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을 꾸었다. 남해의 어느 섬에서였다. 그 섬을 고향으로 둔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펜션을 운영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평생 이름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멀고도 낯선 섬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 기차와 버스와 택시와 배를 갈아타고서 하루를 꼬박 바쳤다. 친구가 한번 오라고 청했다지만, 언젠가 한번 가겠노라 약속했다지만, 그렇게까지 애를 써가며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무슨 비경이니 절경이니 이름난 곳도 아니고, 기도발 좋은 암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낚시꾼들에게는 좀 알려진 모양이나 낚시엔 취미가 일절 없는 데다, 온갖 신선한 해산물이야 섬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수혜라 여겼으니, 기껏해야 고구마와 고등어가 특산물이라는 그 섬에 무슨 특별한 환상을 가졌겠는가. 그런데 그가 미끼를 던지듯 보내준 고구마는 ‘고구마가 뭐 고구마지’ 하던 생각을 접게 만들 만큼 맛있었고, 때마침 철을 맞아 제대로 기름이 오른 산 고등어를 들먹이며, 산 고등어 맛도 모르면서 무슨 음식 장사냐 도발까지 하기에, 그래 어디 그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산 고등어 맛이나 한번 봐보자, 덥석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나를 이끈 줄은 내 지독한 식탐이었다.

어쨌거나 섬은 섬이었다. 아름답고 고즈넉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일몰이 아름다운 절벽과 각종 이름을 건 바위와 몽돌 해수욕장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토지매매, 펜션분양과 같은 팻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거슬리긴 했지만, 곧 케이블카가 건설되고 일주도로도 완성될 거라는 친구의 자랑이 오히려 아쉬웠지만, 아직까지는 손때가 덜 묻은 순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의 저녁 상차림은 기대 이상이었다. ‘고등어가 뭐 고등어겠지’하던 생각을 완전히 날려버릴 만큼 깊고 진했던 산 고등어 회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맛본 꼴뚜기인지 오징어 새끼인지 호래기인지 아무튼지 산 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먹는 맛이며, 그 옆에 딸려 나온 온갖 해초와 해산물들의 향연까지. 내가 문 미끼가 고구마든 고등어든, 섬으로 연결된 줄이 우정이었든 약속이었든, 어쨌거나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는 섬에 딸린 어떤 무인도 얘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는 꽤 많은 인구가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살던 섬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고, 멧돼지들이 자유롭게 번식을 하며 사는 섬이 되어 버렸는데, 멧돼지들이 섬에서 죽지 않고 개체수를 늘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섬의 토양이 손을 대지 않아도 해를 바꿔 고구마가 맺힐 정도로 윤택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수년 전에 섬 전체에 무슨 병이 돌아 고구마 농사를 망친 적이 있었는데, 그 병이 돼지들의 섬까지 미쳤는지 어쨌는지, 어느 날 밤 돼지들이 섬을 빠져나와 본섬을 향해 헤엄쳐 오더란다. 새끼돼지들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무리를 지어 바다를 건너오던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구경 나온 동네사람들이 한바탕 배꼽 잡고 웃으며 지켜봤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돼지들이 걸핏하면 고구마 밭을 습격해 헤집어놓는 통에, 그때부터 멧돼지와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돼지가 한번 왔다 가면 남아나는 게 없다고 멧돼지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 순간 나는, 나름의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바다를 건너는 멧돼지 가족의 이미지를 언젠가 소설에 꼭 써먹어야겠다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읽은 ‘돼지의 보복’인지 ‘돼지의 보은’인지 하는 제목의 일본 소설이 생각났고, 소설의 배경이 오키나와였는지 야쿠시마였는지 헷갈리다가, 결국 돼지가 보복을 한 것인지 보은을 한 것인지 결말도 어렴풋했다. 돼지가 술집을 습격했던가, 죽은 돼지를 삶아먹고 배탈이 났던가, 돼지 때문에 화를 면했던가.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선착장 근처의 한 카페에 이르렀고, 그가 내게 고구마 밑밥을 깔고 고등어 미끼를 던지고 인연의 줄을 잡아당긴 속내를 알게 되었다. 케이블카와 일주도로가 마무리되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건 물론이고 관광객이 엄청 몰려들어올 거라는 것. 5000만원이면 그 카페건물을 살 수 있다는 것. 단순투자로도 좋겠지만 거기서 식당을 하면 아주 잘될 거라는 것. 그 북적거리는 서울에서 그 높은 임대료를 내며 식당을 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돈을 많이 벌 거라는 것.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에 살면 소설도 훨씬 잘 써질 거라는 것. 그 맛있는 고등어와 호래기를 매일 먹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는 것. 이런 기회가 언제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런 기회는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는 거라는 것.

그날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바다를 건너는 멧돼지 꿈을 꾸었다. 멧돼지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쿰쿰쿰 숨소리까지 지랄 맞게 생생한 꿈이었다. 수면 위로 주둥이를 내밀고 죽기 살기로 헤엄쳐 오던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고 어찌나 우습던지. 꿈을 꾸면서도 돼지꿈은 좋은 거라던데 생각을 했다. 돼지가 떼로 나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나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면서. 참으로 무섭고도 슬픈 꿈이었다. 아 인간아, 인간아. 아 식탐아, 빌어먹을 식탐아. 다시 안 올 기회를 버리고 섬을 떠나면서 그제야 소설 제목이 확실히 떠올랐다. ‘돼지의 보복’이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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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오면 항구를 떠나야 하는 이상한 항구가 있다. 서귀포 강정마을 ‘군과 민간이 공존하는 민군복합형관광미항’. 올해 가을 몇 차례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는 동안 항구에는 단 한 척의 군함도, 크루즈선도 없었다. 이곳의 선박들은 부산항, 진해항, 제주항 등 안전한 정박지를 찾아 ‘피항’했다. 태풍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법환마을, 강정마을, 범섬 입지에 해군기지를 건설한 이유가 뭘까. 군사기지로서 은폐가 불가능한 ‘곶’의 지형에 위험한 항구를 왜 만들었을까.

해군은 2009년 ‘기본계획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에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별 입지타당성 평가를 공개한 적이 있다. 화순, 위미 등 8곳의 후보지 중 강정마을이 최고점을 받았다. ‘직선형 해안’이고 ‘배후 도로와 교통여건은 다소 불리’하지만, ‘매입지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고 주민과의 마찰 최소’가 장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지난 10년 동안 경찰에 연행된 ‘강정 지킴이’는 700명이 넘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정 주민에게 34억원 구상권을 청구하기도 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50억원짜리 방파제 케이슨 6기, 2014년 태풍 너구리로 케이슨 3기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여러 논란에도 제주 해군기지는 2016년 준공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전한 항로가 없었다. 지금까지 ‘쉬쉬’하며 부랴부랴 ‘길도 없는 집’을 만든 것이다. 2012년 국가정책조정회의는 ‘보다 더 안전하고 원활한 입·출항을 보장하기 위해’ 신규 30도 항로를 결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제주특별자치도와 해군은 2012년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올해 제주도는 15만t급 대형 크루즈선 입·출항을 위해 시급히 신규 항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해군도 항공모함을 운용하려면 ‘기존 77도 항로’보다 안전한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신규 항로는 최소 15~18m 수심이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내려니 또 다른 암초가 나타났다. 신규 항로에 10m 전후 저수심 암반 지역이 폭넓게 발견된 것이다. 제주도는 수중 발파해 길을 내겠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그 계획을 불허하였다. 그 암초가 국내 연산호 최대 군락지 ‘산호정원’이기 때문이었다. 밤수지맨드라미, 검붉은수지맨드라미, 해송, 긴가지해송 등 멸종위기야생생물과 천연기념물의 존재는 해군이 작성한 환경영향평가서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제주도와 해군은 신규 항로가 천연기념물 제421호 문섬범섬천연보호구역, 제442호 제주연안연산호군락,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핵심지역을 훼손할 것이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상식적, 폭력적 절차로 제주 해군기지는 고삐 풀린 채 강행되었다. 평화롭던 강정 주민을 쫓아내고 구럼비를 발파했다. 강정 등대와 서건도의 산호 생태계는 매립되고 사라졌다. 회복할 수 없는 피해는 고스란히 연약한 것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둔 집도 태풍이 오니 모두 떠나버렸다. 

대양해군, 자주국방을 외친 위정자들은 강정 주민과 싸웠다. 국가안보가 위기상황인데 아직도 연산호 타령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은 10년 이상 되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신규 30도 항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이라도 지난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제주 해군기지를 유지할지 말지, 엄밀히 재평가해야 한다.

<윤상훈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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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통해 조국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하였던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광장정치에 불을 댕겼다. 개천절에는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범보수 진영의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참가인원이 5만인지, 200만인지, 300만명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

‘조국 사퇴’와 ‘조국 수호’의 광장 집회가 거듭할수록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민주주의는 퇴보할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국민통합의 약속을 저버리고 독선의 정치를 일삼은 집권세력의 책임이 크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이 정권이 흠집난 도덕성을 덮기 위해 다시 촛불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촛불집회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반영하여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통치행위처럼 보인다. 여기서 파시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파시즘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파시즘은 권력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반대세력을 포용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안 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지난 5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8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초역사거리를 중심으로 교대역과 예술의전당, 대법원, 누에다리 네 방향으로 모여 앉아 함께 행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민주주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지 않을 때 위기에 직면한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의 지도자가 비민주적 행태를 보이는 새로운 파시즘을 목격하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정권이 붕괴하였다고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한나 아렌트의 경고가 현실이 되고 있다. 파시즘도 마찬가지다. 민주적 열린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야수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집권세력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정치적 불의를 처벌하기 위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으로 나갔을 때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할 것이라는 뜨거운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기득권 세력은 좌우와 관계없이 똑같다는 차가운 인식만이 남았다.

이 정권이 설령 ‘광장 민주주의’로 집권하였다고 하더라도 제도와 절차를 통한 민주주의 개혁에 힘썼어야 한다. 광장의 힘을 맛본 정권이 광장의 유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정권이 다시 민심을 반영하는 촛불집회의 이름으로 광장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에 호소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광장의 민중을 동원할 때 여지없이 파시즘이 함께 등장한다. 지금처럼 의회정치가 실종되고 광장정치만 남아 있게 되면 파시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첫째, 파시즘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편화된 민중을 결집한다. 기득권 세력의 불법과 비위를 밝히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참여행위이지만, 부정과 불의의 의혹을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광장에서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면 파시스트 중우정치이다. 검찰개혁을 위한 촛불집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하더라도 ‘검찰개혁=조국지지’라는 프레임이 굳어진다면,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나갔던 상당수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국민의 반은 등을 돌릴 것이다.

둘째, 파시즘은 권력 쟁취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가 이미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되어 있음에도 운동권 출신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적을 찾아낸다. 타도할 부정부패 세력이 있을 때 저항 운동은 명료하고 강력하다. 싸울 상대가 뚜렷하지 않을 때 운동권은 스스로 부패한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낙인찍는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분법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선악의 이원론에 갇혀 있는 것이다.

셋째, 파시즘은 차이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한 의견만 있는 곳에서는 건강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조국 사태에 대처하는 집권세력은 일사불란하다. 청와대, 민주당, 친정부 시민세력 모두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소위 작가, 지식인이라는 운동권 엘리트들이 나타나서 궤변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집단성이 도덕성을 넘어설 때 파시즘은 고개를 쳐든다.

넷째, 최고의 통치자가 민중과 직접 소통하려는 방식이 파시즘이다. 독일 철학자 베냐민이 파시즘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이 민중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민심을 듣겠다고 의회를 무시하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오늘날 민심을 조작하고 호도할 수 있는 많은 매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시즘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한국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운동권 좌파 정부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엿보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요즘 광장만 있고 의회는 없다. 정쟁만 있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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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에서 촉발된 한·일 간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며, 이러한 한·일 간의 대립은 그동안 일정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는 독도 문제에도 예외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정치인 및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독도 해병대 주둔 등 독도 관련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의견들이 다시 제시되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전쟁 불사론도 언급된 바 있다.

정부는 연례적인 독도방어훈련을 동해영토수호훈련으로 확대해 진행했으며, 그 대상도 독도 중심 훈련에서 벗어나 울릉도와 동해 일대를 훈련 구역에 포함시켰다. 해양수산부, 해군, 해경이 ‘범해양기관 정책협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독도 문제는 한·일의 과거사와 연동된 역사문제이지만 영유권, 해양경계 획정, 분쟁 해결 등이 고려되어야만 하는 국제법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독도는 일반 육지와 다른 도서(島嶼)로서의 특별한 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관할해야 하는 대상이 육지와 함께 바다라는 점이 항상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독도방어훈련이 동해영토수호훈련으로 그 대상 범위가 확대된 것이나, 해양 관련 정부 주요 부처인 해수부, 해군, 해경이 정책협의회를 구성하여 정책의 무게가 바다에 비중있게 실리도록 한 것은 독도 문제의 접근과 관련해 바람직하다고 평가된다.

다만 영유권과 관련된 정책 결정은 현시대의 국제법의 법리나 추세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필리핀과 중국의 분쟁 및 관련 중재사건에서 보듯이 최근 해양에서의 분쟁 사례를 보면 군사적인 무력 충돌보다는 어선들의 무단진입과 불법조업, 우익단체의 상륙 시도 등 민간 부문의 갈등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비군사적 분야에서의 적절한 대응은 현대 국제법의 분쟁 관리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안보를 전제로 하는 군대와 치안을 전제로 하는 경찰의 본질적인 차이는 분쟁 발생 시 적용되는 법원칙 및 규범이 다르다는 데 있으므로,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군사적 분야에서 정부의 독도 관리 및 분쟁 발생 시의 대응능력이 충분한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즉 독도 영유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분쟁 관리가 최우선적 정책 과제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발생 시 대응도 대응이지만 예방적 차원에서의 관리에 정책 운영의 방점이 있어야 하는데, 최근 국회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독도 해역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할 경우 우리 함정이 인근까지 도착하는 데 일본 함정보다 3시간이나 늦는 등 운용의 묘에서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

현재 독도에는 경북지방경찰청 울릉경비대 산하 경찰조직인 소대 규모의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도서로서의 특별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독도의 성격, 현재 한·일 간 위기 국면에서 독도에 대한 국제법적 규범 내에서의 관리라는 측면을 감안하면 현재의 독도경비대와 함께 해양영토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해경의 독도 공동주둔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독도의 영토 및 해양관할수역에 대한 현대 국제법 내에서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해경의 역할을 강화하는 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

<이석우 |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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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 이젠 한참 전이지만 그때 강의에서 20세기 영화를 예로 들면서 수업을 하면,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강의에 영화를 끌어들여 쓰는 이유는, 나와 학생들이 모두 본 공통의 텍스트 위에서 이야기를 하면 주제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학생들이 보지 않은 영화 이야기를 해서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내 또래 친구들에겐 익숙한 영화들이 학생들에겐 낯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생긴 해프닝. 그 이후에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생기면 나와 듣는 사람이 어떤 공통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을지 생각을 많이 한다. 

공통의 텍스트가 떠오르지 않으면 공통의 텍스트로 삼을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이틀 전, 주말에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에서 ‘제12회 우리대전 같은 책 읽기’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그동안 ‘올해의 책’으로 뽑혔던 책들을 전시해 두었다. 편혜영, 구병모, 한강 등 반가운 이름들이 보인다. 올해의 책은 전치형의 <사람의 자리>. 다른 해와 달리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한 에세이가 선정되었다. 

과학을 다룬 책으로는 드물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쉬운 글이었다는 뜻인데, 객석에 앉아 낭독을 들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낭독자가 책 속의 글 중에서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를 뽑아 읽었다. 제주도 특성화고 학생 이민호가 현장 실습 중 사망한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현장실습생은 사람 같지 않은 기계 옆에 혼자 남겨졌다. 프레스에 몸이 눌릴 때에도 혼자였다. ‘파렛타이저 혼자 보고 있습니다.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 관리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혼자 기계를 돌보다가 죽었다. 1970년 이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계속 들어왔던 한국 사회가 2017년에는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공손해서 더 아픈 부탁이다.”(인용)

이런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슴 아픈 사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라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다. 

낭독과 북토크가 이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내 생각은 ‘한 책, 한 도시(One Book, One City)’ 운동으로 옮겨 간다. 1998년, 미국 시애틀의 공공도서관에서 시작했던 프로그램이 2001년 시카고에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선정해 함께 읽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해하면서 우호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앵무새와 편견, 혹은 다른 이유로 ‘어떤 것’을 해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겹쳐 쓴 소설인데, 사람들은 수많은 토론과 치유의 과정을 통해 갈등과 화해의 문제를 생각했다. 

이후 이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순천에서 시작해서 부산, 원주, 청주, 대전 등 많은 도시들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다.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시도 자체를 끔찍해한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이런 독서꿀벌무리를 싫어한다. … 떼거지로 몰려나가 모두 함께 치킨 맥너겟을 먹거나 진저리쳐지는 일을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그렇다. 서울 시민 1000만명이 모두 같은 책을 읽고 같이 보는 것은 호러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블룸의 걱정은 기우일 것이다. 같이 책을 읽자고 청한다고 모두 읽지도 않을뿐더러 일 년에 한 권쯤,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는 것이 집단적인 착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한 권의 책이 전국적인 베스트셀러로 기계적으로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에 맞게 세심하게 준비되고, 그 책과 관련된 전시, 공연, 그리고 읽기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제공된다면 독서율을 높이면서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민주 정치의 훈련을 겸하는 훌륭한 시도가 되리라 믿는다.

대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각 도시의 이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찾아보고 지도를 그려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운동들이 번성하는지, 힘을 잃었는지 궁금하다. 어떤 공통의 텍스트를 골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지를 훑어보면 이 시대의 문제와 그것을 건너는 방법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려본 지도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는 데 힌트가 되지는 않을까?

<주일우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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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여론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활동하다 죽는다. 또 어떤 여론은 다른 여론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기도 한다. 그래서 여론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면 다양한 각도에서의 기준과 판단이 필요하다. 여론이 눈에 보이는 빙산의 부분이라면, 민심은 빙산의 하부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와 같다. 여론은 수시로 표면화되지만, 민심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노출되지 않는다. 여론은 모순을 먹고 산다. 모순이 크면 여론도 커지고, 모순이 깊어지면 여론과 함께 민심이 분출하기도 한다. 모순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판단이 대립하는 상태이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의 논문 ‘모순론’에선 모순을 물질의 운동원리로 정의한다. 모든 물질은 모순 상태에서 생성되고 발전하며 소멸한다고 언급한다. 이 때문에, 모순은 활동의 궤적이 여론과 유사하게 보인다. 모순론은 모순을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으로 나눈다. 주요모순은 중심이 되는 모순이고, 부차적 모순은 주요모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모순이다.

최근 가장 뜨겁게 달궈진 여론. 검찰의 수사선상에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의 가족 문제와 조국 장관의 지휘를 받는 검찰의 개혁 문제일 것이다. 조국 장관이 즉시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은 5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여론은 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는 법무부 장관이 법무를 관장하고 있다는 상황적 모순에 놓여 있다. 반면에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공감하는 여론 또한 54%였다. 이는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가 검찰개혁의 지체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상황적 모순에 놓여 있다. 서로 상충되지만 공존하며 양립하고 있다. 무엇이 주요모순이고 부차적 모순일까.

이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맥락적 사고이다. 맥락적 사고는 상황적 모순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고, 현실감과 균형감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지혜다. 다시 말해 무엇이 좀 더 심각한 모순인가, 또는 무엇이 좀 더 공분을 살 만한 모순인가를 구분하는 사고체계라고 볼 수 있다. 주요모순으로 표출된 민심은 무엇일까. 검찰개혁 주장에 대한 공감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공감이 61%로 나타났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에 대한 여론도 77%로 나타났다. 여론의 성격과 쏠림의 크기로 볼 때, 검찰개혁과 공수처 신설 여론은 조국 장관 거취와 서초동 촛불집회 여론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여론이자 주요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검찰이 가지는 모순과 조국 장관이 가지는 모순을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학습기회를 제공한 사건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의하면 모순의 특수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마도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이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과 관련하여 낸 논평의 마지막 부분이 이를 잘 방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호 참사 수사는 왜 이렇게 하지 않았나,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 수사는 왜 이렇게 하지 않았나, 장자연 사건 수사는 왜 이렇게 하지 않았나, 김학의 성접대 동영상 사건 수사는 왜 이렇게 치열하게 하지 않았나.” 지난주 임은정 부장검사의 국정감사장 발언도 이러한 심증에 힘을 싣는다. “검찰이 검사의 공문서 위조엔 조직적 수사 방해에 나서 영장을 기각하고, 조국 장관 부인의 사문서 위조엔 특수부 수사과 압수수색으로 대처하는 것은 이중잣대이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검찰개혁을 위한 조국 장관의 임명 모두를 선이라고 가정하자. 서로가 시대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누군가를 고의로 죽이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장관과 검찰총장은 주요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실낱같은 국민 신뢰가 끊어지지 않도록 머리 숙이고 최선을 다하고 협력해야 한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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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난 게 아니라

도착한 거예요.

추운 생명으로 왔지요.

추운 몸으로 왔어요.

그때가 아마 늦은 밤이었지.

북극의 생모(生母)가 찾아왔어요.

눈 포대기에서 보채는 

동생들을 안고 얼음을 짜 먹이며

얼음의 말로 말을 가르치듯.

이 밤 어느 웅덩이에 고여 있을 

그대들.

수없는 밤 고여 있었을 그대들.

머리맡에 밤바람이 

주저리주저리 한 말.

그 밑바닥 말.

바닥에 가 닿은 말.

그대를 잉태했던 북극의 어머니가 

평생 물걸레질한 그 얼음 바닥의 

무늬가 손금에 박힌 것처럼.

굴복할 수 없는 무의 물결처럼.

궁핍처럼 스스로를 더 강하게 

얼려야 하는 얼음처럼.

조정권(1949~201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정권 시인은 세속의 시를 고독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라고 쓴 시 ‘산정묘지 1’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일생(一生)의 시편들은 속악한 물신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신의 드높음을 노래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인간 본래의 가난함을 노래한다. 우리 존재가 “추운 생명”이요, “추운 몸”이라고 말한다. 말함으로써 우리 본래의 외로움과 적막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격조, 고고함, 염결(廉潔), 견딤, 정신의 고요하고 청빈한 산정(山頂)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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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남북군사합의는 남북 최초의 군비통제 합의라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서명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기대와 달리 9·19 남북군사합의에 이어 실질적인 조치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안보상황 때문이다. 남북군비통제는 남북 간 의지뿐만 아니라 주변의 안보위협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북한은 9·19 남북군사합의 서명 이후 우리의 첨단 군사력 건설을 비난하면서 더 이상의 실질적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이 남한의 첨단 전력강화를 9·19 군사합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주변 안보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남북군비통제만 고려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다. 북한은 우리 군의 첨단 군사력 건설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남북이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안보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군이 국방개혁을 통해 해군·공군 위주의 첨단전력을 강화하려는 것은 주변 안보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이다. 과거 우리 군 책임자들은 첨단무기로 북한의 핵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며 3축체제 도입을 주장했다. 군사전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3축체제로 핵무기를 상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첨단전력이라도 핵무기를 상대할 수 없다. 3축체제를 구축해서 북한의 핵무기에 맞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틀린 말이다.

최근 중국은 자신들의 육지가 넓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서해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바다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중간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국제적인 해양경계획정의 기준을 무시하고 있다. 중국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군함을 동원하여 힘으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경계선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동해안으로 정보함을 보내 우리의 군사정보를 탐지하고 있으며, 정찰기를 보내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 군항기가 우리 영공을 침범하고 일본이 우리 해군 함정을 위협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최근에는 국방백서를 통해 앞으로 독도에 군항기를 투입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 군이 첨단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위적 조치이다. 지금 우리 군은 북한보다 훨씬 까다롭고 강력한 군사적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만일 우리 군이 중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우리는 중국이 요구하는 해상경계선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북한과 중국의 해상경계선 획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남한이 밀리면 북한도 밀리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미 남북은 공동의 이익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동해에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우리의 이런 자위적 조치가 자신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이 우리 군의 첨단전력강화를 9·19 군사합의정신에 위배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잠수함 건설을 남북군비통제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상호 비난만 하면 남북의 평화는 요원하다.

남북 공히 남북관계의 긴장완화 노력과 주변 안보위협에 대한 대응을 정치하게 분리해낼 수 있는 냉철한 현실 인식능력을 필요로 한다. 남북 간 군비통제 노력을 통해 평화를 구조화하고 제도화하는 하는 한편 주변 안보위협에 대해서는 공동 이익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은 우리 군의 첨단 전력도입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에 앞서, 한반도 전체의 이익을 위해 남북이 무엇을 어떻게 협조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남북 군비통제 노력과 점증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은 남북이 같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남북이 평화를 구축하고 주변의 안보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지 못하면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19세기의 운명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냉전적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남북 공히 냉전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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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인 5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를 포위한 대규모 촛불집회가 다시 열렸다. 참석자들은 ‘조국 수호’ ‘검찰개혁’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1주일 전보다 참가자가 더 늘어 경찰은 통제 구간을 400~500m가량 확대했다고 한다. 개천절인 3일에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원, 보수 기독교단체, 태극기부대 등 범보수세력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촛불집회의 맞불 성격이다. 보수단체들은 오는 9일(한글날) 같은 곳에서 비슷한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양 진영의 대중집회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갈수록 세 대결 양상으로 치달을 것 같다.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위해 집회를 여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직접민주주의는 시민의 대표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문제는 제도권 정치가 이런 시민의 뜻을 수렴하고 조정하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정치 실종’ 상태가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광장에선 조 장관 진퇴를 뛰어넘어 공정과 불평등, 세대 문제, 검찰개혁, 언론개혁 등 숱한 이슈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1980년대 반독재,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이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한목소리 집회였다면, 지금은 대규모 대결적 집회가 진행되는 최초의 사례다. 그래서 ‘시민 대 시민’의 대결 구도란 분석도 나온다. 대규모 세력전으로 사회갈등과 국론분열은 극심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책임 있는 정당들이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사회적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 절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대로 대의민주주의가 계속 작동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더욱 거리로 나서고, 정치는 영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지난 5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을 사이에 둔 서울 반포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촛불을 밝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온 것은 정쟁만 난무하고 정치는 찾아볼 수 없는 국회의 무능함 때문이란 점을 여야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검찰개혁만 하더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는 데 이견이 없다. 한데도 국회는 패스트트랙에 올라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놓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논의한 적이 없다. 검사장 직선제 등 검찰에 대한 국민통제를 제도화할 다른 방안도 많겠지만, 이 역시 난상토론을 벌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서초동에 나온 시민도, 광화문의 시민도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다. 어느 쪽이 더 많이 나왔다며 참가 인원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이 와중에 편 가르기를 부추기고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건 스스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르는 것과 같다. 시급한 국정 현안이 사실상 올스톱된 지 오래다. 정치 부재로 꼭 필요한 국정 현안들의 논점이 흐려지고 집결되어야 할 시민의 에너지가 분산되는 건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여야는 이제라도 지지층을 선동하는 정치를 접고 실종된 정치를 복원하는 데 전력해야 한다. 시민 여론을 수렴하고 조정하고 결정하는 건 결국 국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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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가 국제기구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7~11일 영국 런던 국제해사기구(IMO) 본부에서 열리는 ‘런던협약·의정서 당사국총회’가 무대이다. 이 총회는 폐기물의 해양투기 금지에 관한 당사국의 이행방안을 논의하는 회의체다. 정부는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와 공조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의 위험을 회원국들에 알리고 협조를 구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원전 오염수 처리에 나서도록 하려는 것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하루 150t의 오염수가 배출된다. 그런데 저장탱크에 보관 가능한 오염수는 2022년이면 용량을 초과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지하 매립, 수증기 방류, 전기분해 후 수소배출, 해양 방류 가운데 해양 방류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오염수를 세슘 흡착과 다핵종제거설비를 통해 정화하고, 이를 통해 제거되지 않는 삼중수소는 농도를 희석시켜 해양 방류를 하겠다는 것이다. 돈이 덜 들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전력 내부 문서를 보면 정화처리를 거쳤다고 하는 오염수에 세슘 등 방사성물질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삼중수소는 무해하다’는 일본의 주장과 달리 이를 장기간 섭취하면 인체에 큰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오염수 방류는 특히 한국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도 지하수와 섞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오염수가 있으며, 이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베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이 ‘잘 컨트롤되고 있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는 한국 등 인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류를 타고 대양을 흐르면서 전 세계에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공론화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일본이 성의 있는 자세로 해결에 나서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 스스로 후쿠시마 원전 환경실태를 공개하고, 피해방지에 적극 나서는 것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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