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통과하고 있는 지금 이 갈등을 두고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제 와서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의 당부를 사회가 논쟁할 이유도 없다. 강제동원 판결은 한·일 양국의 정치와 외교를 폭발시키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며칠 전 어느 영민한 판사가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적어 돌렸다는데, 이 세상은 20대의 좋은 머리로 정답을 적어내던 사법시험장이 아니다. 

시민들은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근심하고 있다. 일본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소문, 하루 이틀 불매운동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 중국과 러시아가 서성이고 환율이 들썩거리는 상황에 기시감마저 느낀다. 이런 시국에 세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뒤늦게 판결의 논리전개나 시비하고 있으니, 물정 모르는 벽창호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나마 그 내용이란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다. 눈에 띄는 새로운 이론은 한 줄도 없다. 지금 이 위기는 대법원 판결에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해 생긴 게 아니다. 강제동원은 역사 문제이자 정치 문제이고 외교 문제인데, 그걸 풀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사법부는 사회갈등 앞에서 무력하다. 가령 패전국 일본은 1947년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했다.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없던 때다. 그래서 조선반도 출신이란 의미로 조선적(朝鮮籍)이라고 외국인등록부에 적혔다. 이 조선적을 유지해온 사람과 후손이 조선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부터 한국 정부는 조선적의 입국을 막았다. 이에 조선적 역사학자 정영환이 소송을 냈다. 박유하 교수의 위안부 관련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는 그 학자다. 

정영환은 “나는 법률상 한국인이다. 국가가 국민의 입국을 어떤 근거로 막느냐”고 했다. 실제로 1996년 대법원은 “조선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한 자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의 백성과 후손은 한국 국적이란 얘기다. 2013년 대법원은 정영환의 패소를 확정했고,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조선적을 모두 입국시켰다. 보수야당도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정영환은 이듬해 입국해 서울대에서 조선적에 대해 강연했다. 정치적으로는 손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지만 사법부는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지금 생생하게 보고 있듯이, 사법판단이 모든 분쟁을 종결시키지 못한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남형두 연세대 교수는 예술에 법이 개입하는 일에 부정적이다. 조영남 위작 사건이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진 일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사법적 해결에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원의 결론이 종국적 해법이 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치에 맡겨두었다면 풍부한 예술 논쟁을 통해 예술 발전에 기여했을 일이 법의 성급한 개입으로 예술의 자유와 발전을 저해했다고 본다. 

환경 논쟁을 사법으로 결론 낸 새만금 판결에 대해 환경법 전문가인 조홍식 서울대 교수도 비판한다. 판사 출신인 그는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고 했다. “정치과정이 실패할 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그 실패를 적시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한 법원이 개입한다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새만금 1심 판결 직후 언론에 기고한 글이다. 두 사람 모두 법조인 출신 법학자이다. 이들은 논쟁과 토론, 타협과 협상, 다시 말해 정치행위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정치과정을 사법판단이 대체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사법판단이 정치과정을 살해한 사건이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이다. 헌법연구관 출신 전종익 서울대 교수는 “핵심적인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곧 예정되어 있고 국회의원 총선거가 2016년 봄에 있을 예정이었던 상황에서 사법적인 판단보다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과정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과정 이론에서 보면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이듬해 논문에서 밝혔다. 사법심사를 자제하고 정치과정을 기다렸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시 유일하게 반대의견이던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법치주의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소중하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헌법이라는 탐조등(探照燈)으로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찾아 나설 때,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바탕이자 토대가 되는 ‘자율과 조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헌법 전문의 근본정신이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찾기 어렵고 서로를 겨누는 거친 언사들이 난무하는 우리의 삭막한 현실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주는 우리 헌법의 가르침도 바로 이것이다.” 

숙적(宿敵) 일본을 상대로도 대한민국 헌법이 똑같이 작동한다는 것이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본 당국이 일본군 강제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중단했다. 속내야 뻔하지만, 당국자가 내건 명분은 “테러 예고나 협박 전화 등도 있고 철거하지 않으면 가솔린 통을 들고 가겠다는 팩스도 들어왔”으므로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공중의 위험’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합의된 규범이다. 예컨대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행위 따위는 표현의 자유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협박 전화나 팩스가 들어왔다는 점은 명백하지도 현존하지도 않는 위험이다. 공권력은 오히려 이런 따위의 비열한 협박을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앞으로 일본에서는 누구든지 전화 한 통, 팩스 한 통만으로 얼마든지 헌법상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을 것이니, 일본에서의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2005년 덴마크의 한 신문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테러범처럼 풍자한 만평을 실었다가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로 인해 여러 나라에서 1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대개 의법 조치되었으며, 3년 뒤에 덴마크 17개 신문과 유럽 다른 나라의 신문들이 동시에 그 만평을 실었다. 이 신문들은 표현의 자유를 테러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한 것이다.

물론 이 만평은 이슬람포비아에 기대고 있으며, 타 종교에 대한 편견과 비난이 매우 강력했다. 애당초 그 만평을 신문에 싣는 것은 적절치 못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공론장에서 이뤄져야 마땅하다. 테러나 어떠한 외압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적 위험’을 빌미로 삼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더구나 이번 전시회가 ‘표현의 부자유’를 테마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였다. 패전 후 일본이 군국주의적 역사를 부정하면서 고통스럽게 다져온 민주주의가 아베 정권에 이르러 퇴각하고 있음을 지켜보는 마음은 매우 착잡하다.

한국에도 이런 검열이 횡행하던 시기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 대표 격이다. 정권이 바뀌어 정치권력의 검열은 거의 사라졌지만 자본권력이나 종교단체 등의 민간에 의한 검열 행위는 알게 모르게 지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소수자들의 자기 표현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타자의 자기 표현에 관대해져 보자. 나는 ‘박근혜 석방’에 반대하지만 이를 주장하는 사람의 권리는 존중한다.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동성애자의 자기 표현 역시 존중한다.

한국의 현재 법체계는 공론장의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 명예훼손이라는 전근대적 처벌 규정은 지나치게 강력하여 공적 비판이 자칫 처벌받을 수 있으며, 반면 가짜뉴스나 혐오 표현 등 공론장을 갉아먹는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은 미비한 것이다. 이런 법체계부터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아베 정권의 폭거를 비판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공론장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핵심적이다. 일본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극일이 아니겠는가.

<한만수 | 동국대 국문문창학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낮의 뜨거운 해가 아파트 단지 뒤로 기울어지면 더위를 피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네댓 살 아이들은 씽씽카를 타고, 예닐곱 살 아이들은 뒷바퀴에 보조 바퀴가 달린 네발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나름 질주한다. 이들 사이를 두 바퀴 자전거로 헤집고 다니는 초등학생들은 여유작작하다. 특히 보조 바퀴를 막 떼어냈을, 두 바퀴 자전거 초보 운전자의 표정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 보조 바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들은 세상을 자신이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열한 살의 그도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붙임성이 있어서 아파트 단지 내에 어른을 볼 적마다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어른과는 친구가 되어서 오후 산책 때마다 동행하는 그는 요즘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친구 하나와 말다툼을 했는데, 자신을 편들어 주던 아이들이 그에게 엄포를 놓았단다. 싸운 아이와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싸운 친구와 화해하고 싶어져 아파트 단지에서 만났을 때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일로 제 친구들이 저하고 말을 안 해요.”

그는 함께 산책하는 이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먼저 화가 풀릴 수 있잖아요. 화가 풀렸는데 왜 계속 화내야 해요?”

아이는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싸운 친구와 화해하면서 다른 친구들을 잃게 된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와 함께 산책하던 이는 아이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네 선택이 옳았어. 좀 기다려봐.”

“정말 기다리면 될까요?”

뜨거운 바람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여름 오후, 그들의 대화는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느껴졌다. 이 여름이 지나면 열한 살의 아이는 치열한 자신의 싸움을 이겨내고 한 뼘 더 자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에게 어른이란 보조 바퀴 같은 것이다. 아이들이 혼자 잘 달릴 때까지 잘 붙어 있는 것만큼이나 제때 잘 떨어지는 게 중요한.

<김해원 | 동화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극일을 외칠 줄은 몰랐다. 한국 정치에서 외세, 특히 일본은 단골 메뉴다. 여당이 반일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 이 효과를 잘 아는 야당은 극일과 이성적 외교를 주장해왔다. 매체가 메시지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고 들으면 모두 옳은 말씀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작동 원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두 가지가 아닐까. 적대적 공범 관계와 발전 지상주의. 적대적 공범은 분단체제에서 남북한 통치자와 여야 정치인들의 존재 양식이었다. 

발전주의. 우리는 진보·보수, ‘마초·페미’ 불문, 잘사는 나라를 열망한다. 일본은 축구에서라도 이겨야 하고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다. 그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이라크 침략이든, IT 강국이든, 한류든 한마디로 전 세계에 태극기가 휘날려야 한다는 강박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이러한 콤플렉스와 욕망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문제는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부재이다. 아니, 부재를 넘어 거의 금기에 가깝다. 나는 예전에 소셜네트워크의 윤리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페미니즘 관련 글을 썼을 때보다 많은 비난을 받았다. 어떤 이가 당시 내 글을 비판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진보 인사와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좋아요”를 눌렀다.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과 SNS는 기술 강국과 표현의 자유를 상징한다. 혹은 발언 기회(지면)가 없는 이들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부작용이 있더라도 양비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차피 세상사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양비론은 의미 없는 얘기다. 서구에서는 과학 기술 산업을 주도하는 거대 기업에 대한 비판과 스마트폰으로 인한 인간의 조건 변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우리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어렵다.

20세기 최고의 시간도둑이 TV였다면, 21세기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TV와 달리 휴대성과 사용자의 즉각적인 참여, 주체화 측면에서 완전히 성질을 달리하는 매체다. 인간이 만든 도구는 인간의 몸을 확장(extension)시킨다. 나의 일부가, 기억이, 기능이 도구에 의존하거나 옮겨지는 상태다. 우리는 확장된 몸을 ‘나’로 생각하기 쉽다. 자아는 비대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저하된다. 

디지털 치매는 인간의 기억력을 기계가 빼앗아가는 새로운 질병이다. 치매가 슬픈 병인 이유는 환자의 기억이 상실, 대체됨으로써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증 치매에 걸린 사람과는 살아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인간은 곧 기억이다. 죽음은 이 기억이 몸(mindful body)을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TV가 한때 ‘바보상자’로 불렸다면 지금 스마트폰은 생각하는 인간, 호모사피엔스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페이스북 창시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자기 딸은 “열 세 살까지는 페이스북 사용을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실제 페이스북은 13세 이하 아동들의 계정 등록을 막는 정책이 있긴 하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여섯 살 유튜버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산다.

최근 출간된 <생각을 빼앗긴 세계>는 디지털 유토피아 신화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이 어떻게 지식과 사상, 프라이버시와 문화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생각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불필요한 시대요, 거대 기업이 인류의 뇌를 독점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부메랑이 되는 상황은 누구나 아는 문명의 딜레마이지만, 나는 디지털 범죄나 문화 파괴보다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 간 부대낌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과정을 사는 존재다. 그러나 1인 매체 시대에는 자기가 자신을 규정한다. 자기도취, 자기조작 시대다. 

주식 투자 실적을 부풀리고 결국 사기죄로 구속된 모씨는 올해 구형 10년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그는 기부왕 행세를 하면서 유명해졌다. 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자. “저는 무엇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 가졌어야 하는 분들의 것을 잠시 맡고 있다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 돌려놓는 사람일 뿐입니다. (중략) 저는 제 이름이나 업적이 아닌, 정제된 가치관과 철학을 남기고자 합니다. 제가 뿌리는 씨앗에서 열리는 열매가 사회와 공동체에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랍니다.”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페미니스트의 페이스북 글이다. “빛나는 연구 실적의 첨탑을 향해 내달리는 숨가쁨이 때론 두통과 복통 등의 신체적 통증으로 번역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한글 논문을 완성하기 무섭게, 다른 주제의 외국어 논문으로 향하고 있는 이 일상에서 연구가 주는 기쁨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에너지 고갈에 맞닥뜨린다.” 

디지털을 통해 자아를 무한 확장하는 사람들, 거짓과 혐오 행위가 유명세가 되고 악명도 돈이 되는 세상에서 어떤 상태가 ‘제정신’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성의 양극화일까? 한국은 세계 최고의 우울증, 자살률 국가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강원도 태백시가 태백청소년수련관을 포함해 5개 청소년수련시설을 노인복지재단에 위탁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청소년지도사들은 태백시의 조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지도사들은 청소년시설을 차라리 태백시가 직영하라고 주장한다. 청소년시설은 지자체 직영이 아니라 청소년전문단체에 위탁하여 운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그동안의 청소년계 주장과는 상반된 것이다. 왜일까. 

이는 태백시의 무성의한 청소년시설 투자에 기인하고 있다. 그동안 이 청소년시설들을 위탁 운영해 온 한 청소년단체가 연간 1억원 이상의 적자 운영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2018년 위탁 운영을 스스로 포기했을 정도다. 

시설이 노후화되어 곰팡이에 누수, 녹물이 나오고 석면 내장재가 드러나며 중앙난방시설의 샤워실 라디에이터가 얼어터져 폐쇄하는 지경인데도 태백시의 시설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탁단체인 비영리단체들이 자체적으로 이를 개선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엄두도 못 낼 형편이니 태백시가 직영해야 시설의 안전과 환경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청소년지도사들의 주장이다.  

태백시는 올 초 4번의 위탁기관 공모에도 사실상 아무도 응모를 하지 않자 처음에는 직영하려고 추진했다. 그러고선 난데없이 노인복지재단에 위탁하려고 추진 중인데 직영에서 위탁으로 선회한 이유는 사실상 청소년지도사들을 공무직으로 전환하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란다. 

태백시가 자신들이 출자한 태백복지재단에 청소년시설을 위탁하려는 근거는 2017년 공포된 행정안전부 소관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이다. 여기에 ‘지자체 출자·출연 기관은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을 대행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청소년활동진흥법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청소년시설을 위탁할 경우에 “청소년단체”에 위탁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지난 2014년도에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여성가족부와 전국 지자체에 청소년시설 위탁은 시설관리공단이나 종교단체 등이 아니라 청소년단체에 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당시 153개 지자체 중 50%가 넘는 곳이 임의로 조례를 만들어 청소년단체와 상관없는 곳에 청소년시설을 위탁하는 것은 상위법인 청소년활동진흥법을 정면으로 위반한다는 것이 권익위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적지 않은 지자체들이 출자·출연 기관은 아무 곳이나 다 맡아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노인복지재단이 무슨 청소년육성 업무를 한다는 말인가. 대충 놀아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소년육성에 대한 공무원들의 천박하고 무지한 인식을 드러내는 태백시 사례를 보며 터져나오는 탄식을 참을 수 없다.

<이영일 | 한국청소년정책연대 공동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한의 3대세습, 재벌세습에서 보듯 ‘세습’은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렇다고 대를 이어 물려주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까이에서 보고 배워 외부 사람보다 능력이나 기술이 더 나을 수 있다. 대물림되는 장인(匠人)과 노포(老鋪)가 사랑받는 이유다. 문제는 공과 사를 구분 못한 채 사유화하고 물려주는 일이다. 교회세습이 비판받는 이유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운다고 한다. 사적으로 소유하고, 매매하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공동체가 교회다. 교회가 공적기관이라는 사실은 목회자들이 더 잘 안다. 여론조사를 보면 목회자들의 교회세습 반대 비율이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높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목회자 세습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것은 돈,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목회세습을 일으킨 충현교회, 광림교회, 왕성교회, 금란교회 등은 모두 대형교회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가 확인한 세습교회 143개 중 80%에 해당하는 113곳이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다. 가난한 시골에 세습교회는 한 곳도 없다. 

2017년 11월 담임목사를 아들에게 넘겨줘 세습 논란을 일으켰던 명성교회가 교단 재판국으로부터 교회세습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다. 서울 명일동에 있는 명성교회는 신자수 10만명의 초대형교회다. 창립자 김삼환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과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대표대회장을 역임한 ‘한국 개신교의 얼굴’이다. 교회 안팎에서 명성교회의 세습이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명성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2013년 세습금지법을 교단헌법으로 채택해 이번 판결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 

교단의 판결로 김삼환 목사의 아들은 명성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됐다. 이번 판결이 명성교회뿐 아니라 대형교회 세습에 경종이 되어야 할 텐데,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명성교회 측이 판결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사회의 공기를 흐릴까 걱정이다. 담임목사 시절 김삼환 목사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명성교회가 창립자 김 목사의 말을 실천했으면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것이 인간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이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고전과 교양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만 68세의 나이로 자기 집에서 투신자살해 충격을 주었다. 그 모진 수용소 생활도 견뎌냈던 그가 무엇 때문에 자살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평소 인간이라면 도저히 겪어서는 안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처참한 경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그 점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레비 자신을 포함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꾸는 꿈에 대해서도 털어놓곤 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청중들이 아무 반응 없이 듣거나 역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고 말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곤 했다는 것이다. 레비는 그럴 때마다 경험하는 무력감, 실망감, 절망감이 너무 크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감정이 그를 자살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현실의 고통보다도 남들에게 자신의 고통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일들이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그런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이야기는 삶에서 의미와 희망을 잃었을 때 인간은 곧 살아갈 힘마저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상담하면서 자기가 저지른 실수나 다른 사람들에게 당한 모욕, 멸시, 간섭 등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롭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매번 “그런 과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인간은 기억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기억 때문에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억이 인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기도 하다”는 요지의 말을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과거에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불어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내가 나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태어난 이래로 경험한 모든 것들이 다 우리 뇌에 저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전의식의 세계에 자리 잡고 있다가 뭔가 그 기억을 자극하는 것에 의해 다시금 회상되어 의식의 세계로 나타난다고. 그런가 하면 융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유전자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는 집합 무의식을 주장했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단지 회상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의 기억이라는 세계에는 어마어마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 뇌에 등록되고 저장되었다가 회상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기억이다.

뇌 자체에 문제가 생기면 등록도 안되고 저장도 안된다. 하지만 단지 심인적인 문제인 경우엔 회상만 안되거나 회상이 되어도 왜곡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회상 과정에 감정이 연관된다. 즉 내가 기쁘면 즐거운 기억이, 내가 괴로우면 힘들고 괴로운 기억이 회상되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학과 의사들이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회상에 문제가 생기는 상태가 곧 치매이다.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회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빈 서판’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해도 내 삶의 의미를 모르게 되니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험한 사건들에 대해 그것을 회상하고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치매에 놓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레비가 자살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시민들의 반일 감정에 편승해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쏟아내는 대일 강경론이 도를 넘고 있다.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응특별위원장은 “도쿄를 포함해 (여행금지구역 지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민주당 간사인 신동근 의원은 “(도쿄의 방사능 검사를 위한) 민관합동 조사단을 구성해 점검을 실시해야 한다”며 “조사결과에 따라 도쿄올림픽을 보이콧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강력한 대일 압박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일견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이런 대응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정봉주 통합민주당 전 의원, 김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일본가면 코피나’ 티셔츠를 입고 있다.(왼쪽부터) 정봉주 전 의원 페이스북 캡처

한술 더 떠 정봉주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진과 ‘일본 가면 KOPINA(코피나)’라고 쓰인 티셔츠 사진을 올렸다. 그러면서 “2020년 올림픽도 참가하면 방사능 때문에 코피 나고 암 걸린다는 것을 널리 알리겠다”고 적었다. 한·일 경제갈등을 희화화한 것도 모자라 ‘코피노(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연상시키는 유치한 조어(造語)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서울 중구청은 6일 관내 주요 도로 가로등에 일본제품 불매와 일본여행 거부를 뜻하는 ‘NO JAPAN’ 배너 깃발을 내걸었다가 빗발치는 비판 여론에 한나절 만에 모두 거둬들였다고 한다. 비록 해프닝에 그쳤지만, 일본인 관광객에게 공포심만 안겨줄 게 뻔한 이런 대응이 사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가. 극일 의지는 무도한 조치를 행한 아베 정권을 향해야지, 일본 시민들까지 적으로 돌리는 ‘무작정 반일’이 되어선 안된다. 중구청 사례는 ‘반일 이벤트’를 기획하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 여행 거부와 불매운동을 통해 극일 의지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나 이는 정부 지원 없이 시민 스스로 펼치는 게 중요하지, 사태 해결을 주도해야 할 정치권과 관(官)이 앞장서거나 부추길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들이 아베 정권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들은 ‘반아베 공동행동’을 위해 손을 맞잡고 연대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 시기에 감정 섞인 거친 대응은 반아베 시위에 공감하는 일본 시민을 위축시키고, 양국 시민 교류마저 어렵게 할 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