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처음 접하는 문화권인 데다가 언어까지 낯선 지역의 식당에 가면 살짝 두렵다. 영어로 요리를 설명하는 메뉴판이 따로 있어도, 그 지역 음식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음식 이름만으로 맛을 짐작할 수 없기에,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도대체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 낯선 나라의 메뉴판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쓰여 있는 이집트 석판 같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상에는 요리의 종류도 많지만 그 요리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아예 주재료를 음식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닭똥집이라든가 고등어구이 그리고 삼겹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식당 메뉴판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름 붙여진 음식을 발견하면 일단 안심된다. 싱가포르의 한 식당 메뉴판에 개구리 뒷다리라고 쓰인 요리가 있기에, 호기심에 주문했더니 정말 음식 이름 그대로 개구리 뒷다리가 접시에 한가득 담겨 나왔다. 

비유나 문학적 은유를 사용해 음식 이름을 짓는 방법도 있다. 

마의상수( ), 중국 쓰촨성의 요리 이름이다. 마의상수를 직역하면 “개미가 나무를 기어 올라간다”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의 뜻풀이만으로는 어떤 음식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마의상수는 고기를 갈아 볶은 다음 당면과 섞어서 만든 잡채와 비슷한 요리인데, 요리의 생김이 나무를 기어오르는 개미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음식 이름도 있다. 샌드위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영국의 존 몬터규 샌드위치 백작은 하루하루가 지루하다. 직업이 없어도 되는 귀족이니,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에 쫓기지 않는 그에게 카드놀이는 유일한 취미이자 소일거리다. 그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다. 그를 위해 빵 사이에 고기와 치즈를 넣은 음식이 만들어졌고, 그 음식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샌드위치가 되었다. 

투르네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라는 음식 이름을 메뉴판에서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 이 로시니는 바로 그 로시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가 로시니이다. 유명한 미식가였던 로시니는 안심 스테이크 위에 푸아그라를 얹는 요리를 생각해냈고 즐겨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싼 안심 위에 그보다 더 비싼 푸아그라를 얹은 이 요리는, 이 요리를 즐겨먹던 로시니의 이름을 따서 투르네도 로시니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장 흔한 브런치 메뉴 중의 하나인 에그 베네딕트도 마찬가지다. 에그 베네딕트라는 요리 이름만으로 수란 위에 홀랜다이즈 소스가 뿌려진 모습을 상상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베네딕트는 찐계란이나 계란 후라이처럼 음식을 만든 방법을 일러주는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그 베네딕트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공통점은 에그 베네딕트는 이 요리를 즐겨먹던 베네딕트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에그 베네딕트는 투르네도 로시니처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에 주목하며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우리는 샌드위치를 즐겨먹은 샌드위치 백작은 알지만, 그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로시니를 위해 투르네도 로시니를 요리한 사람의 기록도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에그 베네딕트를 즐겨먹던 베네딕트의 이름은 메뉴판에 새겨져 있는데, 베네딕트를 위해 에그 베네딕트를 수없이 만들던 그 사람의 흔적은 메뉴판에 없다. 메뉴판은 요리하는 손은 없고 먹는 입만 갖고 있는 특별한 사람만을 기록하고, 정작 요리한 평범한 사람의 흔적은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영웅 중심으로 쓰인 역사와 닮은꼴이다. 

식당은 상업공간이니 먹는 사람 즉 고객이 중요해서 그렇다고 치자. 집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식탁의 미시권력은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에게 있다. 음식을 먹기만 하는 사람은 음식에 대해 말이 많다. 요리를 한 사람은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서 먹기만 하는 사람처럼 비평가의 태도를 쉽게 취하지 않는다. 집 안의 평론가는 집 밖에서도 평론가이다. 먹고 품평하는 입만 갖고 있는 미식가와의 식사는 그래서 괴롭다. 비빔국수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의 평양냉면에 대한 장광설, 즉 면스플레인은 공허하다. 먹기만 한 사람은 만드는 사람의 거룩한 손을 잘 모른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때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즐겨 만드는 음식을 묻는다. 나 혼자만의 사람 감별법이다. 남이 해준 음식을 먹으며 해박한 지식을 들먹이며 평론을 곁들여 세끼를 먹는다는 그 ‘삼식이’는 매력적이지 않다. 우리는 샌드위치와 로시니 그리고 베네딕트가 살았던 옛날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삼식이’가 손을 되찾는 ‘미래’의 그 어느 날, 거창하게 말하자면 음식의 새역사는 시작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지만,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음식은 먹는 입과 만드는 손이 따로 놀지 않는 음식이다. 공정한 음식은 미시권력을 돌파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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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시간 한반도의 허리띠는 녹색이다. 밤에 우주정거장에서 보면 얇디얇은 불빛 선으로 바뀐다. 강원 고성에서 한강하구까지 동서로 248㎞, 남북 철조망 사이 4㎞에 펼쳐지는 비무장지대(DMZ)의 두 색깔이다. 70년 가까이 사람 손길이 끊긴 3억평(907㎢)의 긴 띠는 5929종의 생물과 멸종위기 동·식물 101종이 사는 ‘생명의 땅’이다. “바로 앞에서 마주친 산양이 도망가지 않고 눈싸움을 해요.”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DMZ 탐사 중에 만난 동물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독수리·두루미·황쏘가리가 모여 살고, 호랑이만 없는 원시의 세계다.

남북이 유해를 발굴하며 감시초소(GP)·지뢰를 없애기 시작한 DMZ는 가다서다 ‘평화의 땅’으로도 변신 중이다. 한국전쟁 때 동·서·중부 전선에는 북 탱크가 내려온 남침로 3개가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군부 설득에 땀 흘렸다고 한 개성공단·금강산 가는 길은 다시 뚫렸고,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 경원선 길만 닫혀 있다. 군사 요충로 2개는 평화의 길로 바뀐 셈이다. 총알 자국 선명한 북한 노동당사와 먼 옛날 태봉국의 궁예도성이 있는 철원은 ‘세계평화공원’을 만들려는 남북경협 DMZ 축의 중심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총회 회의장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제2차 ‘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P4G)’ 정상회의의 2020년 서울 개최 계획을 밝혔다. 뉴욕 _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DMZ가 24일 유엔총회 무대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총회 연설에서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며 남북에 주재 중인 유엔기구와 평화·생태·문화기구들을 DMZ 안으로 옮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인류의 공동유산이 된 DMZ의 유네스코 등재도 남북이 함께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현된다면, DMZ가 마지막 분단국의 군사적 긴장을 풀고 북이 미국에 요구하는 체제안전 보장의 지렛대도 될 수 있다. 한국은 26개의 유엔 기구에 가입했고, 평양사무소를 둔 세계보건기구(WHO)나 세계식량계획(WFP)처럼 북한도 16개 유엔기구에 적을 두고 있다.  

지난 20일 춘천에선 DMZ에 새 이름을 명명하자는 국내외 학자들의 포럼도 열렸다. 평화와 생명이 공존하는 ‘PLZ(Peace & Life Zone)’로 만들자는 프로젝트가 움튼 것이다. 세계적 온대서식지인 DMZ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미래의 땅엔 새 이름(PLZ)이 안성맞춤이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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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놈만 패”라는 대사가 어느 영화에서 처음 나왔더라. <주유소 습격사건>이던가. 요즘 돌아가는 정국이 딱 그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영화에서는 약자가 강자에 맞서기 위한 부득이한 생존방법(?!)이었지만 현실에서 그 대사를 하는 사람이 약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생존방법이라는 점에서는 어떤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한 놈만 패던 일이 오직 이번뿐이었을까. 한 놈만 패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정반대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할 오직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런 기대 말이다. 오직 한 놈을 제거해서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정반대편에 오직 한 사람을 세워 세상을 구원하려는 욕구도 존재한다. “오직 한 놈만 패”서 정의를 구현하고 싶은 이면에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정의를 실천하고 싶은 욕망도 서 있는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해당 대사가 등장하는 영화를 찾아보려다 지난해 개봉했던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었다. <인크레더블>이다. <인크레더블>은 슈퍼히어로가 불법이 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슈퍼히어로 가족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1편을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회 도처에 난무하는 위험한 상황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을 통제하여 보험 서류나 꾸미고 전화를 받는 평범한 삶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통제는 아무래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약자들을 돕고자 하는 주인공 히어로들의 선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 선함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악의 세력을 제거했고, 그리하여 슈퍼히어로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와 부활의 필요를 주장하듯 끝난 것이 1편이었다. 

그러하니 속편으로 제작된 2편에서는 그들의 맹활약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 같았는데, 의외로 영화는 그들이 정말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묻고 있었다. 히어로를 의지하고 믿었으나 결국 악당에 의해 맞이한 부모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건 히어로가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서 부모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 아들과 히어로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부모의 나약함이 죽음을 가져온 거라는 딸의 대립이 영화의 바탕에 놓여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대체로 후자의 입장에 동의했다. 슈퍼히어로가 있어 세상이 그에게 자신의 모든 안위를 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대에는 내 안위를 구해줄 강력한 대체자는 무슨 일을 하든 선하다는 위험한 믿음이 전제돼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애니메이션에서 딸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더 위험한 짓을 하는 바람에 ‘악당’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주장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TV를 끄고도 그 질문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그 잔상이 현실에 남아서 재생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면서 궁금하다. 그이는 왜 몇몇의 히어로에 의해 구원되는 사회를 반대하면서 ‘저 홀로’ 몇몇의 히어로를 제거하려고 했을까. 그이가 악당이 된 건 그가 가진 논리의 부당함 때문일까, 자신의 논리를 합의 없이 저 홀로 관철시키려고 했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래도 후자 같다. 

난세를 구하는 건 영웅일까, 의인일까, 악인일까, 죄인일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하다. ‘오직 한 사람’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그 한 사람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된다. 우리는 왜 사람의 자리에 제도와 시스템을 올려놓지 못하는 걸까. 제도와 시스템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지만 유독 우리 사회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영웅서사에 기대어 그것들을 완성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우리의 영웅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에게 왜 영웅이 필요한가도 한번쯤 물어봤으면 좋겠다. 

괴물이 되어버린 영웅을 보는 건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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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열어 북한과의 70년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내용의 ‘싱가포르 합의’ 정신이 유효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북한을 상대로 무력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불가침 약속도 재확인했다. 아울러 북한의 대화의지를 긍정 평가하고 조기에 북·미 실무협상을 통해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나가기로 했다.

두 정상이 지난해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정신을 복원한 것은 가장 주목할 대목이다. 미국이 합의 불발로 끝난 2월 하노이 정상회담과 다른 태도로 대북 협상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는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비핵화보다 우선순위에 배치돼 있다. 하지만 합의 이후 미국 내 강경파의 비판에 휩싸인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선 비핵화’에 집착하는 바람에 후속 협상이 장기 교착된 것은 알려진 대로다. 불가침 약속과 싱가포르 합의를 강조한 것은 북한이 제기해온 안전보장 의제에 화답하는 성격도 있어 보인다.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 정신으로 되돌아간다면 북·미 실무협상도 긍정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인터콘티넨털 바클리 호텔에서 열린 9차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정상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65분 동안 회담을 진행했다. 뉴욕 _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다만 회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새로운 방법’이 거론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장해온 ‘리비아 모델’을 비판하면서 “어쩌면 새로운 방법이 매우 좋을지 모른다”고 했다.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에 유연성을 비친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번 회담에서 윤곽이 구체화될 것으로 기대돼왔던 터다. 아울러 대북 제재가 유지돼야 한다는 언급은 있었지만,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등 남북경협에 대해서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망할 건 없다. 임박한 협상을 앞두고 전략과 협상카드를 미리 노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국가정보원은 북·미 실무협상이 앞으로 2~3주 안에 재개될 가능성이 크고, 합의가 도출될 경우 연내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이날 밝혔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전제로 11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할 가능성도 열어놨다. 북·미 협상이 진전될 경우 남북관계도 풀리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될 것이라는 반가운 관측이다. 이 시나리오가 성사되려면 임박한 북·미 실무협상이 성과를 내야 한다. 북·미 양측이 한 발짝씩 양보하는 태도로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나가기를 바란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촉진자 역할을 완수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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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북부지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이 이어지고 있다. 24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17일 ASF가 파주에서 발생한 이후 연천(18일), 김포(23일)로 확대됐다. 24일에는 파주와 강화도에서 또다시 확진사례가 나왔다. 일주일새 5곳에서 ASF가 발생했다. 경기 북부의 방역망이 뚫린 것이다. 그간 당국은 첫 발생지역을 중심으로 10㎞의 방역대를 설정해 한강 이북 접경지역 방역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이 방어벽이 무너진 것은 물론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다.

24일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추가로 발생한 경기 파주시의 한 양돈농가에서 방역당국 관계자들이 농가 출입을 통제하고 돼지 살처분을 준비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더 큰 문제는 전국 확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국 역학조사 결과 ASF는 차량에 의한 전파 가능성이 제기됐다. ASF가 처음 발생한 파주 농장을 방문했던 차량이 2~4차 확진사례가 나온 농장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이들 차량이 경북 등 남부지방까지 운행한 사실이 밝혀져 비상이 걸린 상태다. 

주지하듯이 ASF는 중국과 베트남의 돼지농장을 초토화하고 북한에까지 전파됐다. 북한과 인접한 한국은 ASF 발생을 막을 철저한 대책이 요구됐다. 하지만 예방 방역에 실패해 파주에서 ASF가 발생했다. 더구나 파주에서 처음 발병했을 당시 당국의 조치도 안이했다. 급하게 이동중지명령을 내렸으나 이틀에 그쳤다. 농장들의 경제활동을 감안한 조치였다. 그러나 ASF는 바이러스로부터 돼지를 격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단기적으로 돼지고기 수급에 악영향을 미치더라도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통제가 이뤄져야 하는데 틈이 생긴 것이다. 이와 함께 경기 북부지역 농장 전수조사를 통한 전염병의 실태 파악은 물론 확산단계별 방역대책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ASF는 조기 방역이 성패의 관건이다. 이 기간을 놓치면 끔찍한 사태가 발생한다. 일단 전염되면 100%가 죽는다. 백약이 무효다. 지금 막지 못하면 양돈농가가 초토화될 수 있다. 양돈과 연관된 산업과 요식업 등 서민 경제도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정부가 ASF확산에 재난사태 수준으로 경계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강력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농장 관계자들도 의심사례를 즉시 신고해 조기 차단할 수 있도록 솔선해야 한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피해가 있더라도 ASF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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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무상교육을 위한 법안이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했다.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의결을 거치면 올해 2학기에 고교 3학년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는 무상교육은 내년엔 2학년까지, 2021년부터는 모든 학년으로 확대된다. 고교무상교육의 법적, 재정지원 근거가 마련됐다는 의미가 있다. 

24일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교 무상교육 법안인 초·중등교육법 개정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이 한국당이 퇴장한 가운데 표결에 부쳐지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국회 교육위원회는 24일 고교무상교육을 뼈대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은 국민의 기본권인 교육권을 강화한다는 고교무상교육의 근거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은 재원확보 방안 내용을 담고 있다. 고교무상교육 지원엔 입학금, 수업료, 학교운영지원비, 교과서 대금 등이 포함된다. 이로써 학생 1인당 한 해 160만원가량 가계부담이 줄어든다. 교육위는 이날 고교무상교육 법안을 표결에 부쳐 재석 의원 10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 5명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퇴장했다. 고교무상교육은 원래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었다. 

정부·여당은 당초 2020년 고교 1학년부터 시작해 2022년 전 학년에 시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시행 시점을 6개월 앞당기고 3학년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에 한국당은 투표권이 생기는 고교 3학년을 겨냥한 총선용 정책이라며 반대하다 지난달 돌연 내년부터 고교 전 학년에 무상교육을 실시하자는 안을 내놓더니 표결에 불참했다. 여야 모두 취지엔 동의했고, 시행 시기에만 이견이 있었던 셈이다.  

한국의 고교진학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지만 고교무상교육은 OECD 국가 중 가장 늦었다. 36개 회원국 중 35개국은 이미 시행 중이다. 국민의 기본권인 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은 교육에서 ‘부모 효과’를 최소화하는 첫걸음이자, 빈부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길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등록금을 내지 못한 고등학생이 1만5617명에 이른다. 저소득층, 한부모가정, 농·어업인 등 전체 학생의 40%가량을 지원하고 있는데도 교육복지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넓다. 한국은 민간의 고등교육비 부담률이 OECD에서 제일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고교무상교육으로 한 단계 높아진 교육의 국가 책임성이, 가정형편에 상관없이 대학교육까지 맘껏 받을 수 있는 길로 확대돼 공교육이 튼실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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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 어르신, 올해 1월에 86세의 삶을 마감하셨다. 처음 뵌 건 5년 전 청와대 앞 ‘줬다 뺏는 기초연금’ 도끼상소 행사에서였다. “대통령님, 빈곤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줬다가 빼앗을 거면 차라리 이 도끼로 제 목을 쳐주십시오”라는 그의 외침에 사방이 숙연했다. 이북에서 태어났으나 홀로 피란 내려와 한국 현대사의 여느 민초처럼 살아오다 광우병 촛불에서 학생들을 만난 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단다.

그는 차상위계층으로 당시 기초연금 20만원과 노인일자리사업 20만원 등의 수입으로 살았다. 여기서 매달 고시원비까지 내야 하니 생활은 무척 빈궁하였고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도 자존심과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특히 어려운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줬다 뺏는 기초연금’ 해결 운동에 앞장선 이유였다.

지금 약 40만명의 기초생활보장 수급노인들은 매달 기초연금을 30만원 받지만 다음달 생계급여에서 같은 금액을 삭감당한다. 생계급여가 정부가 정한 기준에서 부족한 금액을 보충해주는 제도이므로 기초연금만큼 생계급여를 삭감해야 한다는 ‘보충성 원리’가 적용된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기초연금이 기초생활보장제도 이후에 시행되다 보니 기초연금으로 인해 노인 일부에서 역진적인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이 겪는 일이다. 이분들은 기초연금을 받아도 같은 금액이 생계급여에서 삭감되니 기초연금이 도입되고 또 인상돼도 자신의 가처분소득은 그대로이다. 기초연금이 오르면 가처분소득이 함께 늘어나는 일반 노인과 뚜렷이 대비된다. 처음에 기초연금이 10만원일 때에 격차가 10만원이었는데 대통령선거 때마다 기초연금이 오르면서 이제는 30만원으로 확대되었다. 근래 분배 격차를 악화시키는 최하위계층의 소득 정체에는 ‘줬다 뺏는 기초연금’도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는 늘 말했다. “아니 나보다 더 어려운 노인들이 기초연금 혜택을 못 보는 게 말이 돼?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 꼭 해결되었으면 좋겠어….” 도끼상소, 기자회견, 촛불집회 등 정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재작년부터 지병으로 거동이 어려워도 더 힘내자며 오히려 젊은 사람들을 격려했으나 안타깝게도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갔다. 지난 5년 내내 정부와 정치권의 식언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기초연금이 시행되던 2014년, 이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최경환 부총리는 추석을 맞아 노인복지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줬다 뺏는 기초연금에 대해) 많이 듣고 있다.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미흡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개선해 나가겠다”고 약속했고, 이듬해에 이완구 국무총리도 국회 본회의에서 “보완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끝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보충성과 형평성, 두 원리의 충돌에서 전자만을 고집했다.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보충성 원리를 내세워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를 기초연금 수혜에서 사실상 배제하는 것은 형식논리에 경도된 비합리적 처사”라며 박근혜 정부를 비판했다. 2016년 총선에서도 “기초생활보장 대상 어르신에게 실질적인 기초연금 혜택 제공”을 공약집에 담았다. 대통령이 시행령만 개정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으니 그가 정권교체만을 손꼽아 기다린 까닭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도 변화는 없다. 야당 시절 그토록 비판했던 보충성 원리를 스스로 앞세우니 정말 정권이 교체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변명의 논리는 더 구차하다.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 지원이 더 급하니 여기에 정책을 집중해야 한단다. 그는 개탄했다. 촛불정부가 우리 사회 절박한 두 집단을 두고 양자택일을 말할 줄은 몰랐다고.

그의 동료 노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는 폭염 속에서 청와대까지 거리행진을 벌였고, 올해는 폐지 리어카까지 끌고 가서 대통령에게 의견서를 전달했다. 국회와 언론까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가세하자 마침내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을 전액 또는 일부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몸과 목소리는 더욱 쇠약해졌지만 웃음을 지어보였다. 모처럼 기대해도 될 듯하다며. 

이제 그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부끄럽게도 그의 바람은 또 무산되었다. 정부는 다시 모르쇠로 돌아섰고 내년 예산안에도 ‘줬다 뺏는 기초연금’ 해결을 위한 항목은 담겨 있지 않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또 속았다며 울분을 토하실 듯하다. 스카이캐슬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너그러우면서 왜 가난한 노인에게는 이토록 매정하냐고. 포용국가를 주창하면서 말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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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자 경향신문에 이양진 민주노동 민주일반연맹 위원장이 쓴 ‘문재인 정부의 도로공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제목의 기고가 실렸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추진돼 도로공사가 그 추진과정의 전략단위로 선정됐으나, 이강래 도공 사장과 정규직의 기득권 유지 욕심이 카르텔을 형성해 일이 틀어졌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한다.  

한국도로공사는 지난 9일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대에 의해 불법 점거됐다. 중요 국가기간망 중 하나인 고속도로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농성장으로 변했다. 국민안전시설을 책임지는 공사 직원들은 공권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시위대와 마주해야 했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공사 직원들의 인권은 갑과 을의 논리에 가려 외면당하고 있다.

19일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11일째 본사 점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현 정부 들어 도공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국민의 생명과 밀접한 업무를 수행하는 안전순찰원을 직접고용했다. 하지만 요금수납원의 경우 향후 기술발전 등으로 기능조정이 예상돼 정규직화 예외대상이었다. 그러나 도공은 수납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노사 및 전문가협의회’를 통해 자회사 방식의 정규직화에 합의했다. 자회사 결정은 6514명을 직접고용할 때 예상되는 경영악화와 구조조정 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한국도로공사서비스(주)는 이 합의에 따라 출범한 자회사다. 또 요금수납원의 78%인 5097명이 선택한 일터다. 따라서 자회사를 부정하는 민주노총의 주장은 노사합의와 근로자들의 자율의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노사합의에는 자회사 미동의 근로자의 경우 소송을 통해 직접고용하고 직무는 현장 도로관리 업무인 조무직을 부여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공사는 최근 대법원이 도공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한 745명 중 자회사 전환 동의, 정년도과, 파기환송 인원을 제외한 499명을 직접고용키로 했다. 직무는 경영권 재량으로 인정받은 대법원 판례와 노사합의에 따라 조무직을 부여할 계획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이번 판결을 현재 1·2심이 진행 중인 1100여명 모두에게 적용하고 직무도 수납업무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은 개별소송이란 점에서 법의 확대적용이 어렵다. 특히 2015년 이후 입사한 630명은 파견적 요소가 제거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일해왔기에 최종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또 1·2심은 임금차액청구소송도 함께 진행되고 있어 도공이 소송을 포기할 경우 배임과 형사소추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자회사 근로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소지가 있다.

민주노총은 줄곧 자회사 반대 원칙을 고수하며 자회사는 또 다른 용역회사라 주장한다. 하지만 도공의 자회사는 고속도로서비스 전문기관으로 성장한다는 비전을 갖고 출범했다. 요금수납과 콜센터, 교통방송 등 업무범위도 광범위하다. 신분보장을 위한 ‘기타 공공기관’ 지정도 추진된다. 정규직으로 인위적 고용감축의 불안에서 자유롭다. 정년은 61세다. 임금도 기존 용역업체 대비 평균 30% 인상됐다. 용역회사가 아닌 것이다.

노동운동은 달라져야 한다. 이런저런 명분과 구실을 대면서 불법시위를 한다면 국민의 공분을 살 수밖에 없다. 또 기업 활동을 위축시켜 그 피해를 국민이 떠안게 된다. 무엇보다 법과 원칙을 무시한 결과는 수많은 청년구직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것이다. 민주노총은 자회사를 호도하지 말고 불법점거와 시위가 아닌 정상적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강훈 | 한국도로공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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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10년 전 화성외국인보호소였다. 말로만 듣던 외국인보호소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었다. 가을볕이 뜨거워서 버스에서 내려 걷는 동안 이마에 땀이 맺혔는데, 막상 그와 마주한 곳은 서늘했다. 면회실 철창 안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뭣 하러 여기까지 왔냐고, 오는 데 멀지 않았냐고, 딸은 잘 있냐고. 그는 안부를 물을 수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할 수도 없어 머뭇대는 철창 밖의 사람을 도리어 걱정했다. 가물가물한 그날의 기억에서 선명한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르게 낮았던 그의 목소리. 그런데 그가 추방되기 바로 전날 보호소를 갔다는 이는 그의 옷차림새가 생각난다고 했다.

“맨날 까만 와이셔츠를 입었잖아요. 긴 소매를 팔꿈치까지 잘 접어서. 그런데 보호소에서는 추레한 추리닝을 입고 있는 걸 보니까 눈물 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와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까만 와이셔츠가 아니었다. 흰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입은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보니 동대문 봉제 공장에서 오래 일했다는 그는 항상 잘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었다. 직접 다려 입었던 것일까? 4년 동안 함께 일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일하다가 틈날 때 커피를 마시며, 밥을 먹으며 그와 나눈 시시껄렁한 대화에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낯선 땅에 와서 살아낸 18년의 삶이 농담처럼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그가 이 땅에서 강제 추방될 때 함께 분노했지만, 그의 쓸쓸함과 슬픔을 깊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영화 &lt;안녕, 미누&gt;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이주노동자였으며, 이주노동자 인권 활동가였으며, 방송인이었으며, 스탑 크랙다운을 외친 가수 미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꿈꾸고 사랑한 미노드 목탄을 만날 수 있었다. 뜨겁고, 아팠고, 외로웠을 긴 시간을 묵묵히 감당해낸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뒤늦게 그가 그리웠다. 네팔에 갔을 때 길이 어긋나지 않았더라면, 작년 가을 잠깐 이 나라에 왔을 때 만났더라면, 그와 나란히 앉아 함께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부질없는 후회를 하면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안녕, 미누.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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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과거 활동이 쌓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듯이 미래의 모습은 끊임없이 진행되는 현재 활동의 축적 결과와 다르지 않다. 현재의 활동은 현 상황에 대한 인식 여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현 상황 인식은 과거에 대한 인식 여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국가 차원의 과거를 국사라 할 때 국사 인식은 국민 개개인의 현 상황 인식 및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사 인식은 자기 인식이다. 자기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불태라는 손자의 명언도 있거니와 바른 국사 인식은 국가의 안위와도 관련 있다. 바른 국사 인식은 바른 활동의 전제가 되고 현실의 가당찮은 주장을 약화시켜 국력 소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국가 차원의 바른 상황 인식을 위해서는 다수 국민의 바른 국사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민의 올바른 국사 인식 여부는 일차적으로 공교육의 책임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3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유실된 시간과 강역의 복원이다. 고조선과 발해(원명은 대진국) 역사의 교과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연구성과로 상당 부분 복원된 고조선사가 대폭 교과에 반영되어야 한다. 상고사에 대한 선명한 인식만으로도 우리의 정체성은 한결 고양될 수 있다.

둘째, 식민사관의 척결이다. 한반도 주변 강국인 중국과 일본의 역사침탈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 예다. 침탈국의 이익을 위해 피침탈국 역사가 왜곡, 축소, 종속되는 식민사관은 용납될 수 없다. 가관인 것은 우리 학계 내 식민사관을 방조, 뇌동, 추종하는 세력의 태도다. 한사군재한반도설이나 임나일본부설 등 학설의 미명 아래 난무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은 원천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셋째, 편파성의 극복이다. 역사기록은 어차피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하더라도 명백한 불공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상과 이념을 빌미 삼아 과거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 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의 혁혁한 공적이 과소평가된다면 우리의 역사 이해는 지극히 분열적이고 편벽될 수밖에 없다. 독립투쟁의 공적이 사상과 이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닌 이상 공정한 잣대로 항일독립투쟁사를 온전하게 재조명해야 한다. 편파적인 국사 인식은 현 상황에 대한 파행적인 인식과 바르지 않은 활동을 초래하여 우리의 미래 모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국사 공교육이 미흡하다면 개선을 촉구한다. 바른 국사 교육은 바른 국사교과서로부터 비롯한다. 바른 국사교과서를 편찬할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바른 국사를 교육할 수 있는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 국사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른 국사 교육이 바른 상황 인식 및 활동으로 이어지려면 한 세대 이상 걸린다. 갈 길이 멀다.

<김범창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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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용하는 어휘 중에 의외로 의미의 외연과 유래가 간단치 않은 경우들이 적지 않다. ‘구차(苟且)하다’를 한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살림이 몹시 가난하다’가 첫 번째 뜻으로 나온다. 중국어사전에는 ‘그럭저럭 되는 대로 하다’, 일본어사전에는 ‘일시적이다’가 통용되는 의미로 등재되어 있어서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장 이른 시기의 출전으로 알려진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글에서는 통치자에게 ‘구차한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이익에 좌우되지 말고 굳건해야 함을 강조하는 문맥이다. 한(漢)나라 순열(荀悅)은 진(秦)이 14년 만에 멸망한 이유로 ‘구차한 정치’를 들었는데, 성현이 제시한 보편적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많이 달라 보이던 의미들이 대체로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인 편의에 따라 대충 봉합하며 지나치는 태도’로 수렴된다. 한국어사전의 두 번째 뜻인 ‘말이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과 그 주된 용례인 ‘구차한 변명’ ‘구차한 목숨’ 등의 표현 역시 일맥상통한다.

“성현의 도는 ‘구차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18세기 작가 조귀명이 불구(不苟)를 호로 삼은 윤득형을 위해 지어준 <불구설>의 첫 문장이다. 그는 구차함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없음’으로 풀이했다. 무릎 꿇어야 할 때는 누울 생각이 나지 않고 서 있어야 할 때는 앉을 생각이 나지 않아야 구차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 그저 무릎 꿇고 서 있는 동작을 예법에 맞추어 억지로 행하는 것으로는 구차함을 면치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구차함과 구차하지 않음의 구별은 외면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떳떳한 원칙이 체화되어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 비로소 구차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이 원칙인지 생각조차 않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만년의 박지원은 병풍에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 여덟 글자를 크게 써두고, “세상 모든 일이 다 이 여덟 자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해오던 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변통하면서 문제를 덮어두는 태도를 경계한 말이다. 우리는 왜 그다지 빈궁하지 않은데도 이렇게 늘 옹색하고, 그 옹색함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자리에서 구차하지 않은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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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은 오랜 관심사의 하나였다. 사회학이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삶과 사회를 모색한다.

생태학 저작들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책은 미국 산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가 쓴 <모래 군(郡)의 열두 달, 그리고 이곳저곳의 스케치>(1949)다. 이 책 제2부에는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에세이가 나온다. 레오폴드가 산림감독관으로 일했을 때 겪었던 늑대 사냥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즉각 (늑대) 무리에게 총알을 퍼부었다. (…) 총이 비었을 때 늙은 늑대는 쓰러졌고, 새끼 한 마리는 빠져나갈 수 없는 돌무더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끌고 있었다. 늙은 늑대에게 다가간 우리는 때마침 그의 눈에서 꺼져가는 맹렬한 초록빛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눈 속에서 아직까지 내가 모르는 오직 늑대와 산만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멸하는 초록빛 불꽃을 통해 레오폴드가 발견한 것은 인간이 아닌 늑대와 산만이 알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었다. 레오폴드는 인간을 넘어선 생태계 전체의 관점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말로 은유한다. 늑대와 가문비나무는 물론 거센 강물과 침묵하는 산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레오폴드의 이 선구적 통찰은 환경운동가 존 시드와 심층생태학자 아르네 네스 등이 참여한 저작 <산처럼 생각하기>(1988)의 생태학적 계몽으로 부활한다.

생태학적 계몽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 및 사고의 근본적 변화를 요청한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자연을 인간의 욕구충족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한,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명권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라는 생태학적 계몽에 입각하여 생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 앞에 우리 인류는 위태롭게 서 있다. 이 계몽과 극복은 모든 이념을 아우르는 인식틀이자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는 기후변화다. 기후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폭염·태풍·홍수·한파 등 너무도 분명하다. 생물다양성 감소, 해수면 상승, 미세먼지 악화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기후변화’는 ‘기후위기’란 말로 대체되고 있다. 기후가 처한 현실의 긴박함과 비상상태를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기후위기 계몽에는 청소년들의 역할이 크다. 특히 열여섯 살의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이 눈부셨다. 툰베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등교 거부 운동을 주도했고, 지난 8월에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태양광 요트를 타고 보름 동안 대서양을 횡단해 ‘글로벌 기후 파업’에 참석해 힘을 더했다. 23일 열린 유엔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는 각국 정상들 앞에서 “당신 지도자들은 우리 모두를 실패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20일부터 오는 27일까지 세계 곳곳에서 글로벌 기후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1일 330개 단체로 이뤄진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서울 대학로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해 지속 가능한 저탄소 경제로의 조기 전환을 위한 방안 모색, 녹색기후기금(GCF) 공여의 2배 증액, 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P4G) 정상회의의 2020년 서울 개최를 약속했다. 더해 ‘세계 푸른 하늘의 날’ 지정을 제안했다.

2009년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위험의 실체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에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기후변화의 예방 및 대응책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현재 변화는 위기로 바뀌고, 그 위기는 다시 대재난으로 커질 가능성이 높다. 기후위기는 결국 정치적 결단과 행동을 요구한다. 기후행동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재적 과제다.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생명의 지구를 물려줘야 할 엄중한 책임이 우리에겐 존재한다.

<모래 군의 열두 달, 그리고 이곳저곳의 스케치>로 돌아가면, 레오폴드는 말한다. “오직 산만이 늑대의 울부짖음을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 왔다.” 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 주인은 인간과 늑대와 산을 모두 자신의 식구들로 넉넉히 품어 안은 지구 그 자체이자 전체다. 이 아름다운 생명의 지구를 생각하고 또 행동할 수 있는 한 주가 되길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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