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7만4000년 전 인도네시아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한 이후로 개체수가 2000까지 줄어든 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종은 그 이후로 6만2000년 동안 전 세계로 확산되어 1만2000년 전쯤에는 개체수가 400만까지 늘었고, 2000년 전쯤에는 1억9000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1804년에는 10억이 되더니 거의 10년마다 10억 개체씩 늘어 현재는 무려 77억이다. 7만4000년 전에는 멸절을 걱정하던 종이 지금은 말 그대로 지구를 뒤덮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종에 대한 이야기일까? 

호모 사피엔스! 물론 개체수 면에서 77억이 최고라고는 할 수 없다. 가령 소, 돼지, 닭, 양처럼 덩치도 좀 있으면서 엄청난 개체수를 자랑하는 가축들이 있다. 그들의 개체수를 다 더하면 인구의 3배 정도(225억마리) 된다. 어쩌다 이렇게 많아졌을까? 모두 우리 때문이다. 우리가 고기로 먹기 위해 육종하고 길렀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치맥을 위해 도살된 치느님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마리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인류는 적어도 지난 300만년 동안의 생명의 역사에서 진화적으로 가장 성공한 종이다. 여하튼 지구를 뒤덮었으니 말이다. 감히 사피엔스의 독주를 견제할 자 누구랴? 

사실, 없었던 것은 아니다. 38억년 전쯤에 시작된 세균의 세계는 아직도 가장 크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얼굴에도 득시글하다. 생물량으로 치면 1등을 내준 적이 없다. 한편 세균에서 나온 바이러스도 지구를 뒤덮었다. 지난 20만년 동안 인류의 생존에 가장 위협적 존재가 이들이다. 6세기 남아메리카 인구의 90%를 죽인 천연두,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 20세기 초 유럽인 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2012년에 발발해 유럽질병통제본부 통계 기준 528명(한국인 39명)을 사망하게 한 메르스, 그리고 지금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2019-nCoV)가 그 도전장들이다.  

이 도전에 대한 인류의 응전은 한동안 고작 회피 전략이었다. 인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수렵채집기의 우리 조상들은 상한 음식, 썩는 냄새, 피부의 발진 등에 혐오(역겨움) 반응을 일으키는 식으로 그 위협에서 벗어났다. 게다가 전염병은 모든 구성원이 회피 행동에 동참해야만 피해갈 수 있는 위협이다. 즉, 주변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병원체에 대한 회피 본능과 집단의 규범을 강조하는 본능이 발동된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규범을 중시하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려는 경향은 사람들을 집단주의자로 만든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일수록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진화심리학 연구들이 있다.  

1만2000년 전쯤에 시작된 농경사회는 인간과 바이러스의 생존에 분수령이 된 시기였다. 그 시대에 인류는 야생동물을 본격적으로 가축화했는데 이는 바이러스에게도 엄청난 호재였다. 야생동물을 보유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농경으로 늘어난 가축들 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야생에서 박쥐나 쥐에만 기생하다가 말, 소, 돼지, 낙타처럼 다양한 가축에게까지 자신의 집을 확장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게다가 인류가 음식과 노동을 위해 가축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니 바이러스는 갑자기 늘어난 부동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폭발적 증가만큼이나 바이러스의 부동산 탐욕도 큰 문제다. 산업화로 인해 조성된 대도시는 바이러스에게도 허브 공항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제는 225억마리 가축과 77억의 인류가 다 그들의 터전이다. 숲을 없애고 야생동물을 몰아내고 공장식 축산을 대규모로 시행하고 대도시에 몰려 사는 한, 인류는 늘 바이러스의 밥이 될 것이다. 인류의 이런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수년 내에, 아니 내년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요즘처럼 일상을 접고 비상상황으로 살아가야만 할까?

‘비상사태’를 넘어 바이러스 감염을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그것을 책임감 있게 잘 지키는 것만이 모두가 살길이다. 수렵채집기와 농경시대 때 잘 통했던 회피 전략이 바이러스와의 현대전에서는 최고 전략이 아니다. 이제는 감이 아니라 똑똑함으로 승부해야 한다. 감염률과 치사율을 모두 고려하여 해당 바이러스의 특성에 적합한 확산 방지책을 합리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우리 뇌는 확률적 사고를 잘하게끔 진화하지는 않았으므로 사망자 수만 보고 과도한 걱정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사망률을 고려하면 별것 아닌 바이러스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백신과 치료법도 신속히 개발해야 한다. ‘자연주의’라는 미명하에 검증된 백신을 거부하여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사이비단체는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하다. 길게 보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 발생 및 확산을 감지하고 예보하는 글로벌 예보 시스템을 구축해야 대유행을 조기에 막을 수 있다. 이런 데에 데이터 사이언스와 AI 기술이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근본적으로는 바이러스와 우리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가축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단지 맛에 대한 욕망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량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육류 생산 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이 가축 사료를 위해 재배된다. 축산업은 농지보다 더 큰 규모의 삼림 벌채를 유발한다. 맛을 버릴 수 없다면 대체육 개발을 통해 가축의 수를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전쟁에는 메타인지와 새로운 기술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곧 다시 우리를 찾을 것이고 더 크게 반격할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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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적으로 확산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려를 넘어 가시화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는 여행이나 입국 금지, 다양한 형태의 인종주의가 표출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한 도시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얼마나 전 세계적 파괴력을 갖는 것인지 보여준다. 이에 대처하는 각국의 태도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선진국이라 알려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의 인종차별적 행위와 언어들은 이러한 질병이 가진 사회문화적 성격을 웅변해준다. 한 예로 독일의 ‘슈피겔’은 이달 초 발간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다루면서 표지에 ‘Made in China(중국산)’라 표기해 물의를 빚었다. 주간지는 중국에서 발병 초기 문제를 제기했던 의사들이 당국의 심문을 받았다는 내용 등 중국 관료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기사와 관련해 중국대사관은 성명을 내고 “공포를 일으키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심지어 인종 차별을 일으키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고 해당 잡지를 비판했고 독일 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주간지 온라인판에 달린 한 댓글은 ‘표지가 끔찍하고 다른 국가를 상대로 한 공공적인 차별이며, 이것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언론이라는 곳의 태도인가’라며 사과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다른 시민은 사과의 뜻을 전하며 이 표지가 독일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이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시민들의 깨어 있는 의식과 실천, 자정 노력이 이러한 환난을 극복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7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허우후의 우한중앙병원 앞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위험성을 폭로했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고 결국 이 질병으로 숨진 의사 리원량을 애도하는 꽃다발들과 초상화가 놓여 있다. 우한 _ AFP연합뉴스

오늘날 기술진보가 매개하는 지구촌이라는 상상은 의외의 경로와 접합되기도 한다. 타자 및 외부에 대한 상상과 반응이 민족주의의 강화나 혐오 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기술진보는 늘 한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고 예측불가능하게 전개되거나 우리의 기대와 정반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제 지구촌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공통분모로서의 보편성과 이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보편성은 현실에 기초하는 것이기에 늘 힘의 역학 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고, 특히 세계체제의 패권적 질서를 반영하는 기울어진 기준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종, 젠더, 계급, 빈곤, 환경 등의 시급한 의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규범과 지향, 실천으로 보편성이 수행되어야 하며 이는 자기성찰성을 전제한다. 보편성의 실천은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거나 억압되었던 우리 자신의 기이함에 대한 응시와 대면에서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이는 확진 초기, 의사 리원량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 질서를 해쳤다’는 이유로 처벌을 내렸던 중국 정부가 태도를 바꾸고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고 반성하는 전향적 노력에서 시작될 수 있다. 17년 전 사스 발병의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다시 과오를 범했다는 중국사회의 자기 반성적 목소리, 이를 계기로 야생동물 식용금지에 관한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대중의 논쟁과 토론도 중요하다. 혐오를 모티브로 한 유력 매체의 언론 기사에 대해 이성적으로 대처한 독일 시민들의 노력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진영논리를 넘어 이러한 노력들이 사회적 차원에서 더욱 폭넓게 논의되고 실천되기를 기대한다.

<류웅재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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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차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자율주행차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전방에 10명이 나타났다. 그대로 가면 행인 10명이 죽고 핸들을 틀면 차에 탄 1명만 죽는다.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일까? 이런 경우 대부분은 차에 탄 사람만 죽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문제가 자율주행차 때문에 새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장마철에 홍수가 나서 아버지의 고향집이 물에 잠긴 적이 있다. 비가 그치고 나서 가보니 집은 거의 2층까지 잠겼다. 댐의 물을 방류했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랬다면 서울이 위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사람이 많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시골이 희생하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듯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중국 교민들을 수용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율주행차의 논란에 비추어보면 인구가 적은 곳에 수용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자율주행차의 논란에서 10명 대신 1명이 죽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사람들도,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차라면 사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10명 대신 1명이 희생해야 하지만, 그 1명이 나는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진천, 아산의 일부 시민이 반대시위를 했다고 해서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한다. 일부는 지역색, 정당색까지 들먹이며 비난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는 갈등이 잘 봉합되기는 했지만, 희생이 당연한 우리 사회의 구조가 바람직한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시설 좋은 병원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혹시 환자가 발생할지 모르니 서울공항에 내려 강남과 서울 일대의 시설에 이들을 수용한다고 하면 반대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희생하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구조가 더 잘못된 것이다.

서울의 집값을 두고 말이 많지만, 사실 서울의 집값이 비싼 것은 서울이 좋기 때문이며, 서울이 좋은 것은 많은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농담으로 서울의 집값을 잡을 복안이 있다고 말한다. 서울을 자족도시로 만들면 된다. 서울에 필요한 전기를 서울의 원전에서 생산하고, 쓰레기장도, 소각장도, 화장장도 다 서울에 둔다면 서울의 집값이 지금처럼 비쌀 이유가 없다. 물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지방의 누군가에게는 싫은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명분으로 그런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보유세를 조금만 올려도 세금폭탄이라고 말하지만, 서울의 집값이 올라가기까지 들어간 공적 비용과, 서울의 일부 지역에 집중되는 자원을 생각한다면 지가 상승에 의한 이익만 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 논밭의 작물을 따가지 못하게 하자 시골인심 사납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누군가 자기 집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오는데도 맘씨 좋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시골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시골을 기억 속에 박제하며 마음의 고향으로 두고 싶겠지만, 시골은 개발되지 않고 아름답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시골에도 사람이 산다. 당신들과 같은 욕망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말이다. 서울이 누리는 아늑함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자율주행차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처럼 힘겹게 고민하며 토론하고는 한다. 어렵게 고민하지 마시라. 당신은 지금 핸들을 어디로 틀고 있는가?

<이총희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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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부터 세미나를 시작했다. 17세기 존 로크부터 21세기 존 테일러 개토까지 경험 중심, 아동 중심의 교육을 주창해온 사상가들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을 탐구하는 자리다. 스무 명이 넘는 신청자 중 대부분은 대안학교 교사들이다. 이들이 한두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동기는 주로 ‘답답해서’라고 한다. 현장 교사들의 답답함은 대안교육의 정체 현상과 맞물린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수백개의 대안학교가 전국에 생겨났다. 시민들의 힘으로 대한민국 교육이 변하고 있구나, 가슴 벅차던 시절이었다. ‘공교육’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와 학생들은 숨통이 트였다. 자유로운 학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교사들은 흐뭇해했다. 과업에 들볶이던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믿고, 기다려주고, 사랑해주면 점차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눈빛이 살아났다. 

그랬던 대안학교가 예전 같지가 않다. 제일 큰 어려움은 신입생이 줄고 있다는 거다. 공교육에서 대안교육을 ‘문제아를 위한 대체교육’으로 흡수하며 대안학교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곳’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더 두터워졌다. 각 현장이 생존 모드로 전환하며, 대안학교의 큰 장점이었던 과감한 교육 실험이 줄고 있다는 것 또한 현장 교사들이 느끼는 답답함의 원인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왔지만 그간의 대안교육운동에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의도치 않은 ‘이분법적 사고’로 놓쳐온 것들이다. 입시 중심의 교육을 비판하며 경험으로 배움을 체득해가는 교육을 지향했지만, 그것이 ‘지식교육의 쓸모없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인류가 벼려온 지식 또한 중요한 간접경험이다. 그런데 입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식교육의 터부’로 이어지며, 이런 면을 간과했다. 다양한 경험을 한 대안학교 아이들은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인간관계에도 능숙하지만, 머리가 굵어질수록 아는 게 없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상상력의 빈곤’이다. 새로운 교육을 상상하면서도 결국 근대학교의 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내용과 형식은 다르지만 결국 대안학교도 결국 ‘학교’ 시스템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부대끼니 교사들은 그 속에서 더욱 지칠 수밖에 없다.

“대안학교도 결국 학교잖아요.” 공교육을 벗어났지만 굳이 대안학교를 택하지 않는 그들의 문제제기에 응답할 때다. ‘학교’가 아니라면, 아이들이 생기를 되찾고 자기답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어떤 공간이 필요할까.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그람시)를 지나고 있는 교육에 질문을 던진다. 쉽게 답을 찾긴 어렵지만 우선 세미나를 꾸준히 이어가고자 한다. 교사들의 치열한 고민이 모여 대안이라는 이름의 안티테제가 ‘합’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길 기대한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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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깍뚜기’로 잘못 쓰기 쉬운 ‘깍두기’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가 궁중에서 열린 종친 회식 때 내놓아 호평을 받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홍선표의 <조선요리학>). 당시 종친 어르신들이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묻자 숙선옹주가 “평소 남는 무를 ‘깍둑깍둑’ 썰어서 버무렸더니 맛이 있어서 이번에 내놓게 됐습니다”라고 해 ‘깍두기’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때 ‘깍두기’를 한자로 음차해 적은 것이 ‘각독기(刻毒氣)’다. “독기를 없앤다”는 의미로, 무가 가진 해독성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다.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도 무를 무척 좋아했다. 성격이 깐깐한 탓인지 평소 소화불량에 시달린 영조는 무를 먹으며 배앓이를 이겨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대에 그쳤지만, 82세까지 산 영조의 장수 비결이 ‘무’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 몸에 좋은 ‘무’를 ‘무우’ 또는 ‘무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무우’와 ‘무수’는 바른말이 아니다. 아울러 “무청째로 김치를 담그는, 뿌리가 잔 무”를 ‘알타리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또한 바른말이 아니다. ‘총각무’로 써야 한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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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엔 특권이라는 단어가 1번 등장한다. ‘제11조 3항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사실 특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국회의원에 한해 두 가지 특권을 인정하는 조항이 있다. 직무상 발언에 대한 면책 특권과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되지 아니할 불체포 특권. 적어도 법적으로는 다른 특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권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의 특권 말고도 검찰과 언론 등이 가진 권력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것 외에도 곳곳에 스며 있는, 별것 아닌 듯하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특권도 있다. 사는 곳에 따라, 버는 돈의 액수에 따라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이 범람한다. 비정규직의 사원증 목줄·식권의 색이 정규직의 그것과 다른 곳이 있고, 노키즈존이 존재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급속도로 퍼지자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자는 목소리, 아시아에 대한 혐오가 고개를 든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특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별의 이면에 특권이 있는 이유다.

뭐 사소한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소한 듯 보이고 무의식적이며 심지어 쉽게 변명이 가능한 언행이 차별 구조를 공고화한다. <인종토크>의 작가 이제오마 올루오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름이 너무 어렵네요. 다른 별칭 없어요?” “아시아인치고 눈이 크네요” “만원이지만 비어 있는 옆자리” “엄마 아빠가 너랑은 놀지 말라고 했다는 말”. 사소하지만 계속 쌓여가며 편견을 강화하는 말과 행동이 바로 마이크로어그레션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만약 지금 ‘내가 차별을 하고 있다고?’ 혹은 ‘나에게 특권이 있다고?’라는 의문이 들었다면 일단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특권을 해체하고 직시할 때만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 성취가 아닌 구조적으로 주어진 특권인 경우 이 분석은 더 유효하다. 올루오는 “우리가 가진 특권이 다른 이가 받는 차별과 교차하는 지점을 인식하면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월 경향신문 기획 ‘가장 보통의 차별’은 우리가 특권과 차별이 교차하는 곳 어디쯤에 서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통해 성별, 성적지향, 학력, 거주지역, 외모, 나이, 경제력, 장애·병력 범주에서 각자의 차별과 특권의 경험을 돌아본 뒤 응답자들이 보인 반응도 이와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강자의 면과 약자의 면이 있다.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특권과 차별을 돌아보면 필연적으로 불편해진다. 남의 특권과 나에 대한 차별, 내 특권과 타인에 대한 차별이 맞닿은 지점에 있어서다. 그 불편함을 기어코 찾아내어 바라보는 게 차별과 특권을 없애는 시작이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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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율시, 오언절구, 사자성어를 생각해 본다. 팽나무 씨앗에 팽나무의 모든 미래가 온축되듯 한자에는 한 글자 너머의 뜻이 깊이 쌓인다. 세 글자의 단어도 있다. 어느 철학책에서 만난 ‘단독자’는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새겨지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 와닿는 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광합성’이다. 산에 다니면서 식물에 대한 궁리 끝에 길어 올린 것이다. 이 세상을 먹여 살리는 밑바탕이 바로 저 세 글자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오래 묵혀둔 숙제를 풀려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왔다. 뒤늦게 고전에 입문하려고 해보지만 굳어진 머리와 고드름처럼 자란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 맹자의 한 대목에서는 천하에서 공히 존중하는 셋 중의 하나로 나이를 들기도 하지만 이게 결코 자랑은 아니다. 어차피 홀로 걷는 길, 또 한번의 결기가 필요해진 나는 ‘단독자’라는 말을 불러내야 했다. 번역원의 소식지인 ‘고전사계(古典四季)’를 뒤적이다가 새로운 말 하나를 얻어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동무해준 건 멀리 북한산이었다. 되짚어보니 불광사에서 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지척에 있다. 

고전사계에서 얻은 말은 ‘화신풍(花信風)’이다. 소한부터 곡우까지의 스물네 번 꽃소식을 전하는 바람이라고 한다. 봄이 왔다고 그냥 봄은 아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 훈풍이 분다고 도래하는 봄도 아닐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훈훈한 눈길이 있어야 비로소 봄은 완성되는 것.  

논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너희들은 어째서 詩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물정을 살필 수 있게 하며,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게 하고, (…)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아직 눈에 띄는 건 없지만 곧 흙이 피워올리는 한 편의 시처럼 꽃들이 얼굴을 내밀 것이다. 바이러스가 사람들 사이를 벌어지게 할수록 올해는 더욱 기본으로 돌아가 꽃을 많이 보고 시도 많이 읽어야겠다, 자연과의 접촉 면적을 최대한 늘려야겠다고 새삼 결심해 보는 스산한 오후.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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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법과 원칙, 증거 등에 따른 사법부의 단죄는 당연한 ‘절차적 정의’다. 살인은 특히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다. 그런데 아내를 살해한 이모씨(68)에게 서울고법이 10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서 “집행유예 기간 동안 보호관찰 아래 치매전문병원에서 계속 치료받을 것”을 명령했다. 이날 선고는 치매를 앓고 있는 이씨가 치료 중인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이뤄졌다. 법정 밖 선고도 이례적이지만, 살인 범죄자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전문치료를 선고한 것은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국내 첫 ‘치매 환자에 대한 치료적 사법절차에 따른 판결’이다.

10일 경기 고양시 일산연세서울병원에서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치매 노인 이모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치료적 사법은 처벌보다는 문제해결에 주목적이 있다. 전통적인 사법체계의 틀 안에서 보완적으로 도입된 새로운 사법 결정 방식이다. 이를 위해 판사는 물론 검사, 변호사, 피해자의 동의와 협조는 필수적이다.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 대신, 유죄 인정 피고인의 치료와 재사회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씨는 중증 치매 환자다. 아내 살해 후 구치소에 수감 중 면회 온 딸에게 “왜 엄마는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말할 정도로 증상이 심하다. ‘아내 살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들은 선처를 원했다. 검사는 현 치료감호 절차를 통한 치료는 시설의 한계로 어렵다고 했다. 이씨가 별도의 치료 없이 징역형을 살게 될 경우 그의 공격적 치매 성향은 더욱 강화될 게 뻔했다. 교정의 목표인 ‘재사회화’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재판부가 선택한 것이 치료적 사법이다. 재판부는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이라고 했다.

치료적 사법은 1987년 데이비드 웩슬러 미 애리조나대 교수에 의해 처음 등장, 제도화됐다. 이후 캐나다·호주·독일·뉴질랜드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플로리다주 약물법원 등 문제해결 전문법원만 1000여개다. 우리의 치료적 사법은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대법원이 올해 처음 기본연구과제로 채택, 연구 중이다. 범죄자에게 법에 따른 일정한 고통만을 부과, 때로 ‘효용 없는 처벌’에 그쳤던 우리 사법 시스템이 점차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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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시점이 문제다. 그 의도가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하필 살아있는 권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두고 기존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부터 법무부가 공소장 제출 거부와 비공개를 결정한 것인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대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공소장 원문이 아니라 공소사실의 요지자료를 제출한 근거로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들지만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는 법률체계상 상위규범인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법무부의 비공개 결정이 국회와 법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국민적 관심이 커 알권리 차원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법무부의 공소장 제출 거부와 비공개 결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관행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현행법 규정상 모순이나 충돌은 없는 것인지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언론에 잘 부각되지 않았던 형사소송법 제47조는 소송에 관한 서류의 ‘공판의 개정 전’ 비공개를 명시하고 있고 공소장은 ‘법원’이 보관하는 소송서류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를 인정하고 있어 국민적 관심사인 중대 범죄나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이유로 한 공개는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도 예외사유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상당수 언론이 법무부의 공소장 비공개 방침을 비판한 것도 알권리와 언론·보도의 자유 차원이다. 알권리를 위해 공소장 전문을 공개한 신문도 있다. 여러 매체에서는 이를 토대로 공소사실을 확인된 사실처럼 다루고 있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개입이 사실인 양 호도하는 기사제목과 표현도 눈에 띈다. 재판과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을 통해 확인되고 확정되어야 할 혐의사실이 이미 결론이 난 사실처럼 국민에게 알려진 것이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런 보도 자체가 유죄의 여론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언론의 무분별한 피의사실 보도로 곤욕을 치른 터라 집권여당 출신의 법무부 장관은 이러한 언론보도의 행태를 우려해 공소장 비공개를 결정했을 것이다. 

우리는 뭐든지 빨리, 미리 하고 싶어 한다. 그 조급함을 언론이 채워준다. 피의사실 언론보도나 공소장 공개가 그렇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판이 열리고 공소장이 공개될 터인데 그새를 참지 못한다. ‘미리, 빨리’ 알아야 알권리가 충족되는 것 같지만 반쪽이다. 공소장은 검사의 일방적 주장이고 피고인이 된 피의자의 주장과 반박은 들어있지 않다. 언론이 공소사실을 가감 없이 보도하면 첫 공판이 열리기도 전에 영락없이 범죄자가 되어 버린다. 물론 재판부는 언론과 여론에 영향받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할 것이지만 딱히 그 신뢰가 높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채택되면 더욱 그렇다. 법무부가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국회 마음대로 언론이나 국민에게 전문을 공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검찰권 행사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그런 정도만 언론에 공개되고 보도되면 국민의 알권리는 충족된다. 

미국은 기소와 동시에 공소장 공개가 원칙이라지만 독일은 다르다. 언론·보도의 자유와 알권리 대 무죄추정의 원칙과 공정한 재판보장 사이에 무얼 우선할 것인지에 대한 가치평가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은 전자, 독일은 후자를 우위에 둔다. 독일 형법(제353d조 3호)엔 공소장의 전문 또는 중요한 부분을 공판이 열리기도 전에 문장 그대로 공개하는 걸 금지하고 1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우리의 형사소송법에 따르더라도 공판 개정 전 소송서류는 공개금지다. 법무부가 대검과 협의해 공소장 국회 제출과 공개여부를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검사의 공소제기로 공소장 원본은 공소제기를 받은 법원이 보관하는 서류가 된다. 그러면 담당재판부가 공판 개정 전에 국회의 공소장 제출 요구를 따를 것인지, 공개의 예외사유에 해당하는지, 원문 그대로 공개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게 맞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법무부 관례는 잘못이다. 절차와 방식에 관해 법 정비가 필요한 부분이다. 여러 관련 법률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담당재판부가 국회의 제출 요구에 응하되 공판 개정 전까지는 전문이든 일부든 공소장 내용을 문장 그대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국회에 비밀준수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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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에서는 주권국가를 유·무형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의 국경 이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국 영토 내에서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총체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국가의 ‘자율성’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주권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긴 해도 전략적, 군사적, 경제적 의존이나 종속 등 여러 이유로 상대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국제정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적 관계에서 하부국가가 보여주는 순응적 외교정책 행태는 외부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자율성을 확보했더라도 현저히 작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래전 한국이 그랬다.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군사쿠데타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제도화된 후견-피후견 관계’를 낳았음은 우리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이다. 1964년 9월 사실상 1차 파병이 시작된 베트남전 참가(이후 1966년 4월까지 모두 4차례 파병이 이루어짐)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후견-피후견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인도차이나 정세 요인 이외에 베트남 참전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공백을 이용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미국의 책략과 미국으로부터 대외원조가 절실했던 박정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냉전기에 형성된 한·미·일 삼국구조에서 달갑지 않은 ‘주니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가 이처럼 위계적이긴 해도 아직도 과거의 후견-피후견 관계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더군다나 한·미관계를 조공 내지 사대관계 운운하는 것은 자기비하적이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계가 더는 한국을 압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이를 부정한다. 탄핵위기를 넘긴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부자국가로 규정하고서 방위비 분담금을 훨씬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심복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몇 주 전 월스트리트저널에 공동기고 형식으로 “한국은 동맹이지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진보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탈피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세계와 함께 걸어가되 우리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 외교가 자주적인 독립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문 대통령에게서 ‘동맹의 방기(放棄)’에 대한 우려를 찾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곧장 반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우려 섞인 전망은 기우에 가깝다고 본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반미의 길로 돌아설 수 없도록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무엇보다 7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혈맹’관계를 무 자르듯이 단절하는 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상호 안보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동맹이 적절히 유지·관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현재의 ‘울퉁불퉁한(bumpy)’ 동맹은 의외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에 손님으로 이 땅에 왔다. 그 손님이 만든 지배-의존적 동맹의 관계가 종종 주인인 한국의 외부적 자율성을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미확보로 인한 한·미의 특수한 주권적 관계에 유달리 불편을 느끼는 21세기 진보세력은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동맹의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 개별관광 개시 시점과 난항에 빠진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협상 결과가 진보정부의 대외적 자율성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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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을 앞두고 여성과 청년들이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있다. 세대를 아우르는 페미니스트들은 오는 3월8일 세계여성의날에 맞춰 ‘여성의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고, 20여 청년단체들은 청년 문제를 정책으로 제안하는 단체를 만들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통로가 없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여성의당’ 창당주비위원인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가 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창당 목적과 계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를 비롯한 청년단체들은 ‘2020 총선청년네트워크’라는 정책제안단체를 꾸렸다. 10일 출범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상식혁명’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정과 경쟁이라는 과거의 낡은 상식을 과감히 기각하고, 우리의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다음 기준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여성의당 창당주비위원을 맡은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경향신문 인터뷰(2월10일자 1·10면 보도)에서 “이제껏 여성의원들은 당론에 구속돼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돼 왔다”고 진단하며 “페미니스트 물결 이후 처음 치르는 이번 총선에서 여성 주권자의 몫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여성과 청년, 선거 때마다 정치권에서 호명되는 이름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이들의 문제가 그만큼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거 앞 이들의 결집은 더 이상 일회용으로, 구색 맞추기용으론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여성과 청년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의제들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래 가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들 스스로 얘기하듯 청년과 여성은 생물학적 나이와 성별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젊음이 아니라 낡은 기준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담는 ‘청년 정치’,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회의 낮은 목소리와 여성주의 요구를 담는 정치다. 여성, 청년 정치 없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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