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보통 계획이 다 있다. 열세 살 무렵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다 골든벨을 울린 언니가 5개 국어로 유창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 뒤 무조건 5개 국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내 인생의 장기계획 중 하나로 남아있다. 앞으로 4개국의 언어를 더 배우기만 하면 된다. 또 20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불어나는 체중의 관리를 위해 “매일 10㎞씩 걸어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한번도 실행한 적 없는 중장기적 계획이 있고, 부디 이 칼럼이 명문이 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망상형 계획, 가깝지 않았던 학교 동기의 결혼식에 불참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부도덕한 계획, 별다른 계획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지는 부를 갖고 싶다는 ‘무계획이 상팔자’형 계획도 있다. 

계획의 크기와 종류는 이렇게나 다양하지만 무슨 계획이든 무산되는 순간에 느끼는 절망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나는 주로 내 부족한 의지로 인해 좌절되는 계획이 많은데 이건 몇 마디 자책으로 쉽게 풀리기도 하고 이후의 대책을 마련하는 게 가능해서 계획을 변경해 나가는 과정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외부 요인에 의해 별안간 좌절되는 계획만큼의 타격은 없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그 계획을 성실하고 훌륭히 잘 지켜왔다면? 그리고 계획 이상의 실적과 성취를 이뤘다면? 그때의 상실감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서 분노할 만큼 큰 것이다. 완성 직전의 도미노가 힘없이 무너지면 도미노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미선, 양희은, 이지혜가 진행했던 시사예능 <거리의 만찬>은 주제와 관련한 당사자에게 마이크를 주는 방송이었다. ‘시사예능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만큼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설정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관점이 분명하며 언변이 좋은 진행자를 앞세우는 기성 시사예능 형태를 생각해보면 그런 상식과 보편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명쾌한 주장과 단단한 근거의 말들은 힘이 있었고, 외면받던 목소리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송이니만큼 그 말을 담아내는 세 명의 여성 진행자는 그 자체로 프로그램의 취지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거리의 만찬>은 첫 방송 때부터 시청자들에게 내비친 계획을 여러모로 훌륭하게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여성 미디어 제작단체 ‘소그노’가 만든 웹 예능 <뉴토피아>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봤다. 출연자와 제작자는 모두 여성으로, 예고편만 봐도 ‘기성 예능의 구태한 관습을 재능 있는 여성들이 직접 바꾸겠다!’ 하는 기획의도가 대차게 드러나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방송에 기대를 갖게 된 데에는 그들이 앞세운 포부와 계획이 적어도 타의에 의해서 무산될 리는 없을 거란 확신이 크게 작용했다. 애청자를 설득하기엔 타당성이 부족했던 <거리의 만찬> 진행자 교체 사태로 나는 방송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기준 하나를 더 얻은 셈이다.

나는 그러한 각성과 동시에 타의에 의해 좌절된 계획이 다시 회복될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담론의 균형을 기계적으로 맞추지 않고 늘 한쪽의 저울에 미리 추를 올려주었던 <거리의 만찬>이 본인들이 겪은 진통마저 직접 다루는 것을 상상하며 재개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이 훌륭한 도미노를 재건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원망할 여력도 그들을 지지하는 에너지에 보태고 싶을 만큼 말이다. 대개 이럴 때 만화에서는 “이것마저 나의 계획의 일부였다…” 읊조리고는 그 좌절을 다시 추진력으로 바꾼다. 전혀 계획에 없었으면서 다 계획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좀 멋쩍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계획은 별로 없지 않나.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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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젊은국회’ ‘청년정치’는 헛된 꿈일런가. 여야 정당이 한목소리로 세대교체 공천과 ‘젊은피’ 수혈을 내세웠지만, 막상 지역구 공천 접수 결과는 너무 빈약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4월 총선 지역구 공천 신청자 1122명 가운데 2030세대 후보자는 3.6%(41명)에 그쳤다. 민주당 신청자 475명 중 20대는 한 명도 없고 30대는 9명(1.9%)에 불과하다. 한국당은 647명 중 20대는 2명, 30대는 30명으로 집계됐다. 청년 충원에 실패하면서 전체 공천 신청자 중 50대 이상이 90%에 육박한다. 현역의원이 교체되는 지역을 청와대 참모나 법조·관료 출신 새로운 ‘586’이 주로 차지해 ‘수직적’ 물갈이는 까마득해진 상황이다. 

정치신인 청년에게 당내 경선은 높디높은 장벽이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영입인재 중 30대 일부가 포함되면 늘어날 수 있겠지만, 최종 공천자 중 2030 비율은 지난 20대 총선 수준을 크게 벗어나기 힘들 판이다. 20대 총선 당시 민주당과 새누리당 공천자 중 2030세대는 각각 6명에 불과했다. 2030 당선자는 달랑 3명, 20대 국회의원 평균 연령은 55.5세로 역대 최고령이었다. 청년 대표성 측면에서 세계 최악의 국회는 단순히 유권자의 선택 결과가 아니라 당내 경선과 공천 과정에서 ‘기득권 카르텔’이 작동한 결과다.

여야 정당이 앞다퉈 청년정치를 강조하며 영입과 공천 경쟁을 벌여온 것은 여느 때보다 높아진 세대교체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외양은 요란했지만, 애초 젊은 정치인을 키우려는 의지도 부족하고 지역구 기회 등 기득권의 벽을 허무는 데 소극적인 탓에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에서도 청년정치의 집단화는 요원해졌다. 게다가 청년 인재영입도 흥행에만 치중한 깜짝쇼 이벤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지 낡아빠진 정당의 얼굴을 화장할 ‘비비크림’으로 청년을 소비하면서 미래세대를 운위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빈약한 환경이지만, 여야 정당은 비례대표 당선권과 전략지역에 2030세대와 40대를 우선 공천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처럼 청년에게 비례대표 몇 석을 선심 쓰듯 떼주고 전략지역 한두 곳 공천하는 수준에 그치면 ‘늙은정치’를 바꿀 기회는 사라진다. 21대 총선은, 정치에서 ‘미래’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청년정치가 튼튼히 뿌리내리는 계기적 선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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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고용연장도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제 고용노동부의 새해 업무보고를 받으며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급격한 감소 대비책으로 노인들의 경제활동을 최대한 늘릴 수 있도록 지시한 것이다. 시선은 정부가 지난해 9월 2022년부터 검토하겠다고 공표한 ‘일본식 계속고용제도’로 모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60세인 법정 정년 이후에도 기업들에 일정 연령까지 고용연장 의무를 부과해 재고용·정년연장·정년폐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정년연장을 법제화하거나 처벌은 하지 않되, 정부 지원에 차등을 둬 정년연장을 유도하고 고령층 노동력이 산업현장에 더 투입되는 효과를 꾀하고 있다. 모든 세대가 민감한 정년연장 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국정현안으로 공론화하고 나선 셈이다.

올해는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를 연 1955년 출생자 71만명이 노인이 된다. 지난해 54만명이던 노인 진입자는 향후 9년간 해마다 68만~91만명씩 급증한다. 1차 베이비부머 727만명이 모두 65세를 넘는 2028년이면 노인인구는 현재 765만명의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다. 그새 2005~2013년 출생자가 생산가능인구에 새로 진입하지만 그 숫자는 418만명선에 그친다. 저출산·고령화 두 바퀴가 구르면서 2020년대엔 생산가능인구가 연평균 33만명씩 줄어든다는 게 정부의 추계다. 그 뒤 노인으로 진입할 2차 베이비부머(1968~1974년)도 635만명이 포진해 있다. 베이비부머 은퇴가 시작된 해에 정년을 논의하는 ‘판도라 상자’가 다시 열린 셈이다.

방향은 맞지만, 넘을 산은 한둘이 아니다. 고용연장은 시급한 노동인구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 65세부터 받는 국민연금과 막대한 정부·기업 돈이 들어가는 건강·고용·산재보험 체계가 함께 개편되고, 필연적으로 노인 연령 기준을 65세에서 상향하는 문제와 얽힐 수밖에 없다.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적자폭이 서울에서만 한 해 4000억원에 달한다. ‘지공거사’ 기준에 따라 전국에서 무임승차 논쟁이 재연될 소지도 있다. 무엇보다 정부는 세대 갈등이 없도록 청년 고용에 미칠 여파를 세밀히 살피고 추진해야 한다. 벌써부터 정규직 위주 연공급 임금체계를 둔 채 정년만 늘리면 그 혜택이 대기업·공공기관 노동자에게만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016년 60세로 정년이 연장됐어도 현실은 그 전에 회사를 나와 70대까지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고용연장은 톱니바퀴처럼 엉켜있는 비용 설계와 사회적 논의가 면밀히 쌓여야 연착륙할 수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고, ‘디테일’이 완비된 정책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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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장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사건’ 공소장이 최근 공개됐다. 법무부는 앞서 국회의 공소장 제출 요구를 거부했다. “잘못된 관행”이라고 했다. 국민 알권리 침해 지적에도 추미애 법무장관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 형사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우리 사법체계는 공판중심주의·공소장일본주의를 채택한다. 재판부가 편견·선입관 없는 상태에서 검사와 피고·변호인이 제시하는 증거와 법리에 따라 유무죄를 다툴 때만 공정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공소장이 재판 전에 공개되면 ‘여론재판’이 시작된다. 판사가 특정 주의·주장에 휘말릴 수 있는 것이다. 공소장이 재판 시작과 함께 공개되면 ‘미리 알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의 알권리와 충돌하는 일도 대부분 해소될수 있다.

공소장에는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사실이 적시됐다. 청와대 전직 비서진의 개입으로 2018년 지방선거 자유한국당 후보,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경찰 수사가 이뤄졌고 관련 언론보도가 김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결국 낙선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비서진이 송철호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위해 경찰 수사를 지시·독려하고, 선거기획에 참여하고, 당내 경쟁 후보의 경선 포기를 종용한 것이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의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반헌법적 행위다. 

공소장에는 ‘대통령’이 수십차례 등장한다. 청와대 전직 비서진에 대한 공소사실을 담기 위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문에서 검찰은 “대통령의 (중략) 정치적 중립성이 더욱 특별히 요구된다”고 했다. 피고 측 변호인들이 ‘정치선언문’이라고 비난한 배경이다. 그럴 만한 것이 ‘선거에서 공무원은 엄정한 정치적 중립의무가 있다’는 한 줄이면 될 것을 557자를 할애하면서 대통령의 중립의무까지 강조했다. 공소장 곳곳에 송철호 울산시장과의 친분을 드러내고 대통령 이름 석자를 적시하기도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통령에 대한 충심’을 강조한 바 있다. “측근 비리는 수사로 도려내는 것이 대통령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공소장에서 대통령을 거론했다. ‘윤석열의 충심’은 믿기 어렵게 됐다.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대통령은 여론재판의 한가운데 서게 됐다. 

여론의 법정은 유죄추정 원칙이 지배한다. 검찰의 공소 내용을 기정사실화하며,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고 몰아세운다. 보수언론, 한국당 등은 물론 교수·법조인 단체, 진보성향 학자·변호사·시민사회단체까지 나서 “대통령이 직접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당은 “범죄집단 총책임자” “수사에 응하지 않으면 혐의를 시인하는 것”이라 윽박지르고,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다.

공소장은 검찰이 재판해줄 것을 법원에 요구하면서 제출하는 서류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담겨 있지만 유·무죄는 재판에서 결정된다. 국가권력의 감시자인 언론이 이를 토대로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다. 다만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반론권은 보장해야 한다. 공소장이 ‘반쪽짜리 사실’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피해는 직접적이고 크다. 과거 ‘포르말린 통조림사건’의 경우 검찰 공소장을 토대로 작성한 언론보도 여파로 관련 제조업체들이 무더기로 도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재판에서 검찰 수사의 잘못이 드러나 무죄 판결이 났다. 검찰의 공소장이 ‘미완성 진실’이었던 탓이다. 이런 잘못된 검찰 수사 등으로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법원 합의부 무죄 비율은 8.9%였다.  

게다가 공소장 어디에도 대통령에 대한 범죄 혐의는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범죄 피의자’로 몰고가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독배를 들게 했던 아테네의 시인 멜레투스 등의 선동정치나 다름없다. 또한 변호인들은 검찰의 공소사실 중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재판에서 다툴 내용들이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법원의 판단을 지켜보는 것이 순리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국민 알권리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충돌, 검찰의 ‘절차적 정의’에 따른 수사결론을 ‘결과적 정의’로 보려는 태도, 그리고 이를 진실인 양 보도해온 언론의 보도행태 등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상대가 어디에 살든, 상대를 얼마나 잘 알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열린 공론장에서 우리 모두가 새겨야 할 경구가 아닐까.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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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훈의 단편소설 ‘졸피뎀과 나’에는 가난뱅이 작가 청년이 등장한다. 어깨는 넓지만 종아리가 가는 아버지를 미워한다. 아버지는 밑구멍이 째지는 형편에도 달마를 닮은 돌덩어리 수석을 1000만원에 사오는 한심한 인간. 하루 종일 신세한탄만 주절대다가 멋진 차를 타고 서둘러 퇴근하는 사촌형 빵집사장. 엄마와 청년은 자정까지 빵 만드는 노동을 하고 허리가 고꾸라져 귀가한다. 빵집 형수는 호텔 연회에서 “도련님! 고기에서 흙냄새가 나지 않아요? 비린내가 나요”라면서 시건방을 떤다. 연립주택의 반지하방. 창문도 북향이라 햇볕도 없는 집. 사도들이나 살 법한 카타콤 같은 지하세계를 전전한다. 정신병원에서 지낸 한때의 이력과 감정기복이 심한 여자들과 지난한 연애사, 6평짜리 원룸으로 이사한 뒤 야뇨증으로 실례한 이불을 널던 가을밤의 풍경 등등. 흡사 영화 <기생충>의 시나리오 같은 얘기들이 똑같이 펼쳐진다. 

나도 어렸을 때 야뇨증을 잠시 앓았다.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지렸다. 누이가 오줌싸개라고 놀리면 더 심해졌다. 평생 처음 한약을 달여 먹기도 했다. 효능은 딱히 없었다. 변소는 멀고 외딴곳, 무서웠다. 캄캄한 밤중에 그곳까지 혼자선 못 갔다. 교회에 얹혀살았기에 거룩한 공간이라는 반복된 주입도 어린 나를 괴롭혔다. 지금 같아선 십자가 강대상 밑이라도 시원하게 오줌을 갈겼을 텐데. 

어느 날 엄마가 조그만 요강을 하나 내게 안겨주셨다. 오직 나만의 요강. 만수무강, 만수에겐 요강이 없다는 뜻. 그러나 나에겐 요강이 생겼노라. 이후 야뇨증은 씻은 듯 없어졌다. 

지금은 몇 걸음이면 안방에서 변소까지 가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때론 얼마나 비열하고 사악한지 알게 되었기에 악령, 귀신 따위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아. 목사란 목표가 없는 사람, 제때 오줌 눌 일 말고는 세상에 무슨 떨칠 만한 목표 따위 없다. 그러니 오줌싸개여도 괜찮아. 적당히 가난해도 괜찮아. 졸피뎀을 먹어야 잠들 수 있는 당신도 괜찮아 다 괜찮아.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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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 여부를 놓고 몇 달째 논란이 이어지던 각 시·도교육청의 ‘모의선거 교육’(모의투표)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주 “안된다”며 쐐기를 박았다. 

선관위원 9명 전원이 참석하는 전체회의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데, 이로써 학교에서 모의투표를 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히게 됐다. 예컨대 이미 지난해 12월 모의투표를 진행할 40개 학교의 선정을 마치고, 이를 지원할 예산과 교육계획까지 준비했던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이 모든 걸 갈아엎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모의투표를 함께 준비해왔거나 이를 지지해온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이어지겠지만 선관위가 이를 받아들여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은 없다. 교육감들이 선관위 결정에 반발해 강경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낮다. 한 교육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터라 정치적 오해를 살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모의투표는 이론보다는 실전에 가까운 교육 과정이다. 학생들이 실제 정당 후보자들의 공약을 살펴보고, 토론과 스스로의 가치판단을 거쳐 투표까지 직접 해보는 일련의 과정이 핵심이다. 모의투표 결과는 실제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 공개토록 돼 있다.

선관위는 모의투표를 전면 불허한 이유에 대해 “교원이 교육청의 계획하에 모의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행위 양태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행위에 이르러 공직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위원들이 교사들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교육계 일각에선 “위원들 대부분이 박근혜 정권 때 임명된 탓”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학내 모의투표는 과거 총선이나 대선 때도 여러 차례 실시했던 교육이다. 모의투표 자체가 정치편향 시비에 휘말렸다거나, 모의투표로 인해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세뇌’되었다는 등의 얘기 역시 알려진 바 없다. 모의투표가 “애들은 가라” 식으로 막아야 할 투전판이 아니라는 얘기다. 선관위의 결정에는 학생 유권자의 독립적인 사고와 판단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결여돼 있다.

일본은 “젊은 유권자의 투표율 상승에 도움이 된다”며 교내 모의투표를 권장하고 있다. 공직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20~30대 젊은 유권자의 투표율이 꼴찌를 기록하는 동안 선관위는 무슨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규제기관이 있으면 진흥기관이 있어야 적절한 균형이 맞는 경우도 있다. 선관위가 규제 쪽에 관심이 더 많다면 이참에 ‘선거진흥위원회’를 만드는 건 어떤지 제안한다.

선관위의 결정이 ‘선거 교육’이라는 큰 밥그릇(혹은 주도권)을 놓치기 싫어서라고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선관위는 최근 ‘18세 유권자 선거 교육 교재’를 발간해 일선 학교에 보급했다. 다만 학교에서 제대로 활용되길 바란다면 교재부터 꼼꼼히 검토해보길 권장한다. 

교재를 보면 “친구에게 지지를 부탁할 수 있다”고 했다가, “교실을 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는 건 불법”이라고 해놓고선, “2개 이상 교실을 다니며 선거운동하면 불법”이라고도 써놓았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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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 시 틀니 압수.” 랜선 세계를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친 표현이다. 여기서 만난 것 대부분이 금세 잊히는데, 이것은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틀니 압수”는 ‘꼰대짓’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맥락에 쓰인다. 노인들이 들으면 서러울 말로, 꼰대짓하는 사람은 대개 나이 많은(그래서 치아가 손실된)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이 내재돼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꼰대인가?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꽉 막힌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반박 시 틀니를 압수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은? 반박을 ‘금지’하는 태도는 꼰대의 것으로 보기 손색없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절묘한 아이러니이다. 

꼰대적 태도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득 없이 강요하는 것, 서열 짓고 차별하는 것, 오롯하게 개인으로 보지 않고 당사자가 원치 않음에도 특정 집단의 틀로 규정짓는 것 등 당해보면 불쾌한 폭력이다. 치아의 유무가 기준이 아니다. (나쁜) 매너가 꼰대를 만든다. 

꼰대에게 당해본 이들은 다짐한다. 나는 꼰대가 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한 친구들 중, 이끌어야 할 후배가 생긴 30대의 고민은 깊어졌다. 후배에게 개선점을 지적한 날마다 친구의 마음은 불편했다. 오늘 후배에게 지나치게 참견했나? 말투에 문제는 없었나?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날을 반복했다. 프로젝트 결과물이 훌륭하면 물론 좋지만, 힘들게 취업했는데 후배가 업계에 오래 발붙이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요, 좋게 말하면 다정함일 텐데 대충 후자라고 해주자. 

어쨌든 그런 날이 반복됨에도 마음을 편히 갖지 않고 계속 스스로를 경계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봤다. 이 친구가 중증 꼰대는 되지 않겠구나. 진짜 심각한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줄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강박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꼰대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나마 괜찮은 꼰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성찰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그는 말했다. 

“넌 회사 안 다니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미안해….”

빠른 사과 역시 그나마 괜찮은 꼰대가 되는 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든, 어디서든 꼰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 10대도 20대도 마찬가지. 뭐든 확신이 문제다. 꼰대는 나와 관계없는 단어라는 확신이 젊은 꼰대를 만든다. 가치관의 어떤 부분은 신선하고 말랑거리겠지만 어떤 부분은 기성의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회로부터 공기처럼 흡수한 혐오와 차별의 시선이다. 

인터넷 공론장의 쌍방향 소통은 재사회화에 도움이 된다. 인터넷은 상대적으로 위계 없이 대등하게 주장을 주고받고 ‘반박’하며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뒤섞이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다. 물론 그 전에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타인이 규정짓는 나’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을 발견하고, 서사를 쌓아가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간. 그 뒤 (랜선을 통해) 나의 방과 세계는 연결되고 타인과 연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희망편’이고, 지금 한국 랜선 세계에서는 ‘절망편’이 펼쳐지고 있다 하더라.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에서도 많은 이들은 ‘집단’에 속하기를 택하며, 특정된 개인들 역시 집단으로 규정하여 쥐어 패고 다닌다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진 편견으로 공격하는 일은 꼰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다수가 한 사람을 공격할 때 공격받는 개인은 명백히 약자일 수밖에 없음에도, 신원이 노출돼 위험을 느끼는 개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지 언어폭력을 멈추지 않는 이들…. 이거 웬만한 꼰대보다 더 나쁜 것 같은데? 이건 솔직히 키보드 2주 압수해도 된다고 본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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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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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은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하지만 가치와 제도처럼 인간 사회에서만 중요한 것들은 호모 사피엔스들의 생각에 따라 변해간다.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특히 그렇다. 사람들은 더 많은 타인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며 분투해왔다. 휴대폰으로 이 칼럼을 읽는 분들에게 보일 광고들이 그런 분투의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다수의 콘텐츠와 서비스가 광고료에 의존할 정도로 마케팅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투자된다. 당연히 기업들의 고심이 깊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마케팅할 수 있을까? 구매는 현대사회의 핵심적 활동인 만큼 뇌과학자와 경제학자들도 궁금해했다. 구매라는 결정을 내릴 때 뇌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신경마케팅

신경마케팅이란 고객들의 행동, 선호, 의사결정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뇌과학이나 생리학 연구에 쓰이는 기술들을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마케팅의 효과를 높이려고 연구를 할 때는 설문조사나 실험, 초점집단 면접 등이 활용됐다. 반면 신경마케팅에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뇌파 검사(EEG), 피나 침 속의 호르몬 농도 측정, 안구 추적, 심장 박동 측정, 피부의 땀 분비량 측정 등이 활용된다. 

연구를 위해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비용과 얻을 수 있는 정보, 가능한 실험의 종류가 달라진다. fMRI 실험에는 수백만원이 필요하고, 참가자가 MRI 스캐너 안에서 누운 상태로만 실험을 할 수 있다. EEG는 비용이 더 적게 들고, 참가자가 다양한 공간에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어떤 위치에서 뇌 반응이 일어났는지 알기가 어렵다. 호르몬 측정, 안구 추적 등에는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최신 기술을 사용했다고 무조건 더 좋은 것은 아니고, 기술을 제대로 사용해서 정확하게 분석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 fMRI 연구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이 음악의 지난 3년간 누적 판매량과 청소년들의 뇌 활동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신경마케팅 연구는 물건의 가격을 책정할 때도 힌트를 줄 수 있다. 한 연구에서는 와인의 가격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면 같은 와인을 마시더라도 뇌 활동이 달라지는 것을 관측했다. 이는 와인을 마시는 경험의 즐거움이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 부풀려진 희망과 공포

신경마케팅을 뇌과학의 악용 사례로 간주할 정도로 신경마케팅을 경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경마케팅이 나의 생각을 읽어내거나, 나의 구매 행동을 나도 모르게 조작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염려가 컸기 때문인지 최근에는 기업의 마케팅을 위한 신경마케팅 연구와, 구매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구매자 뇌과학’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염려는 현실성이 없거나 ‘신경’마케팅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선 신경마케팅은 ‘나’의 생각을 나도 모르게 읽을 수 없다. 내가 신경마케팅 연구에 참여해서 나의 뇌 활동이나 나의 생리 활동을 측정했을 때 해당 실험과 관련된 제한된 정보만을 기업이나 연구자들에게 주게 되며,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신경마케팅이 아니어도 본의 아니게 나의 정보를 기업에 넘기는 일은 지금도 많이 일어나고 있고, 기업들은 이렇게 모은 빅데이터를 마케팅에 활용하곤 한다. 앞서 fMRI로 음악 판매량을 예측한 연구를 언급했는데, 음악이 히트할 확률은 이미 빅데이터로도 예측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포티파이라는 회사는 2013년 그래미상을 수상할 음악을 예측했고, 6곡 중 4곡에 대한 예측이 적중했다. 스포티파이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개인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추천하는 일도 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이 염려하는 것처럼 뇌를 측정한다 해서 구매 행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고, 잘 짜인 마케팅으로 뇌 속의 구매 버튼을 누를 수도 없다. 뇌 속에는 그런 버튼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옆구리를 찌르는 정도(Nudge)는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더 많은 시민들이 더 열심히 연금보험에 불입하게 하기 위해 연금보험 선택지의 기본값을 조정하는 것(사람들은 대개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다음’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옆구리를 찔린 경우라도, 우리는 언제나 ‘내가 정말로 이것을 원하는지’ 멈춰 서서 따져보고 결정을 바꿀 수 있다. 

지식은 한두 명의 천재가 아닌, 여러 사람의 동시다발적 발견으로 진보한다. 이렇게 옆구리를 찌르는 방법에 대한 지식은 여러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전해갈 것이고, 그렇다면 아예 연구 자체를 막는 것보다는 온건하게 쓰일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두루 아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새로 얻은 지식을 어떻게 확산시키고 활용할지는 별개 문제가 되겠지만.

■ 협력하고 싶은 이웃

정보를 어떻게 확산시키고 대응할지는 국적도 피부색도 가리지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에서도 중요하다. 이처럼 힘든 일을 겪으며, 우리는 좋든 싫든 지구촌 공동체임을 통감한다. 기후위기가 심해지고, 신종 전염병의 출현이 잦아지며 앞으로도 이처럼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 늘어갈 것이다. ‘협력’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이 아름다운 말의 실천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힘들 때 기꺼이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도와주면서도 싫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힘들 때뿐만 아니라 좋을 때도,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하고 싶은 이웃이기를 바란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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