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택이 반지하방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집값이 비싼 서울에서는 반지하방에 머무는 서민들이 적지 않다.

영화 <기생충>에서 살인이 난무하는 가든 파티의 근본적 원인은 선을 넘어오는 ‘기택(송강호)의 냄새’였다.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 ‘봉테일’(봉준호+디테일) 감독답게 세트장에는 냄새까지 구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빈부(貧富)의 상징은 반지하와 저택이란 시각적 대비 없이는 구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수많이 계단이 비친다. 반지하 셋집에 쇄도하는 빗물의 계단, 대문에서 잔디밭을 지나 현관과 거실 및 2층 침실로 이어지는 화려한 계단까지. 그 계단들을 하나하나 오르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지하에 숨은 기택에게 아들 기우(최우식)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저는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어요. 돈을 벌겠습니다. 그리고 이 집을 사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계단을 올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현실 자본주의에서는 결코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의 역설이 명대사로 남았을 것이다.

‘사는 곳이 어디인가’는 계급과 계층을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 된다. 대다수는 반지하와 대저택 중간 어디에 살고 있겠지만, 저마다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뛰는 집값에 낙담하는 사람, 무리를 해서라도 강남에 집을 샀어야 한다는 사람, 그리고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와, 그걸 놓고 찬성하고 반대하는 전문가와 건설사와 언론들. 저마다 집을 향한 욕망과 해법 속에 난장을 이룬다. 그러는 사이 보금자리를 찾지 못하는 저소득층, 청년층의 하소연은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얘기로 치부되고 있다.


1년 전 칼럼서 ‘집값 안정’ 당부

12·16 대책에 주춤, 불안 여전

“햇살 든 지하를 지상으로 여겨”

봉준호 감독 ‘반지하’ 의미처럼

총선 앞둔 각종 대책·공약들이

반지하 잠깐 비춘 햇살 안돼야


꼭 1년 전 이 지면에 ‘문재인 정부의 극한직업’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마약 밀매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치킨집을 인수했다가 유명 맛집이 되면서 한바탕 소동을 치르는 영화 <극한직업>의 내용에 빗대 한눈팔지 말고 집값을 안정시킬 것을 당부했다. 2018년 9·13 대책의 약발이 먹히고 있지만 집값 하락 추세를 체감하기에는 미미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으며 끝까지 집값 안정 의지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부동산 안정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잠깐 숨을 고르던 집값은 이후 고삐 풀린 채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랐다. ‘집값 상승→정부 대책→숨고르기→집값 상승→정부 대책’이라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평당 1억원’ 시대가 됐다. “수도권 집값 급등으로 국민을 분노와 우울에 빠지게 만든 고약한 한 해”(박복영 경희대 교수)였다.

지금 양상도 그때와 비슷하다. 지난해 12·16 부동산대책 이후 상승세가 둔화되기는 했지만 서울 집값이 완전히 잡혔다고 할 수 없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서울 집값은 수원·용인·성남 등지로 옮겨붙었고 전셋값도 불안해졌다.  사상 최저금리에 시중에 돈이 넘치고 있지만 경기 회복을 견인하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 그럴수록 부동산을 향한 욕구는 더 강렬해질 것이다.

부동산은 이제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란 당위적 가치가 지배하지 못한다. 이미 있는 사람들의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있다. 부동산을 둘러싼 계급 논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사퇴하고, 이어진 개각에서 잠실, 분당, 세종의 ‘똘똘한 3채’를 가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낙마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동산의 유무가 투기성과 청렴성의 바로미터가 된 셈이다.

봉준호 감독은 “반지하라는 공간에서 오는 미묘함이 있다. 더 힘들어지면 완전히 지하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는 동시에,  햇살이 드는 순간에는 지하이지만 지상으로 믿고 싶어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잠깐 햇살이 비친 반지하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닐까. 반지하에서 잔디가 깔린 마당으로 계단들이 튼튼하고 촘촘하게 연결돼 있어 단지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더불어민주당이 4·15 총선 출마자에게 ‘1주택 이외 전부 매각’이라는 서약을 받았다. 정부도 선거를 앞두고 최대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고자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강력한 대책을 끝없이 내놓겠다”고 했다. 그러나 말의 성찬이나 일시적 대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선거 대책과 공약들이 반지하를 잠시 비추는 햇살이 되게 해선 안된다.

<박재현 사회에디터 겸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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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권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인간은 편안하다. 또한 불안하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끝이 없다. 영상편집을 연습했더니 다음은 배경음악이 문제다. 주머니를 털어 실력 있는 뮤지션에게 작곡을 의뢰하고 싶지만 내 벌이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그래서 개러지밴드를 배우기로 했다. 간단한 음악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앱이다.

뮤지션 박성도님을 만나 두 시간 개인교습(?)을 받았다. 입이 떡 벌어졌다. 오선지에 콩나물 하나씩 그리던 시대가 아니다. 미리 녹음된 짧은 소리들을 레고블록처럼 조립하면 음악이 뚝딱 나온다. “창작이란 개념 자체가 바뀌는구나!”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블록을 쌓듯 조립하는 창작이라니,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만화가다. 파스티슈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말은 제쳐두고, 창작자의 먹고사는 문제로 생각해봤다. 첫째, 이런 식으로 대단한 걸작을 만들지는 못한다. 개러지밴드를 배우고나서 나는 전문 뮤지션의 실력과 재능을 더 존경하게 되었다. 둘째, 하지만 그럭저럭 적당한 창작물은 누구나 만들게 되었다. 악보를 몰라도 연주를 못해도 얼마 동안 스마트폰을 조물조물하면 곡을 만들 수 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뮤지션이 작곡한 품에 삯을 치르지 않으니 나는 ‘소비자’로서 돈을 아낀 셈이다. 그런데 창작자로서 나는 어떨까. 예를 들어 요즘 몇 년 사이에 삽화 일거리가 줄었다. 그전에는 의뢰가 많았다. 글을 받고 꼼꼼히 읽어 그림을 그려 보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편집디자인을 하시는 분이 직접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이미지뱅크에서 사진을 골라 직접 조립하는 쪽이, 나 같은 그림쟁이에게 삯을 치르는 쪽보다 싸고 빠르니 말이다.

만화도 비슷한 변화를 겪는 것 같다. 전에는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어 했다. 요즘은 다르다. 채색은 인공지능이 해주기 시작했다. 배경은 스케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많이들 쓴다. 방이건 건물이건 도시건, 남이 만든 3D오브젝트를 사다가 내 생각대로 ‘조립’하면 된다. 글도 이렇게 쓰게 될까? 아마도 곧. 이에 대해 나는 재미있는 사업 아이템이 있지만 “지면이 모자라 여기 적지는 못하겠다”. 비슷한 아이디어로 다른 사람이 돈을 벌면 “저 생각 나도 했더랬지!”라며 불평이나 해줄 생각이다.

아무려나 누구나 창작하는 시대이자 창작으론 먹고살기 힘든 시대가 온다. 목돈은 어디로 갈까. 플랫폼이 레고블록 같은 모듈을 팔아 챙길 테지 싶다. 이 얘기를 박성도님에게 했더니 이런 대답을 했다. “재밌네요, 이번 경향신문 칼럼에 그 얘기를 해봐요!”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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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이 보인다. 세상이 어수선해도 계절은 바뀔 것이다. 봄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아래에서도 움트고 있어 어느 날 아침 창밖을 내다보면 앙상한 가지만 남았던 나무에 나무눈이 파릇할 것이다. 이렇게 일 년 내내 몸은 움직이지 않고 방구석에 앉아 보일러 온도만 올리고 내리는 나 같은 사람은 계절을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듯 얘기한다. 봄은 잎이 돋고, 여름은 우거지고, 가을은 낙엽이 구르고, 겨울은 잿빛이고…. 식상한 말로 계절을 맞이한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4년 차인 열아홉 살 청년의 계절은 달랐다. 그는 계절을 아르바이트 업종으로 구분한다. “사시사철 좋은 건 편의점이에요. 여름에는 배 봉지 씌우기, 겨울에는 택배 상하차 일이 하기 좋은데 힘들긴 진짜 힘들죠.”

배 봉지 씌우기는 100장에 5000원을 받는다는 말에 도대체 몇 장을 씌워야 돈벌이가 되는지 가늠하느라 내가 손가락을 꼽아대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루에 3500장 정도를 한다고. 비탈진 바닥에 사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가 온종일 한 알 한 알 봉지를 씌우다 보면 여름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그런데 그나마 그 일은 낫다고 했다.

“겨울에는 배를 골라 분류하는데, 남자는 배 상자를 날라야 해서 힘은 힘대로 들고 알바비는 적어요. 그걸 하는 것보다는 상하차 일이 낫죠.”

중학교 때 태권도를 시작해 큰 대회에 나가 제법 상도 많이 탄 그는 훈련이 없는 야간이나 주말에 틈틈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허리를 다쳐 일하기 어려운 아버지 용돈까지 챙겨드린다. 그는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라면서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해 대학교 학비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봄에는 고깃집하고 카페에서 일하려고 며칠 전에 면접을 봤어요.”

그의 사계절에는 다 계획이 있었다. 움튼 꿈을 벼린 긴 시간은 헛되지 않아 겨울을 뚫고 어김없이 봄이 오듯 그도 찬란한 봄을 맞을 것이다. 봄이 오고 있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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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은 옳은가. 만일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이가 될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이 통념은 건강하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성원권을 박탈하고 우리의 일상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다.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재개념화가 필요한 시대다.

정신질환 환자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진짜 아픈 사람은 저 사람(대개 ‘가해자’)인데, 병원은 왜 내가 다니지?” 건강 상태는 ‘전문가’의 진단, 개인의 감각에 따라 다르다. 육체적 건강에서 정신적 부분을 분리하는 사고방식부터 논쟁적이다. 어떤 상태가 건강한 것일까. 전두환씨의 건강이 ‘불편한’ 사람은 나뿐일까.

건강한 상태는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사망의 연속선에 있는 몸의 일생을 계량하는 문제다. 정의하기 어려운 인간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 건강이 개인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주관적, 경험적이다. 지구상에는 인구수만큼의 면역력과 내성(耐性)의 개수가 있다. 질병도 자신의 행방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 환경, 질병의 삼라만상을 진단할 수 있는 명의는 없다.

누구나 쉽게 아프고 대개 만성 질환이다. 가장 난센스인 것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닐까. 감기도 우울증도 가볍지 않다. 고통스럽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건강함과 그렇지 않은 상태, 양쪽의 범위가 모두 확대되어야 한다. 건강한 공동체는 건강의 구분이 흐릿한, 즉 ‘아픈’ 몸들이 가시화되는 사회다.

주변을 둘러보면 안 아픈 사람이 없는데도 아픈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안도감’과 피해 의식이 우리를 지배한다. 아픈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고령화 시대의 보험산업은 간병의 노동을 위로하기보다 공포를 조장하는 듯하다. 질병이 완치보다 평생 관리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암에 걸리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암 환자도, 장애인도, 질병과 장애의 경계에 있는 이들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건강한’ 이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일상이 최상의 민주주의다. 

건강도 경쟁 시대인지라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육체적 고통은 타인과 소통이 가장 어려운 영역이자 인간이 두려워하는 최고의 권력이다. 의사의 권력은 그들의 실력, 명예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의사든 수많은 ‘유사(類似) 의사’든, 그들의 권력은 아픈 사람의 고통에서 나온다. 고문이 최고의 ‘극적(劇的’인 정치인 이유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범주는 빈부 격차로만 한정할 수 없다. 성별, 성정체성, 장애, 이주민, 인종, 외모, 지역 차별까지 다양한 약자가 가시화되고 있다. 하지만 ‘건강 약자’ 개념은 생소하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여전히 개인적 과제로 여겨진다. 건강도 계급에 따라 양극화한다. 사회·경제·심리적 약자는 건강 약자가 되기 쉽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기후 이상을 초래하고, 산불과 사막화는 생명의 멸종과 ‘건강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 건강이 불가능한 시대에 건강 숭배가 강화되니 더욱 스트레스다. 

안전, 안전 보장(그 유명한 안보)의 ‘본뜻(se/cure)’은 완벽한 준비로 근심이 없는 상태(free from care)가 아니라 상호 보살핌이 없는 상황(without care)을 뜻한다. 전자는 “물샐 틈 없는” 언설로 상징되는 기존 국제정치에서의 의미고, 후자는 여성주의를 비롯한 대안적 평화학 개념이다. 

‘건강한 젊은이’가 ‘병든 어른’을 싫어하는 현상을 나는 이해한다. 타인의 앓는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누구나 나이 들고 병든다. 고령화 시대, 인간의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이다. 질병 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팩트다. 시름을 나눌 수밖에 없다. 동병상련과 연대 외에는 대안이 없지만, 마스크 대란 같은 사태는 동병의 처지에도 상련하지 않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건강을 잃는다고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건강을 잃는 것보다 건강과 젊음에 대한 지나친 찬양과 욕망으로 잃는 것이 더 많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마음의 평화’가 대표적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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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 한달에 즈음하여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과천=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오래된 습관과 같이 오랜 관행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한 관행이 설령 잘못된 것이어도 그렇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야당 국회의원이 요청한 공소장 전문을 제출하길 거부하고 공판 개시 이후에 공개하겠다고 밝히자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형사재판에서의 정당한 방어권, 명예, 인격권을 고려하면 공판절차의 개시 이전에 공소장의 전문을 무조건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임에 동의한다. 

우리나라는 공소 제기 이전에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고, 심지어 형법 제126조는 피의사실 공표죄라고 해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를 처벌하고 있다. 작년에 겪었던 조국 전 법무장관과 관련한 각종 보도로 인해 우리 국민은 피의사실 공표의 문제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이와 유사한 처벌규정은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은 형법 제353조d 제3호에서 공소장, 기타 형사소송절차에서 공문서의 전부 또는 주요 부분을 공판에서 낭독 또는 소송절차 종료 이전에 공연히 공개한 자를 처벌하고 있다. 공판절차 개시 전 수사서류를 공개하면, 시민법관(배심원)과 증인의 공정하고 편견 없는 심리나 진술을 저해할 우려가 있기에 이를 처벌하는 것이다. 영국, 미국 등 다른 선진국도 유사하게 공소사실을 상세하게 공개해 배심원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경우 이를 금지하고, 금지명령을 위반하면 법정모욕죄로 처벌한다. 

우리는 검사의 공소 제기만 있으면 공소사실의 공개를 처벌하지 않지만, 선진국은 공소 제기 이후에도 공판절차가 개시되기 전까지는 공소사실의 공개를 처벌한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우리는 국민참여재판(배심제)의 경험이 일천해 이러한 차이를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2008년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해 일반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한다. 법원이 배심원의 평결을 존중해 93% 정도의 사건에서 판사는 배심원의 평결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배심원단이 구성되기 이전에 공소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검찰의 주장인 공소장의 세세한 내용이 공개되어 버리면 피고인은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진범으로 둔갑되어 비난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꿈꾸는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도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공소장을 언제까지나 비밀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공판절차가 시작되면 공판정에서 공소장을 낭독하게 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공개된 법정에서 알려지는 것이다. 한 달가량 후에 국민의 알 권리는 얼마든지 충족된다. 

지난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면서,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시 느낀다. 수십년 길들여진 잘못된 관행도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결정은 타당하지만 낯설 뿐이다. 비공개가 아니라 제출 유예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잘못된 관행을 바꾸고 잠시의 혼란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상훈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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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2월12일 (출처:경향신문DB)

신종 코로나에 대한 보수 야당의 행보는 미국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를 연상케 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3일 “나라가 온통 정신이 없는데 대통령이 공수처에 한눈팔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환자 한두 명 나왔다고 장관과 총리가 나설 순 없다”는 그의 국회 답변과 정면 배치된다. 과거에는 장관·총리조차 나설 일이 아니라더니 이제 와서는 대통령까지 안 나선다고 타박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지난 2일 “신종 코로나 정보를 투명 공개하라”(한국당 대책TF 회의)고 요구했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 역시 “감기 좀 유행한다고 정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2015년 국회 답변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황 대표가 엇갈린 발언을 한 5년 사이 감염병의 방역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거라면 메르스 때 총리이자 방역총책임자이던 그가 지금 제1야당 대표라는 사실뿐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언행이 달라지는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감염병 대처는 매우 엄중한 문제다.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한번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한 치의 시행착오도 용납될 수 없다. 건전한 정부 비판이 야당의 책무이지만 감염병에 관한 한 엄격한 제한이 필요한 이유다. 비판하더라도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면 안된다. ‘반려견 작고’ 같은 단순 말실수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황 대표의 ‘정부의 마스크 300만장 중국 지원’ 발언 역시 무책임하다. 마스크 지원은 중국 유학생단체가 했고 정부는 전세기편에 전달만 했는데도, 정부가 지원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마스크 수급불안 심리’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방역망에 구멍이 뚫리면 시민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신종 감염병은 최근 4개 정권에서 5~6년 주기로 연이어 대유행했다. 그런데 관리 성과는 정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사망자만 해도 사스(노무현 정부) 0명, 신종플루(이명박 정부) 263명, 메르스(박근혜 정부) 38명, 신종 코로나 10일 현재 0명으로 차이가 크다. 황 대표가 중도에 총괄책임을 맡은 메르스 사태는 초동대처 실패, 격리대상의 범위 오류, 컨트롤타워 부재 등으로 인한 방역 실패의 대표 사례다. 예컨대 당시 정부는 사태 초기 환자와 환자 진료 병원 정보를 철저히 은폐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병원을 방문하고 환자와 접촉했다가 속절없이 감염되는 이른바 ‘슈퍼전파’ 사례가 속출했다. 정부가 바이러스로부터 시민을 보호한 게 아니라 방역망으로부터 바이러스를 보호한 셈이다.

사스 때 ‘모범예방국’으로 불린 한국은 메르스 때는 유독 메르스에 취약한 국가라는 뜻의 ‘코르스’(KORS)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황 대표는 지난해 2월 한국당 대표 출마 당시 자신이 “단기간에 메르스 사태를 극복했다”고 자랑했다. 총리 취임 이후에도 시민 15명이 메르스로 숨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자랑병’에 김무성 한국당 의원도 걸린 것 같다. “가장 대응을 잘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신종플루 시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로부터 <신종플루 대유행 대비계획>을 넘겨받고도 초기 대응 실패로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방역실패 정권’ 당시 여당 대표로서 할 말이 아니다. 취약계층 지원 마스크 예산을 삭감한 것은 한국당인데, 되레 민주당이 삭감했다고 왜곡 주장한 민경욱 의원은 또 어떤가. 민 의원은 우한 교민의 국내 송환 신중론을 펴 비난을 사기도 했다. 위험에 처한 국민을 구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 아닌가. 이는 야당 국회의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모두들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싶다. 의학적으로 기억상실증은 뇌가 기억을 인출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른다. 하지만 야당 인사들은 기억이 아니라 상식과 도의를 인출하지 못하는 것 같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물불 안 가리고 정치 공세에 나선 것이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메르스 비극’의 책임자로서 황 대표는 현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감염병 재난은 인재다. 철저한 사전 대비와 신속한 초기 대응,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얼마든지 시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방역에 실패해 대규모 희생자를 발생케 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고위 인사들은 감염병에 있어서만큼은 정부 비판보다 성찰부터 하는 게 맞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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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다. 1954년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하여 TV로 옮겨 1982년까지 이어졌고, 2005년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관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리 뽐내도 사랑스럽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제목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

정조가 어느 날 역정이 묻어나는 비답을 내렸다. 심낙수가 홍국영, 구윤옥, 송환억 등을 비난하면서 이들이 있어서 치세라고 할 수 없지만 정조가 있으므로 난세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요구한 상소문에 대해서였다. 정조는 심낙수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렇게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어 어지럽게 다투는 행위 때문에 치세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을 잡으려면 정수리에 침을 놓듯이 송환억을 처벌해야 한다는 심낙수의 주장에 대해, 장년의 환자와 달리 노년의 환자의 경우 정수리에 침을 놓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반박하면서 마지막에 일갈했다. “네 몸을 사랑하듯이 나라를 사랑하라.”

터럭을 불어서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는 것을 ‘취모멱자(吹毛覓疵)’라고 한다. 요사이 정치계, 언론계를 보면 경쟁적으로 취모멱자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자유로운 비판은 민주사회의 근간이다. 그것이 차단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과정에 이웃 중국에서 일어난 사례에서 우리는 목도했다. 그러나 위기와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취모멱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매우 위험하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며 최선의 길을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말은 아끼고 배려와 협조, 그리고 희생을 나누어 감수할 때다.

세상은 동심처럼 아름답지 않다. “누가누가 잘하나”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누가누가 못하나”만 찾아내려 혈안이 된다면, 험악한 표정의 관객들 앞에서 그 누구라도 한없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내 건강을 지키듯이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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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허우후의 우한중앙병원 앞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위험성을 폭로했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고 결국 이 질병으로 숨진 의사 리원량을 애도하는 꽃다발들과 초상화가 놓여 있다. 우한 _ AFP연합뉴스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은 자들일지니, 쓰디쓴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지 마라.” 중세의 수도사 노트케르 발불루스의 말처럼 죽음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는 것처럼 생명에도 끝이 있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소식들은 죽음이 삶의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이유다.

죽음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고 죽겠다는 ‘웰다잉’ 운동이다. 영화 <버킷리스트>가 화제를 모으고, 영국 BBC방송은 삶의 마무리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선보였다. 2018년 국내에서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존엄사법(연명의료결정법)’이 도입됐다. 시행 2년 만에 환자 8만여명이 연명치료 중단에 동참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관습은 서양보다 동양이 더 강했다. 1600년 전 도연명은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3편의 시를 지었다. ‘혼백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시신은 빈 관 속에 놓여지네/ 재롱둥이 아이는 아비 찾으며 울고/ 친구는 나를 어루만지네.’(‘擬挽歌辭·의만가사’ 제1수)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自挽詩), 자찬묘지명, 자제문(自祭文) 등이 잇따라 쓰였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자찬묘지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대 임준철 교수가 밝혀낸 조선시대의 자만시는 228수나 된다.

중국 의사에 대한 추모글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저는 갑니다. 제가 떠날 때 눈앞은 매우 캄캄했고 아무도 저를 배웅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흰 꽃 몇송이만 제 앞에 놓여 있었지요. (하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발생을 처음 폭로했다가 지난 7일 숨진 중국 의사 리원량(李文亮)을 기리는 ‘저는 갑니다. 훈계서 한 장 들고서’라는 제목의 글이다. 필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양 전통의 ‘자제문’ 형식을 띤 글은 리원량의 죽음, 공안 당국의 협박, 감염증 확산, 우한시 봉쇄 등 중국의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리원량 제문’은 ‘신종 코로나 영웅’에 대한 추도문이면서 감염병 은폐에 급급한 중국 당국에 대한 고발장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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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은 지식공유를 통해 성장해왔다. 지식은 나눌수록 퍼져나가고, 이 과정에서 사회는 발전한다. 그런 점에서 지식은 최근 기승을 부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닮았다. 둘 다 격리되는 순간 소멸이 시작된다. 다만 바이러스는 퍼져나갈수록 인류를 위협하지만 지식은 퍼져나갈수록 인류를 풍요롭게 한다.

학교체계는 지식공유를 위해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그리고 대학은 그런 지식공유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놓여 있다. OECD 교육통계를 보면 주요 국가들의 25~64세 인구 평균 고등교육 이수율은 이미 50%에 근접하거나 넘어서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고등교육 보편화시대”에 살고 있다.

보편화시대 대학의 사명은 대학이 보유한 고급 지식을 보다 넓게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고민하는 것이다. 과거의 경쟁과 사회선발, 학위와 졸업장 중심의 대학과는 다른 모형이 필요하다. 지식을 개방하고 연결하며 융합하고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전파하기 위한 최적의 형태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런 지식공유의 필요성은 평생학습과 계속교육의 차원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산업 4.0시대에는 더 이상 학부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문과 출신들이 공학을 다시 공부한다든지 구조조정되는 인력들이 다른 영역으로 전환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현재 대학 구조는 이런 변화를 받아내기 어렵다. 또한 대학원은 비싸기도 할뿐더러 대부분 학위를 위해 무늬로만 존재할 뿐이다. 재직자들이 다시 빅데이터교육이나 생명과학교육을 받고 싶지만 대학 문을 다시 두드리기에는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그렇다고 유튜브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2019년 우리나라 평생학습 참여율은 역대 최고치인 43%를 기록했지만, 그 가운데 형식교육(학력 혹은 학위과정)에 참여하는 비율은 1%에 머물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은 곧 평생학습에 대학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형식교육 비중이 10%를 넘는 덴마크, 영국, 핀란드 등에 비해 적어도 너무 적다.

우리나라 대학의 계속교육 혹은 재교육 기능이 외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는 대학이 너무 학위과정, 전일제학생, 청년층교육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일반 재직자교육, 비학위과정, 시간제등록 등은 정규과정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이제 대학의 ‘학점’과 ‘강좌’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학위과정을 넘어 비학위과정에 대한 전향적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학위과정 중심의 대학체계는 지식공유를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제한한다. 사회 계층사다리일지는 모르지만 지식공유에 유리한 방식은 아니다. 예컨대 서울대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소수 엘리트 학생들만의 독점물일 수 없다. 국민 누구나 그 지식에 접근하고 학습할 기회를 만드는 것도 대학의 사회적 책무이다. 학위와 상관없이 새로운 차원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비학위과정 모형을 창조할 수 있다. 

최근 고등교육에서의 일련의 변화들, 예컨대 평생교육체제지원사업(LiFE), 대중온라인개방강좌(MOOCs), 대안대학의 등장 등은 이런 흐름을 반영하지만, 이들은 모두 대학의 정규과정을 전일제 학생들만 접근할 수 있도록 제한한다는 고전적 기본전제를 그대로 묵인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 뒤에는 여전히 대학=학위라는 고정관념이 자리한다.

정규강좌를 대중에 개방하고 학점을 줄 수 있으며, 외국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학위과정이 아닐 뿐 강좌를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지식공유이다. 그 학점의 누적을 통해 단기실용자격과정들을 만들 수 있다. 미국 대학들의 입학처 홈페이지에 가면 학부, 대학원과 더불어 성인계속교육 입학 항목이 있다. 정규학생과 비정규학생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현재 우리 고등교육법은 학점을 곧 학위과정의 전유물로 전제하며, 공개강좌는 학점을 부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 대상의 공개강좌는 정규강좌와 별도로 개설하며, 학점은행제로 따로 묶는다. 시간제 학생의 숫자를 비현실적으로 제한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시장에서 가치있는 지식들은 학위과정에 있는 학생들의 전유물이 되고, 그 외곽에 있는 사람들은 맛보기 버전만 들을 수 있는 차별이 나타난다. 지식 불평등이 대학과 학위제도를 중심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학과 학점에 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지식공유를 위해 고등교육과 평생학습이 만나는 접점을 재설계할 때가 되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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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각종 행사가 취소되기 직전 지방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붐비는 역사 안을 오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도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도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닫힌 공간에서 꼬박 두 시간이나 마스크를 썼더니 숨이 찼다.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은 KF 지수가 높은 걸 택하지도 말고, 장시간 착용하지도 말라는 주의가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됐다. 그렇지만 벗을 수 없었다. 집 앞 슈퍼마켓이나 세탁소에 갈 때 한두 번 마스크를 쓰지 않았더니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두 나를 비켜갔다. 언덕길에서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면 더 크게 갈라졌다. 그래서 그 뒤로 집 근처에 나갈 때도 되도록 마스크를 쓴다. 아파트 현관 1층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가기 위해 승강기를 타고 이동할 때도 쓴다. 간혹 잊고 승강기를 탔다가 누군가와 마주치면 옷깃을 바짝 세워 코와 입을 가두고 되도록 멀찍이 서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 맨 얼굴이 무례와 몰상식이 될까봐 두렵다. 내 불운은 어떻게든 이겨볼 수 있지만 상대의 불운이 되는 일까지 감당할 자신은 없다.

사스나 메르스 때도 이렇게 했던가.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니 마스크 착용에 관한 한 더 엄격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일순간 동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워서 마스크가 없으면 면역력이라도 키워야 한다고 각종 비타민을 집에 쌓아두기도 했다. 그때 나를 지배했던 건 분명 감염에 대한 공포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감염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다른 공포가 하나 더 존재한다. 혹시라도 내가 감염된 순간 만천하에 공개될 내 삶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런 위험신호도 없는 상황에서 평범하게 움직였을 평범한 내 일상이 공개되는 건 타인의 안전과 예방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상이 공개되는 순간 부주의하고 몰상식한 하나의 경로로 비난받게 되는 일, 만약 그중 한순간 내가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을 때 세상으로부터 받을 지탄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감염보다 비난이 두려워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근래에 중국을 비롯한 어떤 외국에도 나간 적이 없고, 앞선 확진자들과 겹친 동선이 없고 어떤 유사 증세도 없지만 조심한다.

이제까지 유행했던 다른 바이러스보다 치사율이 낮다는 이 바이러스는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혐오의 지수는 높다는 생각이 든다. 안전과 예방의 중요성이 혐오의 힘을 딛고 견고해지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이 바이러스인지 사람인지 구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부지불식중에 앞서 확진된 자들의 동선을 수시로 확인하는 나를 깨닫고 아차 싶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변명해보지만 염탐도 이미 혐오를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닌가. 두려움이 내 것이 될 때,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길 때 혐오는 아주 간단한 해법처럼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상 난무하는 혐오의 실체라는 것도 참 허술한 것이다. 고작 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휘두르는 주먹 같은 것일 뿐이다. 

한 달도 안되는 기간에 모두의 일상을 지배해버린 바이러스에 깃든 두려움과 혐오의 상관관계를 고민하며 돌아오던 길에 트랜스젠더 입학생의 등록을 끝내 포기하게 만든 숙명여대 입학생들의 성명문을 읽었다. 어떤 이론을 내세우든 그들이 드러낸 건 결국 두려움으로 보인다. 자신의 두려움을 배척하고 분리하는 방식으로 정리한 그들의 연대는 실상 연대라는 이름의 차단벽에 불과할 터. 그렇게 구획 지은 그 공동체 안에서 다시 또 두려움이 발생할 때, 그때는 또 누구를 분리하고 배척할까. 그렇게 해서 끝끝내 남을 가장 마지막 존재는 과연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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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연구동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중앙임상태스크포스 브리핑에서 방지환 팀장(왼쪽 두번째)을 비롯한 의료진이 확진자 치료 현황과 신종 코로나에 대한 의학적 정보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국내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4주째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확진자 수가 크게 늘지 않고, 확진자 중 4명이 퇴원하는 등 위중한 환자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며, 사회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던 초기의 공포와 불안감은 조금씩 걷히고 있는 모양새다. 바이러스가 시작된 중국에서도 이달 초 3000명대에 이르던 하루 추가 확진자 수가 최근 들어 2000명대로 줄어들고 있다. 다만 사태 장기화가 예상되며 사회 전반의 타격과 경제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방역은 철저히 하되 과도한 불안에서 벗어나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의 손실은 최소화해야 한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11일 국무회의에서 “신종 코로나로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위축되어 음식·숙박·관광 등 관련 업계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장관들에게 동네 가게·식당 이용 등 소비 진작에 앞장서줄 것을 당부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전날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신종 코로나와 관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충분히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며 “사태가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지만 실제보다 과도한 불안과 공포로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이번 신종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초반엔 사회 전체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선제적 대응으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초반 위기를 넘어 안정적 관리가 이뤄지는 만큼 이젠 정부와 보건당국의 대처를 믿고 차분히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이러스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사회 전체적으로 냉정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과잉대응은 오히려 환자들을 숨게 만들고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예방의학회와 한국역학회는 최근 공동성명에서 “확진자가 다녀간 지역 인근의 학교·상점이 문을 닫는 것은 공중보건 측면에서 효과가 없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만 소모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이유만으로 백화점이나 호텔, 대형마트 등이 대폭 임시휴업을 하고 있지만 과도하다는 것이다. 소독 후 이틀째부터는 감염 위험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정부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정보를 적극 공개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지자체, 기관별로 제각각인 방역대책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시민들도 이제까지처럼 개인위생 관리에 힘쓰면서 침착하게 대처하면 된다. 가짜뉴스로 불안해하고, 불안심리로 일상과 경제생활이 움츠러든다면 바이러스에 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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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2월 12일 (출처:경향신문DB)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5·18 발언이 논란을 부르고 있다. 황 대표는 지난 9일 성균관대 앞 분식점에 들러 “내가 여기서 학교를 다녔다”고 소개한 뒤 “아, 1980년. 그때 하여튼 무슨 사태가 있었죠, 1980년. 그래서 학교가 휴교되고 이랬던 기억이…”라고 말했다. 황 대표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말 대신 왜 ‘하여튼 그 무슨 사태’라고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황 대표의 말에서 5·18의 의미에 동의하는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시대의 비극에 공감하면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느낌도 없다. 오히려 당시 신군부가 시민과 언론에 강요한 ‘광주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란 표현을 연상케 한다. 시민들이 합의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정의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공당의 대표라니 당혹스럽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일을 대하는 한국당의 태도이다. 한국당은 11일 ‘황 대표 발언에 대한 사실관계 정리’라는 제목으로 낸 자료에서 “황 대표는 당시 혼탁했던 정국 속에서 대학의 문이 닫혀야 했던 기억을 언급한 것”이라고 밝혔다. 휴교한 기억을 더듬다 5·18을 언급한 것뿐이라는 해명이지만, 왜 5·18을 ‘하여튼 그 무슨 사태’라고 했다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5·18은 전두환이 집권한 5공시절 ‘광주사태’로 불리다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공안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황 대표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황 대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을 쓰기 싫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과 관계없는 발언을 역사 인식 문제로 왜곡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네거티브 공세를 중단하기 바란다”며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도리어 화를 내는 격이다. 

한국당의 5·18에 대한 변하지 않는 인식과 태도가 절망스럽다. 한국당은 지난해에도 5·18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 구성에 억지를 부리고, 5·18을 폄훼한 의원도 징계하는 시늉만 했다. 말실수를 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옳다. 이치에 닿지 않는 궤변으로 실수를 모면하려는 모습이 추레하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정당이 두 달 후 총선에서 어떻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보수대통합을 외친들 무엇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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