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15일 치르는 21대 총선이 7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여야 모두 후보 영입과 공천 작업, 공약 개발로 분주하다. 일부 야당은 통합 논의와 신당 창당 등의 현안도 걸려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비친 정치권의 모습은 유권자인 국민들은 안중에 없고 의석수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자신들의 리그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여러 정당들이 공약을 하나씩 발표하고 있지만, 어려워진 국민들의 삶과 국가 및 지역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 방향과 수단 마련, 이를 위한 활동계획에 대한 고민과 노력은 부족해 보인다. 

또 최악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20대 국회 활동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성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정치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안목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을 대하는 정치권의 자세와 수준이 바뀌지 않고서는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국민들의 우선 관심사는 국가경제와 민생경제에 있다고 보인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다수의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 속에 희망까지 잃고 있고, 중소기업은 여전히 대기업들의 횡포와 높은 진입장벽으로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소비지출이 급감하면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내수 악화가 심화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거대 양당의 우선순위 공약을 보면 이 같은 경제상황과는 무관하다. 민주당은 1호 공약으로 ‘2022년까지 공공와이파이 전국 5만3000여개 구축’, 2호 공약으로 재벌 경영권 승계에 악용될 수 있는 차등의결권 도입이 포함된 ‘벤처 4대 강국 실현’을 내걸었다. 한국당은 공수처 폐지가 담긴 사법개혁과 재건축 및 담보대출 규제 완화가 담긴 주택 공약을 발표했다. 

현재 침체된 우리 경제와 민생경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본인들의 표 계산에 의해 나온 공약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인재 영입 또한 지금까지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유권자들의 정책과 정치적 분석 능력을 우습게 알고 있는 것이다.

정당과 의원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바꿔줄 수밖에 없다. 국회를 심판하고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21대 총선이라는 중요한 기회가 왔다. 우선 각 정당과 후보들의 20대 국회 활동 평가, 정당 및 후보자들의 공약, 후보자의 자질과 경력, 전과기록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심판을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잠깐 국민들을 떠받드는 척하는 국회의 버릇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정치권의 자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자세가 적극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7일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4·15 총선 서울 종로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대표는 적장 앞에 등 떠밀려 나간다. 전직 대선후보는 제 집 앞에서 싸울 생각만 한다. 당은 선거법 개정에 내내 손놓고 있다가 패스트트랙 얻어맞고 뒤늦게 위성정당 만들 생각이나 한다. 그리고 그 당의 지지자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아직도 ‘좌빨’ 타령하며 중도층에게 혐오감과 불쾌감만 안겨주고 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대통령은 야당 복이 터졌다. 촛불 덕에 쉽게 당선됐지, 야당 덕에 통치도 거저먹는다. 유재수 비리, 감찰 무마, 조국사태에 선거개입 사건 등 대형 사고가 줄줄이 터져도, 자유한국당이 제1야당인 한 더불어민주당은 아무 걱정이 없다. 떨어져나간 표가 절대 그 당으로 가지는 않을 테니까.

여당의 실정에도 한국당이 반사이익을 못 얻는다.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탄핵 직후 개혁을 하겠다며 탈당했던 의원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한국당으로 돌아갔을 때, 이 사태는 이미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때 꿋꿋이 버텼다면 정권에 실망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지금 강력한 대안세력으로 부상했을 게다.

유권자들은 한국당을 심판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심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왜? 탄핵의 현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한 심판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박근혜 탄핵은 완료형이지만, 한국당에 대한 탄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멸종 위기의 대한민국 보수

자기 점검과 노선 수정의

능력마저 잃었다

이런 지적조차 진보에서

대신 해줘야 한다는 게

대한민국 보수의 비극이다


보수는 위기에 처했다. 눈앞의 선거가 문제가 아니다. 변수가 없는 한 이 위기는 영속화할 것이다. 사실 한국의 보수는 그동안 너무 안이했다. ‘종북’ 딱지 붙이는 것만으로도 쉽게 이기니, 굳이 보수의 이념을 긍정적으로 정립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박정희 서사’ 하나로 버텨온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주의는 이념으로서 이미 죽은 지 오래다. ‘박정희의 암살’ 자체가 실은 그 사실의 정치적 증명이었다. 박정희주의 이후에 보수는 대안서사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고도성장’과 ‘국가안보’라는 박정희주의의 두 기둥을 각각 재탕했다. 이 복고 취향은 결국 시대착오로 드러났다.

이렇다 할 정치적 비전이 없다 보니 보수는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데에 주로 ‘공포’를 이용해 왔다. 하지만 레드 헌트도 자기들이 압도적 다수일 때나 무서운 것. 지리멸렬한 소수의 ‘좌빨’ 타령은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런 보수를 사람들은 자연사박물관의 박제동물 보듯이 구경한다. ‘얘들아, 저게 3공과 5공의 박제란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기 마련이다. 오랜 세뇌로 이성이 마비된 이들은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져 약간의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경직성이 얼마 전만 해도 보수의 든든한 자산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을 외치던 콘크리트 지지층이 이제는 보수의 부채가 되었다. 개혁을 가로막는 게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정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이라도 봤지만, 탄핵 이후에는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정권에 대한 실망이 좀처럼 보수의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 그 당이 혐오기피정당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황교안 전도사는 빤스 목사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보수적 가치의 핵심은 ‘국가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에 있다. 하지만 이 보수적인 나라에서 보수의 덕목을 갖춘 이를 본 적이 없다. ‘보수주의’는 결코 만만한 이념이 아니다. 그런데 이 보수적인 나라에 제대로 된 보수의 담론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보수가 공포 마케팅으로 제 사익이나 채워 왔기 때문이다.

보수주의가 걱정해야 할 것은 선거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위기다. 대한민국 보수는 멸종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보수진영에서는 이를 경고하고, 이를 우려하는 이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보수는 자기 점검과 노선 수정의 능력마저 잃었다. 이런 지적조차 진보에서 대신 해줘야 한다는 게 대한민국 보수의 비극이다.

당장의 선거에서 몇 석 더 얻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보수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스스로 보수적이라 생각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선택과 신념에 다시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주는 데에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요즘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미세먼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와 함께 지구촌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남긴 유언장에는 인류가 앞으로 100년 안에 새로운 행성을 찾아 지구를 떠나지 않으면 멸종할 것이라는 경고가 들어 있다. 그 원인으로 환경파괴, 지구온난화, 원자력발전소와 핵폭탄, 사람들의 건강 악화 그리고 소행성 충돌을 들었다. 소행성 충돌을 제외하곤 모두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당장의 돈벌이에만 혈안인 머니좀비(money zombie)들과 이들과 한통속인 정치인들에겐 기후변화도 부정의 대상이어서 10년 뒤 지구의 운명이 정말 걱정이다. 이들에게 지구를 맡기기보다는 지구촌 시민들이 직접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최근 잇따르는 폭염과 심각한 미세먼지 문제를 겪으면서 환경파괴에 의한 인류 멸망 시나리오가 가속화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미 기후재앙은 살벌한 현장을 일상화하고 있다. 얼마 전 들이 건조해지자 들불이 발생해 해안선을 따라 전 국토로 번지면서 몇 달째 화염에 휩싸인 호주 해안을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확산되는 화염과 여기서 나오는 연기의 띠는 불길한 전조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만일 현재 상태가 지속된다면 10년쯤 뒤엔 전 세계가 봄마다 화염에 뒤덮이고 여름엔 태풍에, 겨울엔 한파나 온난화 등 이상기후에 시달릴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되고 인명손실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탄소배출량을 줄이겠다고 선언한 기후변화협약이 무색하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90년에 비해 무려 60%나 증가했다.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각 나라가 제출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100% 이행하더라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로 제한하기에는 역부족이라 각 나라가 지금부터 2030년까지 예상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5%를 감축해야 하는 상황이다. 과학자들은 지금처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 2100년까지 갈 것 없이 10~20년 안에 지구 기온이 1.5도 이상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로에 선 지구를 살리는 일은 과학기술의 힘만으로는 힘들다. 온실가스를 크게 줄여야 하는데 지구촌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물과 전기를 아끼고 특히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품의 사용을 자제해 자원 낭비와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또한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 온실가스를 매년 100억t 이상 배출하는 가축 사육을 억제하려면 육식을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간소한 채식 중심으로 식단을 바꿔야 한다. 이를 지키면 자연히 음식물쓰레기도 줄어들 것이다. 쓰레기 분리와 재활용은 물론이고 특히 평소에 전기와 물을 아끼기 위해 냉난방을 자제하고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애용해야 한다. 독성 쓰레기 투기나 폐수 방류 등 환경파괴범을 보면 즉시 128로 신고해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

정책적으로는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나무를 곳곳에 많이 심고 태양광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를 늘려 화석연료를 줄여나가야 한다. 환경 선진국 독일은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이미 20%를 넘어섰는데 한국은 겨우 1%를 넘어서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지구를 살리는 일들을 실천하려면 자연의 순리를 존중해 자연스럽고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기영 | 초록교육연대 공동대표·호서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현대국가에서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고전적 정의도 있고, 다원주의 국가관에서는 ‘갈등의 발견과 문제의 해결’로 보기도 하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그 어디에도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처럼, 정치는 말로 하는 패싸움이라는 정의는 없다. 비통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정치인들의 책임일 수도, 아니면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제스처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보통사람들의 책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보건대, 그것을 매개하는 평론가들과 언론의 책임이 작지 않다.

소위 어용지식인을 자처하는 논객들은 사실 언론이 그 말을 진지하게 전할 필요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란 패를 나눠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상대의 잘못은 다소 불확실하더라도 크고 선명하게, 우리 편의 잘못에는 눈을 감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이나 비유로 상대를 매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나를 다 믿지는 마세요’ 하고 이 패싸움에 뛰어든 사람들인데, 그것이 사실을 구별하고 진실을 가리는 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무리 급해도 술자리 담화를 지면으로 끌고 오면 안된다. 공개적으로 육두문자를 섞어서 하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상대는 없다. 풍자에는 해학이 있어야 하고, 비판에는 애정, 걱정, 비전 중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민주당만 빼고’ 식의 무책임한 말을 해서도 안된다. 민주당만 아니면 우리공화당이나 자유한국당, 정의당을 찍는 것이 다 똑같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론적으로 보면 좌익소아병이나 좌익모험주의인데, 잘 봐주어도 단순한 정치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역시 어용지식인이나 무책임한 논객들과 다르지 않다. 검찰의 수사가 어떻게 모두 옳고, 문재인 정부의 정치가 어떻게 다 훌륭하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바이라인을 보면 기사를 읽을 필요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정 기자가 항상 특정 기관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기만 하면 어떤 독자가 공정하다고 신뢰하겠는가? 언론이 기계적 중립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합리적 파당성이 패싸움에 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병이 났는데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묻지 않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장면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의 적나라함이 아니라 그저 선정성이다. 때로 그것이 감추어진 진실을 들추기도 한다. 그러나 뉴스가 막장드라마가 되서는 안된다.

칼 슈미트는 정치란 친구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질서를 전제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한 정치라고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은 결코 스스로 작동하지 않으며 항상 정치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다른 방식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라 했고, 모든 전쟁은 무제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모든 정치가 전쟁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고, 모든 전쟁이 최대한의 잔인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공적 담론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나 전쟁의 본질을 잘못 들먹이며 세상을 패싸움판으로 만들어 놓고 영웅인 양 의기양양해한다. 언론까지 여기에 편승해 있다. 비통한 일이다.

탈무드는 험담이 세 사람을 망친다고 했다.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 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험담을 하는 그 자신이다. 언론이 잘못하면 대상이 되는 정치인도, 듣는 국민도 괴롭지만, 그 자신도 망친다. 선정성으로는 언론이 유튜브를 이길 수 없다.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한 장면이다. 냉전시대에 소련 스파이를 변호하는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에게 CIA 요원은 정보를 요구한다. 변호사는 규정보다 국가안보가 중요하다는 요원에게 말한다. “당신은 독일 출신이고 나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무엇이 우리 둘을 ‘미국인’으로 만들었을까? 단 하나다. 규정집. 이걸 ‘헌법’이라고 하지. 그러니 규정 따위 없다고 건방 떨지 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지닌다. 이는 내가 싫어하는 성별을, 괴상한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를, 자신을 귀족이라 생각하는 꼴불견 인간을 같은 강의실에 마주한다고 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푸념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인간이 공공선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편견으로 차별이 정당화될 순 없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 “내가 숙명의 후예다!”라고 외치기라도 했다면 작금의 논쟁을 약간이라도 이해하겠지만 공간에 발을 딛는 걸 막는 건 자유도, 권리도 아니다. 생물학적 여성만큼 피해의 총량을 지니지도 못했고, 코르셋 문화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기에 ‘그래서’ 싫어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규정집에 천명된 내용을 어길 순 없다. 인간이 비둘기가 어찌 되냐 등의 F학점 논리가 여기저기 등장하지만 설사 A학점 수준이라도 그렇게는 못한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최종 합격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두고 학내 찬반 여론이 갈렸다. 6일 학교 게시판에 찬반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상훈 기자

원인이 있을 게다. ‘래디컬(radical)’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솎아내려는 이들이 달나라에서 특명을 받고 침투한 외계인은 아니므로 이 현상에 밴 사회의 결을 찾는 건 중요하다. 넓게는 괴상한 기준으로 구역을 나눠 사람을 선별하려는 일상의 모습과 닮았다. 성과의 총량으로 사람의 목숨조차 구분하는 게 버릇이 된 사회에서 고통의 총량에 따라 진짜 인간, 가짜 인간을 판단하는 게 낯설어 보이진 않는다. 자신들 기준에서 ‘자격 결핍’인 누군가를 찾아, 몇 가지 엉터리 사례를 덧붙여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시대 정서가 어찌 사람을 가려 부유했겠는가.

좁게는 여성‘만’이라는 서사를 지닌 페미니즘 담론이 약간은 잘못 전개된 측면을 따져야 한다. 역사와 문화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여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 설명하는 건 타당하다. 하지만 현재에 적용할 때는 정교해야 한다. 성평등 강연을 다니다 보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면서 무례한 말을 늘어놓는 여성을 만난다. 논리가 얼마나 부실하냐면, “남자가 왜 여성의 고충을 감히 말하는가!”라는 내용뿐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남성의 입에서 표현된 제한된 여성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정당한 분노를 일상에서 아군과 적군조차 식별하지 못하는 연료로 태워버리면 불평등의 두께가 쉽사리 깨지겠는가. 여자‘만’이라는 담론은 사람을 결집시키는 데도 유용하지만 갈라버리는 동력도 되기에 신중함이 필요하다. 몇 년 사이 페미니즘 담론이 폭발하면서 이를 정제할 시간이 부족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모든 운동은 투쟁과 논쟁의 영역을 구분하는 지혜, 문화 비판과 제도 개선의 속도 차이를 조율하는 치밀함 없이 성과를 낼 수 없다. 전복을 꾀했던 혁명조차 협상과 전략 없이 성공한 적이 있었던가.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반 칼럼

마스크가 논란이다. ‘피 묻은 마스크’가 학교나 쇼핑센터에서 발견됐다는 괴담부터 사재기, 품질 기준, 사용 방법까지 모두가 이슈다. 마스크는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꾸미기 위하여 나무, 종이, 흙 따위로 만들었던 물건을 말한다. 그리스 아가멤논 왕의 마스크,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황금마스크와 같이 마스크는 얼굴 가리개다. 우리나라의 탈도 마스크의 일종이다. 죽은 자를 위한 제례용이거나 행사용으로 많이 쓰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작금에 논란이 되는 마스크는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변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우려가 이어지는 가운데 3일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을 찾은 시민들 대부분이 마스크를 쓴 채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마스크가 나온 것은 19세기 이후다. 코와 입을 가릴 수 있도록 한 마스크는 수술용으로 개발됐다. ‘수술용(외과용) 마스크’가 명확한 표현이다. 의사가 수술할 때 입이나 코에서 미생물이 환자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의사가 아닌 환자 보호용이다. 18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외과의사 폴 버거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마스크는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어 산업용 마스크도 개발됐다. 이는 사용자 보호용이었다. 대표적인 제품이 방독면으로 유해가스에서 분진, 황사 방지용으로 확대됐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마스크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코와 입을 가리는 형태의 마스크는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 많이 사용된다. 미국에서는 마스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총기 사용이 허용된 마당에 마스크 사용은 범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이돌의 패션용 검은색 마스크도 많이 눈에 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예방하기 위한 마스크 구입이 ‘하늘의 별 따기’다. 인터넷 주문이 유명 공연 예매나 대학가 수강신청 때와 같은 ‘클릭 전쟁’ 수준이라는 말도 나온다. 마스크의 품질 기준(KF99, KF94, KF80)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인용 마스크는 KF(미세입자 차단율)80 이상이면 무난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얼굴에 밀착시켜 사용하고 비닐봉지에 넣어서 버려야 한다. 전문가들은 손을 자주 씻고 기침은 옷소매 위쪽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 성능 좋은 마스크보다 손씻기와 기침예절이 관건인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중국에 500만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반응이 많았다.

“중국이 전 세계에 피해 입힌 거니까 우리가 중국에 마스크랑 돈을 청구해도 모자랄 판 아닌가” “언제까지 중국 눈치만 보는 사대주의 외교를 펼칠 것인가” “여러분, 우리 세금 60억원이 이렇게 터지고 있습니다”. 발 빠른 누군가는 청와대 게시판에 중국 500만달러 지원을 반대한다는 국민청원까지 올렸다.

알 수 없는 위험 앞에서 자기보호 본능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 마스크를 쓰고, 예전보다 더 자주 손을 씻으며, 정부에 더욱 촘촘한 방역대책을 요구한다. 추가 확진자가 급증하고, 3차 감염자까지 나온 상황에서 이는 반드시 필요한 경각심이기도 하다. 2015년 메르스 참사를 겪어 본 우리는 이미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방역망에 뚫린 작은 구멍 하나로도 둑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문제는 바이러스에게 국경은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아무리 국내 방역을 강화한들, 신종 코로나의 진원지인 중국에서 확산이 멈추기 전까지 이 사태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제트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대에 우리는 숨을 곳이 없다. 국내 12번째 확진자는 일본에서 감염됐고, 16번째 확진자는 태국 여행을 다녀온 후 증세가 나타났으며, 17·19번째 확진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온 후 양성 판정을 받았다. 중국에서 오는 항공기를 제한한다 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방역망이 뚫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2014년 에볼라가 유행할 때 세계 각국이 감염자의 입국을 막으려는 데에만 안간힘을 쓰자,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는 “집이 불타고 있는데 방 안에 연기가 들어오지 못 하도록 문틈에 젖은 수건만 끼우자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를 막으려면 불부터 꺼야 한다.

현재 매일같이 사망자와 의심환자가 폭증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심각한 의료용 보호장구 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후베이성 왕샤오둥 성장은 관영 CCTV 산하 CGTN에 “현재 하루치 분량의 의료장비밖에 없는데, 재고가 거의 없고 구입할 곳도 없다”면서 “마스크와 보호복 없이 환자를 받을 수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우한시에서 76㎞ 떨어진 황강시의 일부 의료진은 보호복 대신 비옷을 착용하고 쓰레기봉투로 신발을 가린 채 진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의료 시스템 실패는 곧 한국의 방역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과거 발생했던 모든 전염병 사태에서 얻은 교훈이다. 2014년 라이베리아에서 살던 토머스 던컨은 집 주인의 딸이 에볼라 의심 증세를 호소하자 즉시 구급차를 불렀지만, 이미 넘쳐나는 환자로 기능이 마비된 의료센터는 응급차를 보내주지 않았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던컨은 집주인을 도와 택시로 여성을 병원까지 실어 날랐다. 병원은 병상이 부족하다며 이들을 돌려보냈고, 여성은 결국 귀가한 후 몇 시간 만에 숨졌다. 그리고 던컨은 며칠 후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가 바로 미국 내에서 발생한 첫 에볼라 환자였다.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에볼라가 대륙을 건너 전 세계를 휩쓸 수 있다는 공포의 서막이었다. 애초에 서아프리카의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던컨이 집주인의 딸을 직접 택시로 실어나를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던컨이 미국에 에볼라 바이러스를 전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 사태가 언제쯤 진정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종 코로나가 끝이 아닐 것이라는 점뿐이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쓰는 동안에도 아프리카인이나 아시아인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전염병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 5~6년 주기로 전염병 확산이 반복되는 대유행병의 시대에 인류는 모두 한배에 탄 공동운명체다. 타인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의 경각심이 요구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넓은 지평의 인류애를 필요로 하는 시대. 중국인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고, 지구 반 바퀴 너머 서아프리카 국민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다. 우리는 지금 선을 긋고 따지며 혐오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네가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고, 내가 건강해야 우리 모두가 건강할 수 있다. 우리가 아산이고, 진천이고, 우한이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하늘가에 붉은빛 말없이 퍼지고

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

저녁해 보내는 이도 없이

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하면서도

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

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

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

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

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

해 ─ 바다 ─ 섬 ─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

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신석정(1907~197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시는 신석정 시인의 등단작으로 1931년 ‘시문학’ 10월호에 실렸다. 하늘에는 노을빛이 넓적하게 번지고, 바다의 물결은 금조개의 껍데기 조각처럼 반짝인다. 저무는 해는 바다를 넘어가고, 어둠은 섬을 둘러서 감싼다. 바다에는 자개처럼 빛나던 물살의 흔적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던 물살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석양도 어둠도 바다도 섬도 그냥 무심하게 살 뿐이다. 무언가에 매이지 않고, 쌓인 근심이 없이 살 뿐이다. 오직 차분하고 평온할 뿐이다.

이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자신도 풍경 속의 저녁 해가 되거나 바다가 되거나 섬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풍경은 이 시에서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선물이 되기도 한다. 재거나 견주거나 나누지 않으면 환히 통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간택(揀擇)을 멀리하고, 따르거나 거스르는 순역(順逆)도 두지 말라고 일렀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9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환자 3명이 추가로 발생해 전체 확진자가 27명으로 늘었다. 지난달 20일 국내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매일 한 명 이상꼴로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가운데 국내 환자는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9일 현재 1000명 가까운 의사환자에 대해 검사가 진행 중이고, 파악된 확진자 접촉자만 1698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검역과 방역에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종 코로나의 전파 속도가 과거 감염병 때보다 더 빠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부는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는 지난 주말부터 검사 대상을 크게 늘렸다. 중국 방문 유증상자나 확진환자 접촉 유증상자뿐 아니라 중국 외 해외여행자, 감염증 의심자 등도 의사 소견에 따라 검사를 할 수 있도록 기준을 바꿨다. 검사건수도 하루 최대 3000건으로 확대했다. 확진자 치료는 효과를 거둬 현재까지 3명이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보건당국은 앞으로 퇴원 사례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교육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방문한 서울 중랑구와 성북구 관내 유치원과 초중고교 42개교에 대해 휴업 명령을 내린 6일 서울 성북구 삼선중학교에서 학교 관계자가 교문을 닫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부의 대응은 2015년 메르스사태 때와는 달라 보인다. 지난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메르스 때보다 사회와 정부의 대응이 나아졌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러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대응은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지난 4일 16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광주의 문화예술회관 소속 시립예술단원 300여명은 이날부터 휴무에 들어갔다. 이 단체 소속 공무원 한 명이 확진자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단체 소속 공무원 44명은 정상출근하고 있다. 보육시설·유치원·대학의 휴업도 제각각이다. 전남 나주시의 보육시설 100여곳은 오는 11일까지 휴업을 예고했다. 그러나 공·사립 유치원 40곳은 모두 정상운영 중이다. 서울 중랑구와 성북구에서는 확진자가 체류했거나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관내 유치원과 초·중·고교 40여곳이 휴업에 들어갔다. 사립대학의 개학 연기는 학교마다 제각각이다. 연세대 등 일부 대학에서는 중국을 다녀온 학생들에게 최소 2주간 기숙사 이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들 휴업이나 자가격리는 통일된 기준이 없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신종 코로나의 지역사회 확산 방지를 위해 휴업 등 선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조치도 필요하다. 그러나 같은 기관에서 휴업 기준을 달리 적용하거나 환자가 관내를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지역의 어린이집과 학교를 휴업하는 일은 납득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사태가 장기화할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들쭉날쭉 땜질 처방은 곤란하다. 정부는 지자체나 기관이 참고할 수 있는 단계별 ‘위험평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기준과 원칙이 없는 자의적인 대응은 감염병의 안정적 관리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포와 혐오만 부추길 수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이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10개 보수단체들이 지난 8일 서울 주말 집회를 이어갔다. 이들 단체는 덕수궁과 서울역, 광화문광장 등지에서 집회를 연 뒤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일대를 행진했다. 어떤 단체는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했고, 다른 단체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응원했다. 한 초등학생은 집회에서 “우리나라가 공산화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연설했다. 각급 학교가 입학·졸업식을 취소하고, 군 부대가 입영행사까지 축소하는 마당에 도심 집회를 계속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바이러스 확산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만 앞세우는 인식이 놀라울 뿐이다. 

국내에서는 신종 코로나의 확산세가 주춤하지만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800명을 넘는 등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이런 때에 대중이 참가하는 집회를 여는 것은 상식적 행동이 아니다. 이들이 집회를 연 서울역과 덕수궁 등은 관광객과 외국인이 늘 다니는 곳이다. 그런데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집회 참가자들이 있었다. 더구나 이들의 행진코스인 청와대 앞 청운·효자동에는 감염에 취약한 특수학교와 초·중·고교 등이 밀집해 있다. 오죽하면 서울맹학교 학부모와 주민들이 나서 바이러스 감염이 우려된다며 집회 자제를 하소연했을까. 

집회·시위는 시민의 합법적 권리이지만 지금은 신종 코로나 차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의 방역 대책이 미흡하다고 비판하는 보수단체들이 정작 자신들이 집회를 여는 것은 모순적이다. 중국 방역 당국은 침방울 같은 비말이나 직접 접촉 외에도 공기 중 입자 형태인 에어로졸로도 신종 코로나가 전파될 수 있다고 밝혔다. 거리에서 공기를 통해 감염될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집회장에서 신종 코로나가 퍼지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보수단체들은 신종 코로나가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집회를 중단하는 게 옳다. 같은 이유로 다른 단체들도 집회 개최를 자제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새로운보수당 유승민 보수재건위원장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새보수당-자유한국당 신설합당 추진 및 총선 불출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보수재건위원장이 9일 자유한국당과 ‘신설 합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당으로의 ‘흡수 통합’이 아닌, 두 당이 수임기구를 통해 법적 절차를 밟아 신당으로 합쳐지는 게 ‘신설 합당’이다. 그는 자신이 지난해 10월 제시했던 ‘보수 재건 3원칙’, 즉 탄핵의 강을 건널 것, 개혁보수로 나아갈 것, 새 집을 지을 것을 재차 언급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합치는 것만으로는 보수가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보수는 뿌리부터 재건돼야 한다”고 했다. ‘개혁보수’를 전제로 통합을 요구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총선을 두 달여 앞두고 분열된 야권에서 통합 움직임이 부산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간 보수야당에선 말로만 통합을 외칠 뿐 수구적 행태에 대한 반성도, 혁신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되레 황교안 대표가 이끄는 자유한국당은 ‘비례 한국당’과 같은 꼼수정치를 계속하면서 퇴행적 보수의 모습을 보여왔다. 이러고서야 한국 보수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보수통합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한국당의 결단이 절실하다. 한국당은 처절한 반성 위에 책임있는 조치를 취한 뒤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한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단순히 반(反)문재인 연대에 그쳐선 시민의 지지를 얻기 어려울뿐더러, 그런 통합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시민에게 감동을 주려면 인적 쇄신을 포함한 변화와 혁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넘어야 할 부분은 ‘탄핵의 강(江)’이다. 지금처럼 개혁보수를 주장하는 유승민계와 우리공화당을 비롯한 태극기부대 등을 싸잡아 한 텐트 안에 모을 수는 없다. 통합 정치세력의 힘은 ‘대의’에서 나온다. 그건 대의가 아니라 이합집산이다. 보수통합이 자기 성찰과 가치 정립 없이 오로지 선거 승리만을 위한 ‘묻지마 통합’으로 갈 것 같으면 아예 접는 편이 낫다. 과거 선거를 보더라도 어설픈 통합과 연대는 대부분 처절한 실패로 끝나지 않았는가.

보수통합이 단지 총선을 위한 몸불리기가 되지 않으려면 그럴싸한 포장을 넘어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혁신과 비전이 빠진 통합 추구는 박근혜 탄핵 이후 추락한 보수의 재정립을 결코 이뤄낼 수 없다. 진정한 보수통합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람을 바꾸고, 시대정신을 충실히 구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타조좌빨 2020.02.10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치 비평은 개뿔 ㅋㅋㅋㅋ
    좌빨 확성기 주제에 비평가인척 하지 말아라

2011년부터 “총선 출마하려고 저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012년 11월, 검찰 내부망에 한 달 기한으로 만들어진 익명게시판에서 불출마 선언을 요구받기도 했지요. 저에 대한 헛소문이 총선을 변곡점으로 밀물처럼 밀려들다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는 현상은 지겹도록 반복됐습니다.

부조리를 비판하는 사직글이 총선용 튀는 언행으로 의심받는 일이야 검찰 흑역사에서 전례가 없지 않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요. 그러나 쌓인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동기를 의심하며 못 들은 체하는지, 비판과 건의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잘못을 고치는 대신 탄압에 급급하여 자체 개혁 기회를 놓쳐버린 검찰 수뇌부에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세월과 함께 쌓여갔습니다.

몇몇 공익제보자의 총선행으로 한동안 왁자했습니다. 소급하여 동기를 의심하고 조롱하며 급기야 저주하는 듯한 말들까지 접하고 보니, 제 일인 듯 마음이 저립니다. 사회 곳곳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공익제보자분들 역시 같이 아플 겁니다. 공익제보자들은 삶이 고단한 만큼 예민해져 고통에 민감하거든요.

공익제보자 보호에 극히 인색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새로운 선택은 과감하게 매도하는 풍조는 잠재적 공익제보자들을 더욱 주저하게 만들어 우리 사회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익제보자 중 소속 기관에 비교적 장기간 버티며 이번 총선에도 여전히 검찰에 뿌리내리고 있는 제가 말해야 곡해가 덜할 테니 독자분들께 대신 하소연합니다.

공익제보는 해당기관과 사회가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공익제보자들은 숱한 사람들에게 밟히고 짓이겨져 대개 영혼이 너덜너덜해집니다. 각오하고 몸을 던진 분들도 많겠지만, 상당수 공익제보자는 소속기관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벼랑 끝으로 내몰릴 줄 모르고 문제제기한 데서 고난이 시작됩니다. 2012년 12월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 구형건으로 상부와 충돌할 때, 이의제기를 하면 합리적으로 검토해줄 줄 알았고, 백지구형이 위법하다는 걸 당연히 인정할 줄 알았거든요. 저 역시.

감수할 것인가, 항의할 것인가. 그리고 버틸 것인가, 나갈 것인가. 공익제보자의 양자택일 선택지에서 여백은 권력에의 동조자 또는 차가운 방관자가 된 동료들의 뒷모습입니다. 1992년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을 공익제보한 이지문 중위가 장교와 사병 500명의 거짓말과 침묵으로 인해 거짓말쟁이로 몰렸던 일화는 공익제보자가 처한 엄혹한 현실을 극명하게 말해주지요.

공익제보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보호가 계속 강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보호의 공백은 광활하여 공익제보자들의 고통 역시 여전합니다. 공익제보자 33인의 인터뷰를 토대로 집필된 책 <내부고발자, 그 의로운 도전>은 공익제보자들과 잠재적 공익제보자들에게 ‘조직은 공익제보자에게 보복하고자 하고 궁극에는 제거를 원하므로, 결국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차분히 세우라’는 슬프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합니다. 당사자의 실망도 실망이지만, 징계 등 각종 보복, 기수열외와 같은 조직과 동료들의 냉대는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버겁거든요.

동기의 순수성, 제보자의 완벽함, 완벽함의 계속성 등 공익제보자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항이 얼마나 많은지,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옥석을 가려야 하겠지만, 가리는 과정에서 옥이 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 옥은 해당 공익제보자 개인이기도 하지만, 잠재적 공익제보자이고, 우리 사회이기도 합니다.

동기가 다소 순수하지 않더라도, 제보자가 결함이 좀 있더라도, 공익제보의 가치와 결과에 흔쾌히 감사하면 안될까요. 우리 사회는 그런 성숙함을 이제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결함이 있더라도 빛나는 순간이 있을 수 있고, 찰나의 빛남으로 어둠을 잠시나마 내몰았다면, 함께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빛남의 순간이 있는 사람이 그조차 없는 이보다 낫지요. 

2012년 9월, 고 박형규 목사님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과거사 반성을 하였다가 많이 고단했었습니다. 상급자에게 “모든 검찰선배들을 권력의 주구로 몰았다” 등의 질책을 듣고 여기저기 불려 다녔으니까요. 그해 10월7일, 내부망에 고정희님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시를 올렸습니다.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다가 이제 털고 일어서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싶었거든요. 아파하고 있을 공익제보자분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저처럼 위로받기를 소망하며 그 시를 띄웁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전염병 같은 대재난을 

극복하는 역량이 곧 국력이 되고

이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우리의 국격이 될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투표장에 가고

또 봄날을 건널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25번째 확진자가 나온 9일 오전 서울 중구 한 면세점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전쟁이 끝났어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난한 땅에 돌림병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폭탄, 결핵이었다. 마을마다 기침을 했다. 변변한 치료약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슴만 쥐어뜯었다. 거의가 죽어나갔다. 폐병쟁이의 각혈은 슬픔 속에도 스며들지 못했다. 그저 하늘 아래,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이 되어야 했다. “푸른 하늘에게 죄스러워/ 기침을 하면 땅바닥에/ 빨간 피가 번져나가고/ 하늘에게 죄스러워/ 꾸부리고만 사는/ 결핵이란 벌레와 살고 있는 인간아.”(권정생의 시 ‘결핵2’)   

결핵은 폐허의 산하에 들러붙어 1960년대에도 창궐했다. 이웃마을 친구 아버지도 결핵에 걸렸다. 초등학생 친구는 학교를 관두고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여름 내내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해 질 녘 개구리가 줄줄이 꿰어 있는 철사 줄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 아버지는 홀로 골방에 누워 지냈다. 그럼에도 마을 어른들은 결핵에 주눅 들지 않았다. 폐병쟁이라고 따돌리지 않았다. 친구 아버지는 죄스러워 숨으려 했지만 이웃들이 그를 붙들었다. 함께 아파했다. 결핵은 잘 먹어야 했다. 동네 개를 잡아 들여보냈고, 방죽을 품어 가물치와 메기를 잡아 보냈다. 청년들은 독사를 잡으려 산을 뒤졌다. 친구 아버지는 기적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얼 먹고 나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적 속엔 이웃들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의 습격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고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금방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만 같다. 일각에서는 서둘러 하늘길을 봉쇄하고 우리 사회에도 칸막이를 치자고 연일 침을 튀기고 있다. 그럼에도 둘러보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보듬고 있다. 서로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외롭고 두려운 곳’ 중국 우한에서 날아온 교민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수용시설이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손팻말을 들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많이 힘드셨죠? 아산에서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도 응원하는 글이 넘쳤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이웃이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옆집에 불이 나도 인터넷으로 알아차리는 시대라서 가슴도 닫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미담이 괴담을 밀어낸다. 폐렴 위험지역으로 들어가는 전세기에 서로 타겠다고 나선 승무원들, 우한에 남은 교민들 집을 일일이 방문해 마스크와 체온계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는 실험실 연구진, 마스크와 세정제를 나눠주는 이웃들, 후원금품을 보내는 무명씨들,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당당히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에 이어 다시 ‘바이러스 재앙’이다. 지구 숨이 점점 가빠지고 있음이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돌림병의 침공 앞에 인류는 무력하다. 나라 간의 전쟁보다 바이러스의 침투가 더 무섭다. 어떤 생명체도 완전히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정글이나 동굴, 공장형 축산농장, 뒷마당의 여물통, 개집에서도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가장 최근에 밀려온 하나의 파도이다. 이제 파도는 빈번하게 밀려올 것이고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바이러스 감염자는 악마가 아니다. 피해자일 뿐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고, 나라가 재난에 처했을 때 비로소 정부와 국민의 실체가 드러난다. 앞으로는 전염병 같은 대재난을 극복하는 역량이 곧 국력이 되고, 이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국격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투표장에 가고 또 봄날을 건널 것이다. 내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이 남을 돕는 일이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상대를 배려함이다. 마스크를 쓰고 일터로 향하는 당신, 당당하고 아름답다.

<김택근 시인>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