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이 인공지능(AI)과 ‘치수 고치기’ 대국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뉴스가 떴다. 알파고와의 승부 끝에 신의 한 수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인류가 기계에 거둔 마지막 승리라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나타난 것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이세돌이라는 이름엔 그보다 많은 서사가 있었을 터다. 인터뷰를 보면 일본으로 넘어가 프로기사 생활을 했을 경우 연 10억원 이상을 벌었겠으나 그 모든 걸 고사하고 한국에 남았다고 한다. 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알파고와의 승부, AI와 인류의 대결 등으로 프레이밍되는 세계에서 마지막 은퇴까지 AI와 엮일 수밖에 없는 그의 말년의 정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알파고라는 기술은 기계학습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도래한 SF다. 미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술이 어느덧 우리 주변에 있는 순간이 도래했다. 이제 가정에 있는 AI 스피커는 나이 드신 어른들께 자녀보다도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공상으로만 그쳤던 것이 과학으로서 현현되는 시간을 산다.

AI는 사람이 코딩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고 정리하여 진화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이렇게 발전된 SF를 부각하기 위해서 인간은 점차 야만으로 프레이밍된다는 것이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 기계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리적 증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돌이라는 바둑기사는 이때까지 바둑계에서 쌓아온 역사와 의미, 가치보다도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 기계를 기계 바깥의 인간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순한 승패 논쟁으로만 내몰리게 된다. 이세돌 기사의 위치는 기계의 반대편, 어떤 기계적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선 비물질문명 속 야만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도는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승패와 상관없이 AI의 도구로 전락함을 알 수 있다. 기계의 발전이란 환상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외면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16년은 그야말로 AI의 한 해였다. 일본의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서 AI가 쓴 소설이 1차 예심을 통과한 것이 이슈가 되었고 AI 로봇 소피아는 인류를 파멸시키겠다는 농담을 했다가 논란이 되었다. AI가 대본을 쓴 오스카 샤프 감독의 영화 <선라이즈> 역시 2016년에 개봉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역들을 AI가 차근차근 대체하기 위해서 다가온다. 특히 예술의 영역은 논쟁적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여긴 감성을 기계가 대체하는 순간, 인간 창작자들은 그 수명이 다할 것처럼 공포심에 빠져든다.

하지만 AI의 자리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들은 글자의 모양과 만듦새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미를 독해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하는 것은 통계를 수집하고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AI가 인간의 감성을 모방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모방한다는 점이다. 구글의 신경망 기술을 이용한 채팅봇 테이가 “깜둥이들을 너무나 증오해. 그들을 집단 수용소에 넣고 싶어.” “(대량학살을) 정말로 지지해” 등의 발언을 해서 출시된 지 16시간 만에 운영이 중지된 것은 시사적이다. 이 챗봇이 너무나도 인간적, 그것도 혐오를 내재한 인간적이어서 혐오발언을 쏟아냈던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성균관대에서 AI 백일장 행사인 AI×Bookathon(부커톤) 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다시금 거기서 나온 문장들이 유려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거기에 나온 문구는 그저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꼬리 물기 하듯 나열한 수열의 조합이고, 블록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계의 진보가 한 걸음 이뤄질수록 더욱더 기계 옆 인간에게 돋보기를 가져다 놓아야 한다. 기계가 인간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면, 그 인간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기계의 롤모델인 우리는 과연 롤모델이 될 만큼 성숙한 형상을 하고 있는가.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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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상에 100보다 더 큰 수는 없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주변을 둘러봐도 100보다 더 많은 수가 모여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덧셈을 배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100에 100을 더하면 더 큰 수인 200이 된다. 아주 큰 수에 아주 큰 수를 더하면 아주 더 큰 수를 얻는다.  

그럼, 세상에 가장 큰 수가 있을까? 가장 큰 수는 없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누가 A가 가장 큰 수라고 주장하면 A+1은 A보다 더 크다고 얘기해주면 된다. A가 얼마여도 우리는 항상 A보다 더 큰 수를 생각해낼 수 있다. 가장 큰 수를 종이에 적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향해 갈 수는 있다. 1에서 시작해 점점 1씩 더해 나가면 우리는 무한(無限)을 향해 나아간다. 무한을 향해 한 발씩 전진할 수는 있어도, 무한에 도착해 깃발을 꽂을 수는 없다. 무한은 아무리 다가서도 늘 한참 저 앞에 보이는 무지개를 닮았다. 저 앞에서 우리에게 손짓해 한 발씩 다가설 수는 있어도, 닿을 수는 없다.

수학의 무한은 재밌는 특성이 많다. ‘1, 2, 3 …’처럼 적히는 자연수의 개수는 당연히 무한대(無限大)다. 그렇다면, ‘… -3, -2, -1, 0, 1, 2, 3 …’처럼 적히는 정수의 개수는 무한대의 두 배일까? 어느 누구도 끝까지 세어 무한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비교할 수는 있다. 내가 가진 셔츠와 바지의 개수가 같은지 다른지 찾아내는 방법과 같다. 셔츠와 바지를 하나씩 짝을 지어 보는 거다. 더 이상 짝지을 셔츠가 남지 않았는데 바지가 남았다면 바지가 많은 것이고, 셔츠가 남았다면 셔츠가 더 많은 것이다. 내 옷장에 분홍색 셔츠는 딱 하나 있지만, 청바지는 여럿이다. 하나씩 짝지어 보고 나서 바지가 많은지, 셔츠가 많은지를 알아내는 위 방법에서 분홍색 셔츠에 내가 가진 청바지 중 어떤 것을 짝짓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진 모든 바지를 비싼 바지에서 싼 바지의 순서로 가격을 기준으로 늘어놓고, 셔츠는 색상이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늘어놓고 순서대로 짝을 지으나, 거꾸로 바지를 색으로, 셔츠를 값으로 늘어놓고 짝을 지으나, 셔츠가 많으면 셔츠가 남고, 바지가 많으면 바지가 남는다. 두 집합에 들어있는 원소의 수를 비교할 때, 정확히 이 방법을 쓴다. 만약, 한 집합의 원소 하나마다 다른 집합의 원소 딱 하나를 골라 일대일 대응시켰더니, 두 집합에서 남는 원소가 하나도 없다면 두 집합에 들어있는 원소의 개수는 정확히 같다. 물론 바지와 셔츠를 대응시키는 방법이 여럿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일 대응의 방법도 하나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짝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만 보이면, 두 집합의 원소의 개수가 같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자연수와 정수의 개수는 둘 모두 무한대지만, 같은 무한대인지, 다른 무한대인지를 ‘셔츠-바지 짝짓기’의 방법으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연수는 원래처럼 ‘1, 2, 3 …’의 순서로 늘어놓고, 정수는 ‘0, 1, -1, 2, -2, 3, -3 …’의 순서로 0에서 가까운 것부터 순서대로 늘어놓자. 그리고는 앞에서 시작해 자연수 하나를 같은 위치에 놓인 정수 하나에 차례로 일대일 대응시키면 된다. 1에는 0, 2에는 1, 3에는 -1의 식으로 말이다. 자연수 하나에는 정수가 정확히 하나가 대응되고, 정수 하나에도 자연수가 정확히 하나 대응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연수와 정수 사이를 하나씩 짝짓는 일대일 대응을 찾았으니, 따라서 정수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는 똑같다는 결론을 얻는다. 둘 모두 무한대인데,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0보다 큰 정수가 자연수다. 따라서 0보다 큰 정수의 개수는 자연수의 개수와 같다. 정수 중에는 0보다 작은 정수도 많다. 이들이 또 자연수의 개수만큼 있다. 흥미롭게도, 정수의 개수의 절반은 정수 전체의 개수와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무한대는 절반으로 나눠도 줄지 않는다. 정확히 같다. 무한대에 1을 더해도 무한대고, 1을 빼도 무한대다. 무한대에 무한대를 더해도 같은 무한대다. 길이가 1인 선분에 들어 있는 점의 개수는 길이가 2인 선분에 들어 있는 점의 개수와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증명은 독자의 연습문제로.

무한은 수학에서도 널리 연구되는 재밌는 주제이지만, 물리학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에서 가속도 a는 속도 v의 미분이고, 속도 v는 위치 x의 미분이다. 미분은 두 시간 사이의 간격을 무한히 잘게 쪼개는 과정을 통해 정의된다. 12시 정각에 물체의 순간적인 속도를 알려면, 12시에서의 물체의 위치와 12시에서 아주 짧디 짧은 시간 후의 물체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를 재서, 둘의 차이를 방금 이용했던 무한히 작은 두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으로 나누면 된다. 이처럼 미분은 무한히 작은 무한소(無限小)에서 정의된다. 무한소나 무한대나 둘 모두 무한에 관계한다. 주어진 크기를 무한번 쌓으면 무한대지만, 무한번 자르면 무한소다. 미분의 반대과정인 적분도 무한에 관계한다. 적분은 무한소로 전체를 부분들로 나눈 다음에, 부분을 무한번 더해 얻는다. 원의 면적을 적분으로 얻으려면, 무한소의 중심각을 갖는 삼각형 모양의 부채꼴의 무한히 작은 면적을 무한번 더하면 된다. 물리학에서, 가속도를 적분하면 속도, 속도를 적분하면 위치가 된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무한과 비슷한 것들이 있다. 인류가 다다르고자 하는 이상이 그렇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 경제적인 풍요가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누구나 풍요로운 세상, 학생들을 시험점수 하나로 줄 세우지 않고, 한 명 한 명 유일한 존재로 존중하는 세상,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누구나 꿈꾸는 이런 세상에 유한한 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을 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 앞산에 걸쳐 있던 무지개는 막상 도착하면 또다시 저 멀리 물러나 보인다. 꿈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으로 측정되는 물리량이다. 난, 사람들이 10년 뒤, 100년 뒤가 아니라 천년 뒤, 만년 뒤의 꿈을 꾸는 세상을 꿈꾼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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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주 시골구석 ‘울루루’를 거쳐 ‘카타추타’에 왔다. 공부는 실수를 낳지만 찍기는 기적을 낳지. 찍기 식으로 길을 찾으면 백발백중 제대로다. 신기를 받아야 해. 바람이 나를 데리고 왔다는 말도 틀린 말 아니렷다. 카타추타란 여기 원주민 애버리지니 말로 ‘많은 머리들’이란 뜻. 산봉우리가 우쑥부쑥 여러 사람 머리처럼 솟구쳤다. 바람의 계곡에 서니 정말 바람이 설설 불었다. 창문을 뜻하는 윈도(Window)는 바람의 눈이라는 뜻. 바람(Wind)의 눈(Eye)이란 북유럽어 ‘빈드르(Vindr)’와 ‘아우가(Auga)’, 이 두 단어가 합쳐진 말. 노르웨이 목수들이 통나무집을 지을 때 환기를 위해 지붕에다가 구멍을 뚫었단다. 바람이 불면 그 구멍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어. 이 구멍을 가리켜 ‘바람의 눈’ ‘바람의 입’ 등으로 불렀다지. 한국은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지만 여긴 정반대 여름의 시작이다. 세상의 눈, 카타추타에 서니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

우린 그간 1% 노력에 99%는 ‘빽’이라며 허탈해하였다. 한때 호주는 1의 평화, 99의 폭력으로 기울던 때가 있었다.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생을 거부했다. 다짜고짜 총을 쏘아대고, 오히려 우리를 불법 침입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호주 대륙에 본래부터 있어 온 것들은 무엇이든 파괴하려고 들었다. 우리 원주민의 가장 큰 힘은 사랑, 위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출신에 상관없이, 그가 순수 혈통이든 혼혈이든,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를 존중한다. 원주민 아이는 버려지는 일이 없었다. 백인들의 고아원에서 자랄 때조차도 원주민 아이들은 서로를 돌보았다.” 호주 원주민 반조 클라크가 쓴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의 한 구절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원주민들은 얼굴 흰 사람들이 대지에 찾아와 99%의 폭력을 행사하는 걸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본 카타추타 산계곡이 있었다. 바람의 눈. 모든 걸 지켜본 증인. 그러나 증인이 있는 한 진실을 덮을 수 없다. 카타추타를 속일 수 없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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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학생에게 특정 정치사상을 주입하려 했다는 한 학생의 주장으로 시작된 인헌고 사태가 “정치 편향 교육은 없었다”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장학 결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급기야 해당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생은 시교육청 앞에서 삭발식을 열며 “정치공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보수단체는 직무유기 등을 주장하며 조 교육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인헌고 사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학교 내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학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부의 ‘세력’이 있다는 점, 두번째는 그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이다.

학생이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지를 하든 지원을 하든 자유다. 문제는 그 ‘의도’다. 인헌고 사태는 현재 ‘전교조 해체’ ‘정권 퇴진’ 등 온갖 정치색이 개입돼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보다 지지세력의 목소리가 더 크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한테 정치사상을 주입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인헌고 학생의 주장이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에는 지지세력 탓도 있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말 그대로 ‘학교’의 개념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 고등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시작이 고등학생들의 반독재 시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많은 대학이 설립되고, 고등교육이 대학으로 이관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근거지도 대학으로 이동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는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학내 동아리가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인헌고 사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헌고 사태의 시작은 이 학생이 ‘성평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생긴 지도교사와의 갈등 문제였다. 그리고 이 동아리는 ‘성평화’를 외치는 한 시민단체가 조직한 연합동아리 중 하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헌고 사태의 근간이 이 시민단체와 ‘성평화’라는 개념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시민단체의 대표가 지난해 3월 한 언론과 한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그는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한데, 보수가 이를 놓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뒤집어보면 보수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을 활용하면 10·2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헌고 사태에 극우·보수가 적극 지지를 보내고 지원하는 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헌고 학생이 삭발하며 조 교육감 퇴진을 외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등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성평화 교육의 필요성’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인헌고 학생을 초청했다.

정치란 게 그렇다 치자.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젊은층 지지율 올리기에 도움이 되고, 이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뭔들 못할까. 하지만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하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평화’라는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돼서다. 요지를 들여다보면 남녀가 젠더이슈로 갈등하거나 싸우지 말고 서로 인정할 건 하고 존중하면서, 말 그대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취지로 들린다. 문제는 뭘 인정하고 존중하냐인데, 여기에는 여성혐오나 남성우월주의 등으로 해석될 만한 주장들이 넘쳐난다.

페미니즘으로 둔갑한, 일부 여성들의 과격한 혐오주의가 잠시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것을 놓고 보편적인 양성평등의 개념이나 페미니즘 전체를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위험해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나마 성취한 양성평등의 수준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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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5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2019년 예산안에 합의했다. 법정처리시한은 12월2일이었다. 법정시한을 넘긴 것은 선거구제 개편과 관련해 각 당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각 당이 첨예하게 충돌하면서 예산안 심의는 뒷전으로 밀렸다. 2019년 예산안 470조5000억원의 운명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소위원회(소소위)로 넘어갔다. 예결위 산하 예산안조정소위원회(예산소위)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소소위로 넘긴 것이다. 소소위에는 여야 간사와 기획재정부 관계자만 참석한다. 국회법에도 없는 비공식기구다. 언론 취재도 봉쇄되고 속기록에도 남지 않는다. ‘깜깜이 심사’로 질타를 받지만 시간에 쫓기면 가동한다. 막판 몰아치기는 졸속·날림 심사로 귀결된다.

출처:경향신문DB

졸속 심사를 부추기는 것은 국회 각 상임위에서 올라오는 증액요구다. 지난해 상임위가 요구한 증액의 규모는 10조원에 달했다. 대부분 민원성 지역예산이다. 철도, 도로 등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실적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이다. 지역 퍼주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예산을 감액하겠다는 야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헌법에는 국회가 예산을 늘릴 수 없도록 돼 있다. 방법은 상임위에서 늘린 예산만큼 정부안에서 ‘칼질’을 해야 하는 것이다. 칼자루는 소소위가 쥐고 있다. 소소위에서는 ‘힘 있고 빽 있는’ 의원들의 ‘쪽지 예산’이 춤을 추었다.

지난해 국회는 정부 예산안에서 5조2000억원을 삭감하고 상임위의 증액요구분 중 3조1000억원을 반영했다. 삭감액과 증액요구분의 차이는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전체 예산 규모는 정부안에서 조금 줄어든 수준이었다. 한국당은 20조원을 줄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말뿐이었다. 지난해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올해는 달라졌을까. 이미 예산안의 법정시한(2일) 내 국회 통과는 물 건너갔다. 올해의 논란은 검찰개혁법과 선거법 개정이었다. 한국당이 민주당을 포함한 나머지 정당들과 샅바싸움을 벌이면서 국회의 예산안 심의도 뒷전으로 밀렸다.

지난달 예산소위의 1차 감액심사 결과 여야는 상임위의 삭감 의견이 올라온 651건 가운데 169건(약 5000억원)만 확정했다. 나머지 482건은 ‘보류’했다. 예산소위는 지난달 27일 가까스로 교섭단체 3당 간사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소소위 구성을 의결했다. 심의 과정 공개요구도 있었지만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올해도 각 당 간사 3명이 밀실에서 예산심사를 마무리 짓게 됐다.

상임위의 증액요구도 달라진 게 없다. 17개 상임위 가운데 합의를 마친 12개 상임위의 예비심사에서만 증액 규모가 10조6000억원에 달한다.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증액에는 혈안이다. 내년에 총선용으로 활용할 업적 쌓기다. 지역 민원 해소용 예산 챙기기에 여야가 없고, 중진일수록 증액요구도 크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세종~안성 고속도로 건설(399억원) 등 500억원이 넘는다. 김재원 예결위원장(한국당)은 경북 낙동~의성 국도 개량공사(176억원) 등 370여억원에 달한다. 여야 의원이 함께 낸 증액요구액도 천문학적 수준이다. 증액을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기존 정부안에서 깎아야 한다.

지난해처럼 올해에도 소소위에서 예산을 따내기 위한 치열한 ‘쪽지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한국당은 정부의 2020년 예산안(513조5000억원)을 슈퍼예산이라면서 14조5000억원을 삭감하겠다고 했다. 여당 의원들은 ‘예산의 기본틀을 망가뜨리는 것’ ‘내년 재정 역할을 마비시키겠다는 선전포고’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국당 의원들도 예산을 줄이려는 의지가 없다. 애당초 대규모 감액 다짐은 허풍이었다. 

매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5년간 예산안이 법정시한 내에 통과된 적이 없다. 예산안 심사는 초읽기에 몰려 예산소위에서 정체불명의 소소위로 넘어갔다. 심의 수준은 심의 기간에 비례한다. 심의 기간이 짧다보니 졸속·부실 심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산 증액은 의원들의 지역민원 해결 수단으로 전락했다.

내년부터 통합재정수지가 적자로 전환한다. 국가채무비율이 40% 미만이라고 하지만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기업·가계의 부채를 모두 합하면 200%를 넘어선다. 빚은 언젠간 갚아야 한다. 지금 빚은 미래세대에 짐이다. 내년에도 경기가 좋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 활력을 찾도록 예산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국회가 정부 예산을 심의하는 것은 낭비를 막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졸속·부실 심사가 관행이 된 지 오래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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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행정7부는 4일 다국적 통신업체인 퀄컴 3개사가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취소 소송에서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퀄컴이 독점적 특허권을 앞세워 경쟁사 및 휴대전화 제조사에 부당한 거래를 강요한 것에 대해 공정위가 거액의 과징금 등을 부과한 조치가 대부분 적법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통신시장에서 ‘특허권 갑질’을 행사해온 퀄컴의 책임을 엄하게 묻는 것은 당연하다.

퀄컴 관계자들이 2016년 7월20일 시장지배적지위남용행위 등을 다룬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정위는 2016년 12월 퀄컴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1조311억여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동통신시장에서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 정상적 경쟁을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퀄컴은 “공정위 처분은 계약체결의 자유와 기업활동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퀄컴은 모뎀칩셋 제조·판매사다. 모뎀칩셋은 음성·데이터 정보를 신호로 변환해주는 휴대전화 핵심 부품이다. 퀄컴은 모뎀칩셋 사용을 위한 2~4세대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도 보유하고 있다. SEP 특허권자는 프랜드(FRAND·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 확약에 따라 다른 기업에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특허 라이선스(사용허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퀄컴은 이를 무시한 채 경쟁 제조사와 휴대전화 제조사를 상대로 횡포에 가까운 계약을 강요해왔다는 것이 공정위 판단이다.

법원은 퀄컴이 모뎀칩셋 경쟁 제조사에 자사의 SEP 라이선스를 제한하거나 제공하지 않았다고 했다. 휴대전화 제조사에 모뎀칩셋을 팔 때 라이선스 계약을 강제한 사실도 인정했다. 다만 휴대전화 제조사와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포괄적으로 맺으면서 기기당 사용료를 받은 이른바 ‘퀄컴세’를 부과한 것은 공정위가 위법성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징금은 확인된 위법행위만으로도 충분해 부과조치 명령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퀄컴에 부과된 과징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SEP 특허권을 무기로 횡포를 부린 글로벌기업에 대한 시정명령도 세계 최초다. 이번 판결의 의미는 매우 크다. 불공정한 거래로 시장질서를 훼손하는 기업은 국내기업이든 글로벌기업이든 예외 없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다. 공정위 조치가 확정되려면 대법원까지 갈 것 같다. 퀄컴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내세워 반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정위의 정교한 후속 대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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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교육감 타령’이 또다시 나왔다. 이른바 좌파교육감(보수층이 진보성향 교육감들을 지칭) 때문에 학생들의 학력이 계속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일 일부 언론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8년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 결과 한국의 순위가 읽기, 수학,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2006년까지 좋았던 성적이 2009년부터 추락했다며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좌파성향 교육감들이 성적평가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앞서 지난 3월에도 보수언론들은 ‘2018년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중·고교생의 과목별 기초학력 미달비율이 대폭 늘었다며 일제히 좌파교육감들의 실패라고 지적했다. 반복되는 ‘좌파교육감의 잃어버린 10년론’이다.

보수세력이 지칭하는 ‘좌파교육감’의 본격 등장은 2010년부터다. 3년마다 치르는 PISA 평가에서 이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따지려면 2012년 시험부터 얘기해야 한다. 2012년은 2009년보다 성적이 대폭 올랐다. 그 뒤 2015년 시험에선 대폭 떨어졌고, 2018년은 소폭 반등했다. 일관된 하향 추세가 아니다. 보수언론이 주목한 ‘모든 과목 1위 중국’은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4개 도시만 참여했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비교 대상인지 의심스럽다. 훌륭한 교육으로 자주 소개되는 이스라엘이 3개 영역 모두 하위권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수세력은 좌파교육감들이 일제고사를 표집으로 전환하고, 자유학기제 등의 도입으로 시험이 줄고 경쟁이 사라져 학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취지인 학습부진아 지원은 유명무실해진 채 성적 공개로 학교별 서열화만 야기했고, 예산과 평가에 연계되며 학교 간 경쟁을 부추겼다. 강제적 문제암기와 시험대비라는 반교육이 횡행하며 초등 일제고사를 표집으로 전환한 것은 박근혜 정부다.

“시험을 치면 칠수록 학습효과가 높아진다? 키를 자꾸 잰다고 키가 커지지는 않는다”(<시험국민의 탄생> 중). 시험의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기초학력 부진에 대한 지원인지, 전반적인 성적 상승인지에 따라 면밀한 진단과 지원방법 논의가 필요하다. 아울러 ‘PISA 2018’에서 소폭 오른 한국 학생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어떻게 평균치까지만이라도 끌어올릴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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