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사 계단을 올라가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연탄불에 타는 밤 껍질 냄새. 지상에 올라서고 보니 역시나 군밤 할머니가 있었다. 옆에는 김밥과 바람떡 아주머니. 그 옆에는 양말과 이태리타월 할아버지. 아 이 익숙한 조합. 오 이 정겨운 가락. 

“김밥이요 김밥, 금방 만든 김밥이요, 맛있는 김밥 있어요, 김밥 드세요 김밥.” 수년 전 이곳을 지날 때도 딱 이 조합 이 가락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군밤화덕이 지금의 군밤화덕인지, 그때의 가락 주인이 지금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군밤 할머니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짐짓 속으로 알은척을 했다. “저 할머니는 늙지도 않으시네”라고.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나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내 할머니는 생전에 밤 깎는 일을 오래 하셨다. 알이 굵은 생밤을 받아 겉껍질을 벗겨내고 밤칼을 이용해 속껍질을 깎아내는 단순한 일이었는데, 속살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각을 유지하며 밤알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야 해서, 칼질을 하는 데 나름의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할머니가 깎아낸 생밤은 다이아몬드 커팅처럼 아름다웠다. 

한 포대를 깎아 얼마를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앉아 밤칼을 놀리는 대가로는 턱없이 적은 돈이었음은 확실하다. 고까짓것 얼마나 번다고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칼질을 하느냐 병원비가 더 나오겠다 만류를 해도, 늙은이라고 손을 놀리고 앉았으면 못 쓰는 법이라며 소일거리로도 그만 한 게 없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평소 욕심 같은 건 없는 사람이었으나 밤 깎는 철만 되면 이상하게 경쟁심이 솟아나서, 다른 밤 깎는 할머니들을 안방으로 불러 모아 함께 일하기를 좋아했고, 그날 저녁 그들보다 더 많은 양을 채웠다는 것을 은근한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용돈을 드리는 것보다도 그녀 옆에 앉아 밤 깎는 일의 속도를 높여주는 것을 더 반겼다. 그녀처럼 아름다운 커팅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겉껍질이나 까 주었을 뿐인데, 깎은 밤을 수거하러 온 사람이 무게를 잴 때면 우리 손녀 덕분에 일등을 하게 되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쓰던 밤칼은 내가 물려받았다. 그 칼로 밤을 깎아본 적이 없으니 물려받았다기보다는 그냥 챙겨두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에게 밤 커팅하는 법이라도 제대로 배워둘 걸, 제사상에 얹을 밤을 치면서 뒤늦게 후회했다. 그저 겉껍질 조금 까주는 걸로 치하를 받을 게 아니었다. 할머니만큼 예쁘게 깎은 밤알을 포대에 그득그득 채워줬어야 했다. 일을 하지 마시라 만류할 게 아니라, 그녀의 즐거운 승리감에 손을 보탰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처음으로 밤목걸이를 만들어준 사람도 그녀였다. 사실은 삶은 밤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내 놓으라고 내가 먼저 떼를 써서 받아낸 것이었다. 명주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만든 밤 목걸이. 가을운동회 때 교문 앞 노점상에서 팔던 밤 목걸이. 실과 바늘을 손에 쥐여주기까지 하면서 딱 그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먹는 걸로 장난을 치면 안된다는 할머니를 설득했다. 설득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것이 협박이든 설득이든 부탁이든, 발을 동동 구르며 만들어달라는 손녀의 청을 거절할 할머니는 없었을 것이다. 

밤 목걸이는 내게 특별한 물건이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교문 앞 노점상. 솜사탕이며 번데기며 김밥이며 삶은 계란은 봄이건 여름이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삶은 밤 목걸이만큼은 가을운동회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운동에는 젬병이라 공책 하나 스탬프 하나 받지 못한 내가 메달처럼 걸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누구나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계주 경기에서 너 때문에 꼴등을 했다는 비난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할머니의 손을 빌려 우승자의 기쁨을 느꼈다.

군밤 냄새는 오래도록 내 뒤를 쫓아왔다. 군밤 냄새가 이토록 진한 걸 보니 겨울은 겨울이다 싶었다. 공기가 쨍하게 차갑고 메마를수록 더 명징해지는 겨울 냄새. 한 봉지 사서 옷 속에 품고, 누군가에게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냄새. 껍질을 내가 깔 테니 너는 그냥 낼름낼름 받아먹어. 누군가의 입에 맨질맨질한 밤알을 넣어주며 도란도란 밤을 지새우고 싶은 냄새. 누군가의 목에 삶은 밤 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은 냄새. 군밤은 이리도 따뜻한 냄새를 풍기는데, 한길에서 밤을 굽는 저 할머니는 더 추워지겠구나,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저 군밤 할머니가 더 늙지도 말고 더 오래도록 저 자리에 앉아 밤을 구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년 뒤에 또 저 길을 지나갈 때, “저 할머니는 정말 늙지도 않으시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늙지도 않는 할머니가 연탄불에 구운 군밤을 가슴에 품고 걷는 겨울밤. 그 길 끝에 그리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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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성으로서 경험한 차별을 처음으로 쏟아내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혼잣말로 입안에 머물던 감정들이 우르르 말이 되어 쏟아졌다. 불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불편하냐고 아무도 물어주지 않아서 말할 수 없었구나.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자 비로소 내 이야기가 의미를 갖게 됐다. 

맞은편 동료가 맞장구치고 분석도 하며 거들었다. 자신이 겪은 경험도 나눠준다. “나만 겪은 게 아니었어.” 안도와 든든함은 용기가 되었다. 밤새 이어졌던 그날의 ‘수다’는 나를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끌었다. 말할 수 있는 장소와 동료는 싸울 수 있는 힘과 언어를 가지도록 응원해준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인내, 극복 등 개인의 영역이었던 차별은 사회의 과제가 된다.

“차별받은 경험을 나눠 주세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에 맞서는 용기를 잇는 수다(차별잇수다)’가 말을 건넨다. 무엇이 차별일까? 차별하면 안된다는 말에는 어쩌면 내가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또 내가 받은 차별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기회도 드물다. 

차별이 장애인, 노인, 빈민, 성소수자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어떤 사람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별의 의미와 사례를 내 삶과 연결시켜 생각하며 내 안의 소수자성을 만난다. 차별이 일부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우리의 문제로 다가온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인 중년 여성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인데, 다음에 또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차별받은 적 없다던 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럴 땐 어떻게 맞서면 좋을까?” 차별의 이야기들이 많이 모일수록 원인을 찾기도 수월하다. 차별잇수다가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맞설 수 있는 동료를 만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차별에 공감하는 만큼 구조가 연결되어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싸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키운다.

2019년 전국 곳곳에서 진행해온 차별잇수다가 대항·대안적 말하기 활동의 의미를 나누는 자리를 오는 6일 갖는다. 혐오와 차별을 경험했지만, 사회가 규정한 소수자의 위치를 벗어나 그에 맞서 말하고 대항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유예된 12년. 지역의 인권 관련 조례가 철회되고, 지난달 12일엔 안상수 의원 등 40명의 국회의원이 차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사유 중 ‘성적지향’을 삭제하고 성별을 남녀 두 개로 한정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서삼석 의원 등이 철회 의사를 밝히자 지난 21일 44명의 국회의원은 동일한 내용으로 재발의했다. 제도정치가 혐오와 차별에 부끄럼없이 나서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현장에선 평등할 권리를 만들어가는 실천을 지속해왔다. 서로 다른 삶을 어떻게 말하고 만날 건지 준비하고 계속 이야기해왔다. 

서로를 이해하는 다정한 눈빛, 말할 준비를 기다려주는 느린 시간, 손을 꼭 잡고 지지해주는 마음, 연대하는 분노, 긴장을 불러오는 토론,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용기. 말하고 공감하고 행동한 만큼 평등을 꿈꾸는 이들의 힘은 커져왔다. 

그러니 내년에도 계속 차별잇수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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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어젓도 준비했음^^.” 내가 답신을 하지 않자 후배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문자였다. 후배는 지난여름부터 올해 김장을 자기 집에서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요즘 누가 김장을 집에서 하느냐며 한쪽 귀로 흘렸다. 게다가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 원고 마감일이었다. 그런데 저 한마디에 마음이 동했다. 황석어젓이라. 나는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다. 미식가도 아니고 대식가도 아니다. 그런데 유독 젓갈 앞에서는 흔들린다.

결국 원고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차를 몰아 강화대교를 건넜다. 후배는 강화 토박이가 아니다. 10여년 전, 귀촌 비슷하게 강화로 들어가 주경야독하고 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시간을 쪼개 지역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힘을 보태기도 한다. 몸집이 큰 데다 얼굴도 검게 타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후배가 김장을 같이하자고 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마당에다 텃밭까지 있어 배추농사를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젓갈 때문에 솔깃했던 것만은 아니다. 돌아보니 김장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직접 본 적이 없다. 결혼하고 나서도 집에서 김장을 하지 않았다. 김치는 친가나 처가에서 보내오거나 가서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뒤로는 마트에서 사다 먹었다. 새삼스럽지만 지난 40년 사이, 집 안에 있던 것들이 다 밖으로 나갔다. 김장에서부터 생로병사와 관련된 의례가 다 집 밖으로 나갔다.

반면, 집 밖에 있던 것들이 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 한 세대 사이에 우물, 빨래터, 마당, 변소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에는 강아지를 비롯한 반려동물이 들어왔다. 후배 집으로 가는 길에 돌아본 것이 또 있다. 최근 몇 년간 내가 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 집에 손님이 온 적이 있었던가. 거의 없었다. 아랍 지역에는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저 문구가 생각날 때마다 요즘 우리 사는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돼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김장이 핑계였지만 남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후배가 전세로 들어간 새집은 읍내 외곽, 이른바 집장사들이 지은 이층집이었다. 얼마 전 태풍이 지나갈 때 지붕 마감재 일부가 뜯겨 나갔고 비도 조금 샜다고 한다. 하지만 후배네 식구들은 마당과 텃밭이 있어 새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늦은 점심상을 치우고 다들 팔을 걷어붙였다. 마당 수돗가에서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물에 헹구는 사이 거실에서는 김칫소를 버무렸다. 나는 “옛날에는” “우리 집에서는”이라며 간섭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남의 집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하다간 큰 싸움이 벌어진다. 김장에도 무슨 절대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레시피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마땅하다.

음식과 농업, 땅에 대해 그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다고 자부해왔는데 40여년 만에 김장하는 자리에 앉고 보니 김치와 김장의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을 자인해야 했다. 김치는 누구나 먹는 것이지만 누구나 김치를 담그는 것은 아니다. 또 누구나, 언제든 김치를 담글 수 있지만 누구나, 언제든 김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김치를 먹거나 담그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장은 다르다. 제철에 여럿이 함께한다. 김장은 마을과 가족의 큰 연례행사 중 하나다.

케이블 방송 채널을 돌릴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왜 이렇게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많은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음식과 마주할 수 있다. 맛있는 집을 찾아가거나 맛있게 조리하는 법을 일러준다. 누가 더 빨리, 더 맛있게 만드는지 경쟁하기도 하고 전 세계 길거리음식을 탐방하기도 한다. 골목상권을 살려내자는 프로젝트도 있고, 백반집을 순례하는 코너도 있다. 소위 인터넷 먹방에까지 눈을 돌리면 요즘 대중미디어는 가히 ‘음식천국’이다. 그런데 저 수많은 음식 프로그램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놀랍게도 그 음식의 재료가 어디서 어떻게 키워지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식탁에 오르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한국인의 밥상>과 <나는 자연인이다> 정도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먹는 행위는 농업적인 행위다.” 농업은 태양의 도움 없이는, 하늘과 땅, 수많은 생명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농업의 우주적 연관성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식탁에서 천지자연과 연결된 그물망을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 몸이 천지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먹거리에 관한 한 우리가 아는 최대 경로는 마트 혹은 편의점까지다.

웬델 베리가 강조했듯이 ‘먹거리 정치학’에 대해 고민할 때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통제를 받을 때 자유가 억압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먹거리와 그 원천이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경우 우리의 자유가 위축된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우리가 얼마나 수동적인 먹거리 소비자인지를 자각하는 것이 주권자로 거듭나는 첫 단추이자 성숙한 민주사회로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후배가 손수 키운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면서 또 되뇌었다. 전환은 식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새로운 사회, 지속 가능한 공동체는 농업과 땅을 재발견하는 데서 탄생할 것이라고.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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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18일 오후 9시 뉴스.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가 깨졌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당시 나는 노무현 캠프에서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실무자였다. 그전까지 우리는 2% 차의 신승을 예상했다. 자정 무렵 2% 차의 신승 예측을 유지한 채, 마지막 보고서를 전달했다. 실망하여 투표장에 가지 않을 유권자의 규모와 위기의식을 느끼고 결집하는 유권자의 규모가 비슷할 것으로 보았다. 결국 2.3% 차이로 이겼다. 2016년 총선. 선거전문가들은 민주당 100석 미만, 새누리당 150석 이상으로 점쳤다. 나는 민주당이 120석을 얻을 것으로 보았지만, 정작 언론 인터뷰에선 100석으로 예측하고 말았다. 총선 이후, 나는 망했고 민주당은 이겼다.

# 쏠림 현상은 없다.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업종 관계자와 전문가집단뿐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대한 다수의 문제 제기가 여기에서 출발하는데, 잘된 혹은 잘못된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 그 자체로는 국민 여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생물학적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사회에서 일방적인 영향관계란 없다. 여론은 시스템사고를 한다. 어딘가에서 더해지면 또 어딘가에서 빠지기 마련이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만드는 일은 없다.

# 모든 여론조사에 안심번호(정보보호를 위한 임시생성 단기번호)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20년 전만 해도 어느 조사회사에 의뢰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공개된 집 전화번호로 조사했기 때문에 특별한 표본추출(조사대상 일부를 뽑는 방법)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경제가 IT경제로 전환되면서 무선전화 보급률은 급속도로 높아졌고, 여론조사의 비극이 시작됐다. 공개되지 않은 무선전화 번호의 표본추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당과 언론의 선거조사는 안심번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도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조사는 유선전화만 사용할 수 있다. 어두운 밤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길을 찾는 셈이다.

# 10%를 위해 90%를 희생하는 회사는 없다. 여론조사회사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등이 주요 고객이다. 이들이 차지하는 매출 규모는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90%다. 이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정 정당,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은 벼룩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며, 공신력이 생명인 조사회사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이념적 편향으로 여론조사를 한다는 의심도 편견에 가깝다.

# 조사 방법마다 차별성은 있다. 정당은 공천조사, 판세조사를 주로 ARS(자동응답시스템)로 한다. 전화면접조사와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선 ARS 결과가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또 투표율이 낮은 선거에서 높은 예측률을 자랑한다. 반면에 전화면접조사는 리스트조사(제한된 명단의 조사) 등 높은 수준의 응답률과 많은 문항이 필요한 조사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 개표방송 시, 개별 선거구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투표소 조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전화면접조사를 병행한다.

# 비슷한 조사의 결과 차이는 당연하다. 조사의 방법 및 시점, 표본추출 방식, 미세한 질문내용의 차이 등이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통계적 오차 외에도 통신선 품질, 조사원의 숙련도 및 성실성 등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언론보도, 정치행태, 여론조사는 한배를 탄 사이다. 배 어느 한쪽이라도 공공성에 구멍이 나면 모두 가라앉는다. 남 탓해 봤자 누워서 침 뱉기 십상이다.

수시로 진행되는 정당과 공공기관의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것은 정당 후보와 정부 정책을 사전에 결정하고 조율하는 비밀회의에 참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자신의 주권을 4만2000배(4200만 유권자/1000샘플)로 키워서 말이다. 그러니 여론조사에 응답하자. 여론조사는 공학이 아니라 일상의 민주주의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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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장 7절이 허용하듯이 전 제 막내딸을 노예로 팔 의향이 있어요. 딸아이는 조지타운대 2학년이고,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자기 순서가 되면 항상 식탁을 말끔히 치우죠. (노예로 파는 데) 괜찮은 값은 얼마입니까?”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시즌2 에피소드3 ‘중간선거’편에서 대통령 제드 바틀렛이 극우 인사인 제이콥스에게 한 말이다. 제이콥스는,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불렀다는 바틀렛의 지적을 듣자 “제가 아니라 성경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불렀다”고 말한다. 작가 애런 소킨은 바틀렛 입을 빌려 현대에서 폐기된 구약의 여러 규범을 예로 들며 제이콥스를 통박한다. 동성결혼 합법화(2017년) 17년 전 다뤄진 에피소드다. 

오래전 미드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최근 김진태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6일 안상수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 촉구대회’에 나와 “(동성애를 허용하면) 성경 구약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안상수와 김진태 등은 인권위법 제2조의 ‘성적 지향’ 문구를 삭제하고, 성별을 남녀성별로 바꾸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냈다.

소돔은 동성애 때문에 천벌을 받았는가. 목사 이상철은 “예수님이나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소돔 혹은 소돔과 관련된 이야기를 거론할 때 동성애와 관련된 죄를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sodomy)’도 “후대에 형성된, 동성애를 둘러싼 위악적인 이데올로기일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가. 구약의 여러 문제를 가장 신랄하게, 도발적으로 비판한 이 중 한 명은 조제 사라마구다. 

타계 1년 전 내놓은 마지막 소설 <카인>은 주인공 카인을 구약의 여러 시공간을 오가는 존재로 설정했다. 카인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 없는 어린아이마저 유황불에 불타 죽은 일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형제를 하나 죽였는데 여호와는 나를 벌했다. 정말 알고 싶은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

구약이 동성애를 저주했다 한들 저 오래전 문헌을, 잔인함으로 점철돼 기독교에서도 논란인 여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야 하는가. 구약을 신봉하는 이들이라고 자녀를 노예로 팔 리는 없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 같은 이들을 기독교도 중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구약이 명시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환대 거부, 폭력과 강간이다. 이스라엘 국기를 집회장에 들고나온 개신교도들은 성폭력과 미투, 난민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들이 구약에서 찾아낸 반동성애 근거는 선택적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나오지 않은 인권위법 개정안 발의는 인권·진보 측면에서 한국 사회 역행을 드러내는 뚜렷한 위기 징후다. 징후를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에 야당 대표가 서 있다.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동성애 반대에 앞장선 목사 전광훈과 “동성애는 담배 피우는 것보다 훨씬 유해하다. 한번 맛들이면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한 김문수가 지난달 20일 ‘단식 투쟁’에 들어간 황교안과 함께 손잡고 ‘투쟁’을 외쳤다. 황교안도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대해서 반대한다.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한 인물이다.

극우세력의 준동을 방기하는 게 ‘촛불정부’다. 여성가족부는 10일로 예정한 ‘가족정책 패러다임 전환 토론회’ 토론주제에서 동성혼·동성애를 배제했다. 인권위법 개정안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이름을 올렸다. 차기 국무총리 후보로 유력한 이는 동성애 문제에선 황교안과 입장이 비슷한 김진표다. 

인권의 첨병이자 마지막 보루여야 할 인권위는 무력하다. 인권위 권고는 여러 정부 부처·기관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 인권위 권고도 줄고, 부처나 기관의 수용률도 줄었다. 인권위는 이 문제를 자초했다. 혐오와 배제 문제에 비타협적이어야 할 인권위는 김문수의 저 혐오발언에 면죄부를 줬다. 대통령도, 총리도 이름을 올린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수년째 폐기된 상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언한 인권위는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그 일정을 뒷전으로 미뤘다. 그 와중에 나온 게 인권위법 개정안이다. 언제까지 핍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존재와 존엄, 권리를 “나중에”로 미룰 것인가.

지금 ‘진보정부’는 진보·인권 문제에서 법률과 정책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아니다. 제도와 법률로 신장을 이룬 건 ‘조국발 검찰개혁’에서 비롯된 재벌이나 고위 공직자 같은 권력자들의 ‘피의자 인권’뿐이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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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지난 10월 홍콩의 반정부 시위대에 악인 캐릭터인 조커의 가면이 등장했다. 복면착용 금지에 시민들이 조커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홍콩 당국을 조롱하는 의미다. 홍콩뿐 아니라 레바논, 이라크, 칠레, 스페인 등의 반정부 시위에서도 등장했다. 홍콩에서는 고담시티와 같은 현실에, 이라크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 산유량 2위 국가인데도 민생고를 겪는 데 반발하며 가면을 들었다. 영화 <조커>를 만든 토드 필립스 감독의 말처럼 ‘현실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공감능력 부족’이 조커 가면을 쓰게 한 것이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불안에 말로만 공감하는지 모른다. 미래를 고민하는 청춘들과의 상담내용을 실었다고 하는 에세이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호응하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고통을 참고 견디라’는 메시지에 반발했다. ‘왜 청춘은 아파야 하는가’라는 반론이 쏟아졌다. 함정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주어야지 ‘나 때는 더 힘들었다’고 하는 게 무슨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코미디언 박명수의 현실을 반영한 어록이 더 호응을 얻었는지 모른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줘라’.

MBC ‘마리텔2’(위)와 SBS ‘정글의 법칙’에 참여한 펭수.

EBS 프로그램 <자이언트 펭TV>의 주인공 캐릭터 ‘펭수’가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펭수는 거대 펭귄이다. 키는 2m10㎝, 직업은 EBS 연습생, 성별은 ‘모름’, 꿈은 ‘우주 대스타’라고 한다. 올 처음 방송에 출연한 뒤 ‘뚝딱이’ ‘뿡뿡이’ ‘번개맨’ ‘당당맨’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캐릭터의 인기를 넘어섰다. 아이들의 대통령(뽀통령)이라고 하는 ‘뽀로로’만이 넘어야 할 산이다. 펭수는 올 3월20일 유튜브를 시작해 지난달 27일 구독자 100만명을 돌파했다. 러브콜도 쇄도하고 있다.

펭수의 인기는 할 말을 다 하는 ‘직언’ 스타일에 있다. 유튜브 100만 돌파 기념 인터뷰에서 코미디언 박지선이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굳이 삶의 목표가 필요한가. 걍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되죠.” ‘힘내라’ 말에는 “내가 힘든데 힘내라면 힘이 납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이런 식이다. 펭수의 팬에는 성인들이 많다. 뻔한 훈계에 지친 이들에게 ‘사이다 발언’이 공감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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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저 말하려는데

왜 목메는지


목메는데 왜

말은 역류하는지


말을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밤


밤이 바람을 뱉는다

구름이 반달을 뱉는다


반달이 절반만 말한다

해에게 빌린 말


빛 없는 말은

달 뒤편에 있다


윤병무(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말을 뱉기도 하고 삼키기도 한다. 절반은 발설하고 절반은 억지로 참는다. 마치 반달이 반쯤만 빛을 뱉듯이. 달의 앞쪽과 뒤편이 있듯이. 빛과 어둠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의존하듯이.

삼키고 참은 말은 기다리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에도 내심(內心)이 있다. 발화하지 않은 말의 속마음을 알기는 참 어렵지만, 상대방의 사정이나 형편을 어림잡아 헤아리면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좋은 이해는 일어난 것의 그 너머를 보는 것일 테다. 별똥이 떨어진, 산등성이 너머를 가늠하듯이. 

시인은 시 ‘달 이불’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도 달빛 덮고 잠들어요/ 오늘은 반달이에요/ 달도 반은 자야 하니까요/ 저도 반만 잘게요” 달빛을 이불로 덮고 자되, 만월(滿月)의 절반인 반달과 더불어 잔다고 썼다. 반쪽과 반쪽이 의지하고, 뒷받침을 하고, 어울리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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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국제관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최근 우리는 그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한·미관계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한·미동맹은 냉전적 안보상황의 산물이다.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한·미동맹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새로운 안보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통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처리과정에서 드러난 일본 편향적 태도, 그리고 주한미군 주둔비용 6조원을 요구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이런 미국의 태도 변화는 한국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중 패권경쟁에 직면한 미국은 우리보다 먼저 한·미동맹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과거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태도를 우리 정부가 한·미동맹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징벌적 조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한·미동맹이라는 형식보다는 그 안에 무엇이 어떻게 담기는가가 더 중요하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 국제관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가 없이 GSOMIA를 연장함으로써, 안보상황의 변화에 합당하게 한·미동맹의 형식과 내용을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미국은 최근 들어 부쩍 한·미·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한국과 일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국이 주장하는 한·미·일관계는 우리에게 명백한 손해를 초래한다. 당연한 우리의 몫을 주장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미국이 지금과 달리 한국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특히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6조원을 요구한 것을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식적 일탈행위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미국에 한국이 과거와 같은 가치동맹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눌러서라도 복속을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엄혹한 국제정치의 무대에서는 미국의 호의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보다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취해야 한다.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된다.

미국에 대해 정당한 이익을 따져야 한다고 하면, 미국을 버리고 중국 편을 들자는 것이냐고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과의 이해관계를 합당하게 조정하자는 정당한 주장을 중국 편을 들자는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은, 뿌리 깊은 사대의식의 발로이다. 우리의 지식인과 위정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것은 강대국을 확실하게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은 부지런히 중국, 러시아, 미국 혹은 일본과 굳건한 관계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것은 강대국과 확고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닌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강대국인 일본을 꼭 붙잡은 대가는 식민지배였다. 그런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여전히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경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잘나가는 강대국 하나를 꽉 붙잡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잘못 배운 것이다.

냉전과 달리 미·중 패권경쟁시대에서는 어느 한 편을 든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받기 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 아니면 중국이라는 지금까지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분별력이다. 

독자적인 활동공간과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사고가 중요하다. 어느 한쪽에 속하면 반대급부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편에 지나치게 기울 때 반대급부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주한미군 철수라는 말에 언제까지 끌려다니기만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미국도 한국을 예측 가능한 상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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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군(9)은 지난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과속 차량에 치여 숨졌다. 그래서 만든 게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내에 안전시설 설치를 의무화한 ‘민식이법’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달 29일 본회의에 상정될 법안 198건에 대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신청했다. 한국당이 반대하고 있는 선거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의 본회의 처리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다. 말만 토론일 뿐, 사실상 정기국회를 올스톱시키겠다는 속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1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기 위해 자리로 들어서고 있다(왼쪽 사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도 이날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필리버스터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오른쪽).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이 바람에 데이터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한 ‘데이터 3법’, 대체복무제 관련 법 등 다수의 민생·경제법안 처리가 모두 무산됐다. 이 중 76개는 여야가 해당 상임위에서 합의해 올라온 이른바 무쟁점 법안이다. 26개 법안은 한국당 의원이 먼저 발의한 것들이다. 한국당은 이마저도 전부 필리버스터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초대형 입법 방해다. 민식이 부모 등 어린이 교통사고 피해자 가족들은 “아이들 생명을 지켜달라는 게 협상 카드냐.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했다. 

파문이 일자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1일 당장에라도 국회 본회의를 열어 ‘민식이법’을 비롯한 민생법안을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선거법과 공수처 설치법을 지연시키기 위한 ‘필리버스터’는 보장하라고 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민생·경제법안을 우선 처리하는 원포인트 본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그렇게라도 어린이·청년·소상공인·포항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법안들이 처리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2017년 10월 서울랜드 동문주차장에서 사고를 당한 하준이, 2019년 5월 인천 송도 축구클럽 차량사고를 당한 태호와 유찬이, 2019년 9월 충남 아산 스쿨존에서 사고를 당한 민식이의 부모님들과 정치하는 엄마들 회원들이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앞에서 어린이생명안전법안 통과촉구 기자회견 ‘아이들 생명에 빚진 법안들,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라!’는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이준헌 기자

한국당이 선거법·공수처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활용하겠다는 것은 뭐라 할 게 못된다. 그건 국회법에 보장된 합법적 수단이고 자유다. 여당도 그것까지 막겠다고 하면 지나치다. 민주당도 2016년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해 9일 동안 필리버스터를 한 전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번 한국당의 행태는 국회의원의 의무인 입법활동을 스스로 방해했다는 점에서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20대 국회는 지난 3년 반 동안 단 한번도 시민을 행복하게 해준 적이 없다. 내리막 경제를 되살리고 민생을 북돋울 조치를 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제1야당은 사회와 산업의 미래를 바꿀 법안의 발목을 잡았다. 한국당은 정치를 포기하고 국민을 공격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 전략을 인질극에 빗대 ‘법질극’이라 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 야당의 이런 극한투쟁 방식은 우리 정치가 왜 개혁되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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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는 사내 하청노동자가 많은 공공발주 건설현장 115곳에 대한 안전점검을 한 결과 77곳에서 268건의 위반사례가 적발됐다고 1일 밝혔다. 정부 불시 안전점검은 이들 공공발주 사업장과 노동자 100인 이상 민간사업장 284곳 등 총 399곳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그 결과 353곳에서 1484건의 위반사례가 적발돼 사용중지·시정 명령과 함께 과태료가 부과됐다. 하청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안전조치 이행 점검이 목적이었는데 이를 제대로 지킨 사업장이 10곳 중 1곳에 불과했다. 문제는 공공발주 건설현장 10곳 중 7곳 이상이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한국은 사고로 숨지는 노동자가 한 해 1000명 정도다. 상당수는 사업장 안전대책 부실이 원인이다. 그런데 정부와 지자체 등도 ‘노동자 일터 안전’에 눈감기는 마찬가지였다니 기가 찬다.

정부가 발주한 경남 고성의 한 화력발전소는 석탄운반용 컨베이어 장비 아래에 노동자의 접근을 막는 ‘방호울’을 설치하지 않고 작업한 사실이 드러났다.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졌을 때도 현장 컨베이어 장비에 방호울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았다. 산업현장 안전불감증에 대해 정부가 민간에 대해 뭐라고 할 만한 처지가 못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와 지자체의 안전불감증은 건설현장의 일만이 아니다.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내달 시행된다. 그런데 이름만 ‘김용균법’이지 정작 김씨와 같은 발전소·지하철·철도, 조선업 등은 도급 금지대상에서 빠졌다. 또한 기업이 온갖 예외·단서 조항들을 포함시켜 결국 ‘누더기 법안’이 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간접고용 노동자의 생명·안전과 기본적인 노동인권 증진을 위해 ‘위험의 외주화 개선, 불법파견 근절, 사내 하청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 등을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한 것도 정부의 이런 안일함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은 노동자 10명 중 4명 이상이 비정규직인 나라다. 이들은 정규직 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으면서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한다. 사회보험 가입률은 30~40%에 그친다. 그런데 정부마저 비정규직 보호에 소홀하다면 이들이 원하는 안전한 일터는 누가 가꾸고 지켜준단 말인가. 정부는 당장 공공건설 현장부터 선도적으로 안전조치를 강화하고, ‘외주화된 위험’을 뿌리 뽑을 법과 제도를 정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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