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지난해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종 차를 운전하고 다님에도 교통사고를 피했다. 운전을 하고 다님에도 싱크홀(땅꺼짐)도 만나지 않았고, 포토홀(포장면에 구멍이 생기는 것)도 당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제주도행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는 줄 알았지만 결국은 무사했다. 공사 현장 옆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다행히 크레인이 넘어가거나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겪지 않았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있었지만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저런 사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병에 걸려 죽는 이들도 있었지만 돌연한 사고로 죽어간 이들도 있고, 아직까지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올해도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안전사고라는 게 미리 예고를 하고 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사고들도 있지만 특히 여성들은 증오범죄를 당할지도 모른다. 이주민의 경우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십만명이 한 해에 죽어 가는데 정상적인 과정이 아닌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이 유난히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런 죽음들이 너무 많아서 지극히 익숙한 나라다. 최근에 전쟁이 일어날 것같이 불안한 중동의 이라크에서 2003년부터 9년 동안의 전쟁 중에 16만2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9년 동안 한국에서 자살로 12만명이 죽고, 산재로 2만명이 죽고, 교통사고로 4만명 정도가 죽었다. 이렇게만 따져도 이라크 전쟁 9년 동안 한국에서는 자살자와 산재 사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가 대략 18만명이었다. 이 숫자도 평균보다 낮게 잡은 것이니 이보다 더 많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 대한민국은 전쟁 중인 나라가 아닌가. 일상이 전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지난해처럼 올해도 사람들은 생계문제로 벼랑 끝에 내몰려 자살할 것이고, 산업현장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하고, 길거리에서도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는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포함되리라. 

지난해 말 어린이 교통사고 관련 법안인 하준이법, 민식이법이 통과될 때의 국회 모습이 생각난다. 아이를 잃은 엄마들이 국회의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정치 싸움에 골몰한 국회의원들은 그런 엄마들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다행히 두 법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같은 어린이 교통안전 법률안인 태호·유찬이법 등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어떤 의원은 국가기관의 재정 부담이 높다고도 했고, “법 이거 하나 더 만든다고 사고가 안 생기냐”고도 했다고 한다.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하는 나라에서 어린이가 한 해 교통사고로 150명 죽어가는데도 이렇다. 

며칠 전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기업의 고위직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원청의 책임을 높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기업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한 기업의 임원은 기업의 부담을 말하면서 “산재 발생으로 사업장에 내려진 작업중지 명령을 해제해달라고 신청하면 이를 심의할 위원회가 열리는 데 4일이나 걸릴 수 있다”며 개선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긴급한 작업에 대해서는 안전보건평가를 생략하는 등 승인 절차를 간소화해 최단 시간에 승인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는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그 원인을 제거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하는 게 우선인데, 여전히 기업이나 정부나 기업의 이윤이 먼저다.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는’ 노동건강연대의 활동가가 스웨덴 사람을 만나 물었다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일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자 그 스웨덴 사람이 “사람이 일하다 왜 죽나요?” 하고 반문했고, 이에 활동가는 충격을 받았단다. 인권운동가 류은숙씨가 최근 펴낸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게 정상인데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제대국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고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왜 사람의 죽음에는 이리도 무감한가. 지난해 경향신문이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제목으로 우리 산업재해를 고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김용균특별조사위에서 안전대책을 권고하면서 안전분야 노동자의 직접고용을 권고했지만 이것도 거부되었다. 민간기업이 아닌 공사에서도 이러니 민간기업이 알아서 산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리 만무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은 국회에 계류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고 주장했다. 기업이 알아서 산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므로 강력한 처벌을 통해서라도 강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생명안전시민넷은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되도록 노력한다. 재난참사를 당한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내용이 중심이다. 힘이 센 국가나 정부기관, 기업에 무릎 꿇고 호소한다고 해서 안전해지지 않는다. 피해자가 힘을 가질 때야 안전대책 요구가 정책과 제도로 반영될 것이다. 그래서 “평등해야 안전하다”는 말은 진리다. 

2020년은 생명안전의 원년이 될 수 있을까? 이윤보다 생명, 안전의 가치가 우선되는 그런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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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는 아베 일본 총리의 사과 메시지와 더불어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약 100억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의 밀실협상이 낳은 이 합의를 할머니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가해자의 법적 책임 인정을 전제로 하지 않은 사과나 위로금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주전장' 포스터. 사진제공 시네마달

영화 <주전장>의 부제는 ‘위안부 문제의 주 전쟁터’이며, 이는 미국을 의미한다. 2018년 초 주미 일본 대사로 부임한 스기야마 신스케는 자신의 우선과제가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도시들을 찾아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 즉 기림비 철거를 위한 로비라고 공언했다. 또 2019년 새로 부임한 LA 일본 총영사는 글렌데일 시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글렌데일 소녀상 철거라고 말했다고 글렌데일 시의원이 전했다. 일본 정부가 이토록 철거에 안달하는 이유는 미국 내 시정부의 승인을 거쳐 세워진 이 기림비들이 가진 공공성과 그로 인해 이 이슈에 부여된 당위성 때문이다.

2007년 미 연방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이 통과된 후, 미 전역에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주도해 온 미주 한인동포단체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공공부지’를 고집해 왔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홀로코스트처럼 당연한 세계 인권 문제로 자리하게 만드는 그 공공성이야말로 책임회피와 역사왜곡으로 일관하는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공부지에 세워진 기림비 및 소녀상들은 시의 자산이 되어, 글렌데일처럼, 시가 나서서 지키고 옹호하는 인권의 상징물로 승화된다. 이에 반해 사유지에 세워진 기림비나 소녀상들은 일본 정부의 철거 요구나 반대 로비도 없는데 쓸쓸히 잊혀져 가고 있다.

가끔 “소녀상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소녀상을 세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 반드시 주류 커뮤니티와 연대해서 공공부지에 세워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런데 최근 미국 휴스턴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한다. 부부 작가뿐 아니라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 온 단체의 대표도 참석했다고 한다. 소녀상을 식당에 세울 수밖에 없는 100가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와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인 이 마당에, 한국식당에 소녀상이 웬말인가? 한국식당도 좋고, 설명문이 철거된 채 장식품이 되어 서 있는 독일 사설공원도 좋으니, 무조건 세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 

미국에는 일본의 로비에 밀려 공공부지 건립에 실패하고 사유지로 가거나, 아예 창고에 갇혀 있는 소녀상이 여러 기에 이른다. 현지 커뮤니티를 조직해 시 정부를 움직이는 어려운 길 대신 쉽게, 빨리,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려는 욕심을 부리다 자꾸 일본 정부에 승리를 안겨주는 이 현상 뒤에 한국의 대표 운동단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2020년은 히로히토 전 일왕에게 전범 유죄판결이 내려진 도쿄 성노예 전범재판 20주년, 여성·평화·안보를 위한 유엔 1325 결의안 20주년이다. 지난 30년간 할머니들이 앞장선 지난한 투쟁으로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인들에게 인류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인식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일부 지자체와 운동단체들의 성과주의에 매몰된 무분별한 해외 소녀상 세우기는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강한 가해국의 역사왜곡 시도에 맞서 역사적 진실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현정 | 미국 위안부행동 ‘CAR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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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현장에 답이 있다.’ 자주 쓰이는 말이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이하는 중에, 불가피하게 일종의 연말결산 같은 몇 군데의 공적 회의에 참가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든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네댓 번 들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어디인가?

우선 문자 그대로 ‘물리적 현장’이 있다.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현장 말이다. 공연장이라면 무대의 음향이나 조명 시설에서부터 관람객의 동선에 따른 주차장이나 객석 의자를 점검할 수 있다. 스포츠의 경우에는 운동장이나 훈련장의 시설들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위 패턴을 분석할 수 있다. 이로써 노후 장비를 보수하거나 교체하고 이용자들의 불편 사항을 개선할 수 있으며 더 적극적으로는 첨단 시설이나 장비를 확충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봐서 이러한 물리적 환경에 있어 한국의 스포츠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 엘리트 선수들이 올림픽 등 세계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진천선수촌의 훈련 시설 및 숙소나 식당 등 비훈련 시설은 국제적인 수준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 지자체가 운영하고 있는 스포츠 시설 역시 당장 전국 대회를 치러도 될 만큼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포츠 현장’은 문제가 없는가.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란 물리적 환경만이 아니라 ‘관계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 ‘현장’과 연관된 사람들이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점이 중요하다. 조건이란 제도적이고 법률적인 계약 및 고용뿐만 아니라 해당 업무의 권한과 책임까지를 두루 망라한다. 이른바 스포츠 ‘현장’에서 이 부분은 여전히 취약하고 불안하다. 최고 수준의 엘리트 영역에서 학교 체육과 생활 체육에 이르기까지, 그 ‘현장’의 지도자들은 여타의 사회 고용 관계에 비춰볼 때 비합리적인 계약과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놓여 있다. 대체 불가능한 ‘전문직’임에도 말이다. 이 불안정성에 의하여 ‘관계의 현장’에서 종종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대개의 지도자들은 당장의 경기 결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본인은 물론 선수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무한 책임을 진다. ‘아버지’ 역할 내지는 ‘형님 리더십’을 요구받는다. 대개의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희생까지 감수한다. 취약한 여건에서, 이는 의연한 선택이며 아름다운 희생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수준과 사회적 성숙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 그 자체의 국제적인 성취에 비춰볼 때 지도자가 무한 책임을 지는 ‘관계의 현장’은 개선되어야 한다. 

이런 ‘현장’에서는 일부 지도자의 ‘형님 리더십’이 자칫 과도하게 발현될 수 있다. 권한 밖의 행위를 하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고약한 범법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취약한 ‘관계의 현장’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니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할 때, 당연하게도 그 ‘답’은 물리적인 시설이 아니라 지도자와 선수들의 생존 조건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식의 현장’이 있다. 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현장’은 달리 없다. 그 분야에서 주력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집합적인 인식’이 그 분야의 문화와 행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인식을 집합적으로 공유했기 때문에 자칫 이 ‘인식의 현장’은 하나의 견고한 흐름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요구를 배척하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 그러니 이 ‘인식의 현장’의 긍정적인 면을 유지하되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의 인식과 새로운 문화를 과감히 접목하여 개선해 가야 한다.

대한민국 스포츠 정책의 총괄적인 집행자이자 책임자로 최윤희 문체부 제2차관이 임명되었다. 최 차관은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현장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소감을 피력한 바 있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본 것이다. 문체부 제2차관은 엘리트 체육 육성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건강한 삶과 문화를 책임지는 자리다. 따라서 이 ‘현장’은 물리적 공간이나 특정 직업군이 아니라 국민 생활 전체와 넓은 의미의 스포츠 관계자 모두를 위한 더 복합적이며 미래적인 ‘현장’이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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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선거연령 하향 소식을 듣고,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가며 참정권 운동을 해온 청소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삭발을 하고 집회를 하고 성명서를 내며 싸워온 청소년들을 몇 년 동안 인터뷰하며 그 절박함을 가까이서 느꼈던 터다.

한 청소년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좋긴 한데, 걱정이에요.” 기사를 보고 뛸 듯이 기뻐 반 친구들에게 말을 꺼냈더니 “아, 그러냐” 하고 남의 일인 듯 시큰둥하더란다. 21대 총선 얘기에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벌써 끝났냐”고 되물어 당황했다고. 총선이 누굴 뽑는 선거인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건 “수능 준비하기도 바쁜데 또 무슨 필수과목 넣는 거 아냐?” 하는 냉소였단다.

이 얘기가 그리 놀랍지 않았던 건 그간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소수의 청소년 너머에 있는, 다수의 무관심한 청소년들에 대해 익히 들어와서다. 2016년 촛불집회 당시,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들을 보고 사람들은 ‘민주시민이 탄생했다’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광장의 중심에 있던 그들을 인터뷰해보니, 교실에는 이 어마어마한 일에도 별 관심 없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사회 이슈를 꺼내면 “공부하기도 바쁜데 언제 뉴스 보냐”고 한단다. 그들은 진작부터 이런 다수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시민임을 자각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현실적인 시민교육을 해야 한다고 피력해왔다. 

진보교육감 3기를 지나며 민주시민교육이 강조되었지만 양적 팽창만큼 질적으로 성장하진 못했다. 여전히 교육현장에선 시민교육을 사회과 영역으로 여기는 데다, 방법을 몰라 헤매는 곳도 많다. 교육과정으로 시민을 기른다는 발상 자체가 구태의연하다. 사실은 모든 교과가 인성교육이며 시민교육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민들레’에 기고한 고등학생은 ‘교문 밖에서 스스로 민주시민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주말과 방과후 시간을 쪼개 다양한 동아리와 단체 활동을 하며 세상에 눈을 떴다고. 학교 안의 학생자치, 시민교육은 생기부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반가운 소식이지만, 선거연령 하향 이후 해결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교실을 정치판으로 만들 셈이냐”라는 보수진영의 비난에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한, 우리 삶에 한순간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학교는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삶의 변화를 꾀하며, 자신과 이웃의 안녕을 살피는 시민을 기르는 정치판이 되어야 한다.

다수의 청소년들이 정치에서 멀어진 건 그들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왜곡되고 차단된 정보 속에, 경험이 없어서다. 세뱃돈을 모으고 중고장터에 물건을 내다 팔아 단체 활동비를 마련하는 청소년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내 문제니까요. 평생 헬조선에서 살긴 싫거든요.” 53만명에 이르는 만 18세 유권자의 선거교육은 정치를 ‘나의 문제’로 여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민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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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자년 쥐의 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쥐의 해 경자년(庚子年)이 되려면 아직 20일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는 육십갑자의 기준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기 때문이다. 오는 25일, 즉 설날이 경자년의 시작점이다. 지금은 여전히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다.

또 이맘때면 “구랍 31일 충북 진천 버스터미널에서 발견된 폭발물 모조품은…” 따위처럼 ‘구랍(舊臘)’이라는 말을 쏟아내는데, 이 역시 아직은 쓸 수 없다. ‘구랍’이란 “지난해의 섣달”, 즉 음력 1월에 전년의 음력 12월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구랍’ 역시 오는 25일부터 쓸 수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써 왔다.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께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양력을 쓰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음력을 버렸다. 이후 서구 열강에 굴종적 태도를 보이며 힘을 기른 일본은 마치 분풀이하듯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해 강압적 태도를 취했다. 그 피해국 중 하나가 우리나라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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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됐다.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된 지 15년 만의 진일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맛이 찝찝할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채 선거제도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최대 쟁점에 묻혀 덤처럼 통과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통과됐으면 그만일까? 그러기엔 이 의제의 잠재력이 아깝다.

치열한 논쟁의 주제는 사실상 딱 하나였다. ‘만 18세는 선거권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한가?’ 선거에 참여하려면 정치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주제다.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쪽이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접점 없는 논쟁은 공회전만 반복했다.

그런데 만 19세를 넘어가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지는가? 이 질문이 먼저 던져져야 했다. 토요일 저녁 서초동에 선 40세 ㄱ씨는 같은 시간 광화문에 선 60세 ㄴ씨를 정치적으로 성숙하다고 인정할까? 그 반대의 경우는? 같은 시간 어디에도 서기를 거부한 30세 ㄷ씨는 그들 모두의 정치적 성숙함을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서로의 정치적 미성숙함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만 18세 선거권 이슈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만 18세는 미성숙하므로 선거권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풍경이라니, 우습고 미심쩍다.

‘실제로’ 성숙한지를 검증하려 들면 공회전하거나 삐걱댈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평가도 어려울뿐더러, 옳지도 않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나이라는 기준만 만족하면 누구든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보통·평등선거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 원칙이 중요하다는 말을 다시 하기엔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렇게 짧지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선거권에 기준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성숙해지는 나이가 아니라 ‘제도적 관점’에서 성숙해졌다고 간주할 수 있는 나이일 터다. 제도적으로 고안된 어떤 생애주기를 통과하면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의무교육 과정은 그 기준이 될 만하다. 의무교육은 국가가 의무적으로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다. 교육에 관한 국가의 책임을 규정한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을 이념으로 한다. 그렇다면 의무교육 과정을 통과하는 순간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췄다고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020년의 민주공화국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통상적으로 의무교육 과정으로서 중학교를 마쳤다고 간주되는 만 16세까지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제도교육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과정에 그쳐왔고,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만 18세든 만 19세든, 아니면 그 이상 나이 먹은 사람들이든, 제도의 관점으로 볼 때는 민주시민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건 똑같다. 우리 사회는 시민교육조차 ‘사교육’ 또는 ‘각자도생’에 맡겨왔다.

이번 선거연령 하향으로 고등학생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교육부를 필두로 일부 지자체 교육청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참정권 교육을 강화할 것이라는 입장들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고민을 확인했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순서가 틀렸다. 만 18세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니 그에 맞춰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사후대책이 아니라, 의무교육 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을 확대 편성함으로써 선거권을 더 하향시키겠다는 포부가 필요하다. 

시민·유권자로서 알아야 할 필수적인 교양들을 커리큘럼으로 갖춘 시민교육 과정이 강화되고, 그 과정의 이수 시기가 선거연령의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 유권자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도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까지 고민한다면 금상첨화다. ‘이쯤에서 한 살만 낮춰주자’는 정치적 타협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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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에 보고 듣고 읽은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치국은 나라를 다스린다고만 굳건히 알았는데 나라를 치유한다고 새길 수도 있다(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 노자에서 지극히 좋은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의 ‘상선,약수’를 ‘상,선약수’로 끊어 읽으면 상투적인 말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런 뜻밖의 뜻을 얻을 수도 있다. 윗대가리가 물처럼 잘해야 한다. 덕불고필유린.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풀이가 아주 강고하다. 이 또한 조금 비틀어보면, 덕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더불어 함께하는 덕목이 있다(<이탁오의 논어평>). 마치 불행이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오는 것처럼.

경자년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올해는 또 무슨 생각이 찾아올까. 강가에 한해살이풀처럼 서서 흘러가는 것을 거저 바라보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득 번개 같은 꾀가 떠올랐다. 한해를 연초에 열고 연말에 닫는 학교로 삼기로 했다.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이 좀 분명해지는 듯했다. 간지를 따라서 교명은 경자학교로 명명했다. 올해 크게 할 일도 역시 산을 찾는 것. 가서 나무와 그 너머를 자꾸 짚어보는 일에 매달리기로 했다. 교가도 정했다. 백마야 울지마라.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빼놓지 않고 본 <가요무대>에서 송해 선생이 참 찰지게 부른 노래다. 곡조는 물론 가사가 올해의 나이와 지금의 심사를 잘 대변해주었다.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 거치른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 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 또다시 고향 생각 엉키는구나/ 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올해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인왕산에 오른다. 내가 나무를 찾아 산으로 드나든 건 인왕산이 시초였다. 말하자면 여기는 내 나무 문명의 발상지다. 인왕산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정작 인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찔러왔었다. 산의 나무들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귀를 닫고 있다는 낭패감이었다. 저 산꼭대기의 나무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인왕산 넘어 첩첩산중으로, 나무들 너머의 곡절을 찾아서 경자학교의 대문을 성큼 출발한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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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한때 국내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동차 브랜드의 새 광고를 보았다. 시리즈의 제목은 ‘2020 성공에 관하여’. 동창회에서 승진을 자랑하고, 어린 아들과 고향 어머니 앞에서 호기를 부리며, 동료 앞에서 당당하게 퇴사하고, 여전한 젊음을 과시하는 내용이다. 대놓고 속물적인 광고였지만, 제법 마음이 흔들렸다.

가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저렴한 차는 아니지만, 좀 무리하면 장만할 수 있다. 드디어 성공을 손에 쥘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동네에 자가용 가진 이를 손꼽던 시절의 추억과 도로를 가득 메운 고급 차의 행렬이라는 현실 사이의 파열에서 오는 착시다. 그러니 대단한 성공이라며 으스대긴 멋쩍다. 하긴 고급 세단을 모는 공무원을 단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장관이나 회장 정도 되어야 타던 차다. 그러나 슈퍼카도 심심찮게 보는 요즘이다. 선망의 눈길을 던질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차였는데, 고생 끝에 이제 나도…’라며 눈물을 잠깐 글썽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도 광고에 마음이 동했다. 그렇게 얻고 싶었던 성공을 ‘예상보다 싼값’에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하지 못한 나로서는 마음이 자못 애틋했다.

각 광고는 듀스의 노래를 듣던 1993년의 10대, 퇴사하는 박차장을 바라보는 동료들, 친구의 승진 소식을 확인하는 동창, 부단한 관리로 총각 소리를 듣는 중년 남성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한 성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광고 영상 캡처

조선 시대, 가마는 지체 높은 자만 탈 수 있었다. 특히 쌍가마는 주로 2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게만 허락되었다. 말 두 마리를 쓰는 가마다. 하지만 금지는 더 간절한 욕망을 불렀다. 조선 후기가 되자 국법을 어기고 쌍가마를 타겠다는 사람이 넘쳐났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이렇게 썼다. “쌍마교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자가 출생하면 쌍마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은 써야 하겠지만 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럴 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부녀자가 꼭 소원한다면 마땅히 남의 쌍마교를 빌려 한 역참만 가서 치우면 될 것이다. 하루만 타더라도 태어날 때의 축원을 이룬 셈이니.”

우리 선조도 그러했으니 광고를 보고 가슴 한편이 저릿하다며 자책할 것은 없다. 평생 가마 한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를 누가 함부로 ‘속물’이라며 욕할 수 있을까. 아무리 변변찮은 살림이라도 가마 타고 시집가고 말 타고 장가가던 오랜 풍습이다. 이도저도 못했다면 죽어서 상여라도 탔다. 물론 상여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조상이 부지기수였겠지만, 간절한 소망마저 비웃을 수는 없다. 단선적 상향 욕망의 맹목적 단단함은 팍팍한 삶의 고통 속에서 응결된 것이다.

반상이 철폐되었다. 이제 말 백 필이 끄는 가마도 안될 것이 없다. 단,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계급이 사라진 세상은 역설적으로 박탈감을 부추겼다. 모두가 상향 욕망에 삶 전체를 내맡기며 전력 질주했다. 공식적 계급의 진공 속에 새로운 상징이 대신 들어섰다. 빙글빙글 회전의자 앉으면 ‘사장님’이고, 대출이라도 받아 강남에 등기 치면 상류층이다. 돈으로 족보도 사고, 벼슬도 사고, 몰래몰래 쌍가마도 타던 조상의 후손이다. 이제 맘 놓고 실컷 하라는데, 못하는 놈만 바보다.

하지만 갑오경장 후 벌써 126년이 지났다. 중층 사회에서 진화한 상향 본능이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때가 지난 상징은 결국 힘을 잃는다. 국법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조선 후기의 가마 열풍은 개화와 더불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쌍가마를 소원하는 이가 없듯이 고급 차와 강남 아파트라는 낡은 상징도 조만간 위세가 떨어질 것이다. 

사실 ‘2020 성공에 관하여’는 철지난 성공에 관한 이야기다. 유통기한이 다한 상징을 마지막으로 써먹은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하나의 성공을 향해 전국민 레이스를 펼치던 단선 상향의 시대가 지났다. 2020년 한국인의 성공 기준은 더 다양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래도 영 아쉽다면 다산의 조언대로 하루만 빌려 타는 것은 어떨지.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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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이 6일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김수현 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 김문홍 전 목포해양경찰서장 등 당시 해경 최고위 간부 6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청장 등은 참사 당시 승객 퇴선유도지휘 등 구조에 필요한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303명(구조작업 전 익사자 1명 제외)을 숨지게 하고 142명에게 상해를 입힌 혐의를 받는다. 정상 작동되지 않은 구조·수색에 대한 해경 수뇌부의 법적 책임을 참사 발생 5년9개월 만에 물은 것이다. 

검찰 재수사로 드러나고 있는 해경의 부실 구조·수색 실상은 믿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해경은 참사 당일 항공구조 및 수색을 통제할 항공수색조정관(ACO)을 지정하지 않았다. 항공 컨트롤타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헬기로 20~30분이면 이동해 치료받을 수 있었던 단원고 학생 임경빈군이 4시간여 방치된 끝에 숨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ACO 역할을 대신한 해경 초계기는 구조·수색 대신 헬기 고도조정 등 임무와 해경청장 의전에 집중했다고 한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해경 수뇌들 역시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김 전 서장과 김 전 서해청장은 참사 발생 한 시간여가 지나도록 구체적인 구조·수색 지시를 하지 않았다. 김 전 서해청장은 특히 구조대원들을 태우고 출동하던 헬기를 되돌려 본인이 타고 가려 했다. 1분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제정신이었는지 묻게 된다. 김 전 해경청장은 이런 문제들을 짚어내고, 상황 정리와 탈출 안내 등을 지시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 내용만 보면, “해경은 구조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는 유족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다. 해경은 또 하지도 않은 퇴선명령(침몰 전)을 했다고 기자회견을 했고, 선체 진입이 가능했는데도 불가능했다고 관련 문건을 조작까지 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아픈 기억의 치유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이 이뤄질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구조·수색의 난맥상은 물론 ‘박근혜 청와대’의 감사원 감사 축소 의혹 등 새롭게 제기되는 내용까지 ‘더 이상 규명이 필요 없을 때’까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검찰은 수사단 출범 때 “백서를 쓴다는 각오로 수사하겠다”고 했다. 검찰은 이 다짐만큼은 꼭 지키기 바란다. 그나마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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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제 경기 김포시의 한 아파트에서 남편과 별거하던 30대 여성과 60대 어머니, 8세 아들 등 일가족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제적 어려움과 신병 비관을 토로하는 유서가 발견됐고, 범죄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경찰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두가 새 희망을 얘기하는 새해 첫 휴일, 사회 한쪽에서는 생활고로 한 가족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는 대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40대 부모와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 등 일가족 4명이 집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11월 초에도 서울 성북구의 다세대주택에서 빚 독촉 등에 시달리던 70대 노모와 40대 딸 3명 등 일가족 4명이, 앞서 10월엔 제주의 40대 부부가 사업 실패를 비관해 12세, 8세 두 자녀와 함께 세상을 등졌다. 어린이날 2살, 4살 아이들을 끌어안고 숨진 30대 부부를 비롯해 지난해 생활고로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알려진 것만 20여건이다. 

이처럼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은 복지 사각이 여전히 넓고 사회안전망은 성기고 부실한 탓이 크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당시 이들은 가스·전기요금을 꼬박꼬박 납부한 터라 체납 내역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구를 찾는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남에게 어려움을 말하지 못하는 ‘성실하고 소극적인 위기 가족들’은 법으로 정한 복지 테두리 밖에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기 가정, 위기가 예상되는 가정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더욱 적극적인 지원과 복지 대책이 필요하다. 

좀 더 큰 틀의 분석과 대책도 필요하다. 한국은 국민소득 3만달러,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강국이다. 훨씬 어려웠을 때에도 이 같은 비극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빈곤 자체만을 이유로 꼽을 수 없다. 빈부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부의 재분배 실패,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등이 이들의 막다른 선택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외 학자들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경제적 소외계층이 늘어나면 자살도 함께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생활고로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상황에서 손을 잡아줄 공동체 구축과,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며 자식을 해치는 것은 큰 범죄라는 인식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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