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문진 어시장에 갈 기회가 되면 나는 오징어를 유심히 관찰한다. 피부의 갈색이 옅어지면서 색이 달라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심심풀이 땅콩과 함께 오징어를 흔한 먹거리로 취급하지만 바다에서 유영하는 오징어나 문어 또는 갑오징어가 주변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색을 바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이들 두족류 동물은 어두운 바위에 앉으면 진한 갈색으로, 모래 위를 헤엄칠 때는 옅은 모래 빛으로 자신의 피부색을 바꾼다. 

2019년 3월 미국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학 연구진은 오징어나 갑오징어가 피부 층층이 다양한 색소 주머니를 갖고 있으며 빛의 밝기에 따라 이 소기관의 크기를 변화시켜 색소의 농담(濃淡)과 패턴을 조절한다는 논문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했다. 빛을 감지한 오징어의 뇌가 신호를 보내면 색소 주머니를 둘러싼 근섬유가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일이 진행된다. 보호색을 띠는 과정에 오징어의 신경계와 세포 골격 단백질 사이의 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군인이나 화장품 업계 종사자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군복이나 전투기의 색을 조절하여 위장술에 사용할 수 있는지 타진해본다거나 빛에 따라 피부의 색조를 조절해보려는 것이다.

신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징어를 관찰할 때 아마도 글루탐산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나는 색소 주머니를 둘러싼 근섬유가 수축하고 이완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한때 내 연구의 주제가 혈관의 수축과 이완에 관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근육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뼈와 함께 생명체의 이동에 관여하는 골격근과 혈관 혹은 소화기관을 움직이는 평활근이 그것이다.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히는 협심증 환자들은 급할 때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 알약을 혀 아래에 집어넣는다. 구강 점막에 녹아 약물의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은 관상동맥 평활근 세포를 이완하여 혈관을 넓히고 혈액이 잘 흐르게 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은 무기 그리고 의약품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흥미로운 화합물이다. 알프레드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물질의 의약품으로서의 기능은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 다이너마이트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몇 명이 자신들이 일하지 않는 주말에 협심증 증세가 심해진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이 현상에 주목한 임상 의사들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의약품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정작 협심증을 앓았던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약으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무기를 약으로 쓸 수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훗날 과학사가들의 ‘펜놀림’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니트로글리세린처럼 혈관을 확장하는 물질을 우리 세포가 만든다는 점이다. 혈액을 전신으로 보내 산소를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너지를 써서 세포 안의 효소가 만들어내는 혈관 확장 물질은 바로 일산화질소(nitric oxide)이다.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물질을 우리 몸에서 만들고 있다는 점이 다소 의아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 세포가 만든 이 기체 화합물은 생성된 곳 근처에서 국소적으로 작용하고 빠르게 분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에 직면하면 세포는 이 화합물을 즉시 만들어야 한다. 혈관을 확장시켜 산소를 공급할 때 일산화질소는 산소와 협조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세포 안에서 산소와 경쟁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극명한 예는 반딧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름밤을 수놓는 아름다운 반딧불의 정체는 이들 기체 화합물 사이의 경쟁 구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개똥벌레는 세포 호흡에 사용되는 산소를 불씨 삼아 빛을 낸다. 호흡 단백질에 일산화질소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세포는 산소를 호흡 과정에 사용할 수 없다. 갈 곳 없는 산소가 반딧불 불씨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머지않아 곧 반딧불이 꺼진다. 그래서 반딧불은 깜박거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2001년 텁스대와 하버드 의대 공동연구진은 반딧불의 불빛(lantern) 자체가 호흡 단백질에 자리 잡은 일산화질소를 몰아낸다는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지에 발표했다. 이렇게 산소가 다시 호흡에 참여하면 반딧불 불씨는 가뭇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포의 호흡 단백질에 결합하는 성질을 가진 화합물이 일산화질소처럼 반딧불을 밝힐 수 있으리라 추론할 수 있다. 동물에 치명적인 독성 물질인 청산가리를 소량 처리하면 반딧불이 밝아진다. 청산가리가 세포의 호흡 단백질에 결합하기 때문이다. 연탄가스 중독 물질인 일산화탄소도 호흡 단백질에 찰싹 달라붙어 반딧불의 불씨를 키울 수 있다.

몇 가지 예에서 짐작하듯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일산화질소와 일산화탄소를 만드는 효소 단백질이 있다. 세균도 예외는 아니다. 일산화질소는 아르기닌 아미노산을 변형시켜 만든다. 반면 일산화탄소는 적혈구 헤모글로빈 분자에 하나씩 박혀 있는 헴 분자를 재료로 만든다. 적혈구 하나가 파괴될 때마다 약 8억개의 헴이 분해되고 그만큼의 일산화탄소 분자가 생성된다. 이 두 기체 분자 모두 인간의 몸 안에서 호흡을 조절하고 혈관을 확장하며 신경을 전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오징어 색소 주머니를 수축하고 이완하는 과정에도 물론 참여한다.    

요즘 과학자들은 이들 기체 화합물을 의료용으로 사용하려고 시도한다. 세포나 조직의 호흡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 활성 산소의 생성을 차단하면 장기이식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산화탄소와 일산화질소에 천형처럼 부여된 독성 물질이라는 오명은 최근 생겨난 것이지만 사실 이들 두 기체는 생명의 역사 초기부터 오랫동안 세포의 안녕에 공헌해 왔다. 이 두 화합물 모두 호흡이나 광합성 과정을 조절하는 아주 오래된 물질이다. 생물학에서는 오래 버텨 온 것일수록 더 중(重)하고 각별히 아름답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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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잃어버렸다. 지하철 선반 위에 둔 것을 잊고는 그냥 내렸다. 10분쯤 걷다가 무언가 허전해서 돌아보니 항상 메고 다니던 가방이 없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상수역에서 나의 가방을 싣고 응암역 방면으로 출발한 6호선 지하철은 은평구를 순환하고 다시 상수역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하철에 이것저것을 많이 두고 내렸지만 순환선인 2호선을 주로 탄 덕분에 한 바퀴를 돌아온 지하철을 다시 타고 분실물을 찾곤 했다. 이게 뭐가 자랑이라고 적고 있는지 민망하지만, 순환선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열차가 돌아나오는 시점만 잘 맞춘다면 대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마포구청역쯤을 지나고 있을 지하철의 위치를 감안해 새절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11시57분에 상수역을 지난 지하철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고 하자 역무원은 나에게 “몇 다시 몇 번에서 내리셨나요. 그걸 모르면 찾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는 나에게 인력이 부족해서 지하철이 멈추었을 때 그 자리만 빠르게 찾아보고 나올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대략 7-4번쯤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몇 분 후, 역무원에게서 “가방이 없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역마다 전화해서 찾아달라기도 미안해서 나는 그 지하철이 다시 상수역을 통과하는 시간을 물었다.

상수역에 도착한 나는 내가 2-1번에서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새절역의 역무원이 가방을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찾을 것을 자신하며 지하철에 올라 선반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8칸을 모두 돌아다녀도 나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가방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가방의 노트북에는 몇 달간 쓴 단행본 원고가 들어 있었다. 온라인에 문서 저장이 되는 클라우드 같은 것을 사용하다가 구독료가 아까워 갱신하지 않았는데, 그 몇 달치가 모두 날아간 것이다.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에 물건을 놓고 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다. 6호선 유실물센터에 분실물 등록을 했고, 합정역부터 응암역까지 10여개의 역 사무실에 검은색 가방이 들어온 것이 있는지 물었고, 경찰서에 역플랫폼의 CCTV를 확인할 수 있을지를 물었고, 지하철경찰대의 일이라고 해서 다시 거기에도 전화했다. 여러 역의 CCTV를 확인할 방법은 없고 각 역에 경찰관과 함께 동행해 요청해야 한다고 해서, 여러 사람을 고생시킬 그 방법은 그만두었다.

하루가 지나고, 가방을 찾는 일은 거의 포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분실물이 모두 모인다는 ‘LOST112’에 접속해선, 가방 같은 것이야 아무래도 괜찮아졌다. 거기엔 분 단위로 누군가가 잃어버린 가방, 지갑, 휴대폰 같은 것들이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노상에서 주운 현금, ○○경찰서” 하는 것도 있었다. 잃은 사람의 마음도, 주운 사람의 마음도 그 한 줄에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물건은 사면 그만이고 원고는 다시 쓰면 그만이지만 이처럼 서로가 연결돼 있음을 일상에서 감각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가방의 비용은 그것으로 정말이지 충분히 보상받았다. 여기에 접속하고 나면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것이다. 다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다짐보다도 당신의 무엇을 반드시 찾아주겠다는 심정이 되고 만다.

상수역의 역무원을 비롯해 가방을 찾는 동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준 경찰, 공익근무요원, 분실물센터 직원 등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가방은 잃었지만 덕분에 그보다 소중한 무엇을 얻었다. 그에 더해, 몇 달 동안 쓴 원고가 정말 별로여서 가방이 스스로 도망갔다고 믿기로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김민섭의 가방을 발견한다면 언제라도 연락주었으면 한다. 응원하는 야구팀의 민트색 배지가 달린 검은색 백팩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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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가 2년 전 출범할 때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다. 4차위가 내놓은 기본 정책방향 대부분이 창조경제의 바탕이 된 ‘지능정보사회 종합대책’과 겹쳤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했다. 벤처업계도 “창조경제나 혁신경제나 4차산업이나 다 개념은 같다”고 말한다.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창조경제의 실패를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4차위가 내놓은 대답은 ‘사람’이었다. 기술과 산업의 변화를 따라가는 정책을 발굴하되, 그 논의의 중심에 사람을 둔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인 “사람이 먼저”와도 어울렸고, 때마침 ‘우버’ 등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노동소외 현상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한창 제기되던 시기였다. 4차위에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의 변화 등을 연구하는 별도의 분과를 두고 노동부 장관이 이를 맡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아 4차위는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해 여름부터 카풀앱(서비스)이 본격화되면서 기술 발전과 사람이 부딪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벤처업계는 카풀앱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 사업 모델로 꼽은 반면에 택시 기사들은 극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4차위가 팔을 걷어붙였다. 끝장 토론 격인 ‘해커톤’을 통해 양측을 불러 해결책을 찾아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이 해커톤 참여를 거부하면서 4차위의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들이 참여를 거부한 데도 이유가 있었다. 4차위 민간위원 상당수는 벤처·IT업계 전문가나 종사자들이었고, 정부는 카풀앱을 허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고 다녔다. 4차위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부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문제를 방관했다. 4차위의 위상도 1년 만에 쪼그라들었다. “정책의 옥석을 가린다”던 4차위는 어느새 ‘자문기관’이 돼 있었다. 대통령 입에선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사라졌고, 4차위 회의에 참석하는 장관 숫자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연말이 되자 택시 기사들이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 ‘사람’이 죽어나가자 정부가 부랴부랴 움직여 올봄에 합의안 비슷한 것이 나왔다. 4차위 내부에선 정부 측 위원들의 무관심과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의 관심은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경제 살리기’에 있었다. 미래의 문제를 고민하고 논의하기보다 당장 발등의 불부터 끄기로 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혁신성장’이 등장했고, 어느 한 공무원의 서랍 속에서는 낡디낡은 ‘수소경제’가 새것인 양 포장돼 나왔다.

그리고 4차위가 출범 2주년을 막 지난 시점인 지난 25일, 4차위는 ‘4차 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이라는 발표 자료를 내놓았다. 권고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재’라는 말이다. “불확실성이 높은 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의 주체인 ‘인재’를 육성하고, 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주 52시간제 등 노동제도 개선, 대학 자율화, 산업별 맞춤형 지원 등 정부가 충실한 지원자가 돼야 한다.”

출범 초기 4차위가 강조했던 ‘사람’이 어느새 ‘인재’로 둔갑했다. 인재도 물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겠지만, 문 대통령이 말하는 ‘사람’이, 4차위가 중심에 둔다 했던 ‘사람’이 ‘인재’는 아닐 것이다. 4차위는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 52시간제와 같은 노동제도가 걸림돌이라고 적시했다.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만든 게 주 52시간제 아니었던가. 인재를 위해 사람을 포기하잔 말일까. 그러고보니 4차위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미래를 그린다고 했으면서 한번도 이에 대한 보고서나 권고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구태여 세어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전체 19페이지의 이 권고안에서 ‘사람’이란 단어는 딱 한번, ‘혁신’이란 단어는 79번 나온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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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다가오는지 아침저녁 쌀쌀함이 배나 더하다. 밤새 내린 이슬로 아침 마당이 촉촉하다. 뽀글이 점퍼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만날 찾아 입게 된다. 아이들아! 대학에 합격하려면 ‘재수 없는 꿈’을 꾸면 된단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야 또 많단다. 

입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야무지게 책상에 달라붙어 책을 읽곤 한다. 그러다보면 하루가 금세 휙 지나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깐. 가르치는 일보다 배우는 일이 훨씬 즐겁다. 매주 설교를 하는 목사가 아니라서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입으로 뱉은 말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유란 그래 말을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먼저 살 때 차오르는 기쁨이 맞다. “울안의 닭은 배불러도 솥 안에 삶아지고, 들판의 학은 배고파도 천지가 자유롭다.” 지공 선사의 시를 가슴에 새긴다. 

남들보다 프로필이 장황한 편인데, 한마디로 줄이면 자유인. 사실 아무것도 되지 않고자 싸워왔는데, 그만 이력이 늘었다. 인도의 현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자유인은 사실 사제복이나 사타구니쯤 가리는 남루한 옷을 입거나 하루 한 끼 식사하는 이러이러한 인간이 되고 저러저러한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무수히 선서를 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적으로 단순하며 ‘아무것도 안되려는 사람’이다. 그런 이성은 장애물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무엇을 향한 전진이 없기 때문에 놀라운 수용력을 지닌다. 이로써 은총과 하느님과 진리, 원하는 모든 것을 지닐 능력을 가지게 된다.” 

아무것도 안되려는 사람, 자유인들이 있어 예술도 있고 종교도 불을 밝힌다.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묻자 과학자, 장사꾼 쏟아지는데 한 여자아이가 말했어. “결혼해서 애 낳고 소박하게 살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럼 저는 이 친구가 애 낳는 데 협조하면서 소박하게 살래요.” 힛, 그리 살아도 뭐 둘이 좋다면야. 우리 사회는 이제 이 소박한 꿈도 꾸기 힘든 비혼과 저출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대범한 자유인들이 눈에 띄지도 않는다. 닭장에 갇혀 와글다글 살다가 솥 안에 삶아지기 일보 직전.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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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에는 주인공 허숭이 의사와 다투는 대목이 나온다. 의원을 찾은 허숭이 마을 환자들을 치료해 달라며 왕진을 청하자, 의사는 대뜸 선금을 내라고 큰소리친다. 게다가 차비는 환자가 부담하고 자동차가 닿지 않는 곳은 두 배의 진료비를 내야 한다고 하자, 허숭은 “그러면 가난한 농민들이 병이 나면 어떡하느냐”며 따진다. 이른바 왕진을 둘러싼 소동이다.

왕진(往診)은 의사가 직접 환자의 집을 찾아가 진료하는 일을 말한다. 의원이 드물고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옛날, 왕진은 의사 진료의 전부였다. 가죽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의 모습은 ‘인술의 상징’으로 비쳤다. 왕진은 최근까지 지속됐다. 춘원이 소설을 쓰던 1930년대만 해도 전체 진료 건수의 30%를 차지했을 정도로 성행했다. 그러나 의료 행위가 병·의원 내 진료 위주로 개편되고 응급의료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왕진은 197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다. 

급속한 고령화와 함께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왕진이 부활하고 있다. 왕진 제도는 일본, 독일 등 의료선진국에서 먼저 소환됐다. 일본의 경우 의사가 환자 집을 찾는 왕진 건수가 연간 1000만건을 넘어섰다. 독일은 패밀리 닥터에 해당하는 ‘가정의’가 가정을 방문해 환자를 치료하고 진료기록을 관리한다. 미국은 노인의료보험 제도인 메디케어를 통해 방문진료를 지원하고 있다. 

정부가 30일 의사의 방문진료 수가를 올리는 내용의 ‘일차의료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의결했다. 의사에게는 왕진 1회당 8만~11만5000원의 진찰료를 받게 하고, 환자는 이 중 30%만 부담하는 방안이다. 의사협회는 진료 수가가 낮다며 반발하고 있다. 왕진의 수가에 외래 환자를 놓치는 기회비용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진료가 자선사업이 아닌 만큼 의사들의 요구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왕진은 보행 곤란자, 취약지 거주자 등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또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하는 진료여서 첨단장비를 이용한 원격진료보다 오진율을 낮출 수 있다. 인술의 정신에 맞고 시대 요청에도 부합한다. 현대판 왕진 제도가 정착되도록 정부와 의료계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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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부지법 제13형사부는 30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딸 등의 부정채용을 지시한 혐의(업무방해)로 기소된 이석채 전 KT 회장에 대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2012년 신입사원 공개채용 과정에서 11명의 부정채용을 지시해 KT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다. 채용비리는 기회 균등이라는 사회정의를 무력화하는 반사회적 범죄다. 이런 점에서 이 전 회장 등에게 선고된 형량은 결코 무겁다 할 수 없다. 

재판부는 “부정채용으로 KT는 신뢰를 잃었고, 수많은 지원자들에게 큰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줬다”고 했다. 당연한 지적이다. 당시 KT의 공채 경쟁률은 81 대 1에 달했다. 그런데 ‘힘센 부모나 친척’을 둔 지원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자격이 없는 직원을 채용한 기업도 손해지만, 부정채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이 겪은 분노·좌절 등 사회적 손실은 측량조차 하기 어렵다. 

이석채 전 KT 회장. 연합뉴스

재판부가 기업의 채용 재량권을 무한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것도 의미 있다. KT가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기업이고, 이 전 회장이 대표이사라고 해도 채용 재량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 회사에서 내가 사람 뽑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하는 민간기업의 빗나간 채용 관행에 대한 경고다. 채용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하며 어떤 반칙·특권도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는 상식을 재확인한 셈이다.


주목할 것은 “이 전 회장이 청탁을 받고 이를 인재경영실에 전달하고 합격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등 부정채용에 가담했다”는 재판부 판단이다. ‘딸의 부정채용’을 뇌물로 보고, 그 대가로 이 전 회장의 2012년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막아줬다며 검찰이 김 의원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한 사건도 같은 재판부가 심리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전 회장의 뇌물(딸의 부정채용) 공여 혐의를 뒷받침하는 같은 재판부 판단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김 의원 딸 채용비리 정황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반박할 것이 있다면 증거를 제시하고 무죄를 주장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김 의원은 최근까지 “검찰이 증언 교사를 했다” “정권이 김성태 죽이기를 하고 있다” 등 음모론을 멈추지 않고 있다. 김 의원은 이제라도 정치공세를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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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법원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지 30일로 1주년을 맞았다. 당시 대법원은 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11 대 2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며 도리어 한국을 상대로 경제보복을 강행했다. 이후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한 한·일관계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1년이었다. 

이춘식씨가 30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초등학생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일제의 식민지배와 신일본제철의 반인도적 행위로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60년 넘게 기다린 끝에 2005년 한국 법원에 첫 소송을 제기했고, 13년여 만에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사이 원고 4명 중 이춘식씨 혼자 생존해 있다. 1년이 되도록 법적으로 인정받은 권리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게다가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 절차가 중단된 상태이다. 자산 매각을 위해서는 일본 기업에 압류명령서를 보내야 하는데 일본 외무성이 특별한 사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를 반송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나 다름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일본 정부의 비상식적인 입장 탓이다. 일본 정부는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국가 간 협정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는 국제인권법의 기본을 무시하고 있다. 1991년 야나이 슌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등도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금 현금화 조치가 연말이나 내년 초에 마무리될 수 있다. 일본 기업의 자산 강제 매각이 현실화하면 한·일 갈등은 한층 더 격화된다. 그런 상황에 이르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난 24일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평행선을 달리던 양국 관계가 이낙연 국무총리와 아베 신조 총리 회담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현실적인 방법은 한국 정부가 제시한 ‘1+1’(한·일 기업의 자발적 참여로 위자료 지급)안을 토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양쪽 입장을 절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일본 정부가 한국이 먼저 입장을 달리해야 한다는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12월에는 한·중·일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양국은 갈등 해결의 접점을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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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조국 파문’에 대해 “여당 대표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면서 대국민사과를 했다. 이 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이 검찰개혁이란 대의에 집중하다 보니 국민, 특히 청년들이 느꼈을 불공정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좌절감은 깊이 있게 헤아리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가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전 법무장관이 사퇴한 지 16일 만이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30일 국회에서 열린 제11차 정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이 대표의 사과는 때늦은 감이 있다. 그나마도 최근 당내에서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갈 수는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조 전 장관 지명과 사퇴 과정을 겪으며 야당에 밀리지 않겠다는 진영논리에 빠져 ‘조국 비호’ 입장을 강하게 고수해왔다. 그 맨 앞에 선 사람이 이 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다. 그러나 결국 조 전 장관은 사퇴했다. ‘조국 이슈’로 추락하던 당 지지율은 조 전 장관 사퇴 이후 반등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조 전 장관 임명을 고집했던 여당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확인시켜주는 지표다. 이 대표는 두 달여간 온 나라에 혼란과 갈등을 초래한 데 대해 좀 더 일찍 머리를 조아리며 반성했어야 한다. 

‘조국’ 이후 정국을 어떻게 수습하고 끌고 나갈 것이냐의 문제는 민주당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 등 여권 전반에 해당되는 얘기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사과한 것이 전부이고, 이낙연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야당 의원 질의에 떠밀리듯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을 뿐이다. 그러고는 끝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청와대 참모들이 국정 보좌 기능을 점검하고 반성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민주당은 말만 집권여당일 뿐 청와대에 시종 끌려다니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줬다. 이러고서야 제2, 제3의 ‘조국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책임을 지라는 게 무조건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얘기가 아니다. 총선을 6개월 앞두고 지도부를 교체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조국 정국’에서 당과 청와대가 시민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였는지, 민심을 전달하고 조언하는 참모 기능은 제대로 작동됐는지, 여권 내부의 의사 결정 시스템은 정상적인지 등 그간의 국정운영 방식을 하나하나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이 대표는 “지난 두 달 반 동안 국민들도 많이 지치셨다”고 했다. 그걸 안다면 한 줄 사과로는 부족하다. 더 반성하고 쇄신하고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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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연기파 배우를 보며 엄마가 말씀하신다. “저분 신인 시절에 진짜 연기 어색했지.”

옛날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신체 어딘가 간질거리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소위 ‘발 연기’라는 걸 하는 배우가 많고, 주연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훈련된 배우층이 두껍지 않던 시절이라 외모가 좋으면 연기력이 부족해도 주연을 시켰기 때문이다. 내공 탄탄한 주인공들뿐 아니라 재연 드라마의 무명 배우들, 떼로 달려드는 좀비 역할의 엑스트라 연기조차도 흠잡을 데 없는 요즘과는 격세지감이 크다.

BTS를 비롯해 연예계가 이끄는 한류 열풍의 배경엔 전문적인 시스템이 있다. 신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수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온 준비된 인재라는 것쯤은 이제 상식이다. 예능의 위상이 올라가니 더 많은 실력자들이 몰리고, 다시 질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세계적 영화제가 친근해지고, 작품도 다양해지니 다소 아쉬운 외모로 조연에만 머물던 진짜 연기파들이 각광받는다. 연기 하나로 잘생김도 창조해내는 ‘신 스틸러들의 전성시대’다. 여전히 지나친 상품화, 불법, 불공정의 그늘이 있지만 발전의 속도는 빠르다.

어느 분야건 발전엔 공식이 있다. 초기엔 스타를 통한 관심 끌기로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의 완성만이 지속적 발전을 이끈다. 세계 1위 일본 도요타 자동차에 벤치마킹 갔을 때 배운 핵심은 “바보도 쉽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었다. 실제 그들의 표현이 그렇다. 경영서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의 주제 역시 “스타 경영인을 넘어 제도를 구축한 회사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연예계를 포함하여 시스템을 통해 큰 발전을 이룬 다양한 분야와 달리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며 탄식을 자아내는 분야가 떠오른다. 연예인보다 몇 배는 국민생활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업계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 그들의 딸 혹은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던 암흑시대가 지나는가 했더니, 언제부터인가 미디어가 만든 벼락 스타들이 뜨고 진다. 정치권 요직엔 실무능력과는 무관한 법조인과 교수, 지역 유지들이 명성과 이미지만으로 다수를 점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언행으로 앞서가는 국민들의 울화를 돋운다. 21세기 남자 연예인들은 요리실력도 일취월장하는데, 18세기 의원들은 여성 의원에게 “출산으로 국가에 기여하라”는 훈계를 한다. 토론엔 논리가 없고 주장엔 팩트가 없고 국민에게 예의도 없다.

연예인과 정치인. 모두 대중의 인기로 존재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연마하여 실력이 상향 평준화된 집단과 자만에 빠져 “내가 누군지 아느냐”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집단이 보여주는 결과는 비교 불가다. 청소년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과 불신하는 직업, 국위선양을 하는 직업과 국가망신의 직업을 가른 것은 그들 자신이다.

그러나 혹세무민의 정치인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데에는 국민들의 책임도 크다. 진영에 기반한 감정적 동조와 우상화, 단기 이익에 좌우되는 이기심. 무엇보다 시스템이 갖춰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성.

‘빨리빨리’ 문화는 백년대계를 바라보며 큰 장애물을 치우고 묘목을 심는 우직한 일꾼보다, 이를 무능이라 비난하며 늪지에 빌딩을 세워주겠다는 강렬하고 말초적인 선동자들에게 쉽게 마음을 내어준다.

해외 시사 뉴스엔 30~40대에 이미 차세대 리더로 부각되는 정치인들이 보인다. 청년시절부터 정치를 직업으로 여기고 행정능력을 쌓아온, 정당의 장기적 비전 속에 키워진 인재들이다. 

정치는 규모가 큰 살림이고,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꿰차고 실천하는 일상의 경영행위다.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울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과 다르지 않다. 거창한 스펙이나 언변, 스타성보다는 공동체의 가치와 실무를 아는 성실한 인물을 선택해야 국민이 편안하다. 

탄탄한 기초실력으로 맡겨진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하는 정치 ‘신 스틸러’들을 키워내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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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항공사 보유 보잉항공기 다수에서 결함이 드러났다. 29일 국토교통부와 항공업계에 따르면 미국 연방항공청(FAA)은 이달 초 보잉 737NG 기종에서 크랙(균열)이 발생한 사실을 발견하고 각국에 긴급점검을 요청했다. 이에 국내 항공사가 운항횟수가 많은 42대를 우선 점검한 결과 9대에서 크랙이 발견됐다. 5대 중 1대꼴이다. 세계적으로 1130대 가운데 53대(4.7%)에서 결함이 드러난 것과 비교하면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국토부는 해당 항공기를 운항 중지했지만 이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미국 보잉사가 1996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B737NG. B737클래식의 날개 길이와 면적을 늘린 모델로 전 세계에서 7000여대가 운항 중이다. 이 가운데 53대의 동체와 날개 연결 부위에 균열이 발견돼 운항이 중지돼 있다. 보잉코리아 제공

국내 항공사에서 들여온 보잉 737NG 기종은 모두 150대다. 이번에는 누적 비행횟수 3만회 이상 항공기만 점검했을 뿐이다. 나머지 108대도 시급히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즉각적인 조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항공기 결함은 제작사의 기술자문이 필요한 사항이며 수리 방법, 장소, 시기도 제작사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승객들은 점검과 수리가 끝날 때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게 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기종은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 등 국내 저가항공사가 많이 보유하고 있다. 100% 737NG 기종인 곳도 있다. 그 외에 737맥스 기종만 갖고 있는 곳도 있다. 이 기종 역시 문제가 많다. 지난 25일 이륙 직전 정비를 이유로 1시간 넘게 지체한 뒤에 출발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되돌아온 제주항공 소속 항공기가 바로 이 기종이었다. 그 때문에 승객과 승무원은 40여분간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항공사 측은 자동조종장치 이상이라며 균열 등 구조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단언할 수 없다.

항공기 안전에 과도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관리를 요구하는 이유는 작은 결함도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 기종의 결함은 세계 항공업계가 함께 나설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다. 더욱이 한국은 결함 발생 빈도가 다른 나라보다 높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토부는 “현재 운항 중인 기종의 안전엔 문제가 없고 균열이 있더라도 부품만 바꾸면 된다”는 입장이다. 너무 한가한 태도 아닌가. 물론 항공사가 운항중지 등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모든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당국은 안이하게 대처하다 큰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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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재생에너지총회(KIREC)가 10월23~25일 서울에서 열렸지만 기대와 달리 무관심 속에 막을 내렸다.  


2017년 멕시코에서 열린 이전 총회에서 한국이 차기 개최지로 선정됐을 때, 정부는 관련 산업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이번 총회는 소리소문 없이 시작하고 무관심 속에 막을 내렸다. 홈페이지는 한국어로 서비스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행사였던 걸까?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이날 개회사에서 “재생에너지가 우리 미래의 활력”이라는 진부한 슬로건만 제시했을 뿐 기후위기의 시급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혁신 덕에 태양광 전기료가 10년 전에 비해 6%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자랑했다. 가격이 떨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만 재생에너지 가격이 높은지 자문해 봐야 한다. 정부는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을 표방하지만 어이없는 규제를 유지하여 에너지전환을 막고 있다.


그는 또 “한국은 석탄, 석유, 가스 같은 부존자원 없이 오로지 기술 혁신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 장관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건가? 한국은 전 세계에서 화석연료를 다섯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7위다. 대부분의 선진국과는 달리 2030년까지 줄여야 하는 온실가스 감축량의 기준을 특정 연도 배출량 기준이 아니라 배출전망치(BAU) 기준으로 제시하는 나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기후변화를 현존하는 위협으로 규정하고 탄소세를 현행 2달러에서 75달러까지 올릴 것을 주창했다. 한국 산업부는 이 시나리오를 감당할 수 있나? 전 세계는 탄소 배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 상당수는 재생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어 해외 거래처와 계약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무역의존도가 70%에 이르는 한국 경제가 기후위기 탓에 받을 타격을 산업부는 내다보고 있는가? 재생에너지 전환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임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번 총회에서 보인 산업부의 행태를 보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세계재생에너지총회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이해를 넓히며 재생에너지의 확대를 고민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서울 총회는 달랐다. 나는 이번 총회에 고위급 패널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곳에서 10년 전부터 반복되는 논의를 듣고 있자니 속이 터졌다. 한 참석자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기후변화가 경제에 미칠 위협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유하고 있는가?”


한국 정부에 재생에너지는 허울 좋은 말잔치일 뿐이다. 석탄이 수익이 된다는 말이 거침없이 등장하고 심지어 동남아에 수출까지 한다. 또 값이 싸다는 이유로 석탄으로 생산한 전기를 모두 다 사주는 전력 시스템을 유지하고, 산업부는 여전히 세금으로 석탄 발전 보조금을 챙겨주는 게 현장에서 보는 현실이다. 이 같은 산업부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기후위기는 소리 없는 위협이다. 산업부는 이 위협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구조가 탄소제로체제로 재편되고 있지만, 산업부는 아무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그사이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다. 물이 끓어 죽게 될 처지를 모르고 냄비 속에 앉아 있는 개구리처럼.


<이현숙 |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사무소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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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는 짧았지만, 아름다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잔잔했다. 연주곡은 영화 <시네마천국>의 OST ‘Love Theme’이었다.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을 극장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영화와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지.”

영화는 정점에 오른 순간 끝나고 말지만, 인생의 끝은 다르다. 어쩌면 인생은 절정도 없이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다 뜻하지 않은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 표류와 같을지 모른다. 이제 겨우 뱃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고 힘껏 노를 젓기 시작한 열일곱, 열여덟 살은 인생이 영화와 다르다는 걸 진즉 깨닫고 있는 듯했다.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제법 흥겨워하던 이들은 책에 관한 강연이 시작되자 부리나케 제 앞에 있는 종이를 끌어당겨 ‘강연 소감문’을 적어 내려갔다. 그들은 강연 중간에 이미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소감문을 채웠다. 과연 그들은 끝나지도 않은 강연에 대한 어떤 소감이 있는 것일까 적잖이 궁금했다. 

그런 모습은 전국 어느 학교에 가든 흔히 볼 수 있다. 강연 내내 졸던 학생도 강연이 끝날 무렵엔 무거운 머리를 들어 소감문을 열심히 쓰곤 한다. 사실 중·고등 학생들이 독서 강연을 신청하고, 도서관 의자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건 출석과 소감문 제출이 수행 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좋아해서 책 얘기를 하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이는 몇 되지 않는다. 수행 평가 하나하나에, 시험 점수 1~2점에 자신의 인생이 달려 있다는 믿음이 굳건한 사회에서 책을 읽고 즐길 여유는 없다.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며, 인생을 표류라고 했다가는 낙오될지도 모르는 사회에서는 정시 비율을 높이든 말든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성적에 쫓겨야 할 것이다. 

강연을 끝내고 나오니 하늘이 붉은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날마다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기가 막히게 멋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교문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힐끔댔다. 우리 아이들은 이 고운 하늘을 간혹 올려다보긴 할까?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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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촛불 이후 한국 사회가 부유하고 민주적이라는 자부심이 부쩍 커졌다지만, 자살 관련 지표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자살이란 현상이 만약 사회적 비참의 어떤 결정체로 간주될 수 있다면, ‘헬조선’이라는 자조도 유효하다. 2018년엔 10대 청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하루 평균 약 37명이 스스로 생을 중단했다. 매일 우리는 뭔가 대단히 다층적이고 잔인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나름 대응해왔다. 지난 10년간 자살률은 대체로 낮아져왔다. 단순 비교해봐도 2017년의 자살 사망자 수는 1만2463명으로 이명박 집권기에 비해 한 해 3000여명(2009년 기준)이 줄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자살예방법의 제정(2011년)과 실천이 작지 않은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법에 따라 사상 최초로 정부는 지자체·학교 등과 함께 자살예방사업을 벌여 각급 자살예방센터가 설치되었고 보건복지부에는 자살예방정책과가 생겼다. 병원 응급실에 온 자살 기도자를 관리(?)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또 2014년부터는 중앙심리부검센터 같은 기관도 만들어져 자살 사건을 세밀하게 분석해 연령별, 성별, 직업군별 ‘자살의 경로’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만연한 자살 현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지식과 분석력은 전과 비할 바 없이 높아진 것이다. 그저 막연할 뿐이었던 자살의 사회적 요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나름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을 갖게 된 셈이다.

22일 서울 마포대교 난간위에 적혀있던 문구들이 모두 떼어진뒤 흔적만 남아있다. 그동안 마포대교 난간에 남아 있는 자살 예방 문구에 대해 전문가들은 '부적절하며 억지웃음을 자극하는 문구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이준헌 기자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지난 9월 하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꾸준히 낮아지던 자살률이 2018년에 다시 높아졌다. 내용도 나쁘다. 10대·30대·40대의 자살률 증가 폭이 커졌다. 분석이 더 필요하겠지만, 우려되는 것은 현행 자살예방법과 그에 따른 정책 실행의 효과가 한계에 다다른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추출한 74개 자살 위험 요인 중 ‘15대 중대 요인’을 들어본다. “자살 시도, 우울장애, 업무부담, 가족관계 문제(부부), 정신건강 문제와 그 악화, 상사·동료 관계, 이혼·별거, 음주 문제, 사업부진·사업실패, 직무 변화, 지속적 빈곤, 대인관계 단절·철수, 부채(도박·주식), 실업.” 

개인의 정신적·심리적 고통, 가족 및 대인관계, 직장생활(노동), 그리고 경제상황 등으로 범주화될 이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 또는 결과가 되는 상호성을 갖고 있고 비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작용한다. 한 인간에게 저런 고통이 서너개 이상 겹치면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 중에서 정책과 타력으로 ‘예방’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사회와 개인들의 삶에 드리운 심연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연루된 구조적·문화적 한계라 할 수 있다. 자살에 작용하는 많은 요인과 문제상황은 다름 아닌 학교, 가정, 직장 그리고 일상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그중 직장과 노동에 관련된 것만 생각해보자.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유가족들에 대한 면담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 9월 발표한 103명에 대한 심리 부검 분석 결과 중엔 30~40대 직장인들이 어떤 경로로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는지가 포함돼 있다. 그 경로는 “부서배치 변화, 업무부담 가중 → 상사 질책, 동료 무시 → 급성 심리적·신체적 스트레스 → 사망”이다. 비극이 완성되는 시간은 놀랍게도 불과 5개월 미만인 것으로 조사돼 있다. 과중한 업무를 맡는 직장인은 상사의 압박이나 동료의 따돌림, 그리고 다른 부서로의 발령 같은 상황이 겹치면 곧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직장이란 어떤 곳인가? 왜 사회적 잔인성의 체계 중 직장과 노동이 최전선일까? 비극을 야기한 직장 내 따돌림이나 공격성의 거시적 배후는 자본의 논리와 경쟁의 압박일 것이다. 프로이트의 표현처럼 인간이 늑대가 되어 다른 인간을 해치는 그 같은 ‘사회적 잔인성의 체계’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도 모르게 ‘사회적 타살’에 연루된다. 이를 통해 주 52시간 근무제나 각종 직장갑질 근절 같은 미시적(?) 변화가 직장인의 사람다운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다. 

복지부는 자살예방과 지역정신보건에 올해보다 275억원이 늘어난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커지는 우려처럼 정부가 노동개악을 행하면 이런 노력이 헛된 것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라든가 “획일적 주 52시간제는 국가가 개인의 일할 권리를 막는 것”이라는 식의 인식도 ‘노동 존중’은 물론 ‘사람이 먼저다’라는 명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그런 식의 생각은 사회적 잔인성을 증폭시켜온 주요한 요소다.

여느 때보다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와 동료의 삶을 위한 연민과 단결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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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먼 나라에서 공부할 때였다. 어디서 공짜로 나누어주던 작은 화분을 받아온 적이 있다. 익히 보아온 세 잎 클로버와는 달리 가느다란 가지에 하얀 꽃들이 종종 매달린 모양새였지만, 토끼풀과에 속하는 식물이라기에 그냥 ‘토끼풀’이라 부르기로 했다. 창틀에 올려두면 햇볕 드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아침에 눈 뜨면 봉오리가 전날 밤보다 조금 더 열려 있었다.  

하루는 화분을 난로 옆 탁자에 둔 채 물 주는 걸 잊고 방을 나섰다. 밤늦게 귀가했더니 토끼풀이 축 늘어져 있었다. 건식히터 열기로 건조해진 방 안에서 답답하고 목이 말랐던가 보다. 얼른 물을 떠와 흙을 적셨다. 난로도 껐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풀은 기운을 차린 듯했다. 줄기가 스르르 고개를 들고 잎사귀에 생기가 돋았다. 그때의 애틋함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테다. 그 자그만 것이 내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생각하니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에서 뭉클 솟아났다. 

그해 여름, 한 달 넘게 집을 비우며 제일 걱정되던 것이 내 식물이었다. 방학이라 기숙사도 문 닫고 모두들 떠날 텐데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들풀이 심긴 증정용 플라스틱 화분을 어디다 맡기겠는가. 그렇다고 쓰레기통 옆에 두어 말라죽게 할 순 없었다. 고민 끝에 풀밭에다 옮겨심기로 했다. 눈여겨봐 둔 데가 있었다. 기숙사에서 연구소로 이어지는 오솔길 옆 잔디밭. 다음날 이른 아침 화분을 들고 나섰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잔디를 손질하고 있었다. 드르르 기계가 지나갈 때마다 가지런히 머리 깎이는 잔디를 보니, 길고 삐죽한 내 토끼풀이 저기 들어가면 단번에 깎여나갈 것 같았다. 화분을 내려다보자 식물이 고개 바짝 치켜들고서 자기는 머리 잘리기 싫다며 울고 있었다.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 더 걷다 빈터를 찾아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데여서 내키지 않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거기로는 잔디 깎는 기계가 들어오지 못할 듯했으니까. 흙을 손으로 파내어 토끼풀을 옮겼다. 처음 해보는 거라 풀이 자꾸 옆으로 누웠다. 마음에 걸려 그날 밤 다시 가보니 벌써 이파리가 시들시들해진 듯했다.

가을학기가 시작된 이후 그 오솔길을 피해 다녔다. 내 식물이 시들어 사라졌을 자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던 어느 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서 저녁거리 사러 식료품가게로 향하던 길이었다. 발끝만 보며 걷는데 저편의 하얗고 자그만 꽃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들었다. 거기, 있었다.

살아 있었다.

설령 세상에 가장 흔한 식물이 토끼풀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내 토끼풀임을 알았다. 하루라도 물 주는 걸 잊거나 창가에 두지 않으면 시무룩해지던, 그러다 마음을 써주면 이내 환하게 피어나던 그 식물. 이제 야생풀이 되어 예전의 여릿함은 덜했지만 이파리가 넓적해지고 줄기도 단단해진 듯했다. 연약한 듯 보였으나 생명력이 강했던 것이다.

마음이 부서지던 순간에도 나는 내려놓지 못했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손에 쥔 것들을 한 번도 놓지 못했다. 생을 그만두고 싶던 과거 어느 순간에조차 전화가 걸려오자 1초 만에 받아 “논문 교정지 곧 보내겠습니다!”라고 답했었다. 나는 싫었다. 스스로의 생존 본능이. 사랑하는 이들을 질리게 만들 그악스러움이 미웠다. 

사실 난 식물에 관해 활엽수와 침엽수의 차이 정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저 돌보던 식물이어서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나한테 기대니까 애틋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살아있는 토끼풀을 보며 ‘약한 척해놓고 참말로 그악스러운 생존 본능을 가졌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건강히 거기 있어 그걸로 좋았다. 대견하고, 좋았다. 그악스럽게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역시 서로에 대해 그러리라. 그렇게 믿으려 한다. 약한 척하더니 생명력 하나는 끝내준다며 함부로 냉소하는 대신 안도의 숨을 내쉴 거라고 말이다. 바닥에 머리 처박고 울던 그대가 스르르 다시 고개를 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대견하다며 햇볕같은 웃음을 그대 위로 쪼여줄 것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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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군당국이 전시작전지휘권 전환에 맞춰 ‘한·미동맹 위기관리 각서’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이 새로운 제안을 해서 파문이 일고 있다. 한미연합사의 위기관리 범위를 ‘한반도 유사시’로 규정하고 있는 이 각서의 문구를 ‘한반도 및 미국의 유사시’로 바꾸자고 한 것이다. 미국이 문구 변경을 제의한 것은 맞는 것 같다. 다만 ‘미국 유사시’라는 표현이 들어가도 일각에서 우려하듯 중동이나 남중국해 등 한국과 직접 연관이 없는 해외 지역에까지 한국군을 자동 파병하는 것은 아니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방위비 분담금 5배 증액 요구에 이은 미국의 뜬금없는 제안이 당혹스럽다. 


한미상호방위조약(3조)은 한미연합사 작전 지역을 ‘태평양지역’으로 한정하고 있다. 미국의 제안은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한국 측이 문구를 변경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이 중동이나 남중국해 등에 파병할 경우 미·중의 패권 경쟁에 휘말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빌미도 제공해서는 안된다. 미국 측은 전작권 이후 한·미 공동 대응을 더 명확히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한국군 장성이 맡아도 지금처럼 주한미군을 철저히 지키고,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미국으로 발사했을 때를 고려해 ‘미국 유사시’라고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라면 새로 ‘미국 유사시’란 표현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유사시 양국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자동적으로 개입하도록 돼 있다. 미국이 이 문구를 고집한다면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를 위해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군 당국은 이번 각서 개정을 협의한 뒤 다음달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안보협의회(SCM) 때 양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다고 한다. 국방부는 기존 각서의 틀을 견지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이유로 한국군이 태평양 이외 지역으로 자동 파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안보 정책을 둘러싸고 상궤에서 벗어나는 제안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런데 당국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있어 시민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미국이 무슨 제안을 하는지 시민에게 알릴 것은 알려야 한다. 이를 토대로 기존 안보 정책의 틀을 갑자기 바꾸려는 것은 동맹의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에 일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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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렌터카) 호출 서비스 ‘타다’가 법정에 선다. 검찰이 지난 28일 이재웅 쏘카 대표, 타다 운영사 VCNC의 박재욱 대표와 각 법인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여객자동차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 등은 면허 없이 유상 여객자동차운송사업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타다는 “11~15인승 승합차는 렌터카 기사 알선을 허용한다는 여객자동차법 시행령을 근거로 운영해왔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그러나 “여객자동차법은 운전자 알선이 가능한 렌터카 이용을 ‘대여 사업’에 한해 허용하고 있는데, 타다는 ‘콜택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타다 서비스의 합·불법은 법원이 가릴 것이다. 그러나 법에만 맡길 일이 아니다. 

29일 오전 서울 시내를 ‘타다’ 차량과 택시가 나란히 있다. 지난 28일 검찰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이재웅 쏘카 대표와 자회사인 VCNC 박재욱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다. 연합뉴스

타다는 플랫폼 기반 승차공유 서비스다. 배차가 확실하고 기사들도 친절하다는 평가가 많아 요금이 비싼 편이지만 출범 1년여 만에 회원수가 130만명에 이를 정도로 이용자가 늘고 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등장한 ‘공유경제’의 대표적 서비스란 점에서 호감을 얻고 있다. 공유경제는 개인소유 자원을 플랫폼을 통해 서로 나누는 새로운 경제 형태다. 2025년 전 세계 시장규모는 4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눠 쓰기가 가능한 차량, 빈 방, 장난감, 책 등 거의 모든 재화·서비스로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공유경제는 우리 사회가 가야 하고,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문제는 기존 유사업종과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타다의 등장에 직접적 피해를 입은 택시업계는 반발했고 일부 기사들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졌다. 갈등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치유·해결 능력 부족이 빚은 비극이었다. 타다는 ‘이용자 편익’만을 고집했고, 택시업계와의 ‘상생’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택시업계도 승차거부 등 고객불만은 외면한 채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의 책임은 더 크다. 과거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에 대해 법 위반 판정을 내렸던 국토교통부는 정작 타다에 대해선 침묵했다. 타다가 최근 ‘내년 1만대 증차 계획’을 내놓고, 택시업계가 거세게 반발하는 등 갈등이 심화된 것도 정부의 ‘택시제도 개편안’ 후속 및 법 개정 작업이 늦어진 탓이다. 

공유경제 등장은 10여년 전의 일이다. 정부는 타다 사태를 공유경제 전반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개방·참여라는 소비자 중심의 법·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사업종 종사자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일 역시 없어야 한다. 국회도 입법 지체로 인해 공유경제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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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이 만든 도구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문명의 ‘발달’을 “장점도 있고 부작용도 있다”는 양비론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특히 인간과 비슷한 물건들, ‘포스트 휴먼’은 논쟁거리다. 글자 그대로 죽부인(竹夫人), 인형(人形)에서부터 인공지능,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아이디(ID), 휴대전화가 대표적이다. 

지금은 불특정 다수에 의한 악플이 문제지만, 1990년대 PC통신 시절 처음 등장한 ‘온라인 성폭력’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 대 1 채팅방에서 여중생이 성인 남성 사용자의 성적 비하 표현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남성은 인터넷 ID와 사법적 개인은 별개의 존재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몸이 아니라’ 아이디로 활동하게 되면서 인터넷에서의 ‘나’와 현실의 ‘나’는 같은가, 일부인가, 아니, 진정한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논쟁이 일었다. 

하지만 쟁점은 진짜 자아 여부가 아니다. 현실이든 가상현실이든, 언설의 전제와 효과가 문제다. 인형은 어떨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리얼 돌(real doll)은 처음부터 남성을 위한 섹스 대용품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리얼 돌은 실제 사람(여성) 크기에 골격과 관절도 있고 살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리얼 돌의 판매 여부를 놓고 “강간 인형이다” “무역권 침해” “인형일 뿐” 등 여론이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서 흑인 바비 인형과 백인 인형의 가격 차이 사례처럼, 인형은 단지 인형일 수 없다. 장애 여성이나 특정 인종을 연상케 하는 섹스 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리얼 돌을 당연시하는 일부 남성들의 불만은 대단해서, “대한민국 남성은 야동도 못 보고, 성매매도 못하고, 여성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 되었다. 최소한의 남성 인권을 보장해달라”고 외치고 있다. 대안신당(가칭)의 이용주 의원은 리얼 돌을 직접 국감장에 들고 나와, 관련 산업의 육성을 주장했다(검경은 이 의원의 성폭력특별법 위반 여부를 수사해야 한다).

여성용 리얼 돌은 왜 남성용만큼 대중화 요구가 없을까. 주변 여성들에게 물어보니, 남성의 외양을 한 리얼 돌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무서울 것 같다고 한다. 관리와 씻기기(?)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 의과대학 실험실의 인체 모형으로 느껴진다는 여성도 있었다. ‘바바리맨’처럼 여성에게 남성의 신체는 불쾌감과 폭력으로 인식되는데, 남성은 왜 ‘스트립쇼’ 업소에서 비용을 내며 여성의 몸을 소비하는가. 리얼 돌 판매 허가에 앞서 이 문제가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예로부터 죽부인(竹夫人)은 있어도, 여성이 안고 자는 죽부인(竹婦人)은 없다. 죽부인도 죽궤(竹?)라는 ‘물건’ 용어로 대체된다. 문제는 남성에게는 여성의 성이 필요하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다. 그래서 성매매는 “필요악”이라는 모순어가 당연시되고 성매매, 포르노 산업, 리얼 돌이 성폭력 발생을 줄일 수 있다는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성의 성욕은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라는 편견을 강화시키고 성폭력 발생률을 더욱 높일 뿐이다. 성산업은 성폭력 예방책이 아니라 기폭제다. 남성의 ‘억제할 수 없는 성욕’은 통념이지, 사실이 아니다. 남성 문화의 주장대로 성욕이 배변과 같은 생물학적 요구라면, 비아그라가 왜 남용되겠는가. 오히려 억제제를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장애 남성의 성 구매론은 언제나 논쟁거리다. 장애 남성과 비장애 남성의 평등이 성 구매를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끝이 없다. 일단, 여성 장애인은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199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실제로 ‘대리 연인 제도’가 있었다. 국가에서 여성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남성 장애인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장애 남성 스스로의 제안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삽입 섹스라기보다는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타인과의 교류로만 가능하다. 성욕은 발작(충동)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매매 현장에서도 남성들이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구매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지, 삽입 그 자체가 아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신간 &lt;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gt;에서, 이를 “친밀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라고 지적한다. 직업윤리가 있으므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친밀감, 성적 유대가 싫은 이들은 드물 것이다. 신뢰에 기반한 친밀감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사회성이 아니다. 연애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성적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모색, 존중, 협상, 기꺼운 감정노동, 성의의 산물이다. 성산업과 리얼 돌은 이 과정을 생략하는 폭력 제도다. 행복권은 천부 인권이 아니다. 인간에겐 행복을 위해 노력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섹스가 행복한 시간이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가는 지난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리얼 돌 논란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관계는 쉽지 않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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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기도 파주·연천 등 4개 시·군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 야생 멧돼지에서도 ASF 바이러스가 추가로 검출됐다. 돼지가 걸리면 치사율이 최고 100%에 이른다고 하니 돼지고기를 먹어도 좋을지 염려하는 이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ASF는 돼지과(Suidae) 동물에게만 감염되는 바이러스성 가축전염병이어서 사람이 감염되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데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ASF의 병원체는 DNA 바이러스로, 아스피바이러스속(Asfivirus)에 속하며 24종의 유전형을 가진다. 바이러스는 세균과는 달리 다른 생명체(숙주)의 세포 안에 들어가야만 증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세포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열쇠로 숙주의 세포에 있는 자물쇠를 열어야만 세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ASF 바이러스의 열쇠는 사람의 세포에 있는 어떤 자물쇠도 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크고 안정적인 구조를 갖는 DNA 바이러스의 특성상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사람에게 감염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지난 100여년간 세계 50여개국에서 ASF가 발생했음에도, 현재까지 사람이 감염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보고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동물보건기구(OIE) 및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 국제기구도 ASF는 사람 건강에 위해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게다가 우리는 돼지고기를 충분히 익혀 먹는 조리법을 택하고 있다. ASF 바이러스는 70도에서 30분 이상 가열하면 모두 사멸한다. 우리처럼 구이·찌개·볶음요리 등 고온에서 가열하는 조리법을 주로 이용한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장부터 수입·유통 단계까지 이중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다. ASF에 감염된 돼지가 시중에 유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농식품부는 ASF에 걸린 돼지를 전량 살처분·매몰처리하고 있다. 도축단계에서는 검사관(수의사)이 모든 돼지를 검사해 ASF에 감염된 돼지의 출하를 원천 차단하고 있다. 또 식약처는 혹시라도 신고되지 않은 축산물이 시장에 유통되는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외국 식료품 판매업소를 집중 점검하고, 불법 도축된 감염 돼지가 유통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식육판매업소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다.

‘기인지우(杞人之憂)’라는 말이 있다. 괜한 걱정을 이르는 말로, 옛날 중국의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고 지냈지만 나중에 이치를 깨닫고 난 후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고사 속 인물처럼, 국민들도 ASF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의경 | 식약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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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근거로 서울 상위권 대학 입시에서 정시(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비중을 높이겠다고 했다. 뜻밖이다. 정시 지지 여론이 높은 건 새삼스럽지 않다.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 수시(학생부종합전형·학종)보다 수능만 치르는 정시 선호도가 높은 것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정부가 여론에 기대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는 평가에 동조하고, 기왕의 ‘정시 축소, 수시 확대’ 기조를 뒤집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통령 발언 바로 직전에도 교육부 장관은 정시 유지 입장을 내놓았지 않았나.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교육개혁관계장관회의에서 서울 소재 대학들의 수능 정시 비율 상향 등을 포함한 교육개혁 방향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는 다음달 정시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공식 발표한다. 하지만 서울 상위권 대학과의 밀당부터 만만치 않을 터이다. 이들 대학은 수시 우선 선발을 통해 우수학생을 확보해왔다. 특히 비인기학과들이 학종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학종이 비인기과 교수들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수시 비중이 낮아지면 우수학생 선점 통로가 좁아진다. 이른바 ‘수시 납치’가 줄어들어 대학으로서는 학생 선발에 비상이 걸리게 된다. 학종과 수능을 다 준비하게 된 교육현장의 혼란과 반발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미 교육단체와 시·도교육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다.

대표적인 ‘복잡계’인 대입에서 공평할뿐더러 정의롭기도 해서 모두가 승복하고 신뢰하는 전형이 존재하기 어렵다. 본고사-학력고사-수능-학종으로 이어진 대입 전형 변천사가 이를 증명한다. 기존 전형에 문제가 발생하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식이다. 지금은 수능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학종이 차지해가는 시기다. 정부는 이런 변화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교육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조국 사태는 단순히 정시 비중 상향이라는 가시적인 대입 제도 개선책만으로 피해갈 수 없다.

학종에 문제가 많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평가기준이 모호하고 전형 방법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더 잠재력과 창의력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은 대입에서 선택형 시험을 채택하는 ‘객관식형 국가’다. 이런 나라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기 어려운 소질과 적성을 중요한 평가 잣대로 삼는 ‘주관식 입시’는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종은 시행과정에서도 학생 스펙쌓기에 대한 부모의 노골적 개입과 성적조작, 시험지 유출 등의 부작용이 쏟아졌다. 이러니 ‘내신은 자녀가, 비교과는 부모가 맡는 분업형 전형’ ‘깜깜이 전형’이라는 비아냥을 피할 도리가 없다. 여기에 조국 사태까지 불거지면서 학종의 공신력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정시는 어떤가. 계량화된 점수나 등급으로 매겨지므로 공정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소수점 이하에서 합·불합격이 갈리는 반교육적 시험을 어떻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미세한 차이로 ‘대학수학능력’ 여부와 학생의 인생이 갈려서는 안된다. 항상 수능 점수가 잘 나오는 지역과 고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정시의 불공정성을 말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비율을 상향하겠다고 발표한 후 일선 학교에서는 공교육에 큰 타격이 예상되는 데다 지방·저소득층 학생들이 더 불리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일 고3 수험생들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전국연합학력평가 시험을 치르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입 제도에 대한 공정성 논란은 공허한 일이다. 교육 문제의 원인은 경제·사회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툼의 더 큰 연원이 교육 외부에 있는데 해결책을 교육 내부, 특히 대입 전형에서 찾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명문대생이 소위 ‘지잡대생’을 얕잡아보고 이른바 ‘스카이 출신’이 고위공직과 전문직을 독점하는 학벌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대입 전형을 정시로 바꾼다 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대학 공부보다 간판을 따기 위한 의례적 행사로 전락한 점을 고려하면 대학입시 자체가 거대한 위선이며 모순 덩어리이다.

입시 공정성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기계적·산술적 공정성을 위해 고교 교육을 희생해서는 안된다. 입시 제도가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고 있는지, 결과적으로 공정성 확보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예컨대 정시 비중이 크게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교과서는 기출문제집으로 대체되고 모든 교과가 문제풀이 방식으로 진행된다. 학교는 출석점수만 따는 곳으로 전락하기 쉽다. 정시는 고교 교육과 병행하기 어려운 전형이다. 학종은 좀 더 고교 교육 친화적이다. 학생이 교과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하고 교육이 학교 중심으로 이뤄진다.

아직 시간은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입시의 절차적 공정성을 위해 정시를 확대하겠는가. 아니면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학종을 확대하되 확 뜯어고치겠는가.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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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은 1844년 영국의 공업도시 로치데일에서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으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의 횡포로 질 낮은 생필품을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던 로치데일 직물공장의 노동자 28명이 1년에 1파운드씩 출자금을 모아 점포를 내고 밀가루나 버터 등 필수 식료품을 공동구입한 게 시작이었다. 1인 1표제, 정치·종교의 중립, 이익금의 공평한 분배 등의 원칙은 이후 국제 협동조합의 기본원칙으로 자리잡았다. 2017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300만개 협동조합 기업, 12억명가량의 조합원이 있다. 국내엔 약 1만6000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됐다. 자본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협동조합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함께 넘는 공동체 정신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기도에서 조합원 모두 학부모인 최초의 ‘협동조합 유치원’이 내년 3월 개원을 목표로 조합원을 모집 중이다. ‘아이가 행복한’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사립유치원 비리 사태로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경기 동탄지역 학부모들이 ‘아이를 믿고 맡길 유치원을 직접 만들겠다’는 뜻을 모았다. 부지와 건물을 국가와 지자체에서 임차해 비싼 원비를 해결하고, 투명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민관협력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조합의 탄생 과정을 되짚어 보면 씁쓸하다. 작년 이맘때 국정감사에서 사립유치원 비리가 폭로되며 여론이 들끓었다. 국회는 이른바 ‘유치원 3법’을 마련했고 금방이라도 문제가 해결될 듯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건 거의 없다. 답답한 학부모들이 거리로 나섰고, 각종 규정과 방안 마련을 촉구했고, 협동조합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동탄비리유치원비상대책위원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장성훈씨가 조합 이사장을 맡았다. 장씨는 “작년 그 사태를 겪고도 국회도, 사립유치원들도 절대 바뀌질 않는다”며 “1년 정도 운영한 뒤 모든 회계자료를 공개해 관행으로 여겨졌던 사립유치원의 회계 낭비 등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동탄의 사립유치원들이 더욱 투명하게 운영되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대표’들, 사립유치원들이 꿈쩍도 안 하고 있는 사이,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돌보는 ‘협동조합’의 정신을 오롯이 실천하고 있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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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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