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고 며칠 뒤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통증 때문에 걷기 힘들었고 계단에서는 한 발씩 옮겨야만 했다. 무릎 아픈 건 실은 오랜 지병이다. 테니스를 좋아해 과하게 운동했던 탓인지 18년 전 처음 탈이 났고, 고만고만하다 나빠지더니 결국 이 지경까지 왔다. 한번 망가지면 고치기 힘드니 부디 아껴 쓰라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귓전으로 흘리고 함부로 쓴 결과다. 

돌이켜보니 내가 병을 키웠다. 재작년엔 무릎 안 좋은 사람이 허벅지 근육을 키우겠다며 8층까지 매일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작년엔 다이어트를 한다며 날마다 1만보 이상을 일부러 걸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내 몸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에 집착했던 어리석음이 키운 병이다. 수술이든 물리적 치료든 전문가에게 맡겨 고쳐야 할 일이지만, 내가 스스로 병을 키우는 짓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

내 몸을 고치고 되살리는 일처럼 우리 마을과 도시를 재생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병을 고치려면 근원을 건드려야 한다.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내고 병을 키우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내가 내 무릎에 몹쓸 짓을 하듯 삶터의 병을 우리가 키우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재생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들은 대부분 개발시대 후유증들이다. 재생에 앞서 개발시대를 돌이켜보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깨달아야 한다. 오랜 개발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깊이 스며 있는 ‘개발병’을 알고 고쳐야 재생도 성공할 수 있다.

개발병은 ‘빨리빨리’ ‘한꺼번에’ ‘우선 당장’으로 요약된다. 빨리빨리 도시를 짓기 위해 일사불란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국가가 계획하면 지방은 군말 없이 따랐고 민주주의나 분권은 중시되지 않았다. 집이든 공장이든 한 채 한 채 짓는 대신 한꺼번에 ‘단지’로 개발했고 뉴타운이나 신도시처럼 새 도시도 뚝딱 만들어냈다. 긴 안목으로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성과를 내기 위해 ‘성장거점’을 키웠다. 국토를 고루 키우는 대신 대도시와 대기업을 집중 육성했다. 성장거점 전략은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아들딸 모두를 공부시킬 형편이 못되니 될 놈, 클 놈을 골라 대학까지 보냈고 그렇게 큰 자식이 성공하면 남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개발시대는 대한민국에 눈부신 성취를 안겨줬다. 경제발전과 도시화를 이루어낸 속도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오죽했으면 폭발하듯 성장했다고 했을까. 그러나 바로 그 속도에 문제가 있었다. 성장속도는 너무 빨라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발병을 치유하려면 국가의 전략부터 국민들 마음까지 전부 바꾸어야 한다. 마을과 도시와 국토까지 우리 삶터를 더는 물건처럼 보지 말고 생명 다루듯 조심스럽게 되살려야 한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리고 ‘오래오래’ 가도록.

재생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많다. 가장 먼저 살려야 할 것은 소멸위기 지방이다. 국토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몰려 있다. 국토를 사람 몸에 비유한다면 머리는 너무 커져 터지기 직전인데 손끝 발끝은 피가 돌지 않아 괴사직전이다. 시와 군의 3분의 1이 인구 5만이 채 안된다. 극심한 편중과 불균형이 개발시대가 물려준 유산이고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재생시대의 핵심 과제다.

수도권과 지방을 따로 보지 말자. 국토 전체를 한 몸 생명으로 보고 두루 살려야 한다. 재생을 하겠다면서 병을 더 키우는 어리석은 일은 그만해야 한다. 인구편중을 심화시킬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혁신도시도 이제 더는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일을 벌일 때가 아니다. 아픈 곳 빈 곳을 고치고 채울 때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천천히 재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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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마지막 학기를 보낼 때 다세대주택 반지하에서 살았다. 고시원 등지를 전전하다 월세로 들어갔다. 부엌이 딸린 방이라 밥을 지어먹어 좋았다. 작은 가구에 비디오비전도 들여놓아 즐거웠다. 친구들과 술 마실 공간이 생겨 신났다. 시험 기간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이 들어와 자곤 했다.

습기 같은 건 대수롭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면 복도로 물이 들어와 차곤 했지만, 부엌까지 들어오진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내세울 일도,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타지로 와 일하고, 공부하던 이들 대부분이 다세대주택에서 살았다. 한강을 조망하는 오피스텔에 살던 친구를 부러워하진 않았다. 그때 내 욕망의 크기는 같은 다세대주택 옥탑방으로 이사하는 정도였다.

24년 전 내 주거 형태를 떠올린 건 영화 &lt;기생충&gt;의 기택네 반지하 세트장을 복원(고양시)하고, ‘돼지쌀슈퍼’나 ‘동네계단’ 등지를 탐방 코스로 개발(서울시)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뭔가가 뜰 때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경제 활성화’란 명목으로 복원을 하니, 코스를 만드니 하며 관광 ‘상품’에 집착하며 호들갑을 떤다. 경제효과와 상품화에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는 현대 한국의 실제 연쇄 살인을 극화한 영화가 오스카를 타면 그 세트장을 복원해 전시하고, 살인 발생 당시 주민이 여전히 사는 그 현장을 탐방 코스로 만들 기세다. 130년 전 영국의 연쇄 살인마의 범행 현장을 찾아가는 한국판 ‘잭 더 리퍼 소굴’ 탐방 프로그램이라고 선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이 영화에서 교훈을 찾을 건 빈부격차·실업·주거 문제를 두고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할지다. 예컨대 폭우에 대비해 배수시설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가난한 세입자 보호를 위해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도 고민거리여야 한다.

다시 내 살던 반지하의 철제 대문을 쓱 열고 들어와 좁디좁은 반지하 복도에 고개를 내민 ‘투어리스트’를 상상해본다. 밥 한 공기 거저 더 퍼주던 인심 좋은 밥집으로 ‘이 동네 사람들의 먹거리’를 맛보러 온 탐방객들도 떠올려본다. 저 관광 상품에선 반지하 세트장이 환기하는 게 오스카인지, 영화 속 장면인지, 빈민과 빈곤인지에 관한 고민이 없다. 탐방 코스엔 왜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또 다른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빠져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갈 주민에 대한 걱정도 없다. 모든 이의 주거는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성찰도 없다. 저 복원이니 코스니 하는 것들에선 다세대주택·반지하·옥탑방·쪽방에서 사는 이들의 인권을 찾을 수 없다.

주거권은 인권이라고 새삼 다시 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헌법(제16조)은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도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가 들어 있다. 유엔 해비타트 의제는 적절한 주거를 실현하는 게 국가 책무라고 말한다. 적절한 주거 요건엔 물리적 환경에다 ‘사생활 보호’도 들어간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과 주거는 계급과 차별, 혐오의 지표다. 주거 형태와 부동산 가격을 두고 무슨 ‘충’이니 무슨 ‘거지’니 하는 말들이 나돈다. 같은 아파트인데도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격리, 배제’ 당한다. 주로 아이들이 이 세태로 상처를 받는다. 차별과 혐오가 향하는 건 주로 약자, 소수자다. 성소수자들이 주민 반대로, 지자체의 지원 중단으로 공동주택에도 입주하기 힘든 게 지금 현실이다. 

이른바 ‘진보정권’ ‘촛불정부’의 인권은 뒤틀렸다. 고공농성 중인 삼성 해고자 김용희나 마사회를 비판하며 죽은 문중원 기수의 죽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의 인권은 뒷전이다. 정권의 ‘추미애 법무부’와 ‘조국 법무부’가 인권을 내세우며 강행한 공소장 비공개, 형사사건 공개금지 같은 드라이브는 현재로선 ‘조국, 최강욱, 이재용’ 같은 권력자들의 ‘인권’만 강화한 꼴이다.

추미애는 장관 임명 전후 ‘인권과 민생’을 강조했다. 주거권 문제를 보면, ‘계약갱신청구권(계속거주권)’이나 ‘전·월세 인상률 상한제 도입’ 같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이 법무부 일이다. 이주노동자와 난민 정책 주무 부서도 법무부다. 인권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차별금지법이다. 한국 최초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법무부가 발의한 것이다. 추미애는 2013년 국회의원 발의 때 이름을 올렸다. 2017년 민주당 대표 시절 추씨가 희귀성이라며 ‘성(姓)소수자 대표’라는 말장난을 했던 시절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빈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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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病床)의 아침, 창밖에 눈발이 날립니다


병상에 누워 바라보는 바깥세상


한순간, 첫눈이구나 첫눈이구나


마음은 설레이고 육신의 고통은 사라져


창밖에 날리는 눈송이를 따라 나는 춤추는 인형

스스로 창턱에 올라서서


눈에 보이는 세상 이 계절의 풍경 앞에


희열의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박이도(193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병석에 누워 지내던 시인은 창 바깥에 흰 눈발이 흩날리는 것을 본다. 겨울 들어 처음 내리는, 잘고 가늘게 내리는 눈을 본다. 그 순간 공중에서 춤추는 눈송이처럼 마음이 들떠 두근거리고 흥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아파서 병상에 있지만 살아있는 이 순간이 고맙고 기뻐 눈물을 흘린다.

어제 수선화가 겨울의 두꺼운 땅을 뚫고 뾰족하게 화살촉처럼 솟는 것을 보았다. 꽃나무가 꽃망울을 맺은 것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감격과 흥분이 얼마만인가!)

박이도 시인은 시 ‘어느 인생’에서 “이제야 내 뒷모습이 보이는구나/ 새벽안개 밭으로/ 사라지는 모습/ 너무나 가벼운 걸음이네/ 그림자마저 따돌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라고 썼다. 비록 어디인가로 총총히 사라지더라도 이 시에서처럼 우리 삶의 보행이 순간순간 가벼운 걸음이었으면 한다.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감격하면서 춤을 추는 눈송이처럼 설레었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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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맥지수(Big Mac index)’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회사 맥도날드의 대표 햄버거인 빅맥(Big Mac)을 기준으로 세계 각국의 물가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지수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데, 맥도날드가 전 세계에 진출해 있고, 빅맥이 표준화돼 있어 품질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기본 전제다. 맥도날드는 지난해 기준 120개 국가에서 3만7000여개 매장, 한국엔 400여개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빅맥지수 1위는 스위스(6.71달러), 2위 노르웨이(5.97달러), 3위 미국(5.67달러)이었다. 한국은 17위(3.89달러)였고, 일본 26위(3.54달러), 멕시코 42위(2.66달러) 등이었다. 표준화된 비교가 가능하니 최저시급으로 빅맥을 몇 개나 사 먹을 수 있는지, 최저시급의 상대적 수준도 쉽게 알 수 있다.

맥도날드는 노동과 관련해서도 자주 언론에 오르내린다. 옥스퍼드 사전에도 실린 ‘맥잡(McJob, McDonald+Job)’이라는 단어는 임금이 낮고 전망 없는 일자리라는 뜻이다. 미국의 노동·사회단체들은 지난 2009년부터 펼치고 있는 최저시급 인상 운동 ‘15달러를 위한 투쟁’의 주 타깃을 맥도날드로 잡았다. 질 낮은 일자리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주주총회를 점거해 대규모 시위도 벌였다. 노력은 주효했다. 지난해 최저임금 15달러를 달성한 시애틀에서 맥도날드 사업장은 시급을 16달러로 인상했다. 맥도날드는 앞으론 더 이상 최저임금 인상 저지를 위한 로비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16일 정의당이 공개한 맥도날드의 시급제 크루·라이더 등에 대한 취업규칙과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업무의 시작과 종료 등을 사용자가 사실상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등 노동자에게 불리한 위법·부당한 내용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빅맥지수’가 물가와 통화가치를 비교하듯, 조금 더 나은 노동의 표준화를 위한 ‘취업규칙 빅맥지수’를 상상해 본다. 세계 각국이 매년 발표되는 표준화된 노동조건과 환경을 쉽게 비교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칠 방법은 없을까. 201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맥도날드 알바노조가 탄생할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맥잡을 굿잡으로”였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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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나면 어떤 문장이나 장면이 오래 남기 마련이다. 남아서 간직되었다가 문득 떠올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서늘한 반성이 되기도 하고, 난데없이 웃음이 터져나오게 하기도 한다. 혼자 잘 웃고 혼자 잘 놀라는 나는 툭하면 그런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한 장면을 가끔 떠올릴 때가 있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야. 모두가 넘어지지”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다. 모두가 넘어질 뿐 아니라 계속해서 넘어지게 되기도 할 터인데, 그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장면, 혹은 이 대사는 위로가 되는 여운을 남긴다. 넘어지겠으나 일어날 것이고, 또 넘어지겠으나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에서 넘어지는 일이란 마냥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같지만은 않아서 어떤 좌절은 그것 자체로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전복시켜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잘못 전해진 위로는 때로 욕설이 되기도 한다. 아주 넘어져 영영 못 일어나게 된 사람에게, 혹은 그런 느낌인 사람에게 스케이트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농담도 마찬가지다. 분위기를 좋게 만든다고 던진 농담이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어떤 나라의 외교관과 나눴던 대화가 있다. 교민들에 대한 화제에 이르렀을 때, 당신네 나라로 이주한 이민자들을 언제 자국 사람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느냐라고 물어봤었다. 영주권을 땄을 때, 시민권을 땄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일까.  

외교관답게 신중하게 대답을 골라서 했는데, 자기네 나라의 농담을 이해하고 함께 웃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진짜 자기네 사람이 다 되었다고 여기게 된다는 거였다. 농담이란 그 나라의 역사, 그 사회의 문화, 그 이웃의 삶에 완전히 녹아들어가는 순간 마침내 확보할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라는 뜻일 터였다. 같은 순간에 웃고, 같은 순간에 화를 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자체로 이미 내 이웃이고, 내 친구이고, 내 편일 수 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기분 좋은 농담이 하나 있다. 해외에서 북쪽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딸아이와 함께 갔을 때였다. 식탁 앞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북쪽 분이신 종업원이 우리가 모녀 사이냐고 묻고는 이어 말했다. 똑떨어지는 북쪽 사투리로. “아니, 딸을 열다섯 살에 낳았습네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그렇게 말해주는 센스가 너무나 유쾌했을 뿐이다. 다짜고짜 젊어 보인다거나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고 하는 말은 믿어지지도 않고, 믿어지지 않으니 딱히 기분이 좋은 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둘러 하는 말이라니. 북쪽 사람들이 하는 식당에 가는 것이 좀 꺼려지던 시기, 혹시 법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던 시기,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농담 한마디로 인해 무장해제, 음식 맛까지 좋아졌다.

잘못된 농담들도 있다. 일이 없어서 당장 다음달 생활비를 걱정하고 있을 때, 요즘 신수가 훤해 보인다는 말, 사람은 한가하고 볼 일이라는 말, 자기는 바빠서 죽을 맛이라는 말 같은 것. 너무 아파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무슨 다이어트를 했느냐는 말, 몸매가 아주 좋아졌다는 말. 나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구나 우울해지고 있는 참인데, 늙어서 좋은 것들에 대한 쓸데없는 말들. 잔뜩 기대를 하고 영화관에 가고 있는데 반전이 있는 결말을 냉큼 말해버리는 사람들. 말하자면 공감이 없는 말들. 내가 친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지 하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말들. 전해지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만 생각하는 말들. 공감이 없으니 그저 말뿐인 말들.


친해서 하는 말인데…하면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말들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낸 말들

공감이 없으니 그저 말뿐인 말들


말은 매번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하는 것이지만, 또 매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행히 실수는 덮어지기도 한다. 맥락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사실 그 맥락 속에 있고, 그 맥락이 말을 덮거나 살린다. 맥락도 없고 공감도 없는 말은 본인에게는 재앙이고, 타인에게는 폭력이다.

공감이란 게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지 모른다. 보편적인 것, 상식적인 것에 대한 이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그리고 겸손함. 아주 많은 겸손함.  

적어도 공인이라면 그리 해야 할 일이다. 좋은 정치인이라면 ‘말’을 스케이트 타기처럼 “한번 넘어지면 또 일어나면 되지”, 그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절대로 안될 일이다. 공인이, 정치인이 한번 꽈당하는 소리에 빙판이 깨지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내 실수도 아닌데 다친다. 너무 깊이 다친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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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최종 합격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두고 학내 찬반 여론이 갈렸다. 6일 학교 게시판에 찬반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이상훈 기자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지난 2월7일 입학을 포기했다. 여자대학이라는 공간에 트랜스젠더 여성의 진입이 비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혐오와 극심한 반대 속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당사자에게 학교 생활이라는 ‘일상’은 싸우고 지켜야 하는 ‘현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발달장애학생의 특정 행동이 불안하고 위협적이어서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겹친다.  

비장애학생의 교육권이 침해당하고, 안전이 위협당한다는 주장과 장애학생의 정당한 교육권을 박탈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 여론과 교육기관은 권리 간 충돌로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만 강조했다. 이러한 현실은 상대방을 탓하며 피해의 강도를 다투게 만들어 구조적인 한계를 바로 짚기 어렵게 한다. 

청소년에게 강요되는 규범으로 학생의 삶을 가두려는 학교에서 과연 모든 청소년의 교육권,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가? 학력 중심의 경쟁 구도에서 도태되는 것은 장애학생뿐일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관계를 쌓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낯섦이나 두려움과 마주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지금의 학교는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에 반대 세력에 부딪혀 철회한 연세대 젠더인권 의무화 교육 같은 시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유지되는 구조가 변화해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 존재를 심문하는가. 

트랜스젠더 여성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다’라는 일부 비트랜스젠더 여성들의 혐오적 발언은 사회적으로 ‘여성’을 규정하거나 억압하는 제도적 범주와 규범들을 소환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여성과 남성으로 이원화된 세계에서 그동안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배타적으로 적용되어 왔는가. 여성의 권리는 그 세계를 부수고 흔들며, 인간의 자격을 의심받던 이들과 전진해오지 않았는가. 

장애여성은 오랫동안 더 보호받아야 할 여성으로 구분되었지만, 구분하는 권력이 바로 배제의 조건을 만드는 폭력이었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허구는 장애인 거주시설을 여전히 합리화한다. 

그러나 장애여성 운동은 갈등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실패 속에서 안전할 권리를 확장해 왔다. 그 과정에 수많은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함께해 오고 있다. 종종 우리는 서로를 이질적이라고 느끼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르다는 사실이 안도하게 한다.

누군가 포기해 왔고, 앞으로도 포기될 수 있는 모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각자가 서 있는 복잡한 현실과 구조를 마주하며, 특정한 범주를 강요하고 권리를 서열화하는 권력에 맞서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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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가 문제를 일으킨 데 이어, 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이런저런 리스트가 있다고 시비가 일자, 공무원들 사이에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죄, 무서워서 아무 일도 안 하면 직무유기죄’라는 탄식이 돌았다는데, 과장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걱정스럽긴 했다. 어디까지가 남용이고 어디서부터는 남용이 아닌가. 공무원이 권한을 행사하여 남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남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 직권남용죄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겉으로는 권한 내의 행위 같지만 실은 의도가 불순한 행위를 말한다. 권한 밖의 행위는 직권남용죄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세무공무원이 세무조사를 나가 몸수색을 하면 직권남용죄가 아니라 불법수색죄가 된다.

일전에 대법원이 김기춘 등의 직권남용죄에 관해 내린 판결은 직권남용죄의 적용범위를 좁혀 놓았다. 이 판결엔 다수의견, 반대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이 붙어 있고 분량도 80쪽에 이른다. 

이 판결은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 전원이 합의에 관여한 전원합의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중 별개의견은 특정 문화예술인·단체를 기금 지원 선별 대상에서 배제한 것이 위헌적이거나 위법하다고 평가된다고 하여 바로 직권남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렇게 평가하면 직권남용죄의 해석범위가 과도하게 확장된다는 것이다. 다른 별개의견은 수사권이 없는 대통령비서실에서 수집한 증거를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로 쓰는 것은 정치적 중립에 위배되고, 이런 일이 허용되면 향후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위법한 증거의 증거능력은 부정하여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이와 달리 다수의견은 문체부의 지원 배제 조치야말로 정부의 정책이나 노선에 배치된다는 정치적 이유만으로 대상자에게 불이익을 준 것이니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또 공무원은 범죄가 있을 때에는 고발할 의무가 있으므로 대통령비서실에서 제공한 증거를 위법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소수의견(별개의견과 반대의견)은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그 논리도 잘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법원의 공식 견해인 다수의견의 판시범위를 가늠하게 하고 판결의 논리적 정합성을 유도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또 소수의견은 어느 사회의 이념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치적 중 하나는 전원합의체를 실질적으로 활발하게 운영한 것이다. 새만금 사건을 시작으로 <PD수첩> 사건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이 전원합의체를 거쳤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다양한 사법철학과 법리가 개진되었다. 그러다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엔 소수의견이 나올 법한 사건에서도 전원일치 의견의 판결이 선고되어 법조계에 실망 내지 분노를 안겨준 일이 있었다. 키코 사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개입 사건, 형사사건의 성공보수 사건 등이 그렇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휴고 블랙 대법관은 1942년 베츠 사건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냈다가 21년 후인 1963년의 기드온 사건 판결에서 베츠 사건 판결을 뒤집는 다수의견을 집필하였다. 판결 선고 후 그는 살아생전에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대법원이 1977년에 내린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한 마리 제비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아래에서 소수의견은 판사들에게 법치와 인권을 가르치는 교시문이었고 일종의 청량제이기도 했다. 1979년의 계엄포고위반죄 사건에서 군법회의 재판권에 관하여 소수의견을 낸 이일규 전 대법관은 “다수의견이 헌법정신에 눈을 뜨지 못하여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썼다. 판결에서는 이 정도도 격한 언사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의 대법원 판결이 여권 인사들에게 직권남용죄를 묻지 않게 하려는 시도라는 둥,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이라는 둥 정치적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판결문을 다 읽어 보면 그런 말이 별 근거 없는 추측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모두 직권남용죄의 적용범위를 좁히려고 긴 해석론을 펴고 있다. 


법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칼의 임자라고 해서 그 칼을

빼어드는 게 꼭 능사는 아니다

혹 빼어들더라도 필요한 만큼만

베어야 하는 것이 칼이다


두 의견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법은 늘 양날의 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칼의 임자라고 그 칼을 빼어드는 게 꼭 능사는 아니다. 혹 빼어들더라도 필요한 만큼만 베야 하는 것이 칼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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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다크룸>이라는 책을 번역, 출간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펼쳐진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다룬 <백래시>로 유명한 수전 팔루디의 2016년 작품이다. 이 책은 팔루디가 3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최근 태국으로 건너가 성별재지정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아버지 스테파니의 커밍아웃을 납득할 수 없었던 팔루디는 그를 만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팔루디가 대면하게 되는 스테파니의 모습은 2020년 대한민국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온갖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란제리를 입고 앞섶을 여미지 않은 채 집 안을 돌아다니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가족에게 “여자라는 걸 인정해 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자신에게만 집중해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들.

얼핏 보면 기행이나 폭력으로 비칠 행동의 묘사를 번역하면서 나는 전전긍긍했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누군가는 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그 부분만을 떼어내 입맛에 맞게 편집하여 혐오 선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팔루디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맥락에서 떼어내 자극적인 이미지로 박제함으로써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그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10년에 걸쳐 아버지와 대화하고, 질문을 던지고, 탐구했다. <다크룸>이라는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은 그렇게 탄생했고, 그 덕분에 독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란 단순히 성적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계급, 신체적 조건 등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팔루디가 정성을 들여 복원한 시간 속에서 스테파니는 사회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강요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그러니까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트랜스젠더”와 “변태적 복장도착자”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넘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는 맥락을 강탈당하고 그저 이미지로만 소비되거나, 그들의 삶에 벌어졌던 선정적인 사건들 위주로만 서사화된다. ○○녀로 쉽게 낙인찍히곤 했던 한국 여성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페미니즘은 이런 탈맥락화와 싸워왔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배제의 목소리는 크지만, 동시에 그에 맞서는 이야기는 더 많아지고, 저항담론도 확대되고 있어서다. 비트랜스젠더 중심적이던 한국사회는 조금씩 트랜스젠더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트랜스젠더 혐오 선동에 앞장선 페미니스트(터프)들을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심지어 “트랜스젠더에 대한 입장이 어떤가”를 기준으로 여성 단체와 여성 정치세력 등에 대해 사상 검증을 하고, 그곳을 신뢰해도 되는지 정보를 공유한다. 단체가 터프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면 좌표를 찍어 비난하고, 트랜스 배제적 주장에 명시적 반대를 하지 않으면 힘을 실어준다.

그러다보니 터프의 열기와 에너지에서 동력을 얻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등장한다. 자성이 필요하다. 여성운동과 여성정치가 혐오의 얼굴로 오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트랜스 배제를 고집하는 이들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의 의미가 페미니즘이 사람을 가려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첫째, 페미니즘이 “이 사회에서 누가 보편 인간으로 규정되었는가”를 비판적으로 질문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재규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명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함을 뜻한다. 여성운동은 그런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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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항공 및 방위산업은 최첨단 기술이 필요하고, 기술 진부화의 진전 속도로 인해 끊임없는 노력과 자원의 투자가 요구된다.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은 전투기를 비롯한 군용기를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했다. 항공기술을 민간 여객기 분야에 집중해 1949년 세계 최초로 콩코드 초음속 여객기를 개발하는 쾌거도 이뤘다. 그러나 1976년 극심한 경제난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연구·개발 관련 비용을 대폭 삭감했고 이후 영국의 항공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해 항공산업이 무너졌고 공군 재창설을 위한 전투기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형국이었어도 국내 연구·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50년대 후반 초음속 전투기 개발에 성공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 승리로 6일 만에 끝내게 한 미라주 전투기는 프랑스 항공기술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전투기에서 우주선까지도 자체 개발이 가능해진 프랑스는 유럽 공동 여객기 사업까지 주도했다. 오늘날 이 사업을 배경으로 탄생한 에어버스는 여객기 판매량에서 미국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서방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항공우주 분야 수출 비중이 높은 국가가 프랑스다. 

올해 한국의 국방예산은 50조원을 돌파했다. 최근 3년간 정부는 방위산업 혁신성장, 수출 산업화,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면서 방위력개선비를 연평균 11% 증액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예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 방산업체 실질 매출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국방예산 증액이 국내 연구·개발과 국산 무기체계 구매로 확대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위험부담이 존재하는 국내 연구·개발보다는 이미 완성된 고성능의 외국산 무기체계를 선호한다. 최근에는 개발이 이미 완료된 국산 무기체계까지 외면당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1990년대에 육군은 입체적 작전수행을 목적으로 외국산 중형기동헬기를 도입했다. 이때 시도한 면허생산을 계기로 국내 항공기술이 축적됐고, 2010년엔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한 국산 기동헬기가 하늘로 비상했다. 국산 기동헬기는 방위사업청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국책사업으로 개발을 추진했으며 중소기업 등 국내 250여개 업체가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노후한 외국산 중형기동헬기의 성능 개량을 검토하면서 국산 헬기로 대체 가능하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속적으로 생산돼 성능과 품질이 안정된 국산 헬기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수출이 가시화되고 있다. 

해외 기종 대비 손색이 없는 국산 헬기가 자국에서 외면을 받는다면, 수출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국내 항공 방위산업 분야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일자리 창출과 고용 증진이라는 국가 정책에도 역행한다.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궁극적 목적은 자주국방이고, 핵심 목표는 국산화다. 첨단 방위산업의 핵심인 국내 항공산업 육성정책이 실행되어야 한다.

<최기일 | 건국대학교 방위사업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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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 샌더스 46대 미국 대통령 당선. 

비록 뉴햄프셔에서 간신히 득표수 1위를 했지만 나는 아직은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누가 강렬한 에너지와 팬덤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확장세는 약했지만 열정적 지지세가 강했던 트럼프도 예상을 깨고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비록 앞으로 기업주의 국가를 꿈꾸는 블룸버그 전 시장과의 혈투 등 변수가 너무 많지만 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의 든든한 기반이다. 

만약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진보 포퓰리즘 대 우파 포퓰리즘의 혈투가 될 것이다. 과거 뉴딜 진보주의 시대를 만들었던 루스벨트는 원래 블룸버그의 기업주의 제국 DNA에 더 가까웠다. 만약 샌더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뉴딜 시대에 일부 주 차원에서만 영향력이 있었던 사회민주주의가 행정부에서 전면 시도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1912년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자 후보였던 유진 뎁스, 1984년 사회민주주의자 후보였던 제시 잭슨의 오래된 꿈이 2020년 현실화되는 셈이다. 샌더스는 아직도 호주머니에 유진 뎁스의 열쇠고리를 지니고 다닌다.    

미국 진보 진영에 더 희망적인 사실은 현재만이 아니라 그 이후도 잡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바로 민주당의 미래를 상징하는 샛별인 알렉산드리아 코르테스 뉴욕 하원의원이다. 샌더스가 탄핵 심판으로 상원에서 발이 묶인 동안 그녀의 유세가 없었다면 샌더스는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 거칠고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그녀는 폭풍 성장 중이다. 샌더스 이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그녀가 바통을 이어받는다면 과거 뉴딜 시대보다 더 진보적인 뉴딜 2.0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나는 샌더스의 록 콘서트보다 더 뜨거운 유세장에서 자꾸만 백기완과 노회찬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군사독재 치하의 엄혹한 시절, 텔레비전에서 백기완 민중의당 후보의 사자후가 터져 나올 때 난 그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노동자 정당 추진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의 상기된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절제하는 그답지 않게 그날 노회찬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당시 백기완과 노회찬에 가슴 뛰던 나의 심장은 촛불과 문재인 현상에 온도가 데워지다가 최근 다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하지만 샌더스와 코르테스를 보면서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 머릿속에는 질문들이 스쳐 간다.  

한국의 심상정은 샌더스가 될 수 있을까? 수십 년간 등대처럼 우직하게 한자리를 지켜온 샌더스의 시간이 드디어 온 것처럼 노회찬과 함께 자리를 지켜온 심상정의 시간이 올 수 있을까? 다보스의 주류 엘리트들조차도 이야기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거버넌스)와 기후 비상 위기 대응을 촛불의 나라인 우리가 못할 이유란 무엇인가? 공존과 동등성, 그리고 인간존엄이 시대정신이라는 걸 <기생충>과 BTS가 걸출한 예술로 표현했다면 심상정을 비롯한 범진보 진영의 리더들은 담대한 정치로 증명해야 한다.       

한국의 다큐 영화감독 장혜영은 코르테스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코르테스와 장혜영의 열렬한 팬이다. 그들의 연설문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치열한 ‘진리 안에서의 삶’으로 뒷받침된 꿈틀거리는 언어다. 그들은 비록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어느 변호사보다 더 명료하게 사회의 위선과 문제를 드러낸다. 코르테스의 의회 청문회 영상과 장혜영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강연은 로스쿨 교재로 적당하다. 퇴조해가는 미국과 달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편하게 살아가길 거부한 장혜영과 범진보 진영의 넥스트 도전자들은 우리에게 상승하는 미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들은 BTS의 <봄날>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정치적 재현이다. 기존 리더들이 현재의 시간을 열어가고 이들이 미래의 시간으로 함께 떠나야 한다.  

물론 샌더스와 코르테스, 심상정과 장혜영과 같은 이들 앞에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난 며칠 전 종영된 <스토브리그>의 마지막 회 결말이 좀 아쉽다. 드라마는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누가 할지를 결론 내지 않고 시청자의 몫으로 남기며 애를 태운다. 정의로운 원칙에 입각해도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그 구단주의 꿈은 과연 실현되었을까? 그의 새로운 도전은 무엇일까? 너무 궁금해서 작가님에게 <스토브리그 시즌 2> 집필 청원운동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난 안다. 시즌 2는 우리가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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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oon 2020.03.18 0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의당은 분명히하라 표얻을려고 불법민주노총깡패들,불량노동집회자들 내세워부축여서 나라와국민위태롭게하지말라 지금의저의당보면 밥맛떨어진다

국내에서 29번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해 16일 격리조치됐다. 닷새 만에 새로 발생한 이 확진자에게는 종전의 환자와 다른 점이 있다. 82세의 고령인 이 환자는 지난해 12월 이후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는 데다 지금까지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과 접촉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관리하는 방역망 바깥에서 처음으로 환자가 나온 셈이다. 국내 감염자 9명이 퇴원하고, 중국에서 귀국한 교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등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던 참에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감염자가 나와 당혹스럽다. 

16일 코로나19의 국내 29번째 확진자가 다녀간 고려대 안암병원 응급실 입구에 방역을 위해 잠시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보건 당국이 29번째 확진자에 긴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당초 이 환자는 심장 질환으로 동네 병원 두 곳을 거쳐 고대안암병원 응급실에 왔다가 폐렴이 발견돼 코로나19 진단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았다. 감염원과 이미 접촉한 상태에서 선별진료도 받지 않은 채 병원 두 곳을 돌아다니다 큰 병원에 와서야, 그것도 다른 질환을 치료하던 중 우연히 감염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당국의 방역 관리망 바깥에 있는 원 감염자에 의해 바이러스가 옮았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또한 이는 원 감염자가 ‘무증상 감염’ 상태에서 지역사회에 머무르면서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켰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29번째 환자의 사례는 증상이 경미한 상태에서도 빠르게 전파되는 코로나19의 특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도 지역사회 감염이 시작됐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코로나19가 국제적으로 계속 창궐하는 것도 문제이다. 발병지 중국에서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둔화했다고 하지만 지역사회 유행은 지속되고 있다. 크루즈 내 집단 감염으로 방역에 실패한 일본에서도 감염자가 열도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15일 하루에만 도쿄에서 8명의 신규 환자가 나오는 등 홋카이도에서부터 오키나와까지 11개 지방자치단체에서 환자가 발생해 지역사회 감염이 시작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싱가포르에서도 지역사회 전파가 시작됐다.

방역 당국은 29번째 환자의 감염 경로를 신속히 규명하는 등 후속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이번 사례를 계기로 지역사회 감시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요양병원처럼 노인이나 환자 등 감염에 취약한 사람들이 있는 시설은 더 철저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개강을 앞두고 입국하는 7만여명의 중국 유학생에 대한 방역관리 대책도 확실히 마련해야 한다. 중국과 달리 일본 쪽으로는 하늘과 바닷길이 모두 열려있는 데다 출입국 통제도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바이러스 유입을 막을 꼼꼼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아직 코로나19에 대한 경계를 늦출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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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임시국회가 17일 막이 오른다. 교섭단체 대표연설, 대정부질문, 상임위·본회의가 이어지는 30일간의 일정이다. 4·15 총선 목전에 20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가 문을 여는 것이다. 정파 간 합종연횡도 일단락돼 2월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보수통합 신당), 바른미래당·대안신당·민주평화당이 합치는 민주통합당(가칭)의 3개 교섭단체 체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연말연초 패스트트랙 법안 충돌로 생긴 정치적 대치를 풀고 민생과 비전을 경쟁하는 총선 앞 마지막 입법 무대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2월 국회에선 ‘코로나19’ 대책부터 시급해졌다. 긴급 방역체계가 비교적 선방하고 확진자·집단격리자의 퇴원·퇴소가 줄 잇고 있지만, 감염병은 여전히 경각심을 풀 때가 아니다. 외려 관광객과 외출이 줄고 중국과의 무역도 위축되면서 경제와 민생은 2003년 사스 때보다 피해가 더 커질 것이란 ‘적색 예보’가 이어지고 있다. 감염병전문병원이나 공공격리시설이 부족한 민낯도 새로 드러났다. 늦었지만 모든 상임위에서 시민의 불안과 고통을 덜어주고, 장·단기 대비책도 살펴야 한다. ‘코로나19 대응 3법’인 검역법·감염병예방법·의료법 개정안 처리와 여야가 더 논의키로 한 국회 내 ‘코로나 대책 특위’ 구성도 서둘러야 한다. 상임위에 계류된 244개 민생·개혁 법안 처리도 2월 국회 몫이 됐다. 검찰 개혁 후속으로 자치경찰제·정보경찰 개편 작업을 담은 경찰개혁법, 고용노동부 시행규칙으로 땜질 처방부터 한 주 52시간제 보완 입법,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전자서명법같이 경제 활력을 높일 수 있는 입법도 20대 국회의 결자해지를 기다리고 있다. 의미가 결코 작지 않고, 초당적으로 챙길 법과 과제도 산적한 ‘마무리 국회’인 셈이다.

일말의 불안감도 없진 않다. 총선 앞의 입씨름은 벌써 시작됐다. 자유한국당이 ‘추미애 법무장관 탄핵소추안’과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여당이 ‘정치공세’로 일축하면서 2월 전운도 차오르고 있다. 내달 5일 본회의 처리만 기약해 놓은 선거구 획정은 인구 상·하한선 불씨를 품고 내연 중이다. 감염병 재난까지 덮친 때다. 십중팔구가 손가락질부터 하는 20대 국회 4년을 반성할 기회도 마지막이다. 이번 국회에서 보인 정당들의 행동은 그대로 총선에서 평가받을 터다. 적어도 2월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 ‘민생국회’였다는 총평과 유종지미를 거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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