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금연을 한다, 술을 끊거나 줄이겠다, 운동을 하겠다는 등의 결심을 한다. 올해는 꼭 지키겠다며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짐하기도 한다. 새해를 맞아 하는 다짐들은 대개 건강하게 살자는 거다. 물론 건강이 최고다. 한국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세계 최고다.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나 싶을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본인 건강이 양호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한국인은 29.5%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88.5%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응답한 캐나다는 물론, OECD 가입국 평균인 65.7%에도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한국 사람들은 병원에 세계에서 가장 자주 간다. 국민 1인당 연간 16.6회로 OECD 평균 7.1회의 두 배가 넘는다.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도 세계 최장이다. 한국인의 평균 입원일수는 연간 18.5일로, OECD 평균인 8.2일에 비하면 두 배 이상 길다.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병원에 자주 가고, 입원도 오래 한다면, 그건 한국인이 다른 나라 국민보다 두 배 이상 더 많이 아프다는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건강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달리 심각하다는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술·담배를 하는 비율, 비만 정도, 영아사망률과 평균수명 등이 모두 OECD 평균보다 훨씬 좋은 상태다.

특별히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 환자들이 왜 넘쳐나는 걸까. 호들갑에 가까운 건강염려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연대와 나눔을 찾아보기 어려운 각자도생의 사회이니, 제 몸부터 챙겨야겠다는 생존본능이 강하게 작동한 탓일까, 아니면 의료계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의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건강염려증을 조장하기 때문일까. 유감스럽게도 정부 차원의 정확한 진단은 없다.

그래도 다들 아는 게 있다. 환자는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취급되고, 과잉진료가 남발되고 있다. 세계에서 MRI와 CT가 가장 많이 보급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환자들은 돈만 밝히는 병원과 의사를 믿지 못하니, 진단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옮겨 다닌다. 결국 브랜드 파워에 따라 대형병원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다. 믿을 만한 의사, 나아가 존경할 만한 의사는 모두 위인전에 갇혀 버렸다. 의대생들 중에 슈바이처나 장기려를 꿈꾸는 사람이 있을까. 녹색병원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성수의원 양길승이나 사당의원 김록호 같은 의사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도 힘들어졌다.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가 누구든,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는 원칙,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는 상식에 동의하는 의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병원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을 바꿔야 한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에 공공성을 확보하는 게 과잉진료를 막고, 더 이상 한국사람들이 건강염려증에 시달리지 않게 할 유일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며 기득권 세력의 눈치나 보는 형국이다.

돈벌이 의료행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공공의료기관이다. 그러나 전체의 5% 남짓이다. 전체 병상 비율은 10% 정도라 좀 더 낫지만, 둘 다 OECD 최하위 수준이다. 문제는 병상 기준으로 전체의 10% 남짓한 공공병원마저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국가나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다. 서울대학교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은 12개, 종합병원은 49개다.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암센터처럼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는 병원도 있고, 국방부의 국군수도병원, 국가보훈처의 보훈병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한국원자력병원,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병원, 지방정부가 관할하는 병원에다 경찰청의 경찰병원까지 있다. 여기에다 병원이 46개, 요양병원 84개, 치과병원 5개, 한방병원과 의원이 각각 1개씩이다. 합하면 모두 198개다. 이 통계에는 2018년 8월 문을 연 인천보훈병원은 빠져 있으니, 실제로는 200개가 넘을 게다.

아무튼 200개쯤 되는 공공의료기관들이 한국 보건의료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전장치이며, 오로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영리의료기관을 제대로 견인할 수 있는 선도기관이지만, 실상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공의료기관들 사이에 어떤 협력체계도 없다는 거다. 기관별로, 또는 관할하는 부처에 따라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아무 상관없이 각자의 길만 가고 있다. 함께 모여 의논하는 일조차 없다. 그러니 효율성도 떨어지고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담보할 실력도 뒤처지게 된다. 보훈병원은 군병원이나 경찰병원과 아무 연관도 없다. 국가가 예산을 투입해 운영하는 병원인 데다 주요 고객이 겹치는데도 그렇다. 만약 6개의 보훈병원과 19개의 군병원, 그리고 1개의 경찰병원을 통합하면 어떨까.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군인들이 군병원을 이용하듯 경찰병원이나 보훈병원도 자유롭게 이용하면 더 좋지 않을까. 이를 국가돌봄병원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거다.

부처 간 칸막이만 뛰어넘는다면,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를 재편할 수 있는 대안도 만들 수 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 환자들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과잉진료는 설 곳이 없어진다. 믿을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인 데다 실력까지 갖춘 최고의 병원을 만들 수 있다. 대개의 국공립 유치원이 사립유치원보다 훨씬 좋은 것과 마찬가지다. 개별 병원 차원에서 해결하기 힘든 교육기관과의 연계나 유능한 의료진의 확보도 수월해진다.

게다가 국가유공자, 상이군경, 군인, 경찰관과 소방관 등 국가가 챙겨야 할 분들은 더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 지금만큼의 예산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 국무총리가 되는 분이 이런 일을 맡아주면 좋겠다. 당장 복지부, 교육부, 국방부, 노동부, 보훈처 장관들을 불러 논의라도 시작해보자. 새해이니 새로운 꿈으로 적당하지 않은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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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옷을 준비하세요”, “파란색 옷을 준비하세요”. 아기의 성별을 암시하는 이 말은 산부인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의심 없이 ‘분홍색은 딸, 파란색은 아들’로 받아들여진다.

100여년 전만 해도 반대였다. 분홍이 남성의 색이었다. 색의 인문학,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책 &lt;컬러인문학&gt;에는 색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이 나온다. 1897년 &lt;뉴욕 타임스&gt;는 ‘아기의 첫번째 옷’이라는 기사에서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고 충고했다. 1918년 영국의 &lt;브리티시 레이디즈 홈 저널&gt;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분홍은 좀 더 분명하고 강해 보이는 색으로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지만 파랑은 좀 더 섬세하고 얌전해 보여 여자아이한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분홍을 남성적으로 본 큰 이유는 빨간 피와의 연관성 때문이라고 한다. 최고의 복서로 평가받는 슈거 레이 로빈슨이 1946년 첫번째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고 자축의 의미로 처음 구입한 캐딜락 색깔이 분홍이었는데, 이 취향도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을 정도다. 반면 부유한 로마 남성들은 여성적인 색이라는 이유로 파랑을 경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색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분홍은 여성, 파랑은 남성’이라는 현재의 이미지는 마케팅과 사회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1950~1960년대부터 ‘시장’에서 ‘여성과 분홍’을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광고했고, 제품과 연관된 이미지도 무의식중에 강화된 셈이다.

2일 ‘정치하는 엄마들’이 일부 영·유아용 옷과 문구류에 여아용은 분홍색, 남아용은 파란색이 정해져 있어 아이들이 색을 고를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이 단체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핑크 노 모어’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파랑, 분홍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여자답게’ ‘남자답게’가 문제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반쪽으로 가둘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분홍, 파랑의 모든 좋은 함의를 다 갖춘, 더 넓고 큰 아이들이 ‘나답게’ 자라는 2020년대가 되기를.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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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수 없기에 식물의 경쟁은 동물보다 훨씬 치열하다. 영역싸움에서 밀리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물과 달리 그 자체가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함께 커가는 동종 간 싸움에서 이기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종의 침입을 막아냄과 동시에 동종 간 영역싸움, 즉 공격과 방어를 함께하면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식물이다. 대개 처음에 자라나는 식물은 상대적으로 방어능력이 뛰어나며, 방어를 뚫고 자란 후발주자는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소나무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운명을 타고났다. 다양한 연유로 척박한 흙이 드러나게 되면 소나무는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데, 솔잎에 다량 함유된 항생물질이 이 역할을 한다. 다른 종의 침입을 막는 데 힘을 쏟지만 종내경쟁도 녹록지 않다. 10년 전후의 어린 소나무숲이 20년 정도의 젊은 숲으로 바뀌는 동안 절반이 죽게 된다. 그리고 50년 정도의 중년 숲으로 변하면서 또 살아남은 개체의 절반이 죽는다. 그나마 소나무숲으로 유지될 경우에 그렇다는 거다. 바닥에 떨군 솔잎은 해가 가면서 썩게 되고 방어능력이 서서히 사라지는데 이 틈을 타 다른 종이 싹을 틔운다. 이들은 크게 자란 소나무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빠르게 성장하는데, 더 이상 소나무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소나무를 공격한다. 스스로는 공격할 수 없기에 자신에게는 해가 없으면서 소나무를 죽일 수 있는 곤충을 유인한다. 소나무를 죽이는 곤충이 곰팡이와 공생관계를 이루는 이유이다. 이렇게 숲은 성숙해간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비해 참 정 없는 것이 자연이다.

피톤치드. 식물이 병원균이나 곤충, 곰팡이에 저항하려 분비하는 물질이다. 핵심은 다른 식물이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는 방어기작에 있다. 숲속에 들어가면 이 물질이 우리 몸에 흡수되어 인체의 방어능력까지 키워준다. 그리고 우리 조상은 이 특성을 활용해 식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 쓰기도 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송편(松-)이다. 솔잎을 떡시루에 깔고 그 위에 쌀떡을 올리고 다시 솔잎을, 떡을 차곡차곡 쌓아 쪄낸 이 떡은 찌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솔 향이 배어 송편이라는 이름의 참맛을 내게 된다. 송편의 솔잎은 단순히 떡의 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솔잎의 강한 항균작용으로 쉬이 상하는 떡을 오래 보관하고 이 항균물질을 체내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상의 지혜이다. 지금은 추석의 대표음식으로 알려졌지만 옛날 조상들은 정월대보름부터 봄까지 주로 먹던 떡이다. 질병에 가장 취약한 때가 계절이 바뀌는 봄이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그런데 이제 이 향긋한 송편을 맛보기 어렵다. 꽤 오래전부터 꿀벌을 죽이는 농약으로 알려진 네오니코티노이드계열 살충제를 산림에 뿌려왔기 때문이다. 산속 어느 소나무에 농약을 뿌렸거나 주입했는지 모르기에 아예 먹으려 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 산림청이 안전하다고 사용하던 바이엘사의 이 농약을 유럽연합에서는 올봄부터 경작지에서조차 사용을 금지시켰다. 정부가 이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멀쩡한 산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 같다. 왜 숲의 성숙을 막으면서 깨끗한 숲을 오염시키는지, 경쟁에서 도태된 나무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지 이유는 군색하다.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소나무가 잘 자랐던 것은 솔숲의 마른 솔가지와 자연스레 죽은, 경쟁에서 도태된 소나무를 겨울마다 거두어갔기 때문임을 외면하지는 말길 바란다. 에너지 전환에 따른 멀쩡한 변화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상황을 이제 멈출 때가 되었다. 30년이면 이미 오래 해보지 않았는가? 2020년에는 자연의 섭리인 숲의 성장을 더 이상 재선충이라는 재난프레임으로 가두어 전국을 농약숲으로, 보기 흉한 플라스틱묘지로 만들지 말길 바란다.

올봄에는 농약냄새 대신 뒷산의 솔잎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향긋한 송편 한 점을 먹고 싶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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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법이 통과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진보와 보수가 다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진보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던 검찰을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환영한다. 검찰과 공수처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도의 틀을 마련했다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감격한다. 반면 보수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개혁을 빌미로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있는 검찰을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킬 거라며 비판한다. 검찰과 경찰이 범죄를 인지한 단계부터 공수처에 보고해야 할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인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한다.

언뜻 진보와 보수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둘 다 검찰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검찰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다. ‘알지 못하는 타자’까지도 포괄할 수 있게 규칙에 따라 운용해야 한다. ‘서로 잘 아는 우리’만 해당하도록 자의적으로 운용하면 특수한 연대에 복무하는 비시민사회 제도로 추락한다. 진보와 보수는 검찰에 대한 이러한 민주주의 코드를 공유하는데도 왜 공수처법을 두고 죽어라 싸우는 것일까? 그건 경험칙상 검찰이 권력자가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운용해온 권력의 도구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검찰로 대표되는 제도에 대한 불신은 매우 높다. 검찰이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 제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라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 문제다. 몇몇 집단이 검찰을 장악해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민주주의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인 검찰이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겠는가?

제도개혁은 필요하다. 부족한 점이 드러나면 거듭 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줄 수는 없다. 제도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악용해서 그 취지와 어긋나는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의 문화 역량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악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하면 개인이 아무리 문화 역량을 활용해서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검찰이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기본 전제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를 잘해 고시에 붙어 엘리트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고시라는 게 무엇인가? 최근 9개월 공부를 통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공부법을 알려주는 유튜브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도 게임에 빠져 살다가 단 9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26세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9개월 집중해서 공부하면 붙는 시험을 통해 권력집단의 일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고시 사회’.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악한 습속이 공정한 경쟁으로 찬양받는다. 고시 합격자들이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지배 엘리트가 되어 우리 사회를 과도하게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정해진 답 빨리 찾기에는 달인인데,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는 젬병이다. 다른 문제를 제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나 마나 한 학위를 따거나 남의 연구를 통째로 베끼며 빈약한 권력의 정당성을 치장하느라 바쁘다.

형식상 사법시험은 폐지되었다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험용 공부라는 악한 습속에 빠져 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험에 붙지 못하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린다. 공부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니 기출문제 풀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단기 속성으로 합격해서 기득권으로 진입하는 공부가 최고다. 이처럼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 계속 지배하는 한 좋은 제도를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공정 운운하며 시험결과를 최우선으로 두는 고시 인간이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문화 역량을 갖췄을 리 없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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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새로운 십년대가 시작되는 해이자, 100년 단위로 끊자면 ‘대한민국 시즌 2’가 시작되는 첫해이다. 그만큼 새해에 큰 의미를 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작년 내내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이 해가 바뀌기 직전에 국회를 통과했다. 두 법안 모두 20, 30년을 넘긴 해묵은 개혁 과제였지만, 번번이 기득권의 저항 앞에 좌절되거나 왜곡되곤 했다. ‘촛불혁명’으로 큰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므로 개정 선거법이 애초의 구상보다 후퇴했다고 실망할 이유가 없다. 또 공수처법에 우려할 점이 있더라도 군사정권 종식 이후 막강한 권력으로 변질된 정치검찰의 폐해에 비할 수는 없다. 새 제도를 운용하다가 발견되는 허점이나 미흡함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개선하면 된다. 낡디낡은 세력을 무너뜨릴 전략적 고지를 확보했다는 사실 앞에 잠시 마냥 기뻐해도 좋다.

올 4월에 있을 21대 총선 결과를 쉽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정치지형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도 지난 2월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충격 탓에 2019년 내내 지지부진했지만, 총선 이후에는 안정적인 길을 찾으리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득권의 부단한 해체작업 없이 변화는 오지 않는다. 가령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 매달리는 행태는 주권자의 힘으로 가차없이 척결해야 한다.

어쩌면 기득권의 해체보다 자발적인 양보나 포기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정말 ‘혁명적인’ 변화는 개혁 대상인 동시에 개혁 주체이기도 한 모순적인 집단 내부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이 집단은 대개 ‘전문직’의 범주에 속하는데, 공무원, 법조인, 교사와 교수, 의사, 직업군인, 기성 정당과 정치인 등이 대표적이며 때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도 포함될 것이다. 개혁은 적어도 이들의 일부가 적극적 동참세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공수처법은 검찰 내부의 유능하고 양심적인 인력을 살리는 효과를 낼 것이다. 검찰조직 자체는 개혁 대상이지만, 개혁 주체가 내부에 없으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널리 알려진 임은정, 서지현, 안미현 검사 등을 떠올려도 좋다. 이들이 모두 여성인 점도 시대변화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사실이니, 이명박 정부 시절 터진 추악한 ‘벤츠 여검사’ 사건과도 비교해볼 법하다. 사법부 개혁의 경우도 검찰과 다를 바 없다.

교육 분야도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겹치는 현상은 어김없이 벌어지며, 그 양상도 다양하다. 투표할 권리 외에 거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는 초·중등 교사의 처지는 한심할 지경이며, 그들이 대변하는 현장의 정당한 목소리는 손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개혁의 선봉이 되어야 할 그들 또한 모순투성이 현실 속에 대학교수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대상인 면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물론 현장과 유리된 교육 관료들이다. 비리사학과 유착된 썩은 자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훌륭한 공무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낡은 구조가 걸림돌이다.

지난해 11월 칼럼에서 나는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 공정성·투명성 제고를 위한 공동 운영·관리 매뉴얼’의 모순을 짚었다. ‘매뉴얼’은 대학 구성원이 경영진의 불법과 비리를 밝힌 경우라도 해당 대학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거나 불이익을 준다. 학교를 위해 나선 교수, 학생, 직원이 극소수 비리행위자의 잘못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교직원과 학생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매뉴얼 탓에 학교비리 제보를 주저하게 마련이며, 제보행위 자체가 학교의 재정난을 악화시켜 동료들의 냉대와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

매뉴얼은 대학 정상화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작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는 ‘대학의 재정·회계 부정 등 방지방안’(의안번호 제2019-17호)에서 교육부가 작년 말까지 “자체감사로 드러난 비리는 부정·비리대학 제한 완화”라는 개선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12월18일 교육부가 발표한 ‘사학혁신 추진방안’에서 이 핵심 과제는 쏙 빠져버렸다. 12월25일자 모 일간신문의 보도는 국민권익위의 “권고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과 대학 전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내부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라는 교육부 관계자의 발언을 전했다. 권고 이행을 훼방 놓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교육 현장 위에 군림하는 이 오만한 자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신분제의 공고화’를 주장하며 ‘민중 개·돼지론’을 입에 올린 교육부 엘리트 관료가 불현듯 떠오른다. 교육부의 양심적 공무원들은 여전히 짓눌려 있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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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가 2일 법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인사청문회가 끝난 지 사흘, 국회 재송부 기한 종료 7시간 만에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첫 인사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현충원 참배에 추 장관을 참석시켰고, 오후엔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조국사태’에 마침표를 찍고,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검찰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돼야 한다. 수사 관행이나 방식, 조직문화까지 혁신적으로 바꿔내는 개혁이 안착될 수 있도록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신년인사회에서도 “새해에는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내겠다. 권력기관 개혁, 공정사회 개혁이 그 시작”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추 장관을 향한 엄중한 주문이다.

추 장관 앞에 놓인 과제는 어느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검찰개혁이 최우선이다. 국회를 도와 검경 수사권 조정안 입법절차를 마무리하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출범을 매조지해야 한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가 권고한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 배당절차 투명화 등은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감찰 강화, 공개·심야조사 폐지 등 자체개혁안 이행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이 정치수사를 한다”는 시민들의 의구심도 잠재워야 한다.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선택적 정의에 따른 선택적 수사를 하고 있다는 의심은 적지 않다. 여권 수사는 죄가 나올 때까지 하면서 야권 수사에는 관대한, 형평성 잃은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총장이 자기정치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검찰 수사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떠나 이런 수사 행태에 대해 시민 상당수가 의심하고, 지지와 반대로 갈린다면 검찰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하는 권한’을 가진 법무장관의 책무다. 그 과정에서 내부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움직임도 담아내 화합으로 버무려내는 리더십 또한 추 장관이 보여줘야 한다.

추 장관은 임명 후 “정확하게 진단하고 병의 부위를 제대로 도려내는 게 명의”라며 “검찰조직이 국민신뢰를 회복하고, 대통령이 준 (검찰개혁 등) 과제들이 실현되고 뿌리내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추 장관의 다짐이 검찰개혁의 완수, 국민을 위하는 검찰조직의 완성으로 열매 맺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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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 1일 공개한 노동당 중앙위 제7기 5차 전원회의 결정서에는 ‘북남(남북)관계’ 용어가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지난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북남관계를 10차례 언급한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존재감 약화와 한·미 공조의 틀에 갇혀 재량권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됐을 것이다. 향후 정세 변화에 따라 대남정책의 조정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일부러 넣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북한이 현시점에서 남북관계를 주요 변수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정부 신년합동인사회 인사말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민의 열망으로 반드시 ‘상생 번영의 평화공동체’를 이뤄낼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우리는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 한반도 평화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북·미 정상 간의 대화 의지도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평화는 행동 없이 오지 않는다”며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제안한 ‘비무장지대 국제평화지대화’를 거론했고, 이어 “남북관계도 더 운신의 폭을 넓혀 노력해 나가겠다”고 했다.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의 신년 메시지는 무게감이 남다르고, 그런 만큼 한 글자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하지만 이날 언급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북한이 ‘경제·핵무력 병진 노선’으로 회귀할 것을 시사하며 북·미 대치국면이 조성돼 가는 정세에 대한 엄중한 인식이 더 필요해 보인다. 지난해 정세를 ‘한반도 평화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가 내놓은 결정서로 미뤄볼 때 올해 한반도 정세는 격랑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대북정책도 한반도 긴장을 낮추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당장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같은 미국 내 강경파들이 ‘모든 군사훈련 재개’를 주장하고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태도가 강경하게 흐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올해 한반도 정세의 1차 고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2월 말~3월 초 한·미 연합훈련의 조정도 필수적이다. 행동으로 뒷받침할 형편이 안된다면 남북관계에 대해 가급적 말을 아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남북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겠다’는 문 대통령의 언급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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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을 수사한 검찰이 여야 의원 등 총 37명을 재판에 넘겼다. 수사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이다. 박근혜 국정농단 같은 대형 수사도 3개월 만에 마무리했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게 지체된 수사였다. 검찰은 수사 규모가 방대해서 시일이 걸렸다고 하지만, 군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비록 ‘늑장 수사’란 비판을 받았지만, 검찰이 ‘동물 국회’를 연출한 의원 등 관련자들을 무더기 기소한 것은 고질적인 국회폭력에 철퇴를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당시 폭력사태를 총지휘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기소 대상에 포함시킨 판단은 평가할 만하다. 국회 선진화법 위반은 유죄가 확정되면 5~10년간 피선거권이 제한되는 중대한 범죄다. 4월 총선 공천 과정을 앞두고 더 늦기 전에 정치권 최대의 형사사건이 일단락돼서 그나마 다행이다.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해 폭력사태의 주범인 한국당이 반발하고 나선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황 대표는 “불법에 대한 저항은 무죄”라고 했고, 나 전 원내대표는 “명백한 정치보복성 기소이자, 정권 눈치보기식 ‘하명 기소’ ”라고 했다. 조국 전 장관 관련 수사 등 다른 사건에 대해선 엄정한 법 집행을 주문하더니 자신들의 문제에는 정반대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이런 오만과 이율배반이 없다. 그렇다면 평소에 그렇게 강조하는 ‘법치’는 도대체 어느 때 누구한테 적용되는 것인가.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은 국회 선진화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초유의 사태였다. 과거 ‘해머’로 상징되는 국회의 극한 대치를 막기 위해 2012년 여야 합의로 마련한 선진화법을 정면으로 짓밟은 것이다. 온 시민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그런데도 반성은커녕 ‘야당 죽이기’ 운운하며 또다시 정치적 탄압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국당 의원들이 기소된 것은 야당 탄압이 아니라 스스로 국회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소속 의원들이 기소된 데 대해 “기계적 균형 맞추기”라며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여당 입장에선 폭력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한 데 대해 방어적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억울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검찰은 “(야당 의원들이) 회의를 방해한다고 해도 질서유지권으로 해소시켜야지, 자력 구제를 한 건 맞지 않다”고 했다. 누구 말이 맞을지는 법원에서 따져볼 일이다. 이번 기소는 국회 선진화법 위반에 대한 첫 사법처리이자 국회폭력을 뿌리 뽑을 절호의 기회다. 법원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의 불법에 대해선 더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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