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물은 물리법칙에 따른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옳다고 생각하든 그르다고 생각하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밤 늦게 라면을 먹으면 살이 찌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줄어든다. 

사회성이 뛰어난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법칙처럼 작용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동시대 호모 사피엔스들의 생각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라면 머리카락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믿던 시절에는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다. 반면에 요즘에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사람을 신기하게 여긴다. 머리를 자르는 행동에 뒤따르는 결과가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문제는 자연의 법칙과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때 생긴다. 많은 사람이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고 믿을 때는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최적화할 것이라고 믿을 때는 독과점에 대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유, 평등, 박애 등 무엇에 가치를 부여할지는 동시대 사람들의 합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지만, 자연에 대한 생각은 정확한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도움으로써 제도와 정책에 영향을 준다. 과학 연구의 과정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무엇에 연구비를 투자할지, 특정 연구 성과를 얼마나 홍보하고 어떻게 사용할지는 정치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활동으로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많았지만, 이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져 현실의 제도를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뇌과학 연구자와 정책가의 협업

뇌과학은 인간의 마음과 긴밀하게 연관된 기관인 신경계를 연구하는 분야이므로 정책에 영향을 줄 여지가 많다. 그런데 과학이 정책에 활용되려면 논문을 내고 학회에서 발표하는 전통적인 학술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문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야가 다르면 전문 용어는 물론 사고의 스타일과 고려 대상도 다르기 때문에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학계에서 인정받는 주요 저널은 영어권에 있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은 언어장벽 탓에 논문을 읽을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어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래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저술한 고려대 김승섭 교수는 한국 성소수자에 대한 논문을 영어로 출간한 뒤, 한국어로 번역하는 노고를 더해서 한국어 논문을 하나 더 작성했다.

이미 많은 정보를 접하는 정책가들에게는 방대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뢰할 수 있고 주제에 걸맞은, 잘 요약된 자료를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와 정책가들 사이에 이미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다면 이 과정이 수월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약물중독을 예방하고, 치료하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수십년째 마약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마약으로 수감된 사람의 숫자가 유럽 전체 재소자 숫자보다 많은 등 대응이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약물중독과 관련된 연구를 해온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 7명과 정책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 9명이 ‘중독과 정책에 대한 스탠퍼드 네트워크’(Stanford Network on Addiction and Policy, 이하 SNAP)를 구축했다. 

우선 정책 분야의 구성원들이 마리화나 규제, 유년층의 마약 사용 등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 4가지를 투표로 선별했다. SNAP는 5년 동안 이 주제에 집중했다. 주로 온라인으로 교류했으며 전체 회의는 2년에 한 번씩 가졌다. SNAP는 자문을 하거나, 대중들의 인지도를 높이거나, 정책가들이 읽기 쉬운 한두 쪽짜리 자료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책가들은 과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과학자들은 대중 정책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정책가들에게 효과적으로 편지를 쓰고 브리핑을 하는 방식,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정책과 관련된 과학 정보를 명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방법도 개선되었다. 

이 네트워크가 성공적으로 운영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SNAP는 구성원들이 잘 모르는 추가 정보가 필요할 때는 구성원들의 지인들을 연결해주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해갔다. 불필요한 의혹을 피하기 위해 제약회사의 연구비 지원은 피하고,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SNAP의 핵심 멤버를 구성했다. 동질적이지 않고 다양한 네트워크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을 주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책가들은 지위를 앞세우거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상아탑의 이야기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연구자들도 가르치려 들거나,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책의 특성과 비용 등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한 채 과학적 성과만 강조하지는 않았다. 

■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과학

과학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잊기 쉽지만, 서양의 과학은 서양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달력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천문학이 발전했고, 전보와 철도가 발전하면서 시차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상대성이론이 탄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세먼지, 청소년 등교시간, 기후변화와 에너지, 빅데이터와 개인정보 등 많은 부문에서 과학 지식이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변화에는 이해관계의 대립과 가치 충돌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과학의 발전에 맞춰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대립과 충돌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현숙함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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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궁상맞은 편이다. 뭘 할 때마다 ‘가성비’ 따지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한 끼 식사를 아무리 호화롭게 해도 이 비용만은 넘으면 안된다는 기준이 꽤 완고하다. 호화로운 식사를 할 때는 미리 온라인에서 식당에 대해 조사해보거나, 이미 그곳에 가본 믿을 만한 사람의 ‘인증’을 확인한 후 찾아간다. 온라인 쇼핑할 때도 최저가 검색을 다양한 경로로 확인하고 여러 리뷰를 눈 아프게 읽고 난 뒤 구매한다.

이토록 효용 가치 높은 소비를 위해 노력하는 내가, 이미 저질러버린 낭비가 있다.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일이다. 4년치 등록금을 합산하면 약 2000만원.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해본다. 단편영화를 여러 편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종의 인쇄물을 수만부 찍을 수도, 세계 여행을 갈 수도, 어쩌면 ‘인스타 성지’가 될 작은 가게를 시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주택 보증금에 보태면 매달 들어가는 비용 부담이 크게 절감되겠지.

대학에서의 배움이 20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보다 더 큰 효용을 가졌는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아니었다. 내 전공은…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는데, 경영학과이다. 수능이 끝난 뒤, 입시 공부는 이제 지긋지긋했기에 대충 점수 맞춰 추상적인 이미지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빼곡한 숫자와 기호를 보면 바로 기분 나빠지는 사람이 회계·재무관리·생산관리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 전공을 선택해버린 것은 인생의 실수였다. 졸업 후 경영학을 일상에서 활용할 일은 없었고, 배운 것의 대부분은 말끔히 씻겨 사라졌다.

지금 하는 일은 오히려 대학 밖에서의 배움과 관계됐다. 언론사 입사 스터디에서의 토론과 글쓰기. 인쇄소 사장에게 굽실굽실대며 익힌 잡지의 제작 과정. 지역 미디어센터의 영상 교육으로 찍은 단편영화. 이 모든 것들에 든 비용을 합쳐도 대학 등록금에 한참 못 미치지만, 대학보다 인생에 보탬이 됐다. 새로운 만남과 즐거움, 성장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먹고사는 데 도움을 줬다.

적성에 맞는 전공으로 진학했다면 대학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초·중·고 기간 동안 시험공부에만 매진한 뒤 적성 맞는 전공을 찰떡같이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것은 정시 확대 기조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중·고 내내 하나의 시험만을 목표로 시간을 보내게 하는 일은 학생들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인생이 어떤 모양인지 충분히 돌아볼 여유를 앗아간다. 한 줄로 세워 경쟁시키는 방식은 남을 깎아내리며 값싼 우월감을 느끼고 드러내는 어른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단순히 시험문제를 더 맞히게 하기 위한 사교육비용 증가도 예상되는 문제이다. 정시 확대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심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너무 원론적이라 김빠지는 대답이지만, 대학에 가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게 우선이라는 거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약 70%로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학 교육이 거의 무상인 독일의 대학진학률이 약 30%, 한국에 비해 학비가 매우 저렴한 프랑스 및 여타 유럽 선진국도 40%대이다. 대학등록금이 낮은 국가에서 오히려 대학진학률이 낮은 것은 학력 차별이 적기 때문으로 분석되곤 하는데,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하면 한국에서는 ‘차별받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간다는 뜻이 된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에 대해 종합적으로 느끼고 이해하기보다 단편적인 조건들로 ‘평가’한 뒤 태도에 차별을 두는 사람들.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을 사회 곳곳에서 만나 자존감에 상처 입는 순간을 언제고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이 취업을 ‘보장’하지도 않는 형국에, 본인이 딱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없는데 단지 차별받지 않기 위해 인생 걸고 막대한 돈을 쓴다면, 정말이지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 아닐까? 그냥 사회에서의 차별을 없애는 편이 낫잖아? 그로써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확보된 자원을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활용하면 모두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입시 공정성’보다 더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의제라고 생각한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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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참 간사해서 언제 더웠는지 기억조차 없다. 더위를 정녕 ‘보’내기 싫으면 가위와 바위를 내면 돼. 훗~. 어디를 쳐다보나 가을가을 한다. 은행잎은 노란리본을 흔들기 시작. 자연은 제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입이 달린 모든 생명은 제 소리를 내고 산다. “우리 시대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이 내뱉는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을 기억한다. 거친 아우성이나 침묵은 가을의 진중하면서도 분명한 표현력과는 딴판. 인간은 자연에게서 배울 게 많다.

올 들어 처음 군불을 때고 누웠다. 따뜻하니 좋구나. 좋을 일도 참 많다고 그러시겠다. 무엇보다 손발이 따뜻한 게 참 좋아. 나는 얼음송송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아’는 잘 안 마신다. 한여름에도 ‘따아’를 마신다. 후후 불어마시면 속이 데워져서 그런지 바깥 더위를 잊게 된다. 추운 겨울에 어찌 살까 약간 걱정이 드네. 기십년 겨울나기에 이력이 붙기는 했으나 추위는 정말 질색이야. 부지런히 호롱불을 걸어두고 군불을 때고 해야지 별 수 있는가.

노처녀가 시집을 간 첫날밤. 신랑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지. “아니 왜 그래요 갑자기?” “야 이눔의 자식아. 왜 이제야 나타나서 나를 감동 주는 겨?” 밀어뜨려 이불 속으로 쏘옥.

더운 날에는 담양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이 있었으나 추운 날에는 부인 가출 실종이렷다. “해 저무는 들녘 하늘가 외딴 곳에 호롱불 밝히어둔 오두막 있어 노을 저 건너의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사이에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김민기 아저씨의 ‘그 사이’ 밤과 낮 그 사이에 시방 서있다. 더위와 추위 그 사이에 서 있다. 그러다가 점차 기울어진다. 밤으로 그리고 추위에게로. 당신과 함께했던 밤과 추위를 생각하면 온몸 가득 온기가 솟아오른다. 그 기억으로 충분해. 이 세상의 밤과 추위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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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언사는 지난 13일 나온 “톨게이트 수납원이 (현재 농성을 하고 있는데)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나”라는 말이었다. 하이패스 등의 보급으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사람이 직접 돈을 받는 일이 실제로 적어지고 있고, 사라지는 직업이라는 낙인은 종종 리스트로도 만들어져 나올 정도이니 표현 자체로만 봐서는 충격적이랄 것은 없다. 그전에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기도 하다.

문제는 저 말을 한 사람이 청와대 고위관계자이고, 저 말이 출입기자들과의 대화 중에 나왔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사람이, 그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낸 표현이었다.

사양산업을 언급할 때 항상 손에 꼽히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고, 언론 못지않게 사양산업으로 취급받는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굳이 내가 일하는 일터가, 내가 맡고 있는 분야가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톨게이트 수납원이 그렇듯이 아마 사라질 직업이라는 진단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구질구질하게 보일지라도,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록은 해두고 싶다. 매주 100권이 넘는 책이 신문사로 배송되어 온다. 이름난 대형 출판사가 오래전부터 발간을 예고한 유명 작가의 책부터, 처음 들어본 출판사의 ‘무명작가’의 책까지 하루에도 많게는 수십권씩 책이 쌓인다. 

종이봉투에 책과 보도자료를 넣어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끔은 편집자나 작가가 직접 쓴 편지를 동봉하기도 한다. 대부분 책만 보내고 말지만 어떤 출판사나 작가는 담당자 e메일로 자료를 또 보낸다. 자리를 비우기 일쑤인 담당자와 통화가 될 때까지 전화를 해서 책과 자료가 잘 도착했는지 직접 확인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들어온 책들을 골라내는 것은 내 몫이다. 출판사와 작가의 이름이 낯설고, 제목이 생뚱맞고, 표지 디자인이 촌스러워도 한 번씩은 다 펼쳐본다. 대체로 큰 출판사와 유명 작가의 책이 기사로 쓰기에 적합할 확률이 높지만 이미 회사에 온 책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의 일을 ‘사양산업’이라고 쉽게 판정내리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쏟아져 나오는 책 10권 중 9권은 찾는 독자가 없어 초판 1쇄만 찍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책을 다룬 기사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에 서평을 찾아 읽는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온라인 기사 조회수는 다른 분야에 비해 확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 기사를 쓰는 사람도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 여기고, 세상에 꼭 필요한 기사라 생각하며 일한다. 무엇보다 이 일은 그들의 ‘생업’이다.

얼마 전 40년 넘게 출판사를 운영한 분을 만났다. ‘돈 안되는 책’을 만들면서 부도 위기도 겪었지만 아직 책을 내고 있다. 책이 나오면 수십권을 언론사에 보낸다. ‘지면에 소개도 잘 안되는 책을 왜 보내시냐’고 물었다. “광고효과도 바라지만 기자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라 보낸다”고 했다. 또 “지금은 안 읽어도 언젠가는 기사에 도움이 될 책이라 보낸다”고도 했다.

지난 13일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경제전문가로서 냉정한 현실인식이라 볼 수도 있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톨게이트 수납원이라는 직무와 신문, 출판 같은 산업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나”라고 물은 그 고위관계자에게 이 대답은 전해주고 싶다. “당신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뒤에 사람까지 보이니 말을 아끼는 것뿐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란 말이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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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이놈이 꼭 제 증조부를 닮았다거든. 게다가 날 닮은 데도 있어.” 1931년 김동인이 지은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주인공 M은 의사 친구 앞에서 양말을 벗으며 생후 6개월 된 아들도 ‘가운데 발가락이 길다’고 보여준다. 학생 시절부터 돈만 생기면 유곽으로 달려간 M은 성병으로 생식능력을 잃었다. 결혼을 고민하는 32세 M에게 친구는 ‘경증’이라고 거짓말을 해줬다. 결혼 2년 만에 아내가 임신하자 M은 불륜을 의심했지만, 번뇌 끝에 자신의 생식능력 검사를 포기했다. 스스로의 방탕했던 과거도 함께 덮으면서 친구의 소설 속 표현대로, 가운데 발가락을 ‘대발견’한 것이다. 핏줄의 진실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택한 셈이다.

한국의 민법(844조)은 ‘혼인 중에 아내가 임신한 자녀’를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판례는 그걸 부인하려는 요건을 엄격히 규정했다. ‘부부가 동거하지 않은 것’이 명백히 확인될 때만 친생자를 부인할 수 있도록 했고,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소송할 수 있도록 했다. 23일 대법원에선 ‘부부 동의하에 제3자의 정자로 인공수정해도 친생자로 추정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무정자증을 가진 남편과 아내가 인공수정으로 낳은 첫아이도, 아내가 혼외관계로 낳았지만 남편이 무정자증이 치유된 것으로 착각해 친자식으로 출생신고한 둘째 아이도 친자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부부의 동거 유무로만 본 친생자 판단도 ‘부자의 유전자가 다른 것이 확인된’ 뒤에도 할 수 있도록 확장시켰다. 친생관계를 유전자로 금세 알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뒤늦게 이혼하며 가족·상속 범위가 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도록 한 셈이다.

제3자의 정자를 받는 ‘시험관 아기’만이 아니다. 가족과 식구(食口)를 보는 생각의 지평은 넓어지고 있다. 한 집에 살고, 끼니를 함께하고, 의지하는 ‘생활동반자’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혈연·혼인·입양이라는 종래의 ‘정상가족’을 넘어 미혼 동거나 독거노인과 연 맺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저출산 극복과 돌봄을 위해 법적 보완책을 짜고 있는 사람들이다. 36년 만에 나온 대법의 새 친생자 판례도 ‘사회적 가족’이 늘어나는 시대와 동행하고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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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에 가면 한 번씩 들러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낮이거나 밤이거나 아직은 넉넉하다 할 수는 없어도 제법 무성해진 가지를 마을 정자 지붕 쪽으로 드리운 채 그 곁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수령 사십 년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를 심던 날이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흰수염 노인이라 부르던 이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이다. 본래 그 자리에는 족히 이백 년은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앓더니 더는 잎사귀가 돋지 않게 되었고 어느 날 번개에 맞아 몸통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고사목을 뿌리째 뽑은 뒤 마을 사람들은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를 추렴하여 사다 심었다. 그 일에 앞장선 이가 흰수염 노인이었다. 나는 땅을 삽으로 파거나 물 양동이를 나르며 그 일을 도왔는데 내 어린 손아귀에 다 들어올 만큼 가느다랬던지라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예전의 느티나무만큼 자랄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별 흥미도 기대도 없었다. 

노인은 밑동 부근의 흙을 정성스레 골라주었고 듬뿍 물을 주고 난 뒤 다정하게 느티나무를 쓰다듬었다. 노인은 이 나무가 정자 지붕을 덮을 듯이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면 그 아래서 목침을 베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잎사귀들이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숨 푹 자고 싶다고 거의 수줍어하면서 말했는데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난감한 말이기도 했다. 동네 노인 중에서도 가장 연배가 높아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이 고비늙은 노인에게는 그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꿈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노인이 어린 느티나무를 보며 꿈이라도 꾸듯 눈빛을 빛낼 때는 까닭 없이 서글퍼졌다.

그로부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어린 느티나무는 여전히 어린나무에 불과했고 노인의 꿈은 노인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느티나무를 심던 날 보았던 노인의 눈빛만은 내 마음에 박혔고 이따금 나는 거기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눈빛이 누군가의 눈빛을,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의 눈동자에 떠오르던 빛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꿈을 꾸는 노인이라니. 

아무도 노인에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노인을 꿈꿀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고 꿈을 꾸는 노인이 있다면 헛된 꿈을 꾼다며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꿈을 꾸는 노인이 있다면 그 노인이야말로 우리의 통념과 상식을 뛰어넘어 우리가 안전하고 평온하다고 믿는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인 셈이다. 꿈을 꾸는 노인은 불온하다. 그들이 꾸는 불온한 꿈은 이 세계를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계로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난 뒤로는 그 나무를 드물게 볼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내 눈에 느티나무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십 년이 흐르고 또다시 십 년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느티나무는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되었고 그 아래 목침을 베고 잠드는 사람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흰수염 노인의 꿈이 그이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꿈꾸는 노인은 자신만을 위한 꿈을 꾸지는 않는다. 노인의 꿈은 다음 세대를 위한 꿈이기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윤리적인 꿈 가운데 하나이다. 일당 몇만 원에 노인을 매수하여 광장으로 몰려들게 한 자들은 단지 노인을 짓밟은 게 아니라 인간의 꿈을 짓밟은 것이다. 노인에게서 꿈을 박탈한 것이며 꿈꿀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은 것이다. 노인이 꿈을 꿀까 봐 두려워 푼돈을 쥐여주고 꿈을 꾸지 못하도록 억누른 것이다. 노인이 꾸는 꿈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꿈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 아니 그걸 알기에 인간의 미래를 한사코 파렴치하고 비열한 자들의 수중에 남겨두려는 자들. 감히 노인을 능멸하고 능욕한 자들. 부디 그들이 그 노인들의 꿈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노인들의 꿈속에서 영원히 소멸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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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흡연자들에게 액상형 전자담배를 사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액상형 전자담배를 사용해온 30대 남성의 폐손상 의심사례가 보고되면서 내린 강력한 행정 조치다. 액상형 전자담배로 인한 피해의심 사례는 1건에 불과하지만, 정부가 예방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사용중단을 권고한 일은 바람직하다. 

세계적으로 액상형 전자담배의 위해성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15일 기준 액상형 전자담배로 인한 중증 폐손상 사례가 1479건, 사망사례가 33건이나 발생했다. 미 보건당국이 액상형 전자담배 판매를 엄격히 제한한 가운데 일부 주에서는 판매중단 조치를 실시하는 전자담배 퇴출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5건의 폐손상 사례가 보고된 캐나다를 비롯해 이스라엘, 중국, 인도, 호주에서도 전자담배 판매금지 또는 사용자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외국에 비해 늦은 편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전자담배 흡연자의 폐질환 의심사례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담배사업법에 따르면, 담배는 ‘연초의 잎’을 원료로 한 제품을 말한다. 연초의 줄기나 뿌리에서 추출한 니코틴을 사용한 액상형 전자담배는 ‘담배’가 아니라 공산품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액상형 담배는 식약처의 화학물질 안전성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른 금연 규제 대상에서도 빠졌다. 담배 관련 세금 부과 대상도 아니다. 액상형 담배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올 상반기 국내 담배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0.6% 감소한 반면 전자담배 사용은 오히려 12%나 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액상형 전자담배 판매량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위해 경고음이 높아지고 있는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한 대책은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정부는 액상형 담배의 사용중단 권고와 함께 ‘담배’의 범위를 확대하고 관리체계를 강화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흡연자들이 금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부는 흡연자 건강권 보호에 힘써야 한다. 특히 청소년에게 전자담배 사용의 위험성을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 액상형 담배와 폐질환의 연관성이 규명될 경우 판매금지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전자담배 대책은 아무리 엄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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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에 오른 의원들에게 내년 총선 공천 시 가산점을 주겠다고 한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22일 의원총회에서 “패스트트랙에 대해 저항을 앞장서 하신 분들의 기여도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황교안 대표도 공감한다고 전했다. 당 ‘투톱’의 의지라는 것이다.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얘기다. 나 원내대표는 범죄 혐의자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저희는 범법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 생각하고 있다”고도 했다. 선거를 앞두고 수사 대상 의원들의 불안감을 무마하려는 의도라지만, 나가도 너무 나갔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왼쪽)가 22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조국 인사청문회 대책 태스크포스(TF)’ 소속 의원과 당직자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 원내대표의 임기는 오는 12월까지다. 당헌·당규상 원내대표는 공천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 하물며 떠나는 원내대표가 가산점을 주니 마니 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공천 과정에서 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이런 특혜 방안을 수용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당내에서조차 “패스트트랙 저지에 의원 대부분이 참여했는데 소속 의원 110명 중 수사대상에 오른 60명에게만 가산점을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결국 그가 가산점 운운한 것은 수사 대상에 오른 다수 의원들을 다독여 원내대표를 한번 더 해보겠다는 심산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당은 지난 4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을 발의한다고 국회 의안과를 점거해 접수조차 못하게 했다. 팩스로 제출된 법안을 빼앗아 찢고, 다른 당 의원을 회의장에 못 가게 감금하는 등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도저히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이후에도 한국당은 경찰과 검찰의 소환 요구에 불응하며 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황 대표는 “내 목을 치라”며 자진출석했다가 정작 검찰 조사에서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쇼’를 벌였다. 그 당 소속 법사위원장은 국정감사에서 검찰에 대놓고 “수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당은 조국 전 법무장관 수사에는 줄곧 엄정한 법 집행을 외쳐 왔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법치를 유린하고 있다. 하다하다 이제는 범법자에게 공천 특혜를 주자고 한다. ‘조국파문’에도 한국당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건 쇄신과 변화를 외면하는 데 대한 실망 외에 툭하면 터져 나오는 이런 반법치, 반민주적 행태가 겹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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