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소록도를 여러 번 간 적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과 병원이 있다. 한센병은 지금은 치료법도 발견되어 있어서 치료만 하면 낫는 병이고, 병균 자체도 감염이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둥병이라고 알려진 한센병은 우리가 어릴 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어른들은 문둥이가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어린애들을 잡아서 간을 빼먹는다고 했다. 그런 편견은 증오를 낳았고, 그 증오는 문둥이들을 동네에서도 살 수 없게 쫓아냈다. 쫓겨난 문둥이들은 남도 땅 멀리 격리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소록도병원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인권침해는 해방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독한 편견 속에서 그들이 살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 이 병에 대한 유전을 막는다고 단종수술과 낙태수술까지 자행되었다. 병에 대한 무지가 부른 참극이었다.

소록도에 가면 병원 밖 중앙공원까지 갈 수 있다. 일반시민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출입금지 구역 안에 병원도 있고,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들이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데, 1960년대 그곳에 오스트리아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 수녀가 그분들이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이 기억하는 그분들은 비닐장갑도 끼지 않고 그들의 상처를 돌봐주었다. 한센인들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그래서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그들을 수녀님이라고 하기보다는 할매로 불렀다. 그런 그분들은 2005년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홀연히 소록도를 떠났다. 암과 치매로 부담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센병은 쉽게 전염되지 않는 병이고, 병에 걸렸다고 해도 치료를 받으면 낫는 병이다. 에이즈가 치료만 받으면 감기처럼 낫는 병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센병이든 에이즈든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피하고만 싶어 한다. 그런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이런 무지몽매함을 통해 그들을 사회 구성원에서 배제하고, 배제된 그들은 세상을 원망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는다. 그럼 결과적으로 사회는 그런 병을 퇴치하는 게 아니라 그 병은 더 확산되게 된다. 

아마도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대하는 태도도 위의 사례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아직 이 전염병의 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이 병에 맞는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더욱이 중국 우한 지역이 봉쇄되었음에도 국제적으로 확산 속도가 빠르고, 2차, 3차 감염 사례도 발견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다. 

지난달 말에 정부는 전세기를 보내 중국 우한 지역의 교민들을 국내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지금 안산과 진천의 국가시설에 격리 수용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들이 국내에 들어오기 직전에 아산과 진천은 집단행동을 하면서 교민들을 막겠다고 난리를 쳤다. “천안은 안되고 아산과 진천은 되는 거냐”는 반발이 일었다. 한 언론사의 선정적인 단독 보도가 일을 냈고, 다른 언론들이 받아쓰면서 일이 커졌다. 그런데 막상 교민들이 시설에 도착하는 그 순간 그런 반대 움직임은 사라졌다.

‘We are Asan(우리가 아산이다)’ ‘진천에서 안전하게 계시다 건강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와 같은 현수막과 팻말로 바뀌었고, 수용된 교민들을 응원하는 후원물품들도 답지하고 있다. 이렇게 분위기가 반전된 데에는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캠페인이 있었고, 해당 지자체장들이 교민들이 수용된 시설 앞에 임시 사무실을 내는 등으로 해서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론들이 선정적으로 보도를 하면서 혐오를 조장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하고, 개인들은 손을 열심히 씻는 등의 개인위생에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쓰면서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가짜뉴스를 만들어 전파한다든지 하는 일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거대야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굳이 ‘우한 폐렴’이란 용어로 부르기를 고집하는 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상 국제적인 명칭을 거부하고 굳이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전염병과 같은 문제마저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00년대 들어서만 여섯 번째 ‘국제적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감염병균에 의한 심각한 사태가 갈수록 빈발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제적인 협력도 어느 때보다 긴밀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더 나쁜 건 공포증을 불러오는 혐오 바이러스일 것이다. 혐오 바이러스는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어떤 편견도 없이 인간적으로 대했던 소록도의 두 수녀님들처럼, 그리고 혐오를 조장하는 언론과 정치세력에 맞서 중국 우한 지역의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아산, 진천 주민들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혐한 시위대에 맞서는 연대행동을 통해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 방지법과 조례를 제정한 일본 시민들처럼 연대가 더욱 절실할 때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교민들을 응원하고, ‘힘내라 우한, 힘내라 중국’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이런 응원을 받은 중국 시민들은 훗날까지 한국인들의 응원을 기억할 것이다. 혐오가 아닌 연대가 이 국제적 비상사태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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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국회 막바지에 어렵사리 검경 수사권 조정을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및 검찰청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검찰의 힘 빼기나 경찰의 힘 실어주기가 아니다. 국가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실이다.

그런데 견제와 균형이라는 면에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외형을 보면 엇길로 들어설까봐 걱정된다. 독점적 수사와 정보나 규모의 면 모두에서 경찰이 마치 거대 공룡과도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2만 경찰이 정보독점에 수사독점까지 절대권력화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운용 여하에 따라 과거의 경찰국가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해방 이후 지금까지 70여년간 수사권 조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았음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모든 우려는 인권문제로 귀결된다. 인권은 시공을 초월하는 가치로 인간이기에 따라붙는 최소한의 불가침적 권리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영어식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동안 경찰의 독자적 수사권이 번번이 좌절된 것도 경찰의 낮은 인권의식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수사권 조정에 따른 경찰 비대화를 막고 인권경찰을 기약하기 위한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자치경찰제도다. 수사권 조정 논의 초기부터 그 전제로 혹은 이와 병행하여 온전한 자치경찰제 도입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줄곧 있어온 이유다.

하지만 진행되고 있는 경찰개혁 내용은 자치경찰을 하자고 하면서 오히려 기구가 확대되는 감이 있다. 국무총리 산하의 경찰위원회 논의나 경찰청에 별개의 차관급 기구로 국가수사본부를 두는 방안을 말함이다.

경찰구조를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다. 국가경찰에서 정보경찰을 삭제하거나 대폭 축소한 후 국가경찰은 국제, 마약, 테러 등 국제적이거나 광역적인 수사가 필요한 것에 한정하고 자치경찰을 지원하는 체제로 바꾸면 된다. 동시에 지방경찰청 이하의 조직은 자치단체장 소속으로 넘겨 지역주민의 통제를 받도록 하면 될 것이다.

2017년 서울시가 발표한 자치경찰 모델이 이런 내용에 가깝다. 국가경찰 소속의 지방경찰청 이하 단위를 모두 자치단체로 이관하여, 주민들로 구성된 자치경찰위원회에서 시·도 자치경찰청장 및 자치경찰서장 후보를 3배수로 추천하여 시·도지사가 임명하며, 국가경찰 예산을 치안특별교부금으로 전환하여 지역별 치안서비스의 차등문제 및 자치경찰의 처우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논의되고 있는 모델은 제주식 자치경찰에다 몇 가지를 더 얹어 시행하는 방안이다. 이것은 국가경찰기구를 그대로 둔다는 전제에서 출발함으로써 기존의 특별사법경찰을 확장개업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니 무늬만 자치경찰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자치경찰을 걱정하는 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세력의 경찰 장악이나 지방재정 열악을 그 이유로 꼽는다. 앞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주민들로 구성된 자치경찰위원회를 통한 자치경찰 수장의 임명이다. 재정문제 또한 현재의 경찰 예산을 치안특별교부금으로 한정하여 활용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국가경찰에 익숙한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제대로 된 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치안서비스 향상은 물론 그 구성원들의 역할도 훨씬 커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은 지역주민과의 관계가 대세다.

<최영승 | 대한법무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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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휴가 때 앙코르와트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유적을 둘러보다가 문득 허망해졌다. 붓끝을 가볍게 놀리듯 돌에서 깎아낸 무희와 불상들을 촘촘히 새겨넣은 이 거대한 석조 도시를 크메르인들은 왜 기껏 지어놓고 버린 것일까. 수백년 수령의 나무뿌리들이 거대한 뱀처럼 한때의 찬란함을 조용히 집어삼키는 폐허 앞에서 무기력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역설적이지만 이 석조 도시가 원인이라는 학설이 있다. ‘광란의 토목공사’로 국력을 소진했다는 것이다. 1181년 집권한 자야바르만 7세는 베트남 참족에게 점령됐던 앙코르와트를 되찾은 뒤 계획도시 앙코르톰 공사를 시작했다. 1변에 3㎞에 달하는데, 선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지은 동서 1.5㎞ 규모인 앙코르와트의 2배다. 이외에도 반테이끄데이를 비롯한 불교 사원과 50개의 탑에 200개의 웃는 부처 얼굴을 새긴 바이욘 등이 그의 치세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8세기에 창시된 크메르 제국 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도가 된 그는 불사(佛事)를 통해 깊은 신앙심을 표현했다. 여기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장기간 동원됐을 것이다.

이것이 제국의 정점이었다. 이후는 쇠락뿐이었다. 1218년 그가 사망한 이후 왕조는 200년간 이전 수준의 기술 및 건축, 예술, 문학적 성취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1431년, 태국의 침략으로 제국은 붕괴했다. 19세기 후반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이곳을 재발견했을 때, 황금으로 지붕을 칠했던 이곳의 대부분은 무너져 내리는 돌무덤에 불과했다.

물리적 자원과 무형의 제도를 모두 아우르는 ‘국력’은 국민의 힘이다. 어느 사회든 저수지의 물처럼 한정돼 있다. 새로 채워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방향을 책임지는 것은 왕, 대통령, 총리 같은 정치 엘리트들이다. 특권을 누리기에 앞서 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바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제(齊)나라 관중(管仲)은 국민을 함부로 동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상과 벌이 공정한데도 군사력이 약한 것은, 함부로 백성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 백성을 부려서 지치게 하면 백성들의 힘이 다하여 고갈된다.”

국민의 마음인 ‘여론’ 역시 국력이다. 정치인이 함부로 도구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때문인지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여론 동원 정치가 대세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유로존이 휘청이던 2010년 당시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EU 탈퇴 여론이 불거지자 ‘국민투표’를 하자며 무책임하게도 결정을 국민에게 떠넘겼다. 이에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승리하면서 한때의 제국은 이제 유럽 금융중심지 자리까지 내놓게 됐다. 존 버커우 영국 전 하원의장은 브렉시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최대 실수라고 말한다. 포퓰리즘 정치의 진짜 패자는 영국의 미래 세대다.

정치인들이 공동체의 미래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길 멈추고 말초적인 언사로 ‘좋아요’ 클릭수에 매달리고 지지율만 챙길 때, 국가는 분열되고 대가는 내일의 국민이 치르게 된다. 세상에 공짜 점심 없다.

<최민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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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생물학회 주관으로 열린 생물위협(Biothreats)이라는 주제의 학회에 지난주 참석했다. 생명체로 인한 안전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전 세계에서 모였다. 이들은 우한에서 시작되어 WHO 비상사태 선포와 국제적 방역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nCoV2019) 호흡기 질병이 향후 인류에게 인플루엔자 독감처럼 일상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사스, 메르스에 이어 발생한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높아졌지만, 치사율이 현저히 낮아진 것도 서로 공존하며 진화하는 관계로 볼 수 있기에, 질병의 일상화 쪽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 중심의 생태계 변화가 진행될수록 인류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염병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80억에 육박하는 인구 증가와 대량 소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선 인류의 생활 방식은 기후온난화와 같은 지구 생태의 변화를 유도하였고, 깨진 생태계의 균형은 새로운 전염병이나 사라진 질병이 재차 등장하는 여건을 만든다. 

세계화로 좁아진 지구에서 낯선 질병이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까지 전파되는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방역당국도 혼란스럽다. 영화에서나 보던 도시 폐쇄, 여러 나라의 자국민 긴급 수송 등은 물론, WHO 권고 사항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마저 등장하는 것은 아픈 이웃과의 고통 분담이라는 인류 가치나 합리적 이성과는 거리가 먼, 야만에 가까운 감정적 반응이다. 

우한에서의 초기 상황은 진행형이지만 연구자들은 사스나 메르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침착하게 바라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파력은 높지만 치사율이 낮다는 데 주목한다. 앞으로 돌연변이가 더 생길 수 있어 아직 조심스럽지만, 이런 유형의 전염병에 대한 대응은 개인 방어보다는 집단 면역을 갖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현재는 새 질병에 대한 관심과 집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 질병 특성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여론에 맞추고 있지만, 조만간 각국 상황에 맞는, 나라 간 협력으로 이뤄진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편 항공 및 교역량 등을 바탕으로 분석하면 한국은 상위 ‘유행 위험국’이다. 그러나 유행에 더욱 관여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마치 축산에서 공장식 밀집사육 환경이 문제인 것처럼, 서울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같은 고밀집 주거 상황은 전염병 유행에 매우 좋은 환경이다. 방역에 있어서 공장식 축산이 지닌 위험을 우려해 사회적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나, 전염병 유행을 맞이하여 대규모 아파트 문화로 발생한 밀집 생활공간에서의 대안을 묻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뤄진 서울의 주거 환경은 전염병 유행에 가히 폭탄과 같은 또 하나의 변수다.

한편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인간 중심의 사유 방식만으로는 무지가 등장한다. 동물의 공장식 사육 환경 문제에는 무지가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나 장차 경험하게 될 새 전염병에 대한 대책은 공장식 닭장에 버금가는 아파트 집중과 지옥철의 밀집된 도시 생활양식을 전제해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여러 특징을 고려할 때 인플루엔자에 의한 독감 대응책 정도로도 사회 건강성 확보가 어느 정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병원체의 등장으로 국제사회가 시끄럽지만, 돌이켜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휠씬 더 병원성이 높은 생명체가 지구에 존재한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등장시킨 생물체로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유전자 크기가 휠씬 크고 복잡하며, 신속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부 오지를 제외하고는 지구 널리 퍼져 있다. 

그 생명체 이름은 인간이고, 이들이 지닌 이성과 욕망으로 생태계는 교란되고, 그들의 비이성적 두려움과 불안 및 무지는 이 병원체가 지닌 병원성의 동력이다. 합리적 불안과 차분한 대응을 넘어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문명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지금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늘 새롭게 반복하여 우리를 힘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회와 환경 등을 함께 고민하면서(One Health)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어떻게 생명의 가치를 유지하고 존중해 갈 것인가(Planetary Health)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고, 합리적 사고에 기반해 차분하게 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겠다.

<우희종 |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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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의 한철 출몰처럼 사이클이 매우 짧은 영화판에서 점점 더할 나위가 없는 새로운 경지를 밟아가는 <기생충>이 개봉하기 전 공개한 시놉시스를 보면서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가족을 다루기는 했으되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결이 달랐다. 가족과 기생충을 연결했던 내 어설픈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른바 사회적 계급을 건드린 영화는 가족들끼리의 소외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 간의 싸움이었다.

최근 몇 주간 집 안에 스스로 발목을 가뒀다. 오래 묵혀둔 숙제를 거창한 핑계로 삼았다. 산에 못 가니 자꾸 화면 속으로 빠져든다. 좀 모르고 살아도 되는데 어쩌자고 나의 손바닥은 이리도 복잡한가. 그 좁은 면적 안으로 세상만사가 집결하고 그것은 이내 마음속 여러 갈피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근거 없는 불안과 지나친 걱정이 흥건해지는 것이다.

즐비한 나무 대신 이런저런 뉴스는 결이 아주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바탕에는 결국 가족이 있다. 우한의 교포가 입국하기까지의 국내의 싸늘한 반응과 그 이후의 훈훈한 대응이 요동친다. 가족만 먼저 보내고 돌아서는 우한 영사의 눈물의 편지가 있는가 하면 한 교민의 이런 인터뷰도 있다. “남기로 했습니다. 여기 가족이 있고, 중국인 아내가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귀국 여부를 물어 왔지만, 귀국을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력은 물론 음력으로 이제는 완전히 경자년에 들었다. 새 달력도 벌써 한 장만큼 얇아졌다. 입춘이구나, 새삼 중얼거리면서 복잡한 심사도 달랠 겸 창가의 화분 하나를 본다. 작년 고향에 벌초 갔을 때, 내가 뛰놀던 논두렁의 흙을 한 삽 퍼서 담아둔 화분이다. 그냥 무심코 지나친 곳에 의외의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특히 흔하디흔한 방동사니의 매력에 빠져 퍼온 것이다. 내 알량한 호기심을 다독이며 그저 물만 주었을 뿐인데 논두렁 화분의 흙은 지금 들끓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손톱만 한 풀들이 꿈틀꿈틀 올라오고 있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흙에 발을 묻고 사는 것들에 마음을 포개면서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펼친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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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자. 전 세계 청년을 상대로 내일 글로벌 선거를 치른다면 제1 공약은 무엇일까. 단연 기후변화가 돼야 할 것이다.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연말 22개국 18~25세 청년 1만896명을 대상으로 현시대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를 물었더니, ‘기후변화’가 41% 응답으로 1위에 꼽혔다.  

환경 운동가인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 ‘공동의 미래를 향한 지속 가능한 방향 구축’ 세션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살 여중생 그레타 툰베리는 2018년 8월의 어느 금요일,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의회 건물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보도되며 각국 청소년들이 금요일마다 기후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란 단체가 결성됐다. 2019년 3월15일엔 전 세계 110여개 국가에서 140만명이 참여한 동맹 휴학이 진행됐고, 5월과 9월, 11월에도 동시다발적인 전 세계 청소년들의 ‘기후행동’이 이어졌다. 한국 청소년들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팻말을 들고 동참했다. 불과 1년 반 만에 ‘툰베리 현상’이 세계를 휩쓸었다. 

기성세대는 기후변화에 그만큼 민감하지는 않다. 어쩌면 각종 국제무대에서 툰베리와 연달아 설전을 벌인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가까울지 모른다. “기후변화는 거짓말”이라는 트럼프의 입장은 “먹고살기 바빠 기후 문제는 사치”라는 기성세대의 속내와 어느 정도 닿아 있기도 하다. 지난해 4월 유럽의회에서 툰베리는 ‘지금 집에 불이 났어요!’란 연설로 위기를 호소했다. 불타는 지구가 바로 내가 살아야 할 ‘우리집’이라는 연대의식이 세계 젊은 세대들을 하나로 묶었다. 몇 달째 꺼지지 않는 호주 산불, 녹아내리는 빙하, 미세먼지 등 각종 오염물질로 숨 막히는 공기, 플라스틱 등 썩지 않는 쓰레기더미…. 70~80년은 이 ‘집’에서 살아야 할 젊은 세대에게 기후 문제는 미래가 아닌 현실로 다가온 무서운 위협이다.

지난달 31일 ‘환경정의 타운홀미팅’에서 청년들이 공룡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공룡처럼 인간도 멸종하고 말 것”이라며 쓰러져 죽는 연기를 했다. 각국의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2020’ 보고서에서 한국은 61개국 중 58위다. 중생대 공룡처럼 인류세의 인류는 청년세대에서 끊어질까. 스스로 ‘멸종위기종’이라 말하는 청소년들의 외침이 절박하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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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혁신위의 시간’이 끝났다. 지난해 초, 우리 사회를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 이후 이를 구조적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발족된 스포츠혁신위원회 활동이 7차례의 권고와 각 권고의 제도적 이행을 확실히 점검하고 마무리되었다. 

스포츠윤리센터 설립, 스포츠기본법 추진, ‘학생 선수’를 포함한 엘리트체육 문화 혁신,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한 다양한 제도 권고 등은 향후 한국 스포츠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부터는 ‘문체부의 시간’이다. 장기적으로는 스포츠계 전체가 실질적인 주체이지만, 현재로서는 혁신위의 권고에 따른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비 및 인력, 재정, 문화 등에 대한 시스템의 변화를 도모할 단계이고, 이는 당연히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적 의무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떤 권한의 측면이 아니라 의무의 차원에서 ‘문체부의 시간’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각 권고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스포츠계와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설득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력이나 재원에 관련해서는 관계 부처 및 국회와의 밀도 있는 공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렇기는 해도 대통령의 명에 따라 장관이 직접 스포츠계 혁신을 천명하고 차관이 공식 회의에 대부분 참여하여 결정한 7차례의 권고는, 그저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문이 아니라, 스포츠인의 인권 향상과 국민의 활기찬 삶을 위한 국가적 결정 사항이다. 따라서 사안에 따른 완급과 경중은 있을 수 있어도 장기적인 유보나 변형은 있을 수 없다. 속도는 조절할 수 있지만 방향은 흔들려서는 안된다.

혁신위의 공식적인 권고안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권고’하고 싶은 게 있다. 

무엇보다 스포츠계의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이로써 스포츠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는 현재의 참여 구성원 구조, 장기적인 인구학적 재생산 구조, 해당 분야와 다른 분야의 결합 구조 등을 면밀히 분석한다. 아니, 동네에 치킨집 하나 개업하려 해도 유동 인구며 그 나이와 성별을 다 살펴본다. 그런데 스포츠계는 사회 전반의 구조 변화 및 문화적 감수성의 변화와 유리된 채 좁디좁은 칸막이 안에 폐쇄적으로 웅크리고 있다.

이 칸막이를 해체해야 한다. 지금처럼 스포츠계가 장벽을 치고 칸막이를 쳐서 스스로 협소하고 폐쇄적인 ‘이익집단’처럼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스포츠 산업, 과학, 운영, 교육, 국제 관계 등에 지금보다 더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하고 그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스포츠인들이 각 분야의 세상 속으로 늠름하게 참여해야 한다. 그렇게 존중받아야 하고 그렇게 사회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30, 40대 젊은 스포츠 지도자들을 선진적인 관점에서 양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이 세대는 20세기 스포츠의 막차를 타고 각 종목에서 성취를 이룬 세대이자 동시에 21세기의 선진적인 스포츠 문화를 경험한 첫 세대다. 해외 진출이나 지도자 유학 또는 단기적인 해외 대회 참가 등을 통해 이른바 ‘스포츠 선진국’에서 스포츠인들이 어떻게 성장하여 그 지역 사회에서 존중받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한 세대다. 

이 젊은 지도자들에게, 혁신위의 권고대로, 최소한의 안정적인 생계 조건을 마련해주고 이들이 선진적인 스포츠 교육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우리의 스포츠 문화를 저변에서부터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국제 외교, 분쟁, 환경, 성, 과학, 도시 재생 등 스포츠가 세상 속에서 수많은 가치들과 결합하고 이로써 더 많은 산업과 직업으로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첫 세대가 되어야 한다. 

끝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 이른바 ‘체육계 현장’이라고 해서 기존의 ‘칸막이’에 따라 견고하게 조직되어 과잉 대표되는 목소리만 들을 게 아니라 그 바깥으로 밀려난 지도자들, 방치된 선수들, 위계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학생 선수와 학부모들, 이 ‘수많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다. ‘혁신위의 시간’은 그것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문체부의 시간’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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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년 전 제5회 지방선거가 있었다. 흔히 명명되기로 ‘무상급식 선거’였다. 무상급식 공약이 그야말로 전국을 휩쓸었다. 선거 구도가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 여부로 선명하게 나뉘었고, 나아가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의 구도로 확장됐다.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에 관한 논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애초 당시 여당(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으로 전망됐던 선거 결과는 ‘야당 승리’로 정리됐다. 무상급식을 전면에 내건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며 한국 사회는 보편적 복지의 시대로 패러다임 전환을 시작했다. 

선거의 제1기능은 물론 누군가를 뽑거나 뽑지 않는 것, 즉 선출이다. 하지만 제5회 지방선거가 잘 보여줬듯 선거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계기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정치인과 정당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책 공약으로써 제시하고 논쟁하며, 시민들은 여론과 투표로써 특정 방향을 승인한다. 전체 시민의 의사가 득표수로 명확하게 표현되는 선거의 특성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래서 정책 논쟁 없는 선거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뒷맛이 찝찝하다. 정권 수호든 심판이든 정치적 결과를 이뤘을지 몰라도, 시민들이 무얼 원하며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를 확인하고 합의하지 못한 선거는 반쪽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역시 불평등 문제다. 이른바 ‘조국사태’를 경유한 지금은 특히 자산·세습의 불평등 문제가 그렇다. 지난 수십년간 질주해온 ‘각자도생의 신화’를 멈춰 세우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최선의 타이밍은 지금이다.

그런데 거대 양당이 내놓은 ‘1호 공약’을 보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1호 공약은 단순한 공약을 넘어 그 정당이 지향하는 사회를 보여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텐데, 이들의 공약에는 아무런 시대정신도 보이지 않는다. 공공 와이파이 확대(더불어민주당)나 공수처 폐지(자유한국당) 같은 것들이 1호 공약으로 발표되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조국사태’로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작년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정의당의 1호 공약은 드물게 흥미로운 공약 중 하나다. 청년기초자산제, 만 20세가 된 모든 청년에게 3년에 걸쳐 1000만원씩 총 3000만원을 ‘기초자산’으로 지급하겠다는 정책이다. 청년들이 이 기초자산을 대학 학자금, 주거비, 초기 창업자금 등으로 활용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당은 극심해진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 이 정책을 내놓았다고 강조한다. ‘부모 찬스가 아니라 사회 찬스’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 정책은 소득 격차를 넘어 자산 격차를 쟁점화하며, 불평등 해소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물론 냉정하게 평가하면 청년기초자산제의 정책 설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청년에게 3000만원을 지급한다고 만연한 불평등이 단번에 해소되진 않을 것이다. 오늘날 불평등이 청년 세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십수조원에 달하는 현금이 갑작스럽게 시장에 유통되어 발생할 경제학적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결국 그 막대한 돈이 사학재단과 건물주에게 흘러가 그들 배만 불려주는 것은 아닌지도 우려된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를 단지 ‘불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 삼아 치열하게 논쟁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이 정책이 상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 때문이다. 더 이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없으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고,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 이 명료한 아이디어가 영원한 상식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으로 이 공약이 논쟁되기를 기대한다. 제5회 지방선거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 책임 있는 그 어떤 정치세력도 무상급식에 반대하지 않게 되었듯이.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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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개정으로 올해 고3 학생 중 만 18세가 되는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와 동등한 정치적 한 표를 가진 학생들이 교실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교사인 나에게도 무언가 낯설고 새롭게 다가온다. 적어도 고3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학교는 한동안 그 새로운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하고 만들어가는 경험의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학생들은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이었다. 그 가르침은 ‘내가 알려줄 테니 너는 그것을 받아들여라’라는 지배적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봉건사회에서는 권력의 혈통을 가진 귀족들만 ‘말’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말은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가 되었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말’은 들려지지 못했다.

지금도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말하기를 어려워한다. 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공적 영역에서 ‘말’은 언제나 지위와 힘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었고, 학생과 교사들은 ‘듣는 자’로 머물러야 했으며,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때로는 두려움과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들려지지 못한 억압된 목소리는 사적 영역이나 SNS를 타고 비난과 혐오, 거짓과 억측이 되어 우리의 공적인 마음을 분열시키고 아프게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막대한 사회적 비효율성을 지속해서 겪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사 또한 교실에서는 ‘말하는 자’로서 힘을 행사하게 된다. 교사나 교수들이 특정 이슈에 대해 자기 견해를 말하면 학생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것은 주장에 대한 찬반보다도 말하고 듣는 관계의 공정함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투표권은 주어졌으나 벌써부터 학생들의 정치적 발언과 참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염려스러운 것은 기성 사회가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혐오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말이 공정하게 들려질 수만 있다면, 모든 차이는 결국 우리의 이해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해주는 고마운 자원이 된다. 

우리의 염려는 학생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혐오와 억측으로 우리의 공적인 마음이 분열되고 상처받는 것이며, 그 상처가 학교현장에까지 퍼질 것에 대한 염려이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그들이 생애 처음으로 행사하게 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를 선거교육이나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제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올해 투표에 참여하게 된 18세 청년 학생들을 환영하며, 기성세대로서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공적인 영역으로 정중히 초대한다면 그들은 우려 대신 우리의 정치 현실에 새로운 역동을 선물할 것이다. 그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학교의 수업과 지역사회를 통해 서로의 다름이 공정하게 들려질 수 있는 민주적인 참여와 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교육적 경험을 모색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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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은 24절기의 시작인 입춘이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음력으로 날짜를 센 까닭에 24절기도 음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24절기는 태양의 운동과 일치한다. 24절기는 언제나 양력으로 매월 4~8일 사이와 19~23일 사이에 들어 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음력을 사용하면서 양력인 24절기를 함께 쓴 것은 강수량이나 일조량 등이 중요한 농사 때문이다.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냉이나물은 없어지며, 보리이삭은 익어서 누런색을 띤다”는 소만(小滿), “씨를 뿌리기 좋은 시기로, 보리베기와 모내기가 이뤄지는 때”인 망종(芒種) 등을 알아야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절기에 맞춰 농사를 잘 지을 지혜를 갖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철들다’이다. 반대로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철부지(-不知)’이고, ‘철없다’도 같은 의미다.

이 ‘철’을 속되게 ‘철딱지’ ‘철딱서니’ ‘철따구니’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흔히 “이런 철딱서니(철딱지)를 봤나”라고 하는 말은 이상한 표현이다. “이런 철딱서니(철딱지) 없는 사람을 봤나”라고, ‘없다’가 꼭 들어가야 바른 표현이 된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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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중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사망자가 362명으로 집계돼 2003년 사스 때의 사망자 수(349명)를 넘어섰다. 확진자는 2만명을 향해 치닫고 있다. 중국 내 사망자가 하루 50명, 확진자가 2000명꼴로 늘면서 전파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양상이다. 보건 전문가들은 향후 10~14일에 신종 코로나 확산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종료 시기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장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우려가 이어지는 가운데 3일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을 찾은 시민들 대부분이 마스크를 쓴 채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감염 속도도 빨라졌다. 총 감염자 15명 가운데 11명이 지난달 30일부터 2일까지 4일간에 확진판결을 받았다. 2·3차 감염자가 발생한 데다 ‘무증상 전파’ 가능성마저 엄존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확산 방지책 마련이 절실하다. 우한에서 입국해 격리생활 중인 교민 701명 가운데에는 확진환자가 한 명에 그쳐 일단 발등의 불은 껐다. 앞으로의 과제는 확진자 15명이 거쳐간 서울, 경기, 충남, 전북, 강원, 제주 지역의 감염을 어떻게 차단하느냐는 점이다. 지역 접촉자로 의심되는 이들의 자진 신고와 검역이 필요하다. 이제 국경 검역이나 감염병 국내 유입 차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부는 4일 시행되는 우한 체류 외국인 입국제한조치만으로는 신종 코로나 확산을 막는 데 역부족이라는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 광범위한 지역 확산에 대비해 2차 대응책(플랜 B)을 서둘러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력·공조를 강화할 것을 지시하면서 지역사회 감염을 막기 위한 당국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밀접접촉자와 일상접촉자를 구분하는 종래의 방식을 폐지하고 모두 일괄접촉자로 분류한 뒤 자가격리토록 했다. 무증상·잠복기에 있는 감염자들에게 노출돼 감염되는 사례를 막기 위한 조치다. 또 자가격리자에 대해서는 지자체 공무원을 전담 배치해 상태를 관리토록 했다. 그러나 접촉자 격리와 확진환자 조기 발견과 같은 상황적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종 코로나의 지역사회 확산을 막기 위해 방역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현재의 유증상자 위주의 방역에서 벗어나 확진자가 ‘무증상 상태’에서 접촉한 이들도 자가격리나 능동감시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방역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중국 방문 여부에 상관없이 발열·기침 등 의심 증상이 있으면 신고하고, 감염자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선별진료소를 확대해야 한다. 신종 코로나의 지역유행에 대비해 음압병상을 갖춘 지역거점병원을 미리 지정해야 한다. 선제적인 조치만이 감염병 확산을 막고 국민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들 역시 손 씻기, 마스크 착용, 기침 예절 등 개인위생 수칙을 지키며 감염 예방에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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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권 18세 하향에 따른 교내 선거 교육의 방향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고 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지난주에도 “만 18세까지 선거권이 부여된 만큼 선거를 매개로 한 참정권 교육이 무한대로 확대되어야 한다”며 학교 내 모의선거 교육을 허용해달라고 촉구했다. 반면 중앙선관위는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방식의 모의선거 수업은 허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21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일이 7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간만 보내고 있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참정권 교육의 핵심이 모의선거인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선관위와 교육부가 나서 모의선거 실시를 적극 논의하는 게 맞다. 일본과 핀란드도 모의선거를 실시하고 있다. 문제는 사전 준비가 절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회가 18세 투표권을 인정한 개정 선거법을 촉박하게 통과시키는 바람에 법률적 보완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관위가 교내 모의선거 교육의 선거법 위반을 우려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일부 교사의 교육 내용이 중립성 위반 시비에 휘말리거나 학생이 법을 위반할 경우 그 후폭풍은 감당하기 어렵다. 서울시교육청은 이에 대한 책임과 선거관리의 민감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선관위가 학교에 강사를 보내 선거 교육을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소극적이다. 보수세력이 시비 걸 것을 두려워해 할 일을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양측이 교내 선거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선관위는 “서울시교육청이 상세한 계획을 포함해 교내 모의선거에 대한 질의를 하면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 답변하겠다”고 밝혔다. 교육청은 모의선거를 허용해달라고 선관위에 압박만 할 게 아니라 법에 저촉되지 않을 교육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처음 투표하는 미래 세대에게 투표의 참뜻이 무엇인지조차 가르치지 않고 투표하라고 독려만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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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공감이라는 말처럼 크게 성공한 심리학 용어도 없을 것이다. 원래는 그리 흔히 쓰던 말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여섯 번 등장한다. 한 번은 한명회가 명나라에서 성종의 표문을 올리며 황제의 은덕을 찬양할 때 쓰였다. 나머지는 임금의 성덕에 군신이 같이 감격한다며 쓰였다.

혹시 개화 이후 많이 쓰게 된 것일까? 옛 신문을 검색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1941년 12월9일 매일신보에 실린 ‘제국을 절대 지지, 독일조야 만강의 공감’ 제하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독일 국민이 일본 제국을 지지하며 가슴 벅차게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기사 이틀 전, 진주만 공습이 있었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예전에는 공감이란 말을 그다지 흔히 쓰지 않았다. 노래 가사에 감동할 때나 썼던 것 같다. 정신의학을 시작하며 공감의 심리를 배웠지만, 이처럼 대중화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온갖 곳에 남용된다. 우리 동네엔 공감 떡집도 있고, 공감 치킨도 있다. 공감대 아파트도 있다.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다. 한때는 재건이나 현대, 부흥이란 말이 인기를 끌었고, 미래, 융합, 세계화 등의 용어도 히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절박했던 가치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인의 마음에 뭔가 깊이 와닿는 것이 있으니 인기를 얻는다. 그렇지 않다면 갈비 공감이나 공감 떡볶이처럼 썩 공감 가지 않는 상호가 등장할 리 없다.

현대인은 공감에 굶주려 있는 것일까? 콘라트 로렌츠는 밀집 도시에 사는 현대인일수록 오히려 서로 멀어지며 고립된다고 하였다. 하긴 전통사회에서는 공감이라는 말이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부락민 모두 서로의 생각을 항상 넘치도록 나누었을 테니 말이다. 구중궁궐에 갇힌 임금에게나 ‘백성이 성덕에 공감한다’라고 꼭 집어 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정서적 공감이다. 타인의 기쁨이나 슬픔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상태다. 자동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대부분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주관적인 감정적 전염이다. 둘째, 인지적 공감이다. 타인의 입장이나 형편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제법 애를 써야 가능하다. 빈자에게 부자를, 부자에게 빈자를 공감해보라고 해보자. 부러움이나 연민의 감정이 앞서서 제대로 공감하기 어렵다. 인지적 공감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추상적 과정이다.

정서적으로 전혀 공감되지 않는 대상에게 인지적으로 공감해본 적 있는가? 정신과 전공의 때 그런 훈련을 받는다. 사실 환자의 과도한 기분이나 엉뚱한 행동, 망상에 금방 공감하긴 어렵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진짜 공감은 아니다. 잘해야 동정심이다. 도무지 납득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상대를 이해해내려는 인지적 공감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끄는 공감은 전자의 공감이다. 자동으로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나 주장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 그렇지 않은 자를 ‘공감 능력이 없다’며 나무란다. 하지만 이건 공감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 차이에 불과하다. 마네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는 친구가 왜 감동하지 않느냐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모네를 더 좋아하는데. 

그러니 상대가 공감 능력이 없다며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공감 능력 부족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서 ‘공감’이라는 힙한 용어를 덧씌워 몰아세우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공감하는 우리 편’과 ‘공감할 수 없는 상대편’을 가르는 경계의 언어로 잘못 쓰이고 있다.

공감은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가 쌓는 확고한 감정적 성벽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잇는 가느다란 인지적 교량이다. ‘너는 도대체 왜 공감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이야말로 얼마나 ‘비공감적’인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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