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기지 여러 곳이 ‘발암물질 범벅’인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15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모린 설리번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의 보고서(2018년 3월 작성)에 따르면 주한 미군기지 5곳의 지하수에서 기준치를 최대 15배 초과한 과불화 화합물이 검출됐다. 과불화옥탄산(PFOA)과 과불화옥탄술폰산(PFOS) 등 과불화 화합물은 발암물질이다. 이런 유해물질이 미군기지 가운데 대구와 경북의 2곳, 의정부 2곳, 군산 1곳에서 기준치를 초과해 검출된 것이다. 주한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관리실태가 엉망이라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에 있는 캠프 스탠리 주한 미군기지의 문이 15일 굳게 닫혀 있다. 김기남 기자

그동안 국내 미군기지의 환경문제는 벤젠, 톨루엔, 크실렌 등 유류 관련 오염이 대부분이었다. 미군기지 주변 토지와 지하수 오염이 기지 내 기름유출 사고로 다뤄졌기 때문에 과불화 화합물 오염은 생각지도 않았다. 미군기지가 또 다른 유독화학물질로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총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과불화 화합물의 유해성은 끔찍하다. 태아와 어린이의 발달지연, 콜레스테롤 증가, 전립선·신장·고환암 등과 관련성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고는 미 국방부 스스로가 밝힌 위험성이다. 더구나 과불화 화합물은 자연은 물론 인체 내에서 거의 분해되지 않고 잔류해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린다고 한다. 국제암연구소는 발암 추정물질로 분리하고 있다. 또한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에 관한 국제협약인 스톡홀름협약은 PFOS와 PFOA의 제조·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출처:경향신문DB)

이번에 유해물질이 발견된 미군기지들은 미군이 사용 중이다. 미군기지 내 과불화 화합물 오염도가 높은 이유는 이 물질이 포함된 소방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소방장비 사용이 계속되는 한 발암물질의 배출은 중단되지 않는 것이다. 비가 올 때마다 미군기지의 유해물질이 스며들어 기지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지하수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다.

주한 미군기지 내 기준치 이상의 과불화 화합물 검출은 미 국방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환경오염 실태를 밝힌 만큼 왜곡이나 축소는 있을 수 없다. 미국은 미군기지 내 과불화 화합물 오염 대책을 즉시 마련해야 한다. 한국 정부도 미군기지 인근 지역의 지하수 오염실태를 정밀조사하고 주민건강 영향조사도 실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피해는 미국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차제에 미군기지 오염정화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주한 미군기지라 해도 땅을 빌려주고 오염 뒤처리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호주의 산불이 언제 시작됐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9월입니다.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산불은 시드니 등 대도시가 위치한 호주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면적 절반에 달하는 4만9000여㎢가 불탔고 사망자도 24명에 달하죠. 야생 동물의 피해도 막대합니다. 코알라 등 포유류를 비롯해 동물 10억 여마리가 화재로 죽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산불 열기는 너무 맹렬해 자신의 날씨를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산불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이죠. 되풀이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지난해 아마존 산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대규모 산불은 바로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하면서 산불 위험도 증가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죠. 호주 산불은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캥거루섬 숲에서 7일(현지시간) 한 야생동물 구조 활동가가 산불 피해를 본 코알라를 구조하고 있다. 캥거루섬 _ EPA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은 이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만 해도 4대강사업으로 인한 하천 오염, 40%에 달하는 석탄 중심 발전, 공장식 축산 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평화와 안보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북핵에 매달려 있을 때 한국 국방 예산이 50조원을 돌파했음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핵을 들고 밑에서는 F-35A 전투기를 날리는 게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돌이켜보지 않죠. 기본적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폭언·체벌·강요 등에 시달리는 학생, 기본적 삶도 힘든 빈곤층,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성소수자, 법적·신체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 모두 선거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무관심에는 제도적 요인도 큽니다. 이들이 뛰어온 선거판에서는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민주당계 아니면 한국당계 정당 중 하나가 이기는 선거제도에서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제가 통과되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제도는 정당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차이를 좁히려는 것이죠. 그래서 20대 총선에서 7.2% 정당득표율에도 불구하고 2% 의석만 차지한 정의당의 비극을 없애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녹색당, 청년당, 노동당, 동성애자당 등이 원내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정당이 여러 목소리를 내면 기존 거대정당이 외면했던 이슈가 주목을 받을 겁니다. 법과 정책으로도 발전될 테죠. 당장은 아니더라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정권을 잡는 날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산불도, 동성 간 결혼도 심각하게 논의하게 될 겁니다. 민주체제 핵심은 권력 분화이니 양당체제를 끝내고 여러 당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그만큼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발전은 쉽지 않겠죠. 기존 정치 지도자들의 퇴행적 행태가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장 한국당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꾸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당당히 주장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처럼 자기 진영 통합을 외치는 것 또한 미래에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극단적 정당의 출현도 가능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의 경우처럼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도 생길 수 있습니다. 

유권자의 책임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다양한 정당은 그만큼 우리를 더 잘 대변하게 될 테니까요. 미움과 독선이 가득한 정당들이 득세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렇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포용과 관용을 우선시하는 정당들이 득세하는 여의도, 그런 정당을 키워낼 우리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주대의료원과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장) 간의 갈등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사건은 유모 아주대의료원장이 이국종 교수에게 폭언과 욕설을 한 녹취파일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의료원 측은 “녹취는 4~5년 전 상황”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유 원장과 이 교수 간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급기야 16일 아주대 의과대학교수회가 이번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유 원장은 이 교수에게 사과하고 사임하라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대학 의료원장이 중증외상치료의 권위자인 유명 의사에게까지 언어폭력을 자행한 현실이 개탄스럽다.

아주대 교수회는 이번 사태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진단했지만, 의료원장 개인의 일탈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사태의 이면에는 권역외상센터를 둘러싼 의료원장과 이 교수 사이의 오랜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료원 측과 이 교수는 외상센터 운영 방식, 의료진 배치, 헬기 이송 범위 등을 둘러싸고 충돌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적자운영, 인력부족 등 권역외상센터의 열악한 현실이 깔려 있다. 

권역외상센터는 중증외상환자의 응급수술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공급체계다. 전문의료진이 24시간 대기해야 하고 시설과 장비 등에 적잖은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2018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권역외상센터 3곳의 손익현황을 분석한 결과, 수입보다 손실이 훨씬 크게 나타났다. 정부의 보조금이 없으면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민간병원의 권역외상센터 운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얘기가 나오겠는가.

정부는 2년 전 권역외상센터 전문의 지원금과 간호사 인건비를 인상하는 등 중증외상 진료체계 개선대책을 내놓았다. 보건복지부는 권역외상센터 지정병원에 매년 7억~27억원의 외상전담 전문의 충원 비용을 지원한다. 또 외상전용 중환자실, 입원병상 확충 등 명목으로 80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외상센터에 지원된 예산은 532억원이었다. 그럼에도 외상센터의 의료인력과 시설은 크게 부족하다. 외상센터는 중증외상환자에게는 꼭 필요한 사회안전망이다. 전국에는 17곳의 권역외상센터(준비 3곳 포함)가 있다. 정부는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외상센터가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과 보완에 나서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법원이 16일 ‘박근혜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KBS의 세월호 참사 보도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현 의원(무소속)에 대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방송법 제정 57년 만에 언론을 통제한 정치권력을 단죄한 첫 대법원 판결로 의미가 크다. 다시는 권력이 언론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정현 무소속 의원이 지난해 10월28일 2심 선고공판 출석을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 의원은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KBS의 보도를 통제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의원은 참사 직후 KBS <뉴스9>가 해경에 대해 7건의 비판적 보도를 하자 당시 김모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보도하면 전부 다 해경 저 XX들이 잘못해갖고 지금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할 것 아니냐”며 따졌다. 검찰특별수사단 재수사를 통해 드러난 해경의 구조·수색 난맥상으로 볼 때, 이 의원의 이 발언은 ‘진실을 덮으라’는 주문이었다. 이 의원은 또 이 방송사 심야프로그램 <뉴스라인>의 보도 방향과 관련, “다른 걸로 대체를 해주든지 녹음 한 번만 더해달라”고 했다. 이 의원 요구로 해군과 해경의 손발이 맞지않아 초기 구조작업이 지연된 부분이 뉴스에서 삭제됐다고 한다.

이 의원의 행위는 ‘누구든지 방송 편성에 관해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방송법 위반이다. 명백하게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대법원은 법리와 증거만을 볼 뿐, 양형을 따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형량만 보고 판결이 주는 의미까지 퇴색될까 두렵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통령의 입’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권에 이어 9년간 언론을 장악했다. 당시 KBS, MBC 등 공영·공공 매체들이 정권의 무능과 비리에 눈감았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시 KBS 측이 권력의 부당한 요구를 일부라도 수용했던 것이 그 같은 점을 말해준다. 대법원 판결은 이와 같은 권력의 부당한 언론 장악과 통제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 판결은 국가와 언론에 질문을 던진 셈이다. ‘국가와 권력기관은 진심으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존중하고 있는가. 또 언론은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8894글자 중 겨우 56자였다. 조금 더하자면 174개 글자다. 합해도 230글자, 전체 글 중 2.6%에 불과하다. 취임 3주년이 된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를 언급한 글자의 개수다. 글자 숫자만 가지고 중요도를 다루기엔 무리가 있지만 빈약한 건 사실이다. 더 놀라운 건 신년 기자회견 당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물은 기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새삼스러운가!

기후위기는 정치 지도자의 어젠다다. 그저 급작스러운 날씨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2010년 기후위기로 러시아에서 밀 생산량이 25% 줄어 수출이 중단되었다. 이웃 시리아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밀값으로 지출하던 서민층이 폭동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결과 대거 난민과 이슬람국가(IS)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산불이 휩쓸고 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버종 지역에서 15일(현지시간) 한 주민이 불에 탄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주의 산불도 산불로 끝나는 게 아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약 5만7000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부국 호주의 시민들이 장기간 지속된 산불과 기후변화의 여파로 기후난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재산상 손해는 44억달러에 달하며 야생동물 10억여마리가 폐사하였다.

지난해 12월 기후변화 당사국총회가 진행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독립 평가기관인 저먼워치, 뉴클라이밋연구소, 기후행동네트워크(CAN)가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2020’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예상했듯이 전체 61위 중 58위로, 지난해 57위에서 한 단계 떨어졌다. 100점 만점에 28.53점. 그런데도 여전히 기후변화를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탄소감축에 관심이 없다. 아직도 석탄발전소는 60기나 가동하면서 오히려 7기를 더 건설하고 있고 동남아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선진국은 탄소배출을 감축하고 있지만 우리는 계속 증가하여 201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7억t을 넘겼다.

산불로 부모를 잃은 새끼 캥거루와 왈라비들이 15일(현지시간) 호주 퀸즐랜드주 비어와 호주동물원 야생동물병원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서 쉬고 있다. 호주에선 지난해 9월 이후 심화한 남동부 지역 산불로 남한 면적보다 넓은 땅이 불탔으며 동물 10억마리 이상이 희생됐다. 현재까지 28명이 사망하고, 주민 10만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연합뉴스

유럽의회는 지난 11월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였고, 세계 1200여개 지방정부들도 이 기후위기 비상사태에 공감하여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신년사에서 ‘지구 온난화는 현실이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적 능력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지금도 가능하다. 오늘 우리가 행동에 나서지 않아서 나타나는 결과는 우리의 자녀, 그리고 손자 세대가 겪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총리들의 신년사에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각오와 결심이 비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호주 산불, 미국의 대홍수, 인도의 열파 등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우리는 ‘대재앙이 뉴 노멀로 자리 잡은 세계’에 살고 있다. 과연 재난이 우리를 피해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나. 우리는 누가, 어디에서 우리의 안전과 미래를 지켜줄까.

호주산불로 코알라가 새까맣게 타죽고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뉴스가 띄엄띄엄 나오는 가운데 이제 모든 뉴스의 중심은 선거, 선거로 흘러 내 가슴도 타들어 간다. 그러나 선거는 모든 이슈의 블랙홀이 될 수도 있고 혁신가들이 무대에 오르는 경연장이 될 수도 있다. 미래를 읽고 대전환을 이끌 기후혁신가들의 등장을 기대한다.

<이미경 | 환경재단 상임이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 사람이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나이는 몇 살부터일까. 어린이의 말에 우호적인 가정에서조차 아이의 의견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간식 종류 같은 가벼운 선택에서는 어린이를 한껏 존중하지만 집 안의 가구를 옮기는 일 정도만 되어도 어린이의 발언은 빠르게 배제된다. 대화가 중요하다며 협의를 청하는 순간에도 결론은 대개 내려져 있다. 그럴수록 어린이는 떼쓰기로 대응한다. 이때 “너는 네 생각만 하는구나” 같은 비난을 들으면 스스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던 어린이는 위축된다. 어른의 입장에 공감하고 반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시민의 제1조건은 생각과 의견을 갖는 것이다. 어린이가 사회의 갈등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에서조차 겉치레로만 존중받는다면 그는 언제쯤 진짜 시민이 되어볼 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인정받으며 현실을 바꾸어보는 경험은 소중하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규제와 훈화가 아니라 실질적인 실행과 거절의 권리를 손에 들어야 시민의 삶에 다가갈 수 있다.

만 15세인 페넬로페 레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유니세프 대사로 어린이 기후패널을 이끌고 유엔 기후회담에 참여한다. 여덟 살부터 기후 문제에 대해 발언해왔으며 열한 살 때는 어린이 환경단체인 에코 에이전트의 이사로도 일했다. 그는 “기후변화는 어린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내 친구와 이웃, 다음 세대가 살아갈 기회를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유니세프 노르웨이의 카밀라 비켄 사무총장은 페넬로페 레아야말로 현재 가장 분명하고 강한 목소리를 지닌 기후변화 활동가라고 평했다. 2019년 예테보리도서전에서 해양 폐기물을 다룬 그림책 <플라스틱 섬>에 대한 북토크가 열렸는데 그날 온 50대 노르웨이 여성은 존경하는 환경운동가에게 이 책을 선물하겠다며 이명애 작가로부터 사인을 받아갔다. 그 존경의 대상이 바로 페넬로페 레아다.

위의 사례를 읽고 우리 현실과 온도차가 크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거기에는 나이서열주의가 있을 것이다. 아동과 청소년이 정치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면 어른들은 나이도 어린데 대견하다고 시혜적 칭찬을 내놓거나, 나이도 어린데 뭘 아느냐고 비웃는다. 두 반응에는 모두 그들을 한 사람의 동료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적 태도가 있다. 어린이는 잘 자라서 어른을 기쁘게 하려고 예비적으로 존재하는 인력이 아니라 나름대로 오늘을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민의 활동에 나이가 제약이 될 수는 없다. 아동,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이다. 2011년 데뷔해 유튜브에서 4억4000만 조회수를 기록한 멕시코의 청소년밴드 바스케스사운드(V-sounds)는 이주 아동이 당하는 차별과 청소년들이 겪는 폭력을 막기 위해서 정치활동을 병행 중이다. 2006년생인 페루의 프란체스카 아론손은 10대 소녀들이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정치, 지역사회, 학교 운영에서 청소년의 참여권 확대를 촉구하며 분투했고 그 덕분에 4·15 총선부터는 만 18세도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유권자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게 되면서 다가올 변화를 걱정한다. 그러나 그동안 아동과 청소년의 생각과 목소리를 귀여움이나 귀찮음으로만 받아들였던 자신의 편견에 찬 모습을 더 염려해야 한다. 몇 살이냐고 나이를 묻기 전에 그 동료 시민의 생각을 정중히 청해듣는 태도가 먼저다.

<김지은 |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후의 편의점은 초등학생들의 차지다. 다른 편의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용이 일하는 편의점은 늘 그랬다.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가 두 곳이나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의점은 가깝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편의점 내 테이블에 앉아 삼각김밥을 불닭볶음면이나 국물떡볶이에 찍어 먹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용은 속으로 그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이들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학원 숙제를 하기도 했고, 연예인들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중2병이 일찍 찾아온 6학년 아이들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블루레몬에이드를 두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마시기도 했고, 연애를 하는 아이들은 하리보 한 봉을 사이에 둔 채 ‘여보’ ‘자기’ 해 가며 말랑말랑한 서로의 볼을 꼬집어대기도 했다.         

정용이 일부러 밤 9시 근무로 옮긴 것은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쓰레기가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그랬다.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무언가가 묻어 있거나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이들 옆에서 계속계속 그걸 치우다 보면 어쩐지 어떤 수치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아이를 만난 것은 밤의 편의점에서였다. 6학년이었고, 남자아이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밤 10시15분 정확하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롱패딩에 무거운 백팩을 멘 아이. 아이는 늘 혼자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컵밥을 먹었다. 그게 저녁인 듯싶었다.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영어 단어장을 보았고, 중간중간 필통을 꺼내 어떤 대목에 밑줄을 긋기도 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흘리지도 않았고, 밥을 먹고 나면 물티슈로 테이블을 깨끗이 훔치기도 했다. 편의점을 나갈 때면 정용을 바라보며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꼭 그런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정용은 그 아이에게 자주 눈길이 갔다. 밤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정용은 아이에게 슬쩍 사이다를 내밀기도 했고, 츄파춥스 사탕 하나를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예의 바르게 받았다. 한 달 넘게 아이는 꾸준히 편의점에 왔지만, 정용은 그 이상 다가가진 않았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집은 어디니? 왜 혼자 밥을 먹니? 그딴 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정용은 무언가 다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정용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이었다.

“형…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진 않았지만 정용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말했다. 말인즉슨 일월 첫째 주 금요일에 있는 졸업식에 자신과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 졸업식? 졸업식은 이월이 아닌가? 알고 보니 요즘 초등학교 졸업식은 대부분 일월에 열린다고 했다.       

아이의 학교는 특이하게 졸업식장에 부모나 형제 중 한 명과 함께 입장한다고 했다. 함께 단상에 올라 한 명은 졸업장을 받고, 또 한 명은 학교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는 것, 그게 전통이라고 했다.

“한 시간이면 되거든요.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만….”

정용은 그 말을 하는 아이에게 또다시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것 역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생각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용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한 시간, 단지 한 시간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내 어떤 은근한 자부 같은 것이 느껴져 귓불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졸업생은 모두 백십명이었다. 정용은 학교 강당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아이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의자에 앉은 채 계속 떠들고 부모와 함께 셀카를 찍어댔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곧은 자세로 앉아 단상을 쳐다보다가 이따금 안경을 닦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아이가 불러도 말없이 웃어주기만 했다. 괜히 어색하고 긴장한 것은 정용이었다. 아이에게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계속 힘을 주기도 했다. 식이 모두 끝나면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같이 먹어야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정용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식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졸업생이 한 명 한 명 단상에 올라올 때마다 강당 뒤편 대형화면에 아이의 사진과 함께 장래희망이 적힌 글귀가 떠올랐다. 정용은 그제야 아이의 이름이 ‘김호창’이라는 것과 아이의 꿈이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래, 의사도 되고, 병원도 차리렴. 그래서 나중엔 오늘 같은 날은 아예 기억도 하지 마렴. 정용은 그렇게 아이를 응원해주었다. 정용은 아이의 진짜 친형처럼 손을 잡고 단상에 올랐고, 정중하게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식이 모두 끝나고 정용은 아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꽃다발도 없이 졸업장만 든 상태였다.

“어디, 짜장면이라도 먹으러 갈까?”

정용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이는 그렇게 말한 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편지봉투였다.

“형,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아빠가 많이 넣지는 못했대요.”

아이는 그러면서 다시 한번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편지봉투에는 삼만원이 들어 있었다. 정용은 그 봉투를 든 채 잠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돌아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용은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수치심과는 또 다른, 어떤 무섬증 때문이었다. 교문에 내걸린 ‘축 졸업’ 플래카드가 바람에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이기호 | 소설가·광주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