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주류는 보수이고 그 중심에 법조가 있다. 이 법조에서 대통령을 두 번 냈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그룹이 법조다. 경기고는커녕 그 흔한 서울대 출신도 아닌 고졸의 노무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은 상고 출신이 떡하니 연수원 교실 가운데 앉아서 말이야….” 수십년 전 기억까지 끌어다 미워했다. 합격자가 겨우 60명이던 시절 사법시험에 붙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시험 합격은 법조에서 시민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검찰에 불려 다니다가 목숨을 끊자, 얼음장 같은 말로 조소하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험과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곳이 법조다. 경기고를 졸업해도 서울대에 붙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같은 서울대라도 법학과를 졸업해야 한다. 이런 잣대의 최정점에 사법연수원 졸업 성적이 있다.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닌 예비 법조인을 상대로 고도의 논리력과 분석력을 강도 높게 검증한다. 머리 좋은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나오는 연수원 순위이기에 서로들 인정한다. 목포상고 출신에 성균관대 야간대학을 졸업한 연수원 5기 수석이 김오수 변호사다. 연수원 수석인 그를 상고 출신이라거나, 야간대학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런 수석들 가운데서도 우수하다는 사람이 12기 김용덕 전 대법관이다. 자신의 능력을 지난 35년 법관 생활로 입증했다. 

김 전 대법관이 수석이던 해 차석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1980년 4월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2차 시험을 치렀고 유치장에서 합격했다. 연수원 순위에 합산되는 사법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연수원 시험만으로는 문재인이 수석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용덕보다 우수한 사람이 문재인 아니냐고 하면, 법조인 누구도 대꾸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도 문재인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한 데는 이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 대통령이 법원개혁의 적임자로 택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김명수 춘천법원장이다. 김 대법원장을 임명한 것 자체가 개혁이고 성적과 같은 낡은 틀을 부순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개혁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최근 사법행정자문회의라는 기구를 대법원이 만들었다. 민변에서는 “개혁안이라 부르기 어려우니 철회하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핵심인 법원행정처 개혁안을 만들라고 지난해 10월 지시했다. 이에 법원 내부독재를 막으려면 외부인사가 과반인 기구가 법원행정처를 대체해야 한다고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건의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처를 사실상 부활하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이 부활안은 추진단이 생기기 전인 같은 해 8월에 법원행정처가 만든 비밀문건임이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비밀문건대로 추진했고, 이것이 민변도 반대하는 사법행정자문회의다. 

왜 이런 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법조장악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질까. 흔히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이 쉽게 구분되지 않고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 법조이기 때문이다. 당장 사법농단 사건을 주도한 판사들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소속이고, 법원행정처 권력화는 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작품이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용훈 대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은 다르지 않다. 이들끼리 누구는 진보이고 누구는 보수라고 말해 정권의 신임을 돌아가며 얻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문 대통령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법조라는 거대한 집단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법조에는 단단하고 치밀한 자기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요즘 법원의 권위 회복을 호소하는 판사들이 양승태 대법원을 무너뜨린 사람들이다. 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대통령이라도 쉽게 장악하지 못하는 곳이다. 지난해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사법독재를 극복한 유럽처럼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 감시에 관여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 대다수의 뜻을 내세워 거부했다. 실제로 법관 다수가 시민의 통제를 거부한다. 이 무렵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추진할 법무장관에 조국 서울대 교수를 지명했다. 지금은 금수저의 상징이 되어 있지만 진짜 금수저가 수두룩한 법조에서는 사법시험 출신도 아니지 않으냐는 말부터 나왔다. 

조국 후보자가 금수저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위기에 몰리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다. 청문회가 무산되자 다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그로기로 몰고 있다. 이제 조국 후보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검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검찰이 정치를 주도하고 흔들지 못하게 만들자는 것이 조국 후보자의 신념이었다. 노무현에 이어 문재인마저 법원개혁과 검찰개혁에 실패한다면 당분간 희망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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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우리나라 최초로 ‘성희롱’에 대한 법적 판단이 이뤄졌던 일명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의 1심과 2심의 판결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견된다. ‘기기교육 과정의 성희롱 여부’ 사실판단에서 1심은 피고 신 교수가 기기교육 시 원고 우 조교의 몸에 의도적이고 불필요한 접촉 행위를 지속해 왔다고 보았다. 반면 2심에선 같은 행위에 대해 신 교수가 우 조교의 몸에 접촉한 것은 기기조작 방법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고 원고 패소를 선고했다.

이처럼 적법과 불법의 경계는 법관의 개인적인 상황 감수성의 차이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같은 행위에 대한 법적 사실관계 구성에서 소위 ‘법 감정’과 개개인의 경험 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껏 사법기관에 대한 ‘대중 정서’는 이러한 법관 혹은 검사의 정황 감수성에 깊은 불신을 표한 때가 많았다. 여성의 입장에선 여성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법관이 내리는 판결에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소위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을 비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법이 기득체제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특히 ‘법무부 장관’이라는 자리는 이러한 ‘법’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개혁을 향한 기대 모두를 상징한다. 따라서 법무부 장관에게 기대되는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이러한 ‘일반의 법 감정’에 준하는 정황 감수성이며, 이는 서민이라 불리는 대다수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치와 수준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국민 정서’와 배치되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해온 것은 당연하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국 후보자 자녀의 소위 기득권 교육 사다리 문제는 심각하게 좁은 취업의 문,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각종 사회적 이권의 문제와 맞물려 불평등의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 불평등 감수성의 실체는 단지 언론에 선동된, 그저 조국 후보자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한 선택적·단죄성 도덕 감정만으로 매도될 수 없다.  

일부 인사들은 이러한 대중적 의구심 자체를 반대쪽 언론의 선동에 미혹된 것으로 보고, 이를 사법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기까지 한다. 물론 조국 후보자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사적 관심과 비난의 정서는 과도하고 선동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그와 그가 속한 집단의 삶의 궤적이 국민 정서에 괴리되는데도 왜 적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규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사태는 정치 공학과 전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 또 조국 후보자 개인과 그 가족들만의 문제로 협소화될 수 없다. 

같은 기자간담회를 두고도 평행선을 달리는 평가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양 진영 간 깊은 불신의 이념에 갇혀 ‘조국’이라는 상징을 해석하는 데 몰입하고 서로를 비방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끝난다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가 별것 아닌 ‘적법한 것’이라 보는 입장과 하루하루 피 말리는 취업·입시 전선에 서서 개인의 노력 외에 어떤 사다리도 꿈꿀 수 없는 이들이 느끼는 ‘적법’의 지점은 다르다. 그리고 이 지점에 정치·사법 개혁을 향한 염원이 있다. 조국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결국 모두 ‘적법한 것’이라 해도, 이번 일로 터져 나온 젊은이들의 공분을 ‘우매·선동’이라는 말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 해도.

<이지영 | 연세대 법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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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린 곳은 이층집과 다세대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동네였다. 좁은 골목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고, 길모퉁이에는 큰 슈퍼마켓이 있었다. 토요일 한낮이니 어디로 놀러 가지도 못한 아이들이 따분한 얼굴로 슈퍼마켓이라도 들락거릴 만한데, 웬일로 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길옆에 붙어 있는 벽돌집 계단에는 깨진 스티로폼에 심어놓은 나무가 고드러져 꺾여 있고, 그 집과 마주하고 있는 집 현관 유리문은 깨진 채 활짝 열려 있었다. 재개발로 곧 사라질 동네였다. 동네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고, 남은 이들도 머지않아 떠나야만 하는 곳. 과거에는 학원과 음식점이 있어 부산했을 상가 건물은 깨지고 비틀어지고 더럽혀진 채 버려진 무엇 같았다. 

버려진 것들은 대개 쓸쓸하면서도 흉물스럽다. 2층 비어 있는 태권도 학원 유리문에 둘둘 감겨 있는 쇠사슬과 자물쇠마저 섬뜩한 그 건물 4층에 그림을 그리는 그가 있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오래된 건물처럼 묵직한 그림들이 등을 붙이고 빼곡하게 서 있었다. 곧 전시회를 연다는 작가는 물감이 튀어 있는 방에서 작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여름을 난 모양이었다. 전라도에서 구한 흙을 20t이나 갈아 썼다는 그의 그림은 그가 형상화한 세상이었다. 그 특별한 세상 앞에서 내년 봄에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주중에 서너 곳을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쳐 얻은 수입이 적어 대출받기가 수월했다는 흔한 얘기를 들었다. 없이 살아도 욕심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색깔을 갖고 싶다는 그는 그래도 잘됐으면 좋겠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작가들이란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리라 하면서 세상이 봐줬으면 하는 욕망을 감춘다. 예술은 ‘순수’해야 하며, 욕망은 순수하지 않다는 믿음이 아직 존재하는 세상이라. 

그와 두런두런 얘기하는 동안 해가 기울어 조용한 동네를 나와 텅 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이내 재개발이 끝나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고층 아파트는 높아지고 싶고, 남들과 같아지고 싶은 도시의 욕망이다. 고층 아파트가 자꾸 들어서는 건 싫지만, 가난한 작가의 욕망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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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수입 소고기와 조기, 배 등이 국내산으로 둔갑하거나 수입신고를 거치지 않고 불법 판매되는 등 농축산물 불법 유통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단속기관에서는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지만 제수용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외국산을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술은 여전하다.

농산물품질관리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원산지표시 위반 적발 대부분이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집중됐다고 한다. 현행 ‘농수산물의 원산지표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원산지 허위 표시, 위장 또는 혼합 판매 행위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형사 처분을 받게 되고, 원산지를 미표시하면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돼 있다. 그러나 그동안 법 위반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은 예는 거의 없고 대부분 약간의 벌금을 내는 데 그쳐 국민의 건강과 건전한 농산물 유통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산지표시제는 수입품의 국산 둔갑 방지와 소비자의 알권리 신장에 기여하고, 갈수록 수입 농산물의 관세 문턱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농업과 소비자의 안전한 먹거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수입품을 국산으로 속여 판매하는 일은 명백한 범죄행위로 처벌을 대폭 강화하여 농업인과 소비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 처벌로 농산물 원산지 위반이 근절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밖에 안된다.

<이재학 |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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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송건호는 1979년,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李박사처럼 시비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지만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물도 드물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 즉 그가 미국을 협박하여 안보 자원을 얻어낸 건국의 아버지(애국자)라는 주장과 해방 후 새로운 점령자인 미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입장(사대주의자)은, 동일한 논리가 아닐까.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처럼, 그에게 미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겸사겸사 좋은 일이었다. 애국도 하고 국부로 등극했으니 말이다. 

1946년 10월, 당시 이승만을 취재한 시카고 선(紙) 특파원 마크 게인의 평가대로, 그는 파쇼가 아니라 파시즘보다 2세기 이전인 ‘(무능력하면서 왕족 행세나 하는) 부르봉파(派)’ 수준의 인물이었다. ‘미국 박사 이승만’은 근대의 상징이 아니라 봉건적인 인물이었다는 언급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74년이 과연 ‘진정한 광복(光復)’의 시간이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제나 우리의 8월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올해는 아베로부터 시작된 도발과 그 파장으로 인해 대내외적 대립이 유난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어온 논쟁,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 지배, 약탈했고 우리는 저항했다”와 “일본 덕분에 근대화가 도입, 실현되었다”는 이분법이 여전히 반복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근대는 식민지를 동반한 근대화였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 주장은 동일한 논리다. 제국주의가 수탈을 하려면 식민지에 철도와 항만을 만들어야 하고, 노동력도 착취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이 일본 우익의 논리대로 한반도를 문명화시킨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식민지 국가에는 부역자가 있기 마련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들도 내부의 계급과 성별, 인종에 따라 근대화의 경험은 천차만별이었다. 서구 역시 근대 국민 국가는 지향이었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국민들 간의 불평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성은 이등 국민이었고, 흑인은 노예였다. 국가 단위를 넘어서(트랜스 내셔널) 사유하지 않는다면, 흑백 논리는 지속될 것이다. 

역사는 깔끔하지 않다. 역사는 팩트라기보다는 해석, 여파(餘波)에 가깝다. 팩트도 누군가의 기록이며 인간의 인식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사(正史)나 정명(正名)을 시도하는 작업은 위험하다. 배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경합 과정에서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군 위안부는 없었다”거나 “증언은 무조건 진실이다”라는 주장은 모두 신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보와 보수 불문,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층은 스스로를 양 진영의 대표자 혹은 순교자, 저항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유일한 진실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 인식의 분단체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문화 지체 현상’을 겪었다. 이제는 좀 더 나은 논쟁을 할 의무가 있다. ‘친일파’ ‘빨갱이’처럼 편리한 정치적 도구(낙인)가 있는 한,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사회·문화적 검열이 국가보안법보다 무서운 세상이다. 예전의 다른 목소리는 ‘민주화 열사’였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증류수 같은 순수한 현실은 없다. 하물며 식민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진 근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체제에서 문화의 잡종성(hybridity), 모순은 당연하다. 식민주의는 한일합병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가 1945년 8월15일 중단된 그런 체제가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은 싫어하지만 ‘일본산(産)’은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반도체 부품만 일본의 것인가? 재일 조선인의 노동 없이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제 성장을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는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른바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상황 인식이 아닐까. 포스트 콜로니얼이 ‘~ 탈(脫·de), 탈식민주의’로 번역되면서 마치 식민주의가 끝난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식민주의든 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경험은 몸에 각인되기 마련이다. ‘포스트’는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반대, 대항, 변환, 넘어섬, 해체, 문제 제기, 극복 등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국민국가, 포스트 휴먼처럼 포스트는 ‘어떤 것 자체이면서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닌 것’에 가깝다. 공식적 주권 회복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주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피해의식이나 선진국 콤플렉스 대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과정이 진정한 탈식민 아닐까. 

‘이승만 학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독립운동과 건국의 업적을 연구, 교육, 홍보하는 곳이다”. 이승만에게 ‘정치경제사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지만, 나는 이런 학당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승만 학당은 그의 업적을 홍보하는 곳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찬반 논쟁, 식민지냐 근대화냐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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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이 세상을 바꿔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촛불혁명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더 많은,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그 길을 ‘자치분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치(自治)’의 주체는 시민이다. 시민 스스로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자치는 의지나 신념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시민이 결정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분권(分權)’이 함께 가야 한다. 분권은 중앙에 집중된 권한을 지방정부와 나누는 것을 말한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우리 국민은 대통령 직접선거권을 쟁취했다. 1995년엔 지방자치제가 부활돼 지방정부의 장을 주민투표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열화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공공 시스템의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다. 전국 226개 지방정부는 모두 제각각의 지리적, 경제적,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 지방정부들은 지역주민들이 처한 삶의 모습과 상황에 따라 맞춤형으로 사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지방정부들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하달한 사무를 처리하는 지방사무소 역할에 머물러 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재원도, 법적 기준 마련도, 이를 시행할 인적 자원의 규모와 조직 형태도 모두 중앙정부가 정해준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은 중앙정부가 내려준 지침대로 집행하는 것이 모범적인 공무수행 방식이라는 사고가 몸에 배어 있다.

권한이 있는 곳에 책임이 생긴다. 중앙부처가 독점하고 있는 권한을 지방정부들과 나누면 지방정부는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 더욱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은 지방정부의 성숙한 정책 파트너로 성장할 것이다. 자치분권이야말로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주권을 광장의 민주주의를 넘어 동네에서 작동하는 일상의 민주주의로 바꾸는 원동력인 것이다.

지난 3월26일,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되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30년 만에 대대적인 손질을 한 이 법안이 국회에 발이 묶여 있다. 국가사무의 일부를 지방정부에 포괄적으로 이양하는 내용을 담은 ‘지방이양일괄법’ 역시 같은 처지다. 얼마 남지 않았다. 국회는 자치분권의 일보진전을 위해 지금이라도 힘을 보태야 한다. 국민의 뜻에 부응하는 20대 국회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란다.

<염태영 | 수원시장(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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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40대의 사회학에 대해 발표했다. 40대를 어떻게 부를까를 놓고 내가 선택한 이름은 ‘낀낀세대’다. ‘낀낀’에는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인, 앞과 뒤가 다 막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낀낀세대는 20대였을 때 ‘X세대’라 불렸다. X세대는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의 소설 <X세대>에서 유래했다. ‘X’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앞선 냉전세대나 히피세대와는 다른,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탈권위적 의식을 갖고 있었고, 소비문화에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세대를 ‘자유의 아이들’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X세대의 다른 이름은 ‘신세대’였다. 지금 마흔을 넘긴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뜨거웠던 신세대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논쟁의 불을 댕긴 것은 1993년 미메시스가 발표한 책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였다. 그 부제는 ‘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위선적 성격을 거부하고 신세대의 감성 및 문화를 적극 옹호했다.

사회학자 박재흥은 신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개인주의·탈권위주의·감성주의·소비주의를 제시한 바 있다. 이 경향 가운데 내 시선을 끈 것은 신세대가 드러낸 개인주의 성향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신세대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했고,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충실하려 했던 첫 번째 세대였다. 86세대의 이념주의적 구속성에서 벗어나 신세대는 개인의 감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부터 결코 작지 않은 세례를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점에 착안해 나는 신세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신세대의 개인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된 97년체제는 개인주의와 연관성이 높은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경제원리로 삼았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경쟁력을 특권화시키는 ‘시장적 개인주의’였다. 이 시장적 개인주의는 신세대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압박을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감성적 개인주의’와 결합해 신세대의 복합적 내면을 구성하게 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1990년대로부터 시간이 흘러 2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 낀낀세대가 된 이들의 내면풍경이다. 젊은 시절 품게 된 감성·사유·세계관은 나이가 들면서 변하지만, 동시에 쉽게 퇴색하지 않는 도장의 붉은 인주처럼 선명히 각인돼 있기도 하다. 오늘날 낀낀세대의 내면세계는 민주화의 가치에 공감하면서도 그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은 거부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도하고 비인간적인 강제를 비판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젊은 시절 내면화한 개인주의가 여전히 저류(底流)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일각에선 낀낀세대가 86세대의 장기적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주도적 세대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낀낀세대가 선배세대인 86세대와의 경쟁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97년체제의 등장으로 인한 경제적 좌절의 상처와 86세대의 장기적 헤게모니에 따른 사회적 적응의 상처를 주목할 때 낀낀세대는 ‘상처받은 개인주의 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평균수명의 증가가 가져온 사회활동 연령의 연장을 고려할 때 낀낀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는 이제부터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을 이기는 세대는 없다. 오히려 낀낀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리더십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얼세대와 통한다. 끼여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 40대에게 부여된 과제 중 하나가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이러한 교량적·포용적·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세대 문제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같은 세대라도 그 안에는 이념 또는 계급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고, 이 변수들은 세대를 넘어 더 큰 영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대문화, 세대갈등, 세대정치에서 볼 수 있듯 세대는 분명 사회변화를 이끄는 동인의 하나다. 후자의 관점에서 40대를 지켜봐온 내 생각을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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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수습기자들이 듣는 말이 있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가 된다.” 새롭고 기이한 기사를 착안하라고 할 때 나오는 예시다. 그런 나라에서 ‘개물림’ 뉴스가 줄잇고 있다. 개가 사람을 무는 데 새롭고 놀라고 논쟁할 게 많아진 셈이다. 맹견 핏불테리어는 나흘 전 새벽 거실까지 뛰어들어왔고, 보름 전 자동차 튜닝숍에서 화장실 가는 사람을 덮친 50㎏ 대형견(알래스칸 맬러뮤트)은 입마개를 해야 하는 맹견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나와 남성의 급소를 문 대형견(올드 잉글리시 시프도그)도, 맹견 사이에서 태어나 세 모녀를 덮친 개량견(아메리칸 불리)도, 안락사 문제를 일으킨 작은 폭스테리어도 뉴스를 타고 있다. 500만마리가 넘어선 반려견에게 물려 지난해 119구급대를 부른 사람은 하루 6.5명. 결코 작지 않은 숫자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에서 개물림이 시끄러워지는 이유는 여럿이다. 견종과 덩치 구분 없이 일어나고, 물리는 사람의 증가율이 반려견 증가율을 앞서고, 개물림을 보는 간극이 큰 까닭이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She is kind”. 공원이나 둘레길에서 한국인·외국인 견주가 ‘순하다’고 하는 말이다. 사고는 그러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돌발했다. 지난해 목줄 없이 개와 산책하다 과태료를 문 것은 서울에서 16건뿐. 개물림 사고에 안전장치와 법은 헐겁고, 사회적 공론은 못 따라가고 있다.

개물림 대책은 가히 올해가 원년이다. 지난 3월 시행된 개정 동물보호법은 맹견(5종) 외출 시 14세 이상 보호자와 목줄·입마개를 의무화했다. 사망사고 시 징역은 3년, 벌금은 3000만원까지 늘렸다. 7월엔 개 목줄도 2m로 줄이기로 했다. 그새 안락사와 ‘개파라치’ 얘기가 달궈지다 유보됐다. 정부는 개물림 문제에 대해 연내 ‘종합계획’ 발표를 예고했다. 조그만 개도 공격성을 따져 입마개를 하는 문제가 도마에 올라 있다. 돌발사고가 꼬리 물자 나온 처방이다. 그럼에도 법은 최소한이고, 펫티켓 교육은 출발선일 뿐이다. 사고 나면 가장 속상하고 놀랄 사람은 소유주다. 안전 문제는 공존의 룰이 긴요해졌고, 피해자 관점이 우선돼야 한다. “개는 개다.” 보고픈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 미국 동물행동학자 마크 베코프의 말에 답이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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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순방길의 문재인 대통령이 ‘당·정·청 고위 관계자’들에게 화두를 던지듯 “대입제도 전반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또 한번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조국 사태’에 쏟아진 그 많은 감정과 말들 중에 공통적이며 공공적인 고갱이가 있다면 바로 ‘교육개혁’일 텐데, 과연 대통령과 ‘당·정·청 관계자’들은 사태와 해법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결론부터 말하면 수시든, 수능이든 대입제도 개편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입제도는 구조적인 교육 ‘불공정’과 경제적 불평등의 한 가지 고리일 뿐이다. 

대통령과 ‘당·정·청 관계자’들(화두를 받은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교육개혁을 책임질 수 있는 분들인가?)은 정권 출범 때 천명한 ‘100대 국정 과제’를 당장 다시 꺼내보시길 바란다. 49번 “유아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공공성 강화”, 50번 “교실혁명을 통한 공교육 혁신”, 51번 “교육의 희망 사다리 복원”, 52번 “고등교육의 질 제고 및 평생·직업교육 혁신”, 그리고 76번 “교육 민주주의 회복 및 교육자치 강화”다. 다 좋은 명제다. 이런 과제들은 서로 얽혀있고 부동산과 지역 불균등 문제까지 연관되어 있다. 저 과제 하나하나가 꾸준히 제대로 실천될 때만 절망적 ‘불공정’과 그에 따른 분노와 환멸은 치유될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저 중에서 ‘당·정·청’은 무엇을 했나? 그리고 왜 못했나? 

문재인 정부의 전·현직 교육 부총리는 교육 주체들에게 정말 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 했다. 또는 못했다. 지난 5월2일 유은혜 부총리가 4개 교수 단체들을 한자리에서 처음(그리고 마지막) 만나주었을 때, 참석자들은 유 부총리와 교육부를 심하게 질타했다. 기실 큰 기대가 분노로 바뀌어가던 사람들의 호소였다. 격한 말을 많이 들은 유 부총리는 얼굴까지 붉어졌다. 부총리는 고충을 토로하다가 교육부보다 더 힘센 기재부를 탓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재부는 공영형 사립대 설치를 위한 예산을 800억원에서 0원으로 만들어버렸다. 강사법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예산도 쥐꼬리만큼 배정했다. 교육 불평등이나 고등교육 개혁에 대한 경제관료들의 무지 때문인지, 적폐세력의 농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재부만은 아니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교육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정부 청와대에는 교육 문제를 담당하는 수석비서관이 없다!), 교육부 내부의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적폐, 그리고 정치인 출신 부총리 스스로의 한계가 겹쳤을 것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의 ‘겐세이’는 상수다. 

교육 관련 국정과제와 대통령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 되는지, 교육 주체들은 나름 많이 연구하고 계속 이야기해 왔다. 대입 정시 비율을 서서히 높이고 수시 전형을 더 공정하게 하는 것이나 자사고·특목고 등으로 위계화된 고교 제도를 개편하는 것뿐 아니라, 대학 개혁이 더 크다. ‘SKY’로 상징되는 학벌체제를 해체하는 것,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고 서울대를 진짜 연구중심대학으로 개편하는 것, 국공립대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국공립대를 육성하는 것, 공영형 사립대 제도를 도입하고, 사학비리를 모조리 캐내 엄단하고 사학법을 개정하는 것 등등이다. 

교육개혁의 방향을 정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어떤 힘으로 어떻게 합의를 도출하고 어떤 수순으로 해나갈 것인가도 난제다. 따라서 ‘당·정·청’의 대오각성뿐 아니라 교육부 자체의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창출할 리더십과 논의 구조가 절대 필요하다. 아니라면 ‘수능 대 수시’ 같은 비본질적이고 전제 자체가 잘못된 논란 속에서 시간과 힘을 쓰게 된다.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조국 대란’이란 진통을 겪으며 다시 기회가 왔다. ‘당·정·청’은 과연 교육개혁을 시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까? 나는 아직도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시민들의 여론은 여전히 갈라져 있지만, 논란에서 정략적 이득을 보려는 한국당과 일부 세력을 제하면 시민들의 큰 뜻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촛불을 통해 겨우 물꼬를 튼 사회·경제 개혁을 통해 이 나라를 진짜 평등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문재인 정부는 환멸과 선동정치의 아수라장 속에 시민들을 방치하지 말고 사즉생의 각오로 개혁을 위한 공감을 다시 아래로부터 모아야 한다. 법만능주의와 ‘강남좌파’의 한계를 넘어 사회개혁을 성공시켜야 한다. 

국가교육위원회를 제대로 구성하고, 필요하면 교육부총리를 교체하거나 교육수석 자리도 새로 만들어 교육개혁의 컨트롤타워를 세워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효과가 클 것 같다. 위기는 기회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지 모른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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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들 덕분에 꼭 해야 하는 일과 중에 아침 산책이 있다. 녀석들이 자연의 리듬에 맞게 여름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겨울에는 조금 봐줘서 일곱 시면 어김없이 내 방 앞에 와서 나가자고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조금 ‘관종’ 기질이 있어서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다른 개 보호자들에게 꼭 먼저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머 너무 예쁘다!” 등등. 그때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녀석들의 발걸음이 통통 튄다. 반면에 어쩌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오는 날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관심과 칭찬이야말로 마음 에너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물며 강아지가 저런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랴 싶기도 하다. 

우리에게 관심과 칭찬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뼈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신뢰하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인간관계, 일, 사랑의 기본은 바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과 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낀다. 장자에 보면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생겨났다”는 말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늘은 있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땅은 있다고 하지만 내가 태어나서 그 하늘을 보고 그 땅을 디디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맹자 또한 한 말씀 했다. “만물이 내 안에 깃들어 있다”고. 따라서 내가 ‘좋은 삶,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와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약간이라도 사랑이 있을 때는 최소한 여유가 생겨난다. 덕분에 대체로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면 나를 화나게 한 상대보다는 내 마음이 먼저 탄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할수록 그 사람 생각이 내 마음을 점령해서 그야말로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자리 잡는 곳도 결국은 내 마음속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결국 마음속에서 그를 지우지 못하고 있어 봤자 나만 손해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나는 죽는 날까지 떠나보낼 수 없는 존재이다. 나 자신을 내가 미워하고 학대해 봤자 나만 손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학과 상담에서 자기를 알아가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만점이어서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내 부모나 내 자식이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니 나에 대한 사랑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내 마음의 에너지 보전 법칙에도 더 들어맞는다. 솔로몬은 ‘인생에서 필요한 피난처는 돈과 지혜’라고 했다. 많은 심리학자들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무력감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지갑이 두둑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마음의 에너지 통장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스트레스 중 하나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구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즉 자기 불신이 스트레스의 한 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 에너지 통장에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이 가득 차 있으면 세상에 무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곳간에 나에 대한 이해, 수용, 칭찬, 격려, 믿음이라는 곡식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외부의 비바람이 불 때 내가 흔들리지 않고, 설령 흔들린다고 해도 바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다. 그 원천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미워하기보다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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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열차 선로에서 작업하던 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 인근에서 열차에 치여 숨진 정모씨(44)는 18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통신기술자였다. 그는 동료 8명과 함께 열차가 운행하는 낮시간에 광케이블 유지·보수 공사를 하다 전동차에 치였다. 정확한 사고원인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열차감시 의무 소홀, 기관사의 전방주시 태만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코레일 측은 이 둘은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숨진 노동자가 코레일의 하청을 받은 외주업체의 직원이라는 점이다. 

선로 사망 사고는 2013년 성수역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가 희생된 이래 강남역(2015년), 구의역·KTX김천역(2016년), 노량진역·온수역(2017년) 등에서 계속됐다. 끊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이다. 사고 희생자는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외주업체의 노동자들이다. 산재사망자의 90%가 하청노동자라는 통계와 맥을 같이한다. 이번 사고도 예외는 아니다. 선로 작업은 업무 전달체계를 제대로 갖추는 게 중요하다. 광케이블 공사에 앞서 열차 감시원, 관제센터, 기관사 간에 작업·운전 정보를 제대로 공유했더라면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광케이블 작업자들이 외주노동자들이어서 원청인 코레일과 제대로 정보를 공유하지 못했다면 문제가 크다. 

3일 고용노동부 조사관들과 코레일 직원들이 전날 사망하고가 발생한 서울 금천구청역 인근 선로에서 사건조사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2018년 12월 태안화력 비정규직 김용균씨 사망 사건은 외주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고 김용균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발전소 하청 노동자는 사고 및 위험 노출도가 원청 노동자에 비해 9배나 높았다. 반면 연봉은 정규직의 53%에 그쳤다. 다른 외주업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용균씨 사망 이후 유해·위험작업의 사내도급을 금지하고 사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김용균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위험의 외주화’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원청업체는 전문업체에 외주를 주는 게 안전을 높이고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선로 사망사고가 일어난 지난 2일, 코레일네트웍스지부 등 코레일 자회사 지부들은 결의대회를 열고 자회사 노동자 중 안전업무에 종사하는 열차승무원과 차량정비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라고 주장했다. 또 공사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 하청노동자의 임금을 공사의 80% 수준으로 높이는 방안을 권고했다. 외주노동자의 계속되는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협력사 노동자의 직접고용과 정규직화’가 대안이다. 이것이 김용균씨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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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 3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반박하기 위해 ‘조국 후보자의 거짓과 선동 대국민 고발 언론 간담회’라는 걸 열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참여한 간담회는 조 후보자가 전날 해명한 내용에 대한 ‘팩트 체크’ 형식으로 진행됐다. 한국당은 조 후보자가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것 자체가 일방 해명을 위한 ‘국회 능멸 콘서트’라며, 같은 장소에서 반론 간담회를 개최했다. TV 중계로 ‘조국 간담회’를 구경하는 신세였던 한국당은 반론권을 보장해달라며 각 방송사에 공문을 보내 이날 ‘반론 간담회’도 생중계됐다. 후보자 없이 자기들끼리 진행한 간담회에서 반론은커녕 일말의 검증 효과를 못 낸 건 예견된 결말이다. 박지원 의원의 말을 빌리면, “버스 지나니 손 흔드는” 꼴이다.

자유한국당 이은제 의원이 3일 국회에서 열린 '조국 후보자의 거짓, 실체를 밝힌다' 반박 기자 간담회'에서 조 후보자의 논문 표절에 관련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국회 인사청문회를 우회해 후보자 기자간담회를 그것도 국회에서 강행한 것은 전후 원인을 따지기 앞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국회 기능을 무력화한 측면이 있다. 특히 앞으로 악용될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하지만 한국당이 ‘국회 능멸’이니 하며 초법과 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여당의 전례 없는 기자간담회 개최가 나름 명분을 얻게 된 직접적 계기는 한국당이 인사청문회를 정략적으로 활용해 무산시킨 탓이다. 한국당은 끊임없이 인사청문회 발목을 잡아왔다. 관례상 하루였던 청문회를 3일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이 정한 시한을 넘겨서 하자고도 했다. 어렵게 청문회를 9월2~3일 개최하기로 합의한 뒤에는 조 후보자 가족이 무더기로 포함된 87명에 달하는 증인채택을 요구했다. 증인 문제로 사실상 청문회가 무산되자 뒤늦게 가족 증인을 포기하겠다며 청문회 일정을 다시 뒤로 미루자고 제안했다. 어떻게든 청문회를 순연시키면서 ‘조국 정국’을 추석 밥상에 올리려는 정략으로 일관했다. 오죽하면 “명분도 실리도 잃은 전략의 실패”라는 얘기가 당 내부에서 나올까 싶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조 후보자에 대한 청문경과보고서를 6일까지 재송부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이대로면 청문회 없이 국무위원이 임명되는 문재인 정부의 첫 사례가 된다. 시민들은 소중한 청문 기회를 잃었다. 당리당략으로 청문회를 무산시켜 놓고선 여당은 유례없는 후보자 기자간담회를 밀어붙이고, 한국당은 ‘반론 간담회’라는 희한한 쇼를 벌였다. 2019년 대한민국 국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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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에 지난달 27일 총탄과 협박문이 배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사히신문과 대사관 등에 따르면 이날 배달된 편지봉투 안에는 총탄 1발이 들어 있었고, 1장짜리 편지에 ‘라이플(소총)을 몇 정이나 가지고 있고 한국인을 노리고 있다’ ‘한국인은 나가라’ 등 협박문구가 적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일본 우익 세력 등이 주일 한국공관에 항의문이나 오물 상자를 보낸 적은 있지만, 총탄이 배달된 것은 전례가 없다. 지난 1일에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우편함을 파손한 혐의로 우익단체 간부가 현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상대국 공관을 겨냥해 항의시위 등이 벌어지곤 한다. 지난 7월 부산 소재 일본영사관에서 청년들이 일본의 경제보복에 항의하는 기습시위를 벌였고, 서울의 일본대사관에도 대학생들이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경찰에 제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항의행동과 ‘총탄 편지’는 경우가 다르다. 대사관에 총탄을 보내고, ‘소총으로 한국인을 노린다’는 겁박은 그 자체가 한국과 재일한국인들을 겨냥한 테러행위나 다름없다.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

최근 일본 사회의 ‘한국 때리기’ 풍조는 위험수위에 달한 듯하다. 마루야마 호다카 일본 중의원 의원의 트위터 망언과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가 이를 시사한다. 마루야마 의원은 지난달 31일 한국 의원들의 독도 방문을 비판하면서 “전쟁으로 되찾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그런데도 정부 대변인격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의원 개인의 발언에 코멘트를 삼가고 싶다”며 수수방관했다. 지난 5월 마루야마 의원이 러시아와 영유권 분쟁 중인 쿠릴 4개 섬을 “전쟁으로 되찾자”고 하자 스가 장관이 “진심으로 유감이다. 정부 입장과 다르다. 본인이 (발언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것과는 딴판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 때리기’를 방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니 한국공관을 겨냥한 공격이나 협박이 잇따르고, 지상파 방송이 “일본 남성도 한국 여성을 때려야 한다”는 막말을 내보내는 것 아닌가.

일본 정부는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양국관계가 나쁘다고 해도 상대국을 방문하거나 체류 중인 자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사태가 벌어져선 안된다. 정부도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의 안전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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