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대전이 시작됐다. 8월2일 일본은 27개국으로 지정하고 있던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일본에서 전략물자에 해당하는 1100여개의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할 경우, 3년에 한 번 묶음 단위로 심사하던 것을 매번 각 품목별 개별 심사를 거쳐야만 가능하고 심사기간도 일주일에서 석 달여로 늘게 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규제에 이은 후속 조치다. 부품·소재·장비를 주로 일본에서 조달해온 한국의 제조업체, 특히 중소기업들에 큰 제약이 될 전망이다.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임을 언급해왔다.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 현금화 절차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국내에서도 행정부가 사법부의 결정에 개입하는 것이 헌법적 가치에 비춰 옳지 않다는 주장과, 외국 기업 자산을 국내에서 현금화하는 것 자체가 국제법 관점에서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부딪친다. 우려와 전환의 시기가 다가온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엉킨다.

산업 관점에서 부품·소재·장비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 것이 반갑다. 제조업 진화와 대기업 편향을 넘어선 선진국형 일자리 창출을 위해 부품·소재·장비 강소기업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진보진영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분명한 정책 목표로 공표된 건 김대중 정권의 ‘소재 부품산업 육성전략’ 이후 20년 만이다. 안현호 전 산업부 차관이 쓴 <한·중·일 경제 삼국지>라는 책이 떠올랐다. 책에 따르면 일본은 대기업의 투자 부족, 제조업의 생산성 저하,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조립 제조업 경쟁력의 약화라는 구조적 모순들이 쌓여 있다. 1차 경제규제는 ‘Made in Japan’의 마지막 보루인 반도체·디스플레이 부품·소재·장비 분야를 ‘전략무기’로 내세웠지만, 돌아온 것은 엔지니어를 에밀레종의 희생양마냥 짜내서 뭔가를 해낸다는 ‘공밀레’의 역습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은 국산화가 ‘어렵다’는 호소보다는, 개발을 하기 위해 주 52시간제를 유예해달라는 등의 ‘민원’을 많이 전달했다. 어떤 기자는 반도체 엔지니어의 말을 빌려 “여름휴가만 반납하면 해낼 수 있다”는 목소리를 전한다. 책은 그냥 두면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하청 노릇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우수 기술인력 인건비를 국가가 지원하고, 벤처캐피털 등 금융시장 여건도 강화해야 한다고 전한다. 정부는 1조원의 소재산업 투자, 6조원의 금융 공급과 설비투자, 연구·개발(R&D), 인수·합병(M&A) 자금 지원을 발표했다. 재정의 여력이 있다면 훨씬 더 큰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이 훨씬 더 큰 재정지출을 권고한 나라다.

한·일 경제대전은 제조업 진화를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기에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기회의 창’이 열린 상황이다. 미국 조지아텍 테일러 교수가 쓴 책 <혁신의 정치>는 국가의 혁신 역량이 상승할 동기로 국가적인 위기의식의 공유를 꼽는다. 그러한 전제에서 글로벌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고 시장 실패를 조정하면 혁신의 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위기의식과 응전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혁신의 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전환을 하려면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평을 ‘한·중·일 경제 삼국지’보다 넓혀야 한다. 한국 제조업은 한일청구권협정 원조금 외에도 일본과의 지속적인 기술협력을 통해 성장해왔다. 현대중공업은 가와사키조선소의 생산설계를 전수받았고, 삼성전자는 퇴직한 일본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도요타식 생산관리기법을 고민하지 않은 제조회사는 없다. 예전같이 갈 수 없다면 지금까지 밟아온 경로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2일 열린 아세안+3(한·중·일) 회담에서 싱가포르 외교부 장관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신뢰 관계 증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는 상호의존을 높여가야 하는 만큼 화이트리스트 대상국을 축소할 게 아니라 아세안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본의 10대 수출국은 미국과 독일을 제외하면 모두 아시아 국가다. 한국도 미국과 멕시코를 제외하면 나머지가 아시아 국가다. 싱가포르 외에도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가 비중을 키우고 있다. 생산의 가치사슬 역시 아시아 전체로 확장된 지 오래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베트남 공장은 중국의 생산성을 뛰어넘고 한국에 기술혁신을 전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무역의 특혜는 구미 선진국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한·일 경제대전을 아시아 전체의 국가와 협업의 파트너십을 확장하는 단초로 활용할 수 있다. 1970년대에 선진국이 되어 구미와 같은 반열에서 아시아 국가들을 오랜 시간 아래로 보던 일본의 방식을 넘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촛불혁명으로 정착시킨 한국의 민주주의 리더십을 노동·인권·환경·안전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규범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성세대들은 반일감정과 별개로 선진국 일본에 대한 체험에 근거한 경외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문화가 개방된 지 20년, 젊은 세대들은 성장이 정체된 일본을 접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위화감 없이 대등한 감각을 형성하고 있다. ‘한·중·일’로 지정학적 사고를 한정하는 경우도 드물다. 인식의 변화 가운데 일본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 중이다. 협력체제 복원이냐, 1965년 한일협정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환이냐라는 정부의 선택지가 남아있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지평이 한국사회에 펼쳐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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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9일, 김성태 의원은 노동조합의 고용 세습을 근절하자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당시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의 고용 세습 논란이 있었고 그가 제안한 법안은 노동조합원의 친·인척을 우선 채용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내용이었다. 고용의 ‘민주성’과 ‘공정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법안 발의 동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동 발의자 110인 중에는 현재 강원랜드 채용 비리로 수사를 받은 권성동 의원도 있다.

그리고 2019년 7월30일, 김성태 의원은 KT 채용 비리와 관련한 기자회견장에서 ‘딸에게 파견 계약직을 권하는 아버지가 몇이나 있냐’며 부정(父情)을 호소했지만 채용 청탁은 부정(否定)하기에 이른다.

채용 비리의 사실 여하를 떠나 직접 파견 계약직으로 1년이 넘는 시간을 지내보니 알겠다. 나는 한 사업장에서 2년 이상 파견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파견업체와 원청이 자행하는 비겁한 수법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사용자는 3개월 혹은 6개월 단위의 짧은 계약기간을 이용해 노동자에게 압박을 가한다. 계약 연장을 위해서는 직장 공동체에 어떻게든 적응해 살아남거나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약 만료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용 불안정성을 알고 있는 아버지라면 누구도 딸에게 파견 계약직을 권할 수는 없을 테다.

고용 불안정성은 노동 불안정성과 직결된다.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 확대, 선택근로제의 정산기간 확대, 재량근로제의 대상 업무 확대 등 유연근로제는 노동자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 탄력근무제의 단위기간 확대는 김성태 의원이 강력하게 요구하던 것 중 하나다. 이는 노조와의 서면 합의를 통해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노조에 가입할 수 없는 파견 계약직의 경우 사용자가 요구하는 장시간 노동을 거부할 권리조차 없다. 주 52시간 노동이 무용해진 일터에서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켜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일로 하루 전체가 소진되는 청년들에게 주어진 법정 노동시간 상한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더군다나 임금 보전까지 어렵게 하는 법안들이 국회의 협상 테이블에 올라 있다. 지역·업종·규모·연령에 따라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 주휴수당을 폐지하자는 말들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결국 김성태라는 아버지의 이름은 부정(父情)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성과 공정성을 부정(否定)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말았다. 김성태는 누가 자기 딸에게 파견 계약직 일자리를 권할 수 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다. 자기 딸이 파견 계약직으로 일하는 줄 몰랐다며 눈가를 적실 줄 아는 아버지라면 그랬으면 안됐다. 그가 채용 청탁을 위해 이용한 지위와 권력은 자기 자식이 아닌 파견 계약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써야 했다.  

김성태와 권성동이 지위와 권력을 남용해 얻은 일자리는 비교적 안전한 배에 올라타 삶을 항해할 수 있는 승선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밖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를 태운 자그마한 쪽배는 해면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노동악법이라는 암초 어딘가에 부딪힐지 모르는 채 저 드넓은 바다에서 표류하는 중이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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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이상 대한민국의 행정부, 국회, 검찰, 사법부, 재벌, 지역적폐 세력을 감시해 오면서, ‘검찰다운 검찰’의 모습을 본 적이 많지 않다.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법적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 총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윤 총장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이고 중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설일 시간도 없다. 검찰다운 검찰을 만들고 싶다면, 지금 곧바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첫째, 정치부패에 대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회는 썩을 대로 썩어 있다. 국회 예산으로 지원되는 ‘입법 및 정책개발비’를 불법으로 사용한 20대 국회의원들이 고발되어 있다. 하지도 않은 연구용역을 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인쇄하지도 않은 정책자료집을 인쇄한 것처럼 꾸며서 세금을 빼낸 사례도 있다. 남의 자료를 그대로 베껴서 정책자료집을 낸 사례도 있다. 정말 죄질이 나쁘다. 그런데 서울남부지검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작년 10월과 11월에 11명의 국회의원이 고발됐지만 아직까지 시간만 끌고 있다. 

신한은행 채용비리 등의 사건에서 채용청탁을 한 국회의원들도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의 불법 농지취득(농지법 위반) 의혹도 있다. 피감기관 예산으로 해외출장을 다녀온 국회의원들의 김영란법 위반 혐의도 있다. 

이런 정치부패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연루되어 있다. 이들을 수사·처벌하지 않고서는 ‘법 앞의 평등’을 얘기할 수 없고, 공정이니 공평이니 하는 말들도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영등포경찰서가 수사 중인 ‘패스트트랙 당시 국회난동 사건’도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하고 영장 청구와 기소에 들어가야 한다. 

둘째, 정경유착과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 의혹이 있는 재벌들에 대해 과감하게 수사를 해야 한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코오롱 인보사 의혹은 물론이고, 재벌들을 둘러싼 각종 의혹 사건들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를 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영풍그룹이 낙동강 최상류에서 아연을 생산하는 영풍석포제련소를 운영하면서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수사가 필요하다. 최근 드러난 사실에 의하면, 영풍그룹은 불법시설을 설치·운영하면서 카드뮴 등 유해물질들을 대량배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대기오염물질 배출 측정치까지 조작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실무자선만 수사를 받고 있다. 1300만 시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낙동강에서 재벌기업이 수십년간 저질러 온 조직적인 범죄행위이다. 그룹 핵심부가 모를 리 없고, 비호세력이 없을 리 없다.  

셋째, 과거 검찰이 은폐한 의혹이 있는 사건들에 대해 재수사를 해야 한다. 특히 고 장자연씨 사건은 당연히 존재해야 할 핵심적인 증거들이 사라진 사건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공소시효가 지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조선일보 전 사회부장이 작년 10월에 MBC &lt;PD수첩&gt;과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한 건은 무고죄가 성립될 수 있고, 아직까지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조현오 전 청장에게 외압을 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무고죄 수사가 진상규명의 입구가 될 수 있다. 또한 대검 진상조사단의 다수의견이 지적한 것처럼, 특수강간 등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범죄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검찰총장이 의지를 갖고 반드시 재수사를 해야 한다. 

넷째, 지역적폐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가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이뤄진 적폐청산은 주로 이전 정권에서 저지른 국가 차원의 적폐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러나 지역의 경우에는 수십년간 누적된 적폐들이 흘러넘치는 상황이다. 각종 인허가, 예산, 인사 등과 관련된 비리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 지역이다. 그러나 지역검찰의 칼날은 이런 지역적폐들에 대해 무디기만 하다. 얼마 전에는 경북 영주시장의 처남이 뇌물수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었었는데, 정작 영주시장은 수사조차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런 식이니 지역의 부패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검찰의 자존심을 걸고 지역적폐를 뿌리 뽑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검찰의 수사만으로 이 나라의 뿌리 깊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검찰은 검찰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검찰이 정치적 고려까지 해 왔기 때문에 신뢰를 잃은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들에 대한 수사에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검찰은 혐의가 있는 모든 사안에 대해 수사를 하고 영장을 청구하면 된다. 아무리 국회가 방탄국회를 열어도 검찰이 영장을 청구하면 체포동의안이 상정되게 할 수 있다. 만약 국회의원들이 또다시 후안무치하게 동료의원 감싸기를 한다면, 그때는 국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문제만 보더라도, 하반기 국회에는 다수의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상정되는 것이 정상이다. 범죄를 저지른 국회의원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져올 파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은 검찰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윤석열 총장의 역할이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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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친구가 있었다. 아직 일본에 가보지 못한 때였기에 친구의 말을 경청했다. 하긴 두어 번 가보았다 한들 얼마만큼 그 나라를 잘 알 수 있었을까. 꽤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온 친구는 그 나라의 번영과 기술과 그들의 청결과 질서의식에 감동한 듯했다. “솔직히 나라를 보나 국민을 보나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멀었어.” 갑자기 우리를 비교하는 친구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조센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불편해진 내 눈빛을 읽었는지 친구가 덧붙였다. “과거는 과거고… 어느 모로 보나 우리는 일본을 배워야 해.”

아직 우리 사회가 혼란의 와중에 있던 시절, 친구는 일본의 안정된 사회질서와 경제적 번영을 몹시 부러워하는 듯했다. 사실 친구는 ‘그들과 같은 경제적 풍요만 누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무슨 상관이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번영을 이루었으니 과거는 상관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친구의 오래전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 덕분이었다. 시라이 교수는 일본에서 기승을 부리는 내셔널리즘과 자신감의 정체가 패전에 대한 부인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고, 사실은 패전으로 인한 열등감에서 출발한다는 신랄한 지적을 하고 있었다. 거의 50년간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해온 일본의 ‘전후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심리에 의존한 것이었는지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오래전 이야기처럼, 이 분석은 한국 버전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혹시 우리 중 일부는 식민지배를 받은 열등감 때문에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한국 시민의 ‘NO아베’ 움직임에 연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4일 오후 도쿄 신주쿠 역 앞에서 반(反) 아베 집회를 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영속패전론>의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요컨대 일본은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는 동안은 패전의 인정과 과거사 반성이라는 ‘다테마에’(겉모습)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지만, 버블경제의 붕괴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전후체제의 한계와 쇠퇴에 직면해서는 패전을 부인하고 과거의 영광으로 회귀하려는 ‘혼네’(속마음)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기에는 미국에의 철저한 종속과 냉전 와해 등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우리는 너희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미국에게 패배했다”는 심리로 요약된다는 분석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태도와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월감과 굴종이 뒤범벅된 집단분열증으로 나타난다. 패전을 부인함으로써 패전의 상태를 영속화하고, 가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원폭피해 등)의 명분을 획득하려는 이중성이 ‘영속패전’의 심리를 만들었다고 시라이 교수는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의 ‘전후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는 몇 가지만 짚어보아도 금세 드러난다. 일본의 전후 평화와 민주주의는 냉전의 최전선에 있던 한국과 대만에 짐을 떠맡김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일본이 북한과 중국에 직접 대치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들의 민주주의는 가능했을까? 적의 직접적 위협 앞에서 일본이 독재와 군사체제를 택하지 않았으리라 믿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허용해온 일본을 어찌 민주국가로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옹호하지만, 그런 ‘민주주의 흉내’는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손해는 전가하고 이익만을 취할 수 있었던 위치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냉전이 와해되고 한국과 북한의 평화 관계가 가능해진 단계가 되자, 그들도 더 이상 민주주의 흉내를 걷어치우는 것을 보면 그렇다. 혐한 발언이 활개를 치고, 원전의 실상을 감추고, 극우정당이 약진을 해도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 평화헌법 제9조를 개정하겠다는 아베와 극우세력의 꿈을 가시화시키고 있어도 놀랄 게 없는 이유다.

강제징용과 일본군 성노예의 사실을 부인하고 도리어 경제보복이라는 수단을 꺼내든 것은 일본의 자기 과신 내지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은 패전 대신 천황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국가적 정당성의 준거로 삼음으로써 가능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이자 전쟁이 아닌 상태, 곧 칼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를 지속함으로써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우리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우리가 이토록 분개하는 것이 일본처럼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 식민지배를 당한 열등감을 숨기고 당당한 내셔널 국가를 세우고 싶어서라면 나는 분노를 접고 싶다. 비록 미완일지언정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세워왔고, 일찌감치 ‘제국’이기를 거부하고 ‘민국’을 세우기를 열망했던 3·1운동의 나라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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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태어난 뒤 이름을 짓는 것이 제일 고민이었다. 이름이란 그 의미도 중요하지만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이니만큼 시대의 유행도 고려해야 했다. 아내와 며칠 밤을 심사숙고한 끝에 어렵게 정했다. 그런데 막상 신고서를 써 내려가면서 선뜻 손이 쉽게 나가지 않았던 부분은 아이의 이름이 아닌 등록기준지였다. 등록기준지라는 것이 아이가 출생신고 당시에 살고 있었던 거주지 주소라는 행정적인 기록일 뿐이지만, 그래도 발음하기도 힘든 외래어로 된 아파트 몇 동 몇 호가 아이의 출생기준지가 된다는 것이 좀 낯설었다.

엄마·아빠들이 모인 한 모임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웃이 10명이 있으면 참 좋은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곰곰이 머릿속에서 숫자를 헤아려 보았는데, 아무리 후하게 계산해도 우리 아파트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웃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같은 단지에 살면서 틈틈이 아이를 돌보아주셨던 돌보미 선생님이거나,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 초보 아빠의 서툰 행동을 보다 못해 손을 보태주셨던 미화원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다른 이웃들과 관계를 맺을 기회 자체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웃들과 만나고 관계 맺는 마을이라기보다 똑같은 성냥갑 모양의 숙박시설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서울 성북구 ‘정릉 교수단지’ 한 대문 앞에 마을 주민들이 재건축에 반대하는 의미로 매단 ‘초록이 물드는 마을’ 표시가 붙어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얼마 전 성북구 정릉(貞陵) 근처 한 마을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실 서울 도심지에 ‘동네’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정릉동은 아직 푸근한 동네와 골목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었던 신덕황후의 무덤인 정릉은 조선시대의 왕릉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조성되었지만 역사의 부침을 거쳐 지금 자리에 소담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1960년경 서울대가 성북구 동숭동(연건캠퍼스)에만 있던 시절에 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이 이곳에 집단 주택단지를 조성했는데, 당시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았던 이유로 지금도 여전히 “교수단지”라고 불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 곳곳에 꾸며진 꽃길과 정원이었다. 2008년 이 동네가 주택재건축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마을에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골목과 동네에 담겨진 이야기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아 성급하게 재건축사업이 추진되었다. 결국 2013년 법원은 재건축조합 설립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 조합설립 인가를 무효로 한다고 확인하였고, 수십억원의 채무를 남긴 채 사업이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건축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은 거친 구호보다 집집마다 대문에 꽃 화분을 꽃아 두거나 “초록이 물드는 마을”이라는 나무 문패를 만들어 붙이는 방법으로 마을살리기 의사를 표현해 왔다. 봄이면 자발적으로 집 담벼락과 골목마다 꽃길을 가꾸었고, 집 안뜰 정원을 주민들이나 마을을 방문한 외지인들에게 공개하면서 시작된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는 서울의 대표적인 마을 축제가 되었다. 동네다운 동네였다.

최근 정릉에 다시금 재건축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문화재위원회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정비사업계획 변경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주민들에게 “분양권을 2채 주겠다”는 등 듣기 좋은 이야기로 조합설립 동의서를 요구하고 있다. 세상에 공짜 돈은 없는 법인데, 과거 조합이 남긴 채무와 설립추진 과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운영경비에 대한 부담 여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다. 참다못한 주민들이 성북구청에 집단민원을 제기했다. 오래된 마을을 고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이 꼭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일 필요는 없다. 골목마다 가득한 추억. 바람에 실려오는 꽃의 향기와 오래된 나무의 기품, 그리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안뜰을 오가는 이웃주민들이 정릉의 최고 프리미엄이 아닐까.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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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간 엄마는 잘 안 오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안 오시네 엄마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배추를 팔아 신발을 사 오실 엄마


엄마는 신발을 잊고 엄마는 빨랫비누만 소금 됫박이나 사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이란 신발은 오지 않고 좋은 날만 따라왔던 것이다


언 발로 사위를 찍고 사라진 고라니의 겨울 산정도 신발처럼 저 너머에 솟아 있었던 것이다 고라니는 떠나가고 좋은 날은 혼자 남아 기다렸던 것이다 고라니도 신발을 깜빡했다고 들켜주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좋은 날은 어디선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정윤천(196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엄마는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엄마는 배추를 팔러 장에 가시고, 장에 간 엄마가 새 신발을 사서 오시길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엄마는 빨랫비누와 소금만을 사서 돌아오시고, 아이의 신발을 사서 오시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잊으신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생필품만을 살 수밖에 없으셨겠지만.) 아이는 응석을 부리며 엉엉대며 울었을 것이다. 엄마는 다음 장날에는 꼭 신발을 사다 주겠노라고 달랬을 것이다. 흰 종이 위에 아이의 작은 발을 올려놓고 본을 떠서 가겠노라고 엄마는 약속을 했을 것이다. 아이는 겨울 산꼭대기 하얀 눈밭에 찍혀 있는 고라니의 신발 없는, 맨발의 발자국과 고라니의 언 발을 생각한다. 언젠가 좋은 날이 새 신발을 신고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젊은 엄마가 계셨던 옛 시간과 백설(白雪)이 깨끗하게 눈부시던 높은 산정(山頂)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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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청와대, 더불어민주당은 4일 고위 당·정·청협의회를 열고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예산·법령·세제·금융 등 가용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키로 했다. 정부 예산을 늘려 기술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규제는 완화하고, 기업부담은 줄여줘 향후 5년간 글로벌가치사슬(GVC)에 포함될 100개 전문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관련 법을 정비해 소재부품장비 개발기업을 상시적으로 지원하고 범정부 차원의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를 구성, 정책의 차질 없는 추진도 약속했다. 이번 대책은 정부가 중·단기적으로 쓸 수 있는 지원책이 총망라된 것으로 시의적절하다.

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특히 어려움이 예상되는 품목은 159개다. 일본이 수출 통제한 1194개 중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들이다. 이들 품목의 수입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정부와 기업이 체계적으로 대응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특정품목을 고시 또는 허가지연 등의 방법으로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출통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 경제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우리 경제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54년간 일본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낸 적이 없다. 그 기간 대일 무역적자 규모는 6000억달러(720조여원)가 넘는다. 소재부품장비를 일본에 의존해온 탓이다. 올 상반기 100억달러에 이르는 대일 무역적자 중 3분의 2가 소재부품장비 때문이었다. 반면 이들 품목의 국산화율은 크게 낮다. 수출의 버팀목인 반도체 국산화율은 소재가 50% 수준이고 장비는 18%에 불과하다. 이러니 일본이 소재·부품 등의 수출 규제를 경제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가 쉬운 일은 아니다. 원료 확보에서부터 기술개발,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비용이 늘면서 수출품목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사태를 원인적 해결 없이 단순 봉합으로 끝낼 경우 일본은 물론 그 어떤 국가가 언제 또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를 앞세워 한국경제를 흔들어댈지 모를 일이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둔 것도 이런 우려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탈일본’은 정부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대·중·소기업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세울 때 경쟁력 있는 전문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 정부도 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일본에 지지 않는 국가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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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에서도 말이 나왔고, 내부에서 검사장님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특수통 전성시대가 더욱 확고히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몇몇 검사들이 솎아지긴 했지만, 정치검사들이 여전히 잘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잘나갈 거라는 걸 검찰 내부에서는 모두 알고 있지요. 잘나가는 간부들은 대개 정치검사라 다 솎아내면 남은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게 검찰의 현실입니다만, 너무나 도드라졌던 자들에게는 그래도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특수통의 보스가 아니라 대한민국 검찰을 이끄는 검찰총장입니다. 검사장님에게 보내는 국민들의 환호와 응원이 차디찬 실망으로 돌아서는 것은 한순간이지요.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되찾을 마지막 기회를 헛되이 날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부들이 대개 그 모양이라 다 버리라고 차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너무나 도드라졌던 정치검사들은 버려야 합니다. 검사장님이 정치검사들의 방패막이로 소모되면, 국민들이 대한민국 검찰에 기대를 품을 수 있겠습니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7월2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사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자리를 뜨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7월12일, 윤석열 내정자에게 축하메일을 보내며, 아울러 조의를 표했습니다. 검찰 안팎으로 질책과 비판, 비난과 조롱받을 일이 한가득일 테니 애도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 검찰총장을 향해 목청을 높여 쓴소리를 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첫 고언을 그렇게 띄웠습니다. 인사 발표 후 비판하는 것보다 미리 충고드리는 것이 도리입니다.

인사 발표 후 중간간부들의 줄 사표, 내외의 날선 논평들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직권남용 수사로 종래 검찰 인사가 얼마나 자의적, 불공정하였는지가 드러났지요. 별장 성접대 논란의 김학의, 넥슨 주식 대박의 진경준 등 검사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 검사장으로 질주할 수 있는 허술한 인사시스템을 모두 목도하였기에, 검찰 인사의 불합리성과 심각성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만, 수사와 판결로 공식 확인한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불공정한 인사를 처음 보았다는 듯 경악하는 투의 기사들이 더러 보입니다. 검찰에서 종래 공정한 인사가 이루어져 왔다면, 부적격자들이 어떻게 검사장이 되고 검찰총장이 되었겠으며, 검찰개혁이 왜 시대의 요구가 되었겠습니까? 지금껏 불공정하였지만, 이제는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투명한 인사 원칙과 기준으로 신상필벌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를 모든 국민들처럼 저를 비롯한 검찰 구성원 모두 고대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속칭 특수통들이 점령군마냥 요직을 쓸어가니 형사통 검사들의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또한, 정치검사들이 대윤 라인인지, 아닌지에 따라 승진 여부가 갈린다면 축출된 정치검사들이 인사에 승복할 수 있겠습니까?

검찰총장 취임 직후 인사를 실시하는 것이라 투명한 인사 원칙과 기준을 마련하여 공론화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종래 검찰의 불합리한 인사들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는 인사라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한나라 효무제가 신공에게 치란(治亂)에 대해 묻자, 신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힘써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간언하였지요. 검찰총장 취임사에서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은 오로지 헌법과 법에 따라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사익이나 특정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인사권 또한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므로 특정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지요. 내년 인사에서는 좀 더 투명한 인사 원칙과 공정한 신상필벌로 국민들과 내부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인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안태근 검찰국장 시절, 항명검사였던 저는 검사 부적격자로 몰려 쫓겨날 뻔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인사 불이익 정도가 아니라 생존 여부를 걱정해야만 했었지요. 조여오는 공기가 하도 살벌하여 일하면 할수록 적격심사에서 트집만 더 잡힐 걸 직감하고, 도망치듯 반년을 쉬었습니다. 적격심사 파고를 힘겹게 넘기고 2016년 1월 검찰에 복귀하며 복귀인사로 검찰 내부망에 제가 생각하는 검사의 자세와 검사로서의 각오를 밝혔습니다.

습착치는 촉한 명재상 제갈량을 칭송하며 “법은 부득이할 때에 집행되었고, 형벌은 스스로 범한 죄에만 더해졌으며, 작위와 상을 줌에 사사로움이 없었고, 벌을 가함에 노여움이 없었으니 천하에 과연 복종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라고 평했습니다. 수감(水鑑). 사사로움 없는 고요한 물과 맑은 거울이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가 아닐는지요. 그때 내부망에 올렸던 제 다짐을 다시금 되새기며,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들에게 함께 되새기기를 부탁드립니다.

<임은정 |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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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김혼비는 지난 5월 펴낸 책 <아무튼, 술>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술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청아한 소리”다. 치과 치료를 받은 뒤 ‘치료한 부분에 술이 닿으면 좋지 않다’는 권고를 듣고는 금주 대신 창의적 방법을 떠올린다. “그럼 안 닿게 마시면 되는 거잖아? 소주를 입에 머금을 새도 없이 목으로 바로 들이부어 꼴딱꼴딱 삼켰다. (맥주로 주종을 바꾼 뒤에는) 빨대를 사용해서 입속에 들어오는 술의 방향을 치료 부위 반대편으로 흘려 넣었다.”

책에는 보드카와 위스키, 코냑과 와인, 칵테일 ‘블러디 메리’도 등장한다. 쌀로 빚은 일본식 청주 ‘사케’ 역시 빠지지 않는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꼬치를 쏙쏙 빼어먹으며 온(溫)사케를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애주가 김혼비도 재작년부터는 규칙을 정해 지키고 있다. ①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마시더라도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등이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4일 오후 국회에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명단) 배제 조치에 따른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고위 당·정·청 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해찬 대표. 연합뉴스

때아닌 ‘사케 논란’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한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일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사케를 곁들였다는 게 논란의 핵심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이율배반’이라고 비난하자 민주당은 “이 대표가 마신 술은 국내산 청주인 백화수복”이라고 맞받았다. 보수야당의 공세는 지나치다. 설령 사케를 마셨다 해도 한국 시민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한 일이다. 무엇보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일갈했듯 지금 정치권이 사케 따위로 으르렁거릴 때가 아니다. 다만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고위관계자들은 엄중한 시기임을 감안해 음주 수칙을 지켰으면 한다. 김혼비의 규칙을 벤치마킹해보자. ①가급적 낮에는 마시지 말 것 ②저녁에 마시더라도 국산 주류를 마실 것 ③저녁에 마시더라도 소량에 그칠 것!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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