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한 주 정부의 구성을 둘러싼, 예상치 못한 투표결과로 독일이 시끄럽다. 옛 동독지역에 속한 튀링겐주의 주지사를 선출하는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과 보수당인 ‘기민당’의 지원으로 소수당인 ‘자민당’ 후보가 제1당인 ‘좌익당’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극우정당이 이제 정치의 결정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는 충격은 1932년 선거에서 나치가 정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했던 악몽까지 떠올리게 하였다. 안팎의 강한 압력으로 당선자는 결국 자진해서 사퇴했고, 메르켈 총리의 후임자로서 차기 수상후보로 지목된 크람프카렌바워도 기민당의 당대표 직을 사임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극우정당이 과거 나치처럼 다시 독일정치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데 있지 않다. 통일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정치 상황이 과거 나치가 집권할 수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와는 다르게 안정상태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상실감에 시달리는 옛 동독 주민의 일반적 심리를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이변은 독일에서 기민당이나 사민당과 같은 전통적 ‘국민정당’이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른바 중도적 정치세력의 위기다. 동시에 이는 극우 포퓰리즘에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정치에서 이미 상수(常數)가 된 극우 ‘국민전선’은 마크롱이 시도하는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화된 사회적 갈등에 힘입어 현재 마크롱과 거의 비슷한 지지율을 얻고 있어 내년 초로 예견된 대통령선거에서 마린 르펜이 당선될 가능성은 커졌다. 2018년 1월부터 시작된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노란 조끼’의 격렬한 투쟁은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남긴 또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반동들의 지배력을 약화하기 위해 당시 혁명주도세력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억압했던 직종연합을 해체했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도 함께 약화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역설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해소가 쉽게 거리의 투쟁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역사적이거나 문화적 요소가 정치행태에 주는 영향력을 강조하는 정치문화의 대표적인 연구로 알몬드와 버바가 1960년대 초에 발표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멕시코에 관한 비교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 이른바 ‘참여형’의 정치문화를 염두에 둔 영미의 정치문화도 ‘브렉시트’를 둘러싼 혼란이나 트럼프의 등장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구화가 몰고 온 충격은 선진산업국 사이에 있었던 기존의 정치문화적 차이도 크게 좁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대의정치와 지배엘리트에 대한 불신, 사회경제적 낙오자는 물론 중산층의 불안과 불만, 이민자나 이주자에 대한 혐오, 민족주의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포퓰리즘은 이제 주로 남미에서 볼 수 있는 정치문화는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빛을 발한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를 시작으로 거의 전 남미에 번진 포퓰리즘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브라질의 룰라로 상징되었던 좌익 포퓰리즘이 왜곡된 경제구조와 빈부 격차의 혁파를 내세우고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극우적 성향을 띠고 있는 동유럽의 포퓰리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포퓰리즘의 증후는 그러나 동아시아의 정치문화권에서는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빈부 격차나 지배계급의 부정부패나 억압체제가 종종 국민의 강한 저항을 일으키고 정권교체도 가능했지만 오랜 권위주의, 연고주의나 지역주의의 전통이 오히려 포퓰리즘의 강한 집단주의에 기반을 둔 폭발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포퓰리즘은 우리말로 ‘대중(영합)주의’ 정도로 번역되지만, 이는 포퓰리즘의 전반적 내용에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민수주의(民粹主義)’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원래의 의미에 합당한 번역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로 ‘복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무책임하게 복지를 늘리는 정책은 ‘좌익 포퓰리즘’에 불과하며 이로 인해 한국도 머지않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 지난 몇 년간 복지를 위한 재정지출이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복지 분야의 지출은 OECD 국가 가운데 여전히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복지와 포퓰리즘을 연결하는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문화는 현재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구별할 수 없거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했던 과거의 수준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정책을 단순히 ‘빨갱이’의 정책으로 거칠게 내몰 수 없는 상황에서 복지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금폭탄’ ‘미래세대의 짐’ ‘공짜 복지’ ‘국가재정의 파탄’과 같은 선정적인 단어로 나열된 비판을 들을 때 나는 현재 힘을 받는 폴란드의 우익 포퓰리즘을 공격할 때 바웬사가 사용하는 같은 내용의 문구를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머지않아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복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열되겠지만 결국에는 내용 없는 공론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침몰하는 배의 난간에 겨우 매달린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정책이 복지 포퓰리즘으로만 계속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행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존엄을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지 않다”는 이탈리아의 신경과 의사며 인류학자 파올로 만테가차(1831~1910)가 남긴 말이 그래서 생각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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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불편하거나 두려운 장면이 있다. 힘센 집단이 개인을 곤궁에 빠뜨리는 장면이다. 화난 채 혹은 낄낄대며,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수군대며 왕따를 시킨다. 몸을 혹사시키고 기회에서 배제시킨다. 나는 큰 집단이 개인에게 겁주는 곳이 늘 싫었다. 그런 사회는 개인들이 집단 속에서 존재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곳은 공리적 이익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간섭하고 통제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름까지 돋으며 고통스럽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다. 과학, 사랑, 행복, 자유, 언어를 왜곡하고 개인마다 무력하게 위축시키는 집단의 광기를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어의 생성과 죽음, 말과 글을 통제하며 개인의 삶과 사회적 의사소통체제를 억압하는 과정에 호기심을 갖는 연구자에게 이 작품은 여러 고전 중에서도 최고일 것이다.

소설 <1984>에서 당(국가)은 ‘개인됨’을 허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언어’(New Speak)위원회는 사회구성원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간섭하며 심지어 외국어 공부조차 통제한다. 당은 “누구든 외국인들과 접촉하면 그들도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고, 그들에 대해 들어온 이야기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그가 살고 있는 폐쇄된 사회가 붕괴되고 사기의 밑바탕이 되었던 공포, 증오, 독선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렇다. 다른 말과 글을 보고 듣고 배우면 다른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독선의 집단이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의 언어사회는 어떤가? 이곳은 어떤 언어든 자유롭게 사용하고,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 아니었던가. 사무실, 식당, 회의장에서 내 언어를 침묵시키거나, 혹은 위선적인 말과 글로 살아가다 잠자리에 들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는 &lt;1984&gt;의 윈스턴이 우리 중에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텔레스크린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고백이 북한 사회에서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런데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칼럼을 썼다고 해당 신문사와 교수를 고발한 여당의 기세등등함을 보니 내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언어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는 언어를 구성한다. 그런데 힘이 센 어디선가 언어를 만드는 누군가를 손본다고 알려지면 개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누구든 위축된다. 내 위에 군림하는 부적절함에 대해 저항심을 갖기 부담스럽다. 불편하고 부적절하다고 적거나 말하는 것도 망설여진다. 윈스턴의 심문자인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개인은 유한하나 국가는 불멸”이라고. 그가 말한 국가는 사랑도, 미술도, 문학도 사라지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도 없어지는 곳이며, 권력을 향한 도취감, 승리감의 전율,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전체주의 사회였다. 이 나라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자. 그래도 신문 칼럼만으로 거대 정당이 화가 나서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목격하며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는 건 나만일까. 

정치담화에 재갈을 물린 곳에선 무엇이 허락되는가? 윈스턴이 관찰한 <1984>의 그곳은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맥주, 축구, 도박, 엉뚱한 곳을 겨냥하여 투정을 부리는 것”이 넘친다. 그곳은 결코 좋은 언어사회가 아니다.

<신동일 |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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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영화 <기생충>이 한국인을 행복하게 할 줄은 몰랐다. 오스카 시상식을 우리의 행사처럼 즐겼다. 감독과 제작진의 영예를 한국과 연관 짓는 것은 낡은 감정 같지만, 실제로도 좁게는 한국영화계, 넓게는 한국의 성과인 측면이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본질적으로 종합예술이다. <기생충>의 성취는 감독의 각별한 재능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으나, 감독의 예술적 역할이 더 중요한 유럽 영화제 수상과 오스카 수상에는 차이가 있다. 오스카 수상이 더 뛰어난 업적인 것은 아니나, 더 어려운 장벽을 넘어선 건 분명하다. 봉준호, 이창동, 박찬욱, 홍상수 감독 등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그것은 대체로 개인의 역량이 발휘된 결과다. 그러나 오스카 수상에 이르면, 한국영화계와 한국이라는 배경을 더 살펴야 한다. 

영화잡지 스크린의 아시아 편집자는 며칠 전 ‘다음번 외국어 오스카 수상자는 어디에서 나올까’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는 아시아 영화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국의 오스카 수상은 우연이 아니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 외국어 오스카 수상자는 유럽에서 나오거나, 할리우드와 자국 사이에서 편안히 작업할 수 있는 남미에서 나올 것으로 전망하며, 한국영화가 또 수상하지 않는 한 아시아는 아닐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어느 일본 평론가도 일본영화의 현실을 아쉬워하며 한국영화를 부러워하는 글을 썼다. 영화나 영화산업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부질없을 수 있지만, 한국영화는 이제 미국영화에 이어 가장 강력한 영화가 되었다. <기생충>의 이례적인 성과는 이런 토양에서 가능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월드컵에서 일회적으로 우승한 게 아니라, FIFA 랭킹에서 꾸준히 최상위에 랭크되다가 올 것이 온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창의성에 더하여, ‘표현의 자유’의 쟁취, 영화진흥위원회를 필두로 하는 공적인 지원체계, 산업 자체의 전문화와 고도화,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의 기여, 높은 식견의 관객이 어우러진 결과다. 작다고만 할 수 없는 자국 시장의 크기와 세계 유수의 경제력이 기본체력이 된 것은 당연하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중국은 자본, 이야기의 전통, 자국 시장의 크기로 보아 매우 유리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일본은 경제력과 문화적 자본이 두둑하나, 제작 시스템이 낙후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주춤하고 있다. 역동성이 떨어진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다른 대부분의 나라는 경제력, 자국 시장의 협소함, 문화적 이질성 또는 지체 등으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영화라는 매우 미묘하고 복합적인 그리고 정신적이고도 산업적인 산물의 경우에, 그 탁월함은 개인의 성취인 동시에, 영화계의 성취이며, 그 나라의 성숙과 분리될 수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양극화, 정치권에서 표류 중인 수직계열화 문제를 비롯한 불공정거래, 아직 개선 중인 스태프 처우, 패턴화된 장르영화의 양산 등은 한국영화계의 숙제다. 이 문제마저 지혜롭게 해결한다면 지구촌에서 한국영화의 위상과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다. 이미 여러 긍정적 조짐이 있고, <기생충>이 그 변곡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향후 20년 안에 한국영화가 아시아 어느 곳의 극장에서든 늘 상영되는 날이 도래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외부적 환경은 어떨까. 그 사회의 깊은 철학, 인간성에 대한 다층적 이해 없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은 불가능하다.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공공기관의 중립성과 효율성이 쇠퇴하면, 영화 생태계는 이내 망가질 수 있다. 정치적 혼란을 겪는 홍콩이 예전에 누린 영화의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세계적 배우가 갑자기 증발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중국에서 걸출한 영화가 등장할 수 있을까. 그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쓰레기장으로 변한 공론장’ 그리고 ‘무기력한 국가’는 큰 걱정이다. 세계 영화인이 사랑하는 부산영화제는 공적 탄압으로 순식간에 휘청거렸다. 영화만을 위해 민주주의와 생산적인 의사소통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한마디로 말해, 정치가 위태롭다. 정치의 역기능이 한국영화가 직면한 가장 큰 불확실성이고, 이 공동체를 옥죄는 가장 큰 위협이다.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인가.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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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본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국회에서 청년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자며 청년미래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청년 당사자들과 토론회를 연 적이 있다. 기회가 좋아 나도 참관했다. 결국 청년기본법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통과되었고 8월 시행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날 나는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을 조금 느꼈다. 청년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한 의원을 그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떻게 이 사회를 체감하는지,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 진지하게 입법권자에게 전달하러 온 청년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그 의원은 듣기도 부끄러운 본인의 성공 신화를 늘어놨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본인은 열심히, 좌절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국회 의원회관 한가운데 이렇게 앉아 있다고. 혹시나 청년들이 그 대단한 스토리에 졸지는 않을까 호통까지 치면서 말이다. 나를 비롯해 토론회를 참관한 청년활동가들은 이미 닳고 닳아 유머로 전락해버린 의원님의 ‘라떼는 말이야’ 신화에 작은 웃음 하나 짓지 않았다.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지금에야 꺼내놓는 이유는, 최근 이 사람이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로 1년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염동열 의원은 지지자 자녀 등 52명이 기재된 명단을 줘 강원랜드에 채용되도록 청탁했고, 재판부는 이 혐의를 인정했다. 청년미래특위가 출범했을 때, 염동열 의원은 이미 청년참여연대로부터 채용청탁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였다. 청년문제를 해결하자는 자리에서 과거 경험을 들먹이며 청년에게 호통을 친 것도 우습지만, 애초에 청년에게 박탈감을 안겨준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부터 말이 안됐다. 그리고 며칠 전 이보다 더 좌절스러운 뉴스를 들었다. 청년참여연대가 염동열과 함께 고발한 권성동의 무죄 선고 뉴스다.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를 받는 권성동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5일 전의 일이다.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혐의를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맥이 빠지는 건 법의 테두리로 채용청탁을 처벌할 수 없어서다. 사실 고발 내용도 채용청탁이 아니었다. 채용청탁이라는 처벌 사유는 없다. 청년과 강릉 시민의 박탈감을, 업무방해 및 직권남용 혐의 고발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채용비리를 근절하고 채용절차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대안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 아무리 학교 이름을 가리고, 부모님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이미 ‘세습 중산층’ 사회가 된 이곳에서 지원자의 삶의 경력은 좋은 지연과 정보를 가진 부모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처벌받길 원했다. 지금껏 인맥을 이용하는 행위는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게시간, 출퇴근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며, 월급이 안 밀리는 것이 다행이거나, 재계약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삶.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산재를 증명하기 어려운 노동도 허다하다. 그렇게 일해도 내 몸 누일 방 하나 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 하나를 가지면 그다음을 보장받는다. 인맥을 이용한 ‘중산층 세습’은 우리 사회에서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누구나 해온 일이다.

KT에 딸의 채용을 청탁한 의혹을 받는 김성태 의원은 “딸에게 파견 계약직을 권하는 아버지가 몇이나 있냐”고 말했다. 파견 계약직 노동의 불안을 알고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건 이것을 논거로 채용청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자리를 갖더라도 좋은 삶, 안정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청년은 삶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언제까지 경쟁하고, 평등하지 않은 공정 아래 내일을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 법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오늘도 정의는 지연되고 있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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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다시 3월, 새 학기를 앞두고 학교는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졸업식을 제대로 못한 학교들도 많고 대학들은 입학식과 개강을 연기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낮과 밤이 반복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처럼 우리의 삶도 새로운 시작과 마침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일종의 질서를 부여했음을 깨닫는다.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의 질서도 예측불허이고 우리의 삶의 조건들도 예측하기 어려워져간다. 남부지방은 겨울 내내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더니 3월을 앞두고 눈이 내린다. 동백과 매화는 이미 피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봄에 황사는 얼마나 심할지 걱정이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문제투성이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제기하는 사람은 많으나 해결을 위해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작년 도덕과 환경 문제에 관한 단원 수업을 하며 내적 갈등이 심했다. 지행합일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직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실천 영역으로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이면지 사용,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을 내놓는데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함을 알지만 작은 불편들을 감수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가끔 죄책감을 느끼며 내 양심이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거나, ‘남들도 다 그러는데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거나 강력한 정책을 내놓지 않는 정부를 탓하며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었다. 

이제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생수를 사거나 정수기를 들여야 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돈을 내고 공기청정기를 들여야 한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기 위해 먼 나라로 여행이라도 가야 하게 생겼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던 것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등을 얻기 위해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많은 걸 희생하면서 결국 그 돈으로 사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들이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새 학기를 앞두고 연간 수업을 계획하면서 가르칠 교과에 대해 고민하며 배움이 생생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책 속에만 머물고 있는 지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배움이 삶 속에 살아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우리가 배운 대로 실천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까? 모두가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라 말하지만 그러한 불일치가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를 혼란 속에 빠트리는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간디가 자서전의 제목을 <나의 진리 실험>이라고 했듯이 진리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행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기에 올해는 ‘작은 진리 실험’을 시작해봐야겠다.

<손연일 월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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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빨강색으로 쓰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붉은색으로 쓰면 기겁을 한다.

하지만 이는 정말 웃기는 얘기다.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북한에도 그런 미신은 없다. 북한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의 지도자 이름을 산하 곳곳에 붉은 글씨로 써 놓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붉은 글씨로 이름을 쓰는 것은 무척 싫어하면서도 도장으로 찍는 이름은 다들 붉은색이다.

사실 우리는 예부터 붉은색을 길한 색으로 여겨왔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은 ‘붉은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믿음 때문이고, 조선시대 왕들이 붉은색 용포를 입은 것도 붉은색의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함이었다. 전통혼례에서 신부의 양볼에 연지를 찍고 이마에 곤지를 찍는 것 역시 액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 위함이며, 오늘날 복을 바라며 쓰는 부적도 온통 붉은색이다.

그건 그렇고, 저 앞의 ‘빨강색’은 ‘빨간색’이 바른 표기다. ‘빨강’에 이미 ‘빨간색’의 의미가 들어 있다. 검정색·파랑색·노랑색도 검은색·파란색·노란색이 바른말이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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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은 지난달 29일자에 임미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칼럼을 게재했다. 임 교수는 ‘민주당만 빼고’라는 제목으로 “4·15 총선에서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5일 이 칼럼이 사전선거운동이라며 임 교수와 경향신문을 공직선거법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민주당은 비난여론이 이어지자 고발을 취하했지만 임 교수의 과거 이력을 문제 삼아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앞서 언론중재위 산하 선거기사심의위원회는 해당 칼럼을 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선거법은 선거운동기간 외에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임 교수의 칼럼은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반대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신상을 캐고 중앙선관위에 고발까지 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를 맞으며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기본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공동체 구성원이 가지는 근원적 권리다. 이를 토대로 개인은 개성을 발휘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더 나아가 민주사회로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헌법학자 허영은 ‘도덕적으로 필요한 생명의 공기를 공급해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전제군주에 의한 속박이라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종지부를 찍은 프랑스대혁명이 인권선언에서 표현의 자유를 천명한 것은 그것이 ‘숨쉬는 공기’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1791년 미국 헌법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명문화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헌법상 시민의 권리로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폭넓게 인정되며 제한은 개인의 인격권과 충돌하는 경우 등 일부에 국한된다.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공공적·사회적·객관적인 의미를 가진 정보라면 광범위하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칼럼과 관련해 언론중재위 산하 선거기사심의위 결정을 근거로 표현의 자유와 선거법 위반은 별개라고 주장한다. “선거법위반과 표현의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기자들에게 저널리즘은 사치”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서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이다.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가 하위법인 선거법에 우선한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경향신문은 필자의 원고를 원문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목도 마찬가지다. 이는 글을 쓰는 이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다.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자유의 확대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대한민국 출범 이후 권위주의시대와 민주주의시대가 엇갈리면서 언론의 자유도 위축되거나 확장됐다. 무리하게 언론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역사는 보여준다. 60년 전 이승만 정권이 경향신문 폐간을 결정한 바 있다. 1959년 2월4일 실린 소칼럼 여적(餘滴)의 내용이 단초였다. 여적은 다수결의 원칙과 공명 선거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한국의 현실에서 강압 없이 다수의 의사를 공정히 반영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선거가 이런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폭력 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쓴 것이다. 이 칼럼으로 필자인 주요한과 사장 한창우가 기소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 칼럼을 비롯한 일련의 기사에 대해 허위보도, 폭력선동 등을 폐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는 허울일 뿐 경향신문이 노골적인 대정부 비판기사를 게재해온 데 따른 것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폐간결정 1년여 만인 4월26일 대법원이 ‘발행허가정지의 행정처분집행 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경향신문은 복간됐다. 이 사건은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 탄압 사건이다.

언론 자유의 길은 평탄하지 않다. 4·19혁명 헌법에서 넓어진 언론 출판의 자유는 1972년 유신헌법, 1980년 5공화국에서는 언론기본법으로 위축됐다.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됐지만 언론의 자유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정권들마다 언론장악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60년 전처럼 지금도 선거 관련 보도가 문제가 됐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이 정당하다면, 민주주의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맞다면 언론 자유의 확대는 우리가 가야 할 미래다.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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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빙하가 해마다 줄어든다고 한다. 터전을 잃고 몸이 홀쭉해진 북극곰 사진을  보았다. 먹이를 찾아 홀로 방황하는 흰곰. 점점 줄어드는 빙하의 면적이 곰의 발목을 점점 올가미처럼 죄는 것 같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그 처지를 한반도에도 적용시켜 본다. 겨울에도 적설량, 눈 오는 일수가 적어진다. 무엇보다도 눈 쌓인 면적이 졸아든다. 강원도로 가서야 겨우 제대로 된 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다간 나의 겨울 정신도 북극곰의 육체처럼 핼쑥해지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

퍽이나 다행스럽게 최근 눈 소식이 들렸다. 심설산행을 도모하러 백두대간의 마산봉-대간령 구간을 걸었다. 진부령 입구 흘리에서 스패치, 아이젠을 착용하는데 모처럼 쓸모를 만난 장비들이 덩달아 흥분하는 것 같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을 천왕봉에서 출발했더라면 여기는 마지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구간이다. 마산봉 조금 지나 병풍바위에 이르니 눈앞이 장관이다. 멀리 아득한 곳에 원시의 바깥으로 넘어가는 입구처럼 향로봉이 아스랗다. 겨울을 앓는 산하가 붕대라도 감은 듯 전모가 훤히 드러난다. 시린 눈을 달래며 시선을 돌리면 털진달래 옆에 따뜻한 안내판이 있다. “(…) 봄이면 주위로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피어나고 여름이면 산의 푸름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고 병풍바위와 산의 아름다운 조화를 느낄 수 있다.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과 운해가 산에 끼면 마치 산 전체가 단풍으로 물들어 훨훨 타다가 연기를 뿜어 올리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적 드문 한겨울 산중에서 문자로나마 봄, 여름, 가을을 만나 얼었던 마음의 한 조각을 데웠다. 털진달래는 주로 고산지대에 살고 잎에 털이 많다. 꽃보다 먼저 잎을 틔울 준비를 하며 묵묵히 겨울을 견디는 털진달래. 바위틈에 야물게 어울린 털진달래 위로 눈이 내린다. 눈은 공중을 꼬집으며 내려와 차렷! 자세로 선다. 하늘이 평소 무어라 말은 안 하지만 이렇게 가끔 부드러운 말씀도 내려주는 것. 털진달래 위로 쌓이는 무언의 흰 말씀을 오래오래 경청했다. 털진달래, 진달래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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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에서 1666년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던 해였다. 런던 인구의 4분의 1이 전염병으로 죽어 나간 절망의 해였다. 23세 청년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은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뉴턴은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원리를 수식으로 표현해냈다. 이제 지구상의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동일한 보편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갈릴레오는 피사의사탑에서 무거운 공이 가벼운 공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실험으로 뒤집었지만, 이제 뉴턴은 갈릴레오의 관찰이 필연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천체의 운동을 다루려니 가장 큰 문제가 수학적 도구의 부족이었다. 이때까지의 수학은 정적이어서 ‘움직이는 세계’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못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통감한 이 청년은 결국 천체의 운동을 다루기 위해 미분과 적분의 개념을 창안해냈다. 인류 역사에 ‘동적 세계관의 출현’이라고 기록될 만한 대사건이다.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뉴턴은 국가 재난 사태에 따른 휴교령으로 고향에서 지내게 됐다. 평범한 젊은이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휴식의 한 해가 문명사를 바꾼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관찰하는 ‘낮과 밤’ ‘월식과 일식’ ‘계절의 변화’를 뉴턴의 이론은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문제들이 지속해서 나타났다. 다자관계의 복잡함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단둘만 있는 양자관계의 단순함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태양과 행성 하나만 있다면 행성의 경로는 타원이어야 하지만, 행성이 여럿 있다 보니 자기들끼리 끌어당기는 힘까지 생겨서 완벽한 타원을 망가트린다. 태양과 지구와 달의 삼각관계도 비슷해서 양자관계의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18세기의 수학자인 라그랑주가 수학적 천재성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눈에 보이는 달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도, 지구의 자전축이 흔들리는 것도, 춘분점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그는 뉴턴의 이론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사후 설명하는 것만 가지고 방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과학을 후원하기는 힘들다. 경험하고 관찰한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니 참 용하다 싶지만, 그래봤자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현상 아닌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일을 미리 알게 해주는 힘이야말로 마법 같은 일 아닌가. 

물론 뉴턴의 이론은 예언의 힘도 가졌음이 입증됐다. 18세기에 인류는 천왕성까지 7개의 행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천왕성의 움직임에 설명할 수 없는 변이가 관측됐다. 그래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행성이 천왕성 밖에 있을 거라는 가설이 생겨났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애덤스와 르베리에는 관찰된 불규칙성을 토대로 가상의 행성의 궤도를 계산했다. 그들이 맞는다면, 수학적으로 계산된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그 행성은 나타나야 한다. 망원경으로 무장한 관찰자들은 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해왕성을 발견한 것이다. 무작위적인 관찰이 아닌, ‘기획된 발견’이었다. 끝없는 모래사장에서 특정한 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위치를 미리 알고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언에 가까운 이런 일은 이제 일상에 가깝다. 수백년 전에 나타난 핼리혜성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다음번 출현 시기를 ‘예언’할 수 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 얼마만큼의 연료를 탑재하고 어떤 속도로 출발시켜야 하는지 우리는 미리 안다. 

과학적 이론의 힘은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언의 힘으로 미지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수학적 필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왕성의 발견은, 관측 기술의 진보 때문이 아닌, 수학적 필연의 결과였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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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운데)가 17일 국회에서 신당 출범식 직후 열린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신임 최고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 등 보수진영 정치세력이 한데로 뭉친 미래통합당이 17일 공식 출범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로 새누리당이 갈라져 분열을 거듭하다 3년여 만에 불완전하나마 보수통합의 닻을 올린 것이다. 전진당과 재야에 포진한 친이명박계, 옛 안철수계 인사, 일부 청년정당 등 다른 정파가 참여하기는 했으나 큰 틀에선 한국당과 새보수당이 결합해 탄핵 이전의 새누리당을 복원한 모양새다. 미래통합당 지도부부터 황교안 대표 등 한국당 최고위원 8명을 비롯해 옛 새누리당 출신 인사들로 절대 다수가 채워졌다. 총선 공천관리위원회 역시 한국당 김형오 위원장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났다. 당초 통합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시민사회단체 측이 전원 탈퇴한 것도 이런 지도부 구성의 문제 때문이었다. 신당은 모름지기 새로운 지도부와 공천관리위원회 구성 등을 통해 가치와 쇄신의 지향점을 보여줘야 한다. 

애초 유승민 의원이 내건 ‘보수 재건 3원칙’을 수용했다고는 하나 새집을 짓는 외양만 갖췄을 뿐, ‘탄핵의 강을 건너고 개혁보수로 나간다’는 원칙은 충분한 논의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터다. 새로운 가치와 비전은 빠진 채 총선을 앞두고 ‘반문재인’ 세력의 단일대오 구축에만 매몰된 탓에 미래통합당이 간판만 바꾼 한국당의 확대 복사판으로 비치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지리멸렬한 보수진영을 통합해 ‘정권 견제’의 전열을 정비하고 나름 보수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는 있겠으나, 거기까지다. 뼈를 깎는 자기 반성과 혁신이 수반되지 않은 ‘반문’ 깃발만 앞세운 통합으론 잃어버린 보수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미래통합당이 탄핵을 불러온 ‘도로 새누리당’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우선 잘못된 정치관행과 결별하고, 과감한 자기 쇄신과 혁신을 보여줘야 한다. 당장 새로운 보수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첩경은 총선 공천에서 물고기가 아니라 물을 교체하는 수준의 혁신적 물갈이다. 꼴통수구를 대변하고, 구태 정치를 지탱해온 기득권 세력을 배제하고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인물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개혁 공천이 바로미터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인적 구성으로는 새로운 보수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정권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에 안주, 혁신은 시늉에 그치고 결국은 기득권 지키기로 귀결되면 미래통합당은 명멸해간 선거용 ‘급조 정당’의 전철을 되밟을 것이다. 보수통합의 기치에 걸맞은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자유한국당에 ‘자유’가 없었듯 미래통합당에는 ‘미래’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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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기재부·산업부·중기부·금융위 업무보고에 참석.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기획재정부 등 4개 경제부처 합동 업무보고에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민생과 경제” 그리고 “실천”을 강조했다. 준비된 정책들을 꼼꼼하게 실천하고, 그 결과를 국민 모두가 체감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해선 “비상하고 엄중한 상황”이라며 “정부가 최선을 다할 테니 국민들도 과도한 불안·공포에서 벗어나 적극 소비에 나서달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삶이 더 팍팍해졌다”는 국민의 호소에 ‘국민 체감 민생·경제’로 응답하고, 코로나19에 대해선 의연한 대처를 당부한 것이다. 

4개 경제부처 업무보고를 관통하는 주제는 경기 반등과 성장, 포용이다. 100조원의 민간·공공투자, 내수·수출 활성화, 정부재정 62% 상반기 집행 등을 통해 경기 반등을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성장을 위해 데이터·바이오 등 신산업을 육성하면서 반도체·자동차 등 기존산업과 소재·부품·장비사업, 서비스산업 경쟁력은 더 키우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규제는 낮추고, 신·구산업 간 갈등 해소를 위한 ‘한걸음 모델’을 구축하기로 했다. 혁신성장을 위한 인프라 확충에 예산·세제·금융·기술·인력 등 모든 분야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성장의 결과가 일자리 증대, 사회안전망 강화, 취약계층 소득기반 확충으로 이어지도록 할 계획이다.

문제는 대통령의 주문대로 ‘국민 체감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업무보고서에 정부는 지난 한 해에 대해 ‘선진국에 비해 양호한 경제성장률’ ‘고용률과 국가신용도, 외환보유액 역대 최대·최고’ 등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국민 다수가 이런 평가에 공감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등 ‘화석화된 나쁜 지표들’은 현 정부 역시 극복하지 못했다. 정부 통계와 여러 설문조사만 봐도 청년 체감고용률은 더 나빠졌고, 40대 고용률은 51개월째 감소 중이다. 직장인 절반 가까이가 번 돈보다 지출이 더 많고, 자영업자의 성장은 정체된 상태다. 코로나19사태는 대통령조차 ‘단기불황의 원인’으로 지목할 정도로 서민 삶을 옥죄고 있다. 그런데 올해 경제정책에서 ‘공정경제와 소득주도성장’은 제외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났다. ‘국민 모두가 체감하는 민생과 경제’를 이뤄내려면 혁신 성장하되 기회는 평등하고, 그 과정 역시 공정해야 함을 정책 당국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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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료원 박현경 응급의료센터장이 13일 응급실 구석구석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상황실 모니터 앞에서 응급의료센터 운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지난달 20일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환자가 발생한 이후 한 달이 되어간다. 지금까지의 방역 대책은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확진자가 30명 발생했지만 10명이 완치돼 퇴원하면서 초기의 불안과 공포는 누그러들고 있다. ‘선방’의 배경으로 선별진료소가 한 축을 담당했다. 정부가 선별진료소를 발빠르게 지정해 감염증 의심증상자와 일반 환자를 나눠 검사하고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관리한 것이다. 최근 이틀간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데다 확진자와 접촉한 과정도 특정할 수 없는 29, 30번 환자가 확진되며 지역사회 감염 확산 우려가 싹트고 있는 상황이기에, 선별진료 기능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응급실 전체를 선별진료소로 변경해 선제적으로 대응한 서울의료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향신문의 현장취재에 의하면, 서울시가 설립한 공공병원인 서울의료원은 지난달 31일 응급실 전체를 선별진료센터로 바꿨다. 응급실 침상을 25개에서 9개로 줄여 간격을 넓히고, 곳곳에 음압장치를 설치해 격리병동처럼 만들었다. 의사 12명과 간호진이 방호복을 입고 3~4시간마다 교대하며 집중적으로 의심증상자들을 검사하고 선별한다. 응급실 앞에 컨테이너나 텐트 한두개로 마련한 대부분의 다른 선별진료소들은 검사받고 있는 환자가 있으면 다른 환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등 환경이 열악한 탓에 일반 환자들과 섞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고 한다. 

서울의료원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그동안 환자치료를 위한 음압병상에 대한 투자를 많이 했다면 이젠 선별진료소 마련이 절실하다고 했다. 지역사회가 뚫리고, 감염병이 퍼져나갈 경우에는 이런 형태(서울의료원)의 선별진료소가 필요하다며, 지역별로 거점병원이 담당해야 한다고도 제안했다. 아울러 지역감염 확산에 대비해 공공병원에서 환자를 소화할 수 없게 되면 큰 병원들이 환자를 나눠 맡는 ‘공동체성’과 병원 규모별 역할분담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경을 넘는 글로벌 감염병의 위험은 앞으로도 상존한다.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2020년 코로나19 등 실제로도 5~6년 주기로 신종 감염병이 계속 출현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공의료체계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욱 커지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높은 공공의료체계와 감염병 대응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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