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보러간 관객은 소리도 영상도 없는 검은 스크린을 수분간 견딘 뒤에야 본편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를 그린 이 영화에 대해 아들 박지만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일부 받아들여 특정 장면의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문제 삼은 것은 영화의 프롤로그인 1979년 10월 부마항쟁 자료화면, 에필로그인 박정희의 장례식 자료화면이었다. 재판부는 <그때 그사람들>을 열고 닫는 다큐멘터리 화면 때문에 관객이 영화 전체를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오인할 수 있다고 봤다. 백윤식이 김재규, 송재호가 박정희, 김윤아가 심수봉을 연기하는데도 “실제라는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보수세력의 비난은 더욱 극심했다. 마치 <그때 그사람들>이 신성모독이라도 저지른 듯, “역사와 우리 자신에 대한 모멸감”(동아일보), “영화역사에 대한 실례”(조선일보)라고 비판했다. 

제작진도 논란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때 그사람들>의 제작 과정은 비밀에 부쳐졌다. 제작자 심재명은 통화에서 “조심했다. 김재규 편을 들거나 박정희를 비난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불경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고민했다. 이런 시도, 이야기들을 편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였다”고 말했다. 

제작할 때부터 영화가 신문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서 다뤄지길 원하는 제작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영화 외적인 이슈에 휘말리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발생하고, 흥행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그때 그사람들>이 낸 사회적 소음의 크기에 비교하면 흥행 성적은 좋지 못했다. 

‘남산의 부장들’ 속 한 장면. 사진제공_쇼박스

15년이 흘러 같은 소재를 다룬 <남산의 부장들>이 설날 연휴를 앞두고 개봉했다. 단, <그때 그사람들>이 겪은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김재규, 박정희라는 이름 대신 김규평, 박통이라는 배역명을 사용했다. ‘박통’은 박정희의 특징적인 귀, ‘전두혁’은 전두환의 머리 모양을 그대로 따왔으면서도 이름을 달리 붙인 뒤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때 그사람들>이 권력자를 향한 이죽거림이 진득한 수작 블랙코미디였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개성 있는 캐릭터들에 의지하는 진중한 스파이물에 가깝다. 


이제 박정희는 학문적 평가,

예술적 해석, 유희의 대상이다

박정희 시대의 추억으로

정치적 열정에 불붙일 수 없다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자며

유권자를 설득할 수도 없다

역사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15년 사이 달라진 것은 영화 분위기만이 아니다.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도 크게 다르다. <남산의 부장들>의 영화적 재미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이 영화를 법정에 끌고가려는 사람은 아직 없다. 신문 사회면에서 다룰 일도 없다. <남산의 부장들>은 동 시기 개봉작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며 조용히 흥행하고 있다.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 박정희 청와대는 독재정권 말기의 썩은 내를 풍긴다. 5·16 초기 젊은 군인의 이상 같은 것은 간데없고,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다. 부하에게 일을 믿고 맡긴다고 했다가, 부하가 일을 하고 나면 왜 그리했냐고 타박한다. 영화 속 박정희는 대통령은커녕 작은 조직의 팀장으로도 부적격인 인물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손이자 정치적 후계자였던 박근혜는 대통령 재직 시절 ‘콘크리트 지지층’을 보유하는 행운을 누렸다. 여느 정권들처럼 박근혜 정부도 크고 작은 실수와 무능을 노출했지만, 지지율이 30%대 이하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은 치명상을 입었고, 박근혜는 탄핵과 구속이라는 불명예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도 광화문광장에는 박근혜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떠돌지만, 그들이 다시 사회의 주류가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와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가 일단락된 시기에 나온 영화다. 이제 박정희는 학문적 평가, 예술적 해석, 엔터테인먼트적 유희의 대상이다. 박정희 시대의 추억으로 정치적 열정에 불붙일 수 없고,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자며 유권자를 설득할 수도 없다. 역사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남산의 부장들>의 조용한 흥행은 이제 우리가 박정희와 그 유산을 차분하게 평가할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너무나 자주 인용되는, 그러나 여전히 현명한 헤겔의 말을 생각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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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등학교에서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손을 번쩍 든 학생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대답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기차게 달리는 이유가 이토록 명백하다는 것을,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인간의 목표가 이토록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이니까. 대한민국에서는 더 나아가 서울 한복판에서 점심시간에 목에 사원증을 걸고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들고 다니는 걸 ‘꿈’이라고 한다. 

용케 꿈을 이룬 이들은 행복할까? 10년간 대기업에서 충실하게 일한 이는 어느 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회사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린 시절 신기하게 여겼던 시계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먹고, 주말마다 종로에 있는 오래된 시계방에서 시계 조립을 배웠다. 도시의 높은 빌딩 밑 점점 잊히고 오그라드는 좁은 골목길에 진짜 그의 꿈이 있었다. 그는 시계에 들어가는 작은 기계를 깎으며 오랫동안 부질없이 깎여나간 자신의 시간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용기를 내서 일 년간 휴직하고 작은 공방에서 더부살이하며 시계를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거대한 기계 속 부품처럼 쓰이다 버려지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공방에서는 스스로 뭔가 창출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일 년이 다 되어갈 무렵,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꿈도 좋지만, 돈벌이가 힘든데 회사로 돌아가야 하지 않냐고. 결국 그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의 작은 톱니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틈만 나면 시계를 만들면서 언젠가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시계를 내놓을 꿈을 꾼다. 그를 보며 ‘꿈’을 생각한다. 돈벌이가 급한데 꿈을 꾸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돈벌이가 공부의 목표일 수는 있어도, 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어른들 스스로 ‘우리는 왜 사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하려나.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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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위험사회란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벡은 위험사회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위험은 전염성이 강하다. 둘째, 위험은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셋째, 과학의 발전에 비례해 위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다. 넷째,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진다. 다섯째, 시민들의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안전은 물이나 전기처럼 공적으로 생산되는 소비재가 된다.

위험사회론이 이전 시대보다 현대사회가 더 위험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벡이 전하려는 것은 우리 인류가 직면한 위험의 현재적 성격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사회 이전의 오래된 위험은 자연재해와 전쟁 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새로운 위험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사회발전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이 위험사회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벡이 강조하려는 건 현대화가 가져온 우리 삶의 사회적 조건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적극적 대응이다.

문제작 <위험사회>가 발표된 것은 1986년이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후반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 영어본과 독어본을 내놓았다. 이제 위험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벡이 주목하는 세 가지 글로벌 위험은 기후 변화와 같은 생태적 위험, 금융위기와 같은 경제적 위험, 자살폭탄과 같은 테러의 위험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인류가 직면했던 9·11테러, 금융위기, 기후 위기를 지켜볼 때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독자들은 내가 왜 위험사회론을 꺼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란 위험이 세계화된 사회다. 올해 들어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공포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질병 또한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고 있다.

전염병이 원전이나 기후위기처럼 새로운 위험은 아니다. 중세 시대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였던 페스트는 오래된 위험이다. 그러나 도시화, 교통수단 혁신, 과학기술 발전, 그리고 이런 변동으로 인한 ‘사회적 밀도’, 즉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의 증가는 오래된 위험 또한 세계화시켜 왔다. 세계를 공포로 몬 지난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이나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질병의 세계화가 갖는 위험과 위력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이제 위험은 지구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지구촌’이란 말이 있듯, 우리 인류에게 ‘위험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위험의 세계화에 따른 ‘공포의 세계화’를 강화시킨다. 특히 전염병의 세계화는 우리 건강과 생명에 직결돼 있는 만큼 그 으스스한 공포가 예고 없이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다. 더하여 주목할 것은, 오래된 위험이든 새로운 위험이든 이 위험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노인, 아동과 같은 사회적 약자는 위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위험사회가 가져오는 ‘위험의 불평등’ 현상이다.

위험의 세계화에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위험이 일어나자마자 즉각 그 사실을 국민과 다른 국가들에 알려야 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정보의 전달이 늦어질수록 그 위험은 증폭된다. 위험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국민과 다른 국가들에 정확한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중국 정부의 소극적 초기 대처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둘째, 위험의 세계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국제적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 위험사회의 대응에서는 사전 예방과 사후 대처가 모두 중요하다. 위험이 세계화된 만큼 지구적 차원의 사전 예방 및 사후 대처를 위해 각종 국제기구들과 개별 국가 간 협력을 통한 거버넌스 강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벡이 지적하듯, 글로벌 위험사회에 공동으로 맞서는 ‘세계시민주의’의 상상력과 실천은 21세기 미래에서 더없이 중대한 과제다.

문명의 21세기에 예기치 않은 전염병의 발생과 잇단 도시 봉쇄,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의 세계화는 우리 인류가 안고 가야 할 묵시론적 미래 풍경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묵시론적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힘은 역시 이성이다. 정직하고 신속한, 그리고 체계적이고 협력적인 대응이라는 이성의 힘을 나는 여전히 신뢰하고 싶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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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올해 사업이 잘되었다지?”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축하하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 아니니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더욱 간편하게 전할 수 있다. 주는 것 없이 받으라 하고, 받은 것 없어도 기분 좋은 것이 덕담이다.

사실 복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복(祝福)과 신(神)의 한자에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기(示)가 공통으로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은 본디 초자연적 존재와 연관된다. 한 해 내내 반복되어 온 일상의 고리를 잠시나마 끊고, 새해에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잘 안되던 일들까지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건네는 말이 덕담이다. 그러기에 내가 주지 못하면서도 상대가 받기를 바랄 수 있고, 이미 받은 것처럼 선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덕담은 예로부터 민간에 이어져온 풍속이지만, 사대부의 글에서 그 예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설날 지은 시는 나이 듦을 한탄하거나 도소주 즐기는 풍류를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남에게 주는 설날 서신에는 덕담보다 권면이 주로 담겨 있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설날 아침 대궐 뜨락에 백수준(白獸樽)이라는 술동이를 두고 왕에게 바른말을 올리는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오랜 전통도 있었다. 새로워지는 해에 맞추어 자신을 새롭게 할 길을 권하고 찾은 것이다.

기분 좋은 덕담을 엄숙한 권면으로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비방과 악담이 가득한 세상에 축복의 덕담 한마디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다만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덕담을 건넸으면 한다. 덕담인 만큼 현실의 조건에 너무 매이지는 말되, 두루뭉술한 복보다는 구체적인 바람을 담았으면 좋겠다.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룰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복은 사람이 지을 수 없는 것이지만, 두드리고 구하지 않는 이에게는 하늘의 도움도 없다. 설 연휴도 끝나버리고 연말연시를 말할 여유조차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이때, 각자 나름의 희망을 담은 덕담을 자신에게 조용히 건네 보는 것은 어떨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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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비상벨이 전국을 덮고 있다. 지난 20일 우한에서 무증상으로 입국한 국내 4번째 확진자도 172명을 접촉했다는 보건당국 역학조사 결과가 28일 나왔다. 서울 강남·한강변·일산 등지의 병원·식당·카페에서 74명을 접촉한 3번째 확진자처럼 증상 발현 후 타인과 접촉한 환자가 또 확인된 것이다. 한국도 지역사회 2차 감염자가 나올 수 있는 중대 고비를 맞은 셈이다. 중국에선 하루 새 우한이 위치한 후베이성에서만 확진자 1000명이 늘고 전체 사망자도 100명을 돌파했다는 걱정스러운 속보가 이어지고 있다. 춘제(春節) 연휴 때 귀향했던 국내 중국인 유학생이나 중국동포의 귀국길도 보건당국은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국인이 많이 찾는 면세점이나 관광지에선 ‘중국 말만 들어도 놀란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이 곧잘 오른다. 감시망을 벗어난 활보자까지 나온 한국도 신종 코로나로 가슴 졸이고 몸살을 앓는 ‘불안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1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정부는 총력전 태세다. 공항·선상에서 입국자 검사를 강화해온 보건당국은 14~23일 우한에서 입국한 3023명을 전수조사키로 했다. 30~31일엔 전세기를 보내 우한에 있는 한국인 특별수송작전을 편다. 서울시교육청은 초·중·고에 개학과 등교 중지를 권고했고, 어린이집 휴원도 줄 잇고 있다. 5년 전 ‘메르스 홍역’을 겪은 한국 사회는 한번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에 뚫리고, 초기 통제력을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히 알고 있다. 대응은 과감하고, 시급을 다툴 일은 일분일초라도 빠를수록 좋다.

걱정되는 것은 과도하게 부추기는 공포와 괴담이다. 3번 확진자가 스타필드 찜질방에 머물렀다느니, 어느 병원이나 공항에 격리된 감염자가 있다느니, 어디에서 고열 환자가 의식 잃고 구급차에 실려갔다느니…. 설 연휴부터 SNS에 올라오면 ‘발 없는 말’처럼 1000리를 날아다닌 미확인 뉴스들이다. 정부도 아니라고 한 얘기가 가뜩이나 불안한 시민들의 눈과 귀를 홀린 것이다. 시민들의 의구심을 풀어주는 정보공개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국면이다. 실상황을 관장하는 보건당국과 지자체의 대응도, SNS·유튜브의 가짜뉴스를 제어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모니터링도 더 촘촘하고 빨라져야 한다.

그 공포를 정치권이 부추기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중국 여행객의 국내 입국을 금지해 추가 전염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정부에 공개 주문했다. 사실상 국경을 봉쇄하자고 한 것이다. 국경 봉쇄와 여행·무역 제한은 한국도 따르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보건규칙과 어긋난다. WHO는 지난해 7월 에볼라바이러스 창궐 때도 이 원칙을 견지했다. 국경 통제로 밀입국자 피해가 커지는 감시 사각지대를 두지 말고, 입국자의 검역·격리치료와 바이러스 조기 통제를 잘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섣부른 ‘공포 마케팅’은 자칫 실효성도 없이 외교부담만 키울 뿐이다. 정보를 모르고 당국의 손길이 멀면 감염병 공포는 커지게 마련이다. 정부는 신속·투명하게 실상황을 공유하고, 시민사회도 공포나 혐오보다 협조와 연대로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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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탈출카페는 숨겨진 단서를 찾고 추리해 문제를 풀어, 문이 잠긴 방에서 탈출하는 게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빠져나오면 성공이다. 시간 기록 깨는 재미도 쏠쏠하고, 함께 협력하며 스릴을 즐길 수 있어 친구, 연인, 가족단위로 많이 찾는다. 꽤 부담스러운 가격에도, 주말과 휴일엔 몇주 후까지 예약이 밀려 있을 정도다. 2015년 서울 홍대 앞에 국내 첫 업소가 생긴 후 지난해 말에는 전국에 약 400곳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유럽과 북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유행하고 있는데, 이를 소재로 한 영화(<이스케이프 룸>)까지 나올 만큼 인기를 몰고 있다.

영화 <이스케이프 룸> 포스터. 소니 픽처스 제공

그런데 방탈출카페는 유사시엔 위험한 곳이 될 수도 있다. 인화성 물질이 가득하고,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하다. 방이 닫힌 상태인 데다, 내부사진 유출 문제 때문에 휴대폰 소지도 금지돼 외부 연락도 어렵다. 책임을 물을 관할부처도 없다.

정부가 28일 방탈출카페나 키즈카페 같은 신종카페와 감성주점, 스크린체육시설 등을 다중이용업소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되면 스프링클러 등 화재안전 설비를 갖춰야 하고, 내부 피난통로 확보와 화재배상책임보험 가입, 소방안전교육 등이 의무화된다. 현재는 일반음식점과 목욕장, 영화관, 노래방 등 23개 업종이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돼 있다.

지금이라도 포함됐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각 업소들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것이 거의 확실한데도, 처음부터 다중이용업소에 포함되지 않고 이제껏 각종 규정과 관리에서 비켜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문제가 생긴 후 또는 문제가 될 것 같은 시점에서야 예외적으로 법 적용 리스트 지정을 늘려가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등록시점부터 자동적으로 안전관리 규정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맞는가. 지난해 7월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간 광주의 한 감성주점에서 구조물이 붕괴되며 2명이 사망하고, 외국인 선수들도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지난해 초엔 폴란드의 한 방탈출카페에서 생일 파티를 하던 10대 소녀 5명이 화재에 목숨을 잃었다. 다중이용업소는 한번 사고가 나면 인명피해가 크다. 아슬아슬함은 게임에서나 찾는 것이어야지, 실제 상황으로 이어져선 안된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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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가는 꿈을 얼마나 많이 꾸었는지 모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1861년 시인 폴론스키에게 유럽 여행의 포부를 털어놓았고, 1862년 6월7일부터 시작한 유럽 여행의 감상을 ‘유럽 인상기’라는 제목으로 한 잡지에 연재했다. 유럽을 동경했기에 그곳으로 갔는데, 정작 ‘유럽 인상기’의 최종 결론은 조국 러시아의 재발견으로 그를 이끌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지리부도를 펼치면 신났고, 지구본을 보면 알 수 없는 흥분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제일 좋아했고, 비행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재난 영화의 원조 격인 <에어포트>가 심야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 방영되면 졸음을 참아가면서도 꼭 챙겨보았고, 크루즈선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 <러브 보트> 역시 빼놓지 않았다. 나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오리엔트 특급을 타고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여행하고, 보잉 707을 타고 대륙을 횡단하고, 크루즈 관광으로 배리 매닐로가 노래한 코파카바나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이 되었다. 이제 심지어 늙어가기 시작했지만, 오리엔트 특급은 사라졌고 보잉 707도 단종되었고 크루즈도 못 타봤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접했다. 체력이 버텨주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평범한 사람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한 해에 1500만명의 한국인이 외국 여행을 한다. 

떠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이미 공항에 도착하기 이전, 여행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신체 에너지의 활성화 상태는 평상시와 달라져 있다. 물론 늘 공항에서는 가스 밸브를 제대로 잠그고 나왔는지 괜한 걱정에 빠지기도 하고,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흔들릴 때는 잠시나마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입국심사를 기다릴 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송’에 휘말리는 카프카 소설의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뒤로하고 세계 속에 있는 한 개인이 되면, 한국어가 나에게는 모어이자 모국어이기에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언어이지만 어떤 나라에서 한국어는 희귀한 외국어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뜻도 모를 뿐 아니라 발음조차 할 수 없는 문자로 음성을 기록하는 나라에서 그림문자의 현대적 변형인 픽토그램의 인류 보편성에 놀라기도 한다. 

세계인이 된, 아니 되려는, 혹은 되고 싶은 나는 시차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내 몸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설득하며 시차를 견뎌내고, 낯선 음식과 잠자리로 인한 불편함은 세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비행기에서 지구의 지형을 내려다보면서 지리 시간에 배웠던 등고선이라는 단어를 기억해내고, 세상이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며, 책으로 익히고 풍문으로 들었던 세상과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은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고, 호모 사피엔스의 피부색, 눈동자 색깔, 신체적 특징, 머리카락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그 모든 경험이 여행이라는 단어에 담긴다. 여행은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에 자신을 맡기고, 타 문화와 만났을 때 자신의 혀와 몸이 허용하는 다양성의 범위를 확인하고, 한국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집단 공유된 관성을 발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때론 기쁘지만 때론 당혹스러운 이 경험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사람은 기꺼이 여행하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막연한 선입견이 발로 누비는 견문으로 수정되는 과정, 내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며 상상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다른 나라에서 발견하는 게 여행이기에 이 칼럼을 쓰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단연코 ‘여행’이다. 앞으로 연재될 칼럼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나 또한 예측할 수 없다. 이 칼럼은 전적으로 여행의 기록이며, 여행에서 마주친 우연성의 기록이기에 편의상 글쓴이는 내 이름으로 표기되지만 보다 정확하게 이 칼럼의 제목은 ‘여행으로 쓴다’가 될 수밖에 없음을 밝히며 새 연재를 시작한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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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범죄분석 통계(2018년 기준)에 따르면, 소년범의 재범기간은 1~6개월 이내가 48.8%, 1년 이내가 30%다. 재범을 하는 아이들의 78.8%가 처분을 받은 지 1년 이내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는 말이다. 

비행 초기 단계의 청소년은 소년사건 처리 절차에서 훈방, 교육조건부 기소유예, 그리고 사회 내 처우인 보호관찰 처분 등의 기회를 얻지만, 재범을 한 아이들은 대체로 시설 내 처우인 소년원 처분을 받게 된다.

소년원 처분은 비행청소년을 시설에 수용하여 인성교육 및 상담을 통해 심성을 순화하고 교과·직업훈련 교육을 통해 사회적응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호소년의 대부분은 퇴원 후에도 결손가정이나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환경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결국 비행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중요한데, 재범을 하는 아이들은 소년원 재원 중 오히려 비행성과 반사회성이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소년원의 수용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 전국의 10개 소년원은 보호소년들을 1인실이 아닌, 4인 1실이나 10명 이상이 함께 생활하는 호실에 수용하고 있다. 교육은 집단상담의 형태로 진행하고 생활은 1인실에서 안정적으로 이뤄지는 시설환경이 필수적이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소년원은 평일에는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수업과 체험·체육활동을 진행하지만, 주말과 공휴일에는 생활관 호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독서나 학습활동을 장려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앉아 서로를 배려하며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서열과 군대식 고참문화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일부 고참행위를 하는 학생들은 교사들의 눈을 피해 욕설, 갈취, 협박, 폭행 등 인권침해 행위를 일삼고, 지도하는 교사에게 욕설이나 폭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규정을 준수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년원 퇴원 후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비행성과 반사회성이 심화된 학생들은 퇴원 직후 재범하고,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 성인범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소년범죄를 예방하고 재범을 방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정책은 소년원의 시설환경과 교육방식을 개선하는 것이다. 

보호 처분의 활성화·내실화는 소년사건의 처벌을 강화하는 정책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형사미성년자 및 촉법소년 하한 연령을 낮추는 방안 등 소년사건 처리와 관련된 개정안들이 다수 발의됐다. 그중 특정 강력범죄 2회 또는 일반 범죄 4회를 저지를 경우, 형사사건으로 처리하자는 방안이 실효성을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이라고 판단된다. 비행 초기 단계나 초범인 아이들은 감정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보호관찰 등 사회 내 처우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만, 소년원에 와서도 다른 학생과 지도교사의 인권을 침해하는 보호소년에게는 경각심과 긴장감을 갖게 하는 처벌 강화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원훈 |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 대전소년원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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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살고 있는 중국인 친구 링이 페이스북 포스팅을 올린 것은 섣달그믐이었다. 대학원 동문인 링의 고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진원지인 우한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곳이다. 친구는 “중국의 명절인 춘제이지만,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외지를 방문했다가 집으로 향하던 어머니의 비행기는 우한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강제착륙해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내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셨던 친구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 지하철을 탔던 나는 내려야 할 정류장보다 앞서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자리 승객이 기침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리고도 개운치 않았다. 누군가 기침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2015년에 겪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가 내 안에 공포를 심어놓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1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지난 27일 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숫자로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중국인 입국 금지요청’이다. 유튜브에는 출처를 분명히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눈으로도 전염된다는 것을 의료진이 확인했다”는 주장을 펴는 청년의 ‘양심선언’이 게시 하루 만에 조회수 570만을 넘어서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양상은 2015년 메르스사태와 닮았지만, 사뭇 강도가 더해진 것이 있다. 공포를 부추기는 음모론이나 허위정보들이 바이러스만큼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는 점이다. 우한에서 촬영된 것이라며, 병원과 거리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거나 방치돼 있는 동영상들이 유튜브에서 확산된다. 미국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발병이 백신 개발 비용을 후원받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는 주장들이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공유되고 있다. 사실확인을 거친 정보의 생산이 검증으로 인해 더뎌지는 동안, 안전을 위해 자구책을 찾는 시민들은 ‘현장영상’ ‘실시간정보’라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인터넷 공간에서 허겁지겁 찾아내 소비하며 점점 더 합리적 판단의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허위정보에 대응하는 노력들도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국제팩트체킹연대(International Fact Checking Network)에 참여하는 각국의 팩트체커들은 자국에서 번지고 있는 동영상이나 소셜미디어의 주장들을 교차검증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허위정보를 가려내고 있다. 인터넷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공포의 확산경로로도, 진실한 정보를 전파하는 연결망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가 초기에 공개되지 않아 악화됐던 2015년의 메르스사태는, 진실보다 더 효과적인 대책은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확인된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포를 자극하는 루머에 밀리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언론은 확진자들을 좇는 사건추적식 특종경쟁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질병과 관련해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 검증된 사실에 기초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줄 필요가 있다. 시민들도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정보를 육하원칙에 따라 따져보아야 한다. 정보를 올린 사람은 누구인가? 촬영된 곳은 어디인가? 언제 발생했나? 최소한의 질문에도 답을 얻을 수 없다면 합리적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질병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공포와 혐오, 적대를 부추기는 음모론이나 허위정보들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도 모르는 전염병이 다시 이 나라에 도착하면 그땐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작가 김탁환이 메르스사태 피해자들을 취재해 2018년 발표한 소설 <살아야겠다>에서 작중 인물이 던진 질문이다. 질문은 다시 던져졌고, 이번에는 더 나은 답을 찾아야 한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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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쓰러졌다. 이번에도 집배원 노동자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0일 오후 경북의 한 우체국에서 40대 집배원 ㄱ씨가 뇌출혈로 쓰러져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1주일이 넘도록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동료들은 ㄱ씨가 사고 당일 오전 배달 업무를 마친 뒤 오후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쓰러졌다고 전한다. 설 연휴를 앞두고 택배 업무가 늘어난 게 사고의 원인으로 보인다. 

우체국 집배원들의 근무환경은 ‘열악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집배원 노동조건개선 기획추진단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집배원 연평균 노동시간은 2745시간으로, 국내 노동자 평균노동 시간보다 30% 이상 많았다. 장시간 노동이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가중시켜 질병·사고로 이어질 것은 불문가지다. 이는 집배원의 산업재해율이 전체 노동자의 4배에 달한다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실제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총 166명이 사망했다. 매년 17명의 집배원이 각종 질환과 사고로 세상을 뜨고 있다. ㄱ씨의 사고 역시 이 같은 집배원의 장시간·고강도 노동 구조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우체국 집배원노조는 지난해 7월 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을 선언했다. 결국 인력 증원, 토요 업무 점진 폐지 등에 합의하면서 파업을 철회했지만, 노동환경은 체감할 정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집배원의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도록 인력을 더 늘리고 토요일 택배를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는 우체국특별회계 이익금을 집배원 인력충원에 필요한 재원으로 돌릴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여유 부서의 인력을 집배 업무로 재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우편빅데이터 분석, 드론 배송 등 배달 장비·시스템 보완을 통해 집배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노력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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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수족을 자르고 야당은 그런 장관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했다. 대검 선임연구관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기소를 막은 직속상관에게 “당신이 검사냐”고 항의하고 서울중앙지검장은 검찰총장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 지시를 수차례 거부했다. 여당은 공수처법에 이어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안을 마저 통과시켰고 야당은 다가오는 총선 공약으로 공수처법 폐지를 걸었다. 서초동 촛불집회는 올해도 열렸고 3·1절에는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광화문집회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정권 내부 갈등과 여야 정쟁에 국민들의 정치 혐오가 깊어지고 있다. 총선이 코앞이지만 가까운 사이라도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고 공복이어야 할 국회의원이 상전 노릇한 지 오래다. 그래도 선거 때가 되면 없던 관심도 생기고 배신당할 기대도 또다시 하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른 것 같다. 깊어진 정치 혐오가 선거 열기도 식히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도 행정부가 균열을 보이고 국회가 운영 중인데도 여야를 대신한 군중이 거리에서 맞붙고 있다. 이쯤 되면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이다. 자유한국당에 책임이 없지는 않으나 더 큰 책임은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촛불정권을 자임하면서도 국민의 열망보다 정권의 이해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분노로 집권했으면서도 대통령이 진 ‘마음의 빚’은 국민보다 퇴임한 장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 같은 처신은 처음부터 예견돼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 촛불집회의 성과를 국민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누적인원 1700만명이 거둔 결실을 고스란히 대통령선거에 갖다 바쳤다. 2016년 10월29일 시작된 집회는 2017년 4월29일의 23차까지 이어졌다. 5월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를 열흘 앞둔 날이었다. 주최 측은 “우리가 대통령선거 날짜 앞당기자고 촛불 들었냐?”며 ‘장미대선 No! 촛불대선 YES!’를 외쳤다. 하지만 촛불의 여망을 선거에 담는 순간 모든 것은 문재인 후보를 위해 깔아놓은 주단 길에 다름없었다. 

지금 여당은 4·15 총선 승리가 촛불혁명의 완성이라고 외치지만 민주당은 촛불의 주역이 아니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항쟁지도부인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해 대정부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나 2016년 말 민주당의 역할은 다른 야당들과 함께 촛불시민들의 요구를 사후적으로 수용해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데 그쳤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청와대에 단독 영수회담을 제의해 논란이 됐고,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 사유에서 ‘세월호 7시간’을 빼자는 새누리당의 제안에 응하면서 공분을 샀다. 

2016년 겨울, 국민들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에 대해 상전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960년 4월혁명과 1987년 6월항쟁 때도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물러나게는 했다. 그러나 야당까지 포함한 정치권력 전체가 국민의 요구에 굴복한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촛불시민들은 정당을 포함해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의 행동과 스스로의 힘만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 정당과 정치권력이 다시 상전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정권 유지에 동원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한줌의 권력과 맞바꿔지고 있다. 

우려는 촛불집회 당시에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 쒀서 개 줄까’ 염려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선거 외에는, 야당을 여당으로 바꾸는 것 말고는 기대와 희망을 담을 다른 그릇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기대가 ‘2017 촛불권리선언’으로 이어졌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재벌개혁은 물 건너갔고 노동여건은 더 악화될 조짐이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 ‘노동존중’ 구호가 ‘재벌존중’으로 바뀌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보다 더 싸우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끊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선거에만 매달리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더 이상 정당과 정치인이 국민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정당에 길들여져 갔다. 이번에는 거꾸로 해보자. 국민이 정당을 길들여보자.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알려주자. 국민이 볼모가 아니라는 것을, 유권자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선거가 끝난 뒤에도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정당을 만들자. 그래서 제안한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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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때 절이 있다가 사라져 버린 곳을 폐사지나 절터라고 한다. 그 자리에 다시 절이 들어선 곳도 있고 그냥 빈터로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존하는 절터의 수는 나라 안에 어느 정도가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중 경주의 황룡사지나 익산의 미륵사지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들도 있지만 국보나 보물 같은 석조유물 하나조차 품고 있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곳들이 대다수다.

나는 하필 그런 욕망이 스러진 곳들을 좋아했다. 지금은 그나마 번듯하게 손을 댄 곳들도 많지만 처음 그곳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1987년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폐허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겨우 석조유물 곁으로 가는 길만 다듬고 매만져 출입이 가능했을 뿐 웃자란 덤불에 유물이 덮여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함께 다닌 이들이 있었지만 한두 해 후부터는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공간이든 그곳을 찾을 때 혼자여야 좋은 장소가 있고 여럿이어야 좋은 곳이 있기 마련인데 적어도 절터만큼은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금세 깨달은 것이다.

겨울이 무르익은 이맘때면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에 가기를 즐겼다. 그곳은 당시 불교의 주류였던 화엄종(교종)과 새로운 종파인 선종이 공존한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석탑과 탑비, 석등 그리고 부도라고도 부르는 승탑의 받침돌과 같은 빼어난 석조유물이 남아 있어서 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곳에 절터가 있다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니 당연히 하루 종일 머물러도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것이 좋았다.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 말이다. 굳이 겨울에 그곳을 찾았던 까닭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석조유물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아터진 골짜기에 벼랑처럼 곧추선 산의 나무들과 햇빛의 유희였다. 마치 극장의 스크린처럼 절터에서 건너다보이는 산비탈에는 하루에 한 차례씩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고 해마다 서너 차례, 겨울이 되면 그들이 서로 어울려 노는 장면을 보려고 양양읍에서 새벽밥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 부탁해 보온도시락에 점심을 담았다. 그러곤 미리 탄 믹스커피를 보온병에 가득 채워 절터로 달려가곤 했다. 겨울의 낮고 짧은 해는 겨우 산등성이를 넘으며 급경사의 산비탈에 매달린 나무들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마른 나뭇가지들은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빛나는 시간은 불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 나에게 보물은 절터의 석조유물이 아니라 반짝이며 환하게 빛나는 나뭇가지들과 햇살이었다.

그저 나뭇가지는 햇살과 만나기 전에는 나뭇가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 위로 올라서서 그들에게 비추는 순간 산비탈은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변신을 한다. 그맘때면 진짜 극장의 객석처럼 절터는 그늘에 젖어 싸늘한 겨울바람이 아프게 이곳저곳을 찔러댔지만 신비탈의 장관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 장면을 수십 차례 보고 난 후 깨달았다. 세상천지 저 홀로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고 말이다. 절터 또한 마찬가지다. 선림원지의 창건에는 화엄종을 대표하는 해인사의 주지가 시주를 하기도 했지만 창건 후 곧 선종 승려들이 머물렀다. 사실 당시는 화엄의 승려들이 선종을 마귀들이 내뱉는 말이라며 박대할 때이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 있는 사찰의 형태는 조사전의 흔적이나 승탑과 탑비와 같은 석조유물들이 선종 가람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마음이 헛헛해지면 자주 찾았던 절터 중 다른 한 곳은 보령의 성주사지다. 강원도도 그렇지만 서해안의 눈은 소문난 것 아니던가. 눈보라를 맞고 싶을 때면 일기예보를 보고 있다가 툭하면 성주사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묵었던 대천의 바닷가에서 만난 눈은 세로로 내리지 않고 가로로 내리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거셌기 때문이다. 그런 밤이면 숙소의 창가에 앉아 그 장면을 바라보느라 밤을 꼴딱 새고 부스스한 얼굴로 절터를 찾곤 했다. 

아예 눈을 맞기로 작정을 하였으므로 눈을 맞아도 젖지 않도록 옷과 모자 그리고 신발을 갖춰서 넓지 않은 절터를 돌았다. 한동안 서성이다가 쌓인 눈 탓에 높낮이를 가늠하지 못하여 뒤뚱거리며 넘어져도 결코 서둘러 일어서지 않았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꼼짝 않은 채 눈 맞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다가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비각의 눈썹만 한 처마 아래에서 어깨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비는 신라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썼다는 사산비문 중 하나인데 비문이 끝나가는 부분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교종(화엄)과 선종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을 것이라며 법호를 무염으로 쓴 낭혜화상은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선을 배웠고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을 배운 후 당나라로 건너가 선을 익히고 돌아와 선법을 펼친 이다. 사실 그가 했다는 위의 말을 비문에서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두껍게 입은 옷 속을 파고들어 온 한 덩이 눈뭉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서늘하게 곤두선 말이 탁하기만 했던 나의 정신을 맑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한 해를 시작하는 이즈음에 선림원지와 낭혜화상의 수많은 말 중 위의 말을 떠올린 까닭은 그 말을 올 한 해 곁에 두고 되새기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채찍으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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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는 역사적 대변동이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그 영향이 어떻게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해 놓았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중동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사람보다 ‘난민’ ‘테러’ 보도의 영향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가보지도 않은 국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 중동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상상에 지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와, 그 지배적인 상상이 만연해 분열과 혐오로 번지게 된 과정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중동의 난민 문제와 남북 통일 문제엔 교집합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 따른 무지, 배타적 태도로 생긴 차별과 혐오다. 이는 북한을 바라보는 프레임에서도 여과없이 드러난다. 남한이 북한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할 것이라 간주하며 통일은 남한에 손해라는 부정적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분명 북한에도 우리와 협업 가능한 강점이 존재할 텐데 말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후 빠른 복구를 이루었다. 북한 당국의 경제계획에 따른 인민 결집과 일제강점기 대륙 침공을 위한 철도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기에 일시적이지만 남한보다 앞섰던 때가 존재한다. 하지만 실패한 국가 프레임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북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언어적 또는 언어적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통일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막막함이 느껴진다.

리더의 훌륭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깨어 있는,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국민들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통일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확고한 의지가 동·서독의 통일을 만들어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편향된 혹은 얕은 정보만 갖고 일반화하는 태도는 국가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도 유익하지 않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불편한 감정은 어디에서 스며든 것인지, 혹시 부정적 여론 확산에 동화되어 생긴 감정은 아닌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드는 사회구조 탓은 아닌지, 그런 정보가 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원초적인 공포 때문은 아닌지. 기존에 갖고 있던, 어쩌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을 멈추고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 혐오해야 할 대상은 중동도 북한도 아닌 우리를 배타적으로 만든 사회적 병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시 중동 난민은 싫지만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해외 아동에게 매월 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북한 이탈주민은 싫지만 경제 강국을 위해 통일은 찬성한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평화의 발신국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수주의 정책이 확산하는 지금,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갈등과 반목, 혐오를 극복해 세계시민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금초롱 |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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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입학식이 따로 없다고요?” 내가 되물었더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입학식이 없어요.” 내가 재차 캐물었다. “입학식만 없는 거겠지요.” 돌아온 그의 답이 더 놀라웠다. “자기 생일날 학교에 갑니다.” 아이들마다 입학 날짜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뉴질랜드에 갔다가 현지 교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여덟 살이 되던 그해 3월 초, 코흘리개 또래들과 함께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매달고 줄 맞춰 서 있던 기억이 생생한 내게 뉴질랜드 어린이들의 ‘개별 입학’은 낯설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했다. 교민분께 우리나라와 같은 입학식이 왜 없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분도 거기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전체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이쪽 문화가 녹아든 것이라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와 시 한 편을 써서 문예지에 발표했다. 제목을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로 달았다. 신석정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패러디한 것이다. 신석정이 저 시를 썼을 때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시인은 어머니와 함께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로 가기를 염원한다. 그가 꿈꾼 먼 나라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이었다.

나는 패러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창조적 배반을 이뤄내는 경우보다 기존 권위에 기대는 가벼운 아이디어일 때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낯익은 것을 제시해야 시의 진입장벽이 낮아질 것이라고 판단해 명시의 제목을 빌려왔다. ‘그 먼 나라’를 ‘이 먼 나라’로 바꿀 때 일어나는 형용모순이 고정관념을 흔들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졸시의 일부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입학식이 없는 나라 외에도 여덟 살짜리와 열한 살짜리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가 있다. 할머니와 젊은 직장인,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기후 재앙에 대처하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응원하는 나라들이 있다. ‘먼 나라’는 얼마든지 더 있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제법 있으며, 손자손녀 세대가 쓰게 하려고 통나무를 잘라 건조시키는 나라도 있다. 전 국민이 헌법을 알아야 한다며 헌법 해설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나라도 있다.

서구의 한 지성은 68혁명이 일어난 해에 “역사상 처음으로 지상의 모든 인간이 공통된 현재를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공통된 현재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것 같다. 공통은커녕 현재는 완강한 경계선을 그으며 분할된다. 나라, 피부색, 종교, 가진 것 등에 따라 현재는 얼마나 다종다양한가. 공통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신석정 시인이 일제 치하에서 꿈꿨던 유토피아는 그야말로 ‘먼 나라’였다. 하지만 내가 뉴질랜드를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 먼 나라’들은 결코 멀지 않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다. 우리가 불가피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뛰어넘어 미래를 살고 있다. 당장 입학식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먼 나라’들과 마주하며 느끼는 불편함의 뿌리는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공통의 현재’를 만끽하는데도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위축돼 있는지 왜 자각하지 않는 것인가.

며칠 전, 지구 최후의 날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가 ‘자정 100초 전’으로 앞당겨졌다는 뉴스가 떴다. 지난해 ‘자정 2분 전’에서 20초가 앞당겨진 것인데, 핵무기 위험과 기후 위기가 주원인이다. 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면 인류는 파멸한다. 미국 핵과학자회 회장은 “인류가 작은 실수나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할 수 없는 위급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일부 기후학자들은 전 세계가 당장 전시체제로 돌입해야 이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 ‘이 나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현실정치가 기후 대재앙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 공통의 현재, 공통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신석정의 시 한 구절을 오마주한다. “어머니, 지금이 다시 촛불을 켤 때입니다. 아이들과 지구의 미래를 위해 촛불, 아니 횃불을 들 때입니다. 다시 이 나라에서부터 말입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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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트와 형식으로 적혀있지만 모든 글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글쓰기 수업에 같이 다닌 몇 달 사이 서로가 쓰는 문장의 습관을 알아챈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첫 문장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비겁했던 순간에 대해 써보겠다. 난 비겁했던 적이 많아서 다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아주 잘 생각나는 것만 쓸 것이다.” 이것이 열두 살 주현이의 문장임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챈다. 그는 늘 자신이 무엇을 쓸지 독자에게 예고한 뒤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금까지 비겁함에 관한 얘기였다. 이제 마치겠다.” 마치 뉴스 앵커 같다.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독자에게 소식을 전한 뒤 꾸벅 인사를 하고 퇴장하는 듯한 주현이의 글이다.

또 다른 아이의 과제에는 이런 마지막 문장이 적혀있다.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이 한 줄만으로도 아이들은 열두 살 정우의 이름을 외친다. 정우의 글은 언제나 무언가를 궁금해하며 끝나는 경향이 있다. 선생님이 왜 이런 주제를 준 건지도 궁금하고 옆자리에 앉은 형은 글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자마자 글을 마치기 때문에 답이 적히는 경우는 없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끝나는 글들이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문장이 아닌 첫 문장에 질문을 써보자고 말한다. 호기심으로 끝나는 문장 말고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사랑은 궁금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이에 적힌 문장은 훨씬 구구절절하다. “그 애는 나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 애에 관한 온갖 상상에 빠져 단물에 절어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티백처럼 손쉽게 건져진 뒤 물기를 쫙 빼서 곶감처럼 말려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열네 살 예련이의 이름을 외친다. 아주 짧지만 중요한 찰나에 관해 온갖 비유를 끌고 와서 최대한 극적으로 쓰는 것이 예련이의 방식이다.

영화 <매니페스토> 스틸 이미지

아이들 각자의 이 방식들을 나는 글투라고 말한다.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투가 있듯 글쓰는 사람 모두에게 글투가 있다. 글투는 문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과제에서 이름을 지워도 글쓴이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이 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각자 타고난 얼굴이 있긴 하지만 어떤 작가들을 흡수하느냐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도 글투를 미세하게 재형성하며 글을 써나간다.

영화 <매니페스토>에는 한 글쓰기 교사가 등장한다. 그는 칠판에 ‘독창적인 것은 없어(Nothing is original)’라고 적은 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창적인 것은 없다. 어디서든 훔쳐 올 수 있어. 영감을 주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라면 뭐든지 얼마든지 집어삼켜. 옛날 영화, 요즘 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시, 꿈, 마구잡이 대화, 건물, 구름의 모양, 고인 물, 빛과 그림자도 좋아. 너희 영혼에 바로 와닿는 게 있다면 거기서 훔쳐 오는 거야.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훔쳤다는 걸 숨길 필요 없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념해도 좋아.” 

그런 뒤에 교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장뤼크 고다르가 한 말은 꼭 기억해야 해. ‘문제는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다.’ ”

아이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종이 위에서 자기만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표정 때문에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서로 다른 일기를 쓴다. 그들의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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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는 기침, 사랑, 가난이라는 말이 있다. 그중에 가난은 주거형태로 드러나는가 보다.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을 함께 짓는 어느 소셜믹스 아파트에서 두 주택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비상계단을 막아서 주민 갈등이 심해졌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LH 공사에서 지은 아파트에 살면 ‘엘사’, 휴먼시아 아파트에 살면 ‘휴거’, 빌라에 살면 ‘빌거지’라며 놀린다고 한다. 

물질만능주의, 책임의 개인화 사회에서 돈에 따른 차별은 정당한 것이며 가난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게으름 탓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사람을 주거형태로 구분하고 그룹화하여 인지하는 것은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에서 비롯한 집단주의적 사고를 나타낸다.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우리’의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경계 밖의 ‘그들’은 깎아내리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진 생각과 신념은 고착되고 확대 편향되어 반사회적인 어른이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혐오는 경멸, 증오, 기피, 불쾌함이 복합된 강한 감정이다. 속으로 생각만 해도 옆에 있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 언어로 표출되고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징조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언어유희라고 간과했다가는 혐오 표현이 물리적 행위로 이어져 더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 

이미 유럽 주요 국가들은 혐오 발언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만약 우리 반에 가난을 혐오하는 학생이 있다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담임으로서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고 두 가지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다.

첫째, 혐오 표현을 하는 학생을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재미로 썼을 뿐 잘못인지 몰랐다고 한다면 인권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수업과 반편견 교육이 필요하다. 피해가 될 것을 알고도 썼다면 학생의 내면 상태를 점검하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 가정불화, 원만하지 못한 교우 관계, 부모의 높은 기대감, 공허함 등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다. 나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공격적인 언행으로 자존심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반 아이들에게 집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진실한 인간관계가 기반이 되는 참된 삶을 가로막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진정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lt;어린 왕자&gt; 이야기와 더불어 사람이 중심에 있는 세상이 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토의해 볼 것이다. 

가난은 인성 문제가 아니며 집은 생활 공간일 뿐이다. ‘어떤 집에 사느냐?’가 공동체에 소중한 가치를 더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신념을 나누면서 말이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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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으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무척 정겨운 동요가 있다. 하지만 귀에 익은 노랫말과 달리 사람의 손과 발은 절대 ‘시려울’ 수가 없다. ‘시려워’ 꼴의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시려워’라는 말을 쓰려면, 그 말의 기본형이 ‘시렵다’가 돼야 한다. 낱말의 기본형에 반드시 ‘ㅂ’ 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렵다’가 ‘가려워’가 되고, ‘반갑다’가 ‘반가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추위를 느낄 정도로 차다”를 뜻하는 말은 ‘시렵다’가 아니라 ‘시리다’다. 애인이 없는 사람들이 ‘옆구리가 시리다’라고 할 때 쓰는 그 ‘시리다’가 기본형이다. 이 ‘시리다’를 활용하면 ‘시려워’가 아니라 ‘시려’가 된다. “날콩이나 물고기 따위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키는 말인 ‘비리다’를 “생선이 비려워”로 쓸 수 없듯이 ‘시리다’도 ‘시려워’로는 못 쓴다.

추위와 관련해 잘못 쓰는 말에는 ‘오돌오돌’도 있다. ‘오돌오돌’은 “작고 여린 뼈나 말린 날밤처럼 깨물기에 조금 단단한 상태”를 뜻한다. “춥거나 무서워서 몸을 잇달아 심하게 떠는 모양”을 뜻하는 말은 ‘오들오들’이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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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직자 26명의 2009~2013년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은 2013년 6월7일 모터쇼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터쇼라니. 해직자들이 쌍용차의 신차발표회에 가서 부당해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나보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 모터쇼의 이름은 H-20000이었다. ‘20000’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개수를 가리키고, ‘H’는 HEART 혹은 HOPE 혹은 사다리를 뜻한다고 들었다. 그 모터쇼에 나온 차는 달랑 한 대였다. 

그 차를 만든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었다. 해고된 지 5년째에 접어들자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왜 우리는 매일 투쟁만 하고 있는 거지?’ ‘맞아, 우리 원래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었잖아.’ ”

해직자들은 중고자동차 가게에서 2004년산 코란도 밴을 구입해 해체한 뒤, 낡은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조립해 ‘그들만의 차’를 만들었다. 거리와 옥상, 첨탑에서 농성을 하며 ‘시위꾼’ ‘빨갱이’로 매도당하던 그들은 오랜만에 차를 만진 뒤 아이처럼 좋아하고 울었다.

부끄럽지만 그들이 모터쇼를 진행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정리해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노사정(노조, 회사, 정부) 합의에 따라 2020년 1월 복직하기로 했던 쌍용차 해직자 중 46명의 복직이 무기한 연기됐다. 회사는 그들에게 임금의 70%를 주겠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일도 안 하고 돈을 받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비아냥댄다. 복직예정자 김득중씨는 지난 23일 월급 97만6149원을 받았다. 김씨는 1993년 입사해 올해 27년차다. 서류상으로는 쌍용차 직원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액수만 문제는 아니다. 쌍용차 해직자들은 ‘존재의 이유’와 싸웠다. 왜 갑자기 해고되었는가. 경찰특공대가 희대의 진압작전을 벌일 만큼 파업이 불법이었는가. 10년간 30명이 목숨을 잃은 것도 이런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경기 평택이라는 도시를 터전으로 살던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산 자’와 ‘죽은 자’로 분리됐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웃공동체도 무너졌다. 죽은 자들은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쌍용차 출신이라는 것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10년7개월을 버텼다. 남은 복직예정자들은 ‘쌍용차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참담한 사실은 그나마 쌍용차 문제가 지난 10여년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해고사건이라는 점이다. 오늘도 전국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옥상에 오르고 차가운 길바닥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곡기를 끊으며 기약 없는 투쟁을 하고 있다. 정부까지 나서 도장을 찍은 쌍용차의 복직합의가 복직 1주일 전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파기되는 사실을 보며,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그 많은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아마 더 외로워졌을 것이다. 노동하며 일상을 회복하겠다는 바람이, 2020년에도 어떤 이들에겐 몸과 마음을 다쳐가며 절규해야 할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야 할까.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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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봄 스페인에서 다수의 독감환자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독감을 퍼뜨린 것이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포함해 많은 각료들도 감염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성이 약했기 때문에 ‘스패니시 레이디’라고 불렸다. 당시 언론통제가 약했던 스페인에서 집중적으로 독감문제가 다뤄졌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스페인 독감은 8월이 지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강력해졌다. 숙녀가 괴물로 바뀐 것이다. 전염지역도 아프리카와 유럽뿐 아니라 인도, 중국, 한국에까지 확산됐다. 이른바 판데믹(대유행)으로 순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가장 타격을 입은 국가는 남부 유럽과 동남아시아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9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742만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독감환자는 인구의 25~50% 정도로 추정됐다. 매일신보는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14만명에 이른다고 했다. 이 수치도 열악했던 통계 시스템을 감안해야 한다. 얼마나 피해가 컸던지 가을에 추수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5000만~7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보다 3배나 많다.

스페인 독감은 이전 전염병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만들었다. 먼저 전염병의 세계화다. 이전에도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많았다. BC 5세기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유행병으로 그리스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죽음의 수렁에 빠졌다고 적었다. 서기 165년 전염병은 로마를 텅 비게 만들고 안토니우스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다. 514년 역병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0%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돌아 유럽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이들 역병은 파괴적인 독성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전염병은 아니었다.

스페인 독감은 전염 속도에 가속엔진을 장착했다. 선박과 철도는 빠른 속도로 세계에 희생자를 만들었다. 스페인 독감은 기계화된 이동수단을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인간 또는 소나 말의 속도를 능가하는 기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1918년에 한국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전염병의 세계적 전파의 퀀텀점프는 비행기의 출현이 가져왔다. 비행기는 빠르고 멀리 전염병을 실어나를 수 있다. 전염의 세계화와 동시화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2003년 초 중국 광저우에서 발생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비행기의 능력을 입증했다. 사스 감염자가 머물렀던 호텔은 인큐베이터가 됐다. 호텔 고객들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전염병을 퍼 날랐다. 수개월 만에 30여개국에 8200여명의 환자가 나왔고 770여명이 사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이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27일 현재 중국에서만 2744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도 80명에 달했다. 중국 당국의 조치에도 확산기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비행기는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호주에 환자를 실어 날랐다.

신종 전염병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다. 세계농업기구 관계자는 인간집단의 팽창, 자연서식지의 침범, 인간과 야생동물의 국간 이동과 뒤섞임, 자연 서식지와 생태계 교란, 가축과 야생동물의 동시사육, 야생동물 종 또는 야생병원체의 지역 간 이동, 기후변화, 광범한 항생제 사용 등을 꼽았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의학의 발달로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기대가 있다. 과학자들은 항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데 최소한 4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설사 백신을 만들어도 투약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 사이 바이러스는 살기 위해 새로운 변이를 일으킨다. 인간의 노력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기침과 재채기는 반드시 입을 가리고 하라’든지, ‘손을 씻어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마라’ ‘피곤하면 쉬어라’는 대응책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향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3대 요인으로 식량부족과 기후변화, 전염병 유행을 지목한 바 있다. 신종 전염병은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자연의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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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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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한문에 눈을 떴다. 한자하고 한문은 또 다른 세계다. 한자는 한 글자가 하나의 정부(政府)다. 하나의 글자에 하나의 뜻만 고정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다. 같은 한자에 상반되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이인삼각(二人三脚)처럼 뒤뚱뒤뚱 걸어가는 세 글자 이하의 단어에 산술적으로 서너 자 더했을 뿐인데 그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도무지 요령부득인 5언절구, 7언율시의 구절들.

옥편을 뒤적거리면서 밤하늘을 자주 생각한다. 갈피마다 흩어진 한자는 저 하늘의 반짝거리는 뭇별을 닮았다. 고래(古來)로부터 숱하게 뿌려진 별 몇 개가 연결되어 별자리는 만들어졌다. 북두칠성, 오리온, 큰곰자리, 전갈자리가 다 그렇다. 한자를 연결해서 구체(具體)와 심오(深奧)를 빚어내는 저 성좌(星座)에 이백과 두보도 걸터앉아 있는 것.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면서 밤마다 별을 보고 글을 궁리하다가 낮에도 공중을 보려는 습관을 가지려고 한다. 내가 위치하는 곳은 파주출판단지인데 자동차로 출발해 30분 만에 도착하면 서울하고는 영 다른 풍경이다. 평지돌출한 심학산과 서해로 넓어지기 직전의 한강이 넉넉한 세상을 연출하는 것.

우리가 밤낮으로 무엇을 볼 때 전적으로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고개를 조절하면서 천하의 일부를 조각조각 스스로 편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눈을 깜빡거릴 수는 있어도 시선은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너와 나, 저 오리무중의 사이에 무슨 ‘섬’이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섬’에 상륙이 불가능하다. 내리지 않는 눈 걱정이나 하다가 소한, 대한을 엉겁결에 다 보내고 벌써 입춘이 코앞이다. 그 사이에 설날이 끼었다. 까치만큼 좋아라 설날을 기다렸던 게 엊그제였는데, 나는 이제 왜 명절에 시큰둥한 작자가 되었을까. 반성하듯 직진하는 시선을 심학산으로 들어 올리다가 나와 심학산의 사이에 있는 상수리나무 끝에 새삼 시선이 얹혔다. 빈 둥지인 줄 알았는데, 고마워라, 까치 한 마리가 쓸쓸히 날아올랐다. 올해의 설날은 이렇게 겪는가. 산은 아직 정중동, 나는 꽃산행을 준비 중.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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