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겨울이 몹시 추웠다. 빨간 내복 위에 털실로 짠 바지를 껴입고 눈 쌓인 골목을 휩쓸고 다니다 보면 바지 밑단에 얼음이 엉겨 붙어 뻣뻣해졌다. 그때 골목길은 대개 흙바닥이라서 겨우내 꽝꽝 얼어붙었다가 날이 좀 풀린다 싶으면 쌓여 있던 눈과 함께 녹아 곤죽이 되곤 했다.

이제 집 밖으로 나서면 시멘트 바닥에 아스팔트가 짱짱하게 깔려 있어 실감하지 못하지만, 땅도 겨울에는 강물처럼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리밭은 이른 봄이면 겨우내 들뜬 겉흙을 눌러주고, 보리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보리밟기를 한다. 밟아줘야 잘 자라며, 웃자라지 않도록 제때 밟아야 하는 것은 보리의 생장이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번 청년은 얼마 전 꽤 좋은 학원 강사 자리를 얻었다며 좋아했다. 전에 다닌 학원보다 시급이 높은데, 수업을 하루에 한 시간밖에 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다행히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그는 특강 하나를 더 맡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이 늘면 시급이 깎여요. 한 시간 이상 수업을 하면 5000원을 적게 받아요.”

나는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계산법일까. 그 계산법대로라면 청년은 열심히 일할수록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특강을 시작하면서 특강 전 수업까지 깎인 시급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는 첫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날 밤, 자신이 받은 급여가 어떻게 계산된 건지 한참 동안 계산기를 두드려봤다며 그걸 따져 물어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껏 접한 어른이라고 해야 부모님이거나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어른 앞에 서면 자꾸 작아진다면서 웃었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나선 어둠길은 얼어붙은 듯 냉랭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며 내내 중얼댔다. 어른들은 왜 이러는 걸까?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일할수록 불행해진다는 걸 깨우쳐주려고? 웃자라는 것을 걱정해서? 밟아줘야 잘 자라는 것은 보리뿐이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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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대학의 위기가 전 방위적으로 가속화되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이 남긴 후유증은 결국 ‘대학의 종말’이라 할 만한 단계로까지 진행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들이 국공립, 사립, 수도권, 지방 할 것 없이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학 등록금은 동결되었고 인구절벽으로 2021년부터 대학 입학자원 역시 25%가 모자란다는 현실도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계 대학들은 당장 다음 달 교직원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학의 기초학문인 교양교육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실용 학문에 가려 정체성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대학들은 학술성이나 보편성이 없는 교과목들, 일회성 프로그램, 심지어 정부 각 부서가 요구하는 혼전순결교육, 통일교육 등이 교양교육과정을 잠식해 왔다. 학생들 역시 교양과목은 쉽게 학점을 따는 수업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에서 교양이란 용어가 “착하게 살자”는 식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교육부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지 뒤늦게나마 처방전을 내놓았다. 교육부는 훼손된 교양교육의 재정립 카드로 교양기초교육의 정상화를 꺼내 들었다. 대학의 각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교육당국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고등교육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말 발표된 교육당국의 제3주기 대학기본역량 진단 편람은 교양교육과정의 정의를 명료하게 설정하고 특히 기초학문 능력 제고를 위한 교양교육 체계와 운영여부를 진단요소로 채택하였다. 비록 이 내용들이 최종본은 아니지만 편람에 수록된 것만으로도 현장 대학에서는 큰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양교육은 고등교육에서 전공과 양대 축으로 성장해 왔다. 원래부터 대학의 학부교육은 교양교육과 기초학문교육, 즉 교양기초교육으로 구성되었다. 교양기초교육은 대학교육 전반에 요구되는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 즉 전통적인 자유학예(liberal arts)를 바탕으로 올바른 세계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글쓰기와 양적 추론을 비롯한 리터러시 능력 연마를 필수로 하고, 인문·사회·자연·예술에 기반을 둔 기초학문 교과목 배분이수와,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영역의 교과목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2016년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제정한 ‘대학 교양기초교육의 표준 모델’ 역시 이러한 배경을 가진다.

지금까지 대학에서는 실용과 전공과목 등에 밀려 교양교육은 늘 뒷전으로 밀려난 채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교양교육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뒤늦게나마 교육계 안팎에서 제기되는 건 다행이다.

이런 점에서 교양교육 관련 학회, 기관들의 책임과 역할도 어느 해보다 무거워졌다. 올해부터는 교양교육이 제 모습을 되찾아 고등교육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아탑 풍경을 그려 본다.

<박일우 | 한국교양교육학회장·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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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의 잔인한 그날이 정신없이 지나고 다음날 보고가 왔다. 계열사 직원의 아이가 그 배에 탔다는 소식이었다. 무작정 진도에 내려갔다. 눈에 띄는 게 조심스러워서 작은 차를 하나 구해 타고 조용히 실종자 가족이 머무는 체육관 근처에 가서 전화를 했다.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 292번째로 아이는 두 달 만에 부모에게 돌아왔다. 그 잔인했던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상처 받은 유가족을 향해 비난하거나 비아냥을 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가끔씩 그 아빠인 직원도 TV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소속 계열사 대표를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아빠가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 하도록 내버려두라” 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 연말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계열사 말단 직원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에 무작정 차를 몰고 가서 두 번 만난 얘기며, 많은 이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이야기는 재벌 총수의 자기자랑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러고 싶었다면 5년 만에 사연을 조심스레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그 직원은 동지라고 팥죽을 선물로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에도 억울한 죽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용균씨처럼 일터에서 일하다 죽고, 성북구 네 모녀처럼 살아보려 발버둥쳤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죽음은 공평하지 않아서 주로 힘없고, 돈 없고 말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박 회장과 많이 달랐다. 잠시 슬퍼하다가 금세 잊거나 모른 척, 아닌 척, 매몰차게 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11월29일 한국마사회 부산경마공원 소속 기수 문중원씨(당시 40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마사회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겼다. 문씨는 자비로 해외 유학을 다녀와 조교사 면허를 취득했지만 업무를 맡지 못했다. 빽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산경마공원에서는 2004년 개장 이후 기수와 마필관리사 등 7명이 부조리한 구조와 저임금·장시간 노동, 인권유린 등의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마사회는 기수·조교사 면허의 교부와 갱신 권한이 있는 최고의 기관이지만 유족이나 기수들이 만족할 만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씨 아버지는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길거리에 주저앉았지만 유족과 김낙순 마사회장의 만남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7월3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신월 빗물펌프장 배수터널에서 하청업체 직원과 이주노동자, 그리고 이들을 살리러 터널에 들어갔던 현대건설 직원 안모씨가 빗물에 휩쓸려 사망했다.  양천구청과 서울시는 호우주의보에도 작업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사고 수습 후 이주노동자의 분향소는 처음엔 차려지지도 않았다.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흘렀지만 국가는 유족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 내용도 볼 수 없었다.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자인지 묻기 위해 안씨 아버지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 같은 죽음의 레이스에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오늘은 안녕할까. 영화 &lt;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gt;는 성실한 사람들의 현실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주인공 리키는 택배노동자로, 부인은 방문요양사로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한다. 그토록 일하는 이유는 내집을 장만하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 잘해 대학에 다니는 꿈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일할수록 빚은 늘어가고 가정은 위기에 처한다. 강도를 당해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거리에 나앉지 않고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 리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새벽에 다시 택배 트럭에 시동을 걸어야 했다.

영화는 현실같고 현실은 지옥같다. 집값은 쉬지 않고 올라 평당 1억원 시대가 됐고, 일자리 규모가 쪼그라들고 질은 떨어지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은 곳곳에 허점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보다는 현실에서 문제 해결 가능성이 높다. 리키는 홀로 삶의 전쟁에 나서지만, 유족들은 시민사회와 뭉쳐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혁신과 포용, 공정과 평화를 바탕으로 ‘함께 잘사는 나라’로 나가자고 했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라도 주저앉은 아버지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I’ll be by your side.

<박재현 사회에디터 겸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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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는 <쇼생크 탈출>과 더불어 TV에서 틀어줄 때마다 보는 영화다.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를 발견하면 하려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보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본 횟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 번은 넘을 것이다. 

선도부 소속으로,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일진인 이종혁 패거리는 학교를 쏘다니면서 일반 학생들을 괴롭힌다. 그 폭력에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인, 그래서 싸움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권상우는 이들에 맞서려고 기회를 엿본다. 이종혁 패거리가 자기네 반에서 행패를 부릴 때, 권상우는 그쪽을 향해 빈 도시락통을 집어 던진다.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중간부터 봐도 괜찮은 이유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옥상 싸움 장면이 맨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이다. 권상우가 쌍절곤과 태권도로 패거리를 제압할 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건 나만은 아니어서, 네이버 한줄평에는 다음과 같은 소감이 올라와 있다. “보고 또 봐도 재밌어요.” “야아, 질리지가 않네.” “어떻게 100번을 봐도 재밌냐.”

아내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보듯, <말죽거리 잔혹사>는 남성들의 영화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를 주름잡는 일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분을 삭인 기억이 다들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 권상우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상당 기간 맹훈련을 했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들과 대적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 채, 어서 졸업해 저들과 헤어지기만을 바랐다. 일진에게 맞는 학생을 보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부채의식이 이종혁 패거리를 일망타진하는 권상우에게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1978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지금 세대의 남성들에게도 먹히는 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지금도 학교폭력이 남아 있고, 이게 남학교에서 더 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건 매우 건전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그때의 스트레스를 푸는 남성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작년 말 모 동사무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자. 한 공무원이 그곳에서 일하는 공익요원과 갈등을 빚었다. 공무원은 인터넷에 이 얘기를 올리면서 공익 때문에 힘들다고 푸념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 글을 공익이 봤다. 잘못이야 둘 모두에게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둘이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누리꾼이 여기 참전하면서 이들의 갈등은 일대 사건이 된다. 그들은 약자인 공익에게 갑질을 했다며 해당 공무원을 비난했고, 그 공무원을 자르라며 전화를 걸고 민원을 넣으며 해당 동사무소의 업무를 마비시켰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공무원은 사과문을 작성했지만, 누리꾼들의 분노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듯하다. 

얼핏 보면 부당한 갑질에 관한 분노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 공무원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중 한 분이 쓴, “감히 군대도 안 가는 여자가 공익을 부려 먹어요?”라는 글은 그들의 분노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군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남성들은 징집의 주체에게 불만을 표출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공익이 당했던 갑질보다 훨씬 더 큰,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자살에 대해, 복무기간에 최저시급도 못 받는 부당함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만만한 여성이 군대를 조금이라도 비하하는 경우 들불처럼 들고 일어난다. ‘월장’이라는 웹진에서 예비역의 행태를 비판했던 모 대학 여학생들은 사이버테러를 당한 것은 물론이고 신상 정보가 성인사이트에 공개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고, EBS 방송에서 “군대는 살인을 배우는 곳”이라고 한 여성 강사는 누리꾼의 성화에 못 이겨 퇴출당했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공무원은 그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럼으로써 누리꾼들은 과거 비겁했던 자신을 극복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약자에게만 발휘되는 선택적 분노는 그들을 더 허기지게 만드니까. 그들이 늘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이유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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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살리기 사업을 했다. 불과 6개월 만에 마스터플랜을 수립했고 5년도 지나지 않아서 사업을 완료했다. 강바닥을 팠고 보로 막았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강을 살린다고 한다. 맞다. 살려야 한다.

강을 죽인 사람들도, 강을 살리겠다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 강을 모른다. 강은 콘크리트가 아니다. 생물이다. 물도 살아있고 강바닥도 살아 움직인다. 손을 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강이, 강바닥의 모래가 마음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가들이, 학자들이, 강에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이, 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를 없애면 농사를 못 짓는다고 주장한다. 틀렸다. 4대강 준설 때문에 수위가 낮아져서 농사를 못 짓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모래를 강에서 파냈기 때문이다. 보만 열고 파헤쳐진 강바닥은 그냥 두겠다고 한다. 물속은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다고 한다. 두고 보자고 한다. 틀렸다. 강바닥은 강의 뼈다. 강의 기반이고 본체다. 4대강 사업은 강의 뼈를 꺾었다. 꺾인 뼈는 내버려둔 채 피부성형만으로 강이 살아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순차적으로 하자고 한다. 어떤 보는 그냥 두고 어떤 보는 철거하겠다고 한다. 틀렸다. 강의 반응은 연쇄적이다. 상류에서 하류, 본류에서 지류까지 모두 서로 영향을 미친다. 한 지점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의 수문을 열었더니 모래톱이 생겨나서 강이 살아났다고 한다. 아니다 모래톱은 새로 생긴 게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래가 물이 빠져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래는 4대강 이전의 원래 강바닥이 아니다. 포클레인이 파헤쳐 놓은 상처입은 강바닥이다. 살아난 게 아니라 이제야 눈에 보이게 드러난 강의 속살이다. 강의 상처다.

4대강을 살리기 위한 컨트롤타워가 있을 거라고 한다. 틀렸다. 없다.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단의 임무는 보 처리 대책에 한정되어 있다. 환경부는 강물을 관리하고 국토교통부는 강을 관리한다. 대통령 직속 국가물관리위원회는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4대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컨트롤타워도 없고 마스터플랜도 없다. 큰 그림이 없으니 5년 후, 10년 후 4대강이 어떤 모습일지 모른다.

어쩔 것인가? 아직도 문제가 뭔지 모른다. 4대강 사업이 만들어 놓은 상처가 무엇인지 모른다. 강 전체를 살려야 한다. 4대강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강을 살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보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강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살려야 한다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피만 닦아내자는 것이다.

살려야 한다. 생명이니 생명으로 취급해서 살려야 한다.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미국과 유럽에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강 전체다. 강의 본류와 지류, 물, 강바닥, 생물, 수질, 지하수는 하나다. 그들은 강을 생명으로 다룬다. 보를 없애고 물길을 돌리고 강바닥의 모래를 살려낸다. 그것으로 부족해 적응관리를 한다. 자연의 생명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다. 무지하다.

<김원 | 국가물관리위원회 위원·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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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립대학 등록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다.

‘2019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비회원국 9개국 포함, 46개국 대상 조사에서 2018학년도 한국 사립대학의 연평균 등록금(학부 기준)은 8760달러로, 4위였다. 그나마 2016학년도 3위, 이전엔 오랫동안 2위를 지키던 것에 비하면 다소 낮아진 것이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등록금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정부가 2009년 반값등록금 정책을 추진하며 오랫동안 꽁꽁 묶었는데도 여전히 높다. 지난달 실시된 등록금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90%가 넘는 응답자가 등록금이 “매우 부담” 또는 “약간 부담된다”고 했다. 대학생 36%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거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많은 돈을 들여 대학에 갈 필요성은 있는 걸까. 한국 대학교육의 평판이 객관적으론 그리 높은 것 같지 않다. 세계 100위권에 드는 한국 대학이 드물고, 노벨상 시상 때마다 해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이 발표하는 한국 대학교육 경쟁력은 2011년 59개국 중 39위에서 2017년 63개국 중 53위로 떨어졌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높은 것 같지 않은데도 한국 청년들은 일단 대학 졸업장을 따놓는다. 안 갈 경우 낙인찍히고 손해볼까 두려워서다. 2018년 국내 25~34세 청년의 고등교육(전문대 이상) 이수율은 69.6%로, OECD 평균(44.3%)보다 훨씬 높다. 줄곧 OECD 1위다.

7일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가 교육부에 ‘국가장학금Ⅱ 유형’ 참여 조건인 등록금 동결 또는 인하를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불가 방침으로 답했다. 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솔직해져야 한다. 학벌체제가 굳건해 대학 졸업장의 학교명이 결정된 이상, 학생도 교수도 굳이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부 또한 고등교육 투자도, 큰 그림도 없이 뒷짐지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식 학력 인플레가 대학원으로 옮겨붙을 조짐도 농후하다. 왜? 가성비가 뚜렷하니까. ‘2018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조사’에 따르면, 학사 초임은 227만여원, 석사 초임은 350만여원, 박사 초임은 561만여원이었다. 전체 사회를 위한 가성비는 어떨까.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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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사망한 지 100년이 된다. “우리는 그에 필적할 정도의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베버의 묘비명이다. 베버가 갖는 생명력의 원천은 정치·경제에서 종교·문화까지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에 있다. 베버 사후 베버에 맞설 수 있는, 박식함과 심오함을 모두 갖춘 사회사상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짧은 칼럼에서 베버의 학문적 성취를 모두 다루긴 어렵다. 오늘 내가 주목하려는 건 그가 남긴 정치적 통찰이다. 베버는 1917년 11월 뮌헨대학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 초청으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강연했다. 1919년 1월 다시 초청받았는데, 이때 맡은 강연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였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그동안 탐구해온 정치 현상의 사회학을 바탕으로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가의 덕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보였다. 사회학자 전성우는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함께 베버의 ‘학문적 유언장’ 같은 위상을 가진다고 평가한 바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담긴 학문적·실천적 의미는 여전히 각별하다. 그것을 나는 네 가지 시각에서 살펴보고 싶다. 첫째, 베버는 정치를 천직(天職)으로 부여받은 정치가를 ‘악마적 수단’을 가지고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악마적 수단이란 은유는 강제력을 위시해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포괄한다.

둘째, 이러한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윤리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다. 신념윤리가 선과 악의 구별에서 도덕적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한다면, 책임윤리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에 대해 무제한적 책임을 지는 태도를 뜻한다. 바람직한 정치가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다 갖춰야 한다. 정치가 결국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책임윤리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다.

셋째, 이렇게 이중적 윤리가 요구되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의 세 가지다. 베버에게 정치가의 역할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 데 있다. 이 정치적 대표성에 헌신하려는 태도가 열정이라면, 그 대표성에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가 책임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요청되는 게 균형감각이다. 균형감각은 사물과 사람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태도이자 주어진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다.

넷째,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이 특별히 강조되는 까닭은 정치가 국가의 운영을 떠맡는다는 점에 있다. 어느 나라든 국가의 운영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국정을 담당하는 일에는 무엇보다 현실적 성과가 중요하다. 베버에게 정치의 치명적인 두 가지 죄악은 ‘객관성의 결여’와 ‘무책임성’이다.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채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국가 정책을 추진할 경우 그 정책이 국민 다수에게 불행을 안겨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치 실패에 대한 베버의 통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것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독특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란 시민의 직접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국민투표제적 원리’에 기반하고 카리스마적 리더가 정치를 이끄는 ‘지도자 민주주의’다. 정치학자 최장집이 지적하듯, 베버의 민주주의론은 근대 대의민주주의론과는 다른 생소한 것이다. 베버가 이러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한 것에는 당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후발 국가였던 독일의 역사적 특수성이 반영돼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베버의 통찰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가 분석하듯, 포퓰리즘의 도전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한국적 차원에서는, 여러 여론조사가 증거하듯, 대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더없이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이 베버가 말한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활로 볼 수 있다면, 한국적 차원에서 직업 정치가들은 베버가 강조한 균형감각과 책임윤리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성과를 요청받고 있다. 베버의 통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베버의 저작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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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선배 교수님이 계시다. 어디에 발표하거나 게재하는 건 아니고 나를 포함해 가까운 직장 동료를 비롯한 지인에게만 회람하게 하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학생을 인솔하여 해외교육봉사 가서 겪은 에피소드 등 주로 학교 일과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각운이 딱딱 들어맞고 수미상관의 형식미가 철저했다. 공대 모범생이 교양국어 수업에서 작성한 과제물 느낌이랄까. 혹은 ‘오늘 날씨, 맑음’으로 시작하여 ‘참 재미있었다’로 맺는, 소년이 연필로 반듯하게 적어내린 방학일기 같다고 할까. 읽는 내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지만 나보다 한참 손위인 분께 “시가 귀엽습니다”라고 평할 용기는 나지 않아,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도로 예의 바르게 호응하곤 했다.

지난 늦겨울이었다. 카톡 알림음과 함께 또 긴 시구가 보여 휴대폰을 집어 들었더니 뜻밖에도 위독한 아버지 병문안을 다녀온 내용이었다. 학교 일이 아닌 소재는 처음인 데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손쉽게 위로를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답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이내 잊었는데, 여러 날 지나 교원 동정란에 그분 부친상 부고가 올라왔다. 시를 다시 찾아 읽으며 마음이 아릿했다. 빈소가 먼 곳이었으나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당시 봄방학 시기라 항공편이 전석 매진이었다. 그냥 학과사무실로 부의금을 전달해야 하나 하던 찰나, 김포행 취소석이 한 자리 뜨기에 얼른 구매했다. 돌아오는 항공권은 공항에서 대기하며 구하기로 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막상 빈소에 도착하니 ‘타학과 후배교수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게 조문 관례에 어긋나는 과잉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우물쭈물 방명록에 이름을 적다 영정 곁에 형제들과 나란히 서 계신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본 그분의 눈이 둥그레지더니 바로 다음 순간 초승달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활짝, 그야말로 활짝 웃으셨다.

나는 당황했다. 비록 상례에 무지했어도 빈소에서 웃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눈길을 피하며 애써 침통한 표정을 유지했다. 헌화하고 묵념한 후 상주와 인사하려고 고개를 드니 여전히 초승달 눈매로 싱긋싱긋 웃고 계셨다. 안 그래도 항공권이 구해지질 않아 제주 지인들은 거의 못 왔다 하셨다. “교수님도 안 오셔도 되는데…. 근데 와주니까 좋네요. 좋아요, 정말.”

순간 따뜻한 무언가 내면에서 뭉클 솟았다. 어떤 단어로도 오롯이 표현 안될 감정. 그리고 예감했다. 생을 통해 알아온 좋은 사람들을 저마다 사진 한 장으로 만들어 기억하라 한다면 그 선생님은 내게 상복 입은 채 이쪽을 보며 해사하게 웃는 지금 모습으로 간직될 것임을.

“저한테 교수님은 이 모습으로 기억될 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졸업을 앞둔 학생과 상담하는 중에. 그 친구가 말하기를, 상담 올 때 내가 항상 차를 끓여 주었단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편에서 전기포트 버튼을 탁 누르고서 차 상자를 들어 올리며 “레몬차 마실래, 도라지차 마실래?” 물었다고. 그 장면이 잊히지 않을 거라 했다. 한편 한 동료는 방문할 때마다 서랍에서 꺼내놓던 양과자들로 나를 기억할 거라 하셨다. 외할머니 장롱이나 이불 속처럼, 나누어 먹을 다디단 군것질 거리를 쟁여둔 이소영 선생의 책상서랍.

찻물 끓이고 서랍에서 과자 꺼낼 때 표정을 나는 모른다. 유체 이탈하여 스스로를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이들이 품었던 느낌이 내가 조문 가서 선배 교수님을 보며 가진 감정과 닮아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 생각을 하면 행복해진다. 올해엔 우리가 세상 안에서 서로 관계 맺으며 ‘지금 이 모습으로 저 사람을 일생 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많이 만났으면 한다. 그런 사소한 게 무슨 소망이냐 할 테지만, 그게 나의 새해 소망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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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가 시작되었다. 한국민주화 32년을 돌아보면 민주주의 정착이 얼마나 더디고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경제발전과 달리 지정된 방향타가 없는 혼돈과 갈등 속에서도 한국민주주의는 긍정적 방향으로 흘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큰 변화는 보수와 진보 모두 막다른 골목이라 새로운 변신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이라는 것 이외에 이렇다하게 내세울 것 없이 지역주의에 기반했던 소위 한국 보수는 밖으로는 세계화, 안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막장에 이르렀다.

진보세력 역시 독재투쟁 과정에서 반민주주의적 이론과 개념으로 무장되었다가 민주화 이행기에는 지역주의와 타협했다. 이후 한국 상황에 맞는 이렇다할 진보적 이념과 정책 개발보다는 정권 쟁취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지역주의가 형식적 진보라는 허울로 합리화되었다. ‘조국사태’는 진보의 일상이 보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제도적 변화 차원에서도 한국민주주의는 많은 불균형을 보여왔다. 각종 권력집단의 변화, 교육, 언론 등 기능적 영역의 변화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진행돼왔다. 최근의 공수처 법안과 선거법은 많은 문제를 안고 통과되었다.

얼핏 보면 이런 혼란과 갈등이 한국 정치의 후퇴처럼 보일지 모른다. 후퇴적 사고의 이면엔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기준에 비추어 갈 길이 멀다는 인식과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판단이 있을지 모른다. 초고속 경제개발의 경험을 감안한다면 이런 인식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혁명을 거치지 않은 민주주의의 정착은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영국의 경우 명예혁명 이후 여성투표권이 인정되기까지 거의 300년이 소요되었다. 한국의 경우 투쟁을 하지 않고 주어진 민주주의 제도가 많이 있다. 우리 헌법은 바로 이의 상징이다. 상징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권위주의가 오랫동안 공존해왔고 이는 이념적 민주주의와 생활적 권위주의라는 이중구조를 낳았다.

한국 사회는 지난 30여년간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해 많은 갈등과 혼돈을 감내해야 했다. 득표를 위한 단기적 경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역주의의 이용에서 보듯이 이중구조를 강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동시에 갑질문화에 대한 도전 등에서 잘 나타나듯 사회영역에서는 자발적인 민주화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제 정치권도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민주주의는 부조화와 불균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발전해왔다.

더구나 한국 사회의 이런 변화를 비춰줄 역사적 길잡이가 마땅치 않은 상황도 내부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탈식민지 국가 중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한국은 단순히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이뤄낸 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제3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사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과 갈등이 없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혼란과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혼란과 갈등을 무작정 반복할 수도 없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권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 형해화 단계에 들어 근본적 자기 변신과 변혁이 불가피하고 이에 따른 총체적 정치판의 개편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검찰 개혁이든, 선거법 개혁이든 모든 제도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너무 단기적·정략적 이익에 몰두하여 제도 숙명론에 빠지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과 비관론을 야기할 뿐이다. 새로 채택된 선거법은 권한이 집중된 대통령중심제를 그대로 두고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가의 몸부림이 아닌가 한다. 동시에 검찰 개혁은 정치권과 검찰, 경찰 모두를 신뢰하지 못하는 제도 불신 속에서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런 모순과 갈등 속에 제도가 의식을 끌어주고 의식이 다시 제도를 바꾸는 동적 변화 과정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제 곳곳에 만연한 부조화와 불균형을 다시 점검하고 이를 반영한 신보수, 신진보를 창출할 때다. ‘골수 지역주의’ ‘유사 지역주의’ 속에서 가식적으로 서로를 반대했던 정치그룹들이 재편되어야 한다. 새롭게 재편된 보수와 진보가 당면한 한국 사회의 경제, 사회 및 국제적 도전을 위한 문제를 제기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변화는 쉽게 오지 않고 빨리 오지도 않는다. 많은 혼선과 갈등을 수반한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변화는 조금씩 나타난다. 다가오는 총선은 이런 한국적 의제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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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일 양국 변호사·시민단체가 지난 6일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변호사와 지원단체, 한·일 양국의 변호사·학자, 경제·정치계 관계자 등이 두루 참여하는 협의체를 만들고, 이들이 제안한 해결 방안을 양국 정부가 받아들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7일 이에 대해 “전혀 흥미가 없다”며 잘라 거절했다. 한·일 양국의 양심들이 내놓은 제안을 일축한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제안은 피해자 측에서 직접 내놓은 해결 방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동안 나온 관련 판결의 취지와 함께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문제 해결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어 한국 정부와 문희상 국회의장이 내놓은 제안들과 다르다. 특히 이번 제안은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인권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사죄·배상하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기본적인 요구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본의 전범 기업들이 중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 문제를 해결한 방식을 참고한 것인 만큼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이런 해법을 통해 한·일 양국 간 화해를 일구고 신뢰를 쌓으면서 미래로 가자는 제안에 절대 공감한다. 일본 정부는 이런 조건과 제안을 존중해야 백번 옳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 측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일 정부 대변인인 스가 관방장관은 징용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 정부의 꽉 막힌 태도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 지원단체가 숙고해 내놓은 의미 있는 제안이 무산될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법원은 “청구권협정으로 정부의 외교적 보호권은 소멸했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들의 청구는 기각했지만 강제노동의 불법성은 인정했다. 일본 정부는 가해 기업들에 피해자의 권리구제 요청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는 것도 모자라 소송 서류의 송달까지 방해하는 등 사법절차에 간여하고 있다. 이런 태도로는 한·일관계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인정하고 잘못된 한·일 협상을 바로잡으려는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이 문제 해결에 성의 있게 임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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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7일 신년사에서 남북협력을 증진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 교착 속에서 남북관계의 후퇴까지 염려되는 지금 북·미 대화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함께 남북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또 “전쟁불용, 상호안전보장, 공동번영이라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 국제적인 해결이 필요하지만, 남과 북 사이의 협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접경지 협력과 도쿄 올림픽 공동입장·단일팀 구성 협의,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등재 등을 북에 제안했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노력도 계속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에 대해서는 여건이 갖춰지도록 남북이 함께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이번 신년사의 핵심 메시지는 북·미 협상 구도에서 남북관계를 분리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는 점으로 보인다. 정부가 북·미 대화의 촉진 역할에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에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것은 중대한 대북 태도 전환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년간 남북협력에서 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면서 이는 “북·미 대화가 성공하면 남북협력의 문이 더 빠르게 활짝 열릴 것이라고 기대”해 북·미 대화를 앞세워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북관계를 북·미 협상에 종속시켰던 그간의 태도를 자성하면서 변화 의지를 밝힌 것은 긍정적이다. 북·미 협상과 무관하게 남북관계에서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것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 당연한 책무다. 남북관계에서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면 북·미 대화의 촉진자 역할에도 탄력이 붙게 된다. 

문 대통령이 “남북 간 철도와 도로 연결 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남북이 함께 찾아내자”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을 요한다. 본래 철도·도로 연결은 비상업적 공공사업으로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으면 가능한 사업이었으나 미국의 부정적인 태도 탓에 추진이 중단됐다. 이를 신년사에 담은 것은 지난해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철도·도로 연결구상이 말에 그치지 않도록 정부가 가시적인 노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달라진 대북 태도를 주목하기 바란다. 북한도 지난해 북·미 대화를 앞세워 남북관계를 소홀히 여긴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 대통령의 대북 제안에는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등재 방안 등 남북이 즉각 협력할 수 있는 안건들도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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