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고 다 똑같은가? 예를 들어,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한국인들’을 싸잡아 조롱하면 은근히 짜증 나지 않을까? 나도 한국인이지만, 나는 그를 원하지 않았단 말이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너무나 다양하다. 인종, 국적, 계급, 연령, 출신 지역, 이념, 취향 등등. 그중 한두 가지만을 가지고 누군가를 쉽게 분류하고 판단하는 거, 당해보면 불쾌하다. 6개월간 유럽에 체류했을 때 다른 국적 청년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느꼈다. 말을 나누기 전에 한국인은 이럴 것이라고, 혹은 ‘20대 동양인 여성’은 이런 사람이라고 미리 정해놓은 태도로 대하며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런 녀석들과는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일본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당해서 기분 나쁜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자는 모토를 지닌 이로서, ‘일본인’을 모두 싸잡아 혐오하고 배척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모두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것은 아니듯, 일본인 모두가 아베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실제로 일본의 경제 보복 이후 일본의 교수, 변호사, 언론인 등이 모여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지배한 역사를 거론하며 “한국과 대립하더라도 특별하고 신중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당부하는 성명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결론은 “아베 총리는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의 사이를 갈라놓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며 독립투사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던 하토야마 전 총리 또한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거듭 “우애정신”을 강조했다.

이 밖에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세계를 견지해온 일본의 예술인들, 제국주의 폭력성과 닿아있는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일본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이번 경제제재로 인한 부담을 떠맡게 될 일본의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우리와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하고, 손잡을 수 있는 이들. 이런 일본인들과의 민간 교류는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베 정부에 저항하는 일본 내 세력에 힘을 실어주며 일본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려되는 현상이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버젓이 ‘미개한 섬숭이’, ‘쪽바리’와 같은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이 전시되는 일이다. 일본인 여행객을 쫓아낸 숙박 업체와 식당의 사례도 들려온다. 한국에 호감 갖고 놀러 왔던 일본인들이, 없던 원한이 생겨 돌아가는 게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양국민이 서로를 적대하는 일은 오히려 지금의 일본 정권이 바라는 일 아닐까.

일부 국내 언론 역시 ‘창조 논란’으로 혐일을 부추긴다.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을 이용한 트래픽 장사로 보인다.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일본 영화 7편 상영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자가 만들어내고 싶은 논란 아니었는지? 기자는 “날로 확산하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일본 작품의) 상영을 아예 취소하거나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금 같은 분위기에 항일투쟁의 본고장으로 의병의 도시인 제천에서 일본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썼지만 목소리가 얼마나 높은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고, 논리도 억지스럽다. 내용은 살피지 않고 특정 국적이라는 사실만으로 문화 교류의 장인 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취소를 주장하다니, 문화적 퇴행이다.

성숙하고 자발적인 불매운동?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인 전체를 혐오하고 민간 교류까지 위축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한국인들의 평가 역시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어쨌거나 그가 존경받을 만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말했다. “외교 하는 국민이 되십시오.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서 외교가 생명입니다. (…) 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벗들이 많이 생기도록 전 국민이 외교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는 민족주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세계주의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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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물리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두 개의 독립적인 변수로 다룬다. 속력은 장소의 차이에서 시간을 나누어서 계산된다. 하지만 마음에서도 시간과 장소가 별개로 다뤄질까? 모든 경험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던 장소, 출근길 버스를 타는 정류장처럼 내가 방문하기 전까지 정보에 불과했던 장소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경험한 뒤에야 의미있는 공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기억 속의 장소는 나의 경험 및 그 경험이 일어난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 장소와 기억

뇌 속에서 장소와 기억과 관련된 부위는 해마이다. 해마는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다’처럼 말로 할 수 있는 지식, 혹은 ‘점심으로 생선구이를 먹었다’처럼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양쪽 해마가 손상되면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한다. 수술로 양쪽 해마의 대부분을 잃게 된 H M이라는 환자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던 사람이 한동안 방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이 사람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 인사하던 순간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해마는 공간에 대한 기억과 탐색에도 관여한다. 어떤 상자에 쥐를 넣어두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해마 안에서는 쥐가 특정한 위치를 지날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신경세포 X는 쥐가 장소 A를 지날 때 활성화되고, 신경세포 Y는 쥐가 장소 B를 지날 때, 신경세포 Z는 쥐가 장소 C를 지날 때 활성화되는 식이다. 쥐가 장소 C, A, B 순으로 이동하면, 신경세포 Z, X, Y가 순차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인 위치와 신경세포의 활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신경세포들을 ‘장소 세포’라고 부른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장소 세포들의 활동과 무척 달라 보인다. 해마는 어떻게 이처럼 달라 보이는 두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걸까?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번째 가설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가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위치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가설은 기억에 얽힌 정보는 대뇌 피질 등 다른 곳에 저장되어 있고, 장소 세포는 이 정보들의 색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장소 X에 대한 대뇌 피질의 활동이 장소 세포 A와 연결되어 있고, 먹이에 대한 대뇌 피질의 활동이 장소 세포 B와 연결된 경우를 생각해보자. 장소 X에서 먹이를 먹었던 쥐의 해마에서 신경세포 A와 B의 연결이 강화되면, 장소 세포 A만 활성화시켜도 장소 세포 B를 덩달아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쥐는 장소 X에 가기만 해도 먹이를 기대하게 된다. 

이 두 가설은 상충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첫번째 가설에서는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장소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쥐를 상자에 넣었는데 장소 세포 X가 첫날에는 상자 안의 장소 A에서 활성화되다가, 둘째 날에는 장소 B에서 활성화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두번째 가설에서는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장소가 아닌 대뇌 피질과 연결되므로 이런 변화가 있어도 괜찮다. 

■ 기억의 색인

작년 이맘때 출간된 한 연구에선 급속초기발현 유전자의 활동을 사용해 두 가설을 비교했다. 뇌가 아닌 기계라면, 기계의 작동 자체가 기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지는 않는다. 어제 내가 자동차를 운전한 방식이 오늘 자동차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뇌는 다르다. 변하는 환경과 몸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학습하려면, 이번의 활동이 어떻게든 다음 활동에 영향을 줘야 한다. 이렇게 영향을 주는 대표적인 방법이 유전자 발현이다.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는 세포 활동이 유난히 활발할 때 즉시 발현되는 유전자들을 말한다. 이 유전자들은 신경세포의 활동과 학습과 관련된 단백질들의 발현을 조절해 신경세포의 지금 활동이 다음 활동을 바꾸게 한다. 따라서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해마 장소 세포들은 이 유전자들이 발현될 때 일어난 사건의 기억과 관련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쥐를 상자 A에 넣어서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장소 세포와 그렇지 않은 장소 세포들을 찾고 이 세포들이 쥐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활성화되는지 관찰했다. 다음날 쥐를 같은 상자에 넣어 장소 세포들이 나타내는 위치가 변했는지 살펴보았다. 실험 결과,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장소 세포들은 상자에 들어간 첫날과 둘째 날 각기 다른 위치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결과는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공간적인 위치가 아닌 기억의 색인을 저장한다는 두번째 가설을 지지한다. 

또 연구자들은 쥐를 새로운 상자 B에 넣어서 장소 세포들의 활동을 관찰했다. 상자 A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했던 장소 세포들의 활동은 새로운 상자 B에서 활동이 억제되었다. 반면, 상자 A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하지 않았던 장소 세포들의 활동은 새로운 상자 B에서 달라졌다.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쥐가 상자 B 안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탐색을 시작하기 전에, 쥐가 새로운 상자에 들어서자마자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장소 세포들의 활동이 공간적인 위치가 아닌 기억의 맥락(이 경우 상자)과 얽혀 있는 셈이므로 이 결과도 두번째 가설에 가깝다. 

■ 경험으로 연결된 장소와 시간

과학은 과학자 집단이 증거를 겨루는 활동이므로, 앞서 설명한 하나의 연구만으로 어떤 가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더 많은 후속 연구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기억과 공간이 해마라는 하나의 부위에서 처리된다는 사실을 둘러싼 두 가설은 특정 순간의 기억이 공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뇌 속에서 장소는 경험을 통해 시간과 얽혀드는 셈이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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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라는 지명을 처음 인식하게 된 건 미군기지와 관련해서였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도 그에 못지않았던 터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먼 나라였다. 지도를 보면 오키나와가 일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본 열도의 남쪽 끄트머리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으니까. 오키나와에 정말 관심을 갖게 된 건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그제야 오키나와의 역사를 다룬 글을 찾아 읽으며 오키나와를 알아갔다. 

메도루마 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몇몇 단편만 두고 말하자면 낯익고도 낯설어 뭐라 표현하기 쉽지 않은 묘한 특색이 있다. 인물의 한쪽 다리가 퉁퉁 붓더니 엄지발가락에서 물이 나오게 되고 밤마다 귀신들이 나타나 그 물을 받아먹는다거나 넋이 나간 사람의 입속에 소라게가 들어가 있다는 식의 설정은 분명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환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메도루마 슌의 소설에 도입된 이러한 환상성은 최근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환상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외려 러시아의 고골과 같은 옛 작가들이 환상성을 다루었던 방식을 떠올리게 할 만큼 순진하고 단순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환상적이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어떤 실제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비로소 환상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 라고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이의 소설에서 소설가의 곤혹을 느꼈다. 비참한 역사를 마주한 소설가가 선택할 수밖에 없고 선택해야만 했던 환상성이 환상으로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도록 고뇌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인물을 내세워 그 인물의 내면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통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 보여줄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이의 용기 덕분에 일본 내부의 식민지라는 오키나와의 정체성이 다른 어떤 문학에서보다 더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일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일본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던 아무로 나미에의 용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소설가의 용기였다. 그들의 용기가 귀중한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행보와 관련해서 일본 상품을 불매하는 운동이 한창이다. 이 운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의 헌법 9조를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바꾸려 하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적 움직임을 거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혐오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일본의 양심들이 오래전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막으려 했던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 헌법이 개정되었을 때 악몽이 다시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고 느끼게 될 이들은 아마도 오키나와 사람들일 테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 가운데 하나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상상할 줄 아는 용기일 것이다. 우리가 이명박·박근혜 시절을 살면서 느껴야 했던 비참함을 지금 그들도 느끼고 있다. 아베를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그들은 지금 고통받고 있다. 우리는 그이들을 환대해야 하고 그이들을 격려해야 하며 그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일본은 가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오키나와라면 괜찮지 않을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삶과 현실 그 자체로 전쟁을 느낄 수밖에 없는, 평화헌법이 개정되는 순간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그이들이라면 손을 내미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그곳은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니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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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끝났다. 수영, 특히 경영은 고독과 싸우고, 질식의 두려움과 싸우는 종목이다. 온몸을 물속에 집어넣은 채 0.01초의 차이를 다툰다. 하루 1만m씩의 훈련이 이어진다. 여러 시간을 헤엄치는 동안 물속에 고개를 박아두는 시간이 많다. 고개를 들면 공기와 물의 저항이 만나 몸을 뒤로 끌어낸다. 고개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공기 없음의, 질식의 공포가 다가온다. 죽을 둥 살 둥 앞으로 헤엄쳐 나아가야 하는 종목이다.

유스라 마르디니(21)는 수영 코치인 아버지를 따라 3살 때부터 수영을 배웠다. 시리아 국가대표를 목표로 수영 실력을 키웠다. 13살이던 2011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시리아 내전이 시작됐다. 전쟁은 일상을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무참하게 바꿔놓았다. 이듬해 내전은 격화됐다. 다라야 학살 때 마르디니의 집도 무너졌다. 하루는 수영장 지붕에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수영 동료 2명이 세상을 떠났다. 2015년 8월, 마르디니는 결심했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마르디니는 언니와 숙부 둘과 함께 시리아를 떠났다. 지독한 탈출 여정이 이어졌다. 다마스쿠스를 떠나 레바논의 베이루트, 터키 이스탄불을 거쳤다. 밀수꾼들과 함께 움직였고, 난민들의 숫자는 그때그때 달라졌다. 터키에서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넘어갈 때였다. 6명 정원의 통통배에 마르디니와 언니를 포함해 20명이 올라탔다. 한밤 중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 난 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면 모두가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영선수였던 마르디니와 언니, 수영을 할 줄 아는 또 다른 남자 둘이 물로 뛰어들어 배를 밀었다. 남자 둘은 중간에 포기했지만 언니와 마르디니 둘이 3시간 반을 버텨 여러 생명을 구했다. 마르디니는 “배 위의 6살 꼬마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내내 웃으면서 배를 밀었다”고 했다.

마르디니는 천신만고 끝에 독일에 도착했다. 난민촌에 도착한 뒤 “수영을 하고 싶다”고 전했고, 테스트를 거쳐 독일의 도움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때 마르디니는 ‘난민팀’ 소속으로 레이스를 펼쳤다. 올림픽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마르디니는 이번 광주 대회에도 참가했다. 이번에는 난민팀이 아니라 국제수영연맹 독립 선수(IFA) 소속이었다. 마르디니는 지난 26일 기자회견에서 “시리아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 슬프다. 수영 경기를 앞두고는 일부러 뉴스를 보지 않는다”면서 “둘 모두 하는 것은 어렵지만, 수영도 열심히 하고, 평화를 위해서도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마르디니에게 수영은 평화와 동의어다.

7월2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에서 열린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800m 결승에서 중국의 쑨양이 경기를 마친 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대회 내내 가장 큰 화제는 중국의 스타 수영선수 쑨양(28)이었다. 자유형 200m와 400m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땄지만 시상식에서 ‘기념촬영 거부’ 소동이 벌어졌다. 쑨양이 지난해 9월 도핑 수시 검사 때 도핑 검사요원의 자격을 핑계로 자신의 혈액 샘플을 망치로 깨부순 게 가장 큰 이유다. 도핑 위반 혐의가 짙었지만 국제수영연맹(FINA)은 경고 조치만 했다.

대회기간 계속된 이른바 ‘쑨양 패싱’은 기념촬영 거부에서 레이스 뒤 악수 거부까지 이어졌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쑨양이 “죽도록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며 억울해 할 수 있지만 시상식 기념촬영 거부 선수를 향해 “중국을 무시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은 도가 지나쳤다. 마르디니는 내전의 공포 속에 나라를 떠났고 익사의 위기 속에 3시간 반 동안 배를 밀면서 수영을 했다. 쑨양은 자신을 둘러싼 도핑 혐의의 시선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뒤에 숨어 피했다. 스포츠를 위한 나라는 몰라도 나라를 위한 스포츠는 없다. 스포츠 앞에 국기가 설 때, 많은 부정과 불공정이 국기의 그늘에 가려졌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쑨양의 ‘중국 무시 말라’는 발언에서 트럼프가, 아베가 겹쳐 보인다는 점이 무척 씁쓸하다. 다른 많은 마르디니들의 노력이 묻힐까봐 더 그렇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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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때 본 구름이 그야말로 뭉게구름. 가끔 따갑던 해가 안 보여서 좋아. 고되던 시집살이, 모두 안 보이고 혼자 남은 할머니. 이제 좀 홀가분한데 왠지 외로워 보여. 대나무로 검은 차광막을 얼기설기 쳐놓고서 여름을 난다. 뭉게구름은 열심히 따가운 햇볕을 가려보지만 차광막만 못해. 할머니는 애를 쓰는 뭉게구름의 사랑을 알까. 부채를 하나씩 들고 모정에 모여 맘속에 담아둔 얘기 나누던 날도 많았다. 요샌 회관에 달린 에어컨이 대세. 에어컨을 켜고 앉았으면 어디선가 쪄온 옥수수가 나온다. 여기선 ‘옥시시’라고 한다. 옥수수 하나로 충분히 배부르고 행복해진다. “여그가 천국이재 뭘라 싸돌아댕개. 더우엔 가만히 자빠져 있는기 상책이여.” 그러면서도 자녀들이 고향집에 하루라도 들렀으면 바란다. 누워 있다가 궁둥이에서 방귀가 뒤따르면 푸하하들 웃고….

언젠가 말재간꾼 김제동이 그랬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십니까? 행운입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십니까? 그건 행복입니다. 행운을 찾으려고 행복을 짓밟고 다니지는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뭔가를 다들 쫓아다니는데, 행복이 아닌 행운이 아닐까. 꼬무락꼬무락 거동하는 어매들. 길쌈하고 물레 돌리고 고추를 말리고 콩대를 털던 마당, 세월이 지나 아이들 그림자 하나 놀지 않는 빈 마당에서 홀로 허리를 편다.

우리 동네엔 빨치산이 지리산 자락을 타고 추월산, 병풍산까지 쏟아져 내려왔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던 손을 급히 놀려서 옥수수와 감자를 한 바구니 쪄주던 할머니들이 있었다. 배고픈 자식은 남이나 북이나 아군이나 적군이나 보고선 참을 수 없었다. 그게 어머니요 아버지였다. “우리나라 어머니 품을 떠나서 헤매던 형제들 어서 뭉치세. 백설단심 끓는 피 깨끗이 받아 한을 풀고 찾으세. 화려 삼천리….” 독립군들의 노래 ‘우리나라 어머니’에 나오는 그 어머니들. 품이었던 분, 고향집이었던 분들. 그래서 이곳은 고국산천, 화려삼천리 아닌가.

동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갈 때, 꼬무락꼬무락 낮게 별자리가 뜬다. 세 잎 클로버도 보이고 네 잎 클로버도 보인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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