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고 장자연씨 강제추행 혐의로 10년 만에 기소된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에게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유는 ‘접대자리가 아니라 생일파티였고 참석자 중 권력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조희천이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며, 강제추행이 있었다면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텐데 1시간 이상 이어졌고, 종업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공개적인 장소였으며, 파티 참석자 등 모두 강제추행이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윤지오의 진술만으로 형사처벌할 정도로 공소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따져보자.

먼저 생일파티는 그 어떤 이유보다 평소 접대하고자 했던 사람을 불러 접대하기에 좋은 명분이다. 접대받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없다. 이 때문에 생일파티는 접대자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둘째, 권력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눈치 보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눈치에는 ‘조신’한 것만 있지 않다. 회식에서 휴지를 휘감고 현란한 춤을 추는 건 상사가 아니다. 망가지면서 분위기 만들기는 힘없는 사람의 몫이다. 접대자리를 편히 즐길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은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조희천은 여성의 인간성 삭제를 통해 권력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눈치’를 발휘한 건 아닐까?

사실 주목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조희천은 2009년 조사에서 강제추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조사과정에서 그가 지목한 사람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희천의 거짓진술이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그가 거짓을 통해 무엇을 감추고자 했는지 주목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속마음 예측이 아니라 조희천이 했던 진술들에 주목하고 진술 신빙성을 판단했어야 한다.

셋째, 강제추행이 있었다면 분위기가 험악해졌을까?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지난 5월 발표된 검찰과거사위 결과에는 고 장자연씨 전속계약 내용이 있다. 기획사가 제시하는 모든 활동을 전적으로 수락해야 하고, 계약사항 위반 시 위약벌금 1억원과 기획사가 청구하는 모든 경비를 1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배상해야 한다. 사건은 계약한 지 1년도 안된 때였고, 무수한 접대강요가 있었음을 고인은 유서로 밝혔다.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 판사들도 불법을 알면서 사법농단을 하는 판국에 그녀 말대로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가, 그것도 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넷째, 공개적인 장소여서 아닐 것이라는 가정은 무지와 게으름의 정수다. 대표적 공공장소인 지하철 ‘성추행’ 경고방송이 시작된 것이 1998년이다. 재판부가 말한 종업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공개적인 장소는 바로 유흥업소의 룸이다. 

다섯째, 참석자 등 관계자들과 윤지오의 위치성은 다르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함께 ‘접대’의 도구였고 나머지 관계자들은 접대하거나 받는 사람들이다. 윤지오는 2009년부터 일관되게 강제추행에 대해 진술했다. 윤지오가 무고해서 얻을 이익은 불분명하지만 나머지가 조희천을 옹호해 얻는 이익은 너무 명확하다.

조희천 재판부는 틀렸다. 조희천에 대한 처벌과 함께 장자연사건의 남은 진실들도 밝혀져야 한다. 그게 정의다. 정의를 위해 여성들은 매주 금요일 광장에 모인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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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쓴 노트북을 바꿨다. 그동안 이렇게 오래 쓴 노트북은 처음이다. 그만큼 내가 사용을 잘했다는 건지, 아니면 제품의 내구성이 그만큼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10년이란 정이란 게 들어버릴 만한 세월이다. 내가 일용했던 모든 양식이 10여년에 걸쳐 내 오래된 냉장고를 거쳐갔던 것처럼 이 노트북에는 내가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머물렀다. 생각뿐만 아니라 잘 표현되지 않았던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노트북을 열어놓은 채 한 글자도 치지 못하고 스크린이 슬리핑 모드로 넘어가는 걸 보며 시간만 보냈던 때도 있다.

노트북은 마지막 1, 2년 동안은 성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무거운 프로그램은 돌릴 수 없었고, 금방 뜨거워졌고, 때때로 팬 돌아가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마지막 몇 달은 자칫 방심했다가는 크게 다치기 쉬운 노인과 동행을 하는 것처럼 아예 노트북을 모시고 살았다. 절약정신이 투철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정도 들고, 나중에는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는 동안 노트북에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중얼중얼 대화도 했다. 괜찮은가 묻기도 하고,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네, 말하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별것에다 다 얘기를 거네 싶었다. 심심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나이니 외로워서 이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우스운 짓을 해놓고는 노트북을 바꾸자마자 신이 났다는 건 나중에 말하기로 하자. 다른 사람에게든 물건에게든, 사람 마음이란 참 얍삽하다.

어떻든, 그렇게 노트북을 보내는 과정이 오래 걸리다보니, 집 안에 나이 든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릇들, 스테인리스 냄비들, 칼과 같은 주방용품들 중에는 30년 가까이 쓰거나 그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 수두룩했다. 책꽂이의 책들 중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 있다. 그 오래된 책들의 책갈피 사이에서는 빛이 바랜 메모지가 발견되기도 한다. 오늘의 꿈을 잊지 말자. 언젠가 이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런 식의 낯뜨거운 내용을 적어놓은 메모들. 그때 나의 오늘은 언제였고, 또 그때 생각했던 언젠가는 언제였을까 궁금해지는.

오래된 것들 중에는 사진들도 있다.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사진은 백일 무렵에 찍은 것이다. 부모님이 나라고 말해주었으니 나라고 믿을 뿐 어디에도 나라고 보이는 흔적이 없는 흑백사진이다. 남아있을 흔적이 있겠나. 그로부터 흐른 세월이 엄청나다. 

그러고보니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나다. 사기그릇이나 스테인리스 냄비, 플라스틱 쟁반, 그리고 무쇠칼보다 더 오래된 게 나다. 갑자기 숙연해졌다. 아니, 좀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고 해두자. 오늘 갑자기 제일 오래된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어제도 그러했고, 한 달 전에도 그러했고, 또 1년 전에도 그러했을 터인데도 새삼스럽게 그랬다. 아마도 내일이 되면 오늘보다 더 오래된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굳이 곱씹게 되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한탄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왕이면 잘 살았으면 싶어서이다. 동시에 잘 사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인 걸 빼놓고도 물론 그렇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게 있다. 인터넷 지식백과에 의하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고 되어 있다. 코넬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더닝과 그의 제자 크루거는 일군의 사람들을 테스트한 결과, 성취 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성취도를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성취도에 대한 과장된 믿음이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 또한 밝혀냈다. 인터넷상에서는 더닝크루거 효과를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연구를 진행한 더닝은 이런 말도 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만의 결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결점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성실하게 반성해보려는 노력과 같은 얘기일 수도 있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여기서 잠깐. 아이러니하게도, 더닝크루거 효과의 법칙에 의하면 누구도 자기가 실수하는 순간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그 순간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걸 알 수 있다면 법칙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더닝크루거 효과는 그 진지한 연구결과보다는 타인을 조롱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인터넷상의 표현으로 더 유명해졌다. 엄청나게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부분을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여겨져서일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나를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게 나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오늘, 잠깐 멈춰 서보기로 한다. 잘 사는 일이 어렵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더라도, 잘 못 살지는 말아야겠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도 많이 나쁘게 살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해본다. 물론 이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을 오인하고 있을 터이지만.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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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회가 끝나고 사인회가 이어졌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데다 대화 위주의 행사도 아니어서 자리가 일찍 끝날 줄 알았다.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오디오 북 출판을 알리는 행사였다. 나는 후반부에 시 두 편만 읽으면 되는 찬조 출연자였다. 그런데 내 시집을 들고 온 독자들이 제법 있었다. ‘서울에 사는 나무’를 주제로 책을 펴낸 저자, 그 책을 음성으로 ‘새로 쓴’ 연극배우, 이를 기획한 출판사 관계자 등 행사 주역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행사장이 거의 다 비어갈 즈음, 중년여성 한 분이 내 시집을 내밀며 잠깐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긴한 얘깃거리가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일단 성함을 묻고 서명을 하는 사이, 옆에 앉은 여성분이 말문을 열었다. “이년 전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 슬픔을 선생님 시를 필사하면서 견뎌냈습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순간, 난감했다.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이든 해드려야 할 텐데. 하지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상처가 아물어 가신다니 다행이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제 시를 읽고 큰 위로를 받으셨다니 감사하다는 말은 더더욱 나오지 않았다. 내 시를 필사하며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 앞에서 정작 그 시를 쓴 작자가 공감이나 위로, 격려나 응원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다니 무참할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머니, 발표된 시는 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것입니다. 시인은 절반만 쓰는 것이고요, 나머지 절반은 독자가 완성시키는 겁니다. 제 모자란 시를 어머니께서 완성하신 겁니다. 깊이 읽기는 반드시 쓰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제 그만 읽으시고 쓰세요. 어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보세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 쓰는 친구가 어디엔가 쓴 이야기인데, 병원에 입원한 젊은 환자가 졸시 ‘화전’을 벽에 붙여놓고 고통을 견뎌냈다는 것이다. 화전민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르는 나무를 의인화한 것으로 자기희생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짧은 시였다. 그때만 해도 시가 갖고 있는 위로의 기능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지난 세기 후반이었으니 시에는 사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시인과 시, 시와 독자 사이의 경계는 선명하지 않다. 쓰기의 과정이 그렇듯이 읽기도 쉽게 포착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세계다.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매번 그런 것도 아니지만 시인이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쓴 시도 독자와 만나면서 의도가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읽기는 오독이라는 표현은 말장난이 아니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의미만 전달한다면 그것은 시일 수 없다. 단어 하나, 슬로건 한 줄도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듯이 한 편의 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 마련이다. 좋은 시란 오독 가능성이 큰 시다.

오디오 북 낭독회에서 특별한 독자를 만나고 난 후, 쓰기와 읽기 사이에 가로놓인 딜레마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시인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상시적인 것이라면 시인의 권한이나 역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미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지나친 특권이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미의 유일한 생산자로서의 시인은 근대의 유물이다. 시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독자의 수동적 태도 또한 하루빨리 떨쳐버려야 할 낡은 유산이다.

지난 봄 세월호 5주기를 앞두고 시 읽기의 새로운 가능성과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 한 분이 교회에서 졸시 ‘오래된 기도’를 인용하며 간증하는 영상을 접하고 시를 쓴 당사자로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녹화영상은 지난 연말에 유튜브에 올라갔는데 나는 뒤늦게 지난 4월에야 보게 됐다. 영상에서 ‘창현 엄마’ 최순화씨는 ‘아들을 잃은 어미가 살아가는 법’을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교회의 혁신을 바라는 창현 엄마의 목소리는 웬만한 목사의 설교보다 진정성이 있었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고개를 들면 어제와 다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구절은 그대로 한 편의 빼어난 시였다. 창현 엄마 최순화씨는 국가와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서 시인으로 넘어가 있었다.

시인의 유형은 여러 가지다. 시보다 앞서 가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를 따라가는 시인, 시와 함께 가는 시인도 있다. 자기가 읽고 싶은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독자를 의식하는 시인도 있다. 

지금 내가 바라마지 않는 시인은 ‘시를 쓰게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읽기를 쓰기로 전환하는 독자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읽기는 사적 영역에서 위로를 받게 하지만 쓰기는 위로의 차원을 넘어서게 한다. 읽기에서 쓰기로 넘어가면 자기 삶을 쓰는 창조적 주체이자 지금과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회적·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는 전적으로 그 시를 읽어내는 독자의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읽어서 시를 자기화했다면 그 독자는 쓰게 된다. 자기 문장을 쓰게 될 때까지, 새로운 미래가 보일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자.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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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논란이 뜨겁다. 이미 과도할 정도의 논란이 있으니 여기에 가부간 의견을 더할 생각은 없다. 법률적 절차와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임명이든 낙마든 결정될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이 논란 끝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이다. 심청이(조국 후보자를 심청에 비유하는 게 적절한지는 접어두고) 인당수에 뛰어들었다면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한다.

대중이 분노한 지점은 뿌리 깊은 불공정일 것이다. 그동안 보수층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불공정에서 진보진영도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하고 더 분노하는 것일 수 있다. 불공정이 교육 영역에서 확인되면 대중의 분노와 절망은 더 커지게 된다. 교육은 그나마 흙수저 미꾸라지가 용이 되는 꿈을 꾸어볼 수 있는 디딤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에 가깝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입시제도는 그 시스템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지금이야 비판을 받지만, 인턴십이나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스펙’을 쌓아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얼마 전까지 대대적으로 장려되었다. 그때 기준으로 보면 이번에 논란이 된 사례는 오히려 크게 칭찬받을 일일 수도 있다. 대학에 입학한 뒤는 또 어떤가? SKY로 대표되는 명문대 카르텔을 부정할 사람이 있는가? 본인은 대학에 들어와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 후 사회적으로 성공한 신분이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자리는 명문대 배경이 없는 이들에게는 죽어라고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자리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8월21일 (출처:경향신문DB)

이러한 교육 시스템,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해결하자면 말이 달라진다. 현실의 한계를 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거기에 보수·진보의 입장 차이까지 개입되면 해결은 난망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결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과거 진보와 보수가 이런 문제를 놓고 입장이 달랐지만, 지금은 입을 모아 불공정한 입시를 비판한다. 이렇게 예민한 문제를 두고 국민 여론이 지금처럼 일사불란하게 모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모처럼 통합된 여론에 힘입어 자사고, 외고 등 특목고, 수시 등 불공정한 입시의 온상으로 지목된 것이나 족벌사학의 전횡을 도와준 사립학교법 등에 칼을 들이대야 한다. 국립대 통합안과 지역균형선발 확대 등 흙수저에게 더 넓은 기회를 주고 공정성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도 적극 모색해야 한다. SKY 등 명문대 카르텔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서울대와 고려대 등 이른바 명문대 학생들의 분노가 크다고 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이 훼손된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은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런 비판이 진정한 것이라면, 앞으로 공정한 사회를 위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단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사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데, 명문대 카르텔을 깨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경쟁력을 만드는 조치를 늦출 이유가 없다.

논란 끝에 사회가 더욱 건강해질 길을 찾는다면, 논란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입시와 교육 문제의 해묵은 폐단을 청산하고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들었으니, 이제 우리는 풍랑 속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강재 | 서울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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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싶은 상대방이 맞춤법은 물론이고 엉성한 문장으로 마음을 표현하면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든다는 고백. 맞춤법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문장 가지고 사람 평가하지 말라며 토닥이는 댓글이 있는가 하면 사전 검색도 안 해보는 건 기본적으로 성의 부족이다, 글이란 게 교양의 문제인데 맞춤법도 자연스럽게 익힌 사람이 신뢰가 간다며 글이라곤 평소에 멀리한 사람인가 보다고 콕 짚어 폄하하는 댓글도 있다. 경험상, 출판을 하는 나로서는 글만큼 그 사람을 잘 알려주는 게 없다. 일상의 글쓰기,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 당연한 것이지만 잘할수록 매력적이다. 어쩌면 좋을까.

규모가 큰 서점뿐 아니라 큐레이션이 잘된 개성 있는 동네책방의 책장에서도 ‘글쓰기’ 코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글쓰기가 주제인 책들은 오래전부터 오늘까지도 여전히 독자들이 외면하지 못할 출판 기획의 묘수로 꼽히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글쓰기 책들은 작가 지망생만을 위해서 조언하지 않는다. 회사든 집이든 어떤 조직에서도 우리는 글을 써야만 하는 삶을 산다. 독후감, 리포트, 자기소개서, ‘자소설’.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문자메시지며 트위터, 인스타그램, 연애편지 등 놀고 사랑할 때조차 글쓰기는 우리를 졸졸 따라다닌다.

글쓰기 책들이 강조하는 것은 첫째, 어떻게 쓸지 두려워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일단 써라, 그러고 차분히 고쳐라. 글이란 쓰는 것이 아니고 고치는 것이다. 둘째, 잘 쓰겠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문법과 구조 등을 떠올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입으로 뱉듯 써라. 그러고 역시나 고쳐라. 셋째, ‘~적’ ‘~의’ ‘~들’을 문장에서 삭제해보라, 글이 더 간명해진다. 더 유익한 조언과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지만 그 많은 글쓰기 책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건 이거다. ‘고치면서’ 완성하고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개성’을 유지하라. 하고 싶은 말을 입말에 가깝게 쓰고 불필요한 한자나 조사나 접속사, 중복되는 표현 등을 제거하면서 ‘정확하고 개성 있는’ 글에 가까워진다는 것.

최근에 70여권의 글쓰기 책을 훑어보았다. 몇 출판사와 함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위에 말한 공통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글 쓰는 재능을 특별히 타고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관찰하는 습관, 어떤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메모하고 매만지는 부지런함으로 글쓰기가 진전된다.

어느 별일 없었던 하루를 가만히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중에 어떤 일을 그냥 써보자. 아마도 지나쳤다면, 또 쓰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졌을 일이 나만의 묘사에 힘입어 생동감 있는 하루가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필요가 있어서 쓰는 것보다 썼기 때문에 기록이 되고 중요해지는 경험을 쌓다 보면 글쓰기 근력은 강화된다. 그렇게 내적인 동기가 마련되면 이제 그 글을 누군가 읽는다고 가정해본다. 옷과 액세서리를 걸치는 데 형식이 있듯 글도 누군가를 만나려면 형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조사, 어휘, 맞춤법, 주부와 술부, 모든 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국립국어원과 사전을 드나들다 보면 차츰 자기의 개성을 알게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 책이 끊이지 않는 건 글쓰기로 고민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고, 살면서 외면하기도 어렵다는 방증이다. 글쓰기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차라리 쓰자. ‘글쓰기의 고통’은 글을 쓰면서 해소된다. 아이러니다. 글쓰기를 통해서만 그 고통은 극복된다. 생각만 갖고는 고통이 줄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의 일>이란 책에서 “중요한 건 오직 ‘쓴다’는 동사일 뿐”이라고 말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미국 추리소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에서 글 쓰는 비법을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에요.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다른 일을 하면 안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역시나 작가들이다. 글쓰기에 대한 비유도 신선하니 말이다.

글쓰기가 버거운가. 우선 글쓰기 책 한 권을 꼼꼼히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고 쓰자. 일정 분량의 초고를 쓰고 나면 일단 산을 하나 넘은 셈이다. 적어도 고칠 일만 남은 원고를 가진 셈이니까.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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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오직 ‘조국’ 한 단어다. 공직후보자 한 사람을 두고 1만개 넘는 기사와 실시간 포스팅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휴전 제안까지 나왔다. 존재하는 모든 전선이 힘 대 힘으로 충돌한다. 사퇴냐 버티기냐 차원을 넘어선 것 같다. 조 후보자가 장관에 취임하더라도, 물러나더라도 사회 전체가 감당할 비용이 적지 않다는 걱정이 앞선다. ‘조국이 당긴 방아쇠’가 무엇을, 어디를 정조준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심리적 참전을 택하기로 했다.

‘조국 현상’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의혹의 결이 노골적 부패와 명백한 불법성을 띠고 있진 않다. 진보세력 상층부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대물림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것이 본질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세대 ‘리더들’의 ‘권력 점유’는 새삼스러운 진단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삶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조국 현상’을 통해 민주화세대 리더들의 생활 기득권 실체를 보게 됐다. 이들의 ‘권력 점유’가 작동하는 방식도 포착됐다. “국가(정치)와 시장(경제)을 가로지르며 세대 권력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연결망’을 통해 사회 지배를 공고화했다.”(이철승 서강대 교수,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심화’) 촘촘한 네트워크 위계로 정치·생활 기득권을 재생산했고, 그 결과 격차 사회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조 후보자 딸의 논문·입시 관련 의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진보 상층부, 그것도 개혁을 상징했던 인사가 가용 자원을 동원해 자식을 기득권 체제에 밀어넣은 것. 그로 인해 ‘내 자식’은 기울어진 운동장도 아닌 아예 다른 운동장에 서 있는 현실을 확인한 시민들이 울분을 거둘 수 있겠는가. 보수세력은 ‘내로남불’로, 상층부에서 밀려난 동세대들은 ‘체념형 지지’로 대응하고 있다. “불법은 아니다”라는 해명은 역린을 건드렸다.

가족에 대한 각종 의혹으로 야당의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2일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며 입장을 밝힌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 후보자는 ‘저와 제 가족들이 사회로 받은 혜택이 컸던 만큼 가족 모두가 더 조심스럽게 처신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집안의 가장으로, 아이의 아버지로 더 세심히 살폈어야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 ‘당시 제도가 그랬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민 여러분의 따가운 질책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조국 대전’은 진영·당파적 대결 구도를 벗어났다. 더불어민주당 당원 게시판은 조 후보자 거취를 놓고 밀리면 진다는 ‘진지수호론’과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민심경계론’으로 갈리고 있다. KBS 일요진단·한국리서치가 25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조 후보자 직무적합도는 전주 대비 24%포인트 하락한 18%로 나타났다. 지난 23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분야 중 공직자 인사는 긍정평가 24%, 부정평가 53%였다. 2주 전 대비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20대, 주부, 중도층에서 각각 9%, 10%, 16% 정도가 부정 방향으로 돌아섰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믿을 수 없다는 징후다. ‘조국 대전’을 오로지 자유한국당의 정치공세, 언론의 무차별 의혹제기 탓으로 돌리는 여권 일각의 반응에 역풍이 부는 배경이다. “그때 조국만 그랬냐”는 말을 들으면 ‘누가 돌을 던지고 있는가’ 이외엔 눈을 가리는 경주마를 보는 것 같다. 묻고 싶다. 지금 보수정당과 언론만 탓할 수 있는 상황인가. 시민들의 공분 저변에 왜 합리적 근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까. “가진 사람들과 못 가진 사람들의 괴리, 젊은층의 분노를 심각하게 읽지 못하면 조 후보자에게 돌을 던질 자격 없는 세력들이 득세하게 된다”(신진욱 중앙대 교수)고 걱정했다. ‘돌 던질 자격 없는’ 세력은 자유한국당이다. 신 교수는 “2017년 이후 한국당은 ‘내로남불’과 ‘청년우파’ 담론을 유포하고 있다. 개인 문제를 진보세력 전체 문제로 확산해 냉소와 허무주의로 청년층의 환멸을 키우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진짜’ 기득권 세력들이 ‘조국’이라는 폭발력 있는 인사를 동원해, 탄핵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오래된 기획. 또 하나의 ‘조국 현상’이다. 이 와중에 민주당 수석 대변인이 “황교안, 나경원 자녀는 문제없냐”고 했다. ‘조국 대전’을 한국당과의 대결로 본 물타기 전략이다. 차라리 “한국당은 논란에 낄 자격 없다. 빠져라”라고 할 일이지.

조 후보자는 이날 “아이 문제에 불철저했다”고 고개 숙였다. 그렇지만 스스로 개혁 적임자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통화에서 “문 대통령과 조 후보자가 분리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핵심과제는 반드시 조국을 통해 이루겠다는 일체감이다. 법무부 장관은 시민들의 정치적 이상과 정권의 체제 당위성을 제도화하는 책임자다. 법이라는 강고한 기득권을 쥔. 최근 조 후보자가 내놓은 안전정책은 불평등이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던 불행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조국 현상’은 일체감보다 더 중요한 질문에 답하라고 여권에 요구하고 있다. 촛불 이후 유보됐던, 진보적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 이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조국이 당긴 방아쇠’는 지금 청와대와 여당을 향하고 있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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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개의


돌복숭아가 익듯이


아무렇지 않게 열(熱)한 땅 기운


그 끝없이 더운


크고 따스한 가슴…


늘 사람이 지닌


엷게 열(熱)한 꿈으로 하여


새로운 비극(悲劇)을 빚지 말자.


자연(自然)처럼 믿을 수 있는


다만 한오리 인류(人類)의 체온(體溫)과


그 깊이 따스한 핏줄에


의지하라.


의지하여 너그러이 살아 보아라.


박목월(1915~197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땅의 기운이 없으면 무엇도 위쪽으로 자라날 수 없다. 뜨거운 땅의 기운이 있어서 한 알의 돌복숭아도 계절에 맞춰 익는다. 시인은 하나의 성숙과 무르익음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거를 “크고 따스한 가슴”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인류에게도 땅처럼 견고하고 큰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인류의 체온과/ 그 깊이 따스한 핏줄”이 있음을 잊지 않아서 늘 너그럽게 살자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관대한 성품의 넓은 영지(領地)가 있다. 그러므로 음성도 눈빛도 표정도 부드럽고 순하고 서글서글하게 할 일이다. 작고 사소하고 낮은 그 모든 것들에게도 유심하게 넉넉하게 할 일이다. 박목월 시인이 시 ‘내리막길의 기도’에서 “어질게 하옵소서/ 사람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수록/ 안으로 환하게/ 눈뜨게 하옵소서”라고 기원했듯이.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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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언론과 야당의 의혹 제기가 2주째 이어지고 있다. 가족 명의의 사모펀드 약정, 웅동학원 채무변제 회피 논란, 딸을 둘러싼 대학·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장학금 수령, 논문 제1저자 등재 등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만 해도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다. 쏟아지는 의혹들을 접한 시민들은 상실감과 분노, 상대적 박탈감, 진보진영에 대한 혐오 등을 표출하고 있다. 조 후보자가 과거 누구보다 활발히 공동체와 약자를 위한 도덕적 담론을 펼쳐왔기 때문에 실망과 허탈감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 후보자에 대한 숱한 의혹은 일방적 폭로만 있을 뿐, 실체 규명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이 중에는 합리적인 의혹도 있지만, 사실보다 부풀려진 ‘가짜뉴스’도 뒤섞여 있을 것이다. 조 후보자 딸이 고급 외제차인 포르쉐를 타고 다닌다는 주장이 일례다. 이런 상황에서 온 나라가 한쪽에선 ‘조국 사수’를, 한쪽에선 ‘조국 낙마’를 외치며 편가르기 싸움으로 비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건 몹시 우려스럽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26일 (출처: 경향신문DB)

결국 의혹의 실체를 규명하려면 법이 정한 대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열어 검증하는 방법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러나 여야는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을 놓고서도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자유한국당은 조 후보자 청문회 날짜로 9월2~3일 전후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하루가 아닌 사흘간의 청문회를 고집한다. 인사청문회는 장관의 경우 하루, 국무총리는 이틀을 해왔던 게 그간의 관례였다. 조 후보자에 대한 공세를 추석 직전까지 끌고 가 현 정권에 최대한 흠집을 내겠다는 전략이 뻔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말까지 청문회를 마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 청문회’를 열겠다고 한다. 역시 현실성도 설득력도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야당이 빠진 청문회를 열어 그다음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인사청문회법은 인사청문요청안이 국회에 제출된 날로부터 15일 이내 청문회를 열고, 20일 이내에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보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적 시한을 따지기에 앞서 공직 후보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후보자는 정직하게 응답하는 이 모든 과정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이뤄지는 게 옳다. 후보자의 변명을 듣자는 게 아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시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그 이후에 적격 여부를 엄정하게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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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모내기를 한 이웃 논에는 이삭이 패고 있다. 장마가 지나고 이삭 패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햅쌀 생각도 슬금슬금 피어오른다. 재어 둔 나락을 조금씩 꺼내서 때마다 찧어 먹기는 해도, 한여름을 지난 쌀은 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서늘하고 맑은 가을날 먹는 햅쌀밥 생각이 난다.

농사를 지을 때, 어려운 것은 먹을 만큼 짓는 것이다. 논농사야말로 어지간히 작은 논 토막이어도 몇 집 먹을 쌀은 나온다. 처음 농사지을 때부터 쌀을 팔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쌀을 사는 사람들이 묻는 것이 꽤 자세해졌다. 품종이나 농법, 도정에 관한 것 따위를 꼼꼼히 묻는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 딴에는 조금 아는 것이라고 힘을 줘 가면서 설명을 한다. 이런 질문들이 모여서 결국 좋은 쌀이 지켜지는 밑거름이 된다.

좋은 쌀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라면, 여기저기 자세한 정보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품종을 고르는 것,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가, 보관은 어떻게 했고, 도정은 언제 했는가 따위들이다. 한데 이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사람마다 자기 형편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진다. 종자원에서는 품종의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하고, 농사꾼은 어떻게 농사짓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쌀이 된다고 한다. 보관을 제대로 해야만 1년 내내 좋은 쌀이 될 것이라고도 하고, 도정을 직접 해서 파는 사람은 도정한 지 몇 시간만 지나도 쌀은 망가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땅에서, 어떻게 농사짓는가 하는 것이다. 좋은 땅에서, 농약이나 비료를 안 쓸수록 건강하고 좋은 쌀이 된다. 우리나라는 농사에 농약, 비료 모두 상당히 많이 쓰는 편에 든다. 그래도 벼농사만큼은 농약 쓰는 것이 점점 줄고 있다. 비료를 쓰는 것도 더 줄일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도 차차 바뀌어 가지 않을까 싶고. 유기농이나 자연 재배 같은 농법으로 농사지은 쌀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농사짓는 것도 거기에 맞춰 갈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쌀을 쓴다 하고 써 붙인 식당이 생기고, 늘어나면 더욱 좋겠지만.

품종을 고르는 것은 농사지을 때 신중을 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쌀을 사 먹는 입장이라면 혼합미라고 해서 이것저것 섞은 것 말고, 자기 품종을 밝힌 것이라면 다들 어지간히 괜찮은 품종이라고 볼 수 있다. 입맛 따라 고르면 된다. 요즘은 우리 쌀 품종도 고시히카리나 밀키퀸 같은 일본 품종에 견줄 만한 것이 나온다. 고시히카리는 밥맛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인데, 최근에 나온 해들 같은 품종은 밥맛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더 좋다고 골랐다는 조사가 있다. 꽤 비싸게 팔리는 반찹쌀로 나오는 품종들도 비슷한 사정이다. 농사야말로 가장 먼저 다른 나라에 기대지 않고, (특히 일본에) 자급을 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 쌀 품종 소식은 더없이 반갑다. 덧붙여서, 저장이나 도정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피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 저장하는 과정에서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수입밀에도 쓰이는 알루미늄포스파이드(에피흄) 같은 독성이 강한 약을 훈증처리라면서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예 사용금지를 시키는 나라도 있는 약품인데, 우리나라는 허용량 자체가 너무 높다. 이것도 쌀에 대해서 꼼꼼히 묻는 사람들이 있어서 알려졌다. 그에 견주면 벼를 도정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는 것은 먹는 사람이 밥맛으로 금세 알 수 있으니까 심각한 문제까지는 아닌 것도 같고.

농사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쌀을 고르는 방법에 대한 여러 얘기가 다 맞는 얘기로 들린다고 했던 건, 과정마다 일을 어떻게 하는지가 쌀을 갑자기 훨씬 더 좋게 할 수는 없어도, 어디 한구석 허투루 하면 한 해 꼬박 농사지은 쌀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기다란 논둑에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낮은 데가 있으면 그리로 물이 다 흘러버리는 것처럼.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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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조국 사태’를 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치평론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닙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 수도 없거니와 이미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지나칠 정도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셀 수도 없는 가짜뉴스 생산 공장장들과 평생을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었던 자들이 보여주는 새롭지 않은 패악질은 도를 넘었습니다. 정책 검증, 능력 검증은 뒷전이고 주요 지면 대부분을 할애해 가족과 관련된 온갖 설들을 만들어내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무조건 감싸기’ 혹은 ‘무조건 공격하기’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분들의 고집스러움과 구태의연한 흑백논리, 진영논리 또한 지겨움을 넘어선 지 오랩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정권의 초심을 환기하고자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말은 쉽지만 어렵습니다. 어느 시기의 어떤 마음을 지칭하는 걸까요? 개인적으론 대학입학 전 기도했던 그 마음인가요, 취업 직후 회사에 감사하던 마음일까요. 저는 ‘초심’이 강조하는 바는 과거 회귀적 반성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성찰에의 요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리가 달라졌을 때 달라진 시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거만함이 되지 않게 스스로 경계하라는 의미겠지요. 개별적 회고나 참회에 대한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성장한 개인이 어떻게 더 나은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 것인지 책임을 함께 고민하자는 적극적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 건물에 꾸려진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에 출근하며 자녀를 둘러싼 논란 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문재인 정권의 초심은 ‘촛불혁명’이겠지요. 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들었던 촛불의 의미를 복기해 봅시다. 개인적으로 겪은 부당한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혹은 개별적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추상적인 거대 가치보다는 명백히 보이는 부조리함이나 특정 세력에 대한 울분으로 광장에 나오셨을지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치권력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비판하고 시정하기 위해 나오셨을 겁니다. 젊은 시절 못다 이룬 민주주의의 완성, 완벽한 정의, 혹은 온전히 공정한 제도를 상상하며 촛불을 드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촛불광장은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경멸과 무자비한 무관심으로 인해 마음이 부서진 자들이 엮어낸 분노와 슬픔의 연대체였습니다. 차별과 배제, 낙인찍기 때문에 고통받고 아파하고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감의 연대체였습니다. 빈곤과 탐욕이 개별적 불운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임을 깨달은 시민들이 힘을 합쳐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낸 책임의 연대체였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켜켜이 쌓인 부정의한 구조를 직시하고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물려주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변혁의 연대체였습니다.

이 정권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 아픔과 고통, 다른 삶을 위한 책임까지 받아 안고 태어났습니다. 기억하고 이어가겠다는 약속, 변화에 대한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파커 파머는 이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들의 정치”라고 지적합니다. 마음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공감, 책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인간적 연결은 끊어질 것이며, 공공선에 기여할 정치는 창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요. 시민의 마음 안에,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국가와 민주주의, 시민의 의미를 되새길 의무가 문재인 정권의 초심인 이유입니다.

지금 ‘사태’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는 마음이 부서진 자들의 연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소리를 듣고 원인을 살피고, 다독이고 끌어안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해야 할 정치권이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을 밟고 넘어서려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단단한 고정관념, 특정 이념 중심의 이분법, 추구하는 가치와 실천 간 분열적 불일치 등을 기꺼이 깨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지요?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관용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불평등한 구조를 기꺼이 바꿀 용기를 가진 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지요? 운에 의해 연줄에 의해, 성별과 계층, 학벌에 의해 크게 기대어 누리며 살아 왔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책임을 느끼며, 기득권 재생산 구조를 거침없이 개혁할 사람들을 널리 찾아 두루 중용하고 계신지요? 시민들은 성인군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물음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부서진 마음은 각성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임계점을 넘어선 시민들은 다시 새로운 상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때가 조만간 도래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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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25일 올해 독도방어훈련에 전격 돌입했다. 이번 훈련에는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과 육군 특전사도 참가했다. 정부가 지난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선언한 데 이어 사흘 만에 예년의 두배 규모로 독도방어훈련에 나선 것은 대화를 거부하는 일본에 맞서 당분간 단호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GSOMIA 종료 선언과 이에 대한 미국의 비판을 두고 보수세력들은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강수를 구사해 나라를 벼랑으로 몰아간다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물밑 대화 시도에도 일본이 철저하게 거부한 저간의 경과를 살펴보면 잠자코 GSOMIA를 연장할 여건이 도저히 아니었다.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의 설명에 따르면 정부는 7월 중 두 차례나 고위급 특사를 일본에 파견했고, 광복절에도 고위급 인사가 방일해 협의를 시도했다. 게다가 대화의지를 표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일본 측에 사전에 알려주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은 반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결정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보고 자리엔 이낙연 국무총리(맨 왼쪽)도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연합뉴스

GSOMIA는 지난 22일로 종료가 결정됐지만 3개월 뒤인 11월22일까지는 정상 작동한다. 북한의 24일 발사체 발사와 관련해 일본이 GSOMIA에 의거해 정보공유를 요청했고, 한국 정부가 정보를 제공했다. 어찌 보면 GSOMIA 종료 선언은 한·일관계에서 3개월의 협상시간표를 설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기간 내에 양국이 집중력을 갖고 갈등의 출구를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GSOMIA 종료에 대한 미국의 비판에 지나치게 민감해할 필요도 없다. 동맹이긴 하되 한국과 미국은 엄연히 국익이 다른 만큼 불협화음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한·미동맹은 쌍무관계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강행했을 때는 돕지 않던 미국이 GSOMIA 종료에 이토록 흥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한·미·일 3각 안보축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짜려는 미국의 입장에서 GSOMIA는 편리한 고리이겠지만, 한국으로서는 그 전략에 맘 편히 편입할 처지가 못 된다. 한·중관계와 한·미·일 협력체제를 대립항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이다. 그런 점에서 GSOMIA 논란을 키우는 것은 국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한·일관계 악화가 북·미 실무협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해야 할 책임은 한국 정부의 몫이다. 외면적으로는 별개의 사안으로 보이지만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장기 목표에서 본다면 한 묶음이기 때문이다. 

GSOMIA 종료 결정과 미국의 비판 등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정부는 그 배경과 맥락, 정부의 장기적 외교방향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국민에게 상세하게 설명할 책임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수성 탓에 근·현대사에서 여러 곡절을 겪어온 만큼 여론은 외교에 민감하다. 최근의 사태를 ‘외교 불확실성’으로 여기지 않도록 정부가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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