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2014년 9월부터 이달까지 돈을 주고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사람을 정보원 삼아 수십명의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5년 가까이 그의 보고서에 담긴 사람들은 과거 같은 학생운동조직에 있었던 교수·변호사·기자·노무사·영업사원·농민·시민단체 인사였다. 사찰 정황과 증거 물품도 함께 제시됐다. 사실로 밝혀지면, 민간인 사찰을 끊었다는 문재인 정부 국정원의 다짐과 약속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이다.

국정원에서 ‘김대표’로 불렸다는 정보원의 폭로는 구체적이다. 그는 언론에 “운동권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해 알려주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국정원 경기지부 공안2팀의 ‘사업’ 제안을 받고 응했다고 밝혔다. 매달 기본급 200만원, 보고서 작성 때나 시민단체에서 간부 승격 시 50만~300만원의 성과급까지 줬다고 했다. 녹음 장비가 숨겨진 가방을 국정원이 줬다며 직접 공개했고, 시민단체 활동가와 같이 살라고 얻어준 방엔 ‘몰래카메라’도 설치됐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민간인을 매수해 정보를 수집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국정원은 자발적 협조자를 증거수집에 활용한 것은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보원은 “국정원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할 일은 한다’고 독려했고, 그만두려 할 때마다 돈으로 회유했다”고 반박했다. 정보원이 검찰에 고발할 뜻을 비쳤으니 시시비비를 분명히 밝히고, 사실이라면 돌출행동인지, 어디까지 보고·지시가 이뤄졌는지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보기관의 ‘사찰 DNA’는 시민들의 불신이 깊다. 그 악몽이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부에서 튀어나온 충격은 더 말할 게 없다. 국정원도, 국회 정보위도 진상조사에 머뭇거림이 없어야 한다. 국정원이 2년 전 국내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했지만, ‘보안정보’를 명분 삼는 정보수집이 부활할 소지는 상존했다. 그 분기점이 될 국정원 개혁법안들은 2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다. 정보수집 활동에 대한 국회·사법 통제 장치 논의도 다시 고삐를 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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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다음달 2~3일 열기로 합의한 가운데 증인 채택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조 후보자의 모친과 부인, 자녀, 동생, 동생의 전부인 등 87명에 달하는 증인을 요구했다가 25명으로 압축했다. 거기에도 가족들은 그대로 포함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후보자의 가족을 증언대에 세우는 건 전례 없는 일이라며 맞서고 있다. 

조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사모펀드 약정, 웅동학원 채무변제, 딸의 대학·의학전문대학원 입학, 논문, 장학금 수령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문회는 바로 이런 의혹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다. 한국당이 28일 조 후보자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며 ‘청문회 보이콧’을 논의했다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그렇다면 이제 청문회에서 후보자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들을 포함해 도덕성과 직무수행능력을 차분히 검증하는 게 옳다. 그러지 않고 의혹 부풀리기, 망신과 모욕 주기, 인신공격과 흠집내기를 위한 ‘정치 청문회’가 돼서는 안된다. 한국당이 후보자의 어머니에 부인, 딸까지 청문회장에 부르겠다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치다. 당사자가 나와있는데, 그에 더해 가족까지 불러 무엇을 따지고 무슨 답을 듣겠다는 것인가. 이런 ‘일가족 청문회’는 세인들의 말초적 관심을 한껏 부풀려 조 후보자와 문재인 정권에 최대한 흠집을 내겠다는 정략적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청문회가 예정돼 있고, 검찰 수사가 막 시작된 상황에서 특별검사와 국정조사를 거론하는 것 역시 정략적이다. 지금 조 후보자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이 따갑다고 해서 야당의 무차별 정치공세까지 먹힐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국회 인사청문제도가 2000년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청문회가 열렸다. 여야는 정권교체 때마다 공수를 바꿔 야당은 ‘아니면 말고’식 폭로와 흠집 내기에 집중하고, 여당은 후보자를 무조건 비호하는 악습을 되풀이해오고 있다. 청문회가 본질을 벗어나 정치공방의 장으로 전락한 데 대한 비판은 계속 제기돼 왔지만, 항상 그때만 반짝할 뿐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시민이 적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엄정한 청문회를 진행하는 게 필요하다. 야당은 커다란 정치적 호재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지나치면 역풍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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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에 딸과 산책하러 나갔다. 날이 흐린 탓에 보름달인데도 영 밝지가 않아 입김이 서린 창 너머에 떠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달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고 싶었기에 무슨 표현을 고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산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솥에 든 찐빵 같다거나 야단맞고 나와 시무룩해 보인다는 식의 긴 묘사문들만 떠올랐다. 어쨌든 그럴듯한 비유를 찾아보려 애쓰는데 딸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였다. 아빠, 달이 녹았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혀끝에 맴돌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녹아 버렸다. 그래, 달이 녹았구나. 그보다 더 그럴듯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말이었다.

이토록 간명하고 순진하고 투명한 말을 잃어버린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금 아이들의 말에 놀라는 이유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 내가 보는 세상과 퍽 달라 보여서이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눈에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보다 더 비밀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 앞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말에는 비참한 세상을 실제로 더 아름다워지게 하는 힘이 있고 아이들의 말에도 그와 비슷한 힘이 있다. 아이들의 말은 시인의 말에 가장 가깝고 그건 곧 우리 모두 한때 시인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에 비하자면 정치인의 말은 얼마나 졸렬한가. 일본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 나경원, 황교안, 홍준표 같은 자들의 말을 듣고 읽으면서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막말이다. 거칠고 상스럽다. 그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테고 흐린 날 달을 가리키며 달이 녹았다고 말할 줄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이들의 언어에서 누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언어는 앙상하기 이를 데 없어 혐오의 감정 외에는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언어를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언어로 이 세계가 한결 더 거칠어지고 상스러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모든 막말이 막말인 것만은 아니다. 막말이라고 해서 다 거칠고 상스러운 건 아니다.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어느 시인이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다. 그이의 의원 사무실로 축하문과 축하 꽃다발 등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이질적인 문구가 새겨진 화분 하나도 섞여 있었다. 근조 누구누구 시인. 시인의 동료 시인들이 보낸 화분이었다. 장례식장에 보내는 조화나 다름이 없었으니 축하는커녕 조롱을 넘어 상당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화분이었다. 뒤늦게 화분을 발견한 보좌관이 당장 치우겠다고 하자 시인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놔두시게. 왜냐고 묻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걸 보면서 내가 죽었구나 하며 날마다 되새겨 보겠네. 나는 이 일화를 듣고 시인이 근조라는 막말에서 동료 시인들의 분노와 혐오만을 읽지는 않았음을 알았다. 국회의원 이전에 시인임을 잊지 말라는, 어차피 정치를 하기로 했다면 시인답게 하라는 다정한 질책으로도 받아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내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근조라는 단어 속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근조라는 말은 막말이면서도 막말이 아닌 셈이고 분노와 혐오를 담고 있지만 더 이상 분노와 혐오만은 아닌 셈이다. 그 단어는 진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을 듣고도 웃는 이유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욕설에 담겨 있는 진심을 헤아릴 수 있어서이다. 친한 친구들과 이따금 비속어를 나누는 사람은 친구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 말의 내부에도 있음을 안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비록 시는 아닐지라도 아직 시를 완전히 잃지는 않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기에 진짜 막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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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동>을 보면서 거슬리는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comfort woman.’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영어 표기다. CNN같은 뉴스 매체는 물론 집회를 알리는 영문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나 ‘일본군 성노예’의 영어식 표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왜 서구언론은 위안부 피해자를 ‘comfort woman’이라고 부를까. 결론부터 말하면 ‘위안부’ 연구에서 우리 학계가 일본에 완패했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은 한·일 양국에 큰 파장을 불렀다. 그러나 학계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일본 학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 반면 우리는 조용했다. 요시미 요시아키 등 일본학자들이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자료집> 등을 냈을 때 한국 역사학자들은 수수방관했다. 국내에서 관심을 가진 곳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같은 시민단체 정도였다. 일본이 연구를 선취하고 독점하면서 ‘위안부’는 사실상 공식 용어가 됐다. 한국 정부조차도 작은따옴표를 한 ‘위안부’ 명칭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 학계가 한 일은 ‘종군’을 ‘일본군’으로 바꾸고 피해자임을 강조한 게 전부였다.

몇년 전 일본문학 전공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하며 ‘위안부’ 전문가를 자처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내면서 역사가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책과 유튜브를 통해 “위안부 원류는 조선시대 기생이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 등의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고 있는 이들은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징용, 독도 영유권 등에서 일본 우익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학계의 연구가 축적되고, 결과를 대중이 공유했더라면 뉴라이트의 일그러진 역사관은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달 2일 유엔 인권이사회 정기회의에서 발언하는 이우연 위원. 오른쪽 발표자 명단에는 후지키 슌이치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 웹사이트 캡처

어둡고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을 함께 기록하고 기억할 때 바른 역사가 된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항일투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일제가 어떻게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고 군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뿐 아니라 을사늑약·강제합병 같은 망국 역사에 대한 연구도 미진하다. 망국의 책임이 을사오적이나 이완용 등 몇 사람에게만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부는 매년 11월17일을 ‘순국선열의날’로 기리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의한 순국지사들을 생각하자는 뜻이지만, 기념일 명칭만으로는 망국의 단초를 연 사건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다. 어두운 역사를 회피하려는 무의식은 ‘국치일’에 대한 무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국권 침탈일을 기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은 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8월29일과 11월17일을 각각 국치기념일과 순국선열의날로 지정했다. 임시정부가 망국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순국선열의날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1997년 법정기념일로 승격됐다. 그러나 국치일 행사는 임시정부에서 끝났다. 해방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8월29일은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학자 크로체가 했다는 이 말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는 뜻도 있지만, 당대의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겼다. 조선시대 사관들이 썼던 <승정원일기>나 <왕조실록>은 당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백암 박은식이 망국의 전말을 기록한 <한국통사>와 독립투쟁을 담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황현의<매천야록>은 모두 직접 보고 듣고 취재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처럼 당대를 기록하는 전통은 해방 이후 사라졌다.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사>(37권)는 개항에서 끝난다. 이후 역사는 최소 50년 전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묵계가 생겨났다. 당대의 역사가 한국사에서 배제됐고, 현대사 교육은 금기시됐다.

역사가가 더 이상 오래된 과거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당대를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역사 쓰기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역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기억이나 집단적 전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른 역사는 역사가가 제대로 기록할 때 완성된다. 일본의 수출규제, 미·중 무역마찰 등으로 한국을 둘러싼 경제, 외교안보, 군사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시대를 응시하고 기록하는 것은 역사가의 책무다. 현실을 외면한 채 상아탑에 갇혀 있으면 <반일 종족주의>와 같은 사이비 역사가 득세한다. 역사가가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황혼 녘에 나선다면 때는 너무 늦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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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소설 <이방인>에는 버스를 타고 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버스를 놓칠까봐 허겁지겁 뛰어갔다. 숨차게 올라탄 뒤끝에다 버스 배기통에서 나는 기름 냄새, 격한 진동, 도로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 그 모든 것들에 혼미해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버스를 타는 내내 졸았다. 깨고 보니 내가 한 군인의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군인은 겸연쩍게 웃으며 어디서 오는 길이냐 물었다. 대답하기 쑥스러워, 가볍게 얼버무렸다.”

지난여름 동안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작곡가이자 가수 김현성 형이랑 음반 녹음작업을 했다. 음반 제목은 ‘심야버스’. 내가 지은 시들에다가 형이 곡을 붙이고 노래를 하는 음반. 우린 20년도 넘은 오랜 인연이다. 우정의 결실 하나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가을에 출시하고 공연도 같이할 예정이다.

이 일로 여러 번 심야버스를 탔다. 서울과 산촌을 오가면서 나도 소설 속 이방인처럼 까무러쳐 졸고는 했다. 심야버스는 늦게까지 수고한 분들이 주 고객이다.

퀘이커 신자들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가면 워너메이커의 동상이 있다. 체신부 장관까지 지낸 워너메이커는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 그는 우리나라 종로 YMCA를 지어주기도 했다. 입만 열면 4가지를 강조했는데, ‘집중해서 생각하라. 서둘러 실행에 옮겨라. 배나 노력하라. 사람이 아닌 신을 섬겨라.’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백화점을 열고 버스도 구입했다. 사람들은 승용차 대신 백화점 버스에 다투어 탔다. 이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오히려 부유층이었다지.

오늘날 버스, 특히 심야버스는 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가진 게 없고 배운 거 적어도 서로를 믿고 정직하게 사는 이들. 비슷한 거주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향한다. 몰래 한몫 잡아 꿍친 돈도 없다. 자녀들은 집 가까운 동네 학교에 그냥 다닌다. 이웃집 애가 늦으면 같이 발을 동동 구른다. 버스 객석에서, 고단한 머리들 어깨에 나누며 숨소리와 땀내음을 같이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걸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심야버스에 졸던 학생들이 끝으로 내리면 달님도 눈을 감고 잠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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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안 어른이 문제가 생겨 급하게 모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게 됐다. 증상이 심각해 응급병동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됐는데, 이 병동 규칙이 ‘보호자 1명 24시간 상주’였다. 어른의 반려자도 몸이 불편해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행인 것은 노부부에겐 3명의 아들딸이 있었다. 한 명이 반려자를 24시간 돌보고, 나머지 자녀 부부가 번갈아가며 병 수발을 들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앞으로 한국의 노인들은 아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병에 따른 고통에 자식 없는 설움까지 더해질 듯싶었다.

합계출산율 0.98명. 통계청이 28일 내놓은 2018년 출생통계 확정치다. 15~49세 여성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출생아 수가 한 명도 안되는 것이다. 올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1명까지 떨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2022년 출생아 수는 20만명대로 주저앉고, 2029년 경제성장률은 0%대에 진입하며, 생산가능인구는 2047년에 현재(3680만명)보다 1000만명이 감소한다고 한다.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다. 늘어나는 노인의 부양부담은 확 줄어들 청년세대가 짊어질 것이 뻔하다.

정부는 최근 10여년간 저출산 극복 대책에 150여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저출산 해소와 직접 연관성이 없는 곳에 쓰였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앞다퉈 수백만~수천만원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했지만 인구 유지에 필요한 출산율(2.1명)을 기록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안이한 대응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빠른 기술의 진보로 미래사회에는 그렇게 많은 인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고 아파서 찾은 병원에서 자녀 대신 ‘로봇 간병인’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을까. 국민의 85%는 출산 대책으로 ‘출산과 양육 지원’을 주문하고 있다.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육아·직장·노동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결혼하고 싶은, 아이 낳아도 힘들지 않게 키울 수 있는 사회’가 저출산 극복의 길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출산·육아는 물론 교육·고용·주거·복지, 양성평등을 아우르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출산율 0점대의 미래는 우리 모두의 미래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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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가소성이다. 가소성이란 신경계의 모양과 활동 특성이 경험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성질을 말한다. 신경세포는 모양도 변하고,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과 연결 세기도 변한다. 신경세포가 분비하는 물질의 종류도 변하고, 신경세포에서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도 변하며, 신경세포의 활동성도 달라진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신경세포가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유전자 발현 양상도 변한다. 신경계에서는 도대체 변하지 않는 게 있기는 할까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변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더욱이 이런 변화가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신경세포들이 인접하여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인 시냅스의 모양은 초 단위로도 변할 수 있다. 시냅스의 모양이 변하면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세기가 변하므로, 신경계의 반응 양상도 달라진다. 시냅스의 세기 변화는 학습과 기억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다. 신경계는 성인이 된 후에는 변하지 않는 태엽 기계라기보다는 구석구석 변해가는 시스템이다.

■ 변수의 개수와 최적화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신경계가 적응할 수 있는 폭이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신경계를 최적화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떤 방에 히터만 있다면, 이 방에서는 실내 온도만 조절할 수 있고, 조절 방법도 단순할 것이다. 반면 방에 창문과 커튼, 에어컨, 선풍기, 양초, 히터, 공기청정기,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가 여러 개 있다면, 산소 농도와 온도, 습도, 바람의 세기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장치의 효과가 상호작용하므로 조절 방법도 복잡다양할 것이다. 예컨대 가습기, 제습기, 분무기, 양초, 에어컨, 창문이 모두 습도를 바꾸고, 양초와 에어컨, 창문은 실내 온도에도 영향을 주므로 목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려면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처럼 조절하는 방법이 다양하면 최적화가 어렵다. 어찌어찌 목표 습도를 맞췄다고 하더라도 가습기와 제습기를 동시에 틀어두는 것처럼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낮에는 선풍기를 틀어야 목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저녁에는 추워질 수도 있다. 신경계에서 최적화의 실패는 각종 질병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이 사건과 조금만 관련된 자극을 접해도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병을 말한다. 이 병도 신경 가소성과 관련이 깊다. 모든 기억은 신경계의 변화를 동반하는데, 충격적인 사건이 지나치게 강하게 기억되고, 비슷하지만 다른 기억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신경계가 변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고, 잊어버려도 큰 문제가 없는 일들은 잊어버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질병에 걸리지도 않으면서 살아간다. 뇌 속에 수백 가지의 신경세포가 있고, 이 신경세포들이 각각 모양, 유전자 발현, 연결 세기 등을 바꿀 수 있음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 제약 조건

신경계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모든 방향으로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감각회로는 제한된 에너지와 노이즈라는 제약하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도록 동작한다는 이론이 제기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또 신경계는 항상성을 지켜야 한다. 개에게 A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고, B 종소리를 들려준 뒤에는 먹이를 주지 않으면 개는 A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꼬리를 흔들고, B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시큰둥해하면서 두 종소리에 다르게 반응한다. 신경세포도 비슷한 일을 한다. 어느 신경세포 X가 두 개의 신경세포 A와 B로부터 정보를 받는데, 신경세포 A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더 중요하다면 신경세포 A와의 연결이 B와의 연결보다 강해야 한다. 이제 신경세포 A와 X 사이의 연결 세기와 신경세포 B와 X 사이의 연결 세기가 둘 다 3으로 같았지만, 낮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신경세포 A와의 연결 세기가 5로 증가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러면 신경세포 A로부터의 입력이 더 중요해지기는 하지만 연결 세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총 비용이 증가한다. 그래서 A-X 사이의 연결 세기를 4로, B-X 사이의 연결 세기를 2로 줄여서 총 유지 비용은 크게 늘리지 않되, 연결 세기들 간의 차이는 유지하는 과정이 밤에 자는 동안에 일어난다. 이것이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들은 더 잘 기억되고, 어떤 일들은 더 잊혀지는 이유라고 한다.

또한 변하는 환경에 날쌔게 적응하면서 생존에 유용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경세포의 활동량은 강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낮추고, 약한 입력이 계속되면 반응성을 높여 주변 환경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한다. 밝은 곳에 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담쟁이 덩굴이 자라는 돌담처럼

돌담은 담쟁이 덩굴이 벽 안쪽으로 자랄 수 없게 제약한다. 하지만 돌담 덕분에 담쟁이 덩굴이 위로 뻗어갈 수 있다. 지구 환경이 주는 제약 조건도, 생명체라는 제약도 다채로운 가소성을 가진 신경계에는 돌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공지능 컴퓨터에는 아직 생명체가 경험하는 제약에 비견될 만한 제약이 없다. 전기료와 데이터(감각정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를 사람이 제공하니까. 어쩌면 인공지능의 새로운 지평은 로봇 신체라는 제약이 생긴 이후부터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딥러닝 덕분에 ‘인간만의’ 정신 능력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듯, 그 무렵이면 신체에 대한 우리 생각도 바뀌게 될까.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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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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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진 8월이었다.

광복절 전후로는 <김복동>과 <주전장>을 봤다. <김복동>도 시의적절한 영화였지만, 둘 중 하나만 봐야 한다면 <주전장>을 추천하고 싶다. 

<주전장>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우세력의 주장을 비친 뒤 곧장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수족이 구속되거나 철창 안에 갇혀있지 않았는데 무슨 강제동원된 ‘성노예’냐고 비웃는 극우 인사의 발언 뒤로, 여성들의 자유의지가 침해된 여러 정황들과 ‘노예’라는 언어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법학자의 발언이 뒤따르는 식이다.

방대한 정보와 치고받는 대화(처럼 편집된 각자의 인터뷰)의 끝에 다다른 영화의 결론은, 세계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일본의 우익 세력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방안이며,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굳이 과장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하면 오히려 해가 된다. 위안부가 20만명에 달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큰 숫자일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해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용한 세력이 있었고, 이는 상대에게 숫자가 허위이므로 위안부 강제동원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빌미를 줬다. 상호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 '주전장' 포스터. 사진제공 시네마달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것도, 직접 영어 내레이션으로 작품을 진행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안’을 몸소 실천하기 위함일지 모른다. <주전장>을 거세게 공격하는 ‘일본회의’는 전략의 효과를 방증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최근 일주일은 EBS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 상영작들에 빠져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자면, 평소 관심사와 닿아있는 <푸시-누가 집값을 올리는가>이다(이번주 토요일까지 ‘디박스(eidf.co.kr/dbox)’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유엔 특별조사위원 레일라니 파르하와 함께 세계를 누비는 카메라는 ‘조물주 위 건물주’가 한국만의 현실은 아님을 드러낸다. 토론토의 미친 집값과 노팅힐의 젠트리피케이션. 동네를 돌아야 할 돈을 해외로 빼내고, ‘우연한 만남’이라는 도시의 즐거움을 빼앗으며 획일적 공간을 양산하는 투기 세력들. 심지어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마저도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국제사모펀드에 잠식됐다. 

이 지점에서 갑자기 한국이 툭 튀어나온다. 악명 높은 사모펀드의 자금 출처 중 하나가 한국의 국민연금이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은퇴 후 복지를 위해 돈을 불린다는 명목으로 연기금을 투자하지만, 그 투자처는 국민들이 은퇴 뒤 살아갈 터전을 박살낸다는 아이러니. 심지어 한국에는 ‘강제퇴거’라는 박살 방식까지 자행된다. 용역들이 누워있던 아내의 배를 찼다는 남편의 증언은 공분하게 만든다. 레일라니는 유엔을 대표해 강제퇴거는 중대한 인권 범죄이므로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래도 영화는 한 줄기 희망을 비춘다. 지방정부 간의 연대와 여성 연대다. 세계 도시의 시장과 부시장들은 모여 노하우를 공유하고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사무보조로 고용된 줄리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여성들, 특히 워킹맘들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레이라니는 웃으며 줄리를 사진에 담는다. 여러모로 하고자 하는 말이 많은 다큐멘터리다. 딱 내 취향이야.

문득 생각했다. 올해 유독 다큐멘터리 풍년인가? 그럴 리 없다. 좋은 다큐멘터리들은 언제나 있었고 변한 건 나다. ‘다큐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깬 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더욱 진실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감동,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감독과의 내적 토론의 즐거움을. 요즘 다큐멘터리는 미적 성취도 대단하여 시각적 쾌감까지 얻을 수 있다.

관심만 기울인다면 다양성 영화를 접할 기회는 많다. 그것도 무료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시민단체나 지역공동체가 기획하는 상영회는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함께 준비하기도 한다. 나는 같이 보고 함께 얘기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홀로 삭이던 문제도 함께 고민함으로써 해결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볼 게 없다”는 말이 맴돈다면 이런 기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더 풍요롭고 튼튼한 문화 생태계를 지닌 한국을 기대한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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