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시 ‘꽃’은 이제 너무나 유명하여 전 국민이 외우는 시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를 패러디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는 꽃이 될까봐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우스개로 말하기도 한다. 전 대통령의 이름을 ‘503’으로 대신 지칭하는 식으로 말이다.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정현종의 시도 생각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어렴풋한 몸짓을 하나의 존재로 확정하는 일이고, 그 존재가 온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까지 한꺼번에 파악한다는 말이다.

시인들의 이런 통찰을 접할 때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 든다. 릴케는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 마지막 구절을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로 끝맺는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아폴론 흉상이 ‘너’를 꿰뚫고 너의 구태의연한 존재를 다른 무엇으로 바꿔야 한다고 호통친다.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현실의 존재를 소환하고 다그친다. 

시적인 언어들은 뭐라 특정할 수 없는 우리들의 존재, 시간, 세계를 호명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확정해준다는 점에서 ‘이름’의 기능과 꼭 닮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동화 <샬롯의 거미줄>에서 시골농장의 여자아이는 갓 태어난 새끼돼지에게 이름을 붙여주려 애쓴다. 무녀리로 태어난 약한 새끼는 곧 죽여야 하니 이름을 붙이지 말라는 아빠의 엄명을 무시하고 아이는 ‘윌버’라는 이름을 붙인다. 소시지가 될 운명이었던 윌버는 이후 박람회에서 멋진 돼지로 뽑혀 상까지 받는 영예를 누린다. 소시지감을 ‘윌버’로 만들고 미운 오리새끼 안에 백조가 들어있음을 밝혀준 건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름과 호명이 반드시 해방적 기능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월터 옹의 빼어난 저작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는 문자가 생겨나면서 인간의 삶이 개념에 붙들리고 허구적 서사에 매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구술문화의 사람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건 물푸레나무나 유칼리나무 등이지, 나무 혹은 식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확실히 이름은 존재의 풍부한 가능성과 진실을 밝혀주기보다 은폐할 때가 많다. ‘된장녀’ ‘김치녀’가 그러하고, 지만원씨가 5·18시민군을 북한군 특수부대로 주장하기 위해 ‘광수 1호’라는 악의적 호칭을 붙였을 때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주관적 감정과 경험의 직접성을 지키려다보니 아예 진실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이제는 속류 개념으로 추락해버린 탈진실(post-truth)을 광장에서, 단톡방에서, 뉴스 댓글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펼친다. 당신이 붙인 이름이나 내가 붙인 이름이나 진실의 일각일 뿐이니 꿀릴 게 없다는 심리다. 숱한 혐오의 언어나 가짜뉴스는 이렇게 양산된다. 탈진실의 효과는 이렇듯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이름을 없애는 쪽으로 가지 못하고 무분별한 이름만 더 많이 짓는 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 두려워 벌벌 떨며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볼드모트’를 해리 포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호명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호명은 진실이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라 말한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치들이 명명한 ‘최종해결책’ 대신 ‘인종학살’을 택하는 것이다. 사실 이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폭력이 될 이름을 선택할 것인가, 해방이 될 이름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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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8일 대검 검사급 검사 32명에 대한 신규 및 전보 인사를 단행했다. 법무부는 이날 오후 7시30분쯤 전격 인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인사 결정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의견 청취를 놓고 추 장관과 윤 총장 사이에 볼썽사나운 줄다리기가 하루종일 이어졌다. 또한 현 정권을 겨냥한 수사를 주도한 윤 총장의 핵심 측근들이 대거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논란을 예고했다. 검찰 개혁의 충정은 이해하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 총장이 7일 정부 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약 40분가량 만남을 가졌다. 외부 일정을 마친 추미애 장관이 윤 총장과의 면담을 앞두고 법무부 건물로 복귀하고 있다(왼쪽 사진). 윤 검찰총장이 추미애 장관 예방을 위해 법무부 건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인사 내용을 보면 조국 전 법무장관 가족비리와 청와대 하명 의혹수사를 지휘했던 한동훈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과 박찬호 공공수사부장은 각각 부산고검 차장, 제주지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성범 서울중앙지검장도 법무연수원 원장으로 물러났다. 강남일 대검 차장, 이원석 대검기획조정부장 등도 각각 대전고검장, 수원고검 차장검사로 전보조치 됐다. 이들은 윤 총장의 핵심 측근들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민정수석실에 근무했거나 검경 수사권 조정 반대 국회로비 등으로 논란이 됐던 인물들이다. 

검찰 인사는 추 장관 취임 닷새 만에 이뤄졌다. 이번 인사는 ‘추미애발’ 검찰 개혁의 첫 단추를 끼우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렇듯 서둘러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검의 반발 또한 도를 넘었다. 검사 인사는 법무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사한다. 검찰총장은 의견을 전할 뿐이다. 그게 법이다. 추 장관은 윤 총장 의견을 듣기 위해 이날 오전 10시30분에 법무부 정부과천청사에서 만나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윤 총장은 “인사안이 없어 갈 수 없다”며 장관의 면담요청을 거부했다. 의견을 전달해도 이날 오전 11시로 검찰인사위원회가 예정됐다면 총장의 의견은 요식행위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추 장관의 요구가 무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장관이 불러도 총장이 가지 않는 것은 ‘항명’과 다를 바 없다.

검찰 내부에서 반발 움직임이 가시화될 수 있다. 현 정권을 겨냥한 수사팀의 지휘부를 바꾼 것은 일종의 수사 방해라는 불만이 작지 않다고 한다. 수사팀 지휘부가 바뀐다고 수사가 잘못된다는 식의 논리는 ‘자기 모독’이다. 지휘부 변동이 수사 결과의 다름으로 나타난다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이와 별개로 전격 인사의 후유증을 해소할 책임은 추 장관에게 있다. 무엇보다 지휘부 교체에도 성역 없는 수사 원칙은 보장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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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8일 최저임금 인상은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전국중소기업·중소상공인협회(이하 협회)가 2018년과 2019년 정부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고시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을 기각 결정한 것이다. 최저임금제의 취지에 부합하는 결정으로, 환영한다. 

헌재는 “2018년, 2019년 적용 최저임금은 예년의 최저임금 인상률과 비교해 인상 폭이 큰 측면이 있다”면서도 “입법 형성의 재량 범위를 넘어 명백히 불합리하게 설정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또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업자들은 그 부담 정도가 상당히 크겠지만, 최저임금 고시로 달성하려는 공익은 저임금 근로자들의 임금에 일부나마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려는 공익이 제한되는 사익에 비하여 중대성이 덜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안정성을 기업의 부담보다 더 중시한 것이다. 반대 의견을 낸 재판관 3명도 협회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법원에 무효확인 소송을 내는 등 다른 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음에도 이를 거치지 않아, 헌법소원 요건상 부적법하다는 의견을 냈다. 또한,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가 고용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춰볼 때 최저임금위원회 구성에 있어 의미 있는 참여를 보장받지 못하고 과소 대표될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보충의견도 제시됐다. 

최저임금은 국가가 법률로 강제하는 최저 수준의 임금이다. 최근 가파르게 올랐어도 지난해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액수와 비슷한 정도이다. 2018년 국내 1000대 기업 직원들(임원 제외)의 평균 연봉은 5537만원이었다. 2018년의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하루 8시간 노동 기준으로 월 157만3770원이니, 대기업 직원 평균 임금의 34% 수준이다. 이 정도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헌재가 밝힌 대로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려는 공익’에 해당한다. 

물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들도 나타나고 있다. 고용주들이 노동시간을 줄이는 ‘노동시간 쪼개기’로 편법 대응하며 초단시간 노동자가 늘어나 시간당 임금은 늘었지만 월 임금이 줄어드는 경우가 일례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대로 소상공인들이 겪는 고통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으로 발생하는 어려움은 다른 방법으로 푸는 게 맞다. 가뜩이나 양극화가 최대의 갈등요인인 사회에서, 최저임금을 억눌러 쥐어짜는 성장은 이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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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만 18세도 선거권을 갖게 됐다. 교육부가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집계한 결과를 보면 오는 4월16일 총선에 투표할 수 있는 학생 유권자는 14만명이다. 서울만 놓고 보면 2만3000명가량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 많게는 2000표에 달하는 고등학생 유권자가 있는 자치구도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20대 총선에서 관악구을의 1·2위 간 표 차이는 861표였다. 학생 유권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얘기다.

선거 주목도에서는 대선이나 총선에 미치지 못해도 학생 유권자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선거는 바로 지방선거다. 초박빙 승부가 많은 지방선거에선 수백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사례가 흔하다. 고3 학생 유권자가 꼭 교육 문제만 보고 투표하지는 않겠지만, 본인들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학교 문제와 더 가까운 선거도 지방선거다. 초·중·고 교육을 관장하는 교육감은 물론 이를 감시하고 지원할 지자체 의원까지 한꺼번에 뽑기 때문이다.

초·중·고 교육이 교육감들에게 상당부분 이관된 상황에서 지방의회가 각 지역 교육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상대적으로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다못해 학교에 교실이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거나 신축할 때도 지방의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반해 학생들이 지방의회에 대해 알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18세 선거권이 허용된 것을 계기로 학생 유권자들이 지방의회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길 희망한다. 그렇게 해야 교육을 사익과 바꿔 먹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적어지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를 위해 투표하려는 학생은 어떤 의원이 유치원 편을 들며 공익을 가로막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학교 후배와 동생을 위해 투표하려는 학생은 어떤 의원이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개방하자고 압력을 넣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위해 투표하려는 학생은 어떤 의원이 자꾸 학교에서 사교육을 시키자고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학교 내 민주시민교육 도입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금은 각 교육청에서 조례를 통해 일부 실시하고 있는 민주시민교육을 정식 교과목으로 편성해 초·중·고 교육과정에 넣자는 제안이다. 국회에도 여러 건의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법안 도입 취지나 방향만 본다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을 정도다.

다만 민주시민교육을 법제화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했으면 한다. 현재 발의된 여러 법안을 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른바 ‘진영 논리’가 교과목에 개입될 여지가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처럼 말이다. 학생들이 선거권을 갖게 됐으니 교육이 시급하다는 식의 접근도 바람직하지 않다. 역으로 묻는다면 지금 선거권을 가진 ‘어른’들 중 선거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선거권을 획득한 이상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한 표다. 선거에서 국민의 권리를 함께 행사할 수 있는 ‘동지’가 늘었다는 점에서 새로 선거권을 갖게 된 학생들을 ‘격하게’ 환영한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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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이굴기의 꽃산 꽃글’이 소식을 전했다. 서울 서촌에 자리한 길담서원이 충청도 공주로 옮겨간단다. 길담의 인터넷카페에 들어가니, 책방의 책을 할인판매한다는 글이 올라 있다. 공주 이전을 앞두고 정리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주말 길담서원을 찾았다.

오후 늦은 시간, 길담서원 카페에 10여명이 둘러앉아 ‘<자본> 읽기’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자본> 읽기’는 지난해 4월부터 경제학자 강신준 교수의 주도로 매달 한 번씩 마르크스의 <자본>을 발췌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가는 모임이다. 길담의 공부모임은 대체로 회원들이 텍스트를 자율적으로 선정해 진행한다. 과학책을 읽는 ‘시민과학공부 모임’, 경제를 공부하는 모임, 인문학 독서모임 등이 그런 부류다. 그러나 <자본>이나 <헤겔 정신현상학>처럼 전문가의 지도로 진행되는 강좌도 있다. <코스모스>(칼 세이건), <어린왕자>(생텍쥐페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와 같은 고전을 원어로 읽는, 원서읽기 모임은 꽤 유명하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니체 철학에 빠져 대학원에 진학한 회원까지 있을 정도다. 책읽기만 있는 게 아니다. 바느질을 배우며 세상을 얘기하는 ‘바느질 인문학’도 있고, 도시농업을 배우는 ‘텃밭인문학’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인문학’을 얘기했다. 대학이 인문학 위기에 빠졌다고 했을 때, 캠퍼스 밖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일었다. 인문학 모임이 하나둘 생겨나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잇따라 시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기업의 인문학 연수는 스타 인문학 강사들을 배출했다. 길담서원이 첫발을 뗀 것도 그즈음이다. 출범부터 화제가 됐다. 서원이 들어선 곳이 청와대 근처인 데다, 문을 연 2008년 2월25일이 기업인 출신 대통령의 취임 날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담서원이 더 주목을 받은 것은 대표의 이력과 독특한 운영방식 때문이었다.

길담서원 박성준 대표는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한 신학자이고, 대학에서 평화학을 가르친 교수다. 젊은 날에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13년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그가 길담서원을 열었을 때는 68세. 은퇴 나이에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생각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만큼 길담서원에는 박 대표의 오랜 생각과 철학이 담겨 있다. 서원을 서점, 카페, 갤러리, 콘서트홀 등으로 구성한 데에는 공부와 놀이를 결합하면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고민이 녹아 있다. ‘서원’이란 이름에서는 교육, 수행, 생활이 어우러지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읽을 수 있다. 간판을 내건 이는 박 대표였지만, 운영은 회원들의 몫이었다. 박 대표는 길담서원의 운영가치로 ‘자율’과 ‘우정’을 강조해왔다. 회원 누구든 인터넷에서 또는 오프라인 모임에서 좋은 기획을 제안하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그는 대표보다는 ‘서원지기’를 자처하며 낮은 자세로 회원들과 소통해왔다. “밤길을 걸을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친구의 발걸음 소리”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박 대표는 우정이야말로 인간 연대의 토대라고 믿는다.

박성준 대표는 “길 잃고 목마른 나그네들을 위해 옹달샘을 하나 파는 심정”으로 길담서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2년이 흐르면서 옹달샘은 인문학 공부에 목말라 한 사람들이 찾는, 도심 속 큰 우물이 됐다. 지금도 길담서원에는 매주 10여개의 공부모임이 열리고, 온라인카페에는 90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인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생각의 근육을 키웠다. 토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생각 공장’이었고 ‘스터디 민주주의’의 장이었다. 길담서원은 독특한 커리큘럼과 회원들의 자율적 운영으로 인문학공동체의 새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길담서원의 공주 이전은 어느덧 팔순이 된 박성준 대표의 건강과 후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공주 길담서원 대표는 그간 학예실장으로서 서원을 이끌어온 이재성씨가 맡는다. 다음달에는 12년 활동을 정리한 <작은공간의 가능성, 길담서원>도 출간한다. 길담서원의 이사는 지방으로 인문학 영토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성씨는 공주 길담서원을 인문학에 ‘농(農)적 가치’를 결합한 새로운 공동체로 운영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길담서원의 새로운 길찾기가 기대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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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사우나 시설이 좋기로 소문난 동네다. 하지만 산골 누옥이라도 욕실이 일단 잘돼 있고, 같이 사우나 갈 친구도 없어 온천을 소 닭 보듯 하고 산다. 

아부지 생일이라며 아들이 백만년 만에 찾아왔다. 얼치기 실력으로 미역국을 끓이더니 둘이 온천에도 가잔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홀딱 벗고 노천탕에 앉아 비 구경을 했다. 장성한 아이랑 간만에 행복한 순간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멸치국수에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아이에게 옛날 목욕탕 이야길 해줬더니 배를 쥐고 웃는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서로 부탁하여 등의 때를 밀곤 했던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때밀이 세신사’에게 맡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냔다. 

돈을 아끼는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사람 사이 정이 많았던 시절. 모두가 때밀이가 되어 등에 낀 때를 닦아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대를 우애롭게 건너왔다.

경상도 할매들이 교회 앞 평상에 앉아 이런 이야길 했단다. “예수가 죽었다카든데.” “와 죽었다카드나?” “대못이 박혀가 그래 되따 안카드나.” “글마 머리 풀고 다닐 때 내 알아봤데이.” 지나던 할매가 앉더니 “예수가 누꼬?” “며늘아가 아침저녁으로 아부지 아부지 캐사이 바깥사돈 아니겠나.” “보이소. 글마 거지다. 손발에 때가 껌디이같이 끼고, 산발하고 다니질 않트나.”

예수도 때를 밀려고 자주 물가로 나갔다. 늙은 까마귀가 우는 물가에는 때밀이가 서 있었을 게다. 인생은 머잖아 염사가 기다리고 있어 시신을 정성껏 닦아준다. 

중국 허난성의 소설가 옌렌커의 소설 &lt;연월일&gt;을 기억한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같이 오줌을 누고 몸을 닦는다. 늑대와 대치하면서 옥수수 밭을 지키다가 끝내 눈을 감는다. 그들의 죽음은 매우 엄숙했다. 개와 정이 들어 함께하다가 따로따로 죽는 장면은 서럽고도 쓸쓸했다. 마지막으로 눈곱을 떼어주면서 할아버지가 우는 소리 같은 비바람소리. 

오늘은 때가 낀 세상을 씻어내는 바람과 빗소리가 요란한 하루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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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원씨는 경마장에서 말을 타는 기수였다. 2019년 11월29일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의 선물을 받았다. 문중원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택배로 장난감 화장대세트와 레고를 주문했고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하늘에서도 가족을 위해 달렸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했던 손과 세상에 대한 마지막 주문을 글로 남겼던 손. 행복과 절망의 양손 사이 어딘가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손을 잡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하다.

한국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71)가 6일 서울 청와대 앞 길에 놓인 故 문 기수의 빈 상여를 보며 슬퍼하고있다. 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시민분향소가 있는 서울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중원씨 등 부산경남공원에서만 7명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마사회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며 고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유족과 시민대책위는 이제 문재인 정부의 책음을 물으러 청와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자회견 뒤 故 문중원 기수의 유족과 시민대책위 회원들은 빈상여와 조각상을 들고 청와대 사랑채 인근까지 행진을 했다. 고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가 6일 청와대 앞 도로에서 빈 상여를 어루만지고 있다. 문 기수는 지난해 11월29일 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빈 상여를 메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이준헌 기자

유서에는 마사회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복사본을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마사회는 경마라는 합법적인 도박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우선 판 위에 말을 깐다. 마리당 수억원 하는 말을 소유한 마주가 마사회에 등록하고 말이 우승을 하면 상금을 갖는다. 마주는 말의 주인일 뿐 경마 전문가는 아니다. 감독 격인 조교사에게 말을 맡기고 상금을 나눠 갖는 위탁계약을 맺는다. 마사회는 개인사업자인 조교사에게 면허를 교부하고 말을 키우고 관리할 수 있는 마방을 임대해준다. 조교사는 말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달릴 수 있도록 말 관리사를 고용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기수와 계약을 맺는다. 마필관리사는 최저임금 노동자, 말을 타는 기수는 근로자가 아닌 특수고용노동자다. 마사회는 조교사 선정, 마방 임대, 기수 면허 갱신의 권한을 가진다. 간단히 말하면 마사회는 마주의 말을 빌려와서 조교사와 기수와 마필관리사에게 맡기고 알아서 도박판을 돌리라고 한다. 중개만 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이 복잡한 구조는 배달플랫폼과 닮아 있다.

배달플랫폼이 음성적 배달시장을 혁신하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한 것처럼 마사회도 1992년 터진 경마 승부조작 사건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위와 같은 ‘개인마주제’를 탄생시켰다. 마사회로 내려온 낙하산의 전횡 때문에 생긴 문제를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넘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마주제는 마사회를 더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기수는 승부조작을 지시하는 조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출전하지 못하고, 상금을 타지 못하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아픈 말을 타라고 하거나, 다루기가 힘들어 낙마할 가능성이 높은 말에 태우기도 했다. 실제로 낙마사고로 사망한 기수들도 있다. 마필관리사들은 말에게 차여 무릎에 철심을 박거나 뇌진탕, 골절 등의 부상에 시달렸다. 2019년에만 60건의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등진 7명이 이들 기수와 마필관리사다. 사장에게 밉보인 배달 라이더들이 한 번에 묶어 갈 수 있는 배달건수를 제한받거나, 고장 나기 직전의 오토바이를 배정받고 오로지 건당 성과에 따라 돈을 받는 배달산업과 닮아 있다. 배달하다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소식들은 매일같이 들린다. 마사회의 연매출은 8조원, 배달산업은 20조원이다. 우리는 죽음의 판에 돈을 걸고 있다. 문중원씨는 이 죽음의 질주를 멈추고 싶어 노조에 가입하고, 2015년 조교사가 됐지만 마사회는 마방을 임대해주지 않았다. 마사회 직원들은 높으신 양반들과 밥도 좀 먹어야 마방이 빨리 배정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더는 못하겠다.’ 정직한 그에게 허락된 삶의 공간은 없었다.

우리가 문중원씨에게 마방을 임대해줄 수는 없지만 또 다른 문중원씨가 살아갈 방을 만들 수는 있으리라 믿는다. 최근 라이더유니온은 따뜻한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을 위해 ‘라이더유니온 캠페인. 늦어도 괜찮아요 안전하게 와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겨달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중원씨가 세상에 보낸 마지막 주문을 배달하기 위해 거리에 선 사람들도 있다. 그의 가족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다. 문중원씨의 부인 오은주씨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메모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별이 될 사랑하는 제 남편 문중원 기수를 영원히 기억해주세요.”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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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해 7월 유럽을 강타한 열파(heat wave)는 프랑스에서 46.1도, 독일 42.6도, 벨기에에서 40.2도 등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을 모두 경신하게 했다. 특히 이 열파 기간 중 불과 5일 동안 그린란드에서는 550억t의 얼음이 녹았고, 8월1일 하루에만 130억t의 얼음이 녹았다. 130억t, 이는 사람의 평균 몸무게가 62㎏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2100억명의 몸무게 합과 맞먹는다. 현재 세계인구가 약 77억명인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 인구 몸무게 총합의 27.3배만큼의 얼음이 8월1일 하루에 그린란드에서 녹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극단적인 폭염, 산불, 혹한, 태풍, 허리케인 등 심각한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 등이 인류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산업발전과 더 편하고 잘사는 삶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행하고 있는 무분별한 화석원료의 사용과 숲을 훼손하는 등 토지 이용의 변화는 우리가 우리 후손들로부터 빌려서 쓰고 있는 지구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유엔 환경프로그램의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량은 지난 10년 중 2014~2016년에만 정체되고 매년 평균 1.5%씩 증가했다. 2018년에는 연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인 553억t의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온실가스를 배출했다. 이 중 에너지 사용과 산업활동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2018년 한 해 동안 2% 증가한 375억t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여러 해 동안 논의되었듯이 2030년까지 지구 기온 증가를 2도 이내로 한정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25% 감축해야 하고, 1.5도 이내로 한정하려면 55%를 감축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노력은 이를 달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오죽하면 16살의 스웨덴 출신 청소년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가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 패널토론에서 “저는 여기 연단 위가 아니라 바다 건너편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당신들은 빈말로 내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아갔어요”라며 참석한 각국 정상들에게 호통을 쳤을까. 타임지가 최연소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각성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온실가스 감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당면 숙제이다.

바다, 땅 그리고 식물과 광합성 미생물들이 열심히 이산화탄소를 다시 흡수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화석원료를 꺼내 대기 중으로 엄청나게 올려보낸 이산화탄소는 더 빠른 속도로 줄여야 한다. 대표적인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은 이산화탄소의 포집과 저장 및 이용으로 나뉘어 추진되고 있다. 이 중 화석원료 사용을 줄이고 대신 이산화탄소를 활용하여 탄소를 함유한 여러 화학물질들을 만드는 기술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산화탄소는 상당히 안정적인 물질이므로 에너지와 환원력이 공급된 상태에서 다양한 촉매반응을 통해서만 다양한 화학물질로의 변환이 가능하다. 메탄올, 메탄, 탄화수소뿐 아니라 개미산과 다양한 카르복실산, 요소(urea), 카보네이트, 고분자 등을 만들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한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한 예로 알베말과 노보머사가 개발한 폴리프로필렌카보네이트 고분자의 경우 생산된 고분자 중량의 40%가 이산화탄소이다. 이때 반응에 필요한 에너지와 환원력을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사용하여 획득하는 기술들도 개발되고 있다.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한 이산화탄소 활용 기술들도 개발되고 있다. 광합성 박테리아나 미세조류들은 이산화탄소를 탄소원으로 하여 성장이 가능하며, 지방산, 바이오디젤 등을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광합성 미생물들은 성장속도가 느리다 보니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따라서 경제성이 낮아 대사공학에 의한 개량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원래는 이산화탄소만을 탄소원으로 해서는 성장하지 못하는 박테리아들도 대사공학으로 개량하여 이산화탄소만을 탄소원으로 하여 자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화학물질들을 생산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또한 이산화탄소를 화학적으로 변환시켜 액체인 개미산으로 바꾼 후 미생물들이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도 하고 있다. 작년 카이스트 내 연구실에서는 이산화탄소와 개미산만을 탄소원으로 하여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대장균을 처음으로 개발했는데, 이는 다른 미생물에서 테트라하이드로폴레이트 활용 대사회로를 가져와 대장균 내에서 재구축하고 일부 대장균 자체의 대사회로들도 조작하고 최적화하여 가능했다. 올해는 이스라엘 연구팀에서 다른 대사경로를 도입하고 실험실에서 적응 진화과정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탄소원으로 하여 자라는 대장균을 개발했다. 아직은 포도당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성장속도가 많이 느리지만, 추가적인 대사공학을 통해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효율적인 대사활동이 일어나게 하면 앞으로 이산화탄소를 먹고 유용화학물질들을 생산하는 미생물의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산화탄소와 온실가스 저감은 위의 몇 개의 기술만을 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온실가스가 적게 나오거나 나오지 않는 에너지로의 전환, 산업계에서의 감축 노력, 우리 소비행태의 변화 등 필요한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이에 더하여 이미 우리가 배출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활용하는 위의 기술들을 적용할 때, 설정된 온실가스 저감 목표를 겨우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30년 그레타 툰베리가 27살이 되었을 때 “저와 제 친구들의 말을 듣고 행동으로 옮겨주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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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권 조정’이라는 것이 곧 국회를 통과할 겁니다. 이른바 패스트트랙에 올라갔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지요. 패스트트랙에 올라탔을 때 저는 대검찰청 형사정책단장이었습니다.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놈이지요. 누구의 조롱대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불러야 할 텐데, 사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돌도끼 한 자루 들고 고질라와 카이쥬 태그팀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형정단장이라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처음 국회를 찾았을 때, 여당 국회의원에게 들은 첫마디는 “너무 늦었다”였습니다. 법안도 안 만들어졌는데 이미 늦었다니, 이건 출산 준비하러 간 출산박람회에서 유골함 강매당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사실 이 수사권 조정 합의안이라는 게 핵무기 개발처럼 어찌나 은밀히 이뤄졌는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법무부 장관이 밝혔듯 검찰의 입장은 아예 듣지 않았고요. 물론, 경찰의 의견은 들었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에 미뤄볼 때 경찰은 깊게 관여한 것 같은데, 어차피 직접 당사자인 국민도 모르니 제가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닙니다.

대문도 못 들어간 놈이 안방 구경 하겠습니까. 당연히 국회에서도 문전박대였죠. 여당에 찾아가 설명하면 ‘대검 간부들이 괴문서를 뿌리며 의원들을 압박한다’고 위협받았죠. 구걸수사나 하는 제가 여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개차반이 된 겁니다. 하릴없이 야당을 찾아가면 ‘여당 패싱하는 것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찾아가도 성화, 안 찾아가도 성화였고 토론회에도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높은 분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은 들었어도 ‘내가 곧 정부’라는 것은 처음 들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선수 입장이라도 시켜주는데, 저는 라커룸만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검찰이 수사권 조정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오히려 수사권 조정 합의안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수사권 조정 합의안에는 “수사권 조정은 자치경찰제와 함께 추진하기로 한다”라고 눈밭의 동백처럼 명확히 찍혀 있거든요. 국정과제 이행계획에서도 “실효적인 자치경찰제 도입 등과 연계하여 수사권 조정안 마련, 연동하여 시행”이라고 되어 있고, 대통령께서도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권력 비대화 우려가 있으므로 자치경찰이 필요, 수사권 조정은 자치경찰과 함께 원샷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이 그리 큰 죄는 아니지 않나요. 물론 정부도 자치경찰제안이란 것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그걸 자치경찰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넉넉히 쳐줘도 자치방범대 정도죠.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당 싱크탱크에서도 그건 자치경찰제가 아니라고 했거든요. 정부의 국책연구기관인 형사정책연구원도 의문이라고 하고, 참여연대는 한술 더 떠 자치경찰제라고 부르기 민망하다고 합니다. 여당 국회의원조차 무늬만 자치경찰제라고 하는데, 그게 자치경찰이면 새우깡이 새우튀김입니다. 물론 그 새우깡조차 석모도 갈매기가 채갔는지 감감무소식입니다. 원샷으로 마셨는지 모르겠는데, 뺑덕어미에게 전 재산 털린 심봉사 심정입니다.

두 번째 합의는 행정경찰과 사법경찰 분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보경찰의 폐지일 겁니다. 참여연대가 “정보경찰 유지하면 경찰개혁도 없다”고 말한 바 있어요. 지금 청와대 비서관이 되신 분도 “기존 경찰 정보국은 폐지하고 범죄정보 수집 위주의 정보조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밝히셨고요. 기형적으로 강력한 정보경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가 우려하고 있어요. ‘영화 <1987>보다 더 막강한 공룡경찰이 될 것’ ‘정보기관에 실질적 수사권을 부여하는 것은 나치의 제국안전중앙청과 일제강점기 고등경찰과 유사한 것으로 매우 위험한 정부조직 설계’라고 합니다. 나치의 게슈타포라는 거죠.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는 ‘정보경찰 축소나 폐지가 검경 수사권 조정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현 상태라면 경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인지 작년에는 경실련 등 11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정보경찰폐지넷’을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일제 고등계로 출발한 정보경찰 역사상 가장 극성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검사들 승진 순위까지 매길 정도가 되었으니 곧 전 국민의 순위도 매길지 모릅니다. 물론 얼마 전 국회에서 경찰개혁도 하겠다고 밝히긴 했습니다. 반갑기는 합니다만, 20대 국회가 다 끝난 시점이라 추수 다 끝나고 눈밭에 모내기하겠다는 것으로 들리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야 ‘수사권 조정은 정보경찰과 야합을 통한 20년 집권론의 핵심’이라든가, ‘포장지는 검찰개혁이나 내용물은 경찰공화국’이라는 헛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가짜뉴스라는 것이 밝혀질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감히 한 말씀 올렸습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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