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뭘 기다리는지, 얼마의 시간인지, 그새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과가 희망적이든 아니든 기다림은 초조, 긴장, 불안, 공포의 경험이다. 

2014년 2월 나는 서울관악고용노동지청에 있었다. 르노삼성자동차를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고평법)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하기 위해서다. 노동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일할 조건을 만들 책무는 사업주에게 법이 부여한 것이다. 고평법은 직장 내 성희롱 신고를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르노삼성자동차는 피해 증언 이후 피해자에 대해 사직 종용, 소문 유포와 조직적인 왕따 등 괴롭힘, 징계, 업무전환 등 부당한 처우는 물론 그를 도운 동료에게도 징계와 대기발령 등 가히 ‘불리한 처우 종합세트’라 할 정도로 심각한 불법행위를 했다. 이에 6개 여성·인권단체들은 르노삼성자동차를 고발하며 적법한 사법처리와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5년10개월이 지난 지금,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아직 1심 재판도 끝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와 검찰은 아무런 근거도 안내도 없이 4년이나 붙잡고 있다가 2018년 3월에야 기소했다. 검찰은 처리 지연에 대한 무수한 항의와 국정감사 지적에도 꿈쩍하지 않다가 #미투운동이 촉발된 후에야 르노삼성자동차를 기소했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달라는 당연한 요구가 회사로부터 온갖 불이익을 받을 이유이며, 검찰이 4년이나 시간을 끌며 기소하지 않을 일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고발 당시 피해자와 동료는 책상과 의자 외에 아무 비품도 없고 심지어 업무용 컴퓨터도 없는 ‘독방’ 같은 곳에서 점심시간 1시간, 오전·오후 각 10분 휴게시간 외에는 사전 승인 없이 장소를 이탈할 수 없는 대기발령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죄를 물을 기회조차 박탈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던 4년,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1년10개월의 시간이, 아니 여전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이 어떨지,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유로 한 불이익조치 금지’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그 어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불법행위를 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르노삼성자동차 피해자는 국가와 법을 믿었고 국가에 역할을 요청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요된 기다림의 시간,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제 기다림의 잔혹한 고통을 멈춰야 한다. 

르노삼성자동차가 피해자와 동료에게 한 일련의 조치들은 성희롱 피해보고 이후 일어난 일들로 명백히 성희롱 피해 주장을 이유로 한 불이익 조치들이다. 이미 2017년 민사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법원은 조속히 입법 취지에 맞는 정의로운 판결로 르노삼성자동차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는 한국사회에서 불이익조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노동자들이 두려움 없이 말해도 되는 사회라는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고용노동부나 검찰의 임의적 사건 지연을 막는 제도를 마련하고 모든 처리과정이 피해자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이제는 변할 수 있다’는 희망과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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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그 사람, 집에서는 가부장적이네. 젊을 때는 부모를, 결혼해서는 아내와 자녀를 힘들게 하면서도 당연한 줄만 아네. 자신은 밖에서 힘든 일 한다는 핑계로 차별에 둔감하네. 그러면서 성차별 말만 들으면 요즘 세상 좋아졌다면서 지금은 남자가 힘든 시대라고 하소연이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성차별에 반대한다는 그 사람, 학력주의는 찬성하네. 대학 이름은 사람의 성실함을 대변한다면서 주변 사람을 무안하게 하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나오면 공정하지 않다고 분노하네. 어쨌든 시험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에 공정한 것이라면서, 그 빌어먹을 노력을 동등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외면하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학력주의를 타파하자는 그 사람, 난민 이야기만 나오면 결사항전을 치를 기세로 반대하네.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는 끔찍한 논리로 사람을 괴물로 묘사하네. 특정 지역, 문화, 종교에 대한 왜곡된 정보로 오염되어 그릇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괴물인 줄 모르네. 관용이 필요하다는 연예인에게 ‘답답하면 자기 집에 데리고 사세요!’라면서 빈정거리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그 사람, ‘성적 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한국이 소돔과 고모라 꼴이 날 거라면서 흥분하네. 동성애를 혐오할 자유도 있다면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성애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자연적 산물인 양 주장하네. 정상, 비정상이라는 편견 탓에 성소수자들의 자살률이 더 높다는 현실은 모른 척하고 끊임없이 ‘고칠 수 있는’ 질병 운운하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인문학만이 미래의 길을 제시한다며 공자를 읊어대던 그 사람, 집값 앞에서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네. 동네에 특수학교 들어서는 걸 기필코 막겠다는 주민들의 의견은 인문학의 힘으로 반대하지 않네. 대출받아 겨우 집 장만했기에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면서 장애인 권리만 권리냐는 이상한 말을 하네. 결국 근처에 청년 임대주택이 조성된다는 말이 나오자 재산권 보장하라면서 띠 두르고 항의하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반대하는 그 사람, 정작 자신이 꼰대인 줄 모르네. 주변에서 무슨 말만 하면 간섭하지 말라면서 벽을 치더니 OO충(蟲)이라면서 사람을 벌레 취급하네. 노키즈존 찬성하더니 전체 관람 영화도 노키즈관 만들어 아이들을 따로 분류하자고 난리네. 밑도 끝도 없이 요즘 부모가 얼마나 진상인 줄 아냐면서 행동의 통제가 아닌 사람 자체를 배제하는 게 소비자의 권리인 양 포장하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그 사람, 배달노동자가 인사 안 했다고 쯧쯧 혀를 차네. 그 사람, 백화점의 직원이 상냥하지 않다면서 쯧쯧 혀를 차네. 그 사람, 기차역 노숙인을 보며 외국인 보기에 창피하다면서 쯧쯧 혀를 차네. 그 사람, 심지어 사투리 쓴다고 사람을 싫어하네. 그 사람, 외모가 곧 사람의 평소 생활습관이라면서 태연히 혐오하네. 자신은 딱 보면 알 수 있다면서, 자신의 수준을 딱 보여주네. 이러쿵저러쿵 온갖 이유 만들어 그건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누구는 차별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 하네. 그래도 인류가 불평등의 크기를 줄여오지 않았냐고 하면, 유토피아는 없다면서 비꼬네. 사회구조를 탓하면 제발 긍정의 자세를 가지라고 타박하네. 차라리 머리 긁적이며 살아보니 속물일 수밖에 없었다고 반성이라도 하면 다행인데 자유, 권리, 역차별 등의 단어를 멋대로 짜깁기해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하네. 그런 한 해가 저무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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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겠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어. 뭐하러 그 고생을 하나 싶었거든. 그러나 정치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잘 안된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듣고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라. “정치라는 게 짐승이 하는 거라고 쉽게 말하고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잖아요. 또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나마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치를 하려고요.”

후배 K야. 정동길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 너의 강단 앞에서, 뭐랄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소낙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난 많이 지쳐 있었거든. 올 한 해 정치는 혐오와 불신 이외엔 달리 설명할 게 없었잖니. 사방천지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들이 플래카드라도 들고 가는 곳이 국회 앞이라고, 그래서 아직은 정치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정치부 기자인 선배에게 이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을 텐데 난 네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40년 전 영국을 휘몰아쳤던 불만의 겨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 1970년대 영국은 경기 악화로 실업자만 300만명이 넘었지. 공공부문 4대 노조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 유명한 ‘불만의 겨울’은 영국을 덮쳤어. 결국 1979년 총선에서 집권 노동당은 보수당에 패했고, 사상 첫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가 등장해. 영국병을 고치겠다고 선언한 대처는 노조를 탄압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었지. 철의 여인은 영국병을 고쳤을진 몰라도 신자유주의라는 세계 병을 만들었어. 영국은 다시 불만의 겨울이었어. 오죽했으면 대처가 죽었을 때 런던 한복판에서 축제가 벌어졌을까. 하지만 보수당 통치 18년을 무너뜨린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도 대처리즘을 포기하지 않더라. 다른 세상이 올 거라 믿었던 시민들에겐 신노동당 집권기도 불만의 겨울이었을 거야. 그러나 원로들은 60년대 승리의 추억에만 젖어 근본주의만 고수했지. 마키아벨리가 있었다면 아마 “성공했던 방식만 고수하면 반드시 망한다”라고 일갈했을 거야.

우리의 겨울은 어떨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혹독한 삭풍을 이겨냈으니 불만의 겨울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김용균씨 사망 1주기인데도 위험의 외주화를 막자는 외침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있고, 청년층은 ‘실업’, 노년층은 ‘빈곤’이 삶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고. 어쩌면 우리의 촛불은 혁명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정치는 어디 있었나. 여권은 기존 방식만 답습했던 영국 노동당과 다르지 않았어. 세상사를 선과 악으로 가르는 관성을 못 버리더구나. ‘선한 권력이 하는 일은 옳다’는 거지. 측근 정치, 경제관료에 의존했던 과거의 실패를 따라하는 건 무슨 고집인지. 선거제 개혁도 후퇴하는 조짐이야. 민주당은 영국 노동당의 실패를 되새겨야 해. 블레어는 소선거구제 폐해를 극복하겠다며 선거제 개혁을 공약했지만 지키지 않았어. 블레어가 선거제를 바꿨다면 노동당은 대처리즘을 연장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영국엔 불만의 겨울이 없었을 테지.

보수 야당은 반문재인 하나로 연명하고 있잖니. 색깔론도 모자라, 대표가 청년들에게 52시간보다 더 일해야 한다며 새마을운동 시절 얘기나 하고 말이야. 불과 2년여 만에 부활하는 보수를 보며 우리 사회 기득권이 얼마나 강고한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야.

‘조국대전’을 치르고 나선, 이 지독한 불신과 혐오를 이겨낼 힘이 남아 있는지 돌아볼 때가 많아. “조국대전도 이런 정치에 내 공민권을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겠죠. 맞아요, 올해 정치는 썩 매력 없었죠. 그러나 바닥까지 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참 야무진 위로였다. 바닥까지 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정치가 뭘까. 여기 광화문 주변엔 온갖 사연으로 줄 지어선 인파들이 많아. 긴 행렬을 볼 때마다, 사소한 것에 대한 간절함이 순간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어. 인생의 장르를 바꾸기로 결심한 넌 얼마나 많은 간절함이 쌓였을까. 불만의 겨울이 닥칠지 모를, 아니 이미 와 있을지 모를 이때 ‘봄’의 시인 이성부가 생각난 건 참 다행이다.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부질없음이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를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산길에서)

인생의 경계에서 숱하게 흔들렸을 불면의 밤이 이미 네겐 불만의 겨울이었으리라. 너의 다음 계절은 반드시 ‘정치’이길 바란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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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간 ‘사과’와 관련된 국내외 뉴스가 보도됐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공적인 사과’들이다. 지난 5일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가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표했다. 지난 8월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에 이어 이날 광주 오월어머니집을 방문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뭐라도 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왔다”고 말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를 찾아 “어떤 말로도 이곳에서 비인격적인 처우를 받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많은 사람의 슬픔을 달랠 수 없을 것”이라고 사죄했다. 그는 앞서 지난달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구체적인 사건까지 말하며 잘못을 사과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내놓은 이른바 ‘문희상 안’과 관련해 지난 6일 국회 토론회에선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꼭 일본에 사죄를 받아 명예회복해야 한다”고 눈물을 흘렸다. ‘문희상 안’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빠졌다는 점에서 비판이 높다.

세계를 감동시킨 명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무릎 사과’다. 서독에 적대감이 강했던 폴란드 국민들은 빗속에서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린 브란트의 사과를 생방송으로 지켜보며 오랜 앙금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진정한 사과’의 요건은 몇 가지로 추려진다. 핵심은 피해자의 마음이 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사과하고, 조건이나 해명 없이,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고 사과해야 한다. 거짓된 사과는 그 반대다. 모호한 사과, 해명성 사과, 용서해 달라고 강요하는 사과 등이다.

브란트와 메르켈의 사과는 진정한 사과의 전형이었음을, ‘문희상 안’은 사과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노재헌의 사과는? 5·18 단체들의 요구대로, 잘못을 정확히 고백해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5·18의 진범은 유언비어’라고 규정한 노 전 대통령 회고록을 수정하는 것이 최소 기준이 될 것이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때론 화를 부른다. 사과는 잘해야 한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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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학성(196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강물은 멀리 흘러간다.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길고 큰 강을 시간에 빗대기도 한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장강(長江)과 유사하다.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있다. 앞뒤 사정이 많다. 그 시간의 강물 위에 시인은 편지를 써서 띄운다. 달의 언저리에 월훈(月暈)이 곱다고 쓰며 누군가를 생각한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생각한다. 바뀌고 달라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난해해서 도무지 풀이할 수 없는 삶의 질문들을 생각한다. 그 질문들에 꼭 정해진 답은 없다. 누구도 하나의 마음이 아니기에. 시인은 반성과 살핌의 긴 편지를 써서 강물에 띄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꼭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수심(水深)이 깊은 자신의 마음에게 띄우는 서신이기도 하다. 내가 써서 내가 받아보는 편지도 의미가 크다. 따뜻한 말로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일도 필요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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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에서는 최근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이끌어갈 저자들이다. 너도나도 책을 내는 시대에 평범한 저자들의 등장은 그리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어떤 테마나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자기 삶의 고백, 자서전적인 글쓰기를 담게 될 것이다. 

지난가을 출판사로 투고되어온 원고들 중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글 두 편이 있었다. 이들이 최근 연달아 책으로 나왔다. 

출간을 결심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삶이 소설 한 권을 써도 좋을 만큼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랬다면 책을 내는 데 주저했을 수도 있다. 책을 내보지 않은 이들이라 판매나 인지도 측면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좋은 글에 이골이 난 눈으로 볼 때도 뛰어난 글쓰기로 자신을 표현해냈다.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랄까. 글로 다듬어져 나온 이들의 생애는 때론 눈물이 날 정도였고,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질투나 자책의 감정을 느끼게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글이 기성 작가들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표현이나 플롯, 남다른 안목, 상상력 등에서 작가들보다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다. 다만 이들의 글은 자기 삶을 극복하거나 정리해내려는 의지가 강하다. 

예를 들면 어릴 때 겪은 트라우마의 극복,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기,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삶의 끝자락에 다시 갖게 되는 글쓰기의 소망 등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삶을 정면으로 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특정 시기의 일과 사건에 대해 그게 뭐였냐며 끈질기게 추궁한다. 그 정면승부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특히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며 시리즈로까지 낼 생각을 한 것엔 일종의 ‘수집 욕구’가 작용한 측면도 있다. ‘직업적 문체’라는 것을 책의 형태로 한번 끌어모아 보고자 하는 욕심이라고 해도 될까. 세상엔 많은 직업이 있지만 우린 평생 그중 극히 일부밖에 경험하지 못하고 생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직업세계에는 그 세계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평생 식당을 운영해온 사람에게는 음식과 손님의 관계 속에서, 침술을 가르쳐온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침을 맞고 배운 학생과의 관계 속에서, 나무 묘목을 키워 판매하는 사람에겐 또 우리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그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주는 삶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경험한 대로 만들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할 때, 이들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내밀하게,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만나볼 수 있는 방법으로 책만 한 게 있을까.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과정,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고 어떤 일을 도모해서 도전하는 과정,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는 과정, 자살을 시도하거나 이민을 떠나거나 하는 등의 온갖 일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문제들이다. 누구에게나 비슷한 형태로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그걸 겪어내는 방법이나 정도의 차이는 각양각색이라는 점에서 특수하다. 특히 나는 이 특수성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이 선택한 것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게 삶이라는 말이 있듯, 선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 선택의 배경이 되는 사연도 사람마다 구구절절하다. 이것은 의사, 변호사, 공무원, 회사원, 가정주부, 식당 종업원 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판에 박힌 지식을 뛰어넘을 것이다.

이제 겨우 두 권을 냈고, 세 번째 책을 편집 중이지만 ‘아주 보통의 글쓰기’ 시리즈가 보통 사람의 특별한 삶을 알리는 창으로 꾸준히 계속될 수 있었으면 한다. 어찌 보면 예전에 수필을 싣는 월간지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었던 ‘독자투고’나 생활에세이 같은 글을 이제는 책의 형태로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둘의 차이라면 잡지에 실린 글은 단편의 에피소드로 끝나지만 책은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풍부한 맥락이 되어 책에 심겨져 있다는 것이리라. 나 개인적으로는 이 시리즈가 사회에서 주어진 직업을 평생 살다 간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살다 간 사람들의 삶을 모아놓은 색인집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은 어쨌든 시대를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유지해나가야 할 명분도 뚜렷하다. 그 의미를 좀 더 많은 독자가 알아주는 운이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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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정기국회를 마감할 본회의가 9·10일 문을 연다. 지난달 29일 자유한국당이 198개 법안에 무더기 신청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 대치가 풀리지 않은 채 정기국회도 100일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여느 해 할 것 없이 마지막 벼락치기를 반복한 정기국회지만, 올핸 사정이 더 긴박하다. 새해 예산안은 교섭단체 간 감액·증액 심사도 매듭짓지 못하고 법정 처리시한을 1주일이나 넘겼다.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검찰개혁법과 유치원 3법, 시급한 민생법안들, 해외파병 연장안·대체복무법 같은 외교안보 현안까지 줄지어 기다리는 본회의 안건만 200개가 넘는다. 그러나 하루 앞 8일까지도 국회에선 “의회정치 낙오자가 되지 마라”(민주당), “의회독재 길을 걷지 말라”(한국당)는 입씨름만 거듭됐다. 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과 대안신당의 ‘4+1 협의체’는 원내대표급 회의로 높여 예산안과 패스트트랙 단일 법안을 조율했고, 한국당은 예산심사 하자를 따지며 하루 뒤 열릴 새 원내대표 경선으로 부산했다. 달려오던 대로 두 바퀴가 또 하루를 따로 구른 격이다.

파국이냐 대화냐. 시민들의 눈은 9일 본회의에 앞서 뽑힐 한국당 새 원내사령탑을 향하고 있다. 한국당은 지난 6일 ‘필리버스터 철회 시 정기국회에서 예산안·민생법안만 먼저 처리하자’는 국회의장의 중재 협상에 끝내 불참했다. 강경·협상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새 원내대표가 책임있게 이끌 문제라는 이유를 댔다. 그가 내딛는 첫발이 끊긴 대화와 정치를 살리는 방향이길 기대한다. 

한국당은 막다른 선택지 앞에 서 있다. 민생법안을 세운 필리버스터는 차가운 민심에 맞닥뜨렸고, ‘4+1 협의체’는 11일부터 4일 안팎의 임시국회를 이어가겠다고 공언했다. 필리버스터를 한 법안은 다음 회기에 먼저 처리토록 한 국회법상 다수가 조율한 안건을 한국당이 끝까지 막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어졌다. 예산·선거제 심의에 모두 빠져 명분도 실리도 놓치는 첫 제1야당이 될 수 있는 셈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예산안과 선거제는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처리해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시초를 다투는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고, 패스트트랙 법안은 임시국회에서 매듭짓는 것도 합리적·대승적일 수 있다. 한국당은 자승자박이 된 필리버스터를 풀고, 국회는 예산안·선거제 협의를 끝까지 포기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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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PD수첩> ‘검찰기자단’ 편이 방영된 이후, 중앙언론사들의 법조출입기자단이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에 따르면, <PD수첩>은 “법조기자의 취재 현실과는 거리가 먼 왜곡과 오류투성이”라고 한다.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즉각적인 사과와 정정보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말 유감이다. 이런 성명서를 발표하는 패기가 유감스럽다.

기자들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쓰는가? 오래된 언론학 교과서가 물었던 질문이다. 시대나 나라에 따라, 언론사에 따라, 기자에 따라 답이 다를 테니 위험한 일반화는 참기로 하자. 하지만 ‘일반 독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며 기사를 쓰는 기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조사에 의해 쉽게 확인된다. 기사 초고를 읽을 담당 차장이나 부장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답도 많았고, 경쟁사 기자가 생각난다는 답도 있었다고 한다. 광고주를 고려한다는 답도, 취재원을 생각하게 된다는 답도 많았다. 연구차 만났던 한 기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연차가 쌓일수록 ‘일반 독자’는 준거집단에서 점차 멀어진다는 말이었다. 고려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아진단다. 이런 말도 했다. 특정 업계를 취재 대상으로 삼을 경우, 기사를 쓸 때 자꾸 해당 업계 관계자들이 기사를 읽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자주 보아온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볼 사람들이기 때문에.

법조출입기자단의 성명서를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기자들은 누구를 염두에 두며 이 성명서를 썼을까? <PD수첩> 제작진일까? ‘일반 독자’들일까? 혹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그들’은 아닐까?

<PD수첩>은 아주 새로운 내용도, 놀랄 만큼 심층적인 내용도 별로 없다. 검사들은 기자들을 이용해서 여론을 한쪽으로 유도하거나 수사를 용이하게 하려 하고, 기자들은 적당히 협조하면서도 친한 검사들을 활용해 호시탐탐 특종을 노린다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었다. 기자들이 취재원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이해관계까지 함께하는 현상은 출입처 제도의 어두운 면이라는 비판을 오랜 기간 받아왔고, 특히 신진 언론사들에 진입장벽이 터무니없이 높은 청와대와 법원·검찰은 애초부터 원성 자자한 출입처였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몇몇 인터뷰와 자료들, 그리고 구태를 개선하자는 제안 정도에 발끈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성명서 내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굴을 가리고, 음성을 변조하는 것도 모자라, 가명에 대역 재연까지 써가며 현직 검사와 법조기자를 자칭하고 나선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의 허구성은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취재원 보호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해명을 할 필요도 없다. 법조기자 본인들이야말로 실존인물인지도 알 수 없는 ‘검찰 관계자’의 말을 수도 없이 인용하지 않았던가? ‘한 시민의 의견’은 또 얼마나 많이 등장하던가? “전체 법조기자단을 범죄 집단처럼 묘사해 특정 직업군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했다”는 구절도 있다. 내게는 <PD수첩> 속 법조출입기자들이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이유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들로 보였다. 우리는 관습대로 하루하루를 성찰 없이 살아가는 소시민을 범죄자라 부르지는 않는다.

성명서가 ‘법조출입기자단 일동’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소속 22명 이름으로 발표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KBS, MBC, 경향신문, 한겨레 등의 소속 기자들은 성명서 발표에 동참하지 않았다.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법조기자단 단체카톡방에 “팀장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성명서는) 법조기자단 일동이라고 나갑니다. 의견 없으시면 5분 뒤에 성명서 발송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공지된 후 일부 기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22명의 성명서가 되었다고 한다.

성명서에는 자신들의 ‘땀내 나는 외곽 취재’를 몰라준다는 서운함도 있다. <PD수첩> 취재진의 땀내는 무시하는 이중성이 마음에 걸리지만, 사실 이건 맞는 얘기다.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법조기자도 많다. 꽤 오랜 기간 기자상 심사에 참여했는데, 법조기자들이 발굴한 훌륭한 기사들도 많았다. 문제는 능력 있는 개인이 오래된 관습과 기형적 구조라는 강력한 자장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론은 다시 출입처의 폐해로 향한다. 마침 KBS가 출입처 제도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우선 검찰만이라도, 그리고 우선 성명서에 불참한 몇몇 언론사만이라도 이 흐름에 동참했으면 한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 기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PD수첩> 내용 일부에 대해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이 보도를 법조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계기로 삼겠다”는 겸허하고 의지에 찬 성명서를 다시 써달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일반 독자’들이 읽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성명서를 써주었으면 한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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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온통 깜깜했다. 좌우 구조물이 희미하게 보일 뿐 바닥은 가늠조차 어려웠다. 석탄 먼지만 쉴 새 없이 휘날렸다.’ 민주노총이 최근 공개한 한국남부발전 하동발전본부 석탄발전소의 ‘작업 중 현장’ 모습이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대부분 현장도 노동자들이 손전등에 의지한 채 작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2월10일 김용균 노동자가 숨졌다. 어두운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컨베이어벨트 밑에 쌓인 석탄을 긁어모으다 벨트와 롤러에 몸이 끼였기 때문이었다. 조명시설만 있었어도, 도와줄 동료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오늘도 ‘김용균의 현장’은 그대로인 것이다.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가 8일 경기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린 1주기 추도식 중 추도사를 읽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스물네 살에 한국발전기술 하청업체에 입사한 김용균씨는 지난해 12월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야간근무를 서다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김영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김씨 사망 후 “발판 하나, 벨트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펴 방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정규직 전환도 속도를 내겠다고 했다. 2인1조 의무화, 위험업무 시 설비가동 중지 등 정부 대책도 이어졌다. 산재사고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도 제시됐다. 국회는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한 ‘김용균법’을 통과시켰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는 연료환경설비운전 노동자 직접고용 등 22개의 권고안을 제시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관계부처·기관은 최대한 권고 내용을 반영하라”고 지시까지 했다. 숱한 다짐과 약속은 그러나 말뿐이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12월 6일 (출처:경향신문DB)

2인1조 근무원칙은 일부 현장의 일이고, 정규직 전환은 ‘어려운 일’이 됐고, 노무비 착복 악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용균 특조위 권고안 중 4개안은 ‘흉내 내기’에 그쳤고 18개안은 먼지만 쌓인 채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김용균법’은 위험의 외주화 금지·중대재해기업 처벌 방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외주금지 업종에 발전분야가 제외되면서 김용균법에 정작 ‘김용균’도 빠졌다. 그러다 보니 석탄발전 노동자 상당수는 지금도 2950원짜리 특진마스크 대신 값싼 방진마스크를 쓴 채 작업 전 “안전하게 일하고 저녁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한다고 한다. 이런 사정이 이해되는 것이, 여전히 산업현장에서는 매일 3건씩 사망사고가 반복되고 있고, 사업장 대부분은 안전조치에 눈감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7일 촛불행진에 이어 8일 김용균 추도식이 열렸다. 김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은 “너를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걸 막겠다”며 “엄마는 이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가려는 길은 국민 누구나 가야 할 길이다. 김용균을 살릴 수는 없지만, 나는 물론 내 이웃이 일하다 죽지 않을 세상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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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전국사립유치원교직원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말만 교직원일 뿐, 그동안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하 교원지위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고, 사립유치원들의 비리 행위로 인한 피해자였던 사립유치원 교직원들이 자주적인 결사체 노동조합을 만들고 창립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비리사립유치원 명단이 공개되고 사립유치원장과 설립자들이 원비와 국가지원금을 쌈짓돈 쓰듯이 사용한 내역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유치원에 근무하고 있는 교직원들도 사립유치원 비리와 폭리의 피해자이다.

그동안 사립유치원 교직원은 유아교육 일선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열악한 처우와 현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노조는 사립유치원 교직원 처우의 실상을 직접 파악해 보았다. 경기도교육청 자료를 기준으로 346곳 사립유치원 교원 2755명의 급여 수준을 파악해 보니, 평균 월급이 209만원으로 나타났다. 사립유치원 교원들이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18년 기준 근로자 평균연봉(3634만원)에 비하면 거의 70%도 안되는 심각한 수준이다. 교원지위법 제3조2항은 ‘사립학교 법인과 사립학교 경영자는 그가 설치·경영하는 학교 교원의 보수를 국공립학교 교원의 보수 수준으로 유지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말만 교원일 뿐, 사실은 다른 직종 근로자의 평균적인 대우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치원알리미 사이트를 통해 사립유치원 202곳 교사들의 근속연수를 확인해보니, 2년 미만 근무자가 전체의 54%로 나타났다. 교직원 절반 이상이 2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1년 미만 단기 근무자만 떼어서 보더라도 31%에 달해 전체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6년 이상 장기근무자는 겨우 11%밖에 되지 않았다.

사립학교법에 의해 사립유치원 교원은 사학연금에 가입하는 것이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사학연금에도 가입하지 못한 채 근무하는 교원들도 상당하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유치원 교직원의 사학연금 및 4대보험 가입여부 같은 최소한의 기본 자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력이 쌓여 호봉이 높아지면, 설립자와 원장들은 경력 교사들을 쫓아내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온 것도 사립유치원이다. 이런 상황이니 원장, 원감 등의 관리자가 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굳어져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만명의 회원을 둔 어떤 유치원보육교사카페는 가입조건을 1990~1998년생으로만 제한을 두는 곳도 있다. 즉 유치원 교사들 스스로가 30대를 넘으면 교사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립유치원 교직원은 이처럼 열악한 처우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립유치원 설립자나 원장이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원치 않는 한유총 주도 집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교원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한 유치원에서 문제가 되면 해당 교직원에 대해 지역 원장들에게 소문을 내서 일하지 못하게 한다는 소위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하게 오르내렸고, 교사처우개선비를 빼돌려 다시 유치원으로 리턴하는 행태도 비일비재하다.

사립유치원 교직원도 근로기준법과 교원지위법에 명시된 권리와 권한을 제대로 부여받아야 한다. 사립초·중·고 교직원은 정년이 보장된다. 교육기관의 교직원이라는 명예와 더불어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립유치원 교직원도 유아교육을 책임지는 교육자로서 안정적인 고용과 정년이 보장되어야 한다.  

열악한 처우개선과 더불어 사립유치원 교직원들의 고용과 정년의 보장은, 미래세대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큰 울타리가 될 것이다.

<박용환 전국사립유치원교직원 노조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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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유!”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광장이었다. 노동절, ‘메이데이’의 기원이다. 

그간 130년이 훌쩍 넘었지만 8시간 노동은 아직 꿈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13일, 청년 전태일이 분신하며 외친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 약 250달러 시절이었다. 그런데 1인당 3만달러가 넘는 지금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다.

실은 근기법 준수도 힘겨운데 되레 퇴보 일로다. 세계적 장시간 노동국의 오명을 벗고자 2004년부터 점진적으로 주 5일제, 하루 8시간, 주 40시간제를 실시하던 중이다. ‘이명박근혜’ 때는 ‘주 68시간제’가 상식처럼 통했다. 촛불혁명 뒤 현 정부조차 ‘주 40시간제’를 ‘주 52시간제’라 부르는 프레임에 빠졌다. 마침내 2020년 1월부터 시행할 ‘300인 미만 기업 주 40시간제’도 유예하려 한다. 설상가상, 초과근로 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노동시간 정산기간을 (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려 한다. 소위 ‘탄력근로제’다. 6개월간 노동자에게 일을 들쑥날쑥 시켜놓고 주 평균 40시간 이내면 50% 초과수당을 주지 않아도 된다? 경총이나 전경련은 당초 그 정산기간을 아예 12개월로 하려 했다. 1년 내내 초과수당 없이 일 시킨다는 창조(?)경제! 18세기식 발상! 노조가 기겁을 하니, 못 이긴 척 6개월로 타협하려 한다. 문제는 ‘촛불정부’도 이에 동조하는 점. ‘사람답게 살자’던 촛불민심은 어디에 묻히고 자본의 이윤 욕망만 넘칠까?

누차 강조하지만,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이 기준이다! 노동자가 동의하면 ‘예외’로 최대 12시간 더 가능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 기준. ‘8시간 노동’만으로도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자는 게 촛불민심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부동산 투기와 물가를 확실히 잡고, 보육, 교육, 의료, 교통, 노후 등 삶의 기본을 공공성으로 풀면 된다. 이런 게 그나마 ‘노동존중 개혁’이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 이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새 세상을 열며 승승장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존중 개혁이 가능한가? 

이미 노동존중 개혁을 했던 유럽 복지국가조차 신자유주의 물결과 글로벌 경쟁 속에 노동, 민주,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위축되고 시스템 퇴행이 계속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이는 자본과 권력의 문제다. 하지만 과연 이런 퇴행이 노동의 협조 없이 가능한가?

“공장노동자 1세대는 고용주로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교육받았다. 2세대는 10시간 노동 쟁취운동을 펼치면서 노동시간단축위원회를 결성했다. 3세대는 초과 노동수당을 위해 파업했다. 그들은 고용주가 제시한 범위를 수용했고 그 안에서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교훈을 너무나 잘 깨우쳤다.” 1967년, 영국 노동사학자 E P 톰슨의 <시간, 노동규율, 산업 자본주의>란 글에 나온다. 그나마 1세대는 노동(시간) “자체에 반해” 저항했으나, 갈수록 노동(규율)을 내면화한 나머지 드디어 노동시간에 “관해” (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을 높이기 위해) 싸우게 됐다는 얘기다. 요컨대 이제 자본의 지배력이 깊이 뿌리 내린 상태에서 (즉 자본종속 노동을 당연시한 상태에서) 단지 그 조건을 둘러싼 투쟁만 하게 됐다는 통찰이다. 그 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니 오히려 오늘날 한국이야말로 이 지적이 잘 맞는다. 톰슨에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볼 수 있다. 즉 4세대 노동자 다수는 임금이 줄어들까봐 노동시간 단축을 두려워하고 외려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구할 정도로 되고 말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본을 넘어설 생각은커녕,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조차 포기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 일거리, 정규직)을 원하는 게 오늘날 상당수 노동자의 욕망 아닌가. 자본은 바로 이 노동자의 욕망과 정서를 맘껏 활용한다.

그렇다. 2000만(여·남) 노동자와 3000만 가족들은 노동에 살고 노동에 지친다. 아니, (노동력 준비과정인) 학교에 이어 노동자 삶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좀비’ 같은 상품이다. 이를 강요하는 노동체제 속에, 또 이를 내면화한 일중독 속에, 과연 ‘인간다운 삶’의 출구가 있는가? 이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넘어서자면, 권력에 대해 국민주권으로 맞서듯 자본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시간주권으로 연대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아픔에 공감하되, 자본과 남성의 지배를 동시에 넘지 않으면 평생 개고생이다. 돈의 연대가 아닌 삶의 연대야말로 참된 출구다!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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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혁안, 검찰개혁안의 국회 본회의 표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4월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이후에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여전히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비례대표 의석 몇 자리를 더 얻겠다고, 끊임없이 개혁안을 후퇴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공수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자유한국당과의 타협 가능성에 미련을 두고 있다.  

그러나 타협이 잘되면 개혁과는 거리가 먼 ‘누더기 입법’이 될 것이고, 타협이 안되면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칠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유한국당과 타협을 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정당득표율대로 전체 국회 의석을 배분한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준연동형’으로 축소시킨 장본인도 민주당이다. 정당득표율의 50%만큼만 의석을 우선배분하는 ‘준연동형’은 이미 많이 후퇴된 안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40% 연동형 등 더 후퇴된 제안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런 장면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본다면, 어떤 얘기를 할까?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기회만 있으면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03년 12월17일엔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전원에게 편지를 보내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04년 실시될 17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은 당시 한나라당에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래서 2004년 총선 전에 큰 틀의 선거제도 개혁을 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2005년 7월엔 한나라당에 ‘선거제도 개혁만 한다면 대연정도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그만큼 노무현 대통령에게 선거제도 개혁은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선거제도 개혁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되니까,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꼭 선거제도는 좀 고치고 싶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이것은 꼭 하고 싶다. 그래서 이 대연정의 제안은 소위 말하는 반대급부의 내용이고, 진정으로 제안한 것은 선거제도 고치자는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내놓더라도 선거제도를 꼭 바꾸고 싶다는 노무현의 꿈은 정치다운 정치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 염원은 한나라당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이제 기회가 왔다. 자유한국당이 반대해도 민주당의 의지만 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제도 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공수처법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런데 민주당 지도부는 왜 잔머리를 쓰는가? 내년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데, 비례대표 몇 자리를 더 얻겠다고 개혁안을 후퇴시키려 하는가? 

‘합의 처리가 관행’이니 하는 얘기는 하지 말라. 아무런 근거 없는 관행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49조는 “국회는 헌법과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선거법은 ‘게임의 룰’이니까, 합의가 필요하다는 엉터리 같은 얘기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야구게임의 룰을 야구선수들끼리 합의해서 정하는가? 사실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의 룰은 국회의원들끼리 정할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기구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2015년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치권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권고했다. 이런 권고를 따르는 것이 맞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은 국민들을 속이려는 것이다. 결국에는 비례대표 몇 자리를 더 얻는 것이 목표가 아닌가? 그러나 ‘연동형’ 개념이 도입되면, 정당득표를 많이 하면 의석을 더 얻을 수 있다. 민주당도 내년 총선에서 정당득표율을 더 끌어올리면, 비례대표 의석을 더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정정당당한 것이지, 선거법을 누더기로 만드는 ‘꼼수’로 의석을 더 얻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신을 따른다는 정당이 할 일인가?

9일에 자유한국당 신임 원내대표가 선출된다는 것도 시기를 미룰 핑계가 될 수 없다. 이미 자유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공수처법에 반대한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혔다. 원내대표 후보자 가운데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찬성한다는 후보가 없다. 그렇다면 누가 되든, 개혁에 반대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는 역사 앞에서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은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해야 한다. 문희상 의장은 역사적 책임감을 갖고 9일 본회의에 선거법, 공수처법, 검경수사권조정법, 유치원3법의 순으로 법안을 상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하면, 11일 본회의에서 선거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개혁입법을 완성시켜야 한다.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는 어차피 며칠을 가지 못할 것이다. 지역구를 챙겨야 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언제까지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겠는가? 선거법과 공수처법이 통과되면, 자유한국당은 저절로 흩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용기와 결단, 책임의식뿐이다. 제발 노무현 대통령의 꿈을 기억하기 바란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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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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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방조제는 세계 최장을 자랑한다. 무려 33.9㎞에 이른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어보면 갯벌과 그 속의 생명을 죽였던 세계에서 가장 긴 ‘학살의 둑’이다. 또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의 140배)만큼 국토를 넓혔다고 자랑한다. 이 또한 죽임의 현장이 이리도 넓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만금 방조제에 서면 그저 슬프다. 직선으로 뻗은 방조제가 요새처럼 견고해서 더욱 그렇다.

물막이 공사가 한창일 때 새만금 갯벌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먼 남쪽나라에서 날아온 새들이 찰진 갯벌에 주둥이를 박고 날아갈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새들에게 새만금 갯벌은 에너지 공급기지였다. 생명평화순례단원들은 갯벌과 그 속의 생명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은 새들의 울음이 떨어지는 갯벌에서 바다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뭍과 물이 몸을 섞는 갯벌은 육지의 더러운 것들까지 깊숙이 들이마셔 또 다른 생명을 피워 올렸다. ‘인자한 자궁’이었다. 바다의 생각과 육지의 꿈이 서로를 안아주면 그 안의 온갖 생물들이 노래했다. 새만금 갯벌은 어림 7000년 동안 그렇게 벌떡거렸다. 인간들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숨구멍을 막았다. 우리는 갯벌을 잃었고 바다는 말이 없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끝낸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새만금사업은 어떻게 되었는가. 물을 막은 자들이 주장했던 대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하고 있는가. ‘녹색성장과 청정생태환경의 글로벌 거점’으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만, 주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때만 새만금은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내 가라앉았다. 설익었거나 잔뜩 부풀린 청사진과 투자의향서만 쌓여 있을 뿐이다. 이제 국민들은 질렸고 주민들은 지쳤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도 없다.

새만금 간척지 중 2만8300㏊는 산업단지로, 1만1800㏊는 호수로 조성할 예정이다. 산업단지를 조성하려면 갯벌을 덮어야 하고, 호수를 만들려면 소금물을 희석해야 한다. 넓디넓은 간척지를 돋우려면 엄청난 양의 흙이 필요하다. 몇 개의 산을 허물어도 모자랄 것이다. 또 맑은 호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강줄기를 끌어와야 한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이미 예견된 일들이다. 단군 이래 최대 간척사업이라 떠들었지만 실은 최대의 바보 공사였다. 새만금 간척지가 ‘인간의 땅’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할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이는 갯벌의 저주와 다름없다. 물막이 공사가 시민단체의 반발로 한때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때 멈췄더라면……. 부질없지만 거의 20년 전에 쓴 글을 옮겨 본다.

“생명의 눈으로 갯벌을 바라보라. 지혜가 모자라고 경험이 없어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발은 우리보다 뛰어난 후손에게 맡길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죄악이다.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을 지키는 일, 1조1000억원의 수장(水葬)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다.”(2001년 4월4일자 경향신문 칼럼)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나라에서 요즘도 국책사업으로 산하를 짓이기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녹조에 덮여 헐떡이는 강물을 보면서도 동계올림픽을 치른다며 원시림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각박해진 것은 이런 야만의 삽질이 우리 심성까지 파헤쳤기 때문일 것이다. 내장이 튀어나온, 저 죽어가는 강들을 놔두고 무슨 진보와 보수를 논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가.

당국이 새만금사업을 새롭게 추진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살펴보니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만금 사업성과 내년부터 가시화’라는 기사 제목이 참으로 초라하다. 지난 10년 동안 새만금에서는 제대로 이룬 것이 없음을 시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다를까. 역시 적당히 시늉만 내다가 말 것이라고 예단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만금을 계획대로 개발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 또 그대로 방치하면 주민들과 여론의 매를 맞을 것이다. 그러하니 다시 적당히 시늉만 낼 것이다. 새만금 소금밭에는 재앙이 썩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정직하게 말할 때가 되었다. 새만금사업은 무지했다고, 또 무모하고 무엄했다고 고백해야 한다. 자연에 대한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다. 갯벌을 죽인 자들이 받아야 할 벌은 따로 있을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에서 바다만을 바라보지 마라. 돌아서서 간척지도 보라. 새만금 갯벌은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있다. 이는 보이는 것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재앙은 언젠가 벼락처럼 닥칠 것이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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