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인’ 역사는 역사(驛舍)에서 시작됐다. 호남선이 놓이면서 태인과 가까운 마을에 기차역이 생겨났다. 유서 깊은 태인이 인접해 있어 역 이름을 ‘새로운(新) 태인’이라 지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개통되고 아주 작은 마을 ‘서지말’에 기적이 울렸다. 천둥소리보다 컸다. 철마는 거침없이 달려와 신식 물자를 내려놓았다.

신태인역은 수탈의 거점이었다. 일제는 인근 곡창지대에서는 가장 큰 도정공장을 세웠다. 쌀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신태인으로 향하는 길마다 볏가마를 실은 수레와 마차가 줄을 이었다. 역 구내에 쌓여 기차를 기다리는 쌀가마가 하늘을 가렸다. 쌀이 흔하니 돈도 흔했다. 역 앞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약국 등이 들어섰다.

기적 소리는 모두를 들뜨게 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태인이란 역명은 1935년에 신태인면이란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40년 신태인읍으로 승격했다. 거의가 흘러온 사람들이었다. 유민들은 고향에 차마 묻지 못한 사연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건드리면 아팠다. 서로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전쟁도 이곳에서는 많은 피를 쏟지 않았다. 뿌리 없는 사람들은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평야라서 볼거리는 없었지만 노을이 내리고 동진강이 흘렀다. 고운 노을에, 어진 강물에 고된 하루를 씻었다.

1960년대는 ‘신태인 전성시대’였다. 인구가 3만명에 육박했다. 장날에는 장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소시장이 특히 유명했다. 종일 소 울음이 낭자했다. 소를 사고파는 일이 엄중하여 어깨 벌어진 사내들이 소와 돈을 지켰다. 아이들은 시장 바닥에 떨어진 동전만을 주워서도 팥죽을 사먹었다. 극장이 우뚝 서고 목욕탕 3곳, 예식장 3곳, 다방 3곳이 생겨났다. 또 유곽(遊廓)도 있었다. 김제의 어느 땅 부자는 추곡수매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면 신태인 유곽을 찾아왔다. 겨울 한 철을 기생과 함께 보내고 이듬해 모내기철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읍내에 초등학교가 4개나 있었다. 그럼에도 교실이 모자랐다. 한 반에 70명이 넘었고,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다. 글 읽는 소리에 학교가 들썩거렸다. 운동회 날은 운동장이 시장터보다 더 붐볐다. 아이들보다 어른들 잔치였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신태인역에 해방, 전쟁, 새마을운동, 독재, 유신, 민주화운동을 내려놓았다. 천대 받은 전라도가 다리를 절며 내리기도 했다.

어느 때부턴지 기차는 신태인에 돈과 활기를 실어오지 못했다. 쌀과 기차는 ‘최고’가 아니었다. 더 이상 신태인을 떠받치지 못했다. 기적 소리가 자동차 경적보다 작게 들렸다. 돈 냄새에 민감한 시장통 상인들이 먼저 도시로 옮겨갔다. 이내 산업화, 도시화 바람이 불어왔다. 자식들이 고향을 떠났다. 누구는 공부하러, 누구는 취직하러, 누구는 무작정 기차를 탔다. 기적 소리가 슬픔을 머금었다.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의 어깨가 흔들렸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어머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부모들이 갑자기 늙었다. 홀로 된 어머니들이 많아졌다. 빈집이 생겨났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읍내로, 읍내 사람들은 정읍이나 김제로, 그곳 사람들은 전주나 서울로 빨려 들어간다. 돈과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돈과 사람이 몰려간다. 2019년 가을, 신태인읍에는 5837명이 살고 있다. 4개 초등학교를 통합하고, 스쿨버스로 어린이들을 ‘모셔오는’데도 올해 입학생은 40명이었다. 이제 아기의 탄생은 아주 드문 일이며 마을뿐 아니라 읍내의 경사이다. 읍장이 케이크를, 이장이 미역을 사들고 달려간다. 신태인읍에 속한 11개 이(里)와 49개 마을에서 올해(9월 말까지) 태어난 아기는 13명이었다.

1940년 신태인과 함께 읍으로 승격한 영동, 예산, 금산, 보성, 장흥, 의성, 주문진은 어떤지 모르겠다. 철도의 고을 신태인보다야 낫겠지만 아마도 많이 수척해졌을 것이다. 서울특별시도 계속 특별할 수만은 없다. 벌써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사변이 소리 없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짐작하지만 소름이 돋아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신태인 100년, 이제 ‘새로운 신(新)’자에도 이끼가 끼었다. 극장도, 소시장도, 목욕탕도, 예식장도 사라졌다. 아기 울음이 끊긴 마을에는 어둠이 일찍 내린다. 지난 100년은 한줄기 섬광이었다. 

그럼에도 고향의 시제는 현재이다. 안부를 묻지 않았지만 항상 곁에 두었던 고향, 그 속의 시간은 육화(肉化)되어 지금도 흐르고 있다. 기억하고 있음에 동진강은 노래이고, 노을은 기도이다. 빈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그대 고향은 무탈하신가.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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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의료보험의 손해율이 급증하고 있다. 실손보험 손해율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129.6%로 지난해 동기 대비 5.6%포인트 높아졌다. 보험업계는 손해율이 높아진 원인으로 일명 ‘문재인 케어’로 인한 비급여 증가를 들고 있다. 문재인 케어는 2017년 8월 발표 이후 2022년까지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 중인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다. 이 정책을 통해 지난 2년간 국민 약 3600만명이 2조2000억원의 의료비 경감 혜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보험회사는 왜 이렇게 손해 보는 실손보험 상품을 계속 팔고 있는 것일까? 현재 실손보험 손해율은 자동차보험 손해율 산출방식과 달리, 실제 받은 보험료에서 관리비, 수수료, 광고비 등과 같은 부가보험료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산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손해율 130%라면 보험료 100원을 걷어서 130원을 지급한 게 아니라, 부가보험료를 뺀 70원, 80원을 지급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부가보험료 규모(범위) 또한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실손보험의 손해율도 납부 보험료 대비 지급 보험금 방식, 즉 지급률을 기준으로 하는 자동차보험 방식으로의 변경이 필요하며, 그 내용도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손해율이라는 용어는 이해하기 어렵고 보험회사가 만든 자의적인 계산방식으로, 소비자가 알기 쉽도록 지급률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케어’로 인해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올라간다고 지속해서 주장하는 의도는 뭘까? 보험사가 손해율 인상을 들먹이는 것은 보험료 인상을 위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손보험의 보장범위는 건강보험의 법정 본인부담금뿐만 아니라 미용·성형 등을 제외한 모든 비급여를 보장하는 네거티브 방식이다. 실손보험의 보장범위가 과다치료, 과잉진료 및 비급여 이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수의 병원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비급여 항목’을 이용해 실손보험 가입을 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한 방송에서 비급여 항목인 백내장 수술을 권유하며, 수술비 부담으로 망설이는 환자에게 실손보험이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키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실손보험은 손해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인 것이다.

보험회사의 보험 지급액이 늘어난 것은 ‘문재인 케어’ 때문이 아니라, 잘못 설계된 실손보험 상품구조가 핵심 원인이다. 잘못된 상품 설계 등으로 인한 문제의 책임을 보험료 인상으로 가입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올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로 인한 실손보험의 반사이익을 반영해 실손보험료 6.15% 인하를 유도한 바 있다. 내년에도 ‘문재인 케어’가 실손보험 손해율에 미치는 반사이익 등을 반영해 실손보험료가 조정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개한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실손의료보험의 보험료에 미치는 영향분석(2018)’ 연구에 따르면 일부 풍선효과를 고려하더라도 건강보험 보장성이 강화될수록 민간보험사의 지급금은 7.3~24.1%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간보험사의 실손보험 손해율 급증은 문재인 케어가 아니라 잘못된 상품 설계 및 과다치료, 과잉진료 등 다양한 요인 때문이다. 또 실손보험은 건강보험과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금융상품으로만 관리되고 있다. 이제 투명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손해율 산정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앞으로는 국민의 전체적인 건강 보장, 보건의료 관점에서 민간의료보험의 관리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윤철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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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광장이 뜨겁다. 200만, 300만, 내친김에 500만을 부르기도 한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세 대결은 뜨겁다. 

광장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져 있다. 한쪽에선 조국 법무부 장관을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꼭 지켜야 할 보배인 양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선 즉각 구속해야 할 범죄자로 치부하기도 한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구호들도 오간다. 한쪽에선 조국 장관만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까지 끌어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쪽에선 조국 장관을 지키지 못하면 문 대통령, 나아가 민주주의도 지키지 못한다고 염려하고 있다. 

출처:경향신문DB

광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광장은 배타적인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공정한 사회를 원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친북좌파라 규정하고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광화문은 닫혀 있다. 검찰개혁은 절실하지만, ‘조국 수호’에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서초동은 닫힌 공간일 뿐이다. 

대개 광장은 이랬다. 뜨거운 정치적 쟁점과 만나면 광장은 이례적인 공간이 된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광장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또 보완하기도 했다. 위임해 준 권한을 함부로 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주권자들의 참여 공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상한 소굴이 되기도 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취임과 조 장관 일가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계기로 광장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공휴일마다 광화문이 뜨겁고 토요일마다 서초동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참석 규모로 민심의 향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숫자 대결로 결론이 날 싸움도 아니지만, 광장은 연일 타오른다. 

광장이 일상이 되자, 일상은 골목으로 밀려났다. 태풍이 휩쓸고 난 직후여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난리인데도 광장의 함성은 드높았다. 흔히 ‘민생’이라 불리던 숱한 현안들이 골목에 처박혀 버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그랬다. 민주노총이 한국도로공사 농성 현장에서 대의원대회를 열 만큼 중요한 노동현안이었지만,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다. 여승무원들을 내쫓았던 코레일 이철 사장이 그랬듯, 사장만 결단하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문제인데도, 이강래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1500명의 생존권이 걸렸고, 대법원 결정도 진즉에 났기에 법치주의 원칙까지 걸려있었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저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할 뿐이었다. 

광장의 싸움은 단호하고 치열하다. 상대는 간단하게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한참 싸움의 기세가 오르면, 사소한 비판마저 금지된다. ‘조국 수호’는 빼고 ‘검찰개혁’만 외치자는 목소리는 그저 ‘내부 총질’이거나 반동으로 여겨진다. 장관이나 대통령, 아니 민주주의란 제도까지 그 본질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우리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싸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만 닿아 있다. 

싸움이 시작되면 원칙도 쉽게 훼손된다. 인권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우리 편만의 것으로 쪼그라든다.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차이도 그렇다. 친정부 인사와 반정부 인사의 말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어제의 야당이 했던 말은 오늘의 야당이 하는 말과 꼭 닮아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는데, 광장은 디테일쯤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검찰개혁이 쟁점이 되었지만, 뭐가 검찰개혁인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검찰 특수부만 정돈하면 검찰개혁이 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내부 부서를 다시 배치하는 게 개혁일 수는 없다. 악명 높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013년 박근혜 정권 초기에 없어졌지만, 검찰은 여태껏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이름은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지만, 이름을 바꾸는 게 그저 요란한 눈속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 특수부를 아예 없애버린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도 광장은 ‘검찰개혁’만 외친다. 원래 광장에서는 정교한 싸움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검찰 입장에선 개혁의 핵심이 특수부에 있는 것처럼 여론을 끌어내고, 특수부를 줄이는 게 곧 검찰개혁이라는 구도만 만들면, 광장에 200만, 아니 3000만이 모여도 두렵지 않을 거다. 이 정도의 위기는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을 거다. 

광장은 개인들이 만들어냈지만, 정작 개인은 소외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인훈은 그 유명한 작품의 제목을 <광장>이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이명준은 결국 인도양 어디에선가 소멸하고 말았다. 남과 북, 둘 중의 하나만 강요하는 현실에서 이명준의 자리는 없었다. 이명준의 좌절은 곧 개인의 좌절이었다. 모두가 하나 되어 어깨 겯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광장에 개인은 없다. 개인들이 모였으되, 개인은 없는 이 신묘한 판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장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골목을 서성대는 개인의 자리는 더 좁아든다. 이명준은 그나마 최인훈을 만나 우리에게 화두라도 던져줄 수 있었지만, 최인훈마저 떠난 지금, 개인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 스산한 계절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꿈쩍도 안하던 한국도로공사와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에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의 합의가 남았기에 반쪽 합의일 뿐이지만, 그래도 진전은 있었다. 이 진전을 이룬 것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였다. 주목할 만한 성과다. 정치가 자기 역할을 확인하고 모처럼 할 일을 했다.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광장의 함성에 정치권이 화답해야 한다. 계속해서 이렇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국회는 국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중요한 매듭은 국회만이 풀 수 있다. 광장 문제를 풀고, 이제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정치의 본령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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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조국과 나경원. 386세대의 대표주자로 각각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대표한다. 조국은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경제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뜻한다. 소득주도성장과 국민성장 모두 경제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검찰개혁은 군사 언어가 통제하는 검찰의 위계질서를 시민 언어로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나경원의 제일 가치는 ‘성장주의’. 성장주의는 경제성장과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모든 문제는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주의 포퓰리즘 정책 탓에 생긴 것이다. 기업가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속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사회 전 영역에 시장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는 한국 현대사의 두 기본가치로 서로 경합하면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일구어왔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적 담론에서는 민주주의와 성장주의에 기댄다. 진보도 성장주의를 설파하고, 보수도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가치의 차원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앞세우느냐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도 진보와 보수는 마치 가치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것처럼 격렬히 다툰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꼴통이라 조롱하고, 보수는 진보를 종북좌빨이라 낙인찍는다. 다소 과한 듯하지만, 이는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받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디에나 나타나는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다. 사실 이런 ‘만들어진 차이’ 때문에 선거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가 아주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조국과 나경원의 삶을 접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사회학에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규칙을 ‘규범’이라 부른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도 규범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한 종교 안에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다. 하도 싸우길래 사람들은 조국과 나경원이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그런데 목적달성을 위해 온갖 사회자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쌍둥이라 화들짝 놀랐다.

“난 나경원과 관련된 의혹이나 소문 또는 팩트에 대해 별로 놀랍지도 화나지도 않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일 거라는 예상이나 편견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국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뉴스를 접할 때는 허탈 씁쓸. 때론 다소 분노.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가 이런 거였나?”

지방대 자녀를 둔 한 386세대가 대화 도중 내뱉은 한탄이다. 그는 미국에 장기체류할 당시 자녀를 그곳 학교에 보냈다. 귀국할 즈음 아이를 미국에 남겨둘까 잠시 고민하다가 접었다. 돌아오니 당장 극심한 입시교육이 아이를 맞이했다. 영어 특기생 입학을 노리고 외고에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신이나 아내 모두 ‘혼자 힘’으로 시험 봐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품앗이로 서로 자녀 스펙 쌓아주느라 바쁠 때도 짐짓 무시했다. 자녀는 정시로 대학시험을 보았고, ‘스카이’는커녕 ‘인서울’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재수했지만 별무소용. 결국, 지방대로 낙찰됐다. 조국과 나경원으로 도배된 뉴스를 보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아들아.”

가치와 규범이 일관된 보수가 차라리 더 낫다! 아마도 적잖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삐뚤어진 분노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조국 규탄 촛불집회를 연 일부 스카이대생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나는 시험 보고 들어왔는데, 저들은 부모 덕 본 것 아닌가? 떳떳이 공정사회를 외친다. 그런데 이 시험이란 게 뭔가? 오지선다형, 단편적 토막지식 암기력 테스트다. 시험 한 번으로 평생의 복권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부모 덕도 기대할 수 없고, 순간 암기력 테스트에도 능하지 못한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가? 부모의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이 부족하다 보니 고급 스펙은커녕 기초적인 인적자본조차 쌓을 형편이 안되는 ‘지방 청년들’. 이들에게 공정이란 스카이나 인서울끼리 벌이는 내부경쟁에 불과하다. 경쟁 밖에 자신을 놓고 가족 안에서만 살 궁리를 한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으니 우짖지도 않는다. 사실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 대다수는 지방에 산다. 이들의 삶을 살피지 않고선 민주주의든 성장주의든 소수 누리는 자들만의 휑한 잔치일 뿐이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 ‘국과원(조국과 나경원)’이 역설적으로 일깨운 진실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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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지난 일요일에 맞이한 세월호 2000일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소망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퍽 착잡한 날이었다. 진상규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시국은 어지럽고, 하나로 뭉쳐 싸우던 이들 사이에도 인식과 입장의 차이가 없지 않다. 10월3일 광화문의 대규모 보수집회 참가자 중 일부가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서 야유와 함께 철거를 주장했다지만, 그 앞을 지나치며 속마음으로 유족들의 뜻에 공감한 참가자도 많았을 것이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일은 겉치레이고 자신의 이익 도모가 먼저인 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월호 유족들이 바라는 바는 오로지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는 국가가 마땅히 떠맡아야 할 책무이며, 국민 누구라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우리 곁에서 너무도 자주 벌어지는 산업재해, 안전사고까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모두 세월호 희생자요, 유족이라고 말해도 좋다. 진상규명은 특정한 사고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참사와 관련된 주목할 사건 중에 두 가지만 되돌아보자. 

첫째, 2017년 7월17일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서 ‘세월호’라고 적힌 A4 용지 박스 2개의 문건이 파쇄된 사실이 몇 달 전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이 시기는 청와대 안에서 박근혜 정권의 비리·불법과 연관된 문건이 잇따라 발견되던 때였다. 이전 정부에서 임명되어 아직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이들이 저지른 혐의가 큰 엄중한 사건이었지만, 청와대나 이 사실을 인지한 검찰도 제대로 조사하거나 수사하지 못하고 말았다. 보궐선거로 집권하여 대통령직인수위도 없이 내각 구성조차 어려움을 겪던 당시의 여건 탓으로만 돌리고 넘어갈 문제인지 의문이다.

둘째, 지난 5월27일 청와대의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설치와 전면 재수사를 요청하는 국민청원에 대한 실망스러운 답변이다. 청와대는 활동 중인 2기 특조위(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입장을 밝혔다. 애초에 수사권·기소권이 없는 특조위로는 진상규명이 불가능함을 뼈저리게 겪은 끝에 나온 국민청원이었고, 같은 내용의 국회 결의안도 5월7일 발의된 터였다. 그런 국민청원에 대한 이러한 답변은 결국 특별수사를 다시 맡아 기존의 부실한 수사를 되풀이할 검찰이라는 장애물을 다시 확인하는 듯하여 안타까웠다.

반환점을 돈 문재인 정부에서 심각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촛불의 뜻에 부합하는 과제라 하더라도 논란과 반발을 초래하여 정치적 부담이 생길 기미만 보이면 하염없이 미루는 것이다. 고교체제 개편도 어정쩡하게 대처하다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 개선에서도 과감함이 보이지 않는다. 다가오는 선거의 표를 의식한 것이겠지만, 이래서는 내년 총선도 불투명하며 2022년 대선도 이기기 어렵다.

참사의 진상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어떻게 6800t급의 큰 정기여객선이 채 2시간도 안되어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을까? 왜 해경의 현장 책임자와 지휘본부의 책임자들은 세월호와 해경, 각급 상황실과 구조세력 간의 긴밀한 통신을 유지하지 못하며 정확한 상황파악과 신속한 구조에 실패했을까? 세월호와 청해진해운이 국가정보원과 연루된 흔적들은 또 어떻게 해명할까? 승객 전원 구조라는 오보는 어떻게 나왔을까? 사고 당일 한밤중에 배를 빌려 가족들이 현장에 가 보니 잔잔한 바다 위에서 해경은 아무런 구조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구조작업은 즉시 시작되지 못했을까?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받아쓰기식 허위 보도가 횡행한 경위는 무엇일까?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모른다. 아니,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잠수함 충돌설, 고의 침몰설 등이 사회 일각에서 유포된 배경이다. 

내년 세월호 참사 6주기는 마침 4월15일로 예정된 21대 총선 다음날이다. 국회에서 여야가 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라 있는 선거법 개정안 등 개혁 법안들을 더 잘 다듬어 통과시키는 동시에, 정부와 여당은 총선 때까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정치적 성과를 거둘 의지와 과단성을 발휘하기를 빈다. 

내년 4월16일 새벽을 민의가 제대로 반영된 총선 결과를 보며 맞이하고 싶다. 이후에도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의 길은 험난하겠지만 좌초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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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리튬이온전지 개발로 올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요시노 아키라 아사히카세이 명예펠로(71)가 새로운 기술개발 및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선 호기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10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강조했다. 요시노는 또 “자신만의 호기심으로 새로운 현상을 열심히 찾아내는 게 필요하다. (연구결과를) 무엇에 사용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당장 눈앞의 성과에 매달리지 말고, 과학자들이 창의성을 최대한 발현토록 하는 연구풍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은 한국의 교육·연구 현실에 새겨야 할 바가 적지 않다. 이혜정 ‘교육과 혁신연구소’ 소장이 몇해 전 서울대 학생들의 학습패턴을 연구한 결과 교수의 강의 내용을 단어까지 그대로 받아 적은 뒤 시험에서 교수가 한 말에 최대한 가깝게 써내는 학생들이 최우등 학점을 받는 반면 자신만의 생각을 드러낸 학생들은 낮은 성적을 받았다고 발표해 충격을 준 바 있다. 한국 최고대학 서울대에서도 창의적 사고력보다는 순응적 사고력이 더 평가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연구·개발(R&D) 분야도 단기 성과주의와 관리자 중심주의가 창의력을 말살하고 있다. 대학·출연연구소·기업에 지원하는 정부의 연구·개발 과제는 실패하면 재도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연구관리자도 이런 사정 탓에 안전한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니 과제성공률은 98%에 달하는데 정작 세계에 내놓을 만한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연구할 시간에 연구 내용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연구가 잘 안되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써야 한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5분마다 들어와서 왜 1등 못하냐고 채근하는 격”이라는 자조도 나온다. 학생이건, 연구자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전할 의지를 잃어버린다.  

21세기는 창의성의 시대다. 기성의 사고·학습 회로를 벗어나지 않으면 혁신을 일으킬 수 없다. ‘노벨상의 산실’ 교토대학은 ‘괴짜’를 장려하는 풍토로 유명하다. 색다른 시각을 지닌 연구자의 연구를 소개하는 ‘괴짜강좌’도 열린다. 교수들도 상용화 여부와 무관한 별난 연구에 매달린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쓸데없는 짓’이야말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진실에 도달하거나 또 다른 혁신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실패 없이 창조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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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이낙연 국무총리가 오는 22일 정부를 대표하여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식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 총리의 참석이 확정되지 않았다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일왕 즉위식 참석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문 대통령의 방일 의사 타진에 일본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즉위식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와 만난다고 하니, 그가 이 총리와 만나면 정상회담에 버금가는 회담이 될 것이다. 이 총리는 동아일보 도쿄특파원과 국회 한일의원연맹 수석 부회장을 지낸 일본통이다. 지금도 일본 측 인사들을 부단히 만나고 있다. 이 총리의 방일에 주목하며, 이를 계기로 양국 간 갈등에 출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 후 한·일관계는 1년 사이에 급속도로 악화됐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정부 간 합의를 어겼다며 수출규제 강화로 보복했다. 한국 정부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법원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을 일본은 무시했다. 이후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선언해 갈등이 깊어졌다. 일본의 무역보복 후 양국의 피해 양상은 당초 일본의 계산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는 차질이 없는 반면 일본은 한국인 관광객 급감 등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소재·부품·장치 수급을, 일본 관광업소들은 막대한 추가 피해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 총리는 “일본이 무역보복 조치를 철회하면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을 재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은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 당국 간 갈등을 풀려는 노력도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최근에도 국회에서 “한국이 국가 간 약속을 지켜야 한다”거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한국이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갈등을 풀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대로 가면 오는 11월에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가 시행되고, 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을 현금화하기 위해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하는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키기 더 어려워진다. 양국은 한국 고위급 인사의 일왕 즉위식 참석을 반드시 관계 복원의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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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자유한국당이 조국 법무부 장관 동생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법원을 격하게 비난하고 있다. 영장전담판사를 향해 검찰 출신이라느니, 우리법연구회 출신 법원장이 전격 임명한 배경이 있다느니 온갖 치졸한 공격이 이틀째 계속됐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청와대 맞춤형 기각이자, 조국 감싸기 기각”이라고 했다. 이어 “영장전담판사와 대법원장, 서울중앙지법원장과의 관계를 보면 이념 편향성 논란이 있다”고 했다. 판사 출신으로서 아무런 근거 없이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는 건 도가 지나치다. 한국당 의원들은 대법원장과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찾아 항의하겠다고 엄포까지 놓고 있다.



여당이 검찰을 압박한 것도 볼썽사납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 “검찰이 다분히 보여주기식 영장 청구를 한 것”이라고 공개 비판하고 나섰다. 조 장관 동생에 대한 영장 재청구, 부인의 영장 청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검찰을 향해 노골적으로 압박했다고 볼 수 있다. 다분히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겁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치권의 이런 태도는 지난 1월 김경수 경남지사 법정구속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당시 민주당은 1심 재판장을 향해 ‘사법농단 적폐세력의 조직적 반격’ 운운하며 탄핵을 추진하겠다고까지 했다. 한국당은 “판결 불복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민주당을 비난했다. 이번엔 정반대다. 법원 판결이 입맛에 맞으면 감싸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인 셈이다.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 보석 허가,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구속영장 기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 때도 이런 일은 되풀이됐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사법부를 감싸거나 비난하는 행태야말로 사법부 독립을 뿌리째 흔드는 ‘사법농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언행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도대체 ‘쇠귀에 경 읽기’다. 

누구나 판결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공당(公黨)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법원과 검찰을 무차별 공격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행태다. 이러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무슨 낯으로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할 것인가. 헌법이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한 것은 이를 통해 입법·행정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게 삼권분립이다. 법원과 검찰은 권력과 여론의 눈치를 보며 재판하고 수사하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사실과 증거, 법리로 판단할 뿐이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 선을 넘는다면 민주주의의 토대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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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처음엔 덤덤했고, 나중엔 빠져들었다. 정치에서 문화 쪽으로 옮긴 변화 중 하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것이다. 10여년 만이었다. 반쯤은 ‘일’이란 명분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을 것이다. TV에서도 볼 수 있는 걸 굳이 극장에서…. 더구나 요즘은 TV에서 옛 영화부터 최신 영화까지 마음대로 골라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몰입감이 달랐다. 끝을 향할수록 어둠 속에서 하나에 몰입했다. 영화 한 편의 러닝타임이 이렇게 짧았나. TV에선 느끼지 못했던 시간 감각이었다. 실상 영화에만 시간을 바치는 일 자체가 TV에선 없었다.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반쯤은 다른 생각들이 그 시간을 공유했으리라. 사방이 막힌 영화관에선 애당초 그런 ‘멀티’가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영화라는 하나에 시간을 모두 투입하는 일을 사치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척추에 긴장의 뼈를 덧대던 시절이었으니….

TV는 휴식이지만, 영화관은 그것을 넘어선다. 무언가를 ‘향유’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그것으로 채우는…. 앞자리에 ‘삶’이란 단어를 넣어도 좋으리라.

수년 전 정말 무릎을 ‘탁’ 친 카피가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 정치권의 카피란 게 기이할 정도였다. 예쁘고 발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도 경쟁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해서도 아니었다. 그 속에 우리 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느낀 때문이었다.

가족이되 저녁을 공유할 수 없는 가족. 아빠는 직장이나 거리의 술집에서, 아이들은 학원에서, 엄마는 또 어디에서…. 각자 똑똑 부러진 가지들처럼 ‘혼자’로 존재하는 우리 사회 풍경이 머릿속으로 확 들어왔다. 그 저녁의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나’지만, 그 속에 내 삶은 없다. 현기증 나도록 달려가는 사회에 속박된 노예 같은 ‘나의 시간’만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않았거나, 인지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게다. 결국 저녁을 회복하는 건 ‘내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작은 ‘삶의 질’은 곧 나의 존엄이다.

영화를 ‘향유’한 작은 일에서 불현듯 그런 상념을 떠올린 것은 불안함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삶의 질’을 향해 가고 있고,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불안함이다. 분명 한때 그런 기대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그림자로 흔들린다. 불온한 신자유주의 세상에서도 저녁이 있는 ‘삶의 질’을 이뤄낼 것이라 기대했던 정권의 능력과 사회변화가 실상 아니거나, 너무 더딘 현실 때문이다.

삶의 질을 거론하기조차 미안한 일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폭염 속 창문도 없는 한 평 쪽방 같은 휴게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을 청소노동자와 컵라면을 챙겨들고 종종걸음을 쳤을 고단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 무수한 죽음에도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작업장으로 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에게 땀을 식힐 한 칸과 포근한 한 끼의 시간, 불안함 없는 작업은 불가능한 사치일까.

지난달 현대중공업과 대우해양조선에선 일주일 새 두 명의 하청노동자가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위험한 작업임에도 기계는 계속 돌아가고, 안전조치는 부족했다. ‘안전 차별’ 속에 지난해 산업재해로 사망한 하청노동자는 312명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알바 등 보이지 않는 ‘현실의 금’들 속에서 삶들은 균열하고 있다.

어떤 면에선 ‘무한경쟁’의 변명 아래 더 견고해진 구분과 서열들이 존재한다. ‘부의 대물림’만을 말함이 아니다. ‘삶의 질’이 어떤 ‘노력의 대가’라거나, 그에 따른 ‘자격’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우리는 ‘자격’이라는 또 다른 신분의 파라미드에 갇히고 있는 셈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부분을 흔히 간과한다”(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한 개인의 ‘노력이란 관념’은 늘 이기적이며 과장되기 마련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내야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개개인이 싸워 쟁취해야 할 대상인가. 지금의 삶의 질을 유보하면서….

땀을 식히는 한순간이 하루치 행복이고, 하루의 휴식이 일주일을 감당하는 위안이며, 안전조치 하나가 마음의 평화가 되는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 ‘저녁이 있는 삶’이나 ‘극장의 몰입’처럼 우리들 삶 바로 옆에 있다. 1000만 영화가 속출하는 시대에도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집중해 보기 힘들다”고 느끼게 만드는 어떤 공포가 그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과거 ‘유령처럼 배회하던 그것’은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확실하고도 실재적인 ‘공포’로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개개인이 넘기엔 그 공포의 금들은 너무 깊다. 자격이 아닌, 서로의 손을 마주잡는 ‘연대’의 마음만이 이 불온한 시대를 넘을 힘이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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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기후위기로부터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정부와 기업이 외면하는 사이 그 피해의 중심에서 살아갈 10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달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의 툰베리 연설은 환경운동의 시대적 흐름이 바뀌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인다. 그가 변화를 외친 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에너지전환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친환경을 앞세운 수소자동차 밀어붙이기가 국회 내 수소충전소 설치로 브레이크 없는 급가속 채비를 마련한 것이다. 수소에너지가 ‘궁극의 친환경’이라는 이 허황된 구호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다. 수소사회를 대한민국을 구할 미래과학이라 포장하는 이들이 일반인의 기본적 상식에 비춘 몇 가지 물음에 어떤 답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물을 분해해 수소를 얻는다는 따위의 얘기는 OECD 회원국 중 재생에너지 생산비율이 꼴찌인 나라에서 하지는 말자. 수소가 자동차의 주 연료인 석유보다 최소한이나마 친환경이려면 물의 전기분해까지는 아닐지라도, 다른 산업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의 수소를 사용해야만 한다. 이 부생수소도 석유산업에서 생성되니 소위 말하는 친환경은 아닐뿐더러 지금과 같은 화석에너지임에는 변함없지만 말이다. 수소사회를 얘기하는 이들은 부생수소를 마치 버려지는 에너지인 것처럼 말한다. 여기서 누구도 말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한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산업이 석유화학산업이다. 그 석유화학산업 공정 중에 수소가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걸 이용해 친환경으로 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왜 굳이 전기가 필요한 그곳에서 즉시 전환해 사용하지 않고 온갖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고, 또 다른 과도한 화석에너지와 운송비를 들여 자동차에 옮겨 전기를 만들어 써야 할까? 수소가 만들어진 그 자리에서 발전을 한다면 온갖 복잡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을뿐더러 2040년에야 실현된다고 하는 규모의 경제를 당장 실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실로 엄청난 이익을 포기하고 왜 굳이 힘들게 특수트럭으로 옮겨와, 다시 작은 자동차에서 전기로 전환해야만 한단 말인가?

다음으로는 충전소 설치의 확산 가능성이다. 고압가스를 다루는 수소충전소의 안전성은 차치하고라도, 충전소 한 곳을 만드는 데 30억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현재 서울시내 평균 땅값을 고려하면 충전소 1곳을 만들려면 최소 100억원이 든다. 이렇게 만든 충전소에서 하루 약 250㎏의 수소를 충전할 수 있다. 국가 로드맵에 따르면 2030년에 수소 1㎏당 가격을 4000원으로 낮춘다고 하니, 1일 매출은 완판 시 100만원이다. 시골 편의점 매출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소를 무료로 준다고 해도 운영은 불가능하다. 과연 이런 영업장이 전국에 확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세금으로 운영보조금을 지급해줄 차례이다. 세계 1위 기술력을 통한 미래 먹거리? 미래수출산업? 우리나라야 눈먼 세금으로 조성비와 운영적자를 메운다고 하겠지만,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인 미국을 생각해 보자. 미국이 한국 자동차산업을 위해 이익창출은커녕 최저임금 노동자 1명도 고용할 수 없는 충전소를 세금으로 지어줄까?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국민 세금으로 미국에 충전소를 지어줄 수 있을까?

이런 간단한 의문들에 뭐 하나 긍정적인 답이 없다. 아무리 수소 관련 미래전망을 뒤지고 헤매도 답들은 주지 않는다. 미래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 알아서 다 해결된다는 허상 말고는 말이다.

자신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실천하는 16세의 거인, 툰베리의 연설과 같이 “당장에 닥친 지구온난화의 세계적 문제에는 관심 없이, 자신들의 배만 부르게 만드는 끝없는 경제성장만을 얘기하는” 우리의 이 상황이 부끄럽다. 친환경은 세계 1위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과학으로 포장한 허상으로 미래세대를 실망시키지는 말자.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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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촛불이 파도 타고 거리로 흐를 때도 어김없이 노래가 이어진다. 서로의 맘을 묶고 결기를 다잡는 데 노래만 한 게 없다. 광장엔 모두 알고 있거나,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들이 소환된다. 떼창곡이 많지 않던 1960년대 4·19집회와 6·3시위에선 애국가와 삼일절·광복절 노래도 불렸다. 한날 한곳에 있는 비장함을 공유하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가사를 따라 감정이 이입돼 울컥해졌다고 한다.

집회시위곡이 대중화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이다. 유신·5공 시절 대학가·노동현장에서 부르던 금지곡 ‘아침이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늙은 군인의 노래’ ‘선구자’를 도심 대형집회에서 합창했고, 운동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 ‘훌라송’ ‘그날이 오면’ ‘농민가’ ‘흔들리지 않게’도 자주 불렸다. ‘아리랑’과 ‘소나무야~’로 시작하는 독일 민요도 거리집회에서 불리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통일은 민주로, 훗날엔 탄핵으로 확장됐다.

메시지가 짧고 강하게 반복되는 노래가 등장한 것은 촛불집회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들었다고 한 2008년 쇠고기 촛불집회에선 ‘헌법 제1조’가 공전의 히트곡이었다. 야간 옥외집회가 2009년 헌법불합치 판정으로 풀릴 때까지 촛불도 노래·시·율동을 섞은 문화제로 열린 시절이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촛불집회에선 ‘헌법 제1조’와 ‘아리랑 목동’ 개사곡인 ‘하야가’, 세월호 추모곡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단골 메뉴였다.

자유한국당이 만든 집회시위곡 ‘자유결전가’가 7일 공개됐다. 구호만 외치거나 ‘레미제라블’ 같은 번안곡을 틀던 보수집회로선 낯선 시도다. 노랫말은 ‘가슴에 뿜은 더운 피/ 이름 모를 그 마음들/ 싸울 곳에 죽어서 자유를 되살리리’(1절), ‘목청 터지는 그 이름/ 오직 자유 그 한마디/ 내 심장과 바꿔서 자유를 되살리리’(2절), ‘이제 돌아갈 수 없다/ 마지막 결전 나의 피로 살리라/ 어머니 내 나라’(후렴)로 이뤄졌다. 가사가 격하고 “부르기 쉽게 만들다보니 군가 느낌도 있다”고 자평한 노래는 ‘조국 반대 광화문 집회’에서 공개될 듯하다. 긴 싸움을 준비하는 표증으로 읽힌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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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합천 해인사에서 큰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직접 가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화면으로만 눈여겨보았다. 존재의 뚜껑을 따듯 누운 자세로 발을 환히 드러내 보이는 큰스님. 최대한 많이 땅과 접촉하는 자세로 최대한의 이승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얼굴보다는 발바닥을 앞장세우고 먼 길 떠나는 중이었다. 

성경을 읽는다고 저절로 신자가 되는 건 아니겠다. 분열과 증오, 조롱과 선동으로 얼룩진 뉴스의 홍수 속에서 쿵,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뜻밖의 가을 태풍 링링에 해인사 장경각 앞의 학사대 전나무가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그 놀라운 뉴스를 듣고도 며칠간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갈 뻔했다가 쓰러진 나무를 호출해 준 건 역설적으로 또 다른 태풍 마타였다. 마음이 흉흉한 탓인가. 어쩌자고 나는 이웃집 할머니의 늙어가는 얼굴에는 무심하고 태풍급의 사고에만 이렇게 반응하는가. 

내 고향 거창에서 뒤로 자빠지면 뒤꼭지가 깨질 만큼 합천은 가까운 동네다. 동네 어른들은 추수 끝낸 마을여행, 대성중학교 형들은 수학여행으로 해인사를 갔었다. 그때 꼬맹이였던 나에게 최치원이가 죽기 직전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더니 그게 나무로 자랐대. 귀에 솔깃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바로 그 전나무가 쿵, 쓰러진 것이다. 최치원 지팡이의 손자뻘쯤 되는 수령 250년의 나무라고 한다. 

전나무의 행방을 찾다가 현장 사진을 보았다. 밑동이 부러진 전나무는 커다란 허공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스님의 몸에서 사리가 나오듯 나무 안에서 나온 큰 구멍이다. 다음 나라에 가는 데 필요한 여권처럼 나이테도 환히 드러났다. 해인사 스님들은 나무들 세계에서 큰스님에 속할 나무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봉행하고 문화재청은 뿌리를 보존하고 후계목을 심어 후사를 잇기 위한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한다. 아, 고맙고 다행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언젠가 지하에서 하나로 반죽이 된다. ‘깜깜 한밤중 창밖에 비 내리고/ 등불 아래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의 울적한 심사를 읊던 ‘추야우중(秋夜雨中)’의 최치원. 지음(知音)보다 짙고 혈육보다 끈끈한 지팡이와 해후하며 또 어떤 시상에 잠기실지! 전나무, 소나무과의 상록교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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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회 참여자의 11%가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였다.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 중에서 지지를 철회한 사람이 60%를 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은 사람도 50%에 달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 탄핵에 찬성한 사람이 62명이었다. 잠깐이나마 이건 아니라는, 그러니 바꿔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이도저도 지긋지긋하다며 염증을 내는 사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손민주주의란 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이 제시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기는 하되 여러 결함을 가진 하위 유형들을 말한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비자유민주주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배제민주주의, 선출되지 않은 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후견민주주의, 통치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트너가 아닌 시민과 직접 연합하는 위임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의 결손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대선개입을 통한 선거체제의 훼손과 위헌적 통치행위로 인한 비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쌓여오던 정치적 압력은 소위 ‘최순실사태’를 통해 밝혀진 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비선실세에게 넘겨준 가장 저열한 형태의 후견민주주의 행태까지 드러나자 마침내 폭발했다.

촛불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는 결손민주주의 그 자체를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선거에 승리하고 적폐를 청산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민주주의에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촛불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시민은 촛불시민이 되었고, 촛불집회는 촛불시민혁명이 되었으며 촛불의 정신을 이어갈 촛불정부가 태어났다. 촛불시민과 촛불정부의 소명은 적폐청산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랬듯이, 수식어가 붙은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이기 어렵다. 19대 대선은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장을 여는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정권교체라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말았다. 

적폐란 오래 쌓여온 폐단을 말한다. 검찰개혁은 오래 쌓여온 폐단을 청산하려는 시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적폐만 청산하려 하면 민주주의의 또 다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청와대정부’라는 지적이 보여주듯이, 이번에는 대통령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건너뛰고 국민의 직접적 지지에 의존하는 위임민주주의가 아니냐는 혐의이다. 결국 대통령 지지자들은 지나간 보수정부의 비자유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하고, 대통령 비판자들은 현 정부의 위임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한다. 어느 쪽도 전적으로 맞거나 전적으로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민들은 촛불과 태극기로 나뉘어 격렬하게 맞선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잡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만 상대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비토민주주의다.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이다.

아직까지는 중도층과 민주당·정의당 지지자들이 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지언정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차마 지지할 수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결론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이 마지막 교두보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어느 순간 현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지난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역사적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속출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번에는 시간은 대통령이나 조국 장관의 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단이 필요하다. 개혁의 길은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의 동력을 얻으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에 참여했던 옛 새누리당 지지층, 상식의 힘을 믿는 보수층, 탄핵에 동의한 보수 정치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합의의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대의제 정치가 엉망이더라도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정치력이다. 촛불민주주의가 아니라 수식어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가 상대의 길을 가로막기만 할 뿐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설사 성에 차지 않더라도 다만 몇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대통령밖에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 혁명적인 과업을 시도해볼 기회를 가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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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요즘 유난히 ‘단독’이란 단어를 많이 접한다. 언론 종사자에게는 의미가 큰 것 같지만, 단독이라는 머리를 한 기사가 특별하게 느껴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포털이 모든 뉴스를 한곳에 모으는 상황에서 단독이라는 제목이 무슨 소용인지도 궁금하다.

곧이곧대로 풀어보면, 단독기사는 기자가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하여 다른 언론사에서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밝힌 보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단독기사가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의아한데, 아마도 단독이 붙은 기사의 충분성이나 짜임새가 부족하여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에 게재된 ‘[단독]검 “정경심 교수 남매, 이면계약서 통해 코링크 돈 횡령” 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살펴보면 “검찰의 말에 따르면 이면계약서를 통해 10억여원을 불법적으로 횡령했다. 지분 0.99%를 얻은 후 매달 800만원을 받았다. 허위계약으로 매월 200만원의 자문료를 받았다”가 주된 내용이다. 

이 기사를 클릭하며 가장 궁금했던 건 ‘이면계약’의 내용이었다. 어떤 계약을 맺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사에 명쾌한 내용은 없었다. 검찰에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인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했는지,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기사를 내는 게 옳은 것인지 의아했다. 

궁금증을 안은 채 기사를 곰곰이 살펴보니 적힌 내용만으로는 검찰의 주장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선 이면계약서를 통해 횡령한다는 게 가능할까? 계약은 갑과 을이 서로 어찌하기로 약속을 맺는 것이니, 표면계약이든 이면계약이든 ‘을이 얼마를 투자하면 갑이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일 것이다. 통상적인 계약이라면 갑과 을은 별개의 주체이므로 을은 횡령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횡령이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성립하는 죄이다. 흔한 예는 회사의 자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삿돈을 유용하는 경우이다. 

즉 검찰 주장의 앞뒤가 맞으려면 갑과 을이 내부 관계여야 한다. 예컨대 실질적인 회사의 소유자 및 의사결정자(을)가 자기 회사(갑)와 어떤 계약을 맺어 비정상적으로 돈을 받는 경우 등이다. 검찰이 그간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같은 선상에서 취재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는 기존에 수없이 보도된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라는 검찰 주장의 반복에 불과하니 단독 보도로 다룰 만한 새로운 사실로 부족한 것 아닐까? 

이처럼 판단에 근거가 될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 스스로 어렵게 추측을 이어가야 한다면 충분한 기사는 아닐 것이다. 기존의 검찰 주장을 기정사실로 인식하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모르겠으나, 기자와 독자의 정보 및 인식이 같을 수는 없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펀드 수익과 자문료 등이 갑과 을이 내부 관계라는 혐의를 키우려는 검찰의 근거라면, 통상적인 펀드 수익 및 자문료와 비교해서 얼마나 과다하고 비정상적 수준인지 취재해서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단독 보도는 신속해야 하니 기사 내용을 숙고하지 못한 채 내보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서 충분한 내용을 담지 못하거나 짜임새가 떨어진다면 독자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다. 한 방송사의 보도국장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몇 시간 빠른 ‘시간차 단독’이라며 최근의 상황에 대해 자조 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피치 못하게 언론사끼리 단독 경쟁을 해야 한다면, 좀 더 찬찬히 짚은 별도의 심층 기사로 보완해 주는 방법도 있다. 취재와 기사 작성에 지쳐있겠지만, 경향신문은 신뢰도에서 수위를 다투는 언론사이다. 독자로서 조금 더 수고해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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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검찰개혁과 조국 법무부 장관 거취를 둘러싸고 열리고 있는 대규모 집회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7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국민의 의견이 나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 국론분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대의정치가 충분히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국민들이 직접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행위로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국론분열에 대한 우려를 일축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8월 취임 100일을 맞아 열린 대국민보고대회에서 “국민들은 주권자로서 평소 정치를 구경만 하고 있다가 선거 때 한 표 행사하는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며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기본 철학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 말대로 정치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국정에 반영하는 건 필요하다. 다만 이는 대의제를 보완하는 선에서 이뤄져야지, 자칫하면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反)정치주의로 흐를 우려도 상존한다. 이날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도는 44.4%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평가는 52.3%로 더 많았다.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한다면, 절반이 넘는 부정적 민심은 어떻게 반영할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하나로 모아지는 국민의 뜻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보장 못지않게 검찰개혁이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국회는 공수처법과 수사권 조정 법안 등 검찰개혁과 관련된 법안들을 조속히 처리해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했다. 당연한 주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의제는 공정과 정의의 실현, 검찰권의 과잉·남용에 대한 견제로 압축된다. 대통령의 언급도 보수와 진보진영의 세 대결로 흐를 수 있는 대규모 집회를 이제 끝내고, 검찰개혁은 국회 입법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놓고 ‘검찰개혁’을 앞세운 서초동 촛불집회와 ‘조국 사퇴’를 내건 광화문 집회 가운데 서초동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건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극단으로 갈려 정반대 구호를 외치는 집회는 당분간 계속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시민들은 이런 혼란을 종식할 방안을 기대해왔다. 대통령의 언급이 해법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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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사법개혁과 정치개혁 문제를 우선으로 당면한 정치현안을 논의하고 해결하기 위한 ‘정치협상회의’가 꾸려진다. 국회의장과 여야 5당 대표가 참여하고, 사안별로 실무협의도 진행하는 체제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자유한국당 황교안·바른미래당 손학규·정의당 심상정·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등 야당 대표 4명은 7일 ‘초월회’ 회동에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제안한 정치협상회의를 신설,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초월회가 정쟁을 위한 성토의 장으로 변질됐다”면서 회동에 불참한 이 대표는 문 의장과 통화하며 정치협상회의 필요성에 적극 동의했다. ‘협치’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낯 뜨거울 만큼 대화와 소통이 실종된 국회에서 중대한 정치현안을 실질적으로 논의할 최고 단위의 정치협상기구가 가동되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사실 ‘조국사태’를 계기로 분출된 검찰개혁 등 사법개혁은 결국 국회 입법으로 완성될 사안이다. 선거법 개정안 등 정치개혁 마무리도 마찬가지다. 이번주 내에 첫 회의를 열기로 한 정치협상회의는 사법개혁과 정치개혁을 우선적 의제로 다룬다. 아울러 회의 참석자 다수가 요구할 경우 정치현안 전반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로 했다. 도저한 정치 실종을 복원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제도권 정치가 갈등이 내포된 사회적 의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결과가 바로 작금에 목도하고 있는 광장의 정치다.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정치를 대신하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대의민주주의는 죽는다. 광장에서 표출된 분노는, 민생은 팽개치고 개혁과제는 외면한 채 정쟁으로 날새는 정치의 무능을 향한 것임을 여야 공히 직시해야 한다. 다시 타오른 ‘촛불’이 외치는 검찰개혁 등 사법개혁에 대해 국회에서 단 한번도 논의된 적이 없을 정도다.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국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지지층을 선동하고 분열을 부추기는 거리의 정치에 함몰되어 소모적 세 대결을 벌이는 것은 정당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여야가 장외 세 대결에 자제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함께 사회적 갈등 의제 해결에 머리를 맞대는 정치협상회의를 가동키로 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실로 광장의 분열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상황이다. 여야의 정치협상회의가 시민을 거리로 내모는 ‘정치 부재’ 상황을 끝내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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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0일 지면게재기사-

독자에게 묻는 질문이다. 매일 거울에서 보는 얼굴은 진짜 내 얼굴일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다른 이가 보는 내 모습과 정확히 같은 걸까? 매일 거울을 보면서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모두에게 이 질문은 무척 엉뚱하게 들리리라. 그리고 이 질문에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한 분이 많으리라. ‘삑!’, 정답이 아니다.

매일 거울을 보며 살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울은 늘 좌우가 뒤바뀐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른쪽 눈 밑 작은 점이 거울에서는 왼쪽 눈 밑에 보인다. 왼팔에 시계를 찼는데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에 시계를 차고 있다. 매일 거울을 보지만, 난 단 한 번도 내 참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익숙하다고 진실은 아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많은 이가 아름답다고 하는 얼굴에는 공통점이 있다. 좌우대칭인 경우가 많다. 정면 얼굴 사진 한가운데에 수직선을 긋고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을 뒤집어서 원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얼굴이 대칭인지 알 수 있다. 휴대폰에는 사진을 좌우로 뒤집어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 독자도 한번 해보시라. 원래의 사진과 좌우가 바뀐 사진, 둘 중 하나가 좀 더 나아 보인다는 사람이 많다. 둘의 차이가 적을수록 잘생기고 예쁜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 얼굴의 대칭성은 유전적, 환경적 결함이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대칭성이 매력적인 이유다.

여러 사람의 얼굴 사진을 겹치고 겹쳐 합성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인터넷에서 이렇게 합성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상당히 매력적인 얼굴로 보인다. 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큰 사람도 있지만 거꾸로 오른쪽 눈이 조금 더 큰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의 얼굴 사진을 더하는 과정에서 이 둘의 경향은 서로 상쇄되어 결국 양쪽 눈의 크기 차이가 거의 없는 대칭적인 모습의 합성 사진을 얻게 된다. 100명의 얼굴 사진에서, 비록 한 사람의 입술 바로 왼쪽에 점이 있다 해도, 나머지 99명의 사진 중 정확히 같은 위치에 점이 있는 얼굴이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결국 전체 합성 사진에서 한 사람의 얼굴에 있는 점의 도드라짐은 100분의 1로 줄어 주변 피부색과 비교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제각각 다른 위치에 잡티가 있는 많은 이의 얼굴 사진을 더해 나가면, 잡티가 눈에 띄지 않는 매끈한 피부의 얼굴이 된다. 결국 피부도 매끈하고 얼굴도 좌우대칭인 사진을 얻게 된다. 평균은 대칭을 만들고 대칭은 아름답다.

왜 사람들의 평균얼굴이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얼굴에 끌리는 것이 자손을 남기는 과정에서 더 유리한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다. 키나 몸무게, 혹은 두 눈 사이의 간격처럼 연속적인 값을 갖는 사람의 표현형질의 발현에는 여러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다. 이럴 때 자주 작동하는 것이 바로 통계학의 중심극한정리다. 서로 독립적인 여러 마구잡이 확률변수가 함께 작용해 만들어지는 결과 값의 확률분포는 흔히, 가운데가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종 모양이 된다. 실제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키 데이터를 모아 막대그래프를 그려보면 가운데 부분에서 봉긋한 봉우리가 보이는 종 모양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막대그래프에서 가장 위로 볼록 솟은 곳을 최빈(最頻)값이라 한다. 가장(最) 흔하게(頻) 발견되는 값이란 뜻이다. 종 모양의 정규 분포에서는 평균값이 최빈값이다. 키가 평균에 가까운 사람이 더 많고, 가운데 평균에서 멀리 떨어진, 아주 크거나 아주 작은 사람은 상당히 드물다. 예를 들어, 키가 2m보다 큰 남성에게만 마음이 설레는 여성은 인생에서 맘에 드는 남성을 만날 확률이 아주 작을 수밖에 없다. 평균적인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자손을 남기기에 더 유리하다. 평균값이 최빈값이라 그렇다.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모습이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유를 진화심리학의 입장을 택해 설명해 보았다. 평균에 가까운 사람이 다수고, 다수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나의 조상이다.

자 이제, 물리학에서의 대칭성 얘기를 해보자. 물리학의 대칭성은 좌우대칭성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다. 얼굴이 좌우대칭이라 함은, ‘중앙 수직선을 기준으로 좌우 뒤집기’를 하고 봤더니 변화가 없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무언가를 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물리학자는 이를 대칭성이라 한다. 아름다운 얼굴은 좌우 뒤집기에 대해 불변이어서, 좌우대칭성이 있다. 물리학에는 다른 대칭성도 많다. 전 우주의 모든 것을 가만히 들어 모두 다 1m 옮겨도 변할 것은 전혀 없다. 바로, ‘공간 옮김 대칭성’이다. 아무 방향이나 회전축을 하나 골라 모든 것을 똑같이 1도의 각도로 돌려도 우주는 변화가 없다. 이는 ‘공간 돌림 대칭성’이다. 시간도 공간처럼 옮김 대칭성이 있다. 물리학의 법칙에서 시간 t를 t+a로 임의의 상수 a를 더해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의미다. 물리학의 연속적인 대칭성 하나하나에는 각각 짝을 이뤄 보존법칙이 존재한다. 바로, 에미 뇌터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론이다. 공간의 옮김 대칭성과 돌림 대칭성은 각각 운동량과 각운동량이 보존됨을, 시간의 옮김 대칭성은 에너지 보존을 알려준다. 물리학의 발전의 역사는 대칭성의 발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리학은 아름답다. 대칭성 덕분이다. 물리학에서도 대칭성이 아름답다.

리영희 선생님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새는 몸통을 축으로 좌우대칭의 모습이다. 한쪽 날개만 있어 대칭이 깨진 새는 날지 못한다. 새의 날개를 자세히 보라. 몸통에 가까운 쪽이 두껍고 날개의 끝으로 갈수록 단면적이 줄어든다. 나는, 중앙에서 먼 날개의 한쪽 끝이 갈수록 점점 더 두꺼워지는 모습을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날개 끝에는 거짓 뉴스로 사람들을 현혹해 손짓해 부르는 나쁜 이들도 있다. 대칭의 축을 갈등의 축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이다. 갈등을 넘어 건강한 대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심축의 현명한 설정이 필요하다. 정부와 언론, 그리고 깨어 있는 시민 모두의 책임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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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0일 지면게재기사-

10월 마지막 주 모 영상 플랫폼에서는 술에 취한 두 스트리머 간의 난투극(‘현피’ 사건)이 라이브로 생중계됐다.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이어진 싸움은 즉시 gif 그림파일로 저장돼 인터넷 세상에 뿌려졌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방송의 자격론과 윤리가 호출되며, 규제 없이 방송하는 개인들의 수위가 나날이 자극적으로 된다며 이러한 방송을 저지할 수 있는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은 10년 전부터 꾸준히 반복된 낡은 이야기다. 공중파에서 스트리밍 방송 시스템을 빌려 송출자와 시청자의 거리를 좁히고, 실제 셀러브리티를 데려와 방송 출연을 시키는 세상에서 이러한 담론은 고리타분하고, 무용하다.

우리가 좀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 문화 저변이 어떤 동력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인식과 그 여파다. 주목할 것은 ‘현피’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gif라는 파편으로 잘라 밈(Meme)화시켜 공유하고 웃고 떠들며 즐기는 문화 자체,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밈화해서 떠드는 동안 파고든 사실 불신의 미래다. 밈은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의 진화를 설명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특정 집단에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최소단위를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이론설명보다 ‘짤방’으로 알려져 있다. 짤방은 특정 세대 또는 집단의 문화적 유행이 그림파일 등으로 유포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드라마 <야인시대>의 김두한(김영철 분) 캐릭터가 “4딸라!”를 외치는 모습이나 최근 <타짜>의 곽철용(김응수 분)의 대사들이 그러한 사례다. 그들의 유쾌한 대사는 패러디를 양산하고 현실의 문화들에 균열을 낸다. 

가상 캐릭터들과 현실의 폭행 사건이 인터넷 공간 속에서 동일하게 밈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되며, 인간의 노동력이나 다른 능력,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체도 물(物)과 물(物)의 관계처럼 변화됨을 뜻한다. 앞서 이야기한 스트리머의 폭력을 살펴보자. 그것은 인터넷 방송이라는 공간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상품으로 변화한 것인데, 여기에 밈이라는 영역이 합쳐지면 단순히 현실이 물화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가상의 영역에서 문화상품화된다.

즉, 스트리밍 방송 속에서 싸우는 사람은 실제의 사람이고, 실제 사건이지만, 그것이 짤방화되는 그 순간 실제의 사람은 소멸하고 가상의 복제체인 밈만 남는다. 사람들은 실제 사건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는 관심 없고 폭력 그 자체, 자극 자체만 존재하는 일종의 환영체, 팬텀(Phantom)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밈으로 소통하고 복제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사실’을 믿지 않는다. 조작과 거짓, 선동과 날조 속에서 날아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순진하고 나이브한 것이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팩트’에 집착하고 사건에 대한 싸구려 신파적 감성에서 떨어져 나와 기계적 중립을 외치며 타자를 자처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확증편향적으로 믿고, 자신이 믿으면 그것이 팩트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에서만 일어나는 단일적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사건이나 사회·정치의 단면들조차 쉽게 짤방화하고 유희화하지 않나. 수많은 가짜뉴스 생산자들이 활개칠 수 있는 까닭도 이러하다. 정치적 영역에서부터 이미 무엇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생각이 없는 자들이 그것을 사실이라 믿고 소비하며, 현실 사회를 끊임없이 가상의 시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이러한 사실 불신의 사회를 모조리 ‘인터넷의 밈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단지 오늘, 조금 더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몇 년 사이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왜 우리는 팩트에 주목하면서 현실을 가상처럼 소비하고, 그 어떤 사실도 거짓이라 전제하고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가짜들을 사실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그 바깥에서 그 모든 과정을 웃고 즐기는지.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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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0일 지면게재기사-

“밀레니얼 / Z세대 쇼크 & 패러다임 시프트 콘서트 2019 콘퍼런스.” 지난 6월 한 인터넷언론사가 개최한 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어디를 가든 이런 국적 불명의 언어들이 횡행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와 함께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정부부처 보도자료를 살펴본 결과 이들 기관은 정책과 사업 이름에서 외국어와 신조어들을 마구 쓰고 있었다. 한글을 창제한 지 573돌을 맞은 오늘에도 우리말 사용을 강조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 의원과 한글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정부는 보도자료 한 건마다 평균 6회 외국어를 썼다고 한다. 외국어를 가장 많이 남용한 정부부처는 중소벤처기업부로 보도자료 한 건당 평균 19.6회였다. ‘메이커 스페이스 G캠프’(전자, 소프트웨어 제품이 신속 출시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설)나 ‘프리 팁스 사업’(창업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의 우수 예비 창업팀을 발굴 지원하는 사업) 등은 이 중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지자체들 역시 외국어를 남발하고 있다. 보도자료 한 건당 2개꼴로 외국어를 썼다. 가장 많이 사용한 기관은 서울시(692개), 대구시 및 경상남도(462개), 경기도(431개), 부산시(396개) 순이었다. 아무리 우리말로 곧바로 대체하여 쓸 수도 없을 만큼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지만 도가 지나치다. 국어기본법은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정부 기관들이 앞장서서 규정을 위반하고 있으니 민간이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을 탓하기 어렵다. 민간에서는 영어는 물론 단도리(단속)나 땡땡이(물방울) 무늬, 분빠이(각자 내기), 무데뽀(막무가내), 쇼부(결판), 와사비(고추냉이) 등 일본어들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언어는 사유의 집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목숨 걸고 우리말 연구를 한 조선어연구회원들은 우리말큰사전 말머리에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라고 새겼다. 분별없이 외국어를 쓰는 것은 곧 대한민국이 국적 불명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모든 기관과 개인의 맹성과 적극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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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내년에 중소기업까지 확대하는 주52시간제의 보완책을 서두르라고 8일 주문했다. 국회엔 “탄력근로제 등 보완입법이 시급하다”고 했고, 정부엔 “입법이 안될 경우도 생각해 할 수 있는 대책들을 미리 모색해달라”고 지시했다. “경제계 우려가 크다”고 전제한 데 대해 노동계는 “주52시간제를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선 중소기업 주52시간제 시행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현장 안착까지 제도나 준비상황이 미흡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음직하다. 조국 파동에 묻혀 있는 다급한 ‘국정 뇌관’을 직접 공론화한 셈이다.

주52시간제가 새로 적용될 50~299인 사업장은 2만7000개로 추산된다. 지난해 7월 시작된 300인 이상 사업장 3500개보다 8배 많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정부 실태조사에서 39%가 주52시간제 준비를 못했다고 인정했다. 인건비가 부담되고 업무량도 들쭉날쭉해 인력 채용의 고충이 크다고 토로한 것이다. 한 해 370명이 과로사하는 ‘피곤한 대한민국’의 중심엔 중소기업이 있다. 대기업에서 안착 단계로 접어든 주52시간제가 내년부터 실질적인 분수령을 맞는 셈이다. 그럼에도 주52시간제를 준비한 중소기업은 지난 1월 56.7%에서 7월까지 4.3%포인트 느는 데 그쳤다. 1년6개월 유예기간을 두고도 거북이걸음만 해온 것이다. 정부는 회초리를 자청하고, ‘핀셋 보완책’을 찾아가야 한다. 길이 멀지만, 현실 속 주52시간제는 사회적 대화도 국회 논의도 공전하고 있다. 탄력근로제는 지난 2월 경사노위에서 한국노총이 참여해 ‘주52시간 적용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합의안을 냈지만 국회 입법은 7개월째 서 있다. 자유한국당은 ‘1년 연장’을 요구하다 사실상 무제한 연장노동이 가능한 선택근로제 기준을 1개월에서 3개월로 늘리자는 역제안을 내놓았다. 재계는 특별연장근로와 노사가 합의한 노동시간만 인정하는 재량근로제 확대를 요구하고, 민주노총은 “모두 개악”이라며 11월 파업을 예고한 터다. 노동계 우려엔 ‘노동존중’을 선언했던 정부에 대한 불신이 배어 있다.

‘저녁 있는 삶’은 시대적 대의이고, 행복의 척도가 됐다. 이제 해법은 중소기업으로 넘어가는 주52시간제의 문턱이 높은 현실을 인정하고 시민들과 소통·공유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부는 연말까지 중소기업의 인력 채용 인센티브와 스마트공장 설비 지원에 총력을 쏟고, 계도기간 고민은 그 판단이 선 후에 내놓는 게 순서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채 주52시간제 근간을 흔들지 말고, 제도적 보완책은 중소기업 수요가 많고 사회적 대화의 첫 매듭인 탄력근로제를 논의 중심으로 삼는 게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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