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가끔 페이퍼나이프를 선물받곤 했었다. 그런 선물을 받고 나면 어디서 우편물 올 데가 있을까 기다리곤 했는데, 그 날렵하다고 할 수 없는 칼날로 봉투 끝을 가르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페이퍼나이프를 선물받곤 하던 시절에도 손으로 쓴 편지 같은 게 오던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껏해야 페이퍼나이프를 써서 열어볼 게 고지서 따위들이었는데 그래도 그 사각사각 종이를 가르는 소리가 좋아서 기분 좋게 봉투를 열어보곤 했다. 지금은 그나마도 쓸 일이 없게 되었다. 대개의 우편물은 e메일로 오고, 택배로 받는 물건들은 페어퍼나이프로는 개봉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니, 이 나이프들은 이제 내 책상 위 장식품이 되었을 뿐이다.

이 나이프는 북나이프로도 불린다. 수공으로 책이 제작되던 시절에는 기술상의 문제로 간혹 페이지가 제대로 절단되지 않은 책이 판매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가끔씩 이 나이프를 써서 페이지를 펼쳐야 했다. 사각사각, 페이지를 열고 나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책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누구도 손대지 않았던 새 책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귀한 책인 경우에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언커트 페이지라는 말도 생겨났다. 독자들은 그 페이지를 가르면서 오직 자신만의 책을 갖게 되는 셈이다. 내용은 같더라도, 그 책은 유일하게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수공으로 책을 제작하던 시절

제대로 절단되지 않은 책 옆면

지금은 앤틱 구현 장식용 변해

종이에 베이는 게 얼마나 아픈가

사소한 것에 베이는 삶은 어떤가

도톨도톨, 적당하게 베이지 않길


진짜 칼이 아니라 페이퍼나이프가 자른 듯이 매끄럽지 않은 옆면을 가진 책들도 있다. 역시 인쇄와 제본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제작된 책들인데, 단면이 오톨도톨한 이런 책의 페이지를 ‘데클에지(deckle edge)’라고 한다. 데클은 기술상의 한계로 인해 종이를 그런 식으로밖에는 찍어낼 수 없었던 틀의 이름인데, 지금은 책의 앤틱을 구현하는 장식의 이름으로 변했다. 장식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도 예전에 그런 책을 한 권 구입한 적이 있었다. 중고서점에서 그런 책을 한 권 사놓고는 이게 불량품인가 고개를 갸웃하고, 혹은 그 정반대로 이게 초판이거나 희귀본이거나 그래서 혹시 무지하게 비싼 책을 내가 발견한 건 아닐까 가슴이 뛰기도 했었다.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또 들춰보고 하는 게 더 재밌었다. 하긴 그러려고 샀던 것 같기도 하다. 하드커버의 그 두툼한 책을 아직도 읽지 않았으니. 대신에 책장을 정리할 때마다 가끔 꺼내서는 그 옆면을 손 끝으로 만져보곤 한다. 종이의 느낌이 도톨도톨하게 다가온다. 나는 종이다, 혹은 나는 책이다, 말하는 듯한 느낌이다.

새해 들어 하게 되는 이런저런 결심 중에 책정리가 빠지지 않는다. 또 매번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그 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책 정리하는 법이라는 책을 찾아보기까지 하고, 정리하지 않는 것도 그 방법 중의 하나라는 말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책을 이렇게 쌓아놓고 있는 게 내가 일종의 호더(hoarder, 축적가)가 아닌가 고민을 하는 것도 매해 같은 일이다. 그래서 또 괜히 책장을 대책없이 쳐다보고만 있다가 그 우툴두툴한 데클에지의 책을 뽑아든다. 책장 정리라는 게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일이라 시작하기도 전에 잠시 쉬려는 작정이다. 그 책을 꺼내 그 도톨도톨함을 만져보는 건 언제나 기분이 괜찮은 일이다.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언커트 페이지를 갈라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듯이 그렇게 기대에 찬 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오히려 대개는 이미 읽은 이야기의 반복인데, 그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조차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잘 반성하지 못하고 무난히 이어가지도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니 그냥 올해도 이렇게 도톨도톨 살아가게 될 터인데, 혹은 울퉁불퉁하게 살아가게 될 터인데, 그러면 적어도 손을 베이지는 않을 터이니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책 종이에 손을 베이는 게 얼마나 아픈가. 그렇게 사소한 것에 베이는 사소한 삶이 얼마나 아픈가. 내 삶이 사소한 것은 다행인 일이다. 도톨도톨, 뭐, 적당하지 않은가. 그래도 베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는 설이 빨라 새해가 되자마자 또 금방 설이다. 새해가 순식간에 두번 시작되는 셈이니, 무슨 계획이든 결심이든 얼른 수정할 수도 있겠다. 덕담과 위로도 얼른 두번 주고받겠다. 어떤 책은 그냥 거기 툭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하듯이 말뿐인 덕담이라도 주면서 좋고 받으면서 좋기도 하다. 새해가 시작되고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또 새해를 준비하면서, 올해는 복많이 받아야지, 내게 덕담을 한다. 말뿐이면 뭐 어떤가.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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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선거법 개정, 공수처법 제정 등 상징적인 일이 많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은 핀란드 30대 여성 총리 탄생과 한국의 70대 남성 국무총리 지명이다. 두 장면이 강하게 겹친 이유는 각 장면을 만든 인식의 간격, 앞으로 만들어질 다른 미래와 격차가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잘할 것’이란 판단은 개인에 대한 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 특정 집단이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을 살피기 위해 활용된 교육자료가 있다. 부자가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가 나서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환자를 본 의사가 ‘내 아들’이라고 놀라는 장면을 보여주며 의사는 누굴까 질문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답을 못한다.    

이유는 의사 하면 남성이 연상되는데 이미 아버지가 등장해 순간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어떤 직업이나 역할을 떠올릴 때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 집단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총리를 생각하며 30대, 심지어 여성을 상상할 수 있는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배제된다는 것이고 능력 검증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의미다. 차별이다.

문제는 이것이 한 번의 배제와 차별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다. 30대 여성 총리를 보고 자라는 세대와 70대 남성 총리를 보고 자라는 세대의 배움과 인식은 같을까?   

30대 여성 총리는 장관 19명 중 12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두 총리가 펼치는 정치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 삶과 미래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걱정은 현실을 보는 인식의 격차가 크다는 사실이다. 이제 검찰청과 경찰청 간부가 남성 중심인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국민정서다. 여성을 아예 뽑지 않던 때가 있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일지언정 국민들로부터 공감받지는 못한다.    

문제는 국민정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결정권자의 인식이다. 이들은 중장년 남성 독점구조에 너무 익숙해 ‘경륜과 중량감 있는 남성이 적임자’라는 인식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최근 검찰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남성’ ‘참여정부 경력’ 인사기준이 이 둘로 읽힌다.

인사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고 문제를 어떻게 풀겠다는 메시지다. 장관 인사를 하면서 밑돌 빼서 윗돌을 괴었다. 장관 30% 여성 임명 목표는 달성했지만 여성 장관들의 불출마 선언으로 국회의 여성 대표성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여성 장관 불출마 지역구의 여성 전략공천 등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성평등이다. 남은 검찰 인사에서는 여성을 중용해 비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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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절, 깐깐하다고 소문난 어느 재판장이 검사를 혼낸 이야기다. 공판에 참여한 검사가 무료했던지 시도 때도 없이 볼펜을 손에 쥐고 촉을 내밀었다 들였다 하면서 딸깍 딸깍 소리를 냈다. 재판장이 정리(현재의 칭호는 법정경위다)를 부르더니 검사를 가리키며 일렀다. “어이, 정리, 저기 저 볼펜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 있잖아, 법정 밖으로 내보내게.” 그 검사, 얼굴이 벌게지더니 다시는 그 짓을 못했다고 한다.

얼마 전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 사건의 심리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오해를 피하려고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내가 그 사건에서 주목하는 것은 검사의 항의나 주장, 판사의 대응과 판단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따위가 아니다. 형사사법의 운영과 관련하여 보이는 새로운 경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작년 12월21일자 사설은 공소장 변경이 허가되지 않은 후 검사들이 법정에서 벌인 항의를 “전대미문의 법정 활극”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의 방점은 활극이 벌어진 사실이 아니라, 그 활극에서 재판장이 결코 검사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데 두어야 한다. 문제는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당사자가 누려온 지위의 불균형성에 있다.

형사소송에서는 검사와 피고인(및 그 변호인)이 형사소송에서 가지는 지위가 대등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져 왔다고 할 수 없다. 문제의 활극이 벌어진 날 공판에 참여한 검사는 “재판장이 검찰의 의견을 이렇게 받아주지 않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했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검사의 그 발언은 틀리지 않다. 변호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 정경심 사건에서 보인 재판장의 소송지휘였다. 신기하다.

한편으로 전임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에서는 법원이 피고인 측의 온갖 증거신청에 대해 일일이 증거조사를 해 주고 있다. 피고인 측의 그런 주장과 입증이 가지는 정당성 여부는 일단 접어두고, 법원이 이에 대해 일단 진중한 심리를 해 주는 모습은 솔직히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반의 사건에서 피고인이나 변호사가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에 대해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다면 판사가 뭔가 제동을 걸지 않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터라서 하는 말이다.


검사가 가장 싫어하는 무죄판결

2018년 무죄판결 비율은 0.79%

무죄율이 낮은 데서 알 수 있듯

지금까지 판사의 일반적 성향은

이른바 적법절차형 모델보다는

범죄진압형 모델에 가까웠다


형사사법사무 중 수사와 공소유지와 형의 집행을 검사가 맡고 있다면, 판사는 수사와 공판 단계에서 검찰권 행사를 통제하는 것이 제도의 기본 틀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유례 없이 검찰의 권한이 큰 우리나라에서 과거 법원의 통제가 만족스러울 만큼 잘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건 처리에서 검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영장 신청에 대한 기각과 무죄 판결인데, 2018년 기준으로 구속영장의 발부율은 81.3%이고 제1심 형사판결 중 무죄 판결의 비율은 0.79%다. 무죄율이 이리 낮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판사의 일반적 성향은 이른바 적법절차형 모델보다는 범죄진압형 모델에 가까웠다. 그러던 법원이 윤관 전 대법원장의 취임 이래 형사사법절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해 온 일이 영장실질심사제의 실시와 공판중심주의·구술변론주의의 실질화였다. 그러나 변호사의 눈으로 볼 때 법정의 운영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경심 사건에서 검사가 항의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주의였다. 이것은 검찰이나 경찰에서 만든 조서가 맞는지 틀리는지 따지는 식의 재판이 아니라, 유죄인지 무죄인지의 판단을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증인 등 사건관계인이 하는 말을 기본으로 삼아 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 원칙은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우리 형사사법이 여기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수사기록은 던져 버리라”라던 발언이 충격적으로 들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의 적용 확대, 기소 후 증인에 대한 조사의 증거능력 제한, 영장 청구에 대한 엄격한 심사 등 검찰권 행사에 대한 법원의 통제는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법원은 새 정부 들어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피의자나 참고인으로 불려가서 검찰의 조사를 받는 미증유의 체험을 거친 후 종전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법원의 재판이란 것은 불가피하게 그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낳지만, 판사는 그런 해석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이른바 정무적 판단이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정도다. 흥분해서 자꾸 일어서는 검사에게 담당판사가 했다는 그 말, 그래서 신선하다. “검사님, 앉으세요.”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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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벨 경제(dumbbell economy)’가 화두다. 덤벨 경제는 건강과 체력 관리에 관한 소비가 늘고 관련 시장이 크게 호황을 누리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영미권에서 시작된 덤벨 경제 열풍이 최근 한국에서도 불고 있다. 헬스·요가 등 관련 시장뿐 아니라 이를 보조하는 식품·운동용품 등의 부대 산업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덤벨 경제에 힘입어 2019년 식품업계의 최고 키워드는 ‘단백질’이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글로벌인사이트리포트는 세계 단백질 식품 시장이 연평균 12.3% 성장해 2025년 32조8800억원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덤벨 경제의 단백질 열풍으로 식용곤충이 훈풍을 맞고 있다. 식품 원료로 등록된 갈색거저리, 흰점박이꽃무지 등 식용곤충의 40~70%는 양질의 단백질로 구성돼 있다. ‘고소애’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갈색거저리는 식용곤충의 대표주자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먹는 곤충이다. 고소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소한 맛’이다. 이 맛의 핵심은 아미노산이다. 곤충은 단백질을 이루는 20가지 아미노산이 골고루 들어 있다. 특히 글루탐산이 아미노산 중 가장 많다. 글루탐산은 ‘감칠맛’이라는 특별한 맛을 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고소애의 의학적 효능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고소애 추출물은 간암세포 활성을 억제하고 항치매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또 수술 전후 적절한 영양공급은 회복과정의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영양실험에서 수술 환자들의 골격과 근육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강남 세브란스병원과 농촌진흥청이 106명의 암수술 환자를 대상으로 3년 동안 실시한 임상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소애를 지속적으로 섭취한 암수술 환자의 면역력이 16.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자들은 많은 부분의 약리적 효과가 단백질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한다.

발 빠른 곤충농가에서는 고소애의 의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헬스 후 이용하는 식음료 재료로 고소애를 생산하여 스포츠센터를 통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강남 세브란스병원과 공동으로 항암치료 환자를 대상으로 한 ‘환자식’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지난해 12월 초 세계은행의 아프리카팀이 한국의 곤충산업을 돌아보기 위해 농촌진흥청의 연구 현장과 식용곤충 생산농가를 방문했다. 세계은행은 한국 농업인의 곤충 사육 기술과 중앙정부의 곤충산업 육성정책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올해에는 대한민국의 곤충 단백질 생산기술이 세계은행을 통해 아프리카 협력사업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사람들은 그저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원한다. 건강한 100세를 맞이하기 위해 식용곤충을 먹어볼 것을 권한다. 덤벨 경제를 탄생시킨 밀레니얼 세대와 100세 시대에 살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곤충 단백질이 똑같이 필요하다. 식용곤충을 아직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고소한 고소애부터 가까이해 보자. 지구 환경도 살리고 건강도 지키기 위해.

<조남준 | 농촌진흥청 농업생물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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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방학 시기다. 방학식 전 일선 초·중·고교의 행정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중에서도 방학 중 급식 대상자 신청을 받아 방학 중에도 결식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다.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방학 중 급식 신청 문자 메시지는 방학이 오고 있다는 알람이기도 하다. ‘급식 지원 대상’이란 말도 이제 방학에만 해당한다. 

서울시가 2019년 1학기 고3 학생부터 무상급식을 시작해 2021년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적용 대상을 늘려 무상급식을 전면 실시할 예정이다. 각 지자체들도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무상급식을 시행하거나, 시행할 예정이다.

이제 학기 중에는 아예 급식 지원 대상자를 신청하고 선정하는 과정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방학 중 급식 지원 대상자에 대한 안내도 끼니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대상자를 찾기 위한 과정이다. 가정에 긴급한 사정이 발생하면 신청·지원이 가능하고 학교에서는 안내만 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어떤 학생들이 지원을 받는지 알지 못한다. 프라이버시는 이제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가정 형편의 문제와 상관없이 방학 중에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다. 혹자는 방학을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하는데 워킹맘 입장에서는 한갓진 소리일 뿐이다. 

혹자는 식판 밥에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자라면 입맛이 획일화되고 음식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뭘 모르는 소리다. 학교에서는 김치가 적어도 일주일에 다섯 종류가 나오고, 국도 다섯 종류다. 나도 방학 때만 되면 즉석밥과 라면 등을 잔뜩 쟁여놓는다. 종종 돈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일을 하러 가기도 한다. “어제 햄버거 먹었으니까 오늘은 돈가스 사 먹을래?” 그래서 방학을 ‘세 끼 지옥’이라고도 부른다. 워킹맘뿐만 아니라 시간 맞춰 끼니를 챙겨주는 전업 주부들에게도 방학 중 끼니는 힘든 일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엄마들이 ‘맘충’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사회활동을 통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방학이 끝나면 엄마들도 끼니 해방을 이룬다. 적어도 학교에 가면 점심밥은 먹고 온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놓이는지.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전국의 초·중·고교생은 613만6793명이다. 저출산 시대에 점점 감소 추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 650만명의 학생들이 있다’라고 말의 시작을 열곤 했지만 이제는 ‘613만여명’이라 말해야 한다. 그중 고교생들은 141만1027명으로 2018년 대비 8.3% 줄어 감소폭이 가장 크다. 

이제 무상급식은 정치적 논란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한때는 무상급식이 포퓰리즘이라며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정쟁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시대를 읽지 못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2019년까지도 고등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하지 않았던 대구도 여론의 압박과 시민들의 요구로 2020년부터 무상급식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대구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의무교육이 아닌 고등학교까지도 무상급식이 전면 이루어지게 됐다. 2017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수업료와 급식비를 내지 않는 시대가 눈앞에 있는 셈이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수능이 끝난 고3들이 무상급식에 볼모로 잡혀 집에 가지도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학부모인 내 입장에서는 학교에 가면 따뜻한 밥은 준다는 것, 그 밥이 그래도 친환경 식재료를 지향하고 철저한 위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음을 놓는다. 학교에서 일찍 나와 저희끼리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때우거나 찬장에 쟁여둔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지옥이 될 것 같은데 밥이라도 먹여 보내주니 나는 참 좋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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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다 현수막이 나부끼는 걸 보니 선거의 계절이 온 것 같다. 그러나 여성 공천 문제는 매번 4년을 주기로 ‘불행 회로’ 속에 갇힌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20년 전 도입된 여성 할당제 얘기가 나온다. 레퍼토리도 한결같다. 역차별, 특혜…. 선거제 개정 이후 여성 할당제 반대론자들의 무기인 당선 가능성마저 강조된다. 다당제 출현으로 후보자 경쟁력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전직 미국 대통령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2년만 통치해도 엄청난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 시대에 227년 전 여성 참정권을 외치다 처형된 올랭프 드 구주를 떠올릴 줄이야. 왕정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여성을 소외시켰다며 “여성은 교수대에 오를 권리도,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구주를 단두대 위에 세웠다. 차별과 반동의 단두대에서 내려오지 못한 여성 정치, 그 시작은 또다시 공천이다.

더불어민주당은 12일까지 7명의 영입인사를 발표했다. 지도부는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과연 성공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남성은 ‘가능성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여성은 ‘스스로 성공을 입증해야 한다’는 잣대가 적용된 차별 공천에 가깝다. 7명 중 여성은 단 2명이다. 더 큰 불공정은 영입 기준이다. 이해찬 대표는 ‘노선’ ‘진정성 있는 삶’을 제시했다. 그러나 똑같이 삶의 진정성을 본다 해도 성별 구분에선 기준이 달라졌다. 최혜영 교수는 장애를, 홍정민 변호사는 경력 단절을 극복하고 성공한 여성임을 강조했다. 남성인 원종건·오영환씨 경우는 화제·감동 스토리에 주목했다. 남성들에겐 ‘성공 가능성만 있어도 투자하겠다’면서도 여성들에겐 ‘스스로 성공한 뒤 정치권에 오라’고 하는 메시지가 배어 있다. 이는 청년 공천의 성별 비대칭과도 직결된다. 청년층 영입으로 틀을 맞춰도 남성은 2030대, 여성은 40대 이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여성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뒤 정치하라는, 정당은 그 전까진 아무 지원도 안 하겠다는 무임승차 의식 아닌가. 

이 무렵, 여성장관 3인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성 의원들에겐 악몽 같았던 19대 총선이 생각났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지역구 15% 여성후보 의무추천제’를 확정했다. 남성 정치인 40여명은 ‘여성 의무할당 이중특혜 반대를 위한 출마자 모임’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할당제를 반대했다. 그 결과 전체 지역구 여성 후보자는 6.98%로, 18대 총선 16.5%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다. 여성 예비후보들은 별도의 경쟁력 조사를 거쳐 출마 자격을 입증해야 했다. 유은혜 부총리는 ‘어린 여성’이라는 냉소를 뚫고 경기 일산동구에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BBK 재판이라는 고통을 딛고 일산서구에서 승리했다. 박영선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서울 구로을)은 시베리아 총선으로 통했던 18대 때 마지막 지역구 공천자였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서울 광진갑)은 15대 총선 때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영입했음에도 1차 조직책에서 탈락했다. 야당 강세 지역에 여성을 내보내면 의석을 잃는다, 여성이 여성 안 뽑는다는 것이 공심위 논리였다. 추 장관은 천신만고 끝에 공심위 2차 논의에서 조직책으로 선발됐다. 의정활동이라고 편했을까. 지도부 위치에 올랐어도 남성 중심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여성에게 허용된 성공 기준을 벗어난 여성은 여성이 응징하라’는 남성들의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전술에 번번이 치였을 것이다. 추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거역’이라는 전근대적 권력 용어를 쓴 것도 달갑진 않지만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여성 장관들의 눈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젠 ‘다른’ 눈물을 보고 싶다. 여성 정치인 상당수가 할당제에 힘입어 비례대표가 됐고, 그간 과소대표됐던 여성 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러나 정당 내 실질적 성평등은 요원하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여성 정치인들이 여성 정치를 성찰할 때다. <요즘 시대에 페미도 아니면 뭐해> 저자인 노혜경 시인은 “페미니즘은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보는 일이다. 그 때문에 페미니즘은 변혁운동이고 정치운동”이라고 역설했다. 여성 공천이 생물학적 여성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 아님을, 모든 차별을 거부하는 여성 정치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임을 앞장서 말해주길 바란다. 추 장관의 25년 전 회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괜찮은 선거구는 남성이 나가야 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논리, 결코 수용할 수 없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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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모든 명칭이 최초로 기록된 문헌은 기원전 139년 중국 전한 대 류안이 저술한 ‘회남자’로 알려져 있다. 회남자는 중국 최초의 공식 반포력인 태초력에 채택된 이래 모든 역법의 기준이 됐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의 24절기는 화북지방을 기준으로 했기에 우리와 맞지 않았다. 1444년 세종은 이순지와 김담에게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의 해설서를 편찬토록 했다. ‘칠정산내편’은 수시력을 기초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역법 개발은 농업국가의 최우선 국책사업이었다.

지난 9일 서울 남산 중턱 자락에서 산개구리 한 쌍이 포접 중인 모습. 시민과학자 조수정씨 제공

경칩(驚蟄)은 동지로부터 72일 지난 날이다. 양력으로는 3월5일 또는 3월6일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각종 초목의 싹이 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 위로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날이다. 당초 중국의 한서에는 ‘열 계’와 ‘겨울잠 자는 벌레 칩’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기록돼 있다. 나중에 한무제의 이름인 ‘계’자를 피하기 위해(피휘·避諱) ‘놀랄 경’자를 써서 경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한다. 완연한 봄을 알려주는 전령이다.

지난 9일 서울 남산에서 포접 중인 산개구리가 관찰됐다. 포접이란 산란을 위해 몸을 포개는 것을 말한다. 보통 포접한 지 수시간~수일 이내에 알을 낳는다. 개구리는 보통 1월 말~3월 초 사이에 남쪽 지방부터 활동하기 시작한다. 서울에서는 보통 2월에 관찰됐던 관례에 비추어 한 달 정도 앞선 것이다. 국립공원공단은 “겨울이 따뜻한 데다 전국적으로 비가 와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일찍 깬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올해 기온은 평년보다 10도 이상 높았고 많은 누적 강수량을 기록했다. 기후온난화의 결과라는 말도 나온다.

개구리가 너무 일찍 잠에서 깬 것은 좋을 것이 없다. 계절을 앞질러 알을 낳으면 다시 한파가 왔을 때 집단동사할 가능성이 높다. 개구리만 빨리 잠자리에서 나와서는 먹이원의 생물시계에 맞출 수도 없다. ‘철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할 때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계절·절기를 모르는 것을 일러 철부지라고도 한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인간사다. 때를 안다는 것은 어렵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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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박사님이죠? 디스 이스 피터. 우리가 이겼습니다.” 상기된 목소리의 피터 바돌로뮤의 전화를 받은 게 2009년 봄, 11년 전 일이다.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196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고, 강릉 선교장에서 5년 가까이 머물다 한옥의 매력에 푹 빠졌다. 서울로 와서 잠시 여의도 아파트에 살았지만, 흙도 마당도 없는 답답한 곳을 떠나 1974년 동소문동 한옥으로 이사해 50년 가까이 한옥에서 살고 있다. 2004년 봄, 자신의 집을 포함해 동네가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된 걸 알고 이웃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2008년 재개발구역 지정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만에 취소결정을 얻어냈다. 재개발 않고 지금의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권리를 아주 힘겹게 얻어낸 것이다.

“교수님, 통화 가능하세요?” 지난해 12월 초, 교수단지로 불리는 정릉2동에서 단독주택 마당을 개방하는 정원축제를 7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정릉마실 김경숙 대표의 문자를 받고 바로 전화를 드렸다. “이제는 끝난 줄 알았던 재건축이 다시 살아 꿈틀거리네요. 우리 동네를 오래 지켜본 전문가로서 시장님께 의견서를 써주셨으면 해요.” 그러겠다고 답했고 며칠 전 의견서를 써드렸다.

교수단지 주민들과의 인연은 2010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졸업설계 수업 때 이곳을 대상지로 선정한 학생들과 현장수업을 하면서였다. 세계유산 정릉 입구에서 현장답사를 시작해 서울에 드물게 남은 단독주택 마을을 한 채 한 채 돌아봤다. 

주민들은 대문을 열고 마당을 보여주었고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었다. 학생들은 주민과 소통하면서 단독주택 동네를 잘 고치고 되살리는 재생계획을 세웠고 ‘초록이 물드는 동네’라는 제목으로 서울시 마을 만들기 학생공모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시상식 날 학생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짓던 주민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독주택 동네 ‘정릉2동’이 ‘정릉6구역’이란 낯선 이름의 재건축구역이 된 것은 2008년 10월이었다. 오래된 빌라단지 주민들은 재건축을 원할지 몰라도, 단독주택을 그대로 유지하길 바라는 더 많은 주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재건축을 원치 않는다. ‘정릉 사랑 주민모임’이 결성되면서 재건축 반대운동이 힘을 얻어 지금까지 재건축을 막아왔고 2020년 3월 ‘일몰제’ 적용으로 재건축구역이 해제되면 오랜 소망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재건축추진위가 기한연장을 신청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다시 불안해하고 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할 권리’ 못지않게 ‘안 할 권리’도 소중하다. 오래 살아온 내 집과 우리 동네에서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 권리는 왜 존중되고 보장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대단위로 개발해야 사업성이 있고 수익이 커지는 자본논리 때문이다. 

두 권리를 모두 다 존중하는 방안은 없을까? 있다. 개발단위를 줄이는 것이다. 사업성과 수익은 그 안에서 해결할 몫이다. 한 프로젝트의 사업성과 수익 때문에 다수 시민의 주거권이 더는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

<정석 | 서울시립대 교수·<천천히 재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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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갈대들이 차례로 엎드린다

바람이 지나가는 중이다



바람도 생각이 있어

여기를 가고 있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

수많은 말들을 쏟아 놓으며

시원스런 걸음으로 지나간다



갈대들은

엎드려 그 말들을

받아 적고 있다



문효치(1943~)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갈대밭에 바람이 지나간다. 갈대들이 몸을 매우 굽히고, 몸을 바닥에 댄다. 바람은 생각을 하면서 갈대밭을 지나가고, 갈대들은 엎드린 채 바람의 생각을 적고 있다. 이 시에서처럼 누군가를 혹은 어떤 대상을 “거대한 생각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혹은 그 대상에게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이를 여러 가능성과 다양성을 지닌 활물(活物)로 보게 된다. “거대한 생각의 몸”이므로 “수많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존재)의 보법(步法)은 시원시원하고 큼직큼직하고 당당하다.

한쪽에서 말하고 다른 쪽에서 그 말을 받아 적는 관계는 아름답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하지 않을 때 관계는 아름답게 된다. 김종삼 시인은 한 산문에서 “사랑의 손길이 오고 가는 아지랑이의 세계(世界)”라고 썼다. 우리의 관계에서도 아지랑이처럼 사랑의 감정이 눈에 아른아른하면서 움직였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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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프지만 10년 이상 가족과 함께 울고 웃던 어느 보이밴드 팬을 그만두고 얼마 전 BTS에 ‘입덕’했다. 작년 말 서울의 BTS 팝업 스토어와 올해 초 런던 BTS 포럼 줄에 서 있는 동안 과거에 대한 슬픔과 미래에 대한 행복감이 교차했다. 백발이 섞인 중년 남성이 어린 팬들의 긴 줄에 서 있는 건 좀 곤혹스럽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아내가 몇 시간의 긴 줄에 동반해주는 덕분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날씨와 당혹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촛불 때도 그랬다. 역시 가족이 최고이다. 난 지나치게 가족의 가치를 절하하고 공적 영역만을 강조한 철학자 해나 아렌트에 좀 불만이다. 가족은 <동백꽃 필 무렵>의 대사처럼 때로는 서로에게 전환적 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런던에서 BTS를 사랑하는 학자 ‘아미’들끼리 확대된 가족 공동체의 사랑과 우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렌트의 우려는 정당하다. 우리는 불안하면 공적 영역에서 후퇴해서 가족이나 폐쇄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의 달팽이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2020년도 여전히 불안사회이다. TV를 틀면 남한 크기만 한 면적을 태운 호주의 비극적 산불 소식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계는 도래한 기후위기에 대해 긴급 공동 대응을 해도 이미 너무 늦었을지 모르는데, 어이없게도 ‘화염과 분노’ ‘분열과 거부’의 정치가 스멀스멀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우울하게 전망한 미래는 항상 틀렸다는 점에서 일관되기 때문이다. 촛불이 발생할 가능성을 제로로 보았고, BTS가 한류 스타에서 21세기의 밥 딜런이 될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총선과 디플레이션에서도 나의 일관성을 믿는다.

어쩌면 내가 자꾸 틀리는 이유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유달리 강한 ‘퀀텀 에너지(Quantum Energy)’를 간과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물리학자가 있다면 볼멘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요즘에는 아무 데나 양자역학을 갖다 붙인다고 말이다. 하지만 며칠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IT 산업 전시회에서의 양자 컴퓨터 세션에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을 보면 이제 퀀텀의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 같다. 사실 나로서는 과거 월드컵 4강, 촛불, 그리고 최근 BTS 기적에 이르기까지 ‘퀀텀 에너지’ 외에 다른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최근 물리학과 경영학을 결합하려는 일부 학자들은 양자역학의 특성인 그 경이로운 역동성, 광대한 연결감, 모든 이분법의 타파, 초월적인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사회과학 개념으로 수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온몸과 영혼으로 노래하는 BTS의 연기는 그저 칼군무 이상의 빛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가사 메시지와 아미 간의 깊고 확장된 연결망은 또 어떠한가? 젠더, 인종, 국적 등을 다 넘어서는 탈이분법은 마치 파동과 입자 경계 파괴의 양자역학을 연상시킨다. 협소한 자아를 초월하여 우주의 광대한 에너지와 연결하고자 하는 태도는 과거 68혁명 영성의 예술혁명가인 밥 딜런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런던포럼에서 BTS는 촛불혁명의 밥 딜런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 한국은 이 에너지가 높은 리더십 레벨로 갈수록 꼭 사라지고 만다. 올해 불안사회에서 희망사회로 전환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즉 월드컵, 촛불, BTS의 성공 방정식인 퀀텀 에너지에 우리를 과감히 내맡기는 것이다. 반면에 정부, 기업, NGO, 교육기관의 리더십은 전략을 주도하지 말고 이 에너지의 흐름을 타면서 겸손하고 지혜로운 집행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마치 히딩크 감독, 촛불 집행부, 그리고 방시혁처럼 말이다. ‘전략은 집단지성이, 전술은 엘리트가’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도발적 테제는 한국에서 가장 잘 작동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수용하면서도 장기적 지혜를 가진 전술의 집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물론 리더십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자각하고 적극 변화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걸 안다면 지금 이 교착상태가 아닐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우리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광대한 에너지는 우리의 몸을 통해 이미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우리 각각이 ‘2020년 올해 새로운 시작을 할 마음이 있는가’일 뿐이다. 다시 아렌트를 소환한다면 인간의 가장 위대함은 부단한 탄생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능력이다. 이 탄생성은 불가능과 초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처럼 올해부터 몇 년간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전환점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우리 가족이 사랑했던 그 보이밴드도 BTS처럼 계속 성숙해가길 기원한다. 어쩌면 우린 모두 BTS와 아미이다.

<안병진 |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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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윤석열 사단’을 대거 물갈이한 검찰 고위간부 인사 이후 검찰 안팎의 갈등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당·정·청은 인사 과정에서 보인 윤석열 검찰총장의 태도를 ‘항명’으로 비판하며 전방위로 검찰을 압박하고 나섰다. 자유한국당은 검찰인사가 “수사방해를 위한 보복 인사”라며 추미애 법무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과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냈다. 주말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수호”와 “윤석열 사퇴”를 주장하는 두 집회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밤늦게까지 진행됐다. 엄연한 국가기관인 법무부와 검찰 간 갈등이 내부에서 조정되지 못한 채 시민들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검찰 고위직 인사를 두고 여권과 검찰의 기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3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진행된 장관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해 10월17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김영민·김기남 기자 viola@kyunghyang.com

검찰개혁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다. 그 시작은 검찰 인사부터다. 검찰은 조국 전 장관 수사 이후 보여준 여러가지 모습으로 ‘정치검찰’이란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고, 검찰개혁법안 통과 과정에서는 국회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추미애 법무장관을 ‘검찰사무의 최종 감독자’로 지칭하며 검찰개혁을 주문했다. 추 장관이 인사권을 통해 검찰개혁의 고삐를 당긴 것은 당연하다. 그간 일련의 수사가 과도했다는 여론에 비춰 보면 이번 물갈이 인사는 검찰이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윤 총장은 공식입장은 내놓지 않았지만, 인사 직후 청와대 비서실에 대해 압수수색에 나선 것을 보면 그의 속내는 충분히 짐작된다. 

그렇다고 여권이 항명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윤 총장 징계를 거론하고 나선 것은 도가 지나치다. 임기가 법률로 보장된 검찰총장을 흔드는 것은 근본 해결책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건 불과 6개월 전 윤 총장을 중용한 현 정권이 인사실책을 자인한 셈이고, 수사권 독립이란 대의에도 맞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인사를 앞두고 추 장관이 윤 총장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 그동안의 관행과 달리 요식 행위에 그쳤다는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통상 검찰 인사는 법무부 검찰국과 대검에서 자료를 만들어 장관과 총장이 의견을 조율했던 게 그간의 관례이지 않았는가. 윤 총장도 장관 호출을 거부하고, 실시간 성명을 내며 상급기관인 법무부에 맞대응한 것은 명분도 없거니와 설득력도 떨어진다. 

검찰개혁을 위해 검찰권의 남용과 편파성을 바로잡는 인사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작업이 검찰과 치고받는 식이거나 힘겨루기식으로 진행되어선 곤란하다. 이제 법무부와 검찰은 서로에게 겨눈 칼을 거두고 한번쯤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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