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는 구상”이라기보다, 그 길밖에 안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유승민 의원과 통합 안 하면 자유한국당 미래는 없다.” 친박에게 배신자로 터부되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하 경칭 생략)을 한국당의 미래와 접속시킨 나경원 원내대표는 최소한 솔직했다. 당대표 바뀐 것 빼고는 달라진 게 별로 없는, 외려 거꾸로 퇴행한 한국당이 이대로는 미래(선거 승리)가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국당 지지율은 18%를 기록했다. 6개월 만에 황교안 대표 체제 이전으로 돌아갔다. 철 지난 ‘냉전보수’도 모자라 ‘친일보수’의 덮개까지 쓴 한국당의 퇴화를, 탄핵 2년 만에 당 주류로 복귀한 친박의 존재만큼 위시하는 것도 없다. 한국당의 문제를 기득권·꼰대·웰빙 이미지로 지목한 당혁신위의 진단은 고답적이다. 진단이 엉뚱하면 처방도 돌팔이기 십상이다. 황교안 대표는 선거에서 이기는 “간단한 방법”을 내놨다. ‘3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승민의 바른정당계와 우리공화당을 묶는 통합은 애초 불가능하다. 설령 어찌하여 ‘도로 새누리당’만 되면 무조건 내년 총선과 다음 대선에서 이긴다, 이거야말로 정신승리법이다. 궤멸적 참패를 당한 지난 지방선거가 단순히 보수의 분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선관위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알 수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7일 국회에서 열린 당대표및 최고위원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왼쪽)와 황교안 대표가 7일 국회에서 개최된 당 대표 및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왜 유승민일까. 나경원이 미래까지 거론하며 호명한 건 유승민으로 표징되는 개혁 혹은 합리적 보수의 공간과 이미지다. 황교안 체제에서도 인적 청산 등 혁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렵다는 게 드러났다. 인물도, 이념도, 정책도 죄다 수구적인 한국당은 스스로 외연 확장이 힘들다. 탄핵 전후로 돌아간 지지율이 징표다. 한국당 지지 행위를 ‘쪽팔려 하는’ 중도 보수층을 되돌리지 않고는 선거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 그 ‘쪽팔림’을 희석시켜줄 존재로 유승민이 필요해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 혁신’을 주창했다가 배신자로 찍혀 축출됐고, 탄핵에 참여했고, 여느 보수 정치인보다 사회경제 정책에서 개혁적인 유승민이다. 황교안 다음으로 보수 대선주자 지지율 2위에 올라 있다. 스스로 고쳐쓰기 불능인 꼴통보수의 변화 코스프레를 포장하기 위해 이만한 재료가 없다. 친박의 거부감을 모를 리 없는 나경원이 당의 미래까지 들먹이며 유승민을 스토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은 재산 정리를 둘러싼 추한 싸움으로까지 비춰지는 바른미래당의 내전으로 옹색해진 유승민(계)의 처지가 그 스토킹을 거리낌 없게 만들었을 게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기득권 양당구도를 강요하는 힘은 맹렬해진다. 더욱이 ‘3당’ 바른미래당이 자멸할 지경인데 이 힘이 가만 놔둘 리 만무하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 연합뉴스

매번 기대 이상의 나락을 보여주는 바른미래당의 막장극을 그래도 시청하는 것은 유승민(계)의 향배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당 비당권파가 탈당해 제3의 대안신당을 부르짖지만 쪼그라든 ‘호남 기반’에 기생하려는 ‘국민의당 시즌2’는 성공할 수 없다. ‘촛불’과 ‘태극기’ 사이 공간에서 지금 텅텅 비어 있는 곳은 가운데와 태극기 사이 중도우파 땅이다. 바른미래당의 실패도 이 영역을 개척하는 대안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틀린 정당구도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한국당의 극우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지금은’ 개혁보수의 등대 역할이 더 절실하다.

결국 유승민(계)이 관건이다. 한국당은 아무리 ‘살길’이라고 한들 과거(박근혜)와 절연하고 탄핵을 털고 가지 못할 것이다. 통합을 위해 내밀 수 있는 건 ‘반문연대’의 빈약한 명분과 당선을 담보하는 공천뿐이다. 다름 아닌 유승민을 움직이기에는 턱없다. 굳이 평론을 들이밀 것도 없다. 유승민은 지난 5월 동국대 강연에서 이랬다. “한국당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저히 바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팔고 태극기 붙잡고 갈 것 아니냐. 그런 보수 하려고 4년째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강연에서 이런 다짐도 했다. “정치하는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가 추구하는 게 있으면 그걸 끝까지 해봐야 한다. …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한국당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저쪽이 기웃거리고 나면 국회의원 한두 번 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다. “새로운 보수, 건강한 보수가 진짜 힘든 일이지만 그게 옳은 길이라면 누군가 시도하고 그러면서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유승민은 끝까지 개혁보수의 깃발을 놓지 마라. ‘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교섭단체 대표연설(2015년)을 소환하자.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보수정당의 타락을 위장하는 장식으로 쓰이기에는 그가 그리는 보수의 가치가 너무 소중하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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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씨(74) 가족을 처음 만난 건 2009년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재판장이 판결을 선고하자, 피고인석과 방청석에선 분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환호라고 할 수도 없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탄식하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이도 보였다. 사연 없는 소송이 없고, 승소와 패소로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이 판결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더욱 그랬다.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이었다.

박동운씨와 박씨의 고모부 허현씨, 고모 박미심씨(왼쪽 사진부터)는 1981년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인 이들은 38년째 ‘가해자’ 국가와 싸우며, 다른 사회적 약자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법조를 출입한 뒤 처음으로 취재한 재심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4년차 기자였다. 군사정권 시절 위정자들은 민간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나라의 군기(국민들을 다 부하처럼 여겼던 것 같다)’를 잡았다. 무작정 잡아다 감금하고 고문한 뒤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간첩단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경향신문도 그때 그런 보도를 했다. 1981년 7월31일자 경향신문 1면을 보면, 왼쪽 머리기사로 ‘부부, 아들 낀 고정간첩 7명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진도를 거점으로 24년간 암약했다”는 내용과 함께, 피의자 5명의 얼굴사진도 실렸다. 그때 두 살이던 나는 물론 이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한 피해자의 말 때문에 옛날 기사를 찾아봤다. 그날 재심재판이 끝나고 기자들은 법정 밖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렸다. 28년 만에 ‘간첩’이라는 멍에를 벗은 소감을 듣기 위해서였다. 한 피해자가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가 간첩이라고 신문 1면에 썼잖아요. 이제 우리가 간첩이 아니라고, 다시 그만 한 크기로 써줘요.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박동운씨의 고모부, 허현씨였다. 하필이면 허씨의 정면에 서 있던 나는 그 말이 가시 같았다. 슬픈 예감은 맞았다. 28년 전의 기사를 보며, 얼굴이 벌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갔다. 국가는 “너를 간첩이라 부르기로 했으니 간첩이라고 말하라”고 했다. 고문받을 때 질끈 감아 견뎌낸 눈가엔 어느덧 주름이 들러붙었다. 이 가족은 지난 세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만 볼뿐, 제대로 된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했다. 사진 위부터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생존자 박동운씨, 허현씨, 박미심씨.

2019년 7월10일 전남 진도에서 박동운씨와 허현씨, 박미심씨를 만났다. 좋은 일로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여전히 국가의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취재하기 위해서 만났다. 박근혜 정부에선, 양승태 대법원이 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개발해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시도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재심을 거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법무부가 상고해 이를 또 막고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 8명 중 3명은 고인이 됐고, 생존자들은 모두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다. 박씨 가족을 다시 취재하면서, 국가로부터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사회로부터 매정한 손가락질을 당한 이들이 지난 10년간 묵묵히 다른 피해자들(고문피해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용산참사 피해가족, 세월호참사 가족)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멍했다. 잔인한 국가는 여전히 이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이들을 망치는 데는 실패했다. 박동운씨 가족은 스스로 ‘피해자’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피해자들의 품격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10년 전 이 가족의 사건을 처음 취재했던 나는 14년차 기자가 됐다. 지금의 경향신문은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발표한 사건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전두환 정권 때 시작된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정권이 7번 바뀐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국가만,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9일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 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38년 전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굳이 산과 바다에까지 맹세할 필요는 없다. 행정문서(상고 포기) 한 장이면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국가의 품격을 기대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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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옥

지난 하루를 되짚어본다. 깜깜한 밤을 지나 새벽에 눈을 떴다가 한숨 더 잤다. 날이 훤해지고서야 알람의 독촉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멀리까지 신호를 보낸 뒤 바닥을 짚고 일어나 직립했다. 달그락달그락 밥그릇을 비우고 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서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검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섰다. 현관은 玄關으로 쓴다. 왜 ‘검을 현’일까. 

우리는 통상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에서 처음 현을 만난다. 저 천자문의 첫 대목에서 玄을 ‘검을 현’으로 훈을 달면서 그저 ‘검다’라고만 이해한다. 하지만 하늘을 형용하는 검다, 라는 말은 가물가물하다, 라는 뜻에 가깝다. 아득히 멀고 깊어서 가물가물한 경지를 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멀고 깊으면 검을 수밖에 없는 게 상식이기도 하겠다.

그제 절친한 꽃동무가 산에서 만난 염소를 찍은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녹색을 배경으로 까맣기 그지없는 어미 염소가 더욱 까맣게 압축된 새끼 염소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었다. 염소는 ‘검다’라는 형용사의 우두머리인 양 온통 까맣다. 털은 물론 온몸이 구석구석 새까맣다. 염소는 마침내 똥마저 검은 것으로 생산한다. 검은색이 거느리는 세계에서 가장 정통하고 우뚝한 존재.

한편, 까망이 장악한 풍경에서 아는 식물을 하나라도 찾으려니 염소 뒤에 앉아 있는 고사리가 보인다. 염소와 같이 소과(科)에 속하는 양의 이빨을 닮았다는 양치식물의 대표 격이다. 우리나라에 무려 350여 종이나 자생한다는 고사리 앞에서 내가 깜깜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실감한다. 그러니 오늘은 그냥 고사리라고만 여기에 적을 뿐.

흑(黑)과 현(玄)의 차이처럼 블랙과 다크는 확실히 구별된다. 염소의 털은 블랙이지만 눈은 다크라고 해야 함이 옳다. 

우리는 아침에 현관을 열고 세상으로 나왔다가, 저녁이면 현관을 닫으며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집과 세상 사이의 현묘한 문(門)인 현관을 玄關으로 표기하는 건 참 적절하다 하겠다. 눈알마저 새까만 염소 가족을 보면서 현관 바깥을 거니는 나를 겹쳐보느니, 지금 대체 어느 소용돌이 속을 나는 깜깜 헤매고 있는 중이더냐!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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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북악과 함께 서울을 대표한다. 진산(鎭山)인 북악이 임금의 땅이라면 안산(案山)인 남산은 백성들의 거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후 남산 정상에 목멱신사를 세웠다. 오늘날 국사당의 전신이다. 당초엔 이름 그대로 국가 제사를 담당했으나 뒤에 서민의 기도처, 무속인의 굿당으로 변했다. 

남산과 일본의 악연은 역사가 깊다. 조선 전기 남산 기슭에는 일본 사신의 숙소 동평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의 진지로 사용됐다.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남산 자락은 일본인의 집단거주지가 되었다. 지금의 숭의여대 일대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전후해 남산 침탈을 본격화했다. 방식은 신사와 공원 만들기였다. 1898년 경성신사로 시작된 신사 건립은 1925년 조선신궁으로 정점에 달했다. 조선신궁은 일왕가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일왕을 제사신으로 삼은 한반도 내 조선신사의 총본부였다. 20만평의 대규모 신궁이 들어오면서 국사당은 서대문 밖 인왕산 중턱으로 쫓겨났다. 신궁 설치에 맞춰 경성역과 경성부립대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도 개장했다. 일본의 신사 통치를 근대문명으로 포장하려는 노림수였다. 조선신궁은 식민통치의 이념을 제공한 핵심 장소였다. 

광복이 되면서 조선신궁은 해체됐다. 흔적 지우기의 일환으로 동상 건립이 논의됐다. 백범 김구가 1순위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승만 동상이 맨 먼저 건립됐다. 25m 초대형이었지만 4·19혁명과 함께 철거됐다. 1959년 5월에는 안중근 동상이 건립됐다. 당시 안 의사의 동상이 세워진 곳은 숭의여고 앞이었으나 196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백범 동상은 우여곡절 끝에 1969년 세워졌다. 

14일 위안부기림의날을 맞아 조선신궁터에 위안부기림비가 제막된다. 남산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원 앞에 세워지는 기림비는 한국·중국·필리핀 소녀 3명이 손을 맞잡고, 이를 고 김학순 할머니가 바라보는 모습을 실물 크기로 표현했다. 샌프란시스코 위안부기림비를 만든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의 작품이다. 인근에 안중근과 김구의 동상이 있다. 모레는 74주년 광복절, 치욕의 역사현장에 당당히 선 김구·안중근·김학순의 외침을 새겨야 할 때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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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생활 반세기를 넘기면서 그동안 모았던 많은 책들을 얼마 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은 구입한 동기가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어떤 책은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전공인 철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문학작품이나 예술 관련 서적들도 모두 저자가 살았던, 아니면 살고 있는 시대의 고민과 희망을 담고 있다. 어떤 책들은 이미 고전이 되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지만 어떤 책들은 당시에는 많이 읽혔으나 지금은 아예 잊혀졌다. 

내 독일 생활의 시작은 전후에 견고해진 냉전체제를 부수는 작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의 기초는 물론 마르크스가 제공했다. 서가의 한쪽에 꽂혀 있는 <자본론>을 먼지 털며 펼쳐 보니 나도 곳곳에 주를 달면서 꽤 열심히 읽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마르크스의 계승자로 추앙받았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당시에는 필독서였다. 다른 책장에는 중국어와 독일어판의 <모택동선집>이 꽂혀 있다. ‘문화대혁명’ 때 사회주의혁명과 건설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졌던 중국과 소련 사이의 논쟁에 큰 몫을 했지만 이제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내가 몸을 담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이런 소용돌이 속에 곧 휩쓸렸는데 이의 수장 격이었던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는 과격해진 학생운동을 ‘좌익 파시즘’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들과 결별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필독서처럼 읽혔던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은 두 권이 서가에 나란히 꽂혀 있는데 한 권은 내가 구입했고 다른 한 권은 저자가 우리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며 보낸 선물이었다. 

사회 변혁을 추구했던 이론과 실천이 난관에 봉착하자 출구를 테러에서 찾는 급격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새로운 대안을 찾아 닻을 올린 ‘녹색’운동도 이때 시작했다. 이는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기할 점은 이 대안이 마르크스나 레닌 같은 어떤 출중한 이론가나 실천가에 의해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프랑스의 앙드레 골츠와 같은 이론가도 있었지만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을 모색했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제 ‘큰 이야기’ 대신 ‘작은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은 특히 프랑스의 지성계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이른바 ‘탈현대’의 탄생이었다. 현대가 전제했던 이성에 의해 배제 또는 추방되었던 세계를 다양성의 폭력없는 통일이라는 기치 밑에서 복권하려는 시도는 미국의 학계나 예술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낳은 독일의 분위기는 정작 그렇지는 않았다. 라인강을 경계로 서로 이웃한 독일과 프랑스는 이 점에서도 역시 차이를 보여주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탈현대에 관한 논쟁은 곧장 ‘역사는 끝났다’라는 ‘탈역사’로 옮겨갔다. 한편에서는 역사라는 명제로써 더 이상 진보에 대한 꿈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을 체념과 냉소로 맞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기에 이제 더 이상 역사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고 단언했다. 이와 더불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일상적이거나 진부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심미적인 이성에 심취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런 정신적 상황 속에서 나는 역사가 정말 끝났는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탈역사에서 오는 체념이나 또는 낙관으로 역사를 아예 폐기처분하려는 태도가 실은 역사를 오로지 서구의 궤적에 따라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주민 문제를 앞세운 인종주의마저 기승을 부리는 서구 사회의 현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쉽게 역사를 장송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역사와 세계는 앞으로도 열려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화두는 아무래도 ‘지구화’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민족국가 단위의 삶이 흔들리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정보흐름은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의 세계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 악화일로를 달리는 한·일관계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경제권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는 두 나라가 일제의 만행과 독도 문제로 압축 표현될 수 있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 의해 여전히 제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이 사라지고 시간도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는, 맥루한이 묘사한 지구촌의 의미를 우리는 비판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참된 지구화란 개별적인 지역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하나가 된 지구촌 안으로 이것들이 강제로 흡수되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얼마 전 작고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도 ‘지구적’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본래 수많은 개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만들어내는 전체라고 강조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내가 경험한 유럽의 지적 흐름을 담은 서가를 정리하는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코헬렛>의 구절을 인용한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한 페이지가 눈에 띄었다. 세계가 닫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자칫 허무감도 불러올 수도 있는 <구약성서>의 이 구절은 오히려 옛것을 통해 새것을 배운다는 <논어>에 등장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에 가깝다. 세계는 과거와 현재에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열려 있으며, 세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노력도 끊임없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90세를 맞은 하버마스 교수가 올 11월에 1700쪽에 달하는 믿음과 앎의 관계를 서술한 책을 낸다. 종교가 세속화되는 과정 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보았던 계몽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였다. 이성의 아주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종교문제에 대해 그가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늘과 미래를 위한 과거의 의미를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거운 책들을 정리하면서 앞으로는 전자책이 인쇄된 책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오래된 책이 발산하는 기분좋은 냄새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락사락 들리는 소리를 책의 속성처럼 여겨온 내게는 이런 일이 아직은 먼 훗날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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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관광지라고 하면 경치가 좋거나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를 뜻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관광지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이나 맛집 골목 등이 입소문을 타고 새로운 관광지로 뜨는 등 그 외연을 넓히고 있다. 서울시내에도 스토리를 입혀 새로 단장해 관광지가 된 곳들이 많고, 이른바 ‘뉴트로’라 불리는 신(新)복고풍 관광도 유행하고 있다. 서울 을지로는 최신 유행을 뜻하는 ‘힙’을 붙여 ‘힙지로’라 불리기도 한다. 원래 50~70대가 주 고객이었던 이곳은 번화가 바로 옆이면서도 오래된 풍경이 이야깃거리가 돼 20~30대 젊은층의 명소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렇게 젊은층의 명소로 뜬 공간과 장소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순식간에 알려지면서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트렌드가 국내 다른 지역으로는 확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광은 지역에 새로운 인구를 유입시켜 숙박업, 음식업, 소매업 등을 활성화시키고, 제조업보다 고용창출 효과가 커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은 여전히 서울·제주 외에는 상대적으로 매력이 낮고 접근성이 부족해 특정 지역 관광 편중 현상이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특정 지역으로만 편중된 관광은 지속적인 새로운 수요 창출에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타 지역으로 관광객 수요를 분산시켜 지역 간 균형발전을 이루고, 관광객의 재방문율도 높이는 방안이 절실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관광은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스마트관광은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관광객이 기억할 만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개별 관광에 필요한 정보와 편의 기능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와 연계된 관광객 성향 및 관광패턴 분석, 증강현실 및 가상현실에 기반한 콘텐츠 개발, 그리고 관광형 모빌리티 서비스 제공 등을 포함한다. 

최근의 여행 패턴을 보면 관광객들의 기호가 더욱 다양화, 차별화되고 있어서 관광상품 개발도 매우 세분화하고 맞춤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20~30대의 젊은 세대는 소셜미디어에서 보여주기 좋은 이른바 핫플레이스를 선호한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언어권에 따라 아시아권은 쇼핑을 선호하지만, 유럽과 미주권은 한국어나 한국 문화유산에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런 성향과 관심을 파악해 관광코스 개발이나 차별화된 관광정보 제공으로 지역 방문을 촉진시킬 수 있다. 

또한 스마트관광은 지역의 문화·자연자원에 이야기를 입혀 지속 가능한 관광을 가능케 한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로 지역의 관광지를 새롭게 해석할 수도 있다. 영국의 맨체스터는 산업혁명 이후 몰락하던 도시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에 기반한 첨단도시의 이미지로 탈바꿈시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접근성 측면에서 스마트관광은 보다 많은 관광객이 지역으로 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예컨대 20대 관광객이나 외국인 관광객은 지역 관광 시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지역의 스마트관광 플랫폼이 모빌리티 서비스와 연계되면 열차, 버스, 공유차량, 공유자전거 등에 대한 외국어 서비스가 지원되고 결제도 편리해져 이들이 지역을 편하고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새로운 세대와 관광 트렌드에 부응하는 스마트관광을 통해 취약했던 지역 관광을 활성화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할 때다.

<정남호 | 경희대 스마트관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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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한국인 대다수는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라는 질문에 새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들이 알던 ‘조선민족’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유지할 능력도, 근대 문명을 향유할 능력도 갖지 못한 저열한 민족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일본민족의 지도하에 특유의 나약하고 비루하며 나태하고 불결한 민족성을 척결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과제라고 배웠다. 그때까지 그들은 문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자의식을 소멸시키고 일본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담론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자의식을 떨쳐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열강의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설령 즉각 독립을 이룬다손 쳐도, ‘조선민족’에게 그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격을 남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지식인들이 먼저 ‘민족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신탁통치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1946년, 김성칠은 “그릇된 일본 교육으로 말미암아 부지중에 아이들의 뇌수에 밴 자기모멸의 사상을 씻어 버리고 우리 민족에 대한 자신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새로운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조선역사>)고 주장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듬해 김광훈은 일본이 조선민족을 식민지 민족으로 묶어두기 위해 개조한 역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일본 어용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개조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 조일(朝日) 동화정책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착취를 완수하며 조선민족을 노예화하려는 것이니 왈, 조선 역사의 장구성은 부당하다. 왈, 고구려는 조선 역사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왈, 삼국은 일본에 노예 당하였다. 왈, 조선민족은 타율적으로 움직였다. 왈, 조선민족은 열등족이라. 왈, 일선(日鮮)은 동조(同祖)이라 등등 무수 잡다한 골계(滑稽)와 소위 걸작(傑作)을 연출시켰으니 이것으로써 그들은 조선민족이 당연히 일본과 동화일체가 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민족이라는 지위를 감수하여야 옳을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어 소위 내선일체 일본 식민지화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일제 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오늘날에 있는 것이다. 이 불유쾌한 사생아가 후안무치하게도 횡행하는 것이다. 이들이 횡행하는 역사적 지반은 구태여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니와 일제 역사를 그대로 재판(再版)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다.”(<일인이 개조한 조선역사> <신천지>)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은 ‘역사적 지반’이란 정치적 식민 지배는 끝났으되 정신적, 사상적 식민 지배는 끝나지 않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어떤 문제든 인식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본인 학자들이 수십년간 근대적 방법으로 구축해 놓은 역사상(歷史像)을 짧은 시간 내에 재구성할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민족적 자의식은 이미 관행, 관습, 문화, 제도로 굳게 뿌리내린 상태였다. 게다가 엘리트 집단의 대다수는 식민지 시대의 자의식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광복 이후 많은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했지만, 대학교재로 쓸 만한 책도 없었다. 일본인 학자들이 버리고 간 헌책을 구해 보거나, 일본에서 오는 책 밀수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광복 10년이 넘도록 ‘불유쾌한 사생아’는 계속 성장했다.

물리적 환경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서울 주요 가로변에는 와타나베 모자점, 후지모리 운동구점, 나카무라 시계점 같은 간판들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간판을 바꿀 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총독부 청사가 정부 중앙청사로, 조선총독 관저가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현실에서 상인들도 굳이 무리해서 간판을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조선어 말살정책의 영향도 무척 오래갔다. 광복 직후에는 한글을 새로 배워야 하는 ‘지식인’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글보다 일본어 가나가 훨씬 더 익숙했다. 많은 지식인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일본어로 작성했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수많은 사물과 개념들이 여전히 일본어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자는 주장조차 불온시되었다. 집권세력이 이런 주장을 ‘친일파 청산’과 같은 정치적 맥락 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식민잔재 청산 주장이 다시 분출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주권자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 4·19 이후였다. 광복 이후 15년간 미뤄두었던 민족 정체성 재정립의 과제를 속히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재개를 앞두고는 정부도 이를 중요한 국가적 문제로 인식했다. 박정희 취임식에 파견된 일본 특사가 “아들의 경사에 참석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진 판국에 민족의 자존심을 헐값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비난까지 받는 형편이었으니,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만들어 보여주어야 했다.

관(官)과 민(民)의 의도와 방향은 달랐으나, 이 무렵부터 식민사관 극복이니 민족정기 확립이니 하는 말들이 인구에 회자되었고 일본어 퇴치운동도 본격화했다. 하지만 일상 언어생활에서 벤토, 와리바시, 즈봉, 도쿠리 같은 단어들이 사라진 것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식민지 민족의 자기모멸’을 배우지 않게 된 것도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물리적 환경도 그 무렵에서야 확연히 바뀌었다.

그로부터 40여년, 최근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식민잔재 청산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드러내고 있다. 지금의 한국인은, 독립국가 국민과 식민지 주민으로 나뉘어 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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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20년을 한 단체에서 일하면서 여성 등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사람. 2019년 8월8일. 그는 최선을 다했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료들은 그가 “위대한 활동가”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날, 조용하게 추모의 마음이 흐르던 온라인 공간에 고인의 생전 활동을 폄하하는 문장이 하나 올라왔다. 방송인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렬씨가 자신의 개인 트위터 계정에 쓴 글이었다.

“사유가 본인 상인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윤정주 위원이 방통위원직에서 빠진 건 참 다행이다.” 이렇게 쓴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윤 위원은) 이재명 지지자다”라고 답했다.

이정렬씨는 2018년 8월 방송된 TBS TV <품격시대>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하하는 은어인 “찢묻었다”를 사용한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민원이 제기되자 방송통신심위위원회에서는 징계를 결정한다. 이 심의회의에 윤정주 소장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씨가 윤 소장을 ‘이재명 지지자’라고 단언하고 비난한 이유다.

그런데 당시 방심위 회의록을 살펴보면 이씨의 해석은 과도하다. 윤 소장은 민원이 제기된 “찢묻었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의 성기를 찢어서 묻는다는 말에서 나온 표현”으로 이런 단어가 공영방송에서 사용되면 안된다는 것.

여느 인터넷 용어와 마찬가지로 “찢묻었다”라는 말의 어원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다. 하지만 대체로 “이 지사와 그의 형 사이에 있었던 욕설 공방 중 이 지사가 “형수의 X지를 찢어 묻어버리겠다”는 욕설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문제의 용어는 이로부터 비롯된 별명이라고들 설명한다. 이후로 “찢=지지=더럽다”로 전유되었고, “찢묻었다=더러운 것이 묻었다=이재명 지지자다” 정도의 의미로 유통되고 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성적 폭언에 근간한 은어를 비판하는 것은 지금까지 윤 소장이 해 온 활동과 크게 어긋남이 없는 판단이다. 그의 심의위원 활동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치적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여기에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는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윤 소장의 ‘편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씨의 편협한 문해력이다. 궁찾사(혜경궁김씨를찾는사람들) 법률 대리인 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갈등을 빚어 온 그는 자신에 대한 방심위의 판단조차 진영 논리 안에서밖에 해석할 줄 몰랐던 셈이다.

이씨는 자신의 트윗이 문제가 되자 또다시 “윤 위원은 방심위원으로 일할 때 이재명 지사가 관련되어 있으면 편파적인 결정을 해 왔다”고 부연(혹은 변명)했다. 여전히 그 판단 근거는 밝히지 않은 상태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러게 생전에 잘 살았어야지”라며 다시 또 윤 소장을 깎아내린다. ‘품격시대’는커녕, 저열한 말의 칼춤이 트위터를 타고 흐르는 중이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시간. 동료들과 유가족은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고인이 활동하던 공간들을 방문했다. “꼭 방심위에도 들려 달라”는 방심위 직원들의 부탁에 그곳 사무실과 회의실에도 들렀다. 그가 앉던 회의실 책상에는 추모의 꽃이 준비되어 있었다.

윤정주 소장은 지난 1년6개월 동안 1600건에 달하는 심의 안건을 받아 3520회의 안건 심의 기록을 남겼고, 여성과 소수자 문제와 관련해 페미니스트 심의위원으로서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해왔다. 덕분에 부당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런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방심위 내 양성평등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원들의 고충처리와 젠더문제 상담을 맡았으며,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 직원들이 꽃을 준비했던 마음을 알 것 같다.

품격이란 그런 것이다. 함부로 떠드는 입, 쉽게 놀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존재의 품격을 결정한다.

윤정주 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당신 덕분에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계입니다. 남기신 뜻은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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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님은 정말 수업을 사랑하는 분이었다. 시와 소설로 아이들과 만나는 교실은 그분에게는 삶의 가장 소중하고 기쁜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쓴 글을 눈물 콧물 찍으며 저녁 늦도록 읽으셨고 아이들이 만든 손바닥 시집을 줄에 매달아 복도 벽에 걸어 놓으셨는데,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의 꿈과 사랑이 형형색색으로 펄럭거렸다.

그런데 새로 가신 학교에서는 수업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앉으라고 해도 계속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일일이 붙잡아 손에 책을 쥐여주고 나면 10여분이 지나갔고,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는 아이들을 다시 앉히다보면 수업 종이 쳤다. 칭찬과 긍정으로 지도하면 학부모들은 담임이 애들을 혼내지 않아서 우리 아이가 피해를 본다며 항의했고, 반대로 아이를 나무라면 왜 우리 아이만 미워하냐며 담임교체까지 요구하는 반도 있었다. 많은 교사들이 이 선생님처럼 상처투성이 심장이 되어 방학에 들어갔다.

어쩌다 공교육은 이렇게 학생과 학부모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까? 교육이란 아이들이 자유와 책임이라는 자기 영혼의 두 날개를 펴서 세상이라는 하늘을 높이 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돕는 일이다. 학교는 이를 위해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의 삶을 함께 실현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곳이다. 그래서 교실은 수많은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존엄하고 소중한 공간이며 교사는 그러한 공적 역할과 의무를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엄중한 교실에서 교사에게 욕을 하면서 수업 진행을 어렵게 하는 학생이 있어도 그가 동의하지 않는 한 학생은 교실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의 수업권을 존중하느라 더 많은 학생들의 수업권과 교권은 지속적으로 침해를 받는다. 방과후에 지도하려 해도 학부모가 “우리 아이 학원에 가야 된다”고 하면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교육이라는 공적인 역할을 해야 할 학교에서 공적인 힘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교원지위 향상과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 개정되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을 강제 전학 보냄으로써 교원의 지위가 향상된다는 것은 교사의 정체성에 좌절과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학생들은 학교를 못 오게 하는 것밖에 가르쳐줄 게 없는 학교의 무능함을 더욱 비웃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학교의 교육적 역량 강화이다. 수업과 교권 침해야말로 학생들에게 자유와 책임,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깊이 가르칠 수 있는 중요한 교육적 기회이며 의무이다. 자유와 책임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서로를 통해서만 더욱 진실되고 깊어진다. 따라서 모든 교육정책은 교사와 학생들의 양손에 자유와 책임을 더 많이 쥐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계속 교사에게는 책임만, 학생에게는 자유만 주어진다면 자유와 책임 모두 상처를 입고 제 역할을 잃게 된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되 다수의 수업권을 침해할 경우엔 교실에서 분리해 깊이 있는 교육을 통해 책임을 배우고 학생의 학습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학부모들의 참여와 민원에 대해서도 교사의 교육활동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절차와 제도를 두어 보호해야 한다. 이처럼 교육공간을 존중하는 제도가 마련되고 학교가 더욱 적극적으로 교육의 공적 역할을 수행할 때 공교육과 교원의 지위는 저절로 향상될 수 있다.

<조춘애 |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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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구 얼굴이 가장 예쁘니?” “왕비님, 그건 백설공주입니다.” 거울은 늘 그렇게 답했고 새 왕비는 시기심에 눈멀어 예쁨 일인자를 없애려는 안달뱅이가 됐습니다. 왕의 사랑이 예쁜 친딸에게 가는 만큼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웠겠지요. 저쪽은 막 피고 이쪽은 막 지는 미모였으니까요. 속담에 ‘열흘 붉은 꽃 없다’가 있습니다. 성쇠(盛衰)는 돌고 도는 것이라 끝까지 온전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예기술이 발전해 오래 가는 꽃이 많다지만 여러 날 못 가 갈변하고 쇠락하는 건 여전합니다.

원예학회에서 백일초로 부르기로 한 ‘백일홍’과, 정식 명칭이 배롱나무인 ‘목백일홍’도 초여름부터 가을 전까지 백날 피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일초는 한 꽃이 길게는 한 달가량 꽃피고 그 사이 군락의 다른 꽃대에서 다른 꽃들이 피고 지면서 오래 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배롱나무 역시 가지마다 잔꽃이 꽃차례로 층층이 피고 지기를 거듭해 꽃 뭉치마다 오래오래 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석 달 열흘, 백날 피는 꽃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크면 껍질을 벗어버려 몸피가 매끈합니다. 그래서 유생과 승려들이 허물과 허울 없이 살고자 향교나 서원, 사찰에 많이 심었지요.

‘마흔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코코샤넬도 ‘20대 얼굴은 자연이 준 것이지만 50대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 했습니다. 살아 내는 날들은 나이 드는 얼굴에 골골이 새겨집니다. 사납고 탐욕스레 산 얼굴은 누구에게나 보이죠. 돈다발과 이름값, 비싼 꽃단장과 명품양복으로 회칠한들 조화(造花) 같고 미련스러운 노추(老醜)가 보입니다. 아직 배롱나무 꽃 한창인 늦여름입니다. 눈감을 때면 모두에게 인생 거울이 저승꽃에 비춰질 테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구 삶이 가장 예뻤니?”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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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분쟁이 첨예해지면서 점점 도드라지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요즘 무역분쟁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조금씩 희망적인 소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앞으로 1년 정도면 우리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피해는 일본의 수출 기업에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표적이다. 관련 기술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큰 피해를 입을 줄 알았던 우리 대기업들이 이미 상당량의 재고를 확보해 놓았다든가 혹은 일본이 아닌 제3국으로부터 대체 수입원을 확보했다든가 하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이 위기에 빠질 뻔한 나라를 구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잠시 무역분쟁 이전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위 10대 재벌 중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에 불려나오지 않은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벌에 비판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처벌과 재벌 개혁, 더 나아가 재벌 해체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은 때때로 모든 악의 근원처럼 비판받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재벌은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차분하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재벌은 무엇인가. 무엇이 재벌의 진짜 얼굴인가. 우리의 기업정책은 어디로 가야 하나.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하고 생산적인 국가·기업 관계를 설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견실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견실한 성장이 없으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다. 과거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기업 관계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한국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가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금융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하며 수출에 매진하는 발전국가체제였다면, 미국 같은 나라는 기업이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내버려두되 몇 가지 시장의 규칙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하는 규제국가체제였다. 한국에서 과거의 국가·기업 관계는 1987년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무엇이 시장의 질서인지 알 수 없는 ‘제도의 공백’ 상태를 이어왔다. 1987년이 기점인 것은 민주화 원년이라서가 아니라 그해 처음으로 재벌이 제2금융권 계열사를 통해 금융에 대한 국가의 지배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에 대한 국가의 실질적 견제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가 1987년에 도입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후 규제국가체제로 이행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제3의 어떤 질서를 만들어내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혼돈의 시장에서 기업은 규모를 키워갔고 그중 일부는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다. 정치는 기업의 권력을 인정하거나(노무현 정부),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대가로 기업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이명박 정부), 기업을 협박하거나(박근혜 정부), 기업에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보내왔다(문재인 정부). 지나간 정부들의 기업정책은 그때마다 달라져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표가 필요할 때는 반기업 정서에 기대 기업을 적대시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는 기업에 손을 내민다는 점이다. 그러니 기업은 살아있는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만 속으로는 비웃는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치도 기업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에 대한 비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배구조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대중은 재벌에 대한 반감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이 하는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와 글로벌 대기업에 대한 엄청난 의존도가 더 이상 공존할 수는 없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기업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처벌과 의존만을 번갈아 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는 직무유기 상태이다. 정치가 먼저 실용주의적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지배구조 문제를 장기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그 밖의 영역에서 기업이 꼭 지켜야 할 시장친화적 규칙들을 확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기업의 혁신을 총력으로 지원해야 한다. 정치가 혼돈의 시장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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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는 왜 고장이 잦을까? 

조지 애컬로프는 197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시장에서 질이 나쁜 물건 위주로 거래된다고 결론지었다. 판매자와 달리 구매자는 차의 특성이나 성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판매자가 매긴 가격이 합당한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서 ‘뽑기 운’에 기대야 하는 구매자는 평균 가격 정도를 지불하려 할 것이다. 그 가격에 좋은 차를 팔 수는 없지만 나쁜 차를 파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 나쁜 차만 거래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므로 합리적인 시장이 형성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연구하는 분야를 정보경제학이라고 하며, 이를 집대성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보의 비대칭이 낳는 여러 문제 중에 대리인 딜레마가 있다. 본인·대리인 문제라고도 하는데, 분업을 기본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생한다. 일을 맡기는 사람이 맡을 사람의 행태, 즉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제대로 된 재료를 사용하는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을 맡기는 당사자의 편익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비효율이 생긴다. 

이런 문제는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치나 공공행정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정보의 우위를 지닌 정치가나 행정가의 경우 자칫 주민의 편익을 무시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도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와 공공행정에서 발생하는 대리인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주민 주도의 노력 중 하나가 참여민주주의이다. 적극적으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하려는 행동이다. 주민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치를 실현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을활동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마을활동을 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참여민주주의나 주민자치의 실현은 수많은 마을의 욕구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이른바 ‘행복추구권’ 또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조항이다. 자기결정권이란 어떤 권력, 권위, 규범, 관습, 통념 등의 간섭 없이 자기 운명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말한다. 

마을활동을 살펴보면 자기결정권의 발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대한 지원은 헌법에 따른 기본권 보장이다. 

2012년 무렵 각 지자체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주민의 자치요구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의도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부처별로 각각 주민활동 지원사업을 벌임에 따라 지방행정도 실국별로 유사한 사업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마을공동체 활성화라는 명칭으로 흩어져 있던 지원사업을 묶으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한다. 귀찮고 어려운 일을 주민에게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행정의 연장으로 여기는 셈이다. 

이런 인식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관리와 간섭을 통해 드러난다. 모 광역단체의 협치 담당 팀장이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공무원과 같으니 근태관리를 받는 게 당연하다. 모든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라”고 일장훈시를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이 가능할 리 없다. 중간지원조직의 수많은 활동 중에는 위탁받은 행정업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주민자치나 자기결정권 실현이라는 주민의 염원도 실현해야 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헌신적인 활동도 중요하다. 마을에 대한 지원, 중간지원조직의 운영과 존폐에 대한 권한을 지닌 지방자치단체의 올바른 인식과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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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정부는 12일 이 같은 내용으로 전략물자수출입고시를 개정해 9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현행 고시는 화이트리스트 대상인 ‘가 지역’과 나머지 국가들인 ‘나 지역’으로 돼 있다. 개정을 통해 이를 3지역으로 세분화하고 일본을 ‘가의2’로 분류하기로 했다. 종전의 가 지역 국가들은 대부분 ‘가의1’로 분류돼 우대조치를 받지만 일본이 속할 ‘가의2’ 국가는 나 지역에 준하는 통제를 받는다. 즉 우대조치인 사용자포괄허가는 예외적으로만 인정되고, 수출 필요서류와 심사기간이 늘어난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만 정부는 고시 시행 전에 “일본이 요청하면 협의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협상의 문은 열어놓은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13일 (출처:경향신문DB)


정부의 이번 고시 개정은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행한 일련의 조치의 판박이이다. 일본은 전략물자 수출입 법령을 바꾸면서 한국만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고, 법령변경은 자국의 권한이라고 했다. 이에 한국도 일본을 상대로 동일한 방식으로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켰고, 국내법령 개정은 한국 정부의 고유권한이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서 불이익을 감당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조치는 일본이 자초한 것이다.


정부가 일본에 정면 대응하는 것은 ‘일본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내외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미온적인 대처로 나갈 경우 일본의 제2, 제3의 도발을 부르고 끌려가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명분 없는 도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신감도 반영됐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제외의 이유로 전략물자 관리 부실을 내세웠지만 확인 결과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더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이 외교적 사안인 과거사 문제에 경제보복 조치를 내려 자유무역 질서를 깬 것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당장의 갈등 고조는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한·일 간 경제전쟁의 장기화는 양국 모두에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커진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경제적 피해뿐만이 아니다. 벌써부터 민간교류가 끊기고 수십년간 쌓아온 신뢰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주권국가로서 상대국의 도발에 따른 당연한 대응이다. 하지만 일본이 이에 강력 반발할 경우 자칫 ‘강대강’이 부딪치는 치킨게임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양국 모두 협상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병행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이 같은 자세는 먼저 도발한 일본에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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