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지중해 바닷가로 이주한 지도 어언 두 달이 된다. 매일 아침 바닷가의 모래밭을 걷는 것으로 나의 하루 일과는 시작된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매일 마주치던 청년이 보이지 않는다. 요가 수행자의 차림을 한 그는 아침 바닷물이 빠져 나가는 썰물 때 반려견을 데리고 나타난다. 그는 바닷가의 모래밭에 많은 연꽃잎이 연결된 원형의 큰 만다라를 그리고 그 중앙에 돌탑을 세우고 어느새 사라진다. 아침에 공들여 만든 모든 것이 저녁때는 밀물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도 역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모래밭은 하루에도 무수히 변화하는 화폭인데도 그 위에 불가의 상징인 만다라를 남기는 작업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자연과 예술, 그리고 오늘날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이야기하는 자연을 간단히 정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신화나 예술, 생태학적 관심,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보는 자연 이해에는 사실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나 ‘자연스럽지 못하다’라는 우리말처럼 우리는 우리 삶의 질서와 관련시켜 자연을 먼저 떠올린다. 여기에는 근대의 과학과 기술이 강조한 인간정신의 실현을 위한 대상으로서의 자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를 담은 자연을 강조한다. “도는 곧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道法自然)”라는 <도덕경>의 한 구절이 이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세계에 주는 윤리적인 가르침은 물론 동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를 결코 기만하지 않는다. 기만하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라는 루소의 지적도 실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인간세계의 규범으로서의 자연 이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미적인 대상으로서 자연이다. 자연이 펼치는 오묘한 조화가 전달하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고, 경외감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인간의 손을 거친 예술작품도 이에 못지않게 우리 삶에 강한 충격과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겼던 쇼펜하우어와는 반대로 헤겔은 예술세계에선 인간이 자연의 규범이라고까지 보았다. 어떻든 까마득히 높은 산이나 끝없는 망망대해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자연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 앞에 숙연해지면서 동시에 인간존재의 무력함도 느끼게 된다. 

자연은 또 우리의 생활세계가 빚어낸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세계의 소외를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데 있어 자연미의 의의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는 특별히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미가 단순하게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생활세계의 대립점에 서 있는 어떤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도 변화하고 확장한다고 보았다. 그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삶의 원형으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미래로 향한 동적이며 저항적인 힘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자연에 대한 열광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도시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로서는 역시 살 수 없다’는 브레히트의 지적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촉발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삶의 공간으로서 도시의 역할을 떠나서 논의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연에 반기를 들었던 도시생활과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귀향이나 귀농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는 정지용의 시 ‘고향’의 첫 구절처럼 자연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고향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이 점에서 자연에 대한 개인주의적이자 낭만주의적인 생각을 브레히트는 “너희들은 걱정이 없는지? 너희들은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지? 너희들의 세계는 그래서 더 좋아질 건지?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돌 위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자연은 총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파악될 때만 단순히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인간과 공존하는 그의 건강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무엇보다도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연을 단지 대상화해서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밑에 이를 점령하고 파괴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당연히 묻는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발전이 어떤 의미를 담을 수 있겠는가라는 자문 속에서 ‘환경과 개발을 위한 세계위원회’는 1987년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도 점차 주로 시장과 국가를 매개로 움직이는 경제적 범주 안에 머물면서 건강한 생태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재생하고 회복하는 데까지는 진척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형태로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사회운동이 작년 여름부터 전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운동은 특히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때 이주를 생각해서 두 해 겨울을 났던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 바닷가의 한 조그만 마을에 거대한 호텔시설이 들어서는 데 반대하는 섬의 환경운동단체가 호텔 공사장의 벽에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대형 낙서를 남겼다. 파도와 갈매기의 소리를 들으면서 곧 사라지기 마련인 만다라를 매일 이른 아침에 남기는 청년도 멀지 않은 언덕에 세워진 높은 크레인을 항상 올려다본다. 한편에서는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이 주는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모래밭에 남긴다. 사람의 생각이 변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변혁할 수 없기에 자연이 주는 다양한 메시지를 이해하려는 개인의 자성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아가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은 위기에 빠진 지 이미 오래인 생태계로서의 자연이 지니는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를 더 분명하게 확인해줄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근본주의적이고 너무 과격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함께하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투쟁과 행동 없이는 사회는 물론, 자연도 소외된 상태로 앞으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다. “투쟁하는 자는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이미 패배했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가 그래서 생각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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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3000억원! 환경부가 2020년 미세먼지 관련 예산으로 편성한 액수다. 올해보다 35% 늘어난 사상 최대 규모다. 미세먼지를 개선하겠다는 의지에 동의한다. 오히려 미세먼지로 인한 고통과 불편을 생각하면 더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예산의 세부내역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조5300억원을 전기차 구입 지원, 경유차 조기 폐차 지원에 배정했기 때문이다. “친환경차인 전기차를 보급하고 노후된 경유차의 폐차를 유도하겠다는 정책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기차는 미세먼지를 줄일 수 없고 경유차는 미세먼지의 주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자동차로부터 발생되는 미세먼지의 약 90%는 비배기가스가 발생원이다. 자동차 미세먼지는 배기통이 아닌 타이어, 브레이크, 도로포장, 도로재비산먼지가 원인이다. 연구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결과는 유사하다. 연구뿐 아니라 유럽환경청(EEA), 미국환경부(US EPA), 유엔유럽경제위원회(UNECE) 등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독일환경청에서는 향후 자동차 미세먼지 중 비배기가스가 차지하는 비율을 93%까지 예측하고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 처리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그래도 전기차가 디젤차보다 최소한 10%는 미세먼지를 더 적게 발생시키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다. 전기차의 배터리 무게 때문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전기차는 같은 브랜드의 차종 중 가솔린차 대비 300㎏ 정도 더 무겁다. 중량이 더 무거우니 타이어, 브레이크 등에 더 큰 부하를 줘서 배기가스 저감량을 상쇄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전기차가 왜 미세먼지의 구세주가 되었을까? 그리고 경유차는 왜 낙인찍혔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짐작하건대, 미세먼지 측정방식 때문이다. 환경부가 인용하는 미세먼지 배출량 통계는 배기가스만을 대상으로 측정한다. 배기가스만을 대상으로 했으니 내연기관차는 높게 나오고 전기차는 없는 것이다. 한때 고등어가 미세먼지의 주범이라 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것과 판박이다.

원인에 대한 해석이 다르니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대책 또한 유럽이나 미국의 그것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교통부문의 공기질 정책에서는 자동차를 줄이고 녹색수단을 장려한다. 세계보건기구(WHO),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말이다. 올해 영국 정부에서는 향후 20년간 약 25조원을 자전거 활성화에 투입한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그 대책의 이름은 다름 아닌 ‘맑은 공기전략’이다. 대책에 전기차는 없다. 문제는 같은데 방법은 전혀 다른 것이다.

맑은 공기를 위해 외국에서는 자동차를 줄이자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앞장서 자동차를 구입하는 비용까지 지원하겠다고 한다. 다른 나라와 국제기구들이 자전거 활성화에 거액을 투자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주무부처 자전거 예산은 10억원이 안된다. 전기차 지원예산의 0.07%이다. 미세먼지 정책의 심각한 오류이며, 방치를 넘어 고의적 폐기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산업적 측면에서 전기차가 대책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전기차로는 미세먼지를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교통부문 미세먼지를 감축하고자 한다면 자동차 이용을 줄이고,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활성화하도록 정책과 예산을 집중하는게 맞다. 그것이 곧 미세먼지의 원인과 대책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며, 지속 가능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재영 | 대전세종연구원 선임연구위원·교통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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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랜 인연이 있는 선배가 연락을 했다. 독문과 교수인 선배가 이번 학기에 ‘문학과 법’을 주제로 강좌를 여는데, 카프카의 <소송>을 주제로 하루 강의를 맡아달라고 했다. 작년에 소설을 출간하고 작가 아닌 작가 행세를 하는 형편인데, 작가적 관점보다는 법률가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되는 것이라 하여 흔쾌히 맡았다. 그러고 나서 찾아보니, 카프카의 소설 중 읽은 것은 <변신>뿐이고, <소송>은 앞과 뒤의 몇 페이지만 읽다 말았다. 변호사로서 더 관심을 가질 만했지만, 직업상 익숙해서 도리어 회피했던 모양이다. 마침 가깝게 지내는 출판사가 카프카 전집을 발간했기에, 지나는 길에 최신판 <소송>을 빌려왔다. 그런 경위로 뒤늦게 이 유명한 소설을 읽을 처지가 됐는데, 책상에 올려놓고 며칠째 표지만 노려봤다.

토요일 밤이었다. 잠이 안 와 <소송>을 읽기 시작했다. ‘읽다가 졸리면 미련 없이 자야지’ 하는 심사였는데, 읽을수록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는 이 소설을 “잘못도 없이 소송에 휘말린 남자가 관료적인 법원에 의해 경위도 파악하지 못한 채 사형되는 이야기”라고만 짐작했다. 물론 전혀 아닌 건 아니다. 그러나 <소송>은 ‘법’보다는 ‘인간의 조건이 처한 근원적 부조리와 실존의 비극성’을 다루고 있었다. 법과 소송절차는 주인공 ‘카’가 처한 상황의 부조리를 극대화하려 차용된 상징적 장치로 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로 시작하는 <변신>을 읽었음에도, 딱딱한 제목 탓인지 <소송> 또한 비슷한 분위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는 단어는 ‘카프카적인’이라는 뜻이고, ‘부조리하고 암울한’ 느낌을 표현하는데, <소송> 또한 말 그대로 ‘카프카적인’ 작품이었다.

나는 반쯤 읽다가 밤이 깊어 덮어둔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카프카적인’ 꿈을 꿀 것만 같다. 나는 얕고 뿌연 잠 속에서 주인공의 불가사의한 소송 그리고 실존의 불안에 대해 생각한다. 카프카로 하여금 그런 글을 쓰게 한 20세기 초 프라하의 어두운 불빛이 내 창문에 스며든다. 유대인 카프카를 좌절시킨 시대의 어둡고 희박한 공기가 내 방으로 흘러든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진저리친다.

카프카가 비록 법률을 전공했지만, <소송>이 법을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독서 중의 잠정적인 인상이지만, 법질서와 관료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룬 사회파 작품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법의 본질이나 법현상과 무관할까.

최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확인되면서 이른바 8차 사건이 주목받고 있다. 8차 사건은 체포된 어느 피의자가 모방범죄를 벌인 것으로 조사되고 기소됐다. 그는 고문으로 자백했다고 뒤늦게 주장했으나 유죄가 확정되었고, 긴 수형생활 끝에 출소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진범이 그것도 자신의 죄라고 밝힌 것이다. 더 조사해야겠지만 생사람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영문 없이 고초를 겪은 그가 카프카의 <소송>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소설 <소송>은 그에게는 환상이나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저지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범죄. 체포와 고문 그리고 자백. 유죄와 평생에 걸친 감금.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수사나 재판이나 교도행정 같은 관료적이고 법률적인 절차들이 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악몽이었으리라. 합리적 언어의 외피를 쓰며 법을 집행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으리라. 다행히 그는 소설과 달리 사형을 면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형으로 끝남으로써 소설 &lt;소송&gt;이 완전한 현실이 된 정치적 사례들을 알고 있다. 나는 카프카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실존의 부조리를 다룬 상징적 작품이 한국이란 기이한 공간에서 놀랍게도 현실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시대는 흘러간다. 정치는 민주화되었고 사법은 꼴을 갖추었다. 이제 우리의 세상에는 더 이상 카프카적인 악몽이 없는 것일까.

우리 시대에는 사법절차가 온 시민이 참여하는 거대한 게임처럼 변모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는 수사기관과 혐의자와 법원과 언론과 그리고 관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난투극을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터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카프카가 생각했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와 쾌청하고 요란스러운 한국 사회는 포개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을 포기한 사람이 연쇄살인범의 자백 덕에 다시 목소리를 낸다. 자신 있게 살아가던 여성이 괴로움을 못 이겨 스스로 세상을 버린다. 중형이 선고된 전직 대통령은 재판을 받다 말고 병원으로 옮겨진다. 회장님은 몇 년째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 아들은 재판을 받고 있다. 그사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장례식장에는 회장님의 화환이 도착한다. 매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누가 유죄가 되고 누가 무죄가 될까. 누가 잡혀가고 누가 풀려날까. 누가 살아나고 누가 목숨을 빼앗길까. 그런데 사람들은 사법에 대한 믿음이 없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 없다. 정치가에 대한 희망도 없다. 각자 보고 듣고 싶은 것을, 각자 보고 들을 뿐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불법인가.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개죽음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부조리극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다. 대낮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쨍한 햇빛 아래에서, 정색을 한 채 공연되는 이 희비극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너무 일상적이고 익숙해서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조차 잊고 있는 이 소동들은 무엇일까. 이것을 우리가 함께 꾸고 있는 ‘대낮의 카프카적인 악몽’이 아니라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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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제주도에 있는 한 동네책방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제안이 왔을 때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운전도 못하잖아, 길눈도 어둡잖아, 주말이 날아가는 거잖아…’라는 불안은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하지?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서점에 폐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불안과 걱정 때문에 나는 강연을 수락했다. 직접 부딪히지 않는 한, 불안과 걱정은 해소될 수 없다. 거절하더라도 내내 묵은 감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행기 예약을 하면서 결심했다. 큰맘 먹고 뚜벅이 여행을 해보자! 뚜벅이란 자기 자동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지금껏 제주도에 갈 때는 늘 일행과 함께였다. 그들 중 하나가 렌터카를 빌려 운전했으니 나는 단 한 번도 제주도 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지 않았던 셈이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1년 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아마 코웃음 칠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겁은 더 많은 내게 이번 여행은 하나의 관문이었다. 관문을 거치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곧바로 숙소가 있는 종달리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물어물어 정류장을 찾았더니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30분 뒤에나 온다고 한다. 얼른 가서 여장을 푼 뒤 쉬고 싶었지만, ‘뚜벅이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니겠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류장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는 텍스트 형태로 실시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품질 관리를 통해 부패 감귤을 줄여야 한다는 뉴스, 2019 제주 청년의날 축제가 개최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뭍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던 뉴스다. 제주도와 가까워진 것 같아 벌써 기분이 좋다.

버스에 올라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어딘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다. 앞으로 74개 정거장을 가야 한다니 입이 떡 벌어진다. 대화를 나눌 이가 없으니 자연히 주변을 살피게 된다. 버스에 오르는 사람을 보며 나와는 무연한 그 사람의 사연을 상상해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저 사람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죽 자랐을까. 앞 좌석엔 나처럼 여행을 온 사람도 보인다. 나와는 달리 여유가 넘쳐흐른다. ‘저 커다란 배낭에는 뭐가 들었을까?’로 시작한 상상은 ‘여행에 익숙한 삶은 어떤 것일까? 여행을 이끄는 것은 여기에 있기 싫은 마음일까, 거기로 가고 싶은 마음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옆 좌석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아이가 예쁘게 깐 귤껍질을 내밀며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걸 글로 써도 돼요? 이런 것도 글이 될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 무엇이든 네가 쓰면 글이 된단다. 네가 쓰면, 쓰기만 하면. 나는 속으로 힘차게 대답한다. 귤나무에서 떨어진 귤이 오렌지가 되고 망고가 되고 지구가, 우주가 되는 상상을 한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듯, 우리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발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있기만 하면. 어떤 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시작할 때 아무것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기도 하다.

정류장에서 내리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미리 점찍어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여기를 찾아내다니!’라고 자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했던 동네책방에서의 강연도 무사히 잘 마쳤다. 와주신 분들의 눈빛에서는 시종 온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오길 정말 잘했잖아. 혼자 여행하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기 위해 무수한 아무것을 거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병원에서 종달초등학교까지 이어지던 74개의 정류장처럼.

오늘도 아무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보잘것없을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무것 말이다. ‘이런 것도 글이 될까요?’라는 질문이 ‘이걸 한번 써봐야겠어요!’라는 결심이 되는 과정이 그 속에 있다. 물론 그 결심이 실제로 쓰는 행위로 연결될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이, 마침내 아무것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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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 속속 택배가 도착한다. 농사짓는 지인들이 보내는 햇고구마다. 예전에 살던 시골에서는 지금도 고구마를 캐면서 ‘고구마 귀신 장 선생’ 이야기를 한단다. 나는 ‘고구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고사모)’ 회장 출신이다. 고구마를 좋아하지만 사실 귀신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가 고사모 회장이 된 계기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교사로 몸담았던 작은 대안학교에는 스무 개가 넘는 동아리가 있었다. ‘교육과정의 꽃’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을 좋아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인기 동아리에 지원자가 몰리니 선배들은 부원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빠릿빠릿하고 야무진 아이들은 네 개, 다섯 개까지 합격해 정신이 없는 반면, 소극적이고 느린 아이들은 인기, 비인기를 막론하고 모든 동아리에서 떨어졌다. 동아리연합회에 문제제기를 했지만 당장 뾰족한 수를 내기 어려운 터, 나는 탈락자들을 위해 ‘문턱 없는 소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특별한 재능이나 역량을 요구하지 않되, 지속적으로 만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임. 그게 ‘고사모’의 시작이었다.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모였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지원 자격도 만들고 면접도 봤다. 게시판에 붙은 고사모 지원 자격은 자다가 일어나 밤고구마를 물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 하루 세 끼 밥 대신 고구마로 연명할 수 있는 사람, 고구마 심고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원자 중에는 정말 고구마를 좋아하는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예상대로 동아리 면접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큰 솥에 고구마를 잔뜩 쪄서는 운동장 구석의 흙집에 둘러앉아 면접을 봤다. 물 없이 고구마를 먹을 수 있는지 검증하고, 왜 고사모에 들어오고 싶은지, 수확한 고구마로 무얼 하고 싶은지 비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봄에 밭을 분양받아 이랑을 만들어 고구마 순을 심고, 김매고 물 주고 늦은 가을 수확해, 초겨울에 ‘군고구마 아궁이 축제’를 열었다. 방학하는 날엔 한 꾸러미씩 집에 싸들고 가며 아이들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겉도는 아이들에게 마음 붙일 곳을 만들어주고 싶어 시작한 이 프로젝트에서 의도치 않은 큰 수확은 고구마밭에서 펼쳐지는 ‘수다의 장’이었다. 예닐곱 명이 열 평 남짓한 밭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저절로 입을 뗐다. 밭을 갈아엎을 때 벌레들이 잔뜩 나오자 아이들은 당시 이슈였던 4대강 사업을 떠올리며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걱정했고, 어린 시절 왕따 경험을 꺼내놓는가 하면, 연애상담도 스스럼 없이 하고,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 목격담을 배틀처럼 풀어놓기도 했다.

그 수다의 향연에서 선생인 내 역할은 그들의 얘기를 듣지 않는 듯 무심히 듣다 웃음이 터지는 시점에 함께 키득대는 것이 전부였다. 자유로운 대안학교라도 수업에서 이렇게 격 없는 만남이 이뤄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상담을 하자고 딱 불러 앉혀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수다를 엿들으며 나는 아이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을 심었다.

일 년 내내 아이들과 고구마밭을 일구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수업과 회의로 바쁜 일과의 사이, 혹은 퇴근 후, 혹은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어 관심을 두어야 했다. 그 경험으로 배운 건 고구마도 아이들도 정성을 들이는 만큼 자란다는 사실이다. 가을볕 깊어지니, 고구마를 기르며 서로를 키우던 그날의 고구마밭이 새삼 그립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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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는 나무꾼이 도끼질하다 아차 물에 빠트린 도끼로 시작됩니다. 나무꾼은 어쩌다 도끼를 놓쳐버렸을까요. 도끼질 안 해본 사람은 장작에 닿을 때까지 도낏자루 꽉 잡고 힘껏 내려칩니다. 그러면 장작은 안 빠개지고 날만 박혀 빼느라고 번거롭게 힘만 듭니다. 장작은 도끼를 이마 위까지 치켜들어 떡메 치듯 팔 힘 빼고 온몸 실어 내려쳐야 뻑 빠개집니다. 그런데 사실, 도끼질에서 가장 귀찮은 건 도끼질이 아니라 도끼받침 모탕에 팰 거리 올리거나 팬 것들을 허리 굽혀 간추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실력 좋은 사람이 장작을 패고 조수는 그 앞을 지켜 섰다가 새 장작 올리고 팬 장작을 치웁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도낏자루는 그 바닥에서 오래 굵어 노련한 사람이 잡습니다. 내려치는 족족 빠개지는 멋진 도끼질에 경탄하며 나도 저렇게 돼야지, 다음 팰 장작을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여러 번 손바닥 얼얼하게 도끼질하다 보면 손아귀 감각이 무뎌져 내려치던 도낏자루를 맥없이 놓쳐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놓친 도끼는 어디로 날아갈까요? 앞에 선 조수 발등으로 날아가 꽂힙니다. 실수할 리 없다 믿었던 그 손, 거기 들렸던 도끼에 제 발등이 콱 빠개집니다. 

조직의 라인에 기댄 사람들은 윗선만 믿고, 시키는 대로 하면 알아서 끌어주고 감싸주겠거니 합니다. 짬밥과 위세가 얼만데 설마 아랫사람 다치게 하겠습니까 싶습니다. 장작을 패든 누구를 패든 모르쇠, 패는 것만 지키고 보조할 뿐입니다. 그러나 도끼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습니다. 아니, 사람을 못 믿으니 도끼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차! 하고 손 놓은들 도끼장이가 다치겠습니까? 크게 다치고 절름발이 되는 건 패는 걸 돕던 놈입니다. 수뇌부가 헛손질하면 도끼날 겨냥은 믿거니 지키다 발뺌도 못하는 자리로 향합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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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한 마리는 2시간20분, 스터디룸 대여와 음료는 45분, 전기료는 3시간 반….

도연(가명)이는 일해야 하는 시간으로 비용을 계산하는 나름의 셈 방식이 있다. 이른바 ‘시급 치환’. 친구랑 먹는 밥부터 500원을 추가해야만 먹을 수 있는 아이스 음료까지 “그 돈이면 내가 얼마를 더 일해야 하는데”를 떠올리며 아르바이트 시급에 맞춰 가치를 환산해 보는 거다. 도연이 얘기는 서울시 청년수당 지원을 받은 30명의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 ‘청년수당이란 응원’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연이 말고도 돈에 쪼들리는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이 시급 8350원에 ‘청춘’을 판다. 제 빛깔을 잃은 청춘의 가격은 얼마일까?

돌아보면 내 청춘도 설렘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많았다. 제대로 된 꿈도 없었다. 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꿈 따위는 지레 밀쳐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다행히 밥벌이는 하고 있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후가 또 걱정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데, 모두가 힘들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흙수저’로 자신들의 계급을 규정해버린 청년들에게 ‘눈을 낮춰라’ ‘우리 때는 더했다’며 윽박지르곤 한다. 요즘 애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혼밥’을 즐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경우, 메뉴와 가격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이라는 고백을 듣고 나면 어렴풋이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실 고용 절벽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청년 세대의 고통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청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청년을 위한 복지정책을 주요 정책으로 내놓고 있다. 서울시 ‘청년수당’도 그중 하나다. 청년수당은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매달 50만원씩 주는 청년활동지원비다.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이 원조 격이지만 개념이 다르다. 청년수당은 신청 연령과 인원을 제한하고 있고 미취업자 청년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년배당은 취업 여부나 소득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본소득 개념에 한발 다가선 정책이지만, 만 24세 청년에게 1년에 100만원의 지역 상품권을 준다는 한계가 있다.

최근 서울시는 청년수당 지원을 현재 연간 7000명에서 3년간 10만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1인 청년가구에게 월 20만원의 월세를 지원하는 ‘청년월세’도 신설했다. 청년층의 주요 문제인 ‘구직’과 ‘주거’ 불평등을 완화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청년수당 시행 4년차를 맞은 지금도 ‘포퓰리즘’ ‘세금낭비’라는 인식이 따라온다. 물론 청년들에게 청년수당이 실제로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지원 금액과 대상을 크게 늘리는 만큼 사용처 확대 등 정책방안을 촘촘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당연하다. 청년들에게 50만원은 푼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무조건 그만둘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일부 청년들이 수당을 유흥비로 쓴다는 비난은 거두자. 어차피 이 수당은 청년들에게 잠시 숨을 돌리라고 주는 돈이다. 학원 대신 노래방이나 영화관에 가면 좀 어떤가.

청년정책은 늘 청년이 ‘사회의 미래’라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다. 서울시가 28일 발표한 신혼부부 주거지원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들 정책의 밑바탕에는 청년의 결혼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청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꿔야 하는 이유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복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거의 최하위 수준이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삶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것. 그러니 정부 정책이 청년에게만 맞춰져 있다고 불평하지 말자. 다음은 당신 차례일 테니까.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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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1982년생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정유미)의 삶을 중심에 놓은 것은 원작 소설과 같지만, 결은 다르다. 소설이 남성 정신과 의사의 눈에 비친 김지영에 대한 3인칭 보고서였다면, 영화는 김지영의 삶을 1인칭으로 직접 보여준다. 남녀 갈등은 부각되지 않는다. 악인도, 복선도, 반전도 없다. 담담하고 담백하다. 개봉 전 ‘평점 테러’에 시달렸던 영화는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순항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만 참여할 수 있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관람객 평점’도 남성 9.42, 여성 9.58(28일 오후 4시 현재)로 성별 간에 큰 차이가 없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한국 여성의 연대기다. 세월이 흘러도 여성의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김지영의 엄마인 ‘50년생 오미숙’(김미경)은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미싱에 매달려야 했다. 딸은 남동생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처지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취업,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며 허들에 부딪힌다. 한국 남성의 가사분담률(16.5%)과 가사노동 시간(하루 45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유능한 홍보대행사 직원이던 김지영은 전업주부가 된다. 재취업을 꿈꾸지만 ‘시터 이모님’을 못 구해 좌절한다. ‘착한 남편’이 육아휴직하겠다고 나서보지만 시어머니는 결사반대다. 설령 시가에서 찬성한다 해도 쉬운 결심은 아니다. 한국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8.8%에 불과하다. 역시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경력단절 위기를 ‘운좋게’ 면한다 해도 끝은 아니다. 일 잘하는 여성 팀장은 ‘드세다’는 평을 듣다가 승진에서 탈락한다. 관습과 문화와 제도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만들어낸 차별의 전시장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이 땅에 사는 여성들에겐 딱히 새로울 것 없는 ‘보편적’ 현실이다. 외려 일각에선 이 소설과 영화가 고학력·중산층 여성의 경험에 한정된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개별적 역사를 고백할 기회조차 갖기 힘든 저학력·저소득 여성들이 배제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은 이 정도 서사조차 “판타지+피해망상+프로파간다”(네이버 리뷰)로 여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남성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이승한씨가 영화를 본 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답을 준다. “당신이 남자인데 주변에 그런 삶을 산 여자가 없다고 느껴지신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불행한 이야기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당신 주변의 여성들은 당신을 ‘이야기해줘봐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 판단하고 이야기를 안 해줬을 겁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또 다른 여성서사 영화 <벌새>에 대한 리뷰에서 담론 주체의 변화를 읽는다. “<박하사탕>부터 <친구>와 <부당거래>를 거쳐 <1987>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386 남성 주체’들의 기억과 발화가 중심을 차지해왔다. 이제 ‘82년생 김지영’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엔터미디어)

얼마 전 공연예술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에 갔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더니 “저는 안경을 썼고 키는 176센티미터…”라고 소개했다. 오디오 테스트는 아닐 테고, 이게 뭐지 싶었다. 이어 발표자인 변호사 겸 배우 김원영씨가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해야겠죠. 저는 남자이고, 휠체어장애인입니다. 상체를 많이 쓰기 때문에 팔이 길고…”라고 했다. 그제서야 시각장애인을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임을 알아차렸다. 오디오 디스크립션(Audio Description·음성해설)은 본래 공연에서 해설사가 무대 세트와 등장인물의 동선 등을 설명하는 일을 가리킨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 관련 행사에서 발표자들이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하는 일이 보편화돼 있다고 한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소수자적 감수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비장애인으로서 ‘다수자’의 위치에 있음은 깨닫지 못했다. 이후 장애인의 현실과 장애예술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

“저 아세요? 제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처 주는 말을 하세요?” 김지영은 ‘맘충’이라고 비웃는 직장인들에게 맞받아친다. 과거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 희열과 고통을 ‘사회적 언어’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남성들의 꿈과 야망, 우정과 취향은 영화와 드라마, 심지어 예능프로그램에서까지 시시콜콜 일러주는 동안에 말이다. 이제 입을 열기 시작한 ‘세상의 다른 절반’들의 목소리를 경청했으면 한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가기를 바란다. 무지는 부끄럽지 않다. 무지하면서 아는 척하거나, 무지하면서 외면하거나, 무지하면서 상처 주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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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민

후배가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인 자월도에 별장을 마련하고 집들이를 하였다. 섬은 물에서 웃자란 땅, 애처로운 데가 있다. 이름에서 제주 애월을 떠올리게 하는 자월에 도착해서 몸을 세 번 훌쩍훌쩍 뛰었다. 해당화 울타리의 허름한 연립주택에 당도하니 격조했던 살림살이가 심심한 강아지처럼 왈칵 달려들었다. 해변 소나무숲에 해먹을 치고 멍 때리러 나가려는데 안방 미닫이문이 스르르 닫힌다. 다시 열어도 저절로 닫힌다. 아무도 없는데 또 닫힌다. 어디서 오는가, 이 무심한 기울기는.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나가려니 비로소 들어오는 현관 풍경. ‘뻘밭’에 나갈 때 신는 장화 다섯 켤레가 코스모스처럼 가지런히 서 있다. 둘은 크고 셋은 작다. 큰 장화에서 작은 장화로의 귀여운 기울기. 누가 보냈을까, 마음까지 자꾸 간지러워진다. 이 작은 신에 발을 넣은 적이 내게도 분명 있었지. 돌이킬 수 없는 나날 속에서 이틀을 뭉텅 잘라 자월에 온 것도 이런 기울기에 미끄러진 것이겠지.

이튿날 뒷산에 올랐다. 길쭉한 섬이라 능선에는 기울어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겨울로 기우는 계절. 산국을 비롯해 쥐꼬리망초, 산박하 등이 안간힘을 다해 보지만 아래로 기우는 기운은 어쩔 수 없다. 이윽고 정상을 지나 완만한 사면에 이르니 자잘한 열매를 단 보리수나무가 서 있다. 흰 주근깨가 표면에 자글자글 끓는 붉은 열매. 하나 따서 입에 넣으며 나는 고향의 외가로 달려갔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외가에 가면 이상하게 우리집보다 항상 먹을 게 많았다. 대청마루 소쿠리에는 정금과 보리수나무 열매인 ‘뻐리똥’이 가득 담겨 있었지.

볼이 미어지도록 먹던 기억을 되살려 몇 알 넣으니 그때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지 않겠는가. 지금은 짠물에 포위되었지만 예전에는 다 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섬에서 단물이 나오듯 보리수나무의 열매는 정확히 그 맛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변한 게 있다면 내 탓이다. 이제 제법 세월이 흘러 그 많은 것들을 간단히 제압하고 나를 그 어디로 데려가는 보리수나무의 열매, 뻐리똥. 어디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날이 갈수록 가팔라지는 이 시큼한 기울기!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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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상상해 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못할 것도 없지요/ 탐욕도 없고 굶주림도 없는 형제애가 넘쳐나는 세상/ 상상해 보세요/ 모든 사람이 세상 전부를 공유하는 모습을/ 내가 몽상가라고요/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했으면 좋겠네요.”(‘이매진’의 노랫말)

록그룹 비틀스의 리더 존 레넌은 그냥 가수가 아니었다. 레넌은 무정부주의자였다. 국가 권력, 가부장적 지배, 성적 억압을 거부했다. 레넌은 반전·평화운동가였다. 각종 반전집회에 참석하며 평화와 인권, 비폭력의 메시지를 노래했다. ‘이매진’ ‘베드 인’ ‘일요일, 피의 일요일’ ‘혁명’ 등은 음악을 통한 정치참여였다. 레넌은 ‘노래하는 혁명가’였다.

1980년 존 레넌이 암살됐을 때, 체코의 예술가들이 추모 퍼포먼스를 벌였다. 프라하 광장에 있던 벽에 레넌의 얼굴과 그의 노래 가사를 그려넣는, 그라피티 예술이었다. 이후 ‘레넌 벽’으로 불린 이곳은 1989년 체코 민주화운동 때 시위의 거점이 되었다. 프라하의 청년학생들은 레넌 벽에 ‘공산당 OUT!’ ‘소련 철수!’ 구호를 적고,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구스타우 후사크 정권은 군과 비밀경찰까지 동원하며 레넌 벽을 철거하려 했지만 시민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후사크 공산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체코의 ‘벨벳 혁명’ 뒤에는 레넌 벽이 있었다. 지금은 인근의 카렐교와 함께 프라하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2014년 홍콩에 ‘레넌 벽’이 들어섰다. 우산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홍콩 정부청사 옆에 벽돌 벽을 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글귀를 적었다. 그러나 프라하와 달리 낙서가 아닌 포스트잇으로 채웠다. 홍콩 ‘레넌 벽’은 올해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도 계속 만들어졌다. 정부청사 말고도 전철역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지난 26일 서울에도 ‘레넌 벽’이 등장했다. 여의도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여의도역 통로 벽을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포스트잇으로 채운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의 ‘레넌 벽’은 다음날 반대파들이 떼어내면서 사라졌다. ‘레넌 벽’은 민주화운동의 표상이다. 하루 만에 무너진 여의도 ‘레넌 벽’은 이 땅의 민주화가 요원하다는 또 하나의 징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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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유명한 책입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자 판사였던 몽테스키외가 1748년에 펴낸 책입니다. 집필 기간은 21년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현대 정치체계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미국 정치체제가 이 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책 발간 당시 유럽은 절대왕정 시절이었습니다.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은 온갖 권력을 한데 모아서 행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권력은 쪼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권력 주체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죠. 책 내용이 이렇다 보니 유럽 왕조가 좋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은 프랑스에서 익명으로 출간됩니다. 그나마도 곧바로 금서로 지정되어 세상 빛을 보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1750년 무렵 영어로 번역돼서 미국에 알려졌고, 미국 연방헌법의 기초 이론을 제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인류 역사에 삼권분립이 처음 시행되는 계기를 마련한 셈입니다. 이 책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저술 시점인 18세기까지 세 가지 유형의 정치형태가 존재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군주정(또는 귀족정, monarchies), 전제정(despotisms), 그리고 공화정(democratic republics)이 그것입니다. 군주정은 명예나 보다 높은 지위와 특권을 얻으려는 열망이 그 기초를 이룬다고 분석했습니다. 전제정은 두려움을 통치 기반으로 삼는다고 설명합니다. 대중에게 끊임없이 통치자에 대한 두려움을 심으면서, 때로 대중적 향락을 제공해 가며 대리인의 횡행을 눈감아 주고, 그들을 활용해서 군주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체제라고 분석했습니다. 공화정은 선(善)에 대한 사랑(the love of virtue)과 공익을 사익에 앞세우는 의지를 존립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주변에 여러 국가가 있습니다. 우리도 여러 체제를 경험해 왔고요. 각각의 국가와 시절에 이 책에 나온 정치체제를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가마다, 시절마다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선명하게 떠오를 겁니다. 

역사는 한 방향으로만 우리를 안내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진보하거나 계속 퇴보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르침을 주고 기다립니다. 깨달을 시간을 줍니다. 우리는 1960년 4·19혁명에 이어 1961년 5·16군사정변, 1970년대 유신의 정치적 암흑기를 거쳐 민주화 열망을 이어가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에 이어 2017년 촛불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법의 정신>에서 말한 공화정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선사한 역사의 등락이 오히려 우리를 다부지게 만들었습니다. 

주변에 갈라진 광장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갈라져서 다투기만 하는 속성을 가졌다며 비하하는 발언까지 들립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현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두려움 없이 광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생업에 방해를 받고, 여가에 지장을 초래해도 광장으로, 거리로 발길을 돌립니다. <법의 정신>에서 말한 선(善)에 대한 사랑을 그리며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시하려는 의지가 표출되는 현장입니다. 선에 대한 해석이 다른 점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 그랬듯이, 등락을 거치다가 곧 역사가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외신을 훑어보면 우리를 불편한 모습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민주화 경험은 주변으로 계속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명한 선택을 위한 집단 의지를 광장과 거리에서 두려움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불편해 보여도, 모순 뒤에는 조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거리낌 없이 거리로 나서기 위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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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29일 오후 6시 서울 청계광장에 3만개의 촛불이 켜졌다. 닷새 전 최순실이 태블릿PC로 국가기밀인 대통령 연설문 44건을 주고받은 게 공개되고,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이 “개인적 인연”을 시인하며 대국민사과를 한 뒤 성난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퇴근길 시민들이 가세하고, ‘대통령 탄핵’ 구호가 시작된 날이다. 주말마다 전국을 밝힌 촛불은 11월12일 100만명을 넘었고, 국회 탄핵소추를 앞둔 12월3일엔 232만명에 달했다. 광장엔 세월호 참사부터 백남기 농민 사망,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 차별과 교육 특혜까지 온갖 적폐들이 쏟아졌다. 정치권력을 바꾸고, 미생(未生)이 없는 ‘나라다운 나라’를 꿈꾸며, 평화롭게 행진한 촛불은 다음해 4월29일까지 23차례 이어졌다. 독일 에버트재단은 2017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인권상을 주며 “가혹한 겨울 날씨에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와 헌신을 모범적으로 드러냈다”고 반추했다.

출처:경향신문DB

1700만 촛불의 함성이 터진 지 3년. 시민들은 답답하고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국정농단·정경유착·사법농단 세력의 ‘당연한 단죄’를 넘어 세상과 삶이 달라지길 바랐던 그 겨울의 꿈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의 첫 지향점인 공정과 정의는 ‘조국 사태’라는 돌부리에 걸렸고,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적잖은 정책들은 유실되거나 표류하고 있다.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했던 정부에서 비정규직 제로-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 로드맵은 궤도를 벗어났다. 산재 악몽은 끊어지지 않고,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는 아직도 겉돌고 있다. 촛불광장에서는 6가지 민생 요구가 있었다. 교육비·주거비·의료비·통신비·교통비·이자비용 인하였다. 정부가 답을 주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일수록 이 땅에서의 삶이 버거워질 문제들이다. 민주주의 확장도, 뒤늦게 시동 걸린 검찰개혁과 선거개혁도 민생의 첫 단추를 끼울 때만 공고히 나아갈 수 있다.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은 28일 3년 전 촛불을 들었던 광화문광장에서 “반민주 반민생 반평화 적폐들을 일소하고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게 촛불이었다”며 정부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촛불 민의 실현이 지체되고, 역주행 조짐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 깜빡이’를 켜고 우왕좌왕하고, ‘큰 개혁’을 하지 못하는 정부를 향해 호루라기를 분 셈이다. 촛불의 분열과 위기는 초심에서 멀어진 정부가 자초했다. 주도면밀한 개혁을 못했다는 각성, 벼랑 위에 섰다는 비상한 각오가 없다면 ‘촛불개혁’과 ‘촛불정부’를 명예롭게 쓸 수 있는 시효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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