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2019년부터 ‘등대공장’(lighthouse factory)을 선정하고 있다. ‘등대공장’이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극 도입해 제조 산업의 미래를 이끄는 등대 같은 공장을 말한다. 지금까지 독일의 BMW, 미국의 존슨앤드존슨, 핀란드의 노키아, 인도의 타타스틸 등 세계적인 기업 26개가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스코가 유일하게 지난 7월 중국 다롄(大連)에서 열린 2019 WEF에서 세계의 등대공장으로 선정됐다. 포스코가 AI기술을 활용해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하고, 대학, 스타트업, 중소기업, 지역사회와 협력해 스마트 공장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 선정 이유다.

포스코는 ‘제철보국’을 경영이념으로 지난 50년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국민기업이다. 1968년 창사 이래 한국의 산업화를 떠받쳐왔을 뿐 아니라 현재는 연간 4300만t의 조강생산체제를 갖추고 세계 53개국에서 생산과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자리 잡았다. 그런 포스코가 지난해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정하고 영속 기업으로 발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업시민(企業市民)’은 미국에서 2000년대 초에 등장한 개념으로 첫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기업경영의 주요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발상이다. 시민 개개인이 공동체가 합의하고 부여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듯 기업에도 사회발전을 위한 시민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이 눈앞의 이익만 좇지 말고 공동체의 지속발전을 위한 책임을 다하라는 주문이다. 기업이 시민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부나 국제기구보다 크다. 따라서 그 영향력에 맞게 의무와 책임을 기업에 지우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오늘날 기업의 경영에는 당면한 사회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역할 및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들이 전통적인 생산 관점에서 벗어나 이해관계자 관점으로의 전환을 촉진한다. 이해관계자란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의사결정에 영향을 받는 집단을 말한다. ‘기업시민’은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자, 즉 전통적인 주주를 포함하여 소비자, 지역사회 등과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영속 기업을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많은 기업들이 영리 추구에만 몰두하다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몰락의 길을 자초하였다. 기업(企業)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와 시민(市民)으로서의 사회적 가치가 맞물려 선순환을 일으켜야만 영속할 수 있다는 기업 경영 모델의 전환은 새로운 혁신의 단초를 마련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코가 천명한 ‘기업시민’의 경영이념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이익집단을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적극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하고 환영할 만하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SK 등 다른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할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적극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생색내기식 모습과는 전혀 다른 고무적인 흐름이다. 우리 대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에 기반한 가치경영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기업 생존의 필수요건이 되었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러면 ‘기업시민’ 경영이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내가 오랫동안 동반성장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가장 힘주어 강조해온 대기업의 자발적 동반성장 참여가 바로 그 구현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윤 창출이라는 기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의 저명 학자 필립 코틀러도 ‘선행(good works)’은 이제 기업 생존과 번영의 필수조건이 되었고, 공익과 기업 이익 간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미래 기업의 생존전략이라고 강조하였다. 과거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단순히 ‘남는 파이’를 나누는 활동이었다면, 지금은 기업이 사업 목표를 세우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공익과 기업 이익의 균형을 위해 ‘파이를 키워서 나누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파이를 키워 나누자’는 동반성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 대기업들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선순환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겠다는 ‘기업시민’의 경영이념은 대기업 스스로 동반성장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

대기업의 자발적·적극적 동반성장 참여는 최근 부각된 글로벌 밸류체인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필수적 방안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국제 분업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이것은 전 세계 기업들이 원료에서부터 최종 제품에 이르는 생산 밸류체인에서 각자 비교우위가 있는 분야로 특화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로 이러한 국제 분업체계의 고리에 타격을 가했다. 일본의 조치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우리도 깊게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이미 글로벌 경쟁의 패러다임이 단일기업 간 경쟁에서 기업생태계 간 경쟁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도요타와 현대자동차의 경쟁에서 ‘도요타+협력업체’ 대(對) ‘현대자동차+협력업체’의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적극 나서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를 해소하고 환경·안전 문제를 개선하며 중소기업이 혁신 성장하면, 국내 산업의 공급망이 건실해져 불확실성이 커지는 글로벌 밸류체인에 의연히 대처할 힘을 기를 수 있다. 기업시민 나아가 동반성장이 새로운 성장 공식이자 경쟁우위의 원천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의 파로스(Pharos)섬에는 높이가 130m에 이르는 거대한 등대(lighthouse)가 세워졌다. 그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세상의 문물이 모이고 나가는 허브가 되었고,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기업 모두가 동반성장에 전면적으로 나서 새로운 전환의 국면에 접어든 우리나라 제조 산업에 새로운 항로를 인도하는 듬직한 등대가 되어주길 희망해본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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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장관 딸의 교육 문제로 ‘특권 대물림’에 대한 국민 정서가 차갑다. 그동안 교육이 불평등을 대물림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번 조국 사태가 결정적 단서가 되어 불만과 분노가 일거에 터진 것이다. 시민들은 불법적 통로만이 아니라 합법적 통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교육 불평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시민들은 대학입시라도 공정하게 치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약속한 문재인 정부를 향해 “결과가 정의로울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쏘아붙인 것이다. 이것이 ‘대입 기회와 과정의 공정성’을 요구하고 수능 정시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담긴 뜻이다.

문제는 ‘입시 공정성’에 초점을 맞춰 해법을 찾으면 길을 잃는다는 점이다. 대입 공정성은 기껏해야 ‘정시 확대’나 ‘학종 비교과 대폭 삭제’ 정도인데, 정시 확대는 교육의 미래를 볼 때 엄청난 퇴행이다. 수능 문제풀이 암기 수업은 글로벌 교육 경쟁에서 낙오를 의미한다. 학종 비교과 대폭 삭제는 올바른 방향이지만, 시민들의 불공정 불만 대책으로서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입시의 공정성’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 해법, 즉 ‘특권 대물림 교육체제 중단’을 문제 해결의 새 길로 보고, 상응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시민들이 “결과가 정의로울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기회와 과정만이라도 평등하고 공정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할 때, 정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회와 과정만이 아니라 결과도 정의로운 길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응답해 시민들의 답답한 맘을 풀어줘야 한다. 즉 ‘최소한’의 공정성을 바라는 시민들에게 ‘최대한’의 공정성으로 화답해야 한다. 최대한의 공정성이란 ‘특권 대물림 교육체제 자체의 해소’에 있다. ‘영어 유치원→사립초→국제중→자사고·특목고→SKY대→출신 학교를 차별하는 특권직업’이라는 이 특권 교육 트랙을 끊어낼 때가 왔다.

‘대입의 공정성’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특권 대물림 교육체제 해소를 통해 공정성에 대한 욕구 전체를 수용하자는 것이다. 대입의 공정성만을 주장하게 되면 특권 대물림 교육체제를 놔두고 그 안에 들어가는 티켓만 공정하게 주자는 것이 된다. 이는 또 다른 재앙이자 문제 해결의 하책에 그친다. 국가가 근본적으로 특권 대물림 교육체제를 혁신할 때, 대입 공정성 요구에 담긴 국민들의 요구도 더 잘 수용하게 되는 셈이다. 그게 낫다.

정부는 당장 ‘특권 대물림 교육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정기적으로 ‘특권 대물림(교육) 지표’를 발표해야 한다. 대물림 입시 경쟁의 핵심 이유인 ‘수직적 대학 서열구조’ 개혁이 제일 시급하다. 정치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지금껏 방치했다. 이 과제야말로 ‘국민 참여형 공론화 기구’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출신 학교 차별 없는 ‘공정한 채용 제도’ 법제화는 대학 서열 극복의 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 외고,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은 새삼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개혁해도 약자들의 삶은 곤궁하다. 그러니 취업과 진학 때 지역·계층 할당제 시행 등 소위 흙수저 계층을 위한 적극적 배려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학종 비교과 폐지 등을 중심으로 한 공정한 입시정책을 추진할 때, 비로소 국민은 안심할 것이다. 최근 정부가 이 방향을 선택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송인수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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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새는 타조지만 날지 않는다. 나는 새 중 가장 큰 새로는 앨버트로스, 펠리컨, 콘도르가 앞뒤를 다툰다. 가장 작은 새는 단연 벌새다. 그중에서도 작은 종은 5㎝를 겨우 넘는데, 날갯짓이 몹시 빨라 1초에 80회에 이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허밍버드(hummingbird)라고 하는데, 작고 빠른 날갯짓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가 사랑받는다는 말을 듣고 극장을 찾았다. 감동 속에 영화관을 나설 때, 막상 벌새에 관한 에피소드나 장면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주인공 은희가 살아가는 모습이 작은 벌새와 같지 않으냐는 주변의 풀이를 들으니, 굳이 실제의 벌새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수긍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자라는 아이가 자신과 주변 사람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도약이다. 어른에게는 선명한 것이 아이에게는 뿌옇다. 초점을 맞추는 일은 외롭고 고통스럽다. 어떤 아이는 그럭저럭 해내지만, 어떤 아이는 끝내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존중받고 싶지만 자신이 초라할 때, 내 가족이지만 나사가 빠져 있을 때, 친구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아이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옆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자존감 잃지 않고 올바로 해독하는 것은 우주비행사가 달에 가는 것만큼 어렵다. 많은 어른들은 그 어려움을 이미 잊었지만 과장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많은 이가 그 통과의례를 마치지 못해 마음 한편의 짐으로 쌓아두고 있다.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가 거짓말처럼 무너졌던 1994년을 통과한 한 소녀의 삶을 복원한다. 은희가 맞닥뜨린 상황은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다. 대결의 대상이 지구로 다가오는 소행성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며, 연쇄살인범도 아니다. 그래도 어린 은희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상에 내보일 두드러진 자질이 없는 자신, 풍비박산은 아니나 가부장적이고 삐걱거리는 가정,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친구들, 그리고 막연히 감지되는 부조리한 세상이 그의 우주를 구성한다. 

그 속에서 은희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까. 감독은 절제력을 잃지 않고 섬세하게 그 과정을 묘사하며, 스산한 시대의 단면과 공기마저 드러낸다. 게다가 ‘소년’이 아니라 소수자인 ‘소녀’의 성장기는 우리가 자주 본 ‘소년’의 서사와 결이 달랐고, 사람들이 게으르게 덧씌운 상투성을 벗어난 인물들은 관객의 자연스러운 몰입을 이끌었다. 

은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세계가 유기적이면서도 겹겹이 쌓여 있다는 점은 내 마음을 건드렸다. 지구는 자전하고, 자전하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행성들과 태양이 이루는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을 회전하고 있다. 은희는 가족에게서 불평등과 폭력과 서툰 애정을 겪는다. 그 와중에 친구들에게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학교에서는 낯설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데, 뜻밖에 한문학원의 선생님에게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로 대표되는 부실한 사회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들인다. 영화는 주인공의 마음으로부터 가족과 친구와 학교와 지역사회와 대한민국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점차 확대되는 세계가 어떻게 은희의 성장을 더러는 촉진하고 더러는 위협하는지 보여준다. 은희는 자주 힘겹게 가끔은 경쾌하게 이에 대항하면서 자기를 담금질한다.

주인공 은희만이 아니라 그 친구들도 또 다른 벌새였을 것이다. 은희가 숨 쉴 수 있게 해준 학원 선생님 또한 은희보다 조금 큰 어떤 새로서 가혹한 자기만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하고 있었으리라. 아니, 영화의 배경이 된 1994년에 수많은 은희들이 있었고, 오늘 이 순간에도 무수한 벌새들이 모순투성이 가족과 학교와 세상 속에서 작지만 장엄한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적으로, 인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넉넉한 부모를 만나면 상대적으로 쉽게 헤쳐 나가겠지만, 참전을 면제받는 경우는 없다. 특히 그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인 경우에는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할 틈도 없이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세계가 자주 그들의 자아를 침입하며 괴로움을 겪게 할 것이다. 영화는 세대와 성차를 뛰어넘어 내게 그 점을 새삼스레 환기시켰다. 사람을 켜켜이 둘러싼 사회적 환경들은 그 거리가 가정보다 멀다고 영향력이 감소되지 않는다. 무너진 성수대교가 은희의 삶을 겨누듯이 온갖 방향에서 다가오는 사회의 중력은 개인을 마음껏 끌어당기고 뒤흔든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나는 이 시대 어린이와 젊은이가 겪는 세상에 대해 내 자신이 아는 게 거의 없음을 절감한다. 그들의 자아정체성은 어떤 시련 속에서 주조되고 있을까. 완전히 도착한 미디어 시대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가 자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전 지구적 네트워크는 통과의례를 어떻게 변형시켰을까. 한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인형처럼 겹겹이 쌓인 현실에서 한 인간이 통합된 개인으로 바로 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시대다. 

자아정체성을 찾고 세상 속에서 의미를 만들다 마침내 자아를 벗어나는 게 사람의 행로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원래 순탄할 수 없다. 은희는 가까스로 첫발을 뗐지만, 혹시 이 시대 어떤 벌새들에게는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여정이 아닐까. 주어진 자원의 차이가 너무 크고, 극단적으로 경쟁적인 세상에 던져진 어떤 은희들은 1초에 80번이 아닌 단 몇 번의 날갯짓도 힘들지 않을까. 벌새들은 작지만 수천㎞까지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은희가 대륙을 가로지르고 바다를 건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세대는 자기 아이에게는 온갖 날개를 달아주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누구 말마따나 걱정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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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떠난 지 1년이 되었네. 금세이기도 하고 어느덧이기도 한 1년이었어. 금세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어느덧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들이 많았네. 그 순간마다 누나의 희미한 웃음이 있었어. 예전에는 그 웃음이 희미한 줄도 몰랐었네. 힘없는 웃음이, 그러나 새어 나올 때마다 웃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던 그 웃음이, 실은 희미한 웃음이었어. 희미해서 오히려 여운이 길었어. 사람들은 어렴풋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붙들려고 하잖아.

누나가 떠난 날은 개천절이었어. 하늘이 열린 날, 누나는 하늘에 올라가 무엇이 되었을까. 별처럼 빛나고 있을까, 달처럼 한 달에 한 번씩 모양을 바꿀까,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가 새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했을까. 누나는 왠지 이런 말을 해줄 것 같다. “달의 모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거야. 한없이 깜깜해지고 싶은 날, 월식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달을 마주할 수 있겠지. 어제 읽었던 누나의 시가 오늘 읽으면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누나는 한국에 오고 싶어 했고 나는 독일에 가고 싶어 했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말할 때, 쓸 때는 쉽더라. ‘싶다’라는 보조형용사에 마음을 내맡겼으니까. 정작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 내일 있을 회의가, 다음주에 있을 행사가 줄지어 떠오르더라. 항공권을 예매하는 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한숨이 났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떠나고 돌아오는데, 우리의 발을 묶어버린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기다리는 마음은 가닿는 발걸음이 되지 못했을까. 누나와 주고받은 e메일을 읽으며 나는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

지난 1년 사이, 나는 세 번의 큰 이별을 겪었어. 이별을 할 때마다 멀어지는 건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나 같았어. 내가 점점 쪼그라지는 것 같았어. 소실점이 되어 세상 모르게 사라질 것 같았지. 땅을 보고 걷는 버릇이 있었는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부쩍 늘어났어. 이별한 이들이 하늘 어딘가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아. 나란히 걷던 날, 땅을 보며 걷는 내게 누나가 그랬잖아. “주눅 들지 마. 시 앞에서만 겸손해지고.” 잔뜩 웅크린 어깨를 서서히 펴기 시작해.

사람들이 물어. 이제 좀 괜찮으냐고. 덧붙이는 말들은 이런 것이야.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그때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누나의 희미한 웃음이 보이기 시작해. 나도 모르게 손을 쥐게 돼. 놓치면 안 되는 것을 갖게 된 것처럼, 어떻게든 품고 있어야 하는 감정처럼. 남겨진 사람들은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니까. ‘남겨진’이라고 썼다가 ‘남은’이라고 고쳐 썼어.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썼다가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로 고쳐 썼어. 고쳐 쓰는 일이 잦아졌어. 어떤 감정을 슬픔이나 안타까움 등 한 단어로 묶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시간이었어.

슬픔에 깊숙이 잠겨 있으면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잖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도리질을 하면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에 몸을 내주잖아. 그리고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하지. 함께했던 시간을, 내가 몸담고 있는 여기의 시간과 상대가 묵고 있을 거기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억할 것이 남아 있어서 실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누나가 노트에 적은 문구가 누나의 유고집 제목이 되었다고 들었어. <가기 전에 쓰는 시들>이었다가 누나는 글자 ‘시’ 위에 빗금을 그었지. 그리고 그 아래 ‘글’이라고 고쳐 적었어. 가기 전까지 고쳐 적는 마음, 정확함을 향해 한없이 뾰족해지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어. 써야 할 시들을 가늠하고 단어를 고르고 그것들을 연결해 문장을 만드는 모습을 찬찬히 그려봤어. 독일의 시간, 뮌스터의 시간, 누나의 책상 위에서 흐르면서 고이던 시간을.

유고집인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 누나가 떠난 날인 개천절에 출간된다고 해. 2011년 5월17일에 누나는 이렇게 썼지. “오늘도 아프지 않고 글을 쓰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발병도 하기 전 죽음을 예감한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 나는 저 문장을 바꿔 누나에게 답장을 해. “오늘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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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심의에서 윈터 위원이 한국 정부 대표단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그 교육의 목표란 과연 무엇인가. 아동을 통해 돈을 벌려는 것인가, 아니면 아동이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인가?” 그러고는 지나친 입시경쟁 교육에 대해 지적했다고 한다. 아동을 통해 돈을 벌려 한다는 말은 교육을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일종의 학벌투기 현상에 대한 지적으로, 그 흐름 속에 일조하고 있는 한 명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혹자는 그래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것이 교육열 덕분이고, 작은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경쟁이 필수인데 속 모르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학벌투기 과열로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몇 해 전 수업 시간이 생각난다. 7월 무더운 어느 여름날 7교시 마지막 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 대부분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어떻게든 깨워서 수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이쪽 아이 일으켜 놓으면 저쪽 아이 다시 엎드리고 분위기가 전환되지 않아 어떡하나 고민하다 그 전 주에 가르쳤던 ‘비폭력 대화법’의 느낌말로 자신의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졸린, 지겨운, 피곤한, 답답한, 돌아버릴 것 같은, 심심한, 배고픈’ 이런 단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느낌 뒤에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한 명 한 명 공감하니 시들어가는 화분에 물 주면 살아나듯 하나둘씩 아이들의 머리가 들리고 눈빛에 생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아이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누구는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하루 7~8시간을 학교가 정한 시간표와 규율 속에서 보내고 대부분 집에 돌아가 3~4시간을 학원에서 보낸다. 이를 견디고 있다. 부모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미성년이기에 감내한다. 한 아이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특목고를 준비하던 아이였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행복한 꼴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사춘기가 반항기라 하더라도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으니 엄마는 자신이 잠깐 TV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면 예외 없이 ‘그래 가지고 특목고 갈 수 있겠느냐’고 야단을 친다는 것이다. 

이 시대 대한민국 학생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라는 깃발을 연신 흔들며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경주마처럼 달리라고 독려하지만 언제까지 아이들이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속아줄지 모르겠다. 부모세대가 사는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살아도 썩 행복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0.98명이라는 아주 낮은 출산율이 어려운 취업과 높은 집값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생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희망을 어디서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교육관료와 교사들은 교육의 목표가 ‘입시 경쟁 교육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이라도 하자. 그래야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의 의문에 공감할 수 있고 더 이상 회유와 협박으로 아이들을 현 교육제도에 묶어두려는 공모 행위를 멈추고 새로운 변화를 함께 모색할 수 있지 않겠는가?

<손연일 월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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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은 신에게 편애 받는다 여겨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입니다. 한 핏줄이라도 형제자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가 있습니다. 자식이 칭찬 들으면 부모는 흐뭇해서 웃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생이 잘나갈수록 심사 꼬이는 형도 있습니다. 부모 사랑 독차지하다 동생 태어나서 찬밥처럼 느끼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고개 못 가누는 어린 동생을 ‘때찌’하거나 동생 잘못을 고자질하기도 하죠. 그러다 생각이 크면서 자연스레 손아랫사람을 감싸고 우산이 되어주는 품 넉넉한 손윗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이 공평치 않고 어느 한쪽으로 더 기운다 느끼면, 관심과 사랑을 나눠 받는다기보다 빼앗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감정 그대로 큰다면 우애를 가장하면서도 동생을 부모와 이웃, 세상 모두에게서 경쟁상대로 보게 되겠죠.

속담에 ‘갈모형제’가 있습니다. 갈모는 주름진 원뿔 모양의 기름종이 고깔입니다. 얼굴과 비싼 갓이 비 젖지 않도록 갓 쓴 위에 벌려 덮고 턱 밑에 끈 매서 머리 우산처럼 사용합니다. 비 그치면 빗물 탁탁 털고 접부채만 하게 주름 접어 소매에 넣었죠. 갈모는 원뿔 형태라 꼭지 아래로 둘레가 점점 넓어집니다. 주름져 있어 원하는 만큼 더 넓게 펼 수 있습니다. 이런 갈모 모양을 두고 형제 간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보다 출중한 경우를 일렀습니다.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동생만 못한 형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럴 때 카인 같은 형이라면 어땠을까요. 갈모가 넓고 넓게 펴지듯, 동생이 잘나가고 칭찬 들을수록 못난 형은 꽁하다 못해 꼭지가 돌 겁니다. 그래, 어디 널리 펼쳐봐라, 시기심에 꼭지 콱 누르니 고깔이 판판해지다 위아래가 거꾸로 뒤집힙니다. 동생 못 되길 바랐더니 그 뾰족한 마음을 깔때기로 내려 받으면서도 형 잘되길 큰마음으로 우러르고 있었습니다. 역시, 갈모형제 맞았습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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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지나면 휴지가 되어버리는 신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건질 게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신문 사회면의 모퉁이에서 인상적인 기사를 읽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첫 문장이 ‘나, 너, 우리’로 바뀐다는 단신이었다. 아니 이게 뭔 기삿거리인가! 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창한 시대정신이나 교육이념 따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아이에게 한 사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첫 언어는 대단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어의 첫 문장은 몇 번 변했다. 광복 직후에는 ‘바다, 나라, 가자’였다. 내가 배운 건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이리 오너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나하고 놀자. 순이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였다. 천자문의 우주홍황은 아니더래도 왜 개까지 등장시켰을까.

스위치를 누르면 톡, 꺼져버리는 화면에서 며칠 전 짤막한 뉴스가 눈길을 끈다. “국립국어원이 명사 ‘됨됨이’와 ‘엉덩이’, 동사 ‘그리하다’, 형용사 ‘예민하다’ 등 몇 단어의 뜻풀이를 추가했다. (…) 됨됨이는 ‘사람으로서 지니고 있는 품성이나 인격’이라는 뜻으로만 썼지만, ‘사물 따위의 드러난 모양새나 특성’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가을 태풍에 번번이 발목이 잡혔다. 먼 산에 가지 못하고 유리창에 붙이는 신문지처럼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심학산에 올랐다. 늦털매미가 알뜰하게 운다. 인간처럼 말은 못하지만 몇 마디 음률로 성실하게 울다 간 올해의 보통 매미들. 일제히 종적을 감춘 여름의 처사들을 떠올리다가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요즘처럼 언어의 가치가 떨어진 때가 있었을까.

어둑한 산길. 말의 가치 하락을 궁리하는 내 머릿속과 장단을 맞추듯 숲속에서 상수리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툭 귀를 간지럽혔다. 오늘의 글감을 구하러 두리번거릴 때 개여뀌의 빨간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다. 집 근처 뒷산에서 보았다고 함부로 쉽게 볼 건 아닌 풀. 그 옛날 시골에서 잎을 갈아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던 풀. ‘개’가 붙은 독한 풀이지만 그 됨됨이를 잘 다스리면 약으로도 쓰이는 개여뀌.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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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볼티모어에선 기업이 시와 대규모 계약을 맺으려면 노동자에게 시간당 6.10달러의 최저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례가 만들어졌다. 당시 미국 연방 최저임금은 4.25달러였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생활임금 조례’였다.

생활임금은 물가인상률과 주거·교육·교통·문화·의료비 등 가계생활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활비를 보장해 주는 사회적 임금이다. 최저임금이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생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자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생활임금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볼티모어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생활임금 조례가 통과되며 임금이 거의 50% 상승하는 효과를 누렸다. 노동조건 향상과 노동조합 강화에도 힘을 실었다. 생활임금 요구운동은 최저임금 인상논쟁으로도 이어졌고, 다른 도시, 나라로도 확산됐다.   

국내에서도 경기 부천시와 서울 노원·성북구에서 2013년 최초로 생활임금제가 도입됐다. 현재 243개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 중 서울·부산 등 13개 광역단체와 70여개 기초지자체가 생활임금제를 시행 중이다. 최근엔 내년도 생활임금이 속속 결정되며 ‘생활임금 1만원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대전(1만50원), 충남(1만50원), 인천·경남(1만원), 경기(1만364원), 전남(1만380원) 등 광역단체 대부분과 충남 천안, 광주 북구, 인천 연수구 등 일부 기초단체들에서 내년도 생활임금이 1만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2년여간 최저임금을 받는 일자리들에 잠입취재해 <노동의 배신>을 쓴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전일제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생활임금을 벌지 못하는 빈민들이 많다면, 이들은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처벌을 계속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한 달에 영화 한 편, 외식 한 번에 망설이고, 가족들과 치킨을 시켜 먹기 위해 몇 주를 기다려야 하는 생활은 ‘처벌’이다. 평균 소득 3만달러를 누리며 사는 대한민국의 보통 이웃들 사이에선 특히 그렇다. 공공에서 시작된 생활임금이 빠르게 확산되어야 할 이유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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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검찰을 잘 구분하시나요? 법원에 검찰청 일을 보러 오고, 검찰청에 법원 일을 보러 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저도 옆 건물로 가시라고 안내하기도 합니다. 엄연히 하는 일이 다른데 시민들이 이렇게 혼동하는 이유가 뭘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법원과 검찰 건물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원을 찾기 위해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에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언덕밑 정동길 교회당 옆으로 가 보시죠.

서울시립미술관은 대한제국 시절 최고 법원 역할을 했던 평리원 자리였습니다. 평리원이 청사를 옮기면서 한성재판소가 그 자리를 썼습니다. 일제강점 후에 같은 터에서 자리를 옮겨 경성재판소를 지었습니다.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대법원이 그 건물을 그대로 씁니다. 대법원은 1995년 지금의 서초동 청사로 이전했고, 그 후에 서울시가 이곳에 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만, 미술관의 네모난 건물에 들어서면 가운데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건물 위에서 그 형상을 보면 ‘日’자 형태입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그들이 그렇게 설계한 건 이해하겠는데, 주권을 되찾은 후로도 그 건물을 대법원, 그러니까 우리 최고 사법기관 건물로 썼다니 의아합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때 대법원이 다른 곳에서 한옥 형태의 청사를 썼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랬던 곳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경성재판소 건물 안에는 판사실과 검사실이 함께 있었습니다. 법정도 있었고요. 아직까지 법원 청사와 검찰 청사가 나란히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얼마 전까지 사법부 소속 사법연수원을 마쳐야 검사가 되던 시절이 이어졌고, 일하는 건물도 나란히 서 있으니 시민들은 판사와 검사를 비슷한 일을 하는 같은 집단으로 인식해 왔던 겁니다.

이제 이런 인식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변화의 움직임이 강해집니다. 형사 사건에서 증거 조사를 공개 법정에서 제대로 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기록과 조서로 이루어지던 형사 사건 심리에 대한 비판 수위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기록을 집어던지란 말까지 나왔습니다. 꾸준한 논의와 협업 끝에 2007년 형사소송법이 개정됩니다. 그 법이 2008년 1월1일 시행되면서 법정을 중심으로 하는 진실 공방의 틀이 갖추어집니다. 형사 법정의 배치도 그에 따라 바뀝니다. 이 시기를 전후한 시점에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영장심사였습니다. 그전까지 구속영장이 청구돼도 판사가 피의자를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서류만 보고 구속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어색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언론에서 ‘영장실질심사’라는 말을 아직도 쓰고 있죠? 특이하게 ‘실질’이라는 말을 붙이는데요, 2008년 전까지는 구속심사를 형식적으로 했으니까, 이제부터 “실질적으로 해 봅시다!”라고 해서 생겨난 말이 영장실질심사였습니다. 지금은 판사가 피의자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를 듣고 구속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제는 실질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영장심사’라고 하면 됩니다. 

공개된 법정에서 진행되는 형사 사건의 증거 조사, 그리고 구속 전에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대면하고 구속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확인하는 절차는 이제 어느 정도 그 틀을 갖추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노력의 성과였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벌이는 변론이야말로 법원의 가장 큰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로 주권을 회복한 지 74년이 흘렀습니다. 대법원이 종전 경성재판소 건물에서 나와 서초동 청사로 옮긴 지 24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것이 아니었던 예전 것들은 이제 덜어내고 진정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사법개혁, 검찰개혁을 논의하면서 바라봐야 할 곳은 법원도 검찰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에 바뀌진 않았고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돌담길은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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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여성들이 선망하는 대표적 직군이 공기업 정규직이다. 임금·복리후생이 좋고, 저출산·고령화 시책에 따라 육아·정년 체계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자리에서 공분을 일으키는 채용비리 속살이 다시 드러났다. 임직원만 아는 ‘고용세습’과 ‘깜깜이 채용’이 청년·여성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렇게 비정규직으로 추천·채용돼 첫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평가·검증 없이 정규직까지 ‘프리패스’로 갔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곪아있는지 알 길 없는 시민들은 울화만 차오를 일이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오른쪽)과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왼쪽)이 28일 감사원의 공공기관 비정규직 채용 실태 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로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감사원이 30일 공개한 5개 공기업의 ‘비정규직 채용 및 정규직 전환 등 관리실태’ 감사 결과에는 각양각색의 채용 비리가 망라돼 있다. 이 감사는 지난해 10월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 의혹이 불거지자 서울시가 공익감사를 요청해 시작됐다. 동시에 정규직 전환 규모가 큰 인천공항공사·토지주택공사(LH)·한전KPS·산업인력공단도 감사가 이뤄졌다. 공기업들은 비정규직 채용 시 임직원이 추천한 친·인척을 비공개로 내부위원 면접만 거치거나 채용담당자에게 청탁해 뽑았다가 적발됐다. 서울교통공사의 전신인 옛 서울도시철도공사는 46명, 인천공항은 44명, LH는 5명, 한전KPS는 80명, 산업인력공단에서는 14명이 이렇게 불투명·불공정하게 채용됐다는 것이다. 공개 채용공고를 하지 않아 일반인 지원 기회는 봉쇄해놓고 벌인 일이다. 5개 공기업 정규직 전환자 3048명 중 재직자와 4촌 이내 친·인척 관계로 의혹이 제기된 사람만 333명(10.9%)에 달했다.

공개채용에선 여성 지원자 성적을 조작해 떨어뜨리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옛 서울메트로는 2016년 무기계약직 채용 시 ‘철도장비 운전’과 ‘전동차 검수지원’ 분야 면접에서 합격권 점수를 받은 여성 응시자 6명을 단순히 여성이 하기 힘든 업무라는 이유로 과락 점수로 고쳐 탈락시켰다. 대학 철도기관사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면접점수 1등을 받은 여성도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성차별을 피해 가지 못했다.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공기업의 깜깜이 채용은 뿌리를 뽑아야 할 사회적 적폐다. 앞에선 실력대로 뽑겠다고 ‘블라인드 면접’을 확대하면서 뒤로는 기득권과 연(緣)의 고리를 놓지 않는 두 얼굴인 셈이다. 정부는 기회마저 불평등한 세상에 몸서리치는 청년들과 이중차별을 받는 여성들의 분노를 직시하고, 환골탈태한 재발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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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30일 “검찰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며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조국 법무장관을 통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지시했다. 대통령 발언은 검찰개혁을 요구한 100만 촛불집회 이후 나온 것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국민의 외침, 공감에 대통령이 ‘검찰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 방안을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다. 요체는 이를 지금 당장 이행하는 것이다. 검찰개혁안 마련은 ‘조국 수사’와 별개로 검찰이 이행할 수 있으며 이행해야 한다. 

대통령의 검찰 수사관행 개선 주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7일 “검찰권 행사의 방식과 수사관행 등의 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경고였다. 당시 검찰은 “헌법 정신에 입각, 엄정히 수사하고 국민이 원하는 개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촛불집회 이후 윤 총장은 “검찰개혁을 위한 국민의 뜻과 국회의 결정을 충실히 받들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경고, 국민의 요구에 대해 ‘모양은 갖추면서 변화는 없는’ 원칙적인 답변으로 응수한 셈이다. 이에 대통령은 “수사권 독립은 대폭 강화됐으나 검찰권 행사의 방식이나 수사관행, 조직문화 등에 있어서는 부족하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발언의 무게는 사흘 전과 다르다. 법무장관을 통한 지휘권을 발동한 것이다. 최후통첩인 것이다. 검찰은 이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검찰개혁은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다. 무소불위 검찰권력의 분산 없이는 검찰이 정치권력과 공생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검경수사권 조정 및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 법안은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이는 정치권이 책임질 일이다. 문 대통령의 지시는 검찰이 할 수 있는 개혁을 하라는 주문이다. 그러면서 개혁안 시행은 조국 가족비리 의혹 수사 뒤로 미루라고 했다. 수사압력으로 해석될 것을 경계한 것이다. 당연한 조치다.  

이날 출범한 제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도 비입법 개혁방안을 우선 추진한다고 한다. 피의사실 공표·인사·조직문화 등 세부적인 개혁안을 마련해 검찰의 권력화를 제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검찰 내부 게시판에는 “적폐청산 때는 무한 신뢰를 보내더니 ‘내 편’에 칼이 들어오니 수사관행을 바꾸라 한다” 등 비판의 글들이 게시됐다고 한다. 이는 윤 총장의 다짐과는 상충한다. 검찰의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사관행의 잘못을 개혁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정치권의 문제와는 별개의 일로 국민에 대한 검찰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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