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되지 않은 걸 찾기 어렵다. 그동안 쏟아낸 기사가 수십만건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도 많고, 추측기사도 적지 않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신상털기나 가짜뉴스와 다를 바 없는 ‘카더라’ ‘아님 말고’ 식의 기사들을 읽고 나면 피곤과 짜증이 밀려온다. 

언론을 신뢰할 수 있다면 이런 소동들이 소위 ‘알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례를 살펴보면, 어떤 언론사는 의도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낸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 시국에 별 관심은 얻지 못하겠지만 한 경제전문지의 이상한 기사에 대해 짚어보았다.

몇 개월 전 한 경제신문에 “시세 80%로 취약계층 위한다는 ‘사회주택’…달동네로 떠밀린 ‘깡통 사회주택’만 속출”이란 기사가 실렸다. ‘달동네’와 ‘깡통’이 뜻하는 바를 상식적으로 풀어보자면, 각각 ‘산등성이나 산비탈 등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비어있음’ 정도일 것이다. 이에 바탕을 두고 기사의 적절성과 사실 여부를 따져보았다.

우선 사회주택정책에 문제가 있다며 제목으로 뽑은 ‘취약계층을 위하는 사회주택이 달동네에 공급된다’는 명제는 사회주택 비판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 어렵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주변시세보다 더 저렴한 주택이 공급되었다면 주거안정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신념이 서울시 전역에 사회주택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달동네에만 공급되는 것을 비판할 여지는 있다. 그런데 ‘달동네에 떠밀렸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서울시의 사회주택이 공급된 지역은 ‘사회주택플랫폼(http://soco.seoul.go.kr/)’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1인 가구 기준 455가구가 공급되었는데, 동별 공급량이 20가구 이상인 경우를 내림차순으로 살펴보면 성북구 성북동 42가구, 관악구 신림동 40가구, 은평구 갈현동 33가구, 강남구 역삼동 28가구, 종로구 이화동 27가구, 강북구 수유동 27가구, 마포구 연남동 26가구, 은평구 녹번동 25가구, 서대문구 연희동 24가구, 관악구 봉천동 22가구이다. 접근성의 기준인 전철역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면, 평균거리는 640m이다. 통상적인 도보생활권의 기준인 500m와 별 차이가 없는데, 전체의 절반이 넘는 232가구가 전철역에서 500m 이내에 위치한다. 21세기 서울에서 달동네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억지에 불과하다.

한편 2019년 8월 말 기준으로 서울시 사회주택의 공실은 82가구이다. 전체 공급량의 18%에 해당한다. 전철역까지 거리에 따라 구분하여 집계해보면 500m 이내의 공실은 31가구, 500m 범위 밖의 공실은 51가구이다. 전철에 대한 접근성이 양호한 곳의 공실률은 13% 수준이며, 전철과 다소 거리가 있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의 공실률은 23% 수준으로 조금 높다. 하지만 깡통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같은 기자는 사회주택에 관한 기사를 두 꼭지 더 작성하였다. 각각 “사회주택 먼저 도입한 유럽 각국, 취약계층 주거 보조금으로 선회” “밑 빠진 독 지원하더니…서울시 사회주택기업 ‘연쇄 부도’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앞의 기사는 유럽의 사회주택 지원제도를 엉뚱하게 해석하여 유럽에서는 사회주택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잘못된 제목을 달았다. 뒤의 기사는 한 업체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전체 사회주택이 부실하다고 부풀리기 위해 비약과 억측으로 채워 문제가 많다. 

이런 기사들은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무책임하게 생성되는 가짜뉴스와 다를 바가 없다. 

가짜뉴스는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멀쩡하던 회사가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기사의 탈을 쓴 가짜뉴스를 걸러내기 위한 언론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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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줬다. 온 나라의 눈이 찬·반으로 나뉘어 주시하는 청와대에서 사흘 장고 끝에 임명을 선택했다. 대통령 메시지는 “송구스럽다”로 시작해 “무거운 마음”으로 갈음됐다. 막다른 길에서 속고민이 깊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짐작 못할 바도 아니다. 조 장관은 숱한 의혹과 부인이 기소된 속에서 임명된 첫 장관이다. 대통령 인사권을 두고 국론이 이토록 분열된 적이 없고, 검찰의 ‘정치 개입’ 시비가 이렇게 톺아진 전례도 없었다. 공정·정의와 검찰개혁이 시대정신으로 굳어지고, ‘꼭 조국뿐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도 나왔다. 문 대통령으로선 그 모두를 선택지에 올려놓고, 책임도 져야 할 ‘정치적 결단’을 한 셈이다. 그 화두 역시 조 장관의 발탁 이유로 삼은 권력기관 개혁이었다. 목적지를 분명히 하되, 조국의 허물과 의혹을 대통령이 품고 동행하는 틀이 됐다. 8·9 개각 후 한달 만에 내려진 대통령의 재가지만, 여론과 수사가 어디로 향할지는 안갯속이다. ‘논란의 종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고 갈 길도 멀다. 누구도 아닌 문 대통령과 조 장관이 풀어야 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9월 10일 (출처:경향신문DB)

정치의 격랑은 높아지고 있다. 당장 한국당은 “정권에 조종(弔鐘)이 울렸다”며 국정조사·특검을 거론하고, 추석 뒤 국정감사도 ‘조국 국감으로 치르겠다’며 벼르고 있다. 일정도 다 잡지 못한 정기국회에 ‘조국 2라운드’의 빨간불이 켜진 셈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여야가 책임 소재를 다투기 시작했지만, 걱정부터 앞선다. 무역 전쟁이 얹어진 경제는 성장률·물가가 함께 내리막이고, 민생의 주름살은 커지고, 남북관계·외교도 전도가 불투명한 중차대한 국면이다. 대통령 인사권 행사를 놓고 전례 없이 바로 해임안 카드로 충돌하거나, 가뜩이나 할 일 많은 정기국회가 파국을 맞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달간의 ‘조국대전’ 끝 여론조사는 여야 모두 지지율이 답보하고 변화의 진폭이 작았음을 정치권은 성찰해야 한다. 그 책임을 안에서부터 돌아보고, 총선 때 평가받는다는 긴 호흡으로 임하길 기대한다.

눈은 서초동 검찰과 과천 법무부로 향한다. 조 장관은 취임식에서 “검찰의 논리와 인적 네트워크로 움직여온 법무부”를 바꾸고, “민주적 통제를 잃은 검찰”을 누구도 되돌릴 수 없게 개혁하겠다고 했다. “부족하지만, 검찰개혁을 마지막 소명으로 삼겠다”던 ‘조국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시선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조 장관은 “가족 수사는 일체의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청문회 약속부터 지켜야 한다. 검찰의 길과 법무부의 길이 다르다고 했던 개혁의 꿈도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몸소 세워야 한발이라도 나갈 수 있을 터다. 검찰도 성찰할 게 조 장관 못지않다. 왜 ‘정치 개입’ 시비가 계속됐는지, 또 피의사실 유포 지적이 나오는지 돌아볼 일이다.

문 대통령은 달리는 호랑이 두 마리의 등에 올라탔다. 법·제도를 개혁할 법무장관과, 그의 가족을 수사하는 검찰총장이다. 개혁이 삐걱거려도, 처벌 받을 ‘위법’ 사안이 나와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와 레임덕에 맞닥뜨릴 수 있다.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갈라진 국론에 다가가야 한다. 젊은 세대와는 정의·공정사회의 꿈과 길도 다시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구체적 그림과 시간표가 받쳐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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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비서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상고심에서 징역 3년6월을 선고받아 유죄가 확정됐다. 지난해 3월 김지은씨가 언론을 통해 피해사실을 폭로한 지 1년 반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판결이다. 위력을 이용한 ‘권력형 성폭력’이 명백한 범죄임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의 상고심 기각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안 전 지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9일 대법원 2부는 안 전 지사의 10개 혐의 중 9개를 유죄로 판단한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1심은 무죄로, 2심은 유죄로 엇갈린 상황에서 대법원은 2심 판결이 맞다고 판단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용자를 상대로 법과 정의에 기대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환영했다. 정치권에서도 “사필귀정의 확립(바른미래당)” “피해자다움은 가해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이정표를 세웠다(정의당)” “위대한 싸움을 진행한 미투 운동의 승리(민주평화당)” 등 일제히 환영논평을 냈다. 

지난해 초부터 터져 나온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중에서도 안 전 지사 사건은 특히 1, 2심 판결이 뒤집히며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위력이 존재는 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논리로, 1심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됐던 ‘위력 행사의 유무’와 ‘피해자다움’이 공방의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비론이 고개를 들며 꽃뱀 음해와 진영 논리까지 더해져 개인적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한 채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가해지기도 했다. 가해자 동정여론과 피해자 비난은 위력 행사에 고통을 당하는 ‘보통의 김지은들’과 가해 권력자들의 눈높이 차를 실감케 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 같은 논란을 잠재우며 국내외에서 도도하게 진행되는 미투 운동이 시대적 대세임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공대위가 밝힌 대로 이번 판결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성폭력을 끝내는 변곡점이 돼야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성평등이 한발 더 전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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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브리지와 런던타워가 빤히 보이는 템스강가 호텔에서 보름 가까이 머물렀다. 창 아래로 2000여 년 가까이 서 있는 성벽의 잔해가 보이는 곳이었다. 성벽은 런던 월(London Wall)이라고 부르며,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서기 190~22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성벽은 높이 6m, 길이 5㎞에 달했으며, 런던타워 앞 템스강 기슭에서 시작하여 당시 로마인들이 살았던 론디니움(Londinium)을 에워싼 후 알파벳 D 형태를 이루며 템스강의 상류 쪽 기슭으로 이어졌다.

현재 성벽은 지하철 타워 힐 역 바로 앞에 가장 길고 웅장하게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성벽은 끊어졌다가 다시 현대식 건물 틈새로 길이 60~70m 남짓하게 이어진다. 그곳으로부터 런던뮤지엄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은 금융 중심가답게 초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건물들 벽에 간혹 파란색 표지판이 붙어 있다. 타워 힐 앞 성벽에는 2번 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통틀어 모두 21번까지의 표지판이 2000여 년 전 런던 월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기에 빼곡하게 들어 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걷는 길은 로마인들이 닦아 놓은 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곧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런던뮤지엄 또한 론디니움을 지키던 요새의 터 위에 지어졌으며 타워 힐로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은 대개 성벽이 세워졌던 곳들이며 로마인들이 걸었던 길이다. 뮤지엄 못 미처 남아 있는 런던 월 잔해 곁에는 중세에 들어섰던 교회조차 허물어져 볼품없지만 갖가지 꽃이 가꿔진 정원이 성벽을 감싸고 곁에는 카페까지 들어섰다. 더구나 그곳에서부터 ‘스카이워크’라고 부르는 공중 육교들이 건물 사이를 이어 주며 박물관까지 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실 그곳은 론디니움을 거니는 내내 나의 중요한 휴식 장소이자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때우는 점심 식사 장소이기도 했다. 2000여 년 묵은 성벽에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생소할 만큼 훌륭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기운을 추스르고 그곳에서부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중세시대에 세워진 이발사와 외과의사의 집을 지나면 18번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곳은 지하 주차장 입구이다. 주차장 안을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하필 표지판 앞에 중세시대의 망루가 부서진 채 있으니 처음에는 그것이려니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날 밤, 고고학을 공부하는 영국인 지인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무턱대고 물었다. 왜 거기 표지판이 있느냐고, 갸우뚱거리며 10m 남짓 들어가다가 돌아 나왔다고 했더니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곤 내일 다시 가서 지하 주차장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라고 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그곳으로 향해 그가 말한 기둥의 번호를 찾았다. 멀리서 그 번호가 보일 때쯤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일었다. 기둥 근처에 성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시멘트로 바른 겉이 떨어져 나가 속이 훤히 드러난 콘크리트구조물처럼 로마와 중세를 거친 성벽이 주차장 서너 칸을 차지한 채 남아 있었다. 

버려진 듯 무심하게 그곳에 남아 있는 성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말을 잊었다. 그것은 어이없거나 참담함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하여 갖춘 예의였다. 허물어지거나 부서진 것들의 아름다움은 새것들이 감히 탐할 수 없는 분방함과 눅진함이 배어 있다. 낡은 전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로마시대 성벽이 지하 주차장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그 규모는 앞에 말한 2번 구역의 타워 힐이나 그 옆 3번 구역의 성벽에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그것조차 허물어버리지 않고 남겨 둘 수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생각은 성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 다음 날은 길드 홀(Guildhall)을 찾았다. 여러 건물이 에워싼 길드 홀 광장에는 독특하게 검은 돌이 점점이 박혀 있다. 길드 홀 아트갤러리 지하에는 론디니움의 원형극장이 폐허가 된 채 남아 있으며, 광장의 검은 돌은 지하에 있는 원형극장의 외곽을 따라 경계를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그 일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다. 갤러리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1987년 지금의 아트갤러리를 철거했다가 그 지하에 원형극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때부터 원형극장의 보존을 위하여 갤러리 설계를 다시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은 올더게이트(Aldergate)나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의 오피스 빌딩 지하에 있는 성벽이나 로마시대 주택과 목욕탕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모든 장소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유재산권을 앞세운 건물주들의 재산권 행사에 의하여 유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금융 관련 미디어그룹인 블룸버그(Bloomberg)의 유럽 본사건물 지하이다. 지하 3층 깊이인 지표면 6m 아래에는 신비한 미트라(Mithras) 신을 모신 로마의 신전 미트라에움(Mithraeum)이 폐허가 된 채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2000년 전 장소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장소에 21세기의 기술까지 덧입혀서 극대화된 제례의 현장을 재구성하여 공개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젠 익숙해졌지만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거푸 세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미트라에움에서 되돌아 나올 때마다 역사적 장소를 매개로 한 공공이익 창출에 있어서 기업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바실리카(Basilica) 구조물이 남은 리든홀 마켓(Leadenhall Market)의 이발소, 부두 건설에 사용됐던 나무 기둥이 남아 있는 순교자 성 마그누스(St Magnus) 교회와 같은 론디니움의 흔적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러한 장소에 갈 때마다 로만브리튼(Roman Britain)의 역사보다 그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사람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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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달 30일 부산에서 열린 장외집회에서 “문재인 정부는 ‘광주일고 정권’이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을 차별하면서 더 힘들게 하는 정권에 대해 부울경 주민이 뭉쳐서 심판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나경원 원내대표는 “서울에 구청장 25명 중 24명이 민주당인데 그중에서 20명이 광주, 전남, 전북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명백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선동적 발언이다.

내년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과 색깔론 발언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국회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인과 색깔론을 조장하는 정치인, 부패 연루 정치인을 지역 유권자가 소환하여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여 우리 국회가 정책과 입법에 집중하는 국회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특히 지역균형발전 없이는 국민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정부는 예산과 공직 인사, 정책 등을 균형 있게 시행하여 동서화합과 국가의 균형 발전을 통한 국민통합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국회에 있는 110여명의 크리스천 국회의원에게 당부하고 싶다.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상생의 정치와 지역균형 발전과 국민통합, 남북의 평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열강들과의 우호협력강화를 위해 피스메이커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는 정치인 이전에 막힌 담을 허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김철영 |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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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이라는 해괴한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음식점이나 상점 종업원들이 중장년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사장님’이라는 말을 썼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꼭 사장일까?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큰 부자로 대우받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개인 연락사무소로 이용했다. 종업원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라고 소리치면 다방 안에 있던 사람 반이 일어났다는 우스개가 전한다.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 이후 회사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사장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장년 남성을 ‘사장님’으로 부르는 관행은, 모르는 상대를 높여 주던 전래의 미풍양속과 회사가 속출하던 시대 상황이 결합해서 생겼을 터이다.

물론 사장보다 훨씬 많아진 사람은 ‘사원’이다. 오늘날 직업을 가진 한국인의 반 가까이는 ‘사원’이다. 회사원, 월급쟁이, 직장인은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유통업 노동자와 서비스업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인이지만, 그래도 모두 ‘회사원’이라는 통합된 이름으로 불린다. 회사원이 아닌 사람도 회사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먹는 것 일부를 제외하면,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다. 현대는 회사의 시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에 회사라는 이름의 기업 조직이 처음 출현한 해는 1883년이다. 이해 10월21일 한성순보에 ‘회사설’이라는 논설이 실렸고, 같은 무렵 평양 상인들이 대동상회, 서울 상인들이 장통회사를 설립했다. 이때의 회사는 ‘결사영상(結社營商)’, 즉 상인들의 동업조합 같은 것으로서 출자자를 사원, 경영자를 총무라고 했다. 사장은 대개 고위 관료가 겸했다. 오늘날의 사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원(雇員)이나 용인(傭人)이라고 불렀다. 자본주의의 모국인 유럽의 회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초창기의 회사들도 일종의 특권적 상업 조직이었다. 중앙정부가 발급한 회사 인허장은 잡세 면제증과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가 상업 자유의 원칙을 천명한 뒤에도 회사의 특권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나, 점차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처음 쓴 회사는 1898년 김익승이 설립한 부선주식회사였다. 재고, 자산, 나무 그루 등을 의미하는 영 단어 stock을 중국인들은 고본(股本), 일본인들은 주(株)로 번역했는데, 한국인들은 처음 깃(矜)이나 고본이라고 부르다가 이윽고 일본식 주(株)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정부의 중상주의적 정책에 발맞추어 여러 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사설 주식 거래소도 생겼다. 이때부터 주식회사의 시대가 열렸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시대 기업 유형 중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은 온 사회 구성원을 자본 아래 통합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주권(株券)은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고, 10만주를 가진 사람과 100주밖에 못 가진 사람을 같은 ‘이해관계인’으로 묶어준다. 갑 회사에 다니면서 을 회사의 주권을 산 사람은 자기 회사 실적보다 을 회사의 실적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주식회사는 자체로 압축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둘은 운영 원리가 같을 뿐 그 주체와 기본 이념은 전혀 다르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1표씩을 갖는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수결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반면 주식회사의 주권은 돈에 있으며, 모든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다수결의 주체는 전적으로 평등한 액면가의 주식들이다.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기본 이념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Capitalism을 자본주의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아마도 그 속성이 인본주의에 대립한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민주주의가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병립하는 상황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어떤 사람이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에 특혜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모든 사람이 분노한다. 하지만 재벌가 3세가 자기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주식회사에 특혜로 입사하여 초고속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적 기관에는 인본주의를, 사기업에는 자본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펼쳐진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립 법인들에서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원칙에 따를 것이냐를 두고 늘 문제가 발생한다. 종교재단에서 원로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은 온당한가? 사학재단이 이사장 자녀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은 온당한가? 언론사가 가족기업처럼 운영되는 것은 온당한가? 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원리는 사립 법인 내부에서만 관철되는 게 아니다. 얼마짜리 학원에 보내느냐에 따라 학생 성적이 달라지고, 변호사가 대형 로펌 소속이냐 국선이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 인류평등이라는 인본주의의 대의는 말뿐이고, 일상생활 전반을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인본주의적 선심(善心)이란 본래 아래를 향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적 선심은 위를 향한다. 가난한 사람 무시하고 부자에게 선심을 베푸는 건 현대인의 생활 윤리다.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이른바 ‘흙수저’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관건은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에 있다. 인본주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넓은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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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구조기술사 박동훈은 삶이 고달픈 이지안에게 말한다. 건물을 지을 때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설계한다고.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틸 수 있다고. 

내력이란 물체가 외부 힘의 작용에 저항하여 원형을 지키려는 힘을 의미한다. 일본이 일제 징용 배상 판결에 도리어 경제보복을 하는 것이 외력이라고 한다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진정한 사과를 받을 때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내력이다. 우리 역사는 부정선거에 맞서 4·19혁명으로 항거했고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국정농단 사태 앞에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하며 내력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반복되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만큼 토대가 허약함을 방증하기도 한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보며 자아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보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자아는 독립적이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파머는 그러한 자아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역동을 다루는 기회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그 결정적 장소가 교실이라고 보았다. 

교사는 ‘두려움은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 질문을 통해 학생의 내면 탐구를 자유롭게 도와주어야 한다. 자신보다 커다란 실재에 맞닿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지극히 작은 개인이 큰 이야기와 연결될 때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마음의 습관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국어 수업에서 아이들과 같이 고른 책, 티에리 드되의 <야쿠바와 사자>를 읽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서는 소년이 전사로 인정받으려면 홀로 사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 야쿠바는 힘들게 헤매다 드디어 사자를 대면하지만 사자는 이미 피 흘리고 굶주려 죽기 직전인 상태다. 이대로 사자를 찔러 전사로 인정받을 것인가, 상처 입은 사자를 구해주고 겁쟁이로 남을 것인가. 밤새 고민한 소년은 사자를 살려주고 마을로 돌아온다. 전사가 된 다른 친구들은 사냥을 떠나지만 야쿠바는 마을 외딴곳에 남아 가축을 돌보는 허드렛일을 맡게 된다. 

책을 덮은 후 아이들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약한 사자를 죽이고 전사가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인가? 자신에게 당당한 것과 타인의 평가 중 무엇이 중요한가? 스스로 한 결정을 따르기 위해 다수가 바라는 길을 가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함께 읽은 책은 공동의 경험이 되었고 우리가 만든 질문은 실존의 문제를 지닌 큰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프리카 어느 초원을 배경으로 둥글게 모여앉은 스무명의 야쿠바들이 되어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우리는 친구가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쳐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묵묵히 곁에서 들었다. 서로 달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야쿠바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닮아있고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비슷한 일을 만날 것이다. 고독하게 내면을 탐구하되 서로 곁을 지켜주는 시간이 학교에서 켜켜이 쌓여가길, 그래서 장차 사회에 나갔을 때 타인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길,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는 내력을 가진 사람이 되길 이 작은 교실에서 꿈꿔 본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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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와 주제를 모르고 덩달아 남 따라 하면 끌끌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더니” 한소리 듣습니다. 숭어와 망둥이는 둘 다 기수(汽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어귀 바닷물)에서 삽니다. 숭어는 물 위로 멋지게 솟구쳐 뛰어오르지만 망둥이는 개펄 위를 찰박찰박 경망스레 뛰어다니기에 이 둘을 비교해 줏대 없는 따라쟁이에게 혀를 찼습니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가 있듯이 그런 망둥이 보고 꼴뚜기도 가만 못 있었죠.

이 속담에도 숨은 맥락이 있습니다. 부어( 魚), 이어(鯉魚)가 붕어, 잉어로 바뀌듯 숭어도 수어(秀魚)에서 바뀐 것입니다. 원래 이름이 수어(秀魚)인 만큼 맛 좋은 생선이죠. 그런데다 숭어는 흔하게 잡혀 값도 꽤 저렴했습니다. 이 싸고 맛 좋은 물고기가 느닷없이 어느 때인가 값이 뜁니다. 연일 날씨 사나워 못 잡거나 이상기온으로 자취를 감춰서일 수도 있겠지요. 숭어가 비싸지니 어물전 왔다 헛걸음하기 싫어 망둥이를 사 갑니다. 망둥이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망둥이 가격도 덩달아 뜁니다(망둥이 가격이 뛰면 꼴뚜기 값도 물 뿜고 따라 뛰겠지요). 뛰는 생선인 숭어와 망둥이로 ‘위로 뛰다’ ‘물가에서 뛰다’와 ‘가격이 뛰다’ ‘물가가 뛰다’를 연결한 셈입니다. 지금은 애초의 의도가 희미해져 분수 모르고 덩달아 남 따라하는 사람을 뭐랄 때만 쓰지만요.

동료가 신형 차를 사니 없는 살림에 차 바꾸고 싶습니다. 옆집 애가 필요한 유학 간다니 불필요한 우리 애도 비싼 코스를 밟습니다. 따라 하지 못하면 돈 없는 자격지심에 화가 납니다. 내 어디가 저만 못해서! 네, 맞습니다. 사람마다 어느 한곳, 어느 한때 남보다 뛰어날 수(秀)가 있습니다. 숭어가 봄에 맛있다면 망둥이가 맛있는 철은 가을입니다. 망둥이 철에 남들 따라 숭어 먹어보겠다니 꼴뚜기마저 비웃습니다. “제때 제맛도 모르고 뛰는 저 얼간망둥이!”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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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나 운동 선수가 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거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국내 언론이 반드시 쓰는 기사가 이른바 ‘외신 반응’이다. 미국·유럽 등의 언론이 이 뛰어난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현지 기사를 찾아내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는 것이다.

외신의 평가를 기사로 작성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거둔 성공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기사는 동북아시아 변방 국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지만 같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외신 반응 기사를 쓰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차고 아름다운 연기로 피겨 스케이팅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김연아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였다. 김연아는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팬들의 분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 현상에 대한 외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쳤을 때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놀랍지 않다”며 “오랜 세월 한국은 국제 대회 성적을 자부심과 결부했던 나라”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자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OECD 경제 순위나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 노벨상 개수 등 정량화할 수 있는 성과가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걸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의 은메달이 불러온 분노의 후폭풍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서구 언론에 드러내 보인 사건이 됐다.

그러나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응원하는 마음들을 모두 애국심이나 자격지심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운동 선수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인 양 편파 중계하는 방송에 눈살을 찌푸리는 팬들도 많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활약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LA 다저스 류현진이 7월20일 마이애미전에서 힘껏 공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최근 기자들에게 외신 반응을 쓰게 만든 스타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류현진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뛰어난 투구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오르며,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수상 후보로까지 거론돼 왔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얼굴인 류현진의 활약은 반가운 일이다. 류현진의 경기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서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류현진이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응원한 게 아니다. 류현진을 덮어놓고 칭송하는 댓글엔 ‘국뽕(애국심에 도취된 것)’이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는다. 팬들이 류현진에게 원하는 것은 국위선양보다 차라리 ‘힐링’에 가깝다.

우리는 삶에 짓눌려 항상 피곤하고, 별다른 낙이 없다. 정치권엔 믿을 사람이 없고, 경제는 언제 좋아질 것인지 기약이 없다.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류현진은 정교한 투구를 지켜보고 감탄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 경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걱정과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적잖은 팬들이 “요즘 류현진 보는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류현진은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사이영상을 받는다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사에 한 획을 긋겠지만, 사이영상을 못 받아도 실패는 아니다. 남은 경기에서 잘 던진다면 한국 팬들은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즐기려 보는 게 스포츠 아니겠는가.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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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 참나무과의 낙엽교목. ⓒ이해복

어디에서 왔을까. 그건 아주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거기에 무어라 말할 하늘이 아니다. 여름이 차례를 지켜 덥고, 나는 순서가 되어서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 지금 해야 할 일은 자꾸 산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궁리가 든다.

지난 일요일은 입춘 이후 열다섯 번째인 백로였다. 대부분의 24절기가 뜻만 무뚝뚝하게 전하는 데 비해 백로는 그 이름이 퍽 우아하다. 덕유산 삿갓재에서 1박 하는 산행을 계획하였다가 링링에게 발목이 잡혔다. 파주출판단지로 허전한 발길을 돌리는데 뿌리째 뽑힌 가로수가 많았다. 거리에 수북한 상수리나무의 가지를 관찰하니 접촉면이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바르르 떠는 가지를 들고 한 달 전의 춘천으로 달려갔다.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오신 형님들과 김유정문학촌의 금병산 오르는 길. 산은 그야말로 소설가의 뒷배를 담당한 듯 오솔길이 호젓했다. 어두웠던 시대를 감당해야 했던 김유정의 그 많은 고민과 문장을 받아준 산책길. 바닥에 박힌 바위들이 닿소리라면 지나가는 바람결은 홀소리라고 해둘까. 

금병산 길바닥에 신갈나무 가지가 떨어져 있다. 가지와 접했던 부위를 보면 누군가 예리하게 칼로 자른 듯 매끈했다. 이는 도토리가 달리는 참나무를 괴롭히는 도토리거위벌레의 소행이다. 녀석은 신갈나무 열매에 알을 낳고, 주둥이로 가지를 잘라 밑으로 떨어뜨린다. 충격을 완화하려고 프로펠러처럼 잎을 몇 개 매단 채. 그냥 자연스럽게 무위하게 부러진 게 아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거리에서 생각을 더 달려본다. 훤칠한 나무일수록 태풍은 더 집요하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신갈나무라고 한다. 나무는 나무, 사람은 사람이겠지만 결국은 하나로 반죽이 된다. 우리는 이 산들을 등뼈로 삼아 각각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무용한 질문이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물음이다. 어쩌면 신갈나무가 그에 대한 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이굴기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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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2일 고려대에서 열린 삼성 이건희 회장 명예철학박사 수여식은 아수라장이었다. 학생들이 식장을 에워싸고 반대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진행됐다. 파장은 컸다. 다음날 고려대 총장이 사과했고, 청와대까지 나서서 유감을 표시했다. 대학과 시민단체에서는 ‘명예박사 논쟁’이 불붙었다. 고려대는 이 회장에 대한 명예박사 수여의 근거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신경영과 사회공헌활동’ 등을 들었다. 그러나 반대 측은 ‘고려대 100주년기념관 건립비(418억원) 기부’의 대가라며 자본의 대학 영향력 확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명예박사는 교육부에서 인가하는 정식 학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명예’로 주는 학위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47조에는 ‘학술 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했거나, 인류문화 향상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나와 있다.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김수환 추기경 등 취지에 부합하는 명예박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격한 기준이나 잣대가 없다보니 대학들이 학위를 남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사립대 명예박사 학위가 정·재계의 실력자들에게 돌아가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가령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내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는 7개나 된다.

동양대 최성해 총장의 박사 학위가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주 국회 청문회 전까지 최 총장은 교육학 박사로 알려졌다. 최 총장은 그동안 학교 공식문서뿐 아니라 포털사이트, 언론인터뷰에서도 ‘워싱턴침례신학대 교육학 박사’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박사 학위 의혹이 제기되자 ‘교육학 박사’ 이력을 지웠다. 네이버 인물정보에서 최 총장의 학력은 ‘박사’에서 ‘명예박사’로 수정됐다.

최성해 총장의 박사 학위 보유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립대 총장은 박사 학위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허위 사실을 내세우며 총장으로, 교육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앞서 최 총장은 ‘교육자의 양심’을 얘기하면서 조국 법무장관의 딸이 받은 동양대 표창장의 조작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쏟아지는 ‘학력위조’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최 총장은 이 의혹부터 해명해야 한다. 그것이 명예박사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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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놀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의 상황에서 임명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독이 든 두 개의 잔이다. 임명과 철회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켜보는 심경은 그저 착잡하다. 국회의 시간도 지나고, 대통령의 시간도 지나고, 격돌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통령과 조국 장관은 야당과 검찰과 언론과 여론을 상대로 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4중 격돌이다. 격돌의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 한 달간의 소위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것들은 이렇다.

첫째, 정의와 상식이 충돌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386’의 유통기한은 끝났다고 지적해왔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386의 기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도 뚜렷하다. 역사에 기여가 있다고 해서 권력과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은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386에 대한 반감은 커져오고 있었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정당성은 이번에 탈탈 털어서 모두 써버렸고, 부채까지 생겼다. 그 정도 의혹이 불거졌으면 일단 사퇴하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상식과 일단 장관이 되어서 의혹을 해소해가며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386 특유의 정의가 충돌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앞으로 한국 정치에서 386의 정의에 가산점을 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던 제자 한 명이 툭 내뱉은 말을 잊지 못한다. “결국 좌우가 아니라 위아래가 문제였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둘째,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충돌했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가 허황한 장밋빛 미래로 기만하는 것이었다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문제는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벽이다. 박근혜 정부의 시선은 1970년대에 고정되었다. 대통령의 부친이 대통령이었던 그 시절의 사고방식, 문화, 정책, 관행, 그리고 그 시절 이후 누가 배신자였는지 아니었는지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386이 20대였던 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완수하지 못한 개혁을 바라보고 있다. 그 스스로도 남들과 똑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흠결을 몸에 묻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의 상징과도 같은 후보자와, 그 후보자를 질타하며 1970년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일부 청문위원들을 2019년의 한 화면에서 보는 것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독재에 충실히 복무하며 공안검사로 살아왔던 야당 대표가 후보자의 사노맹 경력을 공격하며 자신이 담당검사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과, 똑같이 검사 출신이면서 탄핵무효를 외치는 야당 의원이 후보자가 제출한 부실한 자료를 찢어버리는 장면은 여야 어디에도 1980년대 이후의 세상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소위 ‘조국 사태’ 한 달 동안 민주당 지지율은 3% 남짓 떨어졌고,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1% 남짓 올랐다. 조국 후보자를 임명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의 예상이 과연 맞을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설사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한국당이 설 자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동안 한국당이 1970년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말해왔다면 흔들린 민심은 그들의 몫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

셋째, 꽃과 뿌리의 충돌이다. 화분을 오래 키워본 사람은 안다. 겉으로는 아직 꽃이 화려한데 뿌리는 텅 비어버린 화분이 있음을. 꽃은 조만간 떨어지고 화분은 말라죽는다. 유난히 정의로워 보였고 타인의 불의를 서슴지 않고 지적해왔던 조국 장관에게서 여러 건의 편법과 불공정의 혐의가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불법 여부와 상관없이 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 그의 혐의를 조금이라도 나눠 갖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돈이나 인맥을 동원해서 자녀의 스펙을 도와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의 상층 중에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 낳거나 조기유학시킨 자녀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방조하면서 만에 하나 보험 드는 심정을 잠깐이라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입으로는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한다면서 뿌리는 이미 이 땅을 떠나버린 소위 지도층은 얼마나 많을까? 꽃이 뿌리를 기만하고 뿌리가 꽃을 배신했다.

격돌의 시간이 왔다. 민주화 이후 여러 정부의 경험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화 세대의 특권을 잊어버리고 좌우가 아닌 위아래를 봐야 한다. 권력기관 개혁과 더불어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미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무주공산이다. 힘세고 돈 많은 사람일수록 삼가고 나라의 뿌리에 투자를 해야 한다. 화분이 시들려고 하는 순간에 지금껏 싸우기만 하던 이 나라의 상층은 자기 몫만 챙겨 떠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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