다. 발전소 용량은 큰 것은 100㎾ 수준이며, 작은 것은 50㎾ 안팎이니 5기를 합쳐야 330㎾ 규모이고, 3기를 추가해도 580㎾ 정도이지만 조합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생태계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햇빛의 도움을 받아 에너지농사를 짓고 있고, 이러한 움직임이 모여 서울을 태양의 도시로 만들고, 나아가 에너지 전환에 힘을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운영하는 에너지협동조합이 10여곳 있다. 전국적으로는 시민참여형 협동조합이 30곳에 이른다. 2011년 3월11일, 일본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그 피해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끔찍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보다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시작한 것이 에너지협동조합이고, 태양광발전이다. 비단 핵발전소로부터 나오는 방사능의 위험만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위협과 심각한 미세먼지를 보면서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서울시가 ‘태양의 도시 서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태양광발전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는 대한민국 에너지 소비량의 10% 가까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전력의 95%를 다른 지역에서부터 끌어오고 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전력은 대부분 석탄화력발전소와 원자력(핵)발전소로부터 생산된다. 발전소 주변 지역과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 주민들의 희생을 수반한다. 서울에서 전력 자립률을 조금이라도 높인다면 다른 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태양광인가? 재생 가능 에너지 중 한국에 가장 어울리는 에너지원이 태양광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조량은 미국에 비해서는 낮은 수준이지만, 태양광발전의 선두주자인 독일과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다. 또한 시민들 누구나 참여해 손쉽게 발전소를 설치하고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을 정쟁화하는 일부 언론과 집단에서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태양광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전자파 피해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화재 위험도 태양광발전과는 직접 연관성이 없다. 산림 훼손 등 일부 지역에서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지만, 산지태양광에 대한 가중치를 낮추고 기준을 강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태양광에 문제가 있다면, 독일이나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유럽 선진국들이 어떻게 태양광으로 전체 전력의 수십%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있다. 조금 더 비용을 내더라도 안전하고 건강한 세상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방사능 공포를 감당하면서 지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고, 그 결과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최승국 | 태양과바람에너지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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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가 식인 풍습을 지닌 거인 괴물에게 포로로 잡혔다. 꼼짝없이 잡아먹힐 판이다.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괴물이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물었다. 오디세우스는 본래 이름 대신 우데이스라 답했다. 우데이스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괴물이 술에 취해 잠자는 사이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군 거대한 나무 꼬챙이로 괴물의 눈을 찔렀다. 도움을 청하려고 괴물이 소리 질렀다. “우데이스가 나를 찔렀다.” 하지만 다른 괴물은 긴박한 외침을 “아무도 나를 찌르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오디세우스가 나를 찔렀다”는 SOS 신호로 들리지만 “아무도 나를 찌르지 않았다”는 그저 술주정 같다. 오디세우스는 꾀를 써서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

국립인 어떤 기관의 전시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전시물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앞으로 갔다가도 타인을 배려해 곧 뒤로 물러났고 감상을 나눌 때도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곤댔다. 매우 인기 있는 전시여서 관람객이 많았지만 번잡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의 있는 공간이었다. 단 한 명의 사람에 의해 밀도는 높았음에도 고요하기만 했던 그 아름다운 모순된 상황이 끝났다. 그 사람은 뒤에 관람객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진열장 앞을 한참 동안 점령했고 사진을 찍는다며 위아래 좌우로 종횡무진 오갔다. 그 사람이 다음 전시물로 건너가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관람의 평화를 회복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노라면 역주행하여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전시했다. 모든 움직임엔 “나는 이래도 괜찮아”라는 가상의 말풍선이 따라다니는 듯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적 공간에서 성인이라면 누구나 지키는 상호작용의 기본원리는 그 사람과 무관했다. 그 사람은 공간을 거리낌 없이 넓게 썼고 한 번도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인 듯 큰 목소리로 게다가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사람을 피했다. 냄새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피하는 사람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당신이 왜 피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마지막 전시장에서 그 사람에게 관람 예절을 지켜달라는 당부이자 경고를 전해달라고 스태프에게 부탁하며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물었더니, VIP라고 답했다.

VIP는 이름이 아니다. 직함도 아니다. VIP는 이름과 직함을 숨길 필요가 있을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름과 직함을 숨겨야 마땅한 경우가 있다. 중요한 공적 인물의 경우 공공장소에 등장할 때 이름과 직함이 숨겨져야 안전할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을 경호상의 이유로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VIP라 부를 때가 있다. 자신을 우데이스로 부르게 했던 오디세우스의 행동을 긍정으로 평가하면 오디세우스는 꾀돌이지만 부정으로 평가하면 그는 술수 내지는 수작을 부렸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을 VIP라 부르는 것은 호칭으로 은폐와 엄폐를 수행해 신변보호를 하려는 일종의 꾀다.

의전 혹은 경호를 위한 꾀부리기 호칭으로 시작된 VIP가 맥락을 상실한 채 남발되기 시작하면 술수 내지는 수작으로 바뀐다. 백화점에서 일정한 기준 이상의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을 VIP라 부른다. 소비의 크기로 사람을 분류하고 특정한 사람에게 특권을 주는 백화점의 처사에 시니컬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지만 백화점의 사람 분류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비록 더 많은 물건을 팔려는 술수로 VIP라는 호칭을 남발해도, 백화점은 사기업이 운영하는 영업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적 공간이라면, 국립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공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왕립, 즉 로열에는 특권과 시혜의 의미가 들어가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민주공화국인 한국에 왕립 기관은 없다. 한국에서 로열은 한 호텔(로얄)의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국립은 다르다. 국립의 기반이 되는 민족 혹은 국민은 어떤 차별도 용납할 수 없는 수평의 개념이다.

VIP는 본래 매우 중요한 사람, 즉 Very Important Person의 약식 호칭이다. 냄새가 나지 않음에도 모두가 피했던 그 사람, 스스로 VIP라 생각하는 사람은 국립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람(very ignorant person)이자 공적 공간에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very impossible person)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적어도 국립 기관 안에선 우리 모두가 중요한 사람이다. 공공 공간에서 자신만의 권력과 특권을 전시했던 그 사람은 자신을 VIP라는 호칭도 모자란 VIP 중의 VIP, 즉 VVIP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VVIP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사람의 행동은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우 VIIP스러웠다. VIIP는 그 사람에게 적합한 아주 특별한 호칭인데, 매우 무식하고 구제불능인 사람(very ignorant and impossible person)이라는 뜻이다. VIIP를 한국어로 실감나게 옮기면 진상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진상을 만났다.

<노명우 |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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