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때 절이 있다가 사라져 버린 곳을 폐사지나 절터라고 한다. 그 자리에 다시 절이 들어선 곳도 있고 그냥 빈터로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존하는 절터의 수는 나라 안에 어느 정도가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중 경주의 황룡사지나 익산의 미륵사지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들도 있지만 국보나 보물 같은 석조유물 하나조차 품고 있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곳들이 대다수다.

나는 하필 그런 욕망이 스러진 곳들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나마 번듯하게 손을 댄 곳들도 많지만 처음 그곳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1987년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폐허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겨우 석조유물 곁으로 가는 길만 다듬고 매만져 출입이 가능했을 뿐 웃자란 덤불에 유물이 덮여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함께 다닌 이들이 있었지만 한두 해 후부터는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공간이든 그곳을 찾을 때 혼자여야 좋은 장소가 있고 여럿이어야 좋은 곳이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절터만큼은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금세 깨달은 것이다.

겨울이 무르익은 이맘때면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에 가기를 즐겼다. 그곳은 당시 불교의 주류였던 화엄종(교종)과 새로운 종파인 선종이 공존한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석탑과 탑비, 석등 그리고 부도라고도 부르는 승탑의 받침돌과 같은 빼어난 석조유물이 남아 있어서 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곳에 절터가 있다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니 당연히 하루 종일 머물러도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것이 좋았다.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말이다. 굳이 겨울에 그곳을 찾았던 까닭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석조유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아터진 골짜기에 벼랑처럼 곧추선 산의 나무들과 햇빛의 유희였다. 마치 극장의 스크린처럼 절터에서 건너다보이는 산비탈에는 하루에 한 차례씩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고 해마다 서너 차례, 겨울이 되면 그들이 서로 어울려 노는 장면을 보려고 양양읍에서 새벽밥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 부탁해 보온도시락에 점심을 담았다. 그러곤 미리 탄 믹스커피를 보온병에 가득 채워 절터로 달려가곤 했다. 겨울의 낮고 짧은 해는 겨우 산등성이를 넘으며 급경사의 산비탈에 매달린 나무들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마른 나뭇가지들은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빛나는 시간은 불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 나에게 보물은 절터의 석조유물이 아니라 반짝이며 환하게 빛나는 나뭇가지들과 햇살이었다.

그저 나뭇가지는 햇살과 만나기 전에는 나뭇가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 위로 올라서서 그들에게 비추는 순간 산비탈은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변신을 한다. 그맘때면 진짜 극장의 객석처럼 절터는 그늘에 젖어 싸늘한 겨울바람이 아프게 이곳저곳을 찔러댔지만 신비탈의 장관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장면을 수십 차례 보고 난 후 깨달았다. 세상천지 저 홀로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고 말이다. 절터 또한 마찬가지다. 선림원지의 창건에는 화엄종을 대표하는 해인사의 주지가 시주를 하기도 했지만 창건 후 곧 선종 승려들이 머물렀다. 사실 당시는 화엄의 승려들이 선종을 마귀들이 내뱉는 말이라며 박대할 때이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 있는 사찰의 형태는 조사전의 흔적이나 승탑과 탑비와 같은 석조유물들이 선종 가람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마음이 헛헛해지면 자주 찾았던 절터 중 다른 한 곳은 보령의 성주사지다. 강원도도 그렇지만 서해안의 눈은 소문난 것 아니던가. 눈보라를 맞고 싶을 때면 일기예보를 보고 있다가 툭하면 성주사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묵었던 대천의 바닷가에서 만난 눈은 세로로 내리지 않고 가로로 내리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거셌기 때문이다. 그런 밤이면 숙소의 창가에 앉아 그 장면을 바라보느라 밤을 꼴딱 새고 부스스한 얼굴로 절터를 찾곤 했다. 

아예 눈을 맞기로 작정을 하였으므로 눈을 맞아도 젖지 않도록 옷과 모자 그리고 신발을 갖춰서 넓지 않은 절터를 돌았다. 한동안 서성이다가 쌓인 눈 탓에 높낮이를 가늠하지 못하여 뒤뚱거리며 넘어져도 결코 서둘러 일어서지 않았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꼼짝 않은 채 눈 맞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다가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각의 눈썹만 한 처마 아래에서 어깨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비는 신라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 중 하나인데 비문이 끝나가는 부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교종(화엄)과 선종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을 것이라며 법호를 무염으로 쓴 낭혜화상은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선을 배웠고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운 후 당나라로 건너가 선을 익히고 돌아와 선법을 펼친 이다. 사실 그가 했다는 위의 말을 비문에서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두껍게 입은 옷 속을 파고들어 온 한 덩이 눈뭉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서늘하게 곤두선 말이 탁하기만 했던 나의 정신을 맑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한 해를 시작하는 이즈음에 선림원지와 낭혜화상의 수많은 말 중 위의 말을 떠올린 까닭은 그 말을 올 한 해 곁에 두고 되새기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채찍으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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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는 역사적 대변동이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그 영향이 어떻게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해 놓았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중동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사람보다 ‘난민’ ‘테러’ 보도의 영향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가보지도 않은 국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 중동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상상에 지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와, 그 지배적인 상상이 만연해 분열과 혐오로 번지게 된 과정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중동의 난민 문제와 남북 통일 문제엔 교집합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 따른 무지, 배타적 태도로 생긴 차별과 혐오다. 이는 북한을 바라보는 프레임에서도 여과없이 드러난다. 남한이 북한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할 것이라 간주하며 통일은 남한에 손해라는 부정적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 북한에도 우리와 협업 가능한 강점이 존재할 텐데 말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후 빠른 복구를 이루었다. 북한 당국의 경제계획에 따른 인민 결집과 일제강점기 대륙 침공을 위한 철도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기에 일시적이지만 남한보다 앞섰던 때가 존재한다. 하지만 실패한 국가 프레임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북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언어적 또는 언어적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통일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막막함이 느껴진다.

리더의 훌륭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깨어 있는,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국민들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통일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확고한 의지가 동·서독의 통일을 만들어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편향된 혹은 얕은 정보만 갖고 일반화하는 태도는 국가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도 유익하지 않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불편한 감정은 어디에서 스며든 것인지, 혹시 부정적 여론 확산에 동화되어 생긴 감정은 아닌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드는 사회구조 탓은 아닌지, 그런 정보가 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원초적인 공포 때문은 아닌지. 기존에 갖고 있던, 어쩌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을 멈추고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할 대상은 중동도 북한도 아닌 우리를 배타적으로 만든 사회적 병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시 중동 난민은 싫지만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해외 아동에게 매월 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북한 이탈주민은 싫지만 경제 강국을 위해 통일은 찬성한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평화의 발신국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수주의 정책이 확산하는 지금,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갈등과 반목, 혐오를 극복해 세계시민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금초롱 |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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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입학식이 따로 없다고요?” 내가 되물었더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입학식이 없어요.” 내가 재차 캐물었다. “입학식만 없는 거겠지요.” 돌아온 그의 답이 더 놀라웠다. “자기 생일날 학교에 갑니다.” 아이들마다 입학 날짜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뉴질랜드에 갔다가 현지 교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여덟 살이 되던 그해 3월 초, 코흘리개 또래들과 함께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매달고 줄 맞춰 서 있던 기억이 생생한 내게 뉴질랜드 어린이들의 ‘개별 입학’은 낯설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했다. 교민분께 우리나라와 같은 입학식이 왜 없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분도 거기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전체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이쪽 문화가 녹아든 것이라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와 시 한 편을 써서 문예지에 발표했다. 제목을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로 달았다. 신석정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패러디한 것이다. 신석정이 저 시를 썼을 때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시인은 어머니와 함께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로 가기를 염원한다. 그가 꿈꾼 먼 나라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이었다.

나는 패러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창조적 배반을 이뤄내는 경우보다 기존 권위에 기대는 가벼운 아이디어일 때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낯익은 것을 제시해야 시의 진입장벽이 낮아질 것이라고 판단해 명시의 제목을 빌려왔다. ‘그 먼 나라’를 ‘이 먼 나라’로 바꿀 때 일어나는 형용모순이 고정관념을 흔들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졸시의 일부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입학식이 없는 나라 외에도 여덟 살짜리와 열한 살짜리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가 있다. 할머니와 젊은 직장인,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기후 재앙에 대처하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응원하는 나라들이 있다. ‘먼 나라’는 얼마든지 더 있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제법 있으며, 손자손녀 세대가 쓰게 하려고 통나무를 잘라 건조시키는 나라도 있다. 전 국민이 헌법을 알아야 한다며 헌법 해설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나라도 있다.

서구의 한 지성은 68혁명이 일어난 해에 “역사상 처음으로 지상의 모든 인간이 공통된 현재를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공통된 현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것 같다. 공통은커녕 현재는 완강한 경계선을 그으며 분할된다. 나라, 피부색, 종교, 가진 것 등에 따라 현재는 얼마나 다종다양한가. 공통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신석정 시인이 일제 치하에서 꿈꿨던 유토피아는 그야말로 ‘먼 나라’였다. 하지만 내가 뉴질랜드를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 먼 나라’들은 결코 멀지 않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다. 우리가 불가피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뛰어넘어 미래를 살고 있다. 당장 입학식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먼 나라’들과 마주하며 느끼는 불편함의 뿌리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공통의 현재’를 만끽하는데도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위축돼 있는지 왜 자각하지 않는 것인가.

며칠 전, 지구 최후의 날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가 ‘자정 100초 전’으로 앞당겨졌다는 뉴스가 떴다. 지난해 ‘자정 2분 전’에서 20초가 앞당겨진 것인데, 핵무기 위험과 기후 위기가 주원인이다. 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면 인류는 파멸한다. 미국 핵과학자회 회장은 “인류가 작은 실수나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할 수 없는 위급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일부 기후학자들은 전 세계가 당장 전시체제로 돌입해야 이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 ‘이 나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현실정치가 기후 대재앙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 공통의 현재, 공통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신석정의 시 한 구절을 오마주한다. “어머니, 지금이 다시 촛불을 켤 때입니다. 아이들과 지구의 미래를 위해 촛불, 아니 횃불을 들 때입니다. 다시 이 나라에서부터 말입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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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트와 형식으로 적혀있지만 모든 글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글쓰기 수업에 같이 다닌 몇 달 사이 서로가 쓰는 문장의 습관을 알아챈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첫 문장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비겁했던 순간에 대해 써보겠다. 난 비겁했던 적이 많아서 다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아주 잘 생각나는 것만 쓸 것이다.” 이것이 열두 살 주현이의 문장임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챈다. 그는 늘 자신이 무엇을 쓸지 독자에게 예고한 뒤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금까지 비겁함에 관한 얘기였다. 이제 마치겠다.” 마치 뉴스 앵커 같다.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독자에게 소식을 전한 뒤 꾸벅 인사를 하고 퇴장하는 듯한 주현이의 글이다.

또 다른 아이의 과제에는 이런 마지막 문장이 적혀있다.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이 한 줄만으로도 아이들은 열두 살 정우의 이름을 외친다. 정우의 글은 언제나 무언가를 궁금해하며 끝나는 경향이 있다. 선생님이 왜 이런 주제를 준 건지도 궁금하고 옆자리에 앉은 형은 글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자마자 글을 마치기 때문에 답이 적히는 경우는 없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끝나는 글들이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문장이 아닌 첫 문장에 질문을 써보자고 말한다. 호기심으로 끝나는 문장 말고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사랑은 궁금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이에 적힌 문장은 훨씬 구구절절하다. “그 애는 나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 애에 관한 온갖 상상에 빠져 단물에 절어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티백처럼 손쉽게 건져진 뒤 물기를 쫙 빼서 곶감처럼 말려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열네 살 예련이의 이름을 외친다. 아주 짧지만 중요한 찰나에 관해 온갖 비유를 끌고 와서 최대한 극적으로 쓰는 것이 예련이의 방식이다.

영화 <매니페스토> 스틸 이미지

아이들 각자의 이 방식들을 나는 글투라고 말한다.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투가 있듯 글쓰는 사람 모두에게 글투가 있다. 글투는 문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과제에서 이름을 지워도 글쓴이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이 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각자 타고난 얼굴이 있긴 하지만 어떤 작가들을 흡수하느냐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도 글투를 미세하게 재형성하며 글을 써나간다.

영화 <매니페스토>에는 한 글쓰기 교사가 등장한다. 그는 칠판에 ‘독창적인 것은 없어(Nothing is original)’라고 적은 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창적인 것은 없다. 어디서든 훔쳐 올 수 있어. 영감을 주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라면 뭐든지 얼마든지 집어삼켜. 옛날 영화, 요즘 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시, 꿈, 마구잡이 대화, 건물, 구름의 모양, 고인 물, 빛과 그림자도 좋아. 너희 영혼에 바로 와닿는 게 있다면 거기서 훔쳐 오는 거야.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훔쳤다는 걸 숨길 필요 없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념해도 좋아.” 

그런 뒤에 교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장뤼크 고다르가 한 말은 꼭 기억해야 해. ‘문제는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다.’ ”

아이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종이 위에서 자기만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표정 때문에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서로 다른 일기를 쓴다. 그들의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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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는 기침, 사랑, 가난이라는 말이 있다. 그중에 가난은 주거형태로 드러나는가 보다.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을 함께 짓는 어느 소셜믹스 아파트에서 두 주택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비상계단을 막아서 주민 갈등이 심해졌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LH 공사에서 지은 아파트에 살면 ‘엘사’, 휴먼시아 아파트에 살면 ‘휴거’, 빌라에 살면 ‘빌거지’라며 놀린다고 한다. 

물질만능주의, 책임의 개인화 사회에서 돈에 따른 차별은 정당한 것이며 가난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게으름 탓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사람을 주거형태로 구분하고 그룹화하여 인지하는 것은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에서 비롯한 집단주의적 사고를 나타낸다.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우리’의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경계 밖의 ‘그들’은 깎아내리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진 생각과 신념은 고착되고 확대 편향되어 반사회적인 어른이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혐오는 경멸, 증오, 기피, 불쾌함이 복합된 강한 감정이다. 속으로 생각만 해도 옆에 있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 언어로 표출되고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징조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언어유희라고 간과했다가는 혐오 표현이 물리적 행위로 이어져 더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 

이미 유럽 주요 국가들은 혐오 발언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만약 우리 반에 가난을 혐오하는 학생이 있다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담임으로서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고 두 가지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다.

첫째, 혐오 표현을 하는 학생을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재미로 썼을 뿐 잘못인지 몰랐다고 한다면 인권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수업과 반편견 교육이 필요하다. 피해가 될 것을 알고도 썼다면 학생의 내면 상태를 점검하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 가정불화, 원만하지 못한 교우 관계, 부모의 높은 기대감, 공허함 등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 나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공격적인 언행으로 자존심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반 아이들에게 집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진실한 인간관계가 기반이 되는 참된 삶을 가로막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진정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lt;어린 왕자&gt; 이야기와 더불어 사람이 중심에 있는 세상이 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토의해 볼 것이다. 

가난은 인성 문제가 아니며 집은 생활 공간일 뿐이다. ‘어떤 집에 사느냐?’가 공동체에 소중한 가치를 더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신념을 나누면서 말이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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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무척 정겨운 동요가 있다. 하지만 귀에 익은 노랫말과 달리 사람의 손과 발은 절대 ‘시려울’ 수가 없다. ‘시려워’ 꼴의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시려워’라는 말을 쓰려면, 그 말의 기본형이 ‘시렵다’가 돼야 한다. 낱말의 기본형에 반드시 ‘ㅂ’ 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렵다’가 ‘가려워’가 되고, ‘반갑다’가 ‘반가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추위를 느낄 정도로 차다”를 뜻하는 말은 ‘시렵다’가 아니라 ‘시리다’다. 애인이 없는 사람들이 ‘옆구리가 시리다’라고 할 때 쓰는 그 ‘시리다’가 기본형이다. 이 ‘시리다’를 활용하면 ‘시려워’가 아니라 ‘시려’가 된다. “날콩이나 물고기 따위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키는 말인 ‘비리다’를 “생선이 비려워”로 쓸 수 없듯이 ‘시리다’도 ‘시려워’로는 못 쓴다.

추위와 관련해 잘못 쓰는 말에는 ‘오돌오돌’도 있다. ‘오돌오돌’은 “작고 여린 뼈나 말린 날밤처럼 깨물기에 조금 단단한 상태”를 뜻한다. “춥거나 무서워서 몸을 잇달아 심하게 떠는 모양”을 뜻하는 말은 ‘오들오들’이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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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직자 26명의 2009~2013년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은 2013년 6월7일 모터쇼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터쇼라니. 해직자들이 쌍용차의 신차발표회에 가서 부당해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나보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 모터쇼의 이름은 H-20000이었다. ‘20000’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개수를 가리키고, ‘H’는 HEART 혹은 HOPE 혹은 사다리를 뜻한다고 들었다. 그 모터쇼에 나온 차는 달랑 한 대였다. 

그 차를 만든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었다. 해고된 지 5년째에 접어들자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왜 우리는 매일 투쟁만 하고 있는 거지?’ ‘맞아, 우리 원래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었잖아.’ ”

해직자들은 중고자동차 가게에서 2004년산 코란도 밴을 구입해 해체한 뒤, 낡은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조립해 ‘그들만의 차’를 만들었다. 거리와 옥상, 첨탑에서 농성을 하며 ‘시위꾼’ ‘빨갱이’로 매도당하던 그들은 오랜만에 차를 만진 뒤 아이처럼 좋아하고 울었다.

부끄럽지만 그들이 모터쇼를 진행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정리해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노사정(노조, 회사, 정부) 합의에 따라 2020년 1월 복직하기로 했던 쌍용차 해직자 중 46명의 복직이 무기한 연기됐다. 회사는 그들에게 임금의 70%를 주겠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일도 안 하고 돈을 받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비아냥댄다. 복직예정자 김득중씨는 지난 23일 월급 97만6149원을 받았다. 김씨는 1993년 입사해 올해 27년차다. 서류상으로는 쌍용차 직원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액수만 문제는 아니다. 쌍용차 해직자들은 ‘존재의 이유’와 싸웠다. 왜 갑자기 해고되었는가. 경찰특공대가 희대의 진압작전을 벌일 만큼 파업이 불법이었는가. 10년간 30명이 목숨을 잃은 것도 이런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경기 평택이라는 도시를 터전으로 살던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산 자’와 ‘죽은 자’로 분리됐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웃공동체도 무너졌다. 죽은 자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쌍용차 출신이라는 것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10년7개월을 버텼다. 남은 복직예정자들은 ‘쌍용차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참담한 사실은 그나마 쌍용차 문제가 지난 10여년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해고사건이라는 점이다. 오늘도 전국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옥상에 오르고 차가운 길바닥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곡기를 끊으며 기약 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 정부까지 나서 도장을 찍은 쌍용차의 복직합의가 복직 1주일 전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파기되는 사실을 보며,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그 많은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아마 더 외로워졌을 것이다. 노동하며 일상을 회복하겠다는 바람이, 2020년에도 어떤 이들에겐 몸과 마음을 다쳐가며 절규해야 할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야 할까.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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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봄 스페인에서 다수의 독감환자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독감을 퍼뜨린 것이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포함해 많은 각료들도 감염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성이 약했기 때문에 ‘스패니시 레이디’라고 불렸다. 당시 언론통제가 약했던 스페인에서 집중적으로 독감문제가 다뤄졌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스페인 독감은 8월이 지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강력해졌다. 숙녀가 괴물로 바뀐 것이다. 전염지역도 아프리카와 유럽뿐 아니라 인도, 중국, 한국에까지 확산됐다. 이른바 판데믹(대유행)으로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가장 타격을 입은 국가는 남부 유럽과 동남아시아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9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742만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독감환자는 인구의 25~50% 정도로 추정됐다. 매일신보는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4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이 수치도 열악했던 통계 시스템을 감안해야 한다. 얼마나 피해가 컸던지 가을에 추수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5000만~7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보다 3배나 많다.

스페인 독감은 이전 전염병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만들었다. 먼저 전염병의 세계화다. 이전에도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많았다. BC 5세기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유행병으로 그리스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죽음의 수렁에 빠졌다고 적었다. 서기 165년 전염병은 로마를 텅 비게 만들고 안토니우스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다. 514년 역병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0%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돌아 유럽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이들 역병은 파괴적인 독성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전염병은 아니었다.

스페인 독감은 전염 속도에 가속엔진을 장착했다. 선박과 철도는 빠른 속도로 세계에 희생자를 만들었다. 스페인 독감은 기계화된 이동수단을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인간 또는 소나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기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1918년에 한국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전염병의 세계적 전파의 퀀텀점프는 비행기의 출현이 가져왔다. 비행기는 빠르고 멀리 전염병을 실어나를 수 있다. 전염의 세계화와 동시화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2003년 초 중국 광저우에서 발생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비행기의 능력을 입증했다. 사스 감염자가 머물렀던 호텔은 인큐베이터가 됐다. 호텔 고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전염병을 퍼 날랐다. 수개월 만에 30여개국에 8200여명의 환자가 나왔고 770여명이 사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이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27일 현재 중국에서만 2744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도 80명에 달했다. 중국 당국의 조치에도 확산기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비행기는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호주에 환자를 실어 날랐다.

신종 전염병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세계농업기구 관계자는 인간집단의 팽창, 자연서식지의 침범, 인간과 야생동물의 국간 이동과 뒤섞임, 자연 서식지와 생태계 교란, 가축과 야생동물의 동시사육, 야생동물 종 또는 야생병원체의 지역 간 이동, 기후변화, 광범한 항생제 사용 등을 꼽았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의학의 발달로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기대가 있다. 과학자들은 항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데 최소한 4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설사 백신을 만들어도 투약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 사이 바이러스는 살기 위해 새로운 변이를 일으킨다. 인간의 노력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기침과 재채기는 반드시 입을 가리고 하라’든지, ‘손을 씻어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마라’ ‘피곤하면 쉬어라’는 대응책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향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3대 요인으로 식량부족과 기후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바 있다. 신종 전염병은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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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한문에 눈을 떴다. 한자하고 한문은 또 다른 세계다. 한자는 한 글자가 하나의 정부(政府)다. 하나의 글자에 하나의 뜻만 고정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다. 같은 한자에 상반되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이인삼각(二人三脚)처럼 뒤뚱뒤뚱 걸어가는 세 글자 이하의 단어에 산술적으로 서너 자 더했을 뿐인데 그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도무지 요령부득인 5언절구, 7언율시의 구절들.

옥편을 뒤적거리면서 밤하늘을 자주 생각한다. 갈피마다 흩어진 한자는 저 하늘의 반짝거리는 뭇별을 닮았다. 고래(古來)로부터 숱하게 뿌려진 별 몇 개가 연결되어 별자리는 만들어졌다. 북두칠성, 오리온, 큰곰자리, 전갈자리가 다 그렇다. 한자를 연결해서 구체(具體)와 심오(深奧)를 빚어내는 저 성좌(星座)에 이백과 두보도 걸터앉아 있는 것.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면서 밤마다 별을 보고 글을 궁리하다가 낮에도 공중을 보려는 습관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위치하는 곳은 파주출판단지인데 자동차로 출발해 30분 만에 도착하면 서울하고는 영 다른 풍경이다. 평지돌출한 심학산과 서해로 넓어지기 직전의 한강이 넉넉한 세상을 연출하는 것.

우리가 밤낮으로 무엇을 볼 때 전적으로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고개를 조절하면서 천하의 일부를 조각조각 스스로 편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눈을 깜빡거릴 수는 있어도 시선은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너와 나, 저 오리무중의 사이에 무슨 ‘섬’이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섬’에 상륙이 불가능하다. 내리지 않는 눈 걱정이나 하다가 소한, 대한을 엉겁결에 다 보내고 벌써 입춘이 코앞이다. 그 사이에 설날이 끼었다. 까치만큼 좋아라 설날을 기다렸던 게 엊그제였는데, 나는 이제 왜 명절에 시큰둥한 작자가 되었을까. 반성하듯 직진하는 시선을 심학산으로 들어 올리다가 나와 심학산의 사이에 있는 상수리나무 끝에 새삼 시선이 얹혔다. 빈 둥지인 줄 알았는데, 고마워라, 까치 한 마리가 쓸쓸히 날아올랐다. 올해의 설날은 이렇게 겪는가. 산은 아직 정중동, 나는 꽃산행을 준비 중.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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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뉴질랜드계 자산운용회사인 소버린과 (주)SK가 경영권 분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른바 소버린 사태다. 당시 소버린은 SK 주식을 싼 가격에 매집해 14.99%의 지분을 확보했다. 단일주주로는 최대주주로 등극한 소버린은 그해 11월 이사진 총사퇴, 재벌 구조 해체, 최태원 일가의 퇴진 등을 요구했다. SK 측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 확보에 나섰다.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경영권 확보에 실패한 소버린은 2005년 7월 SK 주식을 모두 외국 투자기관에 팔았다. 매각차익은 1조원에 가까웠다. 이를 계기로 외국계 투기자본의 ‘먹튀 방지책’으로 차등의결권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차등의결권이란 ‘1주 1의결권’ 원칙에 예외를 인정하여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의 주식에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경영 주주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적대적 인수·합병(M&amp;A)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 포드자동차의 경우 창업주인 포드 집안이 소유한 지분은 7%이지만 차등의결권에 따라 40%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주식을 2년 이상 보유하면 1주에 2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차등의결권을 채택하고 있다. 문제도 있다. 차등의결권은 경영진의 잘못을 견제할 주주들의 권한과 감시를 약화시킬 수 있다. 경영진의 방패막이로 전락해 기업소유주, 대주주의 모럴해저드만 불러올 위험성도 있다. 이럴 경우 피해는 주주의 몫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일 총선 2호 공약으로 ‘벤처 4대강국 실현’을 내걸면서 창업주의 차등의결권을 허용하기로 했다.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주주 동의를 거쳐 창업주에게 1주당 의결권 10개 한도의 주식 발행을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벤처기업에 안정적인 경영권을 보장해 기업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복수의결권 주식은 현행 법제하에서도 발행 가능하다. 차등의결권 허용이 소수 주주의 권익 침해는 물론 경영세습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차등의결권을 허용한 이유를 벤처인들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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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제도화된 갈등이다. 그리고 갈등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 없는 갈등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우왕좌왕하다가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갈등 전략이 필요한 영역 중 하나가 비례정당이다. 자유한국당은 공언했던 대로 비례정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들에 따르면 기존의 정당 지지율을 적용해서 한국당 지지자들이 지역구에서는 한국당 후보를 찍고 정당투표에서는 비례정당을 찍는다고 가정할 경우 한국당의 실질적 의석은 지금보다 10석 이상 늘어나고 1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게임이론의 세계적 석학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셸링이 쓴 <갈등의 전략>이라는 책을 보자. 어떤 경우에는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누구나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균형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전쟁과 이산의 경험이 아직 생생하던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혹시라도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나서 가족이 흩어지게 되면 나중에 어디서 만날까? 정답은 서울역 시계탑 앞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역 시계탑이야말로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서울에서 가장 ‘현저한’ 랜드마크였으니까. 서울이 아니라 뉴욕이라면 그랜드 센트럴 역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1부터 4까지 번호가 붙어있는 똑같이 생긴 네 개의 상자가 있다. 두 사람이 게임에 참여하는데, 상대방과 의논할 수 없는 상태에서 둘이 같은 번호를 고르면 각각 10만원의 상금을 받고 다른 번호를 고르면 빈 손으로 돌아간다. 몇 번을 고를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다른 상자는 흰색이고 1번 상자만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상자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1번 상자는 일종의 시그널이 되고, 두 사람은 동시에 1번을 고를 가능성이 많다. 소위 ‘셸링 포인트(Schelling point)’라고 하는 균형점이다. 그런데 셸링 포인트는 문화적 맥락에 의존한다. 만약 남들과 다른 것은 불행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라면 둘은 1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1번은 아니다”라는 공통의 인식을 가질 수도 있다.

한국당에 비해 민주당은 비례정당을 창당하기가 훨씬 어려운 입장이다. 만약 한국당만 비례정당을 창당한다면 마치 빨간색의 1번 상자처럼 하나의 시그널, 즉 셸링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표를 모아주는 시그널이 될까 아니면 최소한 한국당은 아니라는 시그널이 될까. 유일한 빨간 상자를 좋게 볼 것이냐, 나쁘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앞에서 한국당에 유리한 시나리오를 검토했으니 이번엔 반대의 시나리오를 보자. 우선 선거법의 빈틈을 이용해서 위성정당을 통해 표를 모으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고 규칙위반이다. 일부 악덕 재벌의 위장 계열사나 조세회피처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선거법 개정을 막기 위해 한국당이 동원했던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등의 사례는 선거법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당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 위성정당으로 인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무력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위성정당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독일이나 뉴질랜드는 어떻게 된 일일까.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는 정치 후진국이어서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는 정치세력이 용납되고, 독일이나 뉴질랜드는 정치 선진국이어서 그런 세력은 응징을 당하기 때문이다. 빨간 상자는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에서는 표를 모으는 시그널이고 독일이나 뉴질랜드에서는 정치적 자살의 시그널이다.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사례는 선거법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려고 드는 한국당이 알바니아나 베네수엘라 수준의 정당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의당에 표를 모아주는 것이다. 실제로 새해 들어 이루어진 여론조사들을 보면 앞에 소개한 작년의 조사들과는 달리 한국당의 의석은 오히려 줄고 정의당이 약진한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선거법 개정에 동참한 세력들이 공동으로 지분 출자를 하는 공동 비례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범민주 혹은 다당제의 가치하에 연대할 수 있어서 한국당의 비례정당이 가지는 정치도의적 문제로부터 자유롭고, 그 자체가 하나의 소규모 연정 실험이 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한국당의 ‘빨간 칠’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 시그널이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든 야든 갈등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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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의 증가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다. 27일 오후 8시30분 현재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중화권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확진자는 2844명, 사망자는 81명으로 집계됐다. 하루 전보다 각각 869명, 25명이 늘었다. 중국 최대 명절 춘제(春節)를 기해 감염증 환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 춘제 기간 신종 코로나의 확산 속도가 2003년 사스 때를 능가하면서 ‘사스 공포’가 재현될 조짐마저 있다. 한국에서는 감염증 확진자가 설 연휴인 24일과 26, 27일 한 명씩 발생하면서 모두 4명이 됐다. 이 중 세번째와 네번째 감염자는 중국 우한으로부터 입국 당시에는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 확진 판정을 받아 2차 감염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중국의 설)를 맞아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27일 서울 경복궁을 둘러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자 중국 국무원은 춘제 연휴를 이달 30일에서 다음달 2일까지로 연장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현재로선 ‘신종 코로나’ 사태는 수습이 난망한 상황이다. 감염증의 진원지인 우한에서의 초기 방역에 실패한 데다 춘제 기간의 민족 대이동으로 바이러스가 중국 전역과 서방으로까지 퍼진 상태다. 영국 보건전문가는 신종 코로나 감염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중국 당국이 신종 코로나 감염 정보를 감추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전염병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데드로스 게브레예수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중국을 찾았지만, 조기 수습은 난망해 보인다. 

초미의 관심사는 국민의 안전이다. 중국 허베이성 우한에는 한국인 500~600명이 체류 중이다. 현재까지 감염증 확진자나 의심환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우한에서만 수백명의 확진자가 나온 상태에서 언제까지 안전을 기약할 수 없다. 무증상 입국자로 국내에서 1주일가량 활동한 세번째 및 네번째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의 감염 여부를 밝히는 일은 시급하다. 또 우한을 포함한 중국 전역에서 입국하는 중국인에 대한 방역과 관리를 강화하는 것도 숙제다. 중국 매체는 지난 10~22일 우한을 떠난 시민 500만명 가운데 6000여명이 한국으로 이동했다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를 우려해서인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오른 ‘중국인 입국 금지 청원’ 글에는 수십만명이 동의를 표시했다. 

보건복지부가 27일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를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하고 ‘신종 코로나 감염증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설치했다. 정부 관련부처의 인력을 지원받아 신종 코로나의 검역과 방역을 강화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우한 지역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외교부는 우한 체류 한국인의 귀국을 위해 전세기를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전염병 대책은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 일본은 자국민의 귀국을 돕기 위한 전세기 투입과 함께 신종 코로나를 ‘지정감염증’으로 지정할 것이라고 한다. 상황은 엄중하다. 우한뿐 아니라 후베이성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복지부 차원의 중앙사고수습본부를 국무총리 휘하의 범정부 컨트롤타워로 격상시키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전염병 대응은 뒷북보다는 지나치더라도 선제적인 조치가 백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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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설 당일 저녁 강원도 동해시의 한 펜션에서 가스폭발이 일어나 일가족 6명이 숨지는 등 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름은 펜션이었지만, 실상은 숙박업소로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 영업장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모른 채 가족과 명절을 보내기 위해 찾은 곳이 관리의 사각 속에 참변의 현장이 된 것이다. 평소 우애가 돈독했던 중장년 자매들과 그 배우자들이 최근 아들을 잃은 형제를 위로한다고 모였다가 사고를 당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항을 종합하면 허점과 불법이 키운 인재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펜션은 원래 냉동공장으로 세워졌다가 20여년 전 2층 일부를 다가구주택으로 변경하며 ‘근린생활시설 및 다가구주택’으로 등록됐고, 10년째 불법 펜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초 소방당국의 화재 안전 특별조사가 참변을 막을 기회였지만, 건축주의 거부로 내부 점검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가구주택은 숙박업소와는 달리 세입자 등이 내부 확인을 거부하면 강제로 점검할 수 없다. 안전점검은 허가받은 숙박업소에 집중되고, 무허가 업소에는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구조다. 

소방당국은 지난해 12월9일 동해시에 해당 펜션의 위반 사항을 통보했지만, 시는 불법영업에 대한 행정절차를 밟지 못했다. 불법영업장 수백곳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3~4명에 불과한 단속인원들이 지난 연말까지 이뤄진 단속 결과를 분류하고 시정조치를 검토하는 사이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다. 활개치는 불법,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크다. 

우선 불법영업 업소들이 손쉽게 법망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번 적발되면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강력한 처벌과 제재를 마련해야 한다. 6개월까지 걸리는 행정조치 기간도 단축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소방당국의 안전점검을 건축주나 세입자가 거부할 수 없도록 규정을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 더 이상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어선 안된다. 안전 앞에 다른 이유, 가치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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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병원에서 맞았다. 병실에는 네 명의 환자와 간병인, 보호자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앞자리의 아주머니는 중국서 왔는데 식당에서 일하다가 다리가 으깨졌다. 이 때문에 한국 온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쉬어본다. 그 옆 침대에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몸으로 들어와 얼굴에 겁이 가득한 할머니가 있다. 자식들은 잘 오지 못한다. “둘째 아들인데, 오늘 오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 못 온대.” 전화가 올 때마다 간병인이 귀에 대고 소리를 친다. 남의 돌봄을 받는 것이 낯선 할머니는 간병인도 어려워한다. 

할머니의 맞은편 침대에 있는 분은 반대로 간호사도 아랫사람 부리듯 호령한다. 위아래 서열이 분명해서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한테는 ‘지시’하고, 의사한테는 ‘부탁’한다. 돈의 힘이지 싶었는데, 식당 장사로 돈을 벌어 이제는 다달이 집세 받는 건물도 있는 ‘건물주’라 한다. 큰돈은 벌었으나 큰 병이 남았다. 병이 멈춰 세운 삶은 다들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행은 평등한가? 중국서 온 아주머니는 병원에 너무 늦게 와서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도, 기어코 조기 퇴원을 한다. “사정이 있어서”라고 부끄럽게 말하는 이에게 무슨 사정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 병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다. 담당 주치의는 모두 남자인데, 간호사는 모두 여자다. 의사는 아무개 선생님인데, 간호사는 누구라도 그냥 간호사님이고, 간병인, 청소노동자, 조리노동자는 그림자처럼 이름 없이 일한다. 환자들은 갈수록 의사보다 간호사, 간병인에게 몸과 마음을 더 의지한다. 

다 큰 어른 몸을 일으켜 앉히고, 세우고, 씻기고, 밥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은 중노동이다. 사이사이에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나가는데, 눈 한 번 마주칠 틈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에겐 하루에 몇 개의 병실이 주어질까? 굽은 허리 사이로 보이는 파스는 그가 진 노동의 무게를 말해준다. 사회에서 매기는 노동의 가치는 그 무게와 반대다. 말의 가치도 그렇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신년 특집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에 사는, 부유한, 고학력, 전문직, 나이 많은, 이름 있는 남자들이 둘러앉아 나랏일을 말하는데 꼭 남의 나라 말 같다. 

과연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기자협회 보도를 보니, 기자들이 취재할 때 의견이나 정보를 듣는 사람들도 저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구 구성에서는 1%가 조금 넘는 교수, 의사, 변호사, 대표, 임원 등 전문가와 관리자가 의견 그룹에서는 70% 가까이 차지한다. 그런 지면에, 원고지 아홉 장의 몫이 주어졌다. 여기에 뭘 써야 할까. 중국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뉴스가 들려오는데 그 속에 없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환자들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법에 대해선 의사보다 잘 알던 그들. 병원 구석구석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자기 자리에선 전문가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병원 노동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서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직장 평의회가 있다면 지금 같은 위기도 훨씬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일터와 삶터의 민주정치는 사회도 그만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도 요청한다. 자연의 다른 존재와 인간이 공동으로 구성하는 정치공동체와 그런 생명의 정치가 가능할까. 먼지의 말과 강물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위기 속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이 주체로 귀환하는 것을 본다. 원래 민주주의는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간 정치이기도 하다.

<채효정 |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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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끝났다. 여야 정치인들이 전하는 설 연휴 민심을 요약하면 “경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이 느끼고 있는 바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라고 발표했다. 1980년 석유파동,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비견될 정도다. 벌써부터 정부가 제시한 올해 성장 목표인 2.4%를 달성할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체감 경기가 어렵기만 한 시민들에게 각종 경제지표가 호전되고 있다는 정부 발표는 딴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더불어민주당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은 “서민경제, 체감경기는 악화한 것 같다. 중도층의 정치 불신이 심각하다. 불안하다”고 했다. 

가족과의 덕담은 잠시, 걱정이 더 많았던 올 설이다. 중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공포는 확산되고 있다. 주요 현안인 검찰개혁과 바뀐 선거법은 뒷전으로 밀려날 정도였다고 한다. 국내외 상황이 어수선한데도 우리 정치권은 서로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온통 4·15 총선에 쏠려 있다. 정작 시민들은 다가오는 총선보다 일자리 부족과 경기 침체 등 민생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들은 총선의 유불리만 저울질하고 있다. 진짜 민생을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달라는 게 설 민심이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27일 “설 민심은 한마디로 민생 먼저였다”며 민생법안 처리를 위한 2월 임시국회를 제안했다. 야당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번 설은 총선이 3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느 때보다 설 밥상 여론의 향배가 향후 선거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권은 민심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호남지역의 한 의원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청년들이 화가 많이 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야당도 다르지 않다. 만사를 정쟁화하는 모습에 등을 돌린 지 오래다. 

정치의 기본은 민심을 정확히 읽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기불황과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하소연은 정치권의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실망한 민심에 먼저 귀 기울이고 이를 토대로 해법을 제시하는 당이 총선에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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