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특별법에 의한 새로운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위원회의 성과적인 활동을 위해선 위원들 간 합의정신이 지켜지고, 전문위원들의 전문성이 제대로 발휘되며, 별정직 공무원들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등 필요한 과제가 많다. 다른 과제들도 중요도가 낮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소명의식 차원에서 특별히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바로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5·18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미 역사적, 법률적 평가가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북한군 개입설이나 빨갱이 프레임을 여전히 주장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진상규명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좌우 스펙트럼에 따른 갈등은 거의 치유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 출범하는 진상규명위원회도 최초 발포 명령자, 암매장 의혹 사건 등 조사의 진행에 따라 새로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여지도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든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었다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예컨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초 발포 명령자로 밝혀지든, 밝혀지지 않든 정치적 스펙트럼에 따른 반발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면 그 어떤 정치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민 다수로부터 위원회가 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된다. 

절차적 정당성은 20세기 중반 이후 민주주의 법치 원칙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행정절차법의 제정을 비롯해 절차적 정당성을 제고하는 각종 법제도가 구비되어 있다. 아쉽게도 이번 위원회 출범의 법적 근거가 된 특별법에는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을 명시한 조항이 없다. 물론 명시적 규정이 없더라도 법적인 의미에서는 절차적 정당성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더욱 강조할 필요성은 있다.

진상조사의 절차적 정당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우선 위원회를 구성하는 위원들과 곧 선발되게 될 별정직 공무원들이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위원회 활동의 기본 원칙으로 절차적 정당성의 당위성을 늘 환기해야 한다. 별정직 공무원 채용 후 절차적 정당성의 의미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법학 전문가들의 교육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조사 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는 철저하게 절차적 정당성의 원칙에 따라 모든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 나아가 조사의 대상이 되는 기관과 당사자들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진상규명에 제대로 협조해야 한다. 

모든 진상규명은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을 바로잡고자 하는 관계자들의 사명감이 아무리 절박하다고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되는 전제 위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는 진상규명은 반대 측으로부터 새로운 거짓주장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할 일이 많고 최장 3년으로 예상되는 활동 기간 동안 격무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는 과거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기록물 60만쪽 분량을 재검토하는 것만도 겨우 몇 십명에 불과한 위원과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해야 할지 가늠이 안된다.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 법치 원칙에서 내용적 정당성과 함께 핵심적인 양대 기둥이다.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만전을 기해야만 새로운 위원회의 활동이 5·18과 관련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권영태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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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아이를 글에서 호칭해야 할 때 ‘김○○씨’라고 한다. 예를 들면 “김○○씨는 오늘도 나의 핸드폰을 세면대에서 열심히 씻고 있었다”와 같은 것이다. 그가 나를 ‘부글부글’하게 만든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종종 쓰기도 한다. 이것을 육아일기 단행본으로 출간하자는 제안도 몇 번 받았는데, 주양육자가 아닌 사람이 육아에 대해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무엇보다도 전쟁처럼 아이를 돌보고 있을 내 또래의 여성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기에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페이스북의 글을 본 사람들이 “왜 아이를 ‘-씨’라고 부르시나요, 남처럼 느껴지지 않나요?”하고 묻기도 한다. 아내도 나에게 “아이가 남이야?”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을 전한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말로 그를 남처럼 여기고 싶어서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만큼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다.

아이를 보면서 남들보다 빨리 걸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말을 빨리하면 좋겠다, 남들보다 키가 크면 좋겠다, 하는 욕망을 가졌다.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 나면 남들보다 받아쓰기를 잘하면 좋겠다, 1등을 하면 좋겠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겠다, 대기업에 취직하면 좋겠다, 하는 것으로 그 욕망을 확장시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그 자신의 속도가 있을 텐데 나는 나의 기준에 그 속도를 맞추려고 한다. 그것은 나의 기준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기준일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도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를 아이에게 강요해 왔을 것이다. 

이전에 청소년을 위한 ‘진로 박람회’에 강연을 하기 위해 간 일이 있다. 많은 부모들이 초등학생 아이와 함께 왔다. 그들이 나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아이에게 좋은 직업을 찾아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평범하면서 동시에 훌륭한 부모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찾아주고 싶다는 말보다는 찾게 해주고 싶다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진로 역시 아이라는 개인이, 그 타인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되면 좋겠다는 부모의 마음이 결국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거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를 향해 한없이 수렴하는 존재다. 아이는 부모를 향해 다가가고, 부모 역시 아이를 향해 더욱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서로 다정하고 정답게 지내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나 가까워지고 나면 많은 부모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만다. 아이가 부모의 욕망대로 움직이기를,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기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계속 나의 아이를 ‘-씨’라고 쓰려고 한다. 그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와 같은 평범한 부모는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싶어질 것 같아서다. 그것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할 그 대상이 결국 존중해야 할 타인임을 감각하기 위한 일이다. 그가 앞으로 겪을 어려움은 그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도정일 것이기에 나는 그를 가장 가까운 타인으로서 응원하고 싶다.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존감을 가진 객체임을 늘 떠올려야 한다. 아이뿐 아니라 나와 소중한 모든 이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행복한 삶은 스스로 온전히 선택하고 책임지며 자신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과 속도를 무시하는 폭력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2020년 새해에도, 나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가까운 타인들이 행복하고 잘되기를 바란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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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진 DJ’의 얼굴이 선연하다. 1996년 총선 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단독 영수회담한 날이다. 브리핑하던 DJ는 요체만 말한 뒤 당사 지하 복집에 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했다. “칼국수 내놨는데 그것도 대통령 말 듣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YS는 소식가, DJ는 대식가였다. ‘십중팔구는 영수회담의 주도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할 때 떠올리는 컷이다.

영수(領袖). 정치조직 우두머리를 뜻하는 이 말은 오래전부터 대통령과 야당대표 회담에 붙여졌다. 한자가 다르지만, 여당 총재인 대통령(領)과 당수(黨首)의 끝말을 합쳤다고 풀기도 했다. 회담은 화전(和戰)의 고빗길이거나 국가 의제를 놓고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1990년 3월 DJ와 노태우 대통령 회동이 대표적이다. 대통령 공약인 ‘중간평가’를 하지 않고, DJ는 5공 청산과 광주시민 명예회복, 지방자치제를 손에 쥐었다. 1997년 대선 전 외환위기 화두로 만나 ‘대선 공정관리’와 ‘퇴임 후 안정’을 담판한 DJ-YS 회동도 정치적 갈림길에 만났다.

영수회담의 또 다른 얼굴은 ‘밀담’이다. 대통령과의 비공개 대화로 ‘야권 원톱’을 인정받던 시절엔 더 그랬다. 1975년 박정희-YS 회동은 ‘싸꾸라’ 시비도 일었다. “자네도 대통령 한번 해야지”라고 했다는 뒷말이 나오고, YS도 독대 후 부드러워지면서다. 2시간30분이나 만난 2005년 노무현-박근혜(한나라당 대표) 회동엔 ‘대연정’이 돌출했다. 탄핵설이 불거지던 2016년 11월 민주당 의총에서 거부된 박근혜-추미애(대표) 회동도 물음표가 달려 있다. 늘 여당 대표와 함께 만나던 박 대통령이 먼저 단독회담을 급제안한 이유가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3일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민생부터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전날 영수회담 제안 뒤 청와대에서 “구체적 내용을 물어왔다”면서다. 그는 “이 정권의 소득·성장·분배·고용 모두 KO패”라고 했다. ‘심야토론’ 논전을 원하는 걸까. 정가에선 ‘여·야·정협의체’는 줄곧 걷어차면서 정치적으로 힘든 고비마다 단독 영수회담을 요구하는 ‘저의’도 도마에 오른다. 민생 대화는 누구나 반기지만, 야권 내 ‘영수’ 위상과 밀담을 꾀하는가 싶어서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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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법안 발의 1319일 만의 결실이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청년도 있었다. 이런 날이 올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까지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이 노력을 했다. 그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청년기본법은 여야 간 이견이 없었던 비쟁점법안이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발목 잡기에 법안 통과는 녹록지 않았다. 20대 국회 1호 법안을 청년기본법으로 발의하고도 청년의 삶을 외면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총선을 앞두고 청년과 ‘동반자’가 되겠다고 한다. 보수야당과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들에 더 화가 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사이 돈 때문에 만남을 피하고 끼니를 거르는 청년들도 있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학원비와 주거·생활비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청년까지. 청년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주위에 수많은 청년들이 학력, 지역, 젠더 등의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다. 다들 크게 모나지 않은 청년들인데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그간 청년들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기성사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순간 취업을 하지 못한 자는 우리 사회에서 말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소득불균형과 자산격차가 교육과 직업까지 대물림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 불평등이 임계점에 와 있고, 그 중심에 청년들이 놓여 있다. 월 200만원 미만 저소득 부모의 자녀 역시 저소득 확률이 절반 이상(56.4%)이고,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취업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확률은 3분의 1(37.1%)이나 된다. 

청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적어도 공정한 출발이 필요하다. 절차적 공정성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 청년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청년정책도 변한다. 청년정책의 공백과 빈자리에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서울시가 2015년부터 시작한 청년수당은 다양한 정책적 효과를 확인시켜준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청년 10명 중 7명 이상(76.6%)은 목표를 찾거나 구직에 나섰고,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찾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서울시는 지난 19일 국내 최초로 ‘청년 불평등 완화를 위한 범사회적 대화기구’를 발족했다. 100여명의 다양한 시민들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해 토론하고 대안을 만들 예정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의 청년들도 눈에 띈다. 앞으로 2년간 공정·격차 해소, 정치·사회 참여, 분배·소득 재구성 각 3개 분야 전문가, 활동가 그리고 자문단이 시민들과 함께 공론의 장을 꾸려갈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시도다. “우리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납작한 공정성’이 아닌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대인 것 같다.

“소득은 굶주린 배를 채우지만, 자산은 삶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한 학자의 말은 정책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청년 불평등 해결의 출발점은 목소리가 박탈된 청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것이다. 사회가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비로소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그동안 “분노해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청년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이제 서울에서 시작한 청년들의 ‘들려질 권리’가 타 지역과 중앙정부에까지 이어지면 좋겠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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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넉달 전 끔찍한 추석이었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서다. “그 놈아 참 못쓰겠더만.” 공기업 다니는 큰형(59)이 TV를 가리켰다. 사흘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조국 법무부장관이 보였다. “아따 못쓰긴 뭐가 못써요. 형도 저런 종편이나 유튜브만 보지 말라니까.” 구보씨(54) 목소리가 커졌다. 막 데친 김치전에 두세 잔 돌던 술상이 얼어붙었다. 서울·대전의 집값 얘기를 주고받다 TV 틀자마자 조국 얘기로 불똥이 튄 것이다. 만두를 빚던 형수와 아내도 놀라 부엌에서 나왔다. 조국 퇴진(큰형)-중립(형수)-검찰개혁(구보씨 부부). 1대 1대 2로 시작된 말싸움은 “아주버님도 ‘개독’ 페친들 끊으세요”란 아내 말에 교회 다니는 형수가 “왜 동서 그런 말까지…”라고 발끈하며 2대 2가 됐다. 늦게 도착한 둘째형이 말리지 않았으면 험한 말이 더 날아다녔을 터다. “여까지 하자.” 큰형이 방으로 들어가도 집안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늘 추석날 오전 11시 즈음,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이 밀리기 전 형집을 나섰던 구보씨는 아침 차례상만 마치고 바로 귀경길에 올랐다. 추석 뒤 시작된 광화문-서초동의 ‘조국 대전’을 50대 형제가 먼저 치른 격이다. 그 뒤 둘째형 중재로 언성 높인 걸 풀었지만, 설 귀향을 앞둔 구보씨는 아직도 추석 전날의 악몽이 생생하다.

# 나무씨(22)는 열흘 전 다툰 남친과 서먹서먹하다. 남친은 진보정당, 나무씨는 “잘하는 정책도, 못하는 정책도 있다”고 보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평소 술잔을 기울여도 정치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날의 말다툼은 ‘공무원시험에 1% 군가산점을 주겠다’는 보수정당의 총선 공약을 두고 벌어졌다. “그게 될 수 있을까.” 남친은 긴가민가했고 나무씨는 “그건 성차별”이라고 받아쳤다. 불씨는 또 페미니즘으로 옮겨붙었다. 나무씨는 그날 밤 오빠와 얘기하다 알았다. 남친과 둘이서 여초·남초 커뮤니티의 대리전을 치렀다는 것을…. 평소 정치·사회 뉴스도 커뮤니티에서 접하고 댓글까지 다 읽어보며 판단하던 두 청년의 관성이 맞부딪친 날이었다.

두 토막 모두 근래 들은 얘기다. 그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모두 끄덕인 게 있다. 심해져가는 ‘확증편향(Confirmatory Bias)’이다. 이 심리학 용어는 자신의 신념에 맞고 유리한 정보·증거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반대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고도 한다. 케이크 위에서 달콤하고 비싼 체리만 빼먹는다고 해서…. 어느 쪽이든, 한국 사회는 이미 걱정 수위를 넘어섰다. 이리저리 갈려 얼굴 붉히는 이슈는 줄잇고, 페이스북·트위터·커뮤니티의 ‘끼리끼리 친구’도 벽으로 굳어져 가는 까닭이다. 유튜브·포털의 알고리즘도 즐겨 찾는 콘텐츠만 계속 모아주면서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키우고 있다. 동서양의 실험·조사에서 확증편향의 포로가 되기 쉬운 1순위로는 전문가들이 지목된다. 자기확신이 강하고 오피니언 리더 위치에 곧잘 서는 논객·법관·정치인·종교인·학자·교사 부류다. 소셜미디어와 1인미디어가 팽창하면서 멘토(조력자)·멘티(피조력자)의 전통적 경계선과 주도권도 무의미해졌다. 멘토 머리 끝에 올라가 있는 멘티가 많고, 정치인·지식인 인기도 멘티의 입맛 따라 조변석개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명절에 가족·친지가 충돌하는 건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작년 11월 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이슈가 불거진 미국 추수감사절 앞에 언론들은 ‘가족 간 다툼을 피하는 방법’을 앞다퉈 내놓았다. 미국 심리학회는 ‘까다로운 가족 간 대화’ 지침까지 발표했다. 트럼프시대에 미국인 39%가 정치 문제로 가족과 다퉜고, 그중 3분의 1은 절연했으며, 정치적 견해가 같거나 다른 가족의 저녁식사 시간이 1시간이나 차이 난다는 통계도 나온 터였다. 미국 전문가들이 말한 명절 다툼 예방법은 한국에도 유효하다. ①입에 올리지 않을 정치인을 함께 정하라 ②민감한 정치 얘기를 꺼내면 화제를 돌려라 ③이른 아침이나 행사 직전엔 설전을 자제하라 ④내가 타인의 견해를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라 ⑤인신공격은 하지 마라.

23일 대전 귀향길에 오른 구보씨와 통화했다. 그는 과거의 명절 금기어가 청년들의 취업·결혼·출산이라면, 지금은 정치와 페미니즘이 더해졌다고 했다. 총선 목전의 설이다. 그는 큰형과는 다투지 않기로 했고, 선 넘을 조짐만 보이면 아내에게 팔을 잡으라고 했다. 그가 가족 간 호불호가 크게 갈려 피하겠다고 꼽은 이름은 7명이다. 문재인·황교안·조국·윤석열·추미애·유시민·진중권…. 그러면서도 TV 뉴스를 켜면 맘먹은 대로 될진 모르겠다고 했다. 구보씨만이 아닐 게다. 모두를 위해, 가족의 ‘설 평화’를 위해 굿 럭!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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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내 시설에서 지난해 말 고농도 방사성물질이 유출된 사실이 확인됐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 22일 “세슘137, 세슘134, 코발트60 등 인공 방사성 핵종이 연구원 내 자연증발시설 주변 우수관으로 방출됐다는 보고를 21일 받았다”고 밝혔다. 원자력연구원은 지난해 12월30일 연구원 정문 앞 하천 토양에서 시료를 채취해 지난 6일 분석한 결과 방사능 농도가 최근 3년 평균치의 59배(25.5㏃/㎏)로 측정됐다.

자연증발시설은 실험과 연구과정에서 나온 액체 방사성폐기물을 태양열로 증발시키는 시설로, 연구원은 여기서 처리되는 방사성폐기물은 극저준위 수준으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그런데 이 시설 앞 맨홀에서 고농도의 방사성 세슘134, 137과 코발트60 등이 측정된 것은 연구원의 안전관리에 다시금 의문을 품게 한다. 핵반응을 통해 생성되는 세슘137은 인체에 위험한 인공 방사성물질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다량 검출된 바 있다.

대전시는 사고에 유감을 표시하고, 신속·정확한 조사와 원인규명을 촉구했다. 자치단체가 보도자료까지 내 유감을 표시한 것은 연구원에서 수년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지역 주민들의 불신이 크기 때문이다. 연구원에는 연구용 원자로와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저장시설, 사용후 핵연료 저장시설 등이 있는 데다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어 ‘죽음의 재’로 불리는 방사성물질의 안전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도 2017년에는 방사성폐기물의 분류·처분 절차를 따르지 않고 콘크리트·토양·오수 등을 무단으로 폐기한 사실이 적발됐고, 2018년 1월과 11월에는 두 차례나 화재가 발생해 방사성폐기물이 불에 탔다.

연구원은 검사 결과 외부를 흐르는 하천의 방사능 농도는 평상시 수치라고 밝혔지만, 지역 환경단체는 그동안 고농도의 방사성물질이 얼마나 외부로 흘러나갔는지 알 길이 없다며 역학조사에 나서라고 했다. 연구원은 방사성 측정 나흘 뒤인 10일 원안위에 1차 보고를 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름이 지나 공개된 것도 불신을 키우고 있다. 사건·사고가 잦다보니 주민들이 연구원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연구원과 원안위는 이번 사고의 원인·진상을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공개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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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이 휴가 중에 성전환 수술한 변희수 하사를 “군인사법 등 관계 법령상의 기준에 따라 계속 복무할 수 없는 사유에 해당한다”며 강제 전역시켰다. 성전환 후 여군으로 근무하고 싶다는 변 하사의 뜻과 달리 군인사법 시행규칙에 규정돼 있는 장애등급 규정을 적용,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23일부터 군에서 내보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단체 군인권센터의 진정을 받아들여 법원의 성별 정정 이후로 전역심사를 연기하라고 권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 당국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은 이해할 수 있다. 변 하사가 성전환 수술 후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고 싶다고 한 것은 창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어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국민 개병제를 바탕으로 병력을 운용하는 군 입장에서는 장병 전체의 분위기도 감안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해도 이번 결정은 문제가 있다. 심신장애 등급 규정은 남자 군인이 부상으로 신체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규정을 성전환 수술자에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은 억지이다. 전역 심사를 법원의 성별 정정 허가가 결정될 때까지만이라도 연기해 달라는 변 하사의 요청을 무시한 것도 인색하다. 더구나 군은 “군 복무 중 성 전환자에 대한 별도 입법과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성전환 수술 자체를 신체장애로 판단하는 것은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인권위의 의견까지 묵살했다. 차별을 우려한 다른 국가기관의 의견은 존중해야 마땅하다. 인권에 대한 고려는 없이 오로지 논란이 커지는 것만 막겠다는 군 당국의 처사가 유감스럽다.

해외 언론들은 이번 사안을 전하면서 한국 사회가 성 소수자에 대해 유난히 보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한국에서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트랜스젠더)는 장애나 정신질환으로 자주 간주된다”며 성 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도 없다고 비판했다. 한국이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대만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일본에서는 게이가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캐나다와 벨기에 등 20여개 국가가 성전환자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다. 군은 성 소수자의 복무에 대해 점검하고 이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젠더 담론이 활성화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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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가 23일 고검 검사급 검사 257명, 평검사 502명 등에 대한 검사 인사를 단행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 비리의혹, 청와대 감찰 무마·선거개입 의혹 등 이른바 ‘정권 수사’를 지휘해온 일선 검찰청 차장검사들이 모두 교체됐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전원 유임’ 의견을 낸 대검찰청 중간 간부 상당수도 전보조치됐다. 다만 이들의 지휘를 받던 부장검사 및 수사 검사 대부분은 현직을 유지했다. ‘수사팀 공중분해’라는 상황은 피하면서 현 수사의 흐름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 기대되는 인사로 평가된다.

법무부는 인사 배경에 대해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했다. 윤 총장 측근들을 대거 검찰 중심에 포진시킨 지난해 7월 인사를 바로잡는 조치라는 것이다. 수사 중심을 직접수사부서에서 형사·공판부로 이동시켜 홀대받아온 민생사건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도 했다. 법무부의 인사 원칙·배경은 능히 수긍된다. 검경 수사권 조정 등 민주적 통제장치가 하나둘 마련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 직제개편에 따른 인사는 검찰개혁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휘부의 대대적 이동으로 현안 수사의 차질이 우려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국 수사’ ‘정권 수사’를 지휘해온 서울중앙지검 4명의 차장검사가 모두 지방청으로 발령났다. 이들 수사에 관여해온 대검 간부 상당수도 이동했다. 이들의 공백으로 관련 수사가 당분간 혼란스러울 것은 불문가지다. 수사 동력 약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야당 및 보수언론에서 제기하듯 ‘제2대학살’ ‘수사방해’라는 비난은 옳지도 않고, 섣부르다. 이들은 수사의 지휘계통에 있기는 하지만, 직접수사를 하는 실무 검사는 아니다. 무엇보다 ‘지휘부가 교체되면 수사 결론까지 달라질 것’이라는 주장은 검찰 조직에 대한 모독이다. 청와대 감찰 무마·선거개입 의혹 수사 실무팀 부장검사들도 모두 현직을 유지했다. 정권을 겨냥한 수사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조국 수사’의 경우 수사팀장인 부장검사까지 전보조치됐으나, 이 수사는 이미 기소까지 끝난 상태다. 공소유지 등의 절차는 남아있는 검사들이 하면 된다. 이런 인사를 놓고 “수사방해” 운운하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추미애 법무장관 취임 이후 단행된 두 차례 인사과정에서 검찰의 분열, 갈등은 날것처럼 드러났다. ‘상갓집 추태’ ‘공개된 사법처리 이견 대립’ ‘수사내용 흘리기’ 등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잇따라 터졌다. 법무부와 검찰은 갈라진 조직을 다시 하나로 묶을 대책을 함께 고민하고,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무엇보다 검찰은 지휘부 교체가 수사 굴절로 이어지지 않도록, 남은 수사와 공소유지에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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