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체육분야 구조 혁신을 목표로 출범한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가 5월7일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5차례 권고를 발표했다. 1차 성폭력 등 인권침해 근절을 위한 권고는 인권침해를 ‘국가주의적, 승리지상주의적 스포츠 패러다임에서 기인하는 구조적, 제도적 차원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사건을 해결해야 할 클린스포츠센터,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등은 체육계 내부와 분리되지 않아 제 기능을 못했다고 지적했다. 1차 권고의 핵심은 체육계 내부로부터 분리된 ‘독립성, 자율성, 신뢰성’를 갖춘 ‘스포츠 인권보호기구 설립’이다.

2차 권고는 학교 스포츠 정상화로 학생 선수 학습권과 일반 학생 신체 활동을 증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눈에 띄는 것은 ‘합숙소 전면 폐지 실현’이다. 폐쇄적인 성과 중심의 훈련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합숙소는 운동이 끝난 후에도 훈련과 통제가 이어지게 한다. 훈련소 자체가 스포츠의 성격을 스포츠의 정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순이다. 주거 공간이 되어 쉴 수 없는 일의 연장, 사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공간인 합숙소를 유지하게 하는 성과 중심의 훈련이 문제다.

4차 권고는 평등정책 부재를 비판한다. ‘스포츠기본법’을 제정하여 ‘인간의 몸의 자유 실현 및 신체적, 정신적 복지 증진을 위한 삶의 중요한 행위양식’으로 스포츠를 정의하고, 모든 사람의 ‘스포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신위는 스포츠 인권 개념을 아동·청소년, 노인, 여성, 장애인, 이주민, 원주민, 성소수자 등 인구 집단 및 계층별로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체육진흥법 1조(목적)는 “나아가 체육을 통하여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이다. 국가가 추구하는 정상 신체들의 단련은 다양한 몸의 자유와 신체 활동을 스포츠를 통해 보장하기 어려웠다. 혁신위는 국가를 위해 신체를 단련하고 국위 선양을 목표로 하였던 국가주의 체육정책을 스포츠 인권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권고가 잘 이행되도록 정부와 국회의 노력과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대한장애인체육회의 2018년 장애인 생활체육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인 생활체육 참여율은 23.8%로 낮았다. 장애인은 재활체육에 비해 생활체육에 대한 접근성과 정보가 많지 않다. 치료 목적의 운동이나 2차 장애 예방은 권장되지만 장애를 가진 몸이 운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이 개입된다. 평창 패럴림픽에서 장애인 선수들을 감동의 영웅으로 등장시켰지만, 정작 올림픽 중계방송 접근권, 시설 접근권 등은 확보되지 않았다. ‘장애를 극복한’ 영웅을 비추던 모니터 밖의 수많은 날글엔 관심이 없다. 생활체육 기반의 낮은 접근성, 장애학생에 대한 스포츠 교육의 다양성 부재와 같은 구조적 열악함은 장애인 스포츠계를 더욱 협소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또 장애로 인해 훈련 전후 과정에서 신변 보조, 이동과 의사소통 등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는데, 이때 신체적 접촉이나 사생활의 개입에 대한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가 공정함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운동장 밖의 일상의 불평등한 룰(차별)들은 운동장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 다시 다양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것으로 운동장뿐만 아니라 몸과 스포츠를 가져와야 한다. 스포츠(운동)에 인권 ‘운동’이 필요한 때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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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근무 시절, 칠판에 “소신 없는 판사가 되자”라고 써 놓은 일이 있었다. 방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그걸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판사는 대쪽 같은 소신을 가져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소신 없는 판사가 되자니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판사가 한번 소신이라는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그것만큼 고약한 일이 없다. 소신이라는 이름 아래 사건을 선입관이나 편견으로 보게 될 우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로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나 납세자가 세무서를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어느 일방이 늘 잘못을 저지르거나 나쁘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판사가 사건의 결론을 낸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는 보수냐, 진보냐?” 글쎄, 그런 단선적 질문에 단순한 답을 내놓기에는 내 머리가 좀 복잡하다. 아니다, 고쳐 말해서 이 시대의 현실이 지독하게 복잡하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정치적 성향을 정의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곤란하다. 우선 북쪽에 왕정의 변종에 가까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내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보수적이고 때로 반동적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말이 내포하는 복잡성과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누가 내 견해에 찬성하겠는가. 이런 분석은 어떨까. 정치학 원론의 풀이에 따라 박정희의 이념적 성향을 보면, 그는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개입에 의한 급진적 개혁을 꾀하였으니 진보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견해에 동조할 사람도 많지는 않을 듯싶다.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회의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세력이 정치사상사에서 좌파로 분류된다면, 선뜻 이해가 되겠는가. 이렇게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단순명료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수나 진보라는 낱말을 쓸 때, 그것은 당장의 편의를 고려한 것일 뿐이다. 어느 누구의 특정 문제에 대한 견해나 행위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를 가르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라고 규정짓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그를 어느 개념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나 타인을 한쪽으로 밀어넣고, 거기에서 연역하여 자기의 말과 행동을 결정짓거나 남의 말과 행동을 평가한다면 과연 그게 옳을까. 더욱이 우리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을 생각하면, 누군가를 좌파나 우파로 일컫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좌파란 말은 해방정국에서의 좌우익 대립을 연상시키고, 그에 이어지는 한국전쟁이라는 처절한 비극과 이에 대한 책임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빨갱이’는 물론이고 좌파라고만 불려도 벌써 안전치 않은 것이다. 반대로 엄혹한 군사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 우파란 말은 사실 여하를 차치하고 독재에 부역하거나 동조한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진영논리란 바로 자신이든 남이든 누군가를 이런 분류방식에 따라 규정짓는 태도다. 그 태도는 무지스럽다. 한·일 경제전쟁에서 일본이 도발해 오기 전 대일청구권 문제에 관한 정부의 조치가 미숙했다는 견해에 동조하면 보수적이고, 반대하면 진보적인가. 거꾸로, 이 문제를 놓고 보수주의자라면 정부를 비난해야 하고 진보주의자라면 정부를 옹호해야 하는가. 대북관계, 경제정책, 노동문제, 교육정책 등의 모든 이슈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고유한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견해를 달리한다. 이것을 보수와 진보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결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종북좌빨이니 강남좌파니 극우꼴통이니 하는 말을 동원하며, 그 말을 듣는 본인이 수긍하지 않을 분류법을 남에게 들씌우는 사람들의 의도는 뭘까. 특히나 강남좌파라는 말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백인을 ‘니거러버(‘깜둥이를 좋아하는 자’라는 뜻의 비칭)라고 부르며 빈정대던 인종주의자들의 음험한 악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유의 악성은 오늘날 상당수 인터넷 댓글의 무지막지한 파당성에도 나타난다.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의 댓글이 북한 언론매체의 말투를 닮아 있어 실소하였던 일도 있다. 그렇게 양쪽의 댓글들은 상대 진영의 흠집 내기와 욕설로 가득 차 있다. 진영논리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정견과 양식을 부정한다. 그 근저에는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증오심이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정작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보수주의자 됨의 뜻도 모를 것 같은 자들이 보수적 견해라면서 무식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모습이 그렇다. 자기희생이나 공적 책임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스러움이 보수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삐뚤어진 냉소주의와 증오심에 빠져 있거나 싸가지 없고 부도덕한 자가 진보를 자처하는 모습도 한심하긴 매일반이다. 병역을 면한 이유가 아무리 보아도 수상쩍은 자가 보수라며 설치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우습게 아는 자가 진보라고 나서는 현실을 보라.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지지층의 결집이나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다. 그리하여 허튼 말만 제멋대로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세상엔 회색지대의 지성과 양심이 있음을 기억하라. 정치적 성향에서의 연역적 사고를 버리자. 인간과 사회와 문명은 단순하지 않다. 생긴 대로 보라. 덧붙이건대, 어느 쪽이든 이념적 증오는 반지성적이다. 그리고 악이다. 증오는 개인과 사회를 모두 소진케 한다. 그러기에는 오늘 우리의 처지가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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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못할까. 이런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독일의 사례가 불려 나온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과오를 반성하고, 교과서에 낱낱이 기록해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를 역사 기억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반면,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모셔놓고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참배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 극단의 대비가 주는 인지적 충격은 꽤 크다.

그런데 독일이 처음부터 순순히 과오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전후의 폐허에서 패전국 국민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물리적 생존과 정신적 회복이었다. 이윽고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독일은 범죄 내용을 최소화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최호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검사 측이 제출한 기소 항목에 있던 ‘제노사이드 범죄’ 부분이 심리에서 빠졌다. 몇 년 뒤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범 재판에서는 기소 항목에서 ‘반인도 범죄’가 독립적인 기준이 되지 못하고 전쟁범죄 항목에 예속됨으로써 “우리는 적어도 독일보다는 낫다”는 일본인들의 심리를 조성했다. 이 과정까지는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독일은 왜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게 된 것일까.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 이후부터 기류가 달라졌다. 독일 국민은 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이가 지극히 평범한 인성의 소유자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이 ‘악의 평범성’ 앞에서 비로소 책임은 몇몇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자각이 싹텄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더욱 현실적인 여건이 존재했다. 독일에선 전범세력과 전후 집권세력 간의 단호한 단절이 가능했다. 사실 히틀러는 바이마르공화국 정치 엘리트 입장에서 보자면 ‘듣보잡’이고 지극히 예외적인 일탈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당시 서독과 동독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히틀러와 그의 세력을 죄악시하고 바이마르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성행했다. 반면,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집단은 전통 사무라이 계급의 후손들이었다. 처음엔 일본 또한 광적인 군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안겨보려 했지만, 이 쇼와 육군은 극소수만 처형되었을 뿐, 대부분 전후에도 살아남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복역을 마치고 나와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다른 하나는 지정학적 이유다.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의 품에 안겨 아시아 대륙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미국의 품에서 미국몽을 꾸다가 한국에 전쟁이 나자 잠시 일어나 미국의 손을 잡고 외화벌이를 해서 돌아왔다. 한일협정 때 한국이 받았다는 그 3억달러에 해당하는 10년 할부 생산물과 용역보다 수십배는 더 달콤했을 그 돈을 기반으로 일본은 다시 일어섰다. 그 뒤로는 경제성공의 신화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반성할 이유가 없었고 요구받지도 않았다.

그런데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가라타니 고진은 ‘아(亞)주변’이라는 개념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고유성을 지켜올 수 있었던 원인을 설명했다. 조선은 중국과 붙어 있어 ‘주변’이 되어 중심국의 지배원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본은 시쳇말로 사정거리 밖에 있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구조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독일을 보자. 프랑스, 폴란드, 벨기에 등이 국경을 맞댄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조건이다. 프란치스카 세라핌 보스턴대 교수는 “무엇보다 독일은 전후 재건에서 프랑스, 벨기에와의 국경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탄에 많이 의존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먼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1949년 이후 미국이 신생국 이스라엘을 지지함으로써 독일이 1953년부터 대규모 배상 지급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맥락”이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불가피하고도 자발적인 방식으로 아시아 대륙과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과는 끝까지 요구해야 하고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 청산의 정치는 향후에도 양국의 외교적 중심 의제에서 멀어지기 힘들다. 다만, 양심에 따른 반성과 사과에서 이제 일본은 너무 멀어졌다는 판단이다. 최근 방한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와다 하루키의 인터뷰에서 반성의 동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유독 나뿐일까. 평론가 이명원이 말했듯,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야기한 문제는 ‘한·일 양국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문제’라는 점에서 보자면 그렇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경제학적이고 문화적인 힘과 상황의 논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비록 가까운 시일에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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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되고 네팔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되었습니다. 통장에 남은 320만원은 아내와 여동생에게 주세요.” 2년 전 이맘때 한국의 부품 제조 공장에서 하루 2교대로 1년7개월을 일하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27세 네팔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이주노동자 단체가 그가 남긴 유서를 한국말로 번역해 공개하면서 죽음이 알려졌다. 게시글 제목은 “고용허가제 때문에 한 사람이 죽었다”였다.

2004년 8월17일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는 소위 3D 국내 사업장에 합법적으로 외국인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게 허가해 준 제도다. 중소제조업과 건설업, 일부 서비스업, 어업, 농축산업 등 5개 업종에 한해 양해각서를 맺은 16개국에서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외국인력을 ‘초청’했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들은 대부분 고학력자들(대졸 이상 74.5%)로, ‘코리안드림’을 안고 왔지만, 현실은 열악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업장을 옮길 자유가 없다. 폐업이나 반복적인 임금체불 등의 경우에만 아주 예외적으로 이동이 허용되지만, 이때도 사업주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최대 이동 횟수도 3회뿐이다. 불안한 상황을 악용한 사업주의 부당한 처우에도 참고, 불법이 발생해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

각종 사고의 끝자락에서 ‘위험의 외주화’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과 마주한다. 가축 분뇨에 질식해 숨지거나, 저류소 물에 휩쓸리고 공사장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들의 산업재해 건수는 내국인의 6배에 달한다. 참다못해 사업장을 무단이탈하면 불법 체류자가 된다. 10년 가까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지만 가족들과 살 수 있는 기본권도 누리지 못한다. 고용허가제가 ‘현대판 노예제’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18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는 ‘고용허가제 시행 15년’을 맞아 이주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요구는 매년 한결같다. ‘사업장 이동권 달라. 고용허가제 폐지하라.’ 이들의 당연한 요구에, 우리가 필요해서 부른 이들의 착취 수준의 노동권 침해에 더는 귀 막고 눈감지 말아야 한다. 현실적인 고용허가제 개선책이 필요하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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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끝난 죽집에 앉아

내외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옆에는 막걸리도 한 병 모셔놓고

열 평 남짓 가게 안이

한층 깊고 오순도순해졌다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운 아내가

반짝, 한 소식 넣는다

 

― 죽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순한 거 같아

초식동물들 같아

 

내외는 늙은 염소처럼 주억거리고

한결 새로워진 말의 밥상 위로

어둠이 쫑긋 귀를 세우며 간다

고증식(1959~)

 

날이 저물고 장사를 마친 부부가 마주 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탁주도 한 잔 곁들이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죽을 먹으러 찾아온 손님들의 온순한 성품에 대해 말을 나눈다. 작은 가게에서 따뜻한 죽을 내놓으면서 만난 소박하고, 자상하고, 명랑하고, 자잘한 정이 많은 사람들의 됨됨이에 대해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라는 드넓은 평원(平原)의 고귀한,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한다. 늙은 염소처럼 순한 부부가 살아가는 훈훈한 삶의 풍경이다.

고증식 시인은 최근 신작 시집을 펴내며 “아홉 살짜리 두고 아버지 떠나시던 그해가 지금의 딱 이 나이다. 아버지 못 가보신 길을 이제부터 시작한다. 새소리 듣고 바람의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우짜든지 따뜻하고 유쾌하고 뭉클하게!”라고 썼다. 희로애락을 살아도, 곡절이 많더라도 따뜻하고 유쾌하고 뭉클하게!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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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크기가 그리 심하지 않은 나라를 찾아가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그 비결을 묻는 시사프로의 한 장면이다.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게 된 이유를 알려달라는 말에, 자국의 복지체계 자랑을 밤새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답변이 이렇다. “그건 모르겠고요. 아직 이 사회에는 문제점이 많아요. 제가 할 일은 지금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일은 조금이라도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복지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제도를 정비하려는 걸 방해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고정관념도 깨야 해요. 그게 제 의무예요.”

과시를 해도 될 상황에서, 아직도 곳곳이 엉망이라 갈 길이 멀다는 태도를 보인다. 좋은 사회는 이처럼 ‘나쁜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많아야지만 가능하다. 사회가 아름다운 수식어로만 꾸며지면 분명히 존재하는 비상식적인 모습들이 쉽사리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는 사람들이 맹목적 긍지로만 뭉쳐 “이 나라는 완벽해요! 차별과 혐오는 생각도 할 수 없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회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항의가 ‘객관적으로 나아진 현실을 부정하는 배배 꼬인 생각’이라는 냉소에 막혀버린다. 한국처럼 말이다.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단군의 후예, 열정과 성실로 무장한 국민정서 등등, ‘찬란한 역사에 자긍심을 지니자’는 무한 긍정의 강요 속에 듣기 좋은 말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했던가. 이런 노출에 단련된 대중은 이렇게 내뱉는다. “그 덕에 우리가 잘살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 나라에 감사하자!”

팩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사회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순간에도 불평등에 노출되어 삶이 위태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지속적으로 그 방향성이 유지된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불평등조차 낙관하라는 태도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한 사회의 불평등을 탓하는 건 확증편향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걸 무시하고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망상에 빠지는 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착각이다.

곳곳에 첨단 시설이 즐비해졌다는 팩트는 아무리 더워도 휴게실에 창문 하나 낼 수 없어 생을 마감한 ‘그’ 노동자의 비극을 덮을 수 없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과거보다 줄었다고, 허술한 안전장치 때문에 끔찍하게 죽는 ‘그’ 노동자의 불행이 기쁨으로 둔갑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배달되기에 개인들의 편리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하루 열다섯 시간을 일하는 ‘그’ 사람의 고충을 해결하지 않는다. 여성도 차별 없이 교육받는다는 변화된 통계자료가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 당사자의 오늘 불안한 마음을 줄여주지 않는다.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하고 평균수명이 증가했다는 좋은 뉴스가 비만 오면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늘’ 겪는 서러움을 치유해줄 리 만무하다. 재래식 화장실이 사라졌다고 해서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주변의 차별 때문에 ‘오늘’ 느낀 수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낙관주의자들은 ‘왜 세상이 좋아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한 적 없다. 다만, 좋은 세상은 긍정의 자세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평등한 세상은 ‘더’ 불평등한 세상을 찾아야지만 가능하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끝없이 의심하는 비관적 자세는 결과를 낙관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부정하는 건 세상의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의 익숙한 습관일 뿐이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하나의 팩트만이 부유하면, ‘그때 그 시절 덕택에’ 집집마다 자동차 굴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등장한다. 군부독재를 긍정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도 다르게 해석하는 놀라운 사람이 이 땅에 있는 이유다.

<오찬호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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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앤장은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전범 기업 대부분을 변호한다. 이들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해외 먹튀 사건, 쌍용차 회계조작 사건에서 각각 옥시, 론스타, 쌍용차 등을 대리했다. 자본과 기업 편이다. 국적을, 애국을 따져 물을 일도 아니다. 돈만 벌면 된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이다.

누군가는 국적과 애국을 내세운다. 갑질과 불공정 행위로 악명 높던 이랜드는 애국 마케팅 홍보에 들어갔다. ‘태극 물결 챌린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태극기 게양 사진을 올리면 건당 815원을 독립유공자유족회에 기부하는 이벤트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기업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긴다는 공덕역 부근 경의선 용지 상업 개발을 포기하는 ‘좋은 일’을 할 리도 없다. OK저축은행은 ‘OK대박통장815’ 특판 상품을 내놓았다. 한국 금융자본주의는 광복절을 연계한 ‘대박’도 판매한다.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이분법을 강조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가족의 사모펀드 논란에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자본주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다국적기업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배제 결정 전후 애국의 최전선에 선 기업이 됐다. 소설 &lt;토정비결&gt; 작가 이재운은 “한·미·일·중 4국이 펼치는 반도체 세계대전에서 우리 한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제독을 먼저 떠올리듯 백년이 지난 어느 자리에선가 누가 21세기 초의 반도체 전쟁을 이겼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삼성과 하이닉스를 말할 것”이라고 썼다. 지금 한·일 갈등이 ‘반도체 전쟁’이라면,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3개국의 삼성전자 공장은 노동 착취와 노조 파괴가 벌어지는 군수 공장일 것이다.

여야와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이 싸우는 듯하지만 의견 일치를 본 게 있다. 보수 쪽은 이참에 ‘기초체력’을 튼튼히 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주문한다. 정부도 이번 사태가 ‘재난’에 준한다며 특별연장근로 방안을 내놓는다. 신규 화학물질의 신속한 출시나 인허가 기간 단축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정부 소유 통신사는 ‘반도체 산업구조 선진화 연구회’가 낸 보고서를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어려운 이유는 불산공장 환경규제 때문’이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낸다. 불산 때문에 노동자들이 숨진 사건은 망각된다.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 문제로 불거진 한·일 경제 갈등인데 정작 노동은 뒤로 밀려난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일본의 야만적 제국주의 피해자이면서 착취와 수탈의 자본주의 피해자였다. 지금 여기의 노동자들은 어떤가. ‘2018년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산재 사고 사망자와 질병 사망자는 2142명, 산재를 당한 전체 노동자는 10만2305명이다. 정부가 실태 조사로 파악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수는 14만8961명이다. 매년 산재 희생 노동자가 일제강점기 전체 강제징용 피해 노동자 수의 70%에 육박한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인 오민규는 최근 프레시안 기고에서 1999년에 발간된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적용 전문가위원회 결말을 소개한다. “이렇게 비참한 조건에서 일본의 민간기업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 징집이 벌어진 것은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일본 오사카 특수영어교사노조가 1995년 ILO에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를 진정해 나온 결론이다. 오민규는 이 연대를 전하며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정당성을 굳건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도 강제노동 금지협약을 비롯한 ILO 핵심협약을 즉각 비준”하라고 말한다. 일본 도로지바 국제연대위원회는 ‘개헌-전쟁을 향한 아베 정권 타도! 대한국 수출제한을 즉시 철회하라!’에서 “노조 존재 그 자체를 근절하려는 공격이 국가주의-배외주의를 부추기는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아베 정권의 노동 탄압을 전했다.

민족이 실재하는 것인지, 상상의 산물인지는 알 수 없다. 애국이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보편의 가치를 뒷전으로 밀쳐내 위험하다는 건 분명하다. 난세니 토착왜구니 오랑캐니 하는 말의 범람 속에 부쩍 잦아진 ‘우리’란 말도 톺아봐야 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힘세며, 용감하고 재능 있다”는 말을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나’ 대신 ‘우리’를 대입하면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갈채한다. 그 말을 한 이를 애국자라 부른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한 스님의 이 같은 말을 전하며 “이런 난센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수록 평화에 대한 위협은 커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를 제외한 이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점을 경고했다.

‘국민’이든 ‘민족’이든 ‘우리’를 앞세우는 세상은 위험하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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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공화당이야 현직 대통령이 후보로 나올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민주당은 사정이 다르다. 내년 2월부터 시작될 당내 경선에 참여를 선언한 후보는 25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일정한 기준을 만족시켜서 1, 2차 텔레비전 토론에 참여한 후보는 20명이고, 두어 달 후에는 10여 명 수준으로 추려질 전망이다. 현재 민주당 후보 중 지지율 선두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다. 하지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지지도도 만만치 않다. 이 셋은 모두 중앙 정치무대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오랫동안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로 여겨져 왔다. 또 하나 공통점은 모두 70대라는 점이다. 바이든과 샌더스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중 80세를 넘기게 된다.

미국 역사상 만 70세 이상으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사람은 트럼프가 처음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70회 생일에서 두 주가 모자랄 때 대통령에 취임했다. 민주당의 세 주요 후보 중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두 번째 70대 대통령이 되는 셈이고,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무후무한 70대끼리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측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6월 말의 TV 토론 이후 여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바이든의 상품성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그를 지지하던 ‘온건한’ 민주당원들이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대안으로 밀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샌더스나 워런을 지지하던 ‘좌파’ 민주당원들은 정치 신인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이나 사업가 앤드루 양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해리스는 54세, 개버드는 38세, 양은 44세이다. 이 밖에도 만만치 않은 지지율을 기록 중인 피트 부티지지 후보는 37세, 훌리앙 카스트로 후보는 44세, 베토 오루크 후보는 46세이다. 유권자들이 후보의 나이를 중요 변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지만, 이들 젊은 후보는 70을 넘긴 트럼프와 분명한 차별성을 보일 수 있다. 50세의 클린턴이 73세의 돌을 꺾은 1992년 선거나 47세의 오바마가 72세의 매케인을 상대했던 2008년 선거 양상이 재현될 수도 있다.

나이만 젊은 것이 아니다. 배경도 생각도 기존의 질서와는 판이하다. 해리스는 자메이카와 인도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유색 인종 여성이며, 개버드는 사모아 혈통의 힌두교도이자 이라크전에도 참전했던 현직 여성 군인이다. 양은 대만 이민 2세의 벤처 기업가로,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공약으로 내걸어 화제가 되었다. 부티지지는 공개 동성애자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지금의 남성 배우자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정치판에는 이런 ‘젊은 피’들이 끊임없이 수혈된다. 이 다양한 배경의 에너지 넘치고 비전 분명한 신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에서 개버드나 양, 부티지지 같은 대통령 후보가 나올 가능성은 0에 가깝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50세 미만의 당선자가 53명(17%)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정치의 노령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총선이나 지방선거 때만 되면 각 정당은 청년 후보를 찾는다고 분주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다. 젊은 유권자들의 대표자를 만들겠다는 발상인데, 생물학적 나이가 어려야 청년을 대변하는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모자란 생각이거니와 젊은 정치인을 청년 대표로만 소비하다 보면 오바마 같은 ‘모두를 위한 젊은 정치인’은 탄생하기 어렵다.

문제는 노령화의 문제가 여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에서도, 학교에서도, 시민사회에서도, 심지어 친목 모임에서도 ‘젊은’ 리더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40대는 젊고 50대는 늙었다고 무 자르듯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젊은이 못지않게 창의적이고 도발적이며 힘이 넘치는 60대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젊은 60대’보다 ‘늙은 40대’가 더 많은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닐지. 몸도 마음도 ‘젊은’ 지도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세대론과 세대 갈등이 중요한 사회 쟁점으로 떠오른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소위 ‘586세대’의 권력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586세대’는 우리 사회의 ‘민폐’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다. 논리적 반박의 여지가 많은 감정적 수사라는 판단도 들지만, 현실을 직시하자면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젊은 지도자’의 대명사였지만, 혁신은 미미하고 성취는 빈약했다. 무엇보다, 아래 세대에게 쉬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개버드와 양이 등장하지 못한 것은 30, 40대의 문제가 아니라 50, 60대의 책임일 확률이 더 높다. 몸도 마음도 ‘늙은’ 지도자들이 주책맞게 나서지 않는 것이 먼저다. 자리를 비워두면, 어디에선가 젊은 지도자들이 튀어나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지금보다 나은 방식으로.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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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가족 재산에 얽힌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2017년 청와대 민정수석 임명 두 달 뒤 부인과 자녀가 10억5000만원을 투자한 사모펀드가 첫 입방아에 오르더니 실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가족 간 부동산 거래, 부친 소유 사학재단의 빚을 털고 채권은 챙기려는 동생 부부의 ‘위장 이혼, 위장 소송’ 의혹까지 불거졌다. 직계존비속이 민감하게 맞물려 있는 돈거래지만, 조 후보자가 어디까지 알고 간여했는지 법을 지켰는지는 물음표 영역에 있다. 8·9개각 인사청문회에 ‘조국 블랙홀’이  먼저 열리는 것은 불가피해졌다.

세간의 시선은 상식적·합리적 의문에서 시작한다. 사정당국 최정점에 있는 민정수석 가족이 투자·운용 모두 베일에 가려진 사모펀드에 거액을 맡긴 것부터 뒷말을 낳는다. 이 펀드가 투자한 중소기업은 관급 가로등 공사를 한 사실도 알려졌다. 조 후보자 쪽에선 펀드 투자는 합법이고 어디에 투자할지 모르는 ‘블라인드 펀드’라고 했다. 하지만 가족 투자액이 80%나 차지하고 자녀 증여·상속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 사모펀드는 투자실적 보고서도 정기적으로 가족에게 보냈을 테다. 신생 사모펀드 투자 배경과 운용에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

중소 건설사를 운영한 조 후보자 동생이 2013년 숨진 부친의 사학재단에 물려 있던 연대보증 빚 42억원을 피하고, 공사대금 51억원을 받아내기 위해 아내가 함께 새 건설회사를 세워 ‘위장 소송’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조 후보자는 당시 변론 없이 패소한 사학재단 이사여서 가족들의 이익을 묵인·방조했는지 답할 위치다. 2017년 11월 조 후보자 아내가 부산 아파트 전세금을 동생 전처 명의의 빌라 구입 자금으로 댄 것도 부동산 명의신탁 여부가 규명돼야 한다. 10년 전 이혼했다는 동생 부부는 최근까지 함께 살았다는 목격자도 나와 ‘위장 이혼’ 시비에 휩싸여 있다.

조 후보자와 가족의 재산 의혹은 세금 늑장 신고나 색깔론 시비가 인 사회주의노동자동맹 활동 전력과는 결이 다르다. 사실관계가 미궁인 까닭이다. 조 후보자도 왜 파장이 부푸는지 직감할 터다. 그의 과거가 공직자를 검증한 민정수석이었고, 지금 향하는 곳이 누구보다 법의 잣대가 엄중해야 할 법무장관이다. 조 후보자 쪽에선 18일 “모든 절차는 적법하게 이뤄졌다”며 청문회에서 모두 소명하겠다고 했다. 그전이라도 물증 제시나 소명은 명명백백히 빠를수록 좋다. 국민은 알권리가 있고, 그 눈높이에서 공직자는 검증대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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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은 18일 문희상 국회의장 등 5부 요인과 5당 대표들이 국립현충원에서 김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문 국회의장은 추도사에서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양국관계의 해법과 미래비전을 제시했다”며 “우리 국민은 능동적이고 당당하게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 여야 정치권 인사들도 한목소리로 한·일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킨 김 전 대통령의 통찰과 용기를 기렸다. 여야 정치권의 이런 평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정치권의 다짐이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대중·오부치 선언도 한·일관계가 최악일 때 추진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다 급기야 YS 퇴임 한 달 전 일본 정부는 어업협정 파기를 일방 통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DJ는 취임하자마자 외환위기 극복과 북한 핵·미사일 문제 대응을 위해 양국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이어받아 양국은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노력했다. 오부치 총리가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언급한 ‘무라야마 담화’를 재확인해 최초로 공식 외교문서에 명시했고, DJ는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마침내 1998년 10월8일 김 전 대통령은 일본 의회에서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그는 당시 왜색문화가 판친다는 반대에 맞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함께 선언했다. 이는 양국 간 문화교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한류 바람으로 이어졌다. 한·일 양국은 이 과정을 진지하게 되짚어봐야 한다.

작금의 한·일관계 악화는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에 기본적 책임이 있다. 삼권분립의 정신에 따라 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한국 정부가 막지 않았다며 책임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한·일관계는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 위에서만 재출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우리 정부의 대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한·일 간 문제는 어느 일방의 노력으로 풀 수 없다. 오는 24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등 난제가 닥쳐 있다. 김 전 대통령과 같은 한·일관계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통찰, 용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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