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 <콜럼바인>을 며칠에 걸쳐 무서운 마음으로 읽었다. 무섭다고 말하는 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1999년 미국 컬럼비아주의 고등학교 콜럼바인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책이다. 7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인데, 단순히 사건에 대한 취재와 분석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부제로 붙은 말마따나 그 비극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이다.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1999년 4월20일. 두 명의 소년이 폭탄과 산탄총으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로 태연히 걸어들어가 학생 12명과 한 명의 교사를 죽였다. 그들의 계획대로였다면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책은 그들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매우 세밀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마도 사이코패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총격자와 그의 공범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끔찍한 정신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이지가 않아서 오히려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할 정도다.  

언제나 더 무서운 것은 극히 정상적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이 극히 정상적이라고 믿으면서 저지르는 일들이다. 그래서 이 총격범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서워지는 건 오히려 그들이 평범한 가정에서 보통의 소년들로 자라났다는 지점이다. 두 소년 중 한 소년의 어머니는 그 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썼다. 강연도 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아들이 겪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 몰랐다고 말을 한다. 변명을 하는 건 아니다. 알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왜’라는 질문은 남는다. 아니 그래서 더 남을 것이다.

책은 또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뿐만 아니다. 사건 처리 과정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공권력의 시도,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려는 언론의 행태, 심지어 희생자를 종교적으로 추앙하는 종교단체의 이야기도 나온다. 사건은 어떻게든 이미 벌어졌지만, 그것을 처리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복마전으로 치달으면서 사건은 비극이 된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려고 노력했던 한 희생자의 부모가 좌절을 겪은 끝에 하는 말이다. “‘나’는 정의를 단념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총기난사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총기와 관련된 사건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인가?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이코패스든 무엇이든, 총기 구입이 그토록 수월하지 않았다면, 마치 편의점에 가서 술 몇 병 사듯이 그렇게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런 일이 이렇게 쉽게 벌어지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미국에 살고 있었다면 당장 총기규제에 찬동하는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다행’인 이 나라에서도 사람은 죽는다. 총에 맞아 죽듯이 댓글에 맞아 죽는다. 댓글을 쓰기 위해 클릭을 하는 건 총을 사고 탄환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도 더 간단한 일일 것이다. 너무 간단한 나머지 누가 죽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변명도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비겁하다. 용서가 안되는 변명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비극적인 소식 때문에 지난주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되기 전에 한마디쯤은 해줘도 좋았을 텐데. 닿지 않더라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그녀의 나이 때부터 시작해서 이 나이 될 때까지 브래지어라고 하면 그야말로 진절머리를 내는 나로서는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눈이 갔다.  

당당해서 참 보기 좋았다. 그 친구가 투사가 아니고 여권운동가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겼으면 했다. 그것이 단순히 옷차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인식의 문제이며, 여성이 스스로 취해야 할 권리와 태도에 관한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자꾸 미안해진다. 그 친구의 참담한 결정이 단지 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한 가지 원인이 어디 있겠나. 모든 원인은 서로 얽혀 있고 어떤 원인이 또 다른 원인을 촉발한다.

책 <콜럼바인>에서는 그날 총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한 줄 아느냐는 부모의 질문에 소년의 대답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용서해줘요, 제발요.”

용서는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당하게 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어느 글에다 쓴 적이 있다. 가해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가 세상을 떴으니 그 뒤에 남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안다. 최진리법을 입안하자는 청원에 눈이 가는 이유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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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창가 구석진 자리. 내가 들를 때마다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조간신문과 커피잔, 그리고 생수병. 팔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루엣이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작은 자를 대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곤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읽기에 몰두했다. 때로 반신상(半身像)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찾아가는 카페가 있다. 인테리어가 소박하고 자그마한 뒤뜰에는 파라솔이 몇 개 펼쳐져 있다. 점심시간을 피하면 빈자리가 많다. 도심의 고층빌딩 숲에 숨겨놓은 ‘비밀의 정원’ 같은 곳이어서 드나들 때마다 재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는 매번 ‘책 읽는 노인’을 볼 수 있어 카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

대학가에서 주택가까지 도처에 카페 간판이 내걸리는 것을 보고 한때 의아해한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됐다.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무실이자 응접실이고 공부방이자 집필실이다. 가족 형태와 주거 공간이 크게 바뀌면서 카페의 기능은 훨씬 다양해졌다. 카페는 일과 휴식, 나와 타인, 낮과 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경계의 공간이다.

개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카페와 같은 사적 공간을 마련한다. 사회적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사적 영역이 없다면 현기증 나는 이 ‘복잡계’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밀실에서 자기와 만날 수 있어야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밀실의 밀실다움이다. 고시원, 옥탑방, 반지하, 원룸을 바람직한 밀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고독의 공간이 아니라 고립의 공간이기 십상이다. 다른 하나는 광장과 거리, 공원과 같은 공적 영역이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밀실과 광장이 균형을 이뤄야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장소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이승희 옮김, 민음사)에서 19세기 이후 개인주의의 거듭된 변화, 다시 말해 정체성의 변화를 동질사회와 다원화사회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진단한다. 카림은 개인주의를 세 개 세대로 구분하고, 현재 우리는 3세대 개인주의와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카림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대 전환을 이뤘다.

19세기부터 지난 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지배한 1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계급사회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 이 첫 번째 개인은 민족이나 정당에 소속돼 개인이라는 특성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한 법적 권리를 획득했다. 주체의 변화가 목표였던 1세대에게는 정당, 교회, 학교의 역할이 중차대했다. 이 거대 기관들이 민족 중심의 동질사회를 형성하고 개인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민족(공인)과 민주주의(개인)는 서로 충돌하는 관계였다.

1960년대에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는 1세대와 달리 주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2세대는 기존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두 번째 개인은 ‘프로젝트형 인간’이자 ‘표현하는 주체’다. 이들은 1세대가 추구했던 ‘동등’이 아니라 ‘차이’를 우선한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말을 걸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정치 무대에 올려놓았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 즉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범주에 등록시키려는 것이다.

3세대 개인주의의 특성은 2세대와 공통점이 많은데 ‘작아지는 자아’로 요약된다. 세 번째 개인에게는 우연성이 수시로 개입해 불확실성이 가중된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야 하는 다원화사회의 고단한 구성원이다. 카림은 공통된 세계관이 부재하는 다원화사회에서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라고 말한다. 이 중립성은 오스트리아의 ‘만남구역’과 같은 공적 공간에서 구현된다. 만남구역은 교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속도 제한 말고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이용자들이 스스로 관리, 운영하는 공적 공간이다. 만남구역의 확대판 중 하나가 월가 점령 시위다. 

카림은 다원화사회를 인간화하는 지름길이 장소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다름과 다름이 공존하는 온전한 삶과 사회는 공유 공간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개인주의 탐구를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지만 우리는 몇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과연 몇 세대 개인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것은 또 몇 개인가. 우리의 밀실은 어디이고 광장은 또 어디인가. 우리는 ‘사회적·심리적 홈리스’가 아닌가. 카림에 따르면 우리가 창조해야 할 공유 공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주어지지도 않는다. 정당이 계획하지도 않는다. 

주말마다 촛불이 밝혀지고 태극기가 휘날린다. 우리는 언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적 장소’를 창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1세대 개인주의의 틀에 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정치’를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을까.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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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나라는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수량과 수질을 나누어 물을 관리해 왔으나 분산된 관리체계로 인한 업무의 중복과 비효율이 지적되어 왔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물 관리를 환경부로 일원화했다.

한편 물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상류지역의 개발제한과 하류지역의 수질오염 문제로 인해 지역 간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얽혀 있으며, 여러 이해당사자들과의 협력 없이는 정부 혼자서 물과 관련된 갈등을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번에 국가물관리위원회와 4개 유역물관리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통합 물관리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물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물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우선, 위원회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4대강 보 처리에 대해 심도 있는 협의를 통해 지혜를 모아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보 존치와 개방의 효과가 정확히 입증되지 않은 채 주민, 환경단체, 정치권의 의견 대립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역물관리위원회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들도 주민 및 전문가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공공재인 유역의 물을 가장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국가·유역물관리위원회가 지속 가능한 통합 물 관리 실현을 위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제를 충실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물관리위원회는 물관리기본법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정부, 지자체, 지역주민,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소통의 과정은 물관리위원회가 심의·의결해야 할 최상위 계획인 국가물관리기본계획의 수립 과정에서부터 충실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지자체와 환경부, 수자원공사, 환경공단 등 관련 기관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둘째, 물관리위원회는 물 분쟁 조정 결과에 대한 실효성을 확보해야 한다. 관건은 이해당사자들이 물관리위원회의 조정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 분쟁 조정에 갈등과 관련된 모든 이해당사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관련된 전문가 집단도 반드시 조정 과정에 참여해 객관적인 자료 검토에 근거한 합리적 해결책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이해당사자들로 하여금 전문적 판단에 근거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유역 내의 물 정책과 현안은 우선적으로 유역물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각각의 유역은 고유의 환경 특성에 따라 물 현안이 다양하고 상이하다. 유역 물 정책과 현안에 대한 논의는 유역 구성원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역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역 내 논의를 통해서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할 경우 국가물관리위원회에서 심화된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통합 물 관리기구에 거는 관심과 기대가 크다. 그렇지만 복잡하게 얽힌 물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원회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물 분쟁 조정의 실효성을 확보한다면, 물 분야 최상위 의사결정기구로서 국가 물 관리 선진화를 앞당길 것으로 기대된다.

<윤성택 |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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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딱히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이어서가 아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해질 것만 같았다. 종종 여행을 다녔지만 그건 호기심이 앞선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충동은 그런 여행 감각과 또 달랐다. 일상의 루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하루하루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침실에 들여놓은 시집 책장에 손을 뻗어 아무 시집을 펼쳐 한 편 읽는 일, 절대로 거르지 않는 아침 식사, 출근하면 컴퓨터를 열기 전에 나무와 고양이의 동태를 살피는 일, 퇴근하기 전 사무실 골목을 기웃거리기 등 업무의 과중에 상관없이 반복되는 행위가 삶에 힘을 실어준다고 믿었는데 시큰둥해진 것이다.

떠날 수 없을 때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전시회 관람과 영화관에 숨어들어가는 일. 현실과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를 거치면 기운이 회복되겠지.

전시를 찾아다니며 직업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시 벽면의 문장 타이포를 유심히 보거나 작품의 배열, 관람 동선도 내가 만드는 책 편집과 연결되었다. 일 생각에 빠져서 현실의 답답함을 잊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알로하셔츠전’이라는 독특한 전시를 보았다.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에서 2년, 하와이에서 2년을 산 이우일·선현경 만화가 부부가 서울로 돌아와 여는 전시는 뜻밖에도 작업한 작품이 아니라 현지에서 그러모은 오래된 알로하셔츠를 내건 것이다. 꽤 오래전 신혼여행으로 1년간 바깥세상을 다녀온 커플이니 짐작은 했지만, 그 후에도 이들은 출장도, 단순한 여행도 아닌 낯선 곳에서 ‘눌러앉아 살기’를 실천했다.

“나는 늘 ‘익숙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라고 <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에서 이 작가는 고백했다. 창작자인 이들에게 잘 모르는 곳, 낯선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전시장에서 마주친 알로하셔츠들은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문양이 많았다. 작가가 모아들인 것이니 프린트된 그림이며 포인트며 점잖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신선하고 재밌었다. 알로하셔츠에는 하와이 주민들의 예술 감각과 문화가 그대로 드러났다. 전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어 마음에 드는 두 장을 선택했다. 당장 걸치고 싶을 정도로 화려한 색감에 끌렸다. 반팔 알로하셔츠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홀로 패션쇼를 벌였다. 가을 긴팔 옷 위에 겹쳐 입은 알로하셔츠는 색달랐다.

거울 앞에서 옷을 겹쳐 입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발견하고 내가 왜 떠나고 싶었던가 이유를 알았다. 이 장난기를 잠시 잃었던 것이다. 경직되고 유머 없는 날들 속에서 숨이 막혔던 것이다. 생업의 긴장감에 마모되는 곳이 나올 만한 시기였다.

그날 밤 보랏빛 책을 펼쳤다. 얼른 읽고 싶어도 펼쳐볼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콧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시인 듯 삶인 듯 처연하고 아름다운 글을 읽고 코를 벌름거렸다. 본능적으로 향을 맡아보겠다는 자세였다.

답답하다고 여기는 날들도, 그것이 향기일지 악취일지 알 수 없으나 어떤 냄새로 분명 남을 것이다.

이우일·선현경 부부가 돌아온 소감은 담백했다. “익숙한 곳에서 멀어질 때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것처럼 내가, 우리가 작아졌다. 그렇게 작아질 때마다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돌아온 이들은 익숙한 것의 가치를 말한다. 돌아올 수 없이 멀리 떠난 시인은 떠나기 전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말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 세계와 사람들에게 닿고 싶어 했다.

나도 언젠가 떠날 것이다. 담백한 소감조차 밝힐 일 없는 곳으로. 그때 일상도 멈출 거라고 생각하니 떠나고 싶은 충동으로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여행감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날들도 콧가를 스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테니. 오늘을 잘 살자.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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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이사를 오고 크게 달라진 것 하나는 관공서에 드나들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서른 몇 해 동안 서울에서 관공서에 갔던 모든 횟수보다 하동에 내려와 관공서에 간 횟수가 훨씬 많았다. 면사무소와 군청과 농업기술센터와 보건소와 농산물품질관리원 같은 곳들. 면사무소 직원은 온 마을 사람들 얼굴을 알고, 사람들은 해마다 올해 관에서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신경을 기울인다.

지방으로 내려와 살면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문화행사를 치러낸 이가 있었다. 그는 지역 유지가 노골적으로 몇 사람을 지정해서 꽂아넣거나,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무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결국 그는 정해진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늘 해오던 관습에 대해 문제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역 사회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그런 일들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논이었던 땅에 어느 날 갑자기 과일나무가 벼처럼 빼곡하게 심긴 다음해에 그 땅이 도로로 수용이 된다거나(나무그루 수마다 보상을 받는다.), 한 해에 2주쯤 관광철에 교통량 조사를 해서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토목 공사를 벌인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지역의 상징 조형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글자 그대로 상징이어서, 빙하 꼭대기와도 같은 상징물 아래에, 다크웹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언젠가는 지역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신청하는 사람이 창구 직원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저 아는 사이에 선물을 주는 것인 줄로 생각했다.

관청과 가까운 삶이어서 그럴까. 이명박 시절에 내려와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런 일들은 점점 버젓해지고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지방자치라는 것이 지방의 토호와 관청의 어긋난 관행을 제도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른들은 ‘나서기’라고들 하셨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들이 지방의원을 하고, 지역의 여러 기관 자리를 도맡는다. 사람을 때리고, 욕하고 했던 예천군 군의원들은 제명을 당한 다음, 그걸 취소시켜달라고 소송까지 했다. 이 군의원들이 유별난 경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소문은 금세 퍼지고,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가 또 누구와 어떤 사이인가 하는 것도 알려진다. 그러고 나서는,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공적인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는 경우는 적다. 국회의원쯤 하는 사람이라면, 수사를 하는 지역 경찰서에서 현장에 가 보는 일도 없이 수사를 끝내는 일도 벌어진다. 그것은 지방의 검찰과 법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들리는 말로 판사는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한직이고, 검사는 관할 지역의 규모가 작을수록 한직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일하는 것을 두고, ‘한직’과 ‘좌천’과 ‘영전’으로 설명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좌천되어 한직을 떠도는 사람들의 법치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방의 비리가, 그것이 저질러지는 방식이 꿈쩍 않고 있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국 장관의 사퇴 발표가 있고, 가슴이 찢어진다는 한 작가의 말을 보았다. 집어든 책에서는 ‘생나무가 빠개지는 것 같다’는 글귀도 들어왔다. 그리고 암전. 지난달에 아이들과 서초동 집회에 다녀온 뒤로, 스스로 품었던 마음들을 찬찬히 되짚어 봐야 했다. 엊그제 19일, 서초동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서초동 검찰 앞에서 주말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모은다고 했다. 간절한 만큼, 서로 즐기며 북돋우는 자리라고도 했다. 생나무가 빠개진 자리에, 다시 어린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었다.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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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수많은 기자회견이 열린다. 하나같이 절박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최근 대형마트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제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달라”고 호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첨단 기계를 도입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자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요구라니. 어쩌다 우리 사회는 이런 ‘소박한’ 요구까지 절박하게 호소하도록 만든단 말인가.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매일 무거운 상자를 수백차례씩 들고 나른다. 상자의 무게는 평균 10㎏, 최대 25㎏. 그것을 하루 평균 345회 이상 운반한다. 상자에는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하중을 분산시키지도 못한 채 그 묵중한 상자를 바닥부터 한번에 들어올려야 한다. 골병이 들 수밖에 없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지난 6월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주요 대형마트 노동자 51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56.3%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69.3%는 이로 인한 병원 치료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으면 신체 부담을 10~40%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구멍만 뚫으면 된다. 이쯤되면 이런 탄식이 육성으로 터져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니, 도대체 대형마트들은 상자에 구멍도 안 뚫어주고 이제까지 뭐했단 말인가.

고객의 충동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상품을 배치할 때 인체공학과 심리공학까지 동원하는 마트들이 같은 무게라도 하중이 분산되지 않으면 신체에 주는 타격이 더 크다는 간단한 물리공학조차 몰랐을 리 없다.

혹시 마트 노동자들이 손잡이 구멍을 뚫어달라는 상자가 텅스텐 합금으로라도 만들어진 것일까. 물론 그럴 리도 없다. 이들이 하루에도 345회 이상 낑낑대며 들고 나르는 최대 25㎏ 무게의 상자는 두께가 채 1㎝도 안되는,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상자다. GTX 열차를 놓기 위해 지하 40m 땅속까지 뚫는 이 첨단기술 사회는 고작 그 1㎝도 안되는 두께의 종이상자에 구멍조차 뚫어주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은 노동현장 곳곳에서 비극으로 되풀이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풍속 70m/s의 강풍과 진도 7.0의 지진에서 버틸 수 있는 ‘아웃리거 벨트월’ 시스템을 적용하고 초고강도 강재 ‘HSA800강’을 사용해 지어진 부산의 101층짜리 초고층건물 엘시티의 초정밀 과학에 ‘일하는 사람’은 빠져 있었다”고 지적했다(한겨레 10월2일자 칼럼 ‘거대한 공동의 묵인’). 지난해 5월 이 건물을 짓다가 외부 유리 작업을 하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바람과 지진에 이긴다는 초강재와 초첨단 기술 현장에서 (안전작업 발판과 벽면을 연결해주던) 간단한 고정장치가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비자와 자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첨단기술의 혜택이 현장 작업 노동자의 안전을 향상시키는 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같은 현실은 우리에게 기술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를 되묻게 한다. 하긴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기술의 발달로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라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거리낌 없이 발언하는 사회에서 그 기술을 노동자를 위해서도 써 달라는 요구는 사치일지 모른다.

해외에서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작업 현장에서 인공지능(AI)과 드론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시도되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은 지상 2m 이상 높이에서 작업하는 건설 노동자들이 추락 방지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지 않은 위험지점 1m 이내로 접근하면 경고음이 울리도록 하고, 드론이 찍은 수천장의 현장 사진을 AI가 분석해 위험 요소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시범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례들이 우리에게는 허무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한국 사회의 산재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본을 지키지 않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20㎏ 무게의 쌀과 음료수 상자를 나르느라 요추, 경추 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아 4개월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조금이나마 무리가 덜 갈 것 같습니다” “상품이 가득 든 상자 바닥을 잡고 들어야 하니 자세가 구부러지고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너무 많이 갑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좀 더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조차 안 뚫어주는 이런 사회에서 무슨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겠나. 마트 노동자들이 ‘나에게 손잡이가 필요한 이유’라는 자필 손편지까지 쓰게 만들다니, 기업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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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천양희(194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나치게 많은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홍수를 이룬 말들 속에서 오히려 말의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말에도 때가 있고, 말에도 공터가 있다. “말의 공터”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 말의 비어 있는 땅을 볼 줄 아는 사람의 말은 나직하고 신중하고 고상하다. 여지를 두는 말, 에둘러 해서 듣는 이가 짐작하게 하는 말이 좋은 말이다. 그런 말은 세상에 꽃을 피우고, 세상에 길을 낸다.

그러나 이 세상엔 창처럼 찌르는 말이 넘쳐난다.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는 말이 넘쳐난다.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는 말이 넘쳐난다. 불 같은 말은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다치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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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설리(본명 최진리)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나도 왠지 모를 우울감과 슬픔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한 연예인이 이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원인에 무관심한 세상 때문이기도 하다. 당당한 행동과 밝은 표정 뒤에 감추어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절망감에 통감하는 여성들의 마음에 애도의 강물이 흐르는 사이 악플과 언론으로 주범의 과녁을 바꿔가며 세상은 지금도 설왕설래 중이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책임을 느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얼굴 없는 악플이나 신체 없는 언론사인가, 댓글을 작성하고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인가.

가수 겸 배우 설리. 연합뉴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 더해 ‘여성’에 대한 심오한 편견을 장착하고, ‘여성+연예인’의 취약성을 노린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한 자들. 연예인이 사용하는 차량과 거주지, 자주 가는 식당과 옷집에서부터, 누구와 사귀는지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등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살이 빠졌네, 쪘네, 얼굴이 예뻐졌네, 성형했네, 옷차림이 어떻네, 몸매와 얼굴 품평을 낙으로 삼고, 조금만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이상한’ 여자로 취급해 가차 없이 비난하거나 폄훼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이들. 남자 연예인이 하면 소신발언이라 칭송하다가도, 여자 연예인이 하면 관심종자라 비난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태그 붙여 집요하게 송곳을 꽂아댔던 이들. 여성을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거나 눈요깃거리, 성적 만족의 도구 정도로 보는 자들. 모두 설리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범들이다.

여성 연예인들의 삶을 도마에 올려놓고 부위별로 나누어 품평회를 일삼던 TV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 파파라치처럼 사생활 꽁무니나 쫓고 소셜미디어 계정 하나하나를 기사화해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을 제기하고, 특정 행동을 ‘페미니스트’ ‘논란’이라 규정해 공격을 부추긴 기자들. 여성의 피해에 공감하는 기사를 멀쩡히 쓰는 척하다 자신들만의 단톡방에선 그 고통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 희롱거리로 전시하거나 오락거리로 소비하고 어떠한 제재나 처벌도 받지 않는 자들. 

연예인의 사망 소식에 집 앞과 빈소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진을 치고, 악플러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사진들을 애도랍시고 끄집어내어 다시 망자의 명예를 물어뜯는 이들. 악플을 기사화해 악플을 유도하고, 상처를 팔아 다시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만든 논란에 기름을 부어 논란을 기정사실화하며, 한 여성의 죽음을 이용해 다른 여성의 사회적 죽음을 유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기생하는 이들이 또 다른 주범이다.

나는 의심한다. 온라인에 ‘설리 사망’ 보고서를 퍼트린 대한민국 공무원은 이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 착취의 대상, 돈벌이용 상품, 남성연대의 도구 정도로 생각했던 그 검사, 기획사 대표, 언론사 대표는 이들과 전혀 다른 인간들일까. 사람의 실제 모습을 모방한 성인용 인형(소위 리얼돌)을 국감 현장에 들고나와 “산업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회의원은 또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아동 음란물 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하고 다운로드로 돈을 버는 사람들, 체포된 성범죄자를 불기소하거나 기소중지하거나 집행유예로 선처를 베푸는 사람들은 완전히 별개의 인간들인가. 불법촬영물을 찍고 올리고 거래하고 다운받고 낄낄거리며 소비하는 남자들은 또 완전히 무관한 이들인가. 미성년자에게 전화번호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거절하자 ‘탈락’이라 과감히 말하더니, 논란이 되자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남자 연예인과 제작진은 또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이들은 어쩌면 젊고 재기발랄한 한 여성의 데이트강간 사건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보도하고, 출신배경을 캐서 인신공격하며, 온갖 외모 품평과 추문을 만들어 ‘방종한’ 여자로 몰아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한 100년 전 이 땅의 언론 및 남성 문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닐까. 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 시인이자 소설가,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였던 김명순은 그렇게 사회적·실존적 죽음을 맞았고, 이제야 그의 이름과 작품이 서서히 복권되고 있다.

우리가 최진리의 용기 있는 행동과 죽음의 배경을 마음을 다해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는 쓰레기더미 같은 악플과 기사만이 역사로 남아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다시 왜곡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숨을 다해 소리친 이야기가 지워지고 여성의 죽음을 생산하는 세상의 ‘진리’가 단 하나의 ‘진실’로 남아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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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회의 마지막 국정감사가 이번주 마무리된다. 12개 상임위는 21일, 기획재정위 등 3곳은 24일 각각 상임위별 종합감사를 끝으로 종료한다. 올 국감은 예상했던 대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문제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면서 상임위 곳곳에서 ‘조국 난타전’이 펼쳐졌다. 야당의 ‘조국 때리기’와 여당의 ‘조국 지키기’가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민생·정책 국감은 뒷전으로 밀렸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여야는 지난 14일 조 전 장관이 사퇴한 이후에도 여진을 이어갔다. 이대로라면 청와대를 상대로 한 운영위 국감 등 남은 일정도 마지막까지 조국사태에 묻힐 게 뻔하다. 예년 같으면 매일 쏟아지는 의원발 국감자료도 올해는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다른 야당들도 정책 이슈 면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넘어 역대 최악의 국감이란 말을 들어도 싸다. 

여야 대립의 골이 깊어지면서 일부 의원들의 욕설·막말·고성으로 볼썽사나운 장면도 벌어졌다. 한국당 소속 여상규 법사위원장은 김종민 민주당 의원을 향해 “웃기고 앉았네. XX 같은 게”라고 욕설을 했다. 행정안전위 국감에서는 조 전 장관 호칭을 둘러싼 대립 속에 이재정 민주당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같이 탄핵됐어야 할 의원이 한두명이 아니다”라고 하자, 조원진 우리공화당 의원은 “야, 너 뭐라고 얘기했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실망을 넘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 나라는 경기 침체와 북·미 비핵화 협상, 한·일 갈등, 아프리카돼지열병 등 시급히 다뤄야 할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국회에는 1만건도 넘는 법안들이 먼지만 쌓인 채 방치돼 있다. 20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30%도 안된다. 반년도 채 남지 않은 내년 총선 일정을 감안하면 여야 정쟁은 이어질 공산이 크다. 

엊그제 주말에도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또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조 전 장관 사퇴로 일단락될 듯하던 시민들의 ‘광장정치’가 되살아난 건 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야 간 정치적 공방은 피할 수 없지만, 할 일은 하고 싸워야 한다. 국회는 22일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예산 심의에 들어간다. 이번만큼은 민생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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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전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서울 한복판에 모였다. 나들이가 아니다. 이주노동자 대책을 촉구하고자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2019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는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등 1000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했다. 이들은 더 이상 노예노동을 감수할 수 없다며 산업재해로 죽어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외국인에게도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당당한 외침이다. 

민주노총·이주공동행동·이주노동자노동조합 등 9개 시민단체가 2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전국이주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이석우 기자

이주노동자들의 산재 사망 소식은 뉴스에 자주 등장한다. 지난 7월 이후만 꼽아도 삼척 승합차 전복사고,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 영덕 오징어젓갈공장 지하탱크 질식사고, 속초 아파트건설현장 추락사고 등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최근 5년간 산재사망 이주노동자는 모두 557명. 한 달에 8명꼴이지만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이주노동자를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주목할 점은 전체 산업재해율이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주노동자 산재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력난을 겪는 3D 업종의 일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떠안으면서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이주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는 최하위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임금체불, 갑질 등에 시달리면서도 법적·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고용허가제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다. 고용허가제는 인력이 부족한 제조업·농업·어업 분야에 해외 노동력을 원활히 공급하려는 취지로 2004년 도입됐다. 그러나 사업장을 옮길 때에 원칙적으로 사업주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인권 침해 요소가 적지 않다. 사업장이 위험해도 자유롭게 직장을 옮길 수 없다. 사업주에게 안정적인 노동력을 공급하려는 제도의 취지가 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국제노동기구(ILO)조차 문제를 지적한 사항이다. 시행 15년이 된 노동허가제는 이제 개선할 때가 됐다. 

국내 이주노동자는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한 축이다. 이미 100만명이 넘었고 매년 10만명 안팎의 신규 노동자가 유입된다. 이주노동자도 인격과 노동권이 존중돼야 한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적·인종·종교에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더 이상 이주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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