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방법원이 15일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인터넷사이트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초상권이나 명예훼손보다 양육비를 아이들의 생존권 문제라고 한 사이트 운영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배드파더스는 미혼모나 이혼한 싱글맘이 제보한 합의서·판결문을 토대로 양육비 약속을 어긴 부모의 얼굴 사진과 이름·거주지·직업 등을 게재하고 있다. 2018년 개설된 사이트엔 수백명의 신상정보와 ‘113건이 해결됐다’는 공지가 떠 있다. 이 재판은 지난해 5월 검찰이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한 뒤 재판부가 “일반적 명예훼손 사건과 다르다”며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국민참여재판이 열려 화제가 됐다. 지난해 2월엔 방송통신심의위에도 ‘사이트 폐쇄’ 요구가 접수됐으나 거부됐다. 자정을 넘기며 15시간 이어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렸고, 재판부는 대가 없이 양육비 고통을 알린 사이트에 대해 “공공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양육비를 뭉개는 부모들에게 ‘사회적 경종’을 울린 셈이다.

피해 양육자의 소송·추심을 도와주는 양육비이행관리원이 2015년 출범했다.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나 몰라라 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부서비스 후에도 양육비지급이행률은 30%대에 머물고 있다. 2015~2018년 소송으로 양육비 지급 명령이 떨어진 1만414건 중 받아낸 것은 3297건(31.7%)에 그쳤다. 여성가족부 한부모가정 조사에서도 73.1%는 양육비를 한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세 통계는 미혼모·싱글맘 3명 중 2명이 합의이행을 요구하거나 재판을 거쳐도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동인권단체들은 양육비 미지급으로 고통받는 아동이 100만명을 넘었다고 추산한다.

미국·영국·덴마크 등에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운전면허를 정지하고, 출국을 제한하며, 형사처벌도 하고 있다. 아이의 생명줄인 양육비를 사인간 채무보다 아동학대와 유기·방임 문제로 보는 것이다. 한국에도 소송이란 막다른 절차가 있지만, 피해자들은 시간·비용 부담에 속만 태울 때가 많다. 아이들의 미래를 벼랑으로 내모는 양육비 사기는 관용의 울타리 밖에 있다. 국회는 양육비 해태 시 법적·생활경제적 제재를 담은 10개의 계류법안들을 조속히 심의·처리하고, 한부모가정 양육비에 대한 국가적 책임도 더 높아져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요즘은 새해 인사보다 “2020년이 되면 자동차가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하는 진부한 실망을 더 많이 듣는다. 나는 ‘자동차가 날아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완전 과거형 아닌가? 날아다니는데 굳이 무겁고 바퀴 달린 자동차 모양일 필요가 없잖아’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러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더 진부한 인사를 하고 만다.

비록 2020년의 풍경이 어릴 적에 그렸던 상상화나 과학 엑스포 전시관에서 봤던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유튜브 ‘맞춤동영상’ 때문에 내가 충분히 미래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죽을 때까지 돈을 쓰지 않고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다고 저주받은 세대의 청년답게 아침 출근길에 부동산 대책을 브리핑하는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본다. 봐도 무슨 말인지 통 어렵기 때문에 금방 끄고 ‘오늘 뭐 먹지’를 검색해서 점심메뉴를 미리 골라본다. 수많은 맵고 짠 외식들을 보다가 갑자기 건강이 염려되어 건강식 위주로 검색어를 바꾼다. 장수를 위해 샐러드를 먹으라는 사람과 샐러드는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잘못된 식습관이라고 말하는 사람, 샐러드로 연간 억대의 수입을 올린다는 청년 사업가, 브로콜리를 먹는 고양이 영상이 같이 나온다. 당연히 고양이의 브로콜리 먹방을 선택하고 흐뭇하게 본 뒤에, 이어지는 연관 동영상 중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라는 멋진 가사가 있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라는 명곡을 재생해본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내 유튜브 메인 채널에는 ‘억 소리 나는 한강뷰 아파트’ ‘일주일 동안 샐러드만 먹기’ ‘고양이의 냉동잉어 먹방’이 같이 나오게 되고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하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한동안 유튜브를 켜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친구한테 얘기하니 친구는 가만히 살펴보면 그게 전부 다 나의 관심사가 아니겠냐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싫은 거다. 사람들 대부분 하루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을 떠올리고 망각할 텐데 유튜브 한번 봤다는 이유로 나의 허튼 뇌 활동 기록이 한꺼번에 전시되다니. 이것이야말로 SF영화에 나오던 미래다. 

‘인간,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수치심을 느껴봐’ 하는 로봇들의 저항!

나는 인공지능에게 지배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대책을 세웠다. 바로 ‘유튜브 영상에 댓글 남기기’다. 비웃지 마시라. 글 한 편을 대충 훑어도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것이 된다고 했다. 유튜브 댓글창을 보니 이미 굉장히 많은 감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고양이가 브로콜리를 먹는 영상에는 “고양이가 브로콜리를 먹는 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브로콜리가 아니라 콜리플라워인 것 같습니다”, 집값 떨어지는 징조들을 소개하는 영상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담합해서 집값 떨어질 때까지 안 사면 좋겠다”, 또 무언가를 열심히 폭로 중인 가로세로연구소의 영상에는 “변희재님 안경 벗고 렌즈 끼시면 멋질 것 같습니다”까지. ‘굳이 내가 댓글을 단다고 해서 로봇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한동안 유튜브를 켜지 않게 된다.

설날쯤이면 새해 인사를 슬슬 마무리해도 좋을 것이다.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튜브를 보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다. 상대가 봤을 수십개, 수백개의 영상 중에서 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채널은 무엇이고 그게 어떤 재미인지 묻고 싶다. 그러고는 마치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 방향을 유도하듯이 그렇다면 유튜브에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채널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어본 뒤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다가 유튜브를 끄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2020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새해 대화는 없을 것이다.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는 진리다  (0) 2020.02.06
하지 말아야겠다  (0) 2020.01.23
2020년 새해, 유튜브를 끄면 할 수 있는 일들  (0) 2020.01.16
그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0) 2020.01.09
익명의 시간  (0) 2020.01.02
처음 시를 쓰던 날  (0) 2019.12.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질학자 토끼를 따라가는 샛강 어귀나 노출된 사암층 어디.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슬오슬 춥다. 토끼털처럼 따스한 옷을 챙겨 입고 나서야 한다. 토끼 똥이 보이면 근처에 분명히 토끼굴이 있을 거다. 토끼를 뒤에서 부르면 휙 돌아보는 까닭은 눈이 뒤에 없기 때문. 시시한 수수께끼.

시베리아 하고도 바이칼 호수에 얼음이 땡땡 얼었겠다. 용기가 대단한 토끼는 앙가라강 얼음강을 건너기도 한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얼음호수를 내다보면서 꼭 토끼굴처럼 생긴 조그만 사우나 공간에 들어가 ‘바냐’를 즐긴다. 나도 러시아에 가면 종종 바냐를 해보곤 한다. 자작나무 잎사귀로 등때기와 허벅지를 자근자근 때리면서 더운 물을 뿌린다. 바냐란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 한 집에서 자작나무를 쪼개 불을 때고 바냐에 초대를 하면 주민들이 보드카와 빵과 청어조림을 들고 모이게 되는데, 어지간한 마을 대소사는 이 바냐 시간에 결정이 다 된다.

달구어진 돌덩이를 바라보며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이눔의 스키 저눔의 스키 수다를 떨어댄다. 뒤에다가 스키만 집어넣으면 무조건 러시아말 중급. 20도 30도 40도짜리 술을 나눠 마신다. 그러다보면 ‘졸도’할 수도 있다. 토끼굴 바냐를 마치고 나와 횡단열차에 오르면 출출하여 도시락 라면을 사먹게 된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이라는 상표의 네모진 컵라면은 그냥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 도시락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기차는 24시간 따뜻한 물을 제공한다. 온수를 붓고 기다리면서 젓가락 대신 포크를 만지작거린다. 토끼가 배춧잎을 조근조근 씹듯이 라면줄기를 후루룩 쩝~ 하고서 밖을 살짝 내다보면 하얀 눈이 삽으로 퍼서 뿌리듯 내려싼다. ‘눈에 맞아서 죽어봐라’ 하는 식으로다가 마구마구 내린다. “펄펄 눈이 옵니다, 마구마구 눈이 옵니다….” 토끼굴 같은 기차칸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며 어디론가 저마다들 흘러서 간다. 당신은 시방 어디로 가는 길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정  (0) 2020.01.30
땅거미  (0) 2020.01.23
토끼굴  (0) 2020.01.16
때밀이  (0) 2020.01.09
게릴라 쥐  (0) 2020.01.02
자작자작  (0) 2019.12.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커피를 좋아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마신 커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어쩌면 생애 처음 마신 커피였을 달달한 믹스 커피, 시험공부를 하다가 도서관에서 마신 자판기 커피, 추운 겨울에 손을 녹일 요량으로 마시던 캔 커피, 인상적이었던 카페, 함께 마신 사람들… 내 머릿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십에서 수천의 장소를 지나고, 수백가지 음식을 먹고, 온갖 사람을 만나 갖가지 사건을 경험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항상 떠올리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이 중 많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 뇌 속에 남아있다.  

이 기억들은 의도적으로 떠올리거나, 기억과 관련된 무언가를 마주함으로써 떠올려질 수 있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단어들이 적힌 목록을 외우게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목록에서 꽃에 해당하는 것을 떠올려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장미, 튤립처럼 꽃들만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단서를 주면, 사람들은 무작정 목록 속의 단어들을 떠올려 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보다 더 많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떠올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잊혀진 것은 아님을 뜻한다. 완전히 잊혀진 일도 있겠지만, 지금 떠올려지지 않을 뿐인 기억도 있다.

■ 기억흔적

뇌 속에서는 기능이 곧 구조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뇌 속의 어떤 부분이 구조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외부 사건에 반응해서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이나 신경세포의 활동 특성이 변하는데, 이렇게 변한 부분을 기억흔적(engram)이라고 한다. 기억은 기억흔적에 저장된다.

기억의 회상을 연구하려면 특정한 기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표시하고,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무 신경세포나 기억흔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 중의 일부가 기억흔적이 된다는 사실이 활용된다.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에서는 종종 급속초기발현 유전자가 발현되므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이 유전자가 발현된 신경세포들은 그 사건의 기억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에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를 찾아서,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실험자가 조절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이를 위해서 광유전학과 약물을 혼합한 방식이 더러 사용된다. (1)약물 X가 체내에 없을 때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의 발현이 유전자A의 발현을 유도하고, (2)유전자A의 발현은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의 발현(광유전학)을 유도하도록 생쥐의 유전자를 변형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생쥐에게 평소에는 약물 X를 투여하다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약물 X의 투여를 중단한다. 그러면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서는 유전자A가 발현되고, 연달아서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이 발현된다. 이렇게 하면 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이 방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한 연구에서는 생쥐를 상자에 넣고 발에 전기충격을 주어 공포학습을 시키는 동안, 위 방법을 사용해서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빛으로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는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들어가기만 해도 벌벌 떨었다. 그 상자가 전기충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억제하면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있어도 훨씬 더 적게 떨었다. 한편,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라도 전기충격을 받지 않은, 다른 상자에 들어가면 별로 떨지 않는다. 전기충격을 떠올릴 단서가 없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자극하면, 생쥐들은 마치 전기충격 상자에 있는 것처럼 벌벌 떤다고 한다.

위와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실제 없었던 사건의 기억흔적을 만들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는 다른 실험에서는 생쥐에게 향기A가 풍기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었다. 그 뒤 향기A가 나는 방과 다른 향기B가 나는 방을 생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면, 생쥐는 향기B가 나는 방에서 더 오래 머문다. 전기충격을 받았던 기억과 관련된 향기는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쥐가 향기A를 맡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는 대신, 향기A에 반응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키는 동안 회피 반응을 강화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향기A를 맡은 적도, 전기충격을 받은 적도 없었음에도 생쥐들은 향기A가 나는 방보다 향기B가 나는 방을 선호했다. 이는 생쥐에게 향기A를 기피하는 기억이 인공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기억 연구에는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 기억: 떠올려지고 변해가고 잊혀지는

기억은 영구불변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기억의 내용이 변하기도 하고, 영원히 잊혀지기도 한다. 요즘 자주 접하는 것들과 거리가 멀어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오늘 또 하루치의 행복한 기억을 쌓아가시길.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 ㄱ씨를 보면 흰 토끼가 떠오른다. 통통한 하얀 볼, 늘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도드라진 앞니 두 개. 그런데 그날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흡사 억울한 토끼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이렇다. ㄱ씨는 하나의 집이었던 것을 여러 원룸으로 쪼갠 다가구주택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열·방음 등에 문제 있음은 당연했고, 기타 수리 가능한 문제도 건물 주인이 제때 고쳐주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불러 수리한 뒤 영수증과 함께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기간 동안 버틸 따름이었고, 기한이 만료되자 쾌재를 부르며 모든 짐과 함께 탈출했다.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벽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환풍이 어려운 구조를 가진, 노후된 주택 자체 문제라고 ㄱ씨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배 비용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정확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은 채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버텼다. ㄱ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주인은 모친과 통화하며 그동안 ㄱ씨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지 사생활을 노출하며 ㄱ씨를 깎아내렸고, 모친에게도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사생활 보호에 어찌나 둔감한지, 그는 일전에 잠긴 문을 열고 침입해 ㄱ씨의 비명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여서 ㄱ씨는 더욱 놀랐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나도 이제 1인 가구 6년차다. 6년 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그럼에도 ㄱ씨의 얘기에 새삼 놀란 것은, ‘종합판’이어서다. 한두 가지 결점을 가진 집주인은 흔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나 다 갖추다니…. 이제 2020년인데,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주인이 멸종하지 않았다니….

ㄱ씨가 서투르긴 했다. 특히 보증금 받기 전 짐을 다 빼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얘기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서툰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안되는 거잖아. 밟힐 것 같은 대상은 짓밟고 빨대 꽂아 부를 증식하는 삶의 방식, 혹시 나이 지긋한 집주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닐는지.

배경에는 이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 자기 소유의 주택이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권리가 제한되며, 동시에 지켜줘야 할 세입자의 권리가 있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하는 임대인에게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고 옆구리 세게 꼬집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주택 문제’를 다루는 뉴스에 관심이 줄었다. 대부분이 서울의 아파트 매매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내겐 1000만원도 큰돈인데, 그것도 오랜 기간에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데, 몇 억원을 우습게 말하는 기사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자극됐다. 자극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움 안 당하려면 빚내서 집 사야 한다는 ‘심리’.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울에서 아파트 사는 것, 어차피 이번 생엔 가망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따지면 이쪽이 다수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은 서울의 아파트를 가졌거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계급을 위한 뉴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분들이 감정이입하는 계급인가 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매매가 등락을 매일매일 중계하듯, ‘해도 너무한’ 집주인이 발견될 때마다 한 명 한 명 대서특필한다면? 자신의 행위가 파급력 있는 매체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식한다면, 해도 너무한 짓은 좀 덜 하지 않을까? 세입자가 통화 내용 등 증빙자료와 함께 제보하면 후속 취재를 통해 보도하는 상설 코너가 있는 프라임 타임 뉴스쇼를 그려본다. ㄱ씨와 같은 이들이 제보할 수 있게. 앞으로의 10년은 나아지기를.

<최서윤 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