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두고 각종 의혹이 블랙홀이 되어 버린 가운데 청와대는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김기수 변호사에 대한 인사검증을 진행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대책 등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의 비상임위원으로 임명될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세월호 유가족과 5·18 단체들은 즉각적으로 김기수 변호사의 사참위 위원 임명 반대 의견을 표명했고, 어제는 합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군이 전남도청 지하실 지하에서 지휘했다”는 등의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인터넷 언론사 ‘프리덤뉴스’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가 진실규명을 목적으로 설립된 사참위의 위원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5·18에 대한 가짜뉴스를 생산해서 유포한 일로 해서 이 매체는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접속 차단’ 조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니 세월호 유가족들의 의견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 ‘세월호참사진상규명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당시에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극우파 인사인 고영주 변호사를 비롯한 우익인사들을 추천하여 특조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을 정점으로 당정청이 일사불란하게 작전을 하듯 세월호특조위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새누리당이 이들을 임명한 목적은 특조위가 청와대의 업무 적정성을 조사하기로 하자 곧바로 드러났다. 특조위가 “반국가단체화”했다며, 해수부가 작성했던 지침대로 움직였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작전에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이런 방해공작 끝에 특조위는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하고, 강제 종료되고 말았다. 당시 정부와 여당인 새누리당은 특조위의 활동기간을 법 시행일로부터 기산하여 2016년 9월30일로 종료된다고 우기고 밀어붙였다. 위원도 임명되지 않은 때였고, 예산도 배정되지 않은 그 시점부터 조사기간이라고 산정하는 것은 억지였다. 장관급 위원장인 이석태 특조위 위원 등이 릴레이 단식농성을 하면서까지 강제 종료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당시 새누리당과 박근혜 청와대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특조위는 법정 조사기한 8개월을 앞두고 막을 내린 불운한 조사기구로 기록되었다. 물론 특조위가 제대로 된 진상규명 작업을 하지 못해 이후에 선체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활동해야 했고, 뒤를 이어서 지금 사참위가 탄생했고, 활동 중이다. 

자유한국당은 사참위 위원만 부적절한 인사를 추천한 게 아니다. 어렵게 국회를 통과한 5·18진상규명특별법은 지난해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특별법이 시행되었는데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진상조사위원회는 구성조차 안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5·18 망언을 하는 등 5·18 진상규명에 의지가 전혀 없는 인사를 추천하자 이 중 일부 위원을 청와대가 반려했고, 이에 반발해서 자유한국당이 후속으로 다른 인사들을 추천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인권활동 전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이상철 변호사를 추천해서 인권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하는 인사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그 위원회의 설립목적에 반하는 인사들을 의도적으로 추천한다는 점이다. 

이런 전통은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현병철씨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차별적 언사를 공식 회의석상에서 사용하는 등으로 해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새누리당에서는 인권활동 경력이 전무한 홍진표, 유영하 등을 상임위원으로 추천하였다. 그 결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이 국제적 주목을 받던 위치에서 국제적인 우려를 낳는 처지로 몰락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사참위 모두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진실을 밝혀서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는 국가기구들이다. 지금까지 미루어졌던 정의를 실행해야 하는 기구들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가족을 위한다고 살균제를 사용했는데 그 결과로 가족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던 사람들이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은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 있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해 죽고만 싶었던 사람들이다. 두 참사에서 모두 국가는 피해자들을 위로하지 않았고, 사건의 진상규명을 방해만 하고 나서 분노를 샀다. 이제 이 정부에서 새롭게 진상규명을 통한 안전사회의 미래를 만들어보겠다는 사참위에 부적절한 가짜뉴스를 유포한 언론사의 대표를 앉힌다는 것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알고,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를 보다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사가 보수진영에는 그렇게도 없는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리에 피해자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인사를 굳이 추천하는 심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적절한 인사를 추천하는 건 자신들이 저지른 참사의 책임을 외면하고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참사들의 진실규명을 통하여 다시는 우리 사회에 이와 같은 비극이 없도록 하자는 위원회 설립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결국 미래의 안전마저 걷어차는 범죄적 행위다. 

사참위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밝혀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는데 시간도, 인력도 부족하다. 자유한국당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정당이다. 그들이 집권했을 때 생긴 참사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책임 있는 공당의 자세가 아닐까. 자유한국당은 의도적인 모욕을 멈춰야 한다. 대통령은 가습기살균제와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어 활동하는 사참위 위원에 김기수 변호사를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어왔는데, 이제는 이런 반인권적인 행동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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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를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재직하실 때, 하나고등학교 입시 비리를 검찰이 얼마나 부실하게 수사했는지 증거자료를 보냈던 하나고 공익제보교사 전경원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탄핵을 당하고 새 정부가 들어서기 불과 며칠을 앞둔 2017년 4월 말경 ○○일보 사장 딸의 부정입학 의혹을 포함, 3년간 90명에 이르는 부정입학 의혹을 검찰은 무혐의라며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그때 불합격생 신분에서 합격생으로 둔갑했던 대상자들의 부모가 누구였는지 검찰은 어떠한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도 없이 무혐의라는 결론을 내고선 그대로 덮어버렸습니다. 우연인지 숙명인지 문재인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던 당신의 모교 선배이자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아들도, 이명박 정권 청와대 대변인의 아들도, 전직 총리의 외손녀이자 현직 ○○일보 사장의 딸 등도 모두 하나고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7일 오후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한 건물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는 입시부정이 우리 사회를 좀먹는 부정이기에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지요. 저는 왜 지금까지도 입시 비리와 채용 비리를 발본색원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의지가 없는 것인지, 특권층의 카르텔이라 심지어 검찰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인지…. 접수된 사안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대검찰청으로, 다시 서울서부지검의 김현우 검사실을 거쳐, 다시 오창명 검사실로, 다시 김현서 검사실로 해를 거듭해 지금까지 계속해서 폭탄 돌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나름의 이유를 알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봅니다. 당신의 딸도 특혜 의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씁쓸함을 넘어 연민까지 느끼게 됩니다. 가장 슬픈 것은 당신이 부정입학과 채용 비리 수사를 책임지는 검찰을 지휘하게 될 법무부 장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촛불혁명의 도화선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한 것이었습니다. 박근혜씨가 일국의 대통령에서 탄핵당하고 감옥까지 가게 된 것도 그 시작은 불공정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분노였습니다. 그렇게 들어선 정권이 바로 촛불정권, 문재인 정부였습니다. 평범한 서민들의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고 보살피겠다는 다짐으로 탄생한 정부였습니다. 당신들은 약속했습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그러나 요즘 평범한 서민들은 괴롭고 허탈합니다. 박탈감도 큽니다. 왜 그런지, 왜 이토록 자식들 앞에서 움츠러드는지 아시는지요? 과연 누가 평범한 서민들의 삶을 위해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지 망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과연 촛불혁명의 정신을 오롯이 되새긴 채, 역사에 부끄럼 없이 적폐를 청산하고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부가 맞습니까? 그럴 자격이 있는 정부가 맞습니까? 참담한 심정으로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집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과정도 결과 못잖게 중요합니다.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당신이 자리에 연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국민에게, 역사에 어떤 의미로 평가될지 고민해 보셨습니까.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이 그렇게도 과한 소망일까요? 소박한 서민들이 꿈꾸기엔 과한 욕심인가요? 그저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께서는 이처럼 묵직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민중의 울부짖음에 답변을 해야만 합니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이 글을 배운 사람의 도리입니다.

<전경원 | 하나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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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KTX를 타고 학교 선생님들과 서울 출장을 가게 되었다. 공휴일 오전 8시,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열차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여럿이 동행하다보니 자리를 확인하고 앉는 과정에서 일행의 목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는지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무원이 와서 조용히 해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들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금세 입을 다물었고 열차는 이내 침묵에 잠겼다. 

아침 일찍 나오느라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이의 휴식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이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졸지에 상경하는 시골 아낙네들의 촌스러운 행동으로 취급받은 것 같아 마음 한편으로 불편함이 올라왔다. 개인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광주~서울행 KTX를 이용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열차 안의 풍경이 삭막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수면 열차인가? 언제부터인지 열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보는 등 혼자서 조용히 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침묵에는 상대의 존재를 수용하고 배려하며 기다리는 부드러운 침묵이 있고, 상대의 존재를 배제하고 억압하며 강요하는 불편한 침묵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할 때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는 것은 여행 목적지에서 하게 되는 일보다 더 많은 의미와 기쁨을 주는 시간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앞자리에 앉은 승객으로부터 “조용히 하라”는 항의를 받고 나서 나는 열차 안에서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조용한 대화였다고 생각했지만 대다수의 승객이 자고 있는 상황에서는 소곤거리는 대화조차도 우리가 앉은 좌석의 앞뒤 사람에게는 들릴 수밖에 없었다. 열차 안내방송은 주기적으로 정숙할 것을 요구하고, 승무원들의 제지, 이런 것들이 본래 의도와 달리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이의 울음조차 여유롭게 봐주질 않는다. 언젠가는 아이가 울자 한 승객이 승무원을 불러 세워 아이와 동승할 수 있는 8호차를 타게 하지 왜 일반실을 타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따지는 것을 보았다. 

교실 풍경이 떠올랐다. 지나치게 엄격한 규칙으로 조용하지만 생기가 없는 교실, 교사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교실, 튈까 두려워 조심하게 되는 분위기, 지루하고 무표정한 학생들의 표정이 승객들의 표정과 오버랩된다. 반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자신의 욕구만 내세우는 교실도 있다. 규칙은 유명무실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교육의 공간이라 부를 수 없는 교실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질서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혼란 없이는 어떤 것도 생성될 수 없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질서와 예기치 않는 상황에 열린 마음을 갖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견딜 수 있는 인내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열차라는 공적 공간에서 함께 행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서로의 입장이 달라 충돌하게 될 때 성급히 반응하며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목소리 높여 주장하거나, 망설이다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속으로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를 주로 선택한다. 그럴 때 좀 더 자신의 입장을 보류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줄 따뜻한 시선과 여유를 갖고 견뎌보는 것은 어떤가? 어쩌면 성숙해 간다는 것이 관계 속에서 긴장을 견디며 자신이 포함할 수 있는 테두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것이 아닐까?

<손연일 | 월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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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손에서는 그랬다. 나는 쓰레기를 잠깐씩만 만져왔으므로. 더구나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으므로. 쓰레기란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가벼운 한 겹. 버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기억. 그래서 아주 잠깐이었던 무엇.

그다음 단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잊은 쓰레기를 손으로 만지는 이들이다. 쓰레기와 관련된 어떤 노동자들은 밤에만 일해야 한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과정을 보는 것조차 불쾌해할지도 몰라서. 자기 손을 떠난 쓰레기를 곧바로 혐오스러운 남의 일로 여기곤 해서.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지만 내가 떠난 자리에 그들이 다녀갈 것을 안다.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이 그들에겐 짧지 않을 것을 안다.

또 어떤 쓰레기들이 있는가. 의류 수거함에는 입다버린 옷이나 작아진 옷이나 망가진 옷뿐 아니라 오물이 묻은 수건이나 옷이 아닌 쓰레기도 담긴다. 그 모든 게 한데 모여 ‘자원’이라는 곳으로 옮겨진다. 그곳에 가면 헌옷과 쓰레기만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언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언덕에 올라 일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들 중 하나는 나의 엄마 복희다. 복희는 헌옷으로 된 언덕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일했다. 어떤 버려진 옷은 유달리 더럽다. 어떤 쓰레기가 특히 쓰레기인 것처럼.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복희는 다시 입을 만한 것을 찾아내 사오고 깨끗이 손질하여 팔았다. 그 일을 하고 온 날에는 몸살을 앓곤 했다. 손이며 무릎이며 온몸이 욱신거린댔다. 나는 복희가 파는 옷들을 주로 입으며 자랐다. 아름다운 옷들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나의 옷장에 남아있는 옷들이다. 너무 많은 옷이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너무 조금 입은 뒤 너무 쉽게 버려지는 세상이라 복희가 오를 언덕은 언제고 계속 생겨났다.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 지금도 복희는 새 옷을 잘 사 입지 않는다.

7월4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앞바다에서 한 어선이 수면 위로 떠오른 해양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이날 태안군서부선주협회는 청결한 해양환경 조성을 위해 소속 어선 150여척을 동원해 폐어구, 스티로폼, 플라스틱, 말풀 등 해양쓰레기 30여t을 수거했다.연합뉴스

쓰레기로 된 언덕은 바닷속에도 있다. 거의 모두가 모르고 지나가는 쓰레기다.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만이 그 쓰레기를 안다. 나는 아직 이야기로만 들어보았다. 누군가가 잠수복을 입고 공기통을 메고 몸 여기저기에 납 벨트를 찬 채로 입수한다. 수면 아래로 깊이 내려가기 위해서다. 지상으로 연결된 호스를 통해 숨을 쉬어가며 바닷속 쓰레기를 치운다. 산업 잠수사들의 일 중 하나다. 그들은 육지에서 하는 대부분의 막일을 수중에서도 할 줄 안다. 나의 아빠 웅이의 직업도 산업 잠수사였다. 바닷속에서 어떤 쓰레기를 보았느냐고 내가 묻자 웅이는 보지 않았고 만졌다고 대답했다. 물속은 아주 탁하고 어둡기 때문이다. 쓰레기는커녕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댄 자기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시야가 나오지 않는 광활한 찬물 안에서 웅이는 쓰레기를 치운다. 손으로 하나하나 만져가며 치운다. “보이지 않아도 만지면 알 수 있어. 자전거구나. 드럼통이구나. 페트병이구나. 캔이구나. 비닐이구나.”

손에 눈이 달렸다는 말은 잠수사들 사이의 관용구다. 웅이는 익숙한 쓰레기들을 바다 위로 올려 보낸다. 그는 생생한 악취를 맡는다. 바닷물의 냄새를. 쓰레기의 냄새를. 오염된 물의 냄새를. 나는 쓰레기 언덕에 올라보지도, 바닷속 쓰레기를 만져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이 내 부모에게 결코 짧지 않았음을 안다.

그리하여 이 쓰레기를 가장 오래 겪을 이 세계를 생각한다. 세계는 우리 모두를 품고 있기 때문이며, 썩지 않은 무수한 것들과 함께 미래로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어떤 쓰레기는 거북이의 콧구멍에 꽂히고 바다사자의 목을 조르고 돌고래의 배 속을 채우고 아기 새의 목구멍에 들어간다. 어떤 쓰레기는 수출되었다가 돌아오고 어떤 쓰레기는 방대한 섬이 되고 어떤 쓰레기는 내일도 생산되어 내 손을 잠깐 거친 뒤 잊고 싶은 곳에 쌓여갈 예정이다. 내가 배운 언어가 적힌, 익히 아는 쓰레기들이다.

모두가 버리지만 모두가 치우지는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쓰레기가 잠깐이 아니라는 걸 똑바로 보는 부모와 자식과 자식의 자식과 노동자와 옷가게 주인과 잠수사와 소설가와 시인과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있다. 우리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생이 스며드는지.

<이슬아 | ‘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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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헛바람 들어 주식이나 다단계, 사업을 하겠다고 설칠 때 옛사람이라면 어떻게 에둘러 일렀을까요. “바람 가는 데 구름 가는 법이야.” 깜냥 모르는 바람(望)이 헛바람이듯, 잡으려는 그 구름도 뜬구름이라는 뜻이지요. “뭐야, 당연하잖아” 하며 말에 든 뼈를 못 알아채는 어리석은 타인이라면 굳이 내 시간 써가며 만류할 것도 없겠지요. ‘바람 가는 데 구름 간다’는 속담은 ‘바늘 가는 데 실 간다’처럼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헛바람 가는 곳에 뜬구름도 간다’였을 것입니다. 상처받지 않게 넌지시, 지나가는 말처럼 일러주려 생략했겠지요.

바벨탑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지만 그런 바벨탑조차 깊은 바닥부터 하나하나 구름 위로 쌓아올린 것입니다. 높은 산에라도 힘써 올라야 구름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 바닥 차고 힘껏 뛰면 잡힐 것도 같습니다. 어린이는 구름이 잡힐 것 같아 헛손질합니다(어리다와 어리석다는 같은 말입니다). 끝 모를 열망이든 남 따른 욕망이든, 혼자 해낼 수 있다면 뭐가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열망엔 불만이 따라붙습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공할 수 있는데…. 주위에 섭섭한 가슴을 칩니다. 그렇게 애면글면 사업한다고 형제 재산과 부모 노후자금에 집까지 들어먹고, 다단계에 빠져 가족을 오로지 회원 머릿수로 봅니다.

바람이 조바심칠수록 구름은 거의 손에 잡힐 듯 떠갑니다. 보란 듯한 뜬구름 따는 간짓대와 바지랑대로 주위를 써먹습니다. 제바람에 넘어져도 조금만 길었다면, 계속 남 탓이지요. 안중에 제 욕망뿐인 높바람은 바람벽마저 쓰러트려 모두를 의지가지없게 합니다. 구름은 원래 잡히지 않습니다. 움켜쥐면 안개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니까요. 구름을 옳게 갖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늘같이 너르고 빈 사람이 되면 붙잡지 않아도 구름이 탐스럽게 담깁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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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는 몹시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나 일본과의 관계,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 때문만은 아니다. ‘전주 여인숙 화재…폐지 주워 쪽방 생활하던 노인 3명 사망’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휴게실서 숨진 서울대 청소노동자’ ‘냉장고는 텅 빈 채…보호사각서 죽어간 탈북 모자’ ‘속초 아파트 건설 현장서 엘리베이터 추락…3명 사망·3명 부상’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 등 쏟아지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사람이 죽고 있다. 일을 하다가, 폭염에, 배를 곯다가, 쪽방에 불이 났는데 피하지 못해서. 그리고 뉴스 검색창에 오르지 않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안전사회시민연대와 노년유니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일 서울 목동 빗물 펌프장 앞에서 사망 사고 참사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석우 기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예정돼 있다. 죽음을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맞이하기 위한 지침서들도 쏟아진다. 그 방법과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몸과 질병, 죽음에는 사회적 원인이 스며 있다.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라고 했다.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죽음이 시시때때로 목도된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김모군, 과로에 쓰러진 수많은 집배원들, 5년 전 빈곤을 이기지 못한 송파 세 모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의 사람들. 이들은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끊어지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유해성분 물질이 안전한 제품으로 둔갑하는 구조, ‘가만히 있으라’로 응축되는 사회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 있다.

사회의 치부를 떠안은 비극에서 마취된 공동체를 본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빈곤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고, 안전하게 살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패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고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현장실습생 르포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말한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일반’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순간의 충격파를 던지지만 그마저도 쉽게 잊혀지고 만다. 쏟아졌던 기사들도 이미 사라졌다. 존재, 메시지, 죽음마저도 휘발된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기억해야 한다. 떠난 이가 남긴 궤적과 이 이후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으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라는 핑계들은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에 다름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밝혔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계속 정권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부르는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죽음이 덧없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기록으로 각성한 공동체를 꿈꿔 본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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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잘 못한다. 그럼에도 고교 시절 음악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피아노를 전공하던 언니 덕이다. 가창 시험 전날이면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다. 집에는 클래식 음반이 많았다. 고전음악 감상 시험도 무난히 치를 수 있었다. 서울 강북의 일반고에 다니던 내게도 문화자본은 작동했다. 운이 좋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딸 문제에 대해 뒤늦게 사과했다. “당시 존재했던 법과 제도를 따랐다 하더라도 그 제도에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국민과 청년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밝혔다. 조 후보자의 최대 과오는 딸의 ‘드문 행운’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데 있다. 조 후보자의 딸은 한영외국어고 재학 중 단국대 의대에서 2주가량 인턴을 한 뒤 소아병리학 관련 영어 논문의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책임저자인 단국대 장모 교수는 한영외고 학부모였다. 조 후보자 딸은 이후 고려대 생명과학대학에 합격했다. 당시 자기소개서에 ‘인턴십 성과로 이름이 논문에 올랐다’는 사실을 밝혔다.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진학 후엔 유급하는 등 성적이 저조했음에도 지도교수로부터 6학기 연속 ‘면학 장학금’을 받았다. 조 후보자는 당초 이 모든 과정을 딸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로 여겼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서울 종로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조 후보자와 시민의 시선은 엇갈렸다. 그는 모든 과정이 합법·적법임을 강조했다. 현 단계에서 조 후보자가 불법적으로 개입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시민은 그러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 과정이 합법적일 수 있다는 데 더 좌절했다. 과거 부와 명예, 권력의 대물림이 불법적 통로를 거쳐 이뤄졌다면, 그래서 사후에라도 제재가 가능했다면, 이제는 자본·지위·네트워크 등 ‘합법적 역량과 자원’을 총동원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박탈감이 깊어졌다. ‘조국 구하기’에 나선 일부 여권 인사들은 기름을 부었다. 대중, 특히 청년층 분노의 근원을 들여다보기는커녕 궤변을 늘어놨다. 논문 제1저자 등재를 두고 “보편적 기회”(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현장실습 하고 ‘에세이’를 쓴 게 뭐가 문제냐”(이재정 경기도교육감)고 했다.

높은 담장 안쪽에 ‘그들만의 성채’가 솟아 있음을 짐작 못한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를 목격한 이는 많지 않았다. 조 후보자로 인해 다수 시민이 담장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은 ‘냄새’를 통해 계급 문제를 은유했다. ‘조국 사태’는 은유를 넘어섰다. 조 후보자는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혔다.

조 후보자의 장관 임명 여부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주권자의 여론을 반영해 결정될 일이다. 나는 그의 거취보다 한국 사회에 계급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김해영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공개한 한국장학재단의 대학생 소득분위 분석자료(2018년 1학기)를 보자. 재단은 신청자를 대상으로 부모의 수입과 재산을 월소득으로 환산해 국가장학금을 지급한다. 이른바 SKY대(서울·고려·연세대) 신청자를 대상으로 소득분위를 나눴더니 장학금을 못 받는 최상위층(9·10분위)이 절반에 육박하는 46%에 달했다. 9분위의 월소득 인정액 하한선은 약 904만원, 10분위는 약 1356만원이다. 연소득으로 환산하면 1억원 이상이다. 반면 3개 대학을 제외한 다른 대학 재학생 중 9·10분위 비율은 25%에 그쳤다. SKY대학의 고소득층 비율이 다른 대학의 2배 가까이 되는 셈이다. SKY대와 비SKY대 학생 간 격차가 이 정도라면, 대학생과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의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 특정 사회계층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갖가지 혜택을 누릴 때, 더 많은 누군가는 그런 혜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로버트 D 퍼트넘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계급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현실을 다룬 <우리 아이들>에서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아이들 또한, 부자 아이들만큼이나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재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감한다. 외고·국제고·자사고 체제를 뜯어고치고, 일반고에 대한 획기적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대학입시에서 지역균형선발·기회균형선발을 확대하고,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장학금을 줘야 한다. 국공립대 공동학위제와 공영형 사립대 도입을 추진하고, 출신학교 차별금지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집권세력은 계급적 박탈감이 사안의 본질임을 인정하는가? 격차를 완화하려는 구체적 실천을 할 각오가 돼 있는가? ‘조국 사태’가 특정 부처 장관의 임명 문제를 넘어, 시민의 삶을 좌우할 핵심적 질문의 계기로 작용하길 바란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는 계급이다. 해답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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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 가면 전봇대에 자꾸 눈길이 간다. 너절한 세상 따위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저 멀리 달아나는 전봇대. 껑충한 전봇대는 키만 큰 게 아니다. 수많은 소식과 사연을 전달하느라 귀가 아주 발달했다. 길에도 막다른 골목이 있는 것처럼 전봇대도 그 끝이 있을 것이다. 혹 말이 바뀌는 국경 근처에 가면 전봇대의 최후를 볼 수 있을까. 흔치 않은 외국 여행은 주로 비행기를 이용했으니 그 또한 여의치가 않아 아직까지 궁금한 사항으로 남았다. 육상선수처럼 성큼성큼 뛰어가는 전봇대, 너는 자꾸 어디로 가느냐.

사나운 파도를 가르며 대청도로 갈 때 문명의 척후병인 양 전봇대는 이미 나보다 먼저 상륙해 있었다. 혹 이곳에서라면 격리된 섬에서 진화를 관찰하듯 전봇대의 일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작은 섬은 섬대로 한없이 넓고 깊어서 좀체 그 끝을 보여주지 아니했다. 허겁지겁 쫓아가는 텅 빈 공용버스를 보기좋게 따돌리며 숲으로 들어가더니 저 멀리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전봇대. 하늘을 배경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구름의 난간을 밟고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대청도와 백령도에서 자생하는 대청부채를 바닷가에서 만난 뒤, 이 지역에서 겨우 볼 수 있는 나무를 찾아나섰다. 섬마을을 잇는 줄기 같은 도로를 벗어나 확 좁아지는 가지 같은 임도로 접어드니 여느 곳과 다름없는 생태계가 눈을 호린다. 북한계선에 위치한 동백나무를 구경하고 돌아나오는 길켠에서 좀 특이하다 싶은 나무를 용케 꽃동무가 찾아냈다. 이름도 아주 특이한 뇌성목.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게 특징인 감태나무와 아주 유사하다. 감태나무가 산지에 산다면 뇌성목은 바닷가에 산다.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다가 무청 돋아나는 밭에 꽂힌 전봇대 아래에서 들리던 윙윙윙 소리는 조금 무시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우물로 던진 밧줄 같아서 그 끝을 잡고 대처로 가는 꿈을 의탁하기도 했었지. 뇌성목, 그 이름은 천둥치는 소리라는 뜻의 뇌성(雷聲)이라고 한다. 외딴 섬, 대청도에서 만난 전봇대 옆의 뇌성목, 녹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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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절차에서 국민정서법의 파고를 넘어서야 적격보고서가 채택될 것이고 임명권자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다. 지금 분위기는 부정적이다. 인사검증 기준에 따른 위법과 탈법은 없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는 기류다. 당시 있던 법과 제도를 잘 알고 활용했다고 하더라도 특권층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박탈감과 후보자의 평소 소신에 배치되는 것 아니냐는 실망감이 빚어낸 국민정서법이 그렇다. 거기에는 그동안 보여준 공적인 행동과 사회적 발언으로 형성된 후보자의 이미지에 실망한 지지자의 배신감도 자리하고 있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에 부합하는 인물인가에 대한 회의가 숨어 있기도 하다. 후보자의 날카로운 발언에 폐부가 찔려본 사람이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분노와 울분도 있을 것이다. 후보자가 했던 말과 글을 소환하여 대비표까지 만들어 가면서 비난에 가세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평소 후보자를 마뜩잖게 생각했던 이들의 거센 반격이 부정적인 분위기와 기류로 흐르게 했을 것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출근 중 입장 발표를 마치고 승강기를 타고 있다. 이준헌 기자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는 “법률 위에 헌법 있고,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말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실체가 없어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여론과 다를 바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국민정서법은 여론보다 덜 객관적이다. 정서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지극히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다. 지역정서처럼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일시적이고 휘발성이 있다. 누군가가 어떤 의도로 사실을 왜곡하여 선악을 판단해 버리고 이를 그대로 받아 퍼뜨리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정서법이 만들어진다. 언론 스스로 왜곡이나 편파보도로 그 흐름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한번 일어난 감정은 물결치듯 퍼져서 멈춰 세우기가 쉽지 않다. 그 반작용의 정서도 생기지만 금세 묻혀 버린다. 관련 당사자 측에서 해명을 시도하지만 기류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국민정서의 흐름을 읽은 후보자는 아이 문제에 불철저하고 안이한 아버지였음을 고백하면서 ‘국민정서’에 맞지 않은 일이라며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법 위에 숨어서 전 방위로 영향을 미치는 국민정서법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래서 헌법 위에 자리한 최상위의 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특권층과 가진 자에 대한 불신이나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분노가 쌓여 발산된 국민정서법은 순기능도 한다. 전관예우나 병역면제 등에서 국민정서의 위력이 부정의와 불공정을 바로잡은 적도 있다. 그러나 국민정서법은 생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의적이고 감정적이다. 사람의 감정과 정서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듣고 보았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일단 정서가 형성되면 그것이 마치 객관적인 여론인 것처럼 포장되고 국민의 뜻이 된다. 마치 보편성을 띤 법감정인 것처럼 여겨진다. 국민정서의 흐름을 정하는 국민의 눈높이도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후보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다가도 어느 후보에게는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때때로 이중적이다. 누구도 향방을 가늠하거나 옳고 그름을 변별할 수도 없다. 실체를 검증할 방도도 없다. 성문법처럼 실체가 있는 법이 아니기에 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바람처럼 왔다가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법과 절차를 뒷전으로 밀어두고 국민정서법에 휘둘려 누군가를 재단하고 국가정책을 결정할 수는 없다. 죄형법정주의, 무죄추정의 원칙, 적법절차 등이 핵심으로 자리 잡은 민주법치국가에서 국민정서법이 개인의 유무죄를 가르고 공직의 임명기회를 좌우한다는 것은 구시대로의 회귀다. 민주국가의 정당이라면 언론을 이용해 유리한 국민정서 만들기에 애쓸 것이 아니다. 국회가 아니라 장외에서 투쟁과 의혹 터트리기로 국민정서법의 기류확산에 몰두해서는 안된다. 이는 국민이 제정한 인사청문회법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반의회민주적 행태다. 청문이란 말할 기회를 주고 들어야 하는 절차다. 임명권자가 지명한 공직후보자가 적격자인지를 판단하려면 그를 불러 세워 들어보라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자료도 제출받고 증인도 불러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라는 것이 법에 정해진 청문방식이다.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는지, 검찰개혁과 수사권 조정 등을 어떻게 추진해 나갈 것인지, 그래서 공직윤리와 도덕성에 문제가 없는지, 법무행정 수행능력과 전문성이 있는지를 묻고 들어 확인해야 한다. 국민정서법이 통용되는 여론의 법정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법정에서 공방이 벌어져야 한다. 그리고 공직적격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인사청문회에서도 국민정서법의 파고를 넘지 못하면 장관직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임명권자의 결단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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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눈에 띄게 잦아지자 또다시 핵무장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보수성향의 전문가와 정치인들 중심으로 “핵무기를 배치할수록 비핵화 협상력이 커진다”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전술핵 전진 배치, 핵억지력 강화 방안이 비핵화 협상에 반영돼야 한다” “미국이 핵우산으로 한국을 보호해주겠느냐”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핵의 균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공론의 장으로 한층 나온 느낌이다.

핵무장은커녕 전술핵이라도 남한 내에 반입되면 북한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가고 덩달아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하며 북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킬 압박과 명분 역시 사라짐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게다가 전술핵이 들어오면 여섯 차례 핵실험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관에다 대못을 박는 셈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후과(後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위협과, 최악의 경우 단교(斷交)까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학계, 정치권, 시민단체 등에서 전술핵 재반입을 공론화해 주길 제안한다. 전제가 있다. 주한미군(엄격히 말해 지상군) 철수와 연계하는 것이다. 넓게 보면 주한미군 철수는 진보진영의 비원(悲願)이었고, 전술핵 반입은 보수진영의 숙원(宿願)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과거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여러 차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적정 수준의 미군이 전술핵을 통제할 경우 한국 자체 핵무장 욕구를 억지하는 효과는 분명 있다. 여기에다 근력을 키워 나가는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장사꾼 트럼프에게는 가성비가 높은 흥미로운 옵션일 수가 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미군을 철수하고 핵무기를 전진배치하는 것은 중국과의 전면전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결기가 없는 한 불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하다. 중국은 미군이 한반도에서 나갈 경우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일례로 베이징과 거리가 불과 1000㎞ 이내인 군산 공군기지에 미국이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까지 용인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1967년 한 해에만 남한에 미국 핵무기의 숫자가 무려 950기였다는 점을, 그리고 박정희가 닉슨의 괌 독트린(1965·7·25)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자 제주도를 핵무기 기지로 미국에 제공할 수도 있음을 제안(1969·10)한 역사적 사실들을 미국이 모를 리가 없다.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는, ‘트럼프가 있는 미국’과 ‘트럼프가 없는 미국’은 같은 미국이 아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프린터에 깊이 끼어있는 종이처럼 엉켜버린 상태에서 미국은 동북아시아 원 안에 ‘핵 보유국 북한’을 넣고 전략을 새롭게 짜고 있다. 문서상으로는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한국의 방위비분담금은 획기적으로 인상하고, 동시에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폐기에 따라 한국을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 어디엔가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여러 선택 사항 중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따진 후 우리의 급소를 찾아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럴 경우 관건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의 압력과 중국의 위협까지 동시에 감내할 여력이 있느냐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만드는 높은 파도는 ‘평화경제’의 성벽을 아무리 높이 쌓고, ‘우리민족끼리’의 해자(垓字)를 아무리 깊이 파도 성 안으로 넘쳐 들어오게 마련이다. 

막스 베버는 선(善)은 선에서만, 악(惡)은 악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정치적 어린아이’(political infant)라고 했다.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은 동서고금의 불편한 진실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강(自强)과 균세(均勢)를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적 유아(幼兒)가 될지 아니면 정치적 거인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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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다루는 유엔 상설회의에서 지난달 2일 한국 학자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전쟁 기간 쉽고 편한 삶을 살았으며, 징병도 합법적이었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 ‘망언’을 쏟아낸 이는 식민사관으로 써내려간 책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저자 이우연씨다. 그에게 유엔 인권이사회에 가자고 제안하고, 스위스 제네바 5박6일 체류비와 항공료를 댄 곳은 일본 극우단체 ICSA(국제경력지원협회)였다. “위안부 강제동원은 거짓이고 돈을 요구하려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려온 단체다. 이 단체의 활동가 후지키 슌이치와 이씨는 제네바 행동이 ‘공동작품’임을 인정했다. 일본 극우가 기획·협찬하고, 한국 극우가 대변인·얼굴 노릇을 한 꼴이다. 하필 그날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예고한 다음날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책 <반일 종족주의> 저자 6명은 올해 안에 일본판 출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책에 묶인 저자들의 온라인 강의 영상엔 처음부터 일본어 자막이 달렸고, 일본판 저작권도 계약서에 명시했다. 징용자 동원엔 강제성이 없고,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고 왜곡·조작한 책이다. 일본, 그것도 ‘우익의 눈’을 대변한 책이나 발언에 사실관계를 세세히 다툴 일은 없다. 조선인들이 1000m 해저 막장에 끌려가 죽은 ‘지옥섬’ 군함도만 봐도 그렇고, 10대 소년·소녀 얘기로 시작되는 징용·위안부 증언이 넘친다. 그럼에도 경계는 늦출 수 없다. 문제의 식민사관 책이 광복절 즈음에 호기심까지 겹쳐 베스트셀러가 됐다. 극소수라도 등 뒤에서 쏘는 총알을 일본이 악용할 것은 불문가지다. 툭하면 “학자적 소신”으로 포장하는 친일 마케팅의 주도 인물과 위험성을 더 드러낼 때가 됐다.

지난 3월 경향신문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 활동가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언젠가 위안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가 온다’는 기사를 잘 봤다며 일본이 그걸 노리고 있다고 일깨웠다. 위안부 기림비와 교육을 방해하는 데 일본이 얼마나 많은 돈과 인력을 쏟아붓고 있는지 알리면서다. 일본·한국의 극우가 부창부수하는 역사전쟁의 집요함이 더해지고 있다. 2006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펴낸 국내 뉴라이트 사학자들이 국정교과서에 실패하고 이젠 책과 국제무대에서 대중적 선전 활동에 나섰다. 말은 점점 노골적이고, “단어 하나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썼다”(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얼굴은 두꺼워진다. 사실과 엇가는 말과 글은 사상누각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 행각’,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알리고 두렵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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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장애인 특수학교인 서울 서초구 ‘나래학교’가 다음달 1일 개교한다. 서울에 공립특수학교가 문을 여는 것은 2002년 서울경운학교 이후 17년 만이다. 애를 태워온 학생과 가족들을 고려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다른 특수학교의 더딘 설립 속도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성숙도와 장애인 인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설립 추진 2년10개월 만에 문을 여는 나래학교는 비교적 큰 갈등 없이 추진됐다. 유치원부터 고교까지의 지체장애학생 66명(순회학급 포함 27학급)으로 교육을 시작하며, 향후 직업교육 과정까지 모두 35학급, 140명가량의 학생을 수용할 계획이다. 이곳도 한때는 인근 주민들이 학교 설립 조건으로 일반 건물 층수 제한 완화를 요구했으나, 그 대신 마을에 북카페를 지어주겠다는 교육청의 대안을 받아들여 문제가 해결됐다.

나래학교보다 일찍 설립을 추진한 다른 특수학교들은 아직도 난항 중이다. 2017년 9월 장애학생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학교 설립을 호소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큰 비판을 받았던 서울 강서구 서진학교는 당초 지난 3월 문을 열 예정이었지만 주민 민원 등으로 개교가 3차례나 미뤄졌다. 서진학교는 2013년 설립 계획을 세웠지만 이 지역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학교 부지에 국립한방병원 유치를 총선공약으로 내걸면서 학교 설립이 표류했고, 몇 년이나 지나서 사회적 역풍을 맞고서야 겨우 첫삽을 떴다. 2012년부터 추진해온 서울 중랑구 동진학교는 아직 부지 확정도 하지 못한 상태다. 특수학교가 이처럼 기피시설로 간주돼 지역주민에게 보상을 제공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만큼 더 편한 학습환경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장애학생들은 비장애학생들보다 더 먼 거리를 통학하고 있다.

장애는 성격처럼 개인적 차이일 뿐이다. 장애인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소득만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존중과 배려가 그 척도다.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장애와 비장애 학생들 간 벽을 허물고 함께 공부하는 ‘통합교육’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집값 떨어진다며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언제까지 특수학교 설립이 특별한 뉴스가 되는 ‘비정상 사회’에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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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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