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4년 전 초여름, 중국 복건성 북부에 위치한 무이산 구곡계에 갔었다. 죽벌을 타고 구곡계를 미끄러지듯이 내려오기도 했으며, 천유봉에 올라 뱀처럼 구불거리는 물길과 조화롭게 솟아오른 바위 봉우리들을 즐겼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그곳에 간 까닭은 주희(1130~1200)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사람은 서하객으로 널리 알려진 서홍조(1586~1641)였다. 

2011년 가을에 <서하객유기>가 완역되어 출간되었고 그때는 내가 큰 수술을 마치고 정양을 할 때였다. 두어 달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무료했던 시간에 그 책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꿈을 키웠으니 내게는 그 어떤 신약보다 좋은 약과 같은 책이었다. 

3년 후, 몸이 안정을 되찾자 대뜸 서홍조가 남긴 유기 중 후반부 3분의 1을 차지하는 운남으로 향했다. 리장에서 소수민족들을 찾아 사진을 찍으며 함께 춤을 추고 놀기도 하고 발병이 나서 꼼짝 못한 서홍조를 돌보아 집으로 갈 수 있게 도와준 나시족들의 문자인 동파문자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닳고 닳아서 반질거리는 리장의 골목길을 걷다가 나를 다시 세상으로 나서게 해 준 서홍조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어떤 여행기를 보고도 리장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유기를 제대로 읽자마자 불쑥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리학자로 알려졌지만 탐사와 탐험에 가까운 그의 글은 굉장했다. 고대사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는 물론 뜻밖에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민속이나 풍속과 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지식이 방대했다는 것이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안목이었다. 그 지식과 안목이 빚어낸 그의 사상은 더욱 굉장하여 만약 그 어떠한 경계가 있다면 그곳 너머에 서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가 갔던 길은 용기가 없다면 결코 나설 수 없는 길이며, 스스로 낸 용기 덕분에 그는 경계 너머로 향하는 길을 거침없이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운남에서 또 한 사람이 기존의 삶을 접고 새로운 꿈을 펼쳤다. 그는 호를 탁오로 쓴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양명학자인 이지(1527~1602)다. 전국을 떠돌며 벼슬살이를 하던 그는 1576년 운남에 부임하여 1580년에 임기가 다했다. 유임해 주기를 요청받았지만 굳이 사양하고 운남을 떠돌며 여행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관직으로 중국을 떠돌고, 운남에서 벼슬을 던지고부터는 호북성 마성과 황안을 시작으로 무창과 용호까지 거처를 옮기며 또다시 떠돌았다. 그리고 1596년부터는 산서성을 거쳐 북경으로 올라갔다가 배를 타고 대운하를 이용하여 남경으로 가서 지불원이라는 사찰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지불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북경 근처 통주로 갔다가 감옥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기존 관료들이 그가 세상에 펼쳐 놓은 생각이 혹세무민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운남에 부임하던 해인 1576년에 말한다. 지난 50년의 인생이 한 마리 개와 다를 바 없었다고 말이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갑자기 짖어대자 뒤에 있던 개는 영문도 모른 채 같이 짖었다는 이야기다. 앞에 먼저 짖은 개는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이고 덩달아 짖은 개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곤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공자를 배웠으나 정작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 말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무엇이 존경할 만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뿐일까. 공자와 맹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내놓은 이지는 앞에 말한 구곡계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살았던 주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이지는 성리학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양명학을 취하였으며 불교와 도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성리학의 세상이었는데 이처럼 대놓고 싸움을 건 셈이었으니 어찌 그가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서홍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무이산일기>에서 제5곡의 자양서원을 찾았지만 주희에 대한 찬탄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당에 배알했다’는 짧은 문장으로 방문의 소회를 대신했을 뿐이다. 전통사회 지식인의 일원이었던 그로서는 주희를 모른 체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의 관심은 오히려 제4곡과 3곡 사이 홍교판이나 가학선관과 같은 애묘에 가 있었다. 주희와 애묘는 아무리 해도 서로 엮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므로 어쩌면 그 행간에는 주희를 부정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이지와 서홍조는 기존 성리학에 젖어 있던 이들과는 달랐다. 이지가 성인이라는 이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며 강대강으로 맞부딪쳤다면 진취적이며 개방적이었던 서홍조는 낡은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성리학자들과 맞부딪치지 않았다. 전통적 지식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출사를 포기하고 길거리로 나섰다는 것 자체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찾아다녔던 소수민족이나 사대부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민중들의 생활 풍습이나 민속에 관한 기록에 몰두한 것 또한 전통사회 지식인에 대한 이의제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지인과 영산강 답사를 다녀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확장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했다. 인간이란 컴퓨터의 기능이나 성능을 확장할 수 있는 슬롯과 같은 것을 무한대로 지니고 있다. 그곳에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칩을 꽂으면 더 이상 넓어지거나 깊어지지 못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의 칩을 꽂는 순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존 사회질서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조금씩 넓어져 가고 아름다워진다. 당신은 무엇과 다른가!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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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평등과 공평의 차이를 설명하는 그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떠돌며 공감을 얻었다. 세 사람이 담 너머로 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키가 담 높이보다 큰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같은 높이의 받침대에 올라서니 두 사람은 경기를 관람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경기를 볼 수 없다. 받침대 없이도 경기를 볼 수 있는 사람 대신 키가 가장 작은 사람에게 받침대 두 개를 받쳐주니 비로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이 그림 하나로 많은 사람이 공평의 의미를 쉽게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 친구가 위의 그림에 한 컷이 더해진 그림을 보내왔다.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경기를 관람하고, 다른 이는 그가 마실 음료와 간식을 받쳐 들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를 풍자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씁쓸하게도 우리의 학교를 떠올렸다. 노동시간으로 따지자면 과로사 기준인 주당 60시간이 넘는 시간을 학습하며 경쟁하는 탓에, 이긴 사람이 혼자 독식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성적이든 일자리든 너무나 힘들게 얻은 성과라 진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내가 낙오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기 쉽다.

교육은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교육에 공평보다 공정이라는 잣대를 먼저 들이민다. 부모의 경제적 자산뿐 아니라 사회적 인맥과 문화적 소양이 이미 공정하지 않은데 말이다. 똑같이 가르쳐야 공정하고, 순위를 공정하게 정해 선발하는 것에만 집중하니 교육이 오히려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고 있다. 개천에서 난 용은 개천을 돌보기는커녕 개천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사교육 도움 없이는 용이 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다. 이런 차이를 메우려면 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경제적 불평등을 다룬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에 이어 아카데미에서 수상했다. 영화는 부자에게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충(벌레)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불합리하게 여겨 없앴다고 생각한 신분이 다시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불평등 해소라는 사회적 요구를 낳고 있다. 

공평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교육정책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되었다. 하지만 제시된 해결방안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71개 교육시민단체가 4·15 총선을 앞두고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시행할 교육정책을 온라인 국민투표로 정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이 투표로 정한 교육과제를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내밀어 21대 국회에서는 꼭 실행하도록 정책협약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의 참여가 필요하다. 코로나19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한다. 온라인 국민투표를 홍보하기도 어렵다. 4·15 총선 교육공약 선정 온라인 국민투표는 http://edu415.net에서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교육공약 선정 홍보대사가 되어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한 한 걸음을 함께 내딛기를 요청한다.

<변춘희 | 교육단체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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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림책이니까.” 책읽기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께서 집 주소를 여쭤보더니 엊그제 책을 한 권 부치셨다. 선생님 친구분이 펴냈는데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 1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어서 여기저기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포를 열어보니 유현미 작가의 그림책 <마음은 파도친다>(도서출판 가지)였다. ‘지구를 닮은 얼씨 드로잉(Earthy Drawing)’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가 낯설어서 프로필부터 살폈더니 미술치료를 공부하다 우연찮게 그림에 빠졌다고 한다. 작가는 구순인 아버지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함께 그림책을 만들고 촛불집회를 기록한 그림책도 펴냈다. 개인전과 원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작가는 머리말에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로 태어난다”라고 썼다. 그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작가의 아버지였다. 평생 농사를 지은 구순 노인은 뒤늦게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적 자아를 발견했다. 작가는 쪼그려 앉아 꽃그림을 그리는 아버지에게서 “인간이란 존재의 경이로움”을 목격했다고 한다. 인간은 ‘잘 놀’ 때, 예컨대 그림을 그릴 때 자기표현의 기쁨, 자유와 해방감,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에 이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가 관찰한 대상은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것들이다. 해남 할머니들이 국에 넣어 먹는 엉겅퀴, 바람 부는 쪽으로 휜 소나무, 인수봉을 지키는 털북숭이 개, 마을 하천에 찾아든 민물가마우지, 지하철에서 마주친 장삼이사들, 그림에 집중하는 늙은 아버지, 세월호 유가족, 광화문 촛불집회 등등. 

그런데 내가 글쟁이여서 그런지 그림보다 글이 눈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가령 벌레에게 뜯어 먹힌 플라타너스 잎사귀 그림 옆에다 “장엄하다”라고 쓴다든지, “사방이 시여서 아무 시도 써지지 않는 곡성 산골마을 별똥이네” 같은 대목과 마주치면 작가가 왜 ‘지구를 닮은 드로잉’이라고 밝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구의 마음’은 지하철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잠든 여성을 보고 안쓰러워하거나, 구걸하는 노인에게 선뜻 지폐를 건네는 동남아 청년에게 보내는 박수로 번진다. 책을 덮고 나니 작가의 마음씨가 그려졌다. 올바르면서도 따뜻하고, 정확하면서도 너그러울 것 같은.

선물로 받은 책이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또 있다. 이 그림책이 내 오랜 버킷리스트를 되찾아줬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배워 그림책 한 권을 내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손때가 묻었던 수채화 붓과 대학교 때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스케치북이며 목탄, 4B 연필이 못내 잊혀지지 않았다. 5년 전인가 드로잉 관련 책을 서너 권 구해놓고는 열어보지 못했다. 독학은 어려울 것 같아 미술학원에 등록할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보니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던 버킷리스트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희곡 쓰기와 연극 연출, 대륙횡단 트럭 운전사, 실크로드 도보여행, 사막에서 밤하늘 별 보기, 사시사철 꽃이 피는 마을 만들기 등등. 이제 남은 목록이 몇 안 된다. 그림책을 한 권 펴내는 것이 내밀한 꿈이라면 공적 의미를 갖는 꿈도 있다. 전환 설계, 즉 더 나은 미래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뜻 맞는 이들과 어울려 예술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시민 스스로 자기표현 욕구를 찾아내고 그것을 함께 키워나가는 열린 예술학교. 

유현미 작가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대다수가 사회적 압력과 경제적 공포에 짓눌려 자기 안의 표현 욕구를 억누른다. 놀이로서의 예술을 한가한 사치로 치부하거나 은퇴 이후로 미룬다. <마음은 파도친다>가 증명하듯이 생의 후반부에라도 예술과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남녀노소를 구분할 필요도 없다. 하버드대에서 진행한 예술교육 프로그램 ‘프로젝트 제로’에 따르면, 예술은 자기해방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응력을 높여준다. 창의성과 관계 맺기 능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꿈을 이루는 비결은 단순하다. 꿈을 가질 것, 그 꿈을 구체화할 것, 그리고 절대 잊지 말 것. 우리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꿈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비결도 다르지 않다.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 버킷리스트는 또 다른 기도다. 매번 절실해서 새로운 ‘오래된 기도’.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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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유독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스물다섯 살의 도혜가 쓴 글이다. 

아직 한 번도 알바를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도혜였다. 도혜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그의 친구 윤이는 달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이미 여러 알바를 해본 아이였다. 그들의 동네가 관광지로 뜨기 시작하여 곳곳에 알바 자리가 생겨나던 2014년 무렵이었다. 방과 후에 윤이는 다양한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다. 자신의 용돈을 직접 벌고 전기료와 난방비도 직접 내야 하는 사정이 윤이에겐 있었다. 도혜의 반에서 그런 친구는 윤이뿐이었다. 쉬는 날이면 윤이는 자신의 가난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파티를 하곤 했다. 도혜는 자신이 모르는 슬픔과 낭만을 아는 듯한 윤이의 모습을 남몰래 동경했다. 당시 윤이는 갈빗집 알바와 중국집 알바를 병행했는데 하루는 갈빗집 알바가 길어지는 바람에 중국집 알바 대타가 필요해졌다. 급하게 대타를 찾느라 난처해진 윤이에게 도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대신 출근하겠다고 자처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윤이보다 어리숙한 자기 모습을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도혜는 자신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과 그들로부터 별 어려움 없이 용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게 부끄러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게 없는 것 말고 내게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경험 말이다. 염치 때문에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혜는 가장 아끼는 보라색 맨투맨 티를 입고 윤이가 일하는 중국집 문을 열어젖혔다. 말끔하고 호감 가는 일꾼으로 보이기 위해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옷이었다. 그걸 입고 몇 시간을 일했다. 퇴근할 무렵엔 옷소매에 짜장면 소스와 짬뽕 국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의 대타로 뛰는 첫 알바 날에 가장 아끼는 티셔츠를 골라 입는 도혜의 마음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다. 윤이 덕분에 도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있음’이 부끄러워졌다. 결여된 것들을 통해 윤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일찌감치 배웠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적힌 문장에 따르면 욕망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지만 사랑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해진다. 도혜가 윤이를 좋아하다가 자신이 무엇에 서툰지 알아가게 되는 과정처럼 말이다. 어떤 사랑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기보다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끈다. 

열아홉 살의 도혜는 스스로가 미덥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윤이의 일터에서 일한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너처럼 빛나는 사람의 자리를 반이라도 메꿀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과 몸과 마음을 쓰겠다는 응답과도 같다. 스물다섯 살 도혜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새로운 일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윤이를 떠올린다. 윤이야, 너는 다 알고 있었니. 무엇을 더 알고 있니. 이다음은 무엇이니. 이젠 보이지 않는 윤이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바쁘게 쫓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나여서 그 자체로 너무 충분하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굳이 응답하지 않아도 평안할 것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없는 것과 나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면서 시작되기도 하니까. 가장 아끼는 맨투맨 티를 입고 중국집 문을 열어젖히며 윤이에게 온몸으로 응답하는 도혜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랑과 우정이 해내는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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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입학식이 다가오자 새 출발을 앞둔 아이들 표정에 희비가 드러난다. 가고 싶은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러지 못하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복이 마음에 안 든다, 건물이 낡았다 등 아이들 입에서 투정 섞인 소리가 새어 나온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모양이다.

요즘은 어느 고등학교에 가느냐가 어느 대학에 갈지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등학교가 대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대학입시에서 수시모집이 확대되며 학생부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수시모집은 학생, 학부모, 학교가 함께 뛰는 3인4각 경기다. 아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부모와 학교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하지만 부모와 학교가 기대 이상의 지원을 해주면 아이는 자기 실력 이상의 결과를 거둔다. 이게 학생부 전형의 묘미이자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기 힘든 부분이다. 어쨌든 대입 수시모집을 준비하려면 부모의 관심뿐 아니라 학교의 역량도 중요하다.

그래서 이맘때면 전학이나 재배정 문의를 많이 받는다. 수시에 강한 학교를 원했는데 정시에 강한 학교에 배정되었거나 내신 관리가 쉬운 학교를 원했는데 정반대의 학교에 배정되었으니 학교를 바꾸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배정받은 학교를 바꿀 방법은 마땅치 않다. 건강문제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재배정해주지 않고, 전학도 다른 학군으로 이사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소만 잠시 옮겼다가 돌아오면 안되냐고 묻는 부모도 있는데 불법인 데다 3개월 이내에 돌아오면 처음 배정받은 학교로 다시 배정된다. 3개월 이후 돌아오면 학교를 옮길 수 있지만, 수업 진도나 시험 기간이 달라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학교를 옮길 생각을 하면 학교에 정이 붙지 않아 교우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 자퇴까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설마 자퇴까지 하겠는가 싶었는데, 지난해 고졸 검정고시 응시자 중 10대 청소년 비율이 역대 최고치(67.7%, 4만3816명 중 2만9659명)를 기록했다는 소식에 걱정이 앞선다. 물론 그들 모두가 대학에 잘 가기 위해 자퇴한 학생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서울대 정시 합격자 중 검정고시 출신 비율이 전년도보다 2배 이상 증가(1.4%→3.5%)한 점을 고려하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자퇴한 학생이 적지 않아 보인다.

어쩌다 고등학교가 대학을 가기 위한 곳이 되었나 싶어 마음이 무겁다. 교육을 하다 보면 입시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교육과 입시가 따로 논다. 아이들 모두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제는 현실을 생각해야겠다. 학교는 어디에 배정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니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하나의 기회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문을 힘껏 열고 들어가 최선의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최고보다 더 좋은 최선도 있으니까.

<강명규 스터디홀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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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도 법이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법철학(法哲學)>에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라고 쓴 내용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한 말처럼 와전된 것이다.

2004년 헌법재판소도 일부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실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며 독약을 먹었다”는 내용은 준법사례로 연결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내용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억압적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악법은 참으며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싸워서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한편 일상에서 “얼마전 주차위반 벌금을 물었다”처럼 ‘벌금’을 잘못 쓰는 사례가 많다. 

벌금은 “재산형의 하나로 범죄인에게 부과하는 돈”이다. 주차위반처럼 형벌의 성질을 가지지 않는 법령 위반에 대해 부과하는 돈은 ‘과태료’다. 아울러 “도로 교통법의 규칙을 어긴 사람에게 물리는 돈” 역시 벌금이 아니라 ‘범칙금’이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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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나들이객들이 오갔을 일요일 한낮 덕수궁 돌담길에 인적이 드물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로에도 차가 별로 없어 퇴근 시간이 15분 가까이 단축됐다. 코로나19의 확진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도시의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사람들의 일상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났다.

스포츠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정규시즌 막바지에 접어든 프로배구는 순위싸움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교통 접근성이 좋은 서울 장충체육관의 경우에는 평일에도 좌석이 매진된 것은 물론이고 입석 관중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로 팬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나 프로배구는 25일부터 무기한 무관중 경기를 시행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서 관중을 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여자프로농구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시즌 개막을 앞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는 개막 일정 조정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오는 7월 개막하는 2020 도쿄 올림픽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지난 14일 열었던 기자회견에서 나온 기자들의 질문은 모두 올림픽 개최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IOC와 조직위는 “대안은 없다”며 취소나 연기 없이 예정대로 올림픽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정상 개최가 가능할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외신 보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올림픽이 취소된 건 전시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올림픽 출전 선수 1만1000여명, 패럴림픽 출전 선수 5000여명이 결전의 날을 기다리며 땀흘리고 있다. 스포츠에서 시즌은 매년 돌아오는 것이고 올림픽 역시 4년마다 돌아오는, 불변하는 약속이었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또박또박 훈련하고 경기장에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란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쉼없이 돌아가던 쳇바퀴가 멈추고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 그 빈틈 사이로 새로운 갈등이 비집고 올라온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과 일본, 중국의 스포츠를 강타하기에 앞서 미국 프로야구는 불신이라는 재앙에 맞닥뜨렸다. 메이저리그 휴스턴의 조직적인 사인 훔치기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한다’는 명제는 스포츠를 성립하게 만드는 토대다. 그러나 휴스턴은 사인 훔치기를 통해 상대 선수들을 기만했고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까지 차지했다. 선수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명제가 배반당한 상황에서 이제 어떤 선수가 휴스턴을 떳떳한 경쟁 상대로 인정하려 할까.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이달 중순 스프링 캠프에 소집된 후 휴스턴에 대해 한마디씩 하기 시작하면서 겨우내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불신과 갈등은 이제 공공연해졌다. 휴스턴의 형식적 사과는 다른 구단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선수들은 휴스턴 선수들을 징계하지 않은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메이저리그의 2020시즌이 약속대로 돌아오고 있지만 선수들은 예전과 같을 수 없다. 바이러스를 진압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메이저리그의 일상도 당장 복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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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이라고 하면 곧장 쌀밥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한탄강, 겨울에는 두루미의 고장이다. 나의 경우 그 사이에 절 이름 하나가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얼음 트레킹,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관찰 등 몇 번의 철원 여행에서 백마고지, 노동당사는 둘러보았지만 그 아름답다는 절을 이정표에서 확인하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고대산 지나서 철원의 경계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절이라는 곳은 저물 무렵에 가야 더욱 특별한 맛이 나는 법이다. 철원에서 저녁을 맞이했으니 방향은 딱 한 곳으로 정해졌다. 길 위에서의 바쁜 마음을 추슬러 이번에는 곧장 그 절로 들이닥쳤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아담한 절이 바로 나타났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통일신라 경문왕 때 세운 절이라고 한다.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연혁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규모다. 완만한 경사길을 오르며 오른편을 주목하니 잎은 없고 열매가 모두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다. 히어리, 줄댕강나무, 분꽃나무 등 모두 짱짱한 나무들이 아닌가. 나무수국은 작년 꽃이 미라처럼 아직도 늠름하기만 하다. 하나하나 짚어나가는데 야생화 냄새도 난다. 즉석에서 알아보니, 이곳은 나무들 말고 야생화로도 한 끗발 한다. 노루귀, 복수초는 물론 깽깽이풀, 삼지구엽초가 풍성하단다. 대적광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종각 옆의 우람한 산뽕나무를 우러러보는데 처사님이 저녁 공양을 하라시는 게 아닌가.

소박한 밥상. 수제비와 함께 철원쌀밥을 주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끝의 침묵을 깨고 결국 꽃 이야기를 했다. 도피안사에 계시는 분들은 법력뿐만 아니라 나무와 꽃에 대한 공력이 보통 분들이 아니었다. 앞서 거론한 이름과 함께하는 식탁이 아연 꽃들의 야단법석(野壇法席)! 깊숙이 절하고 내려오는데 날은 어둑해지고, 나무들도 어둠의 이부자리를 깔려고 한다. 절에 왔다가 뜻밖의 거룩한 끼니는 물론 꽃에 대한 이야기로 호주머니가 불룩해졌다. 일주문을 빠져나오다가 짚이는 데가 있어 잠깐 차를 세웠다. 비로소 제대로 들어오는 산의 이름. 절을 품고 꽃을 여는 화개산(花開山)!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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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하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험에 맞서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인데, 이를 둘러싼 논의와 정책을 정치화시켜 버리는 일 말이다. 사태 초기부터 그들은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런저런 시그널들이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위험을 정치화시키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선거운동이다. 총선이 두 달밖에 안 남지 않았는가. 그러나 코로나19를 광우병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수입 쇠고기를 먹어야 하는 계층과 한우를 먹는 계층을 뚜렷하게 갈라놓았던 광우병과 달리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19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민주적인’ 위험이어서 전선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국민의 안전을 시장에 맡기려 했던 보수정부와는 달리 공공의 영역에 적극 개입하는 문재인 정부의 성향은 위험이라는 상황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대응 능력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는 매우 높았고, 초기에 비판적이었던 국민들 중 상당수도 정부의 역량을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섰었다. 그러던 것이 신천지 대구교회와 청도대남병원을 중심으로 한 확진자 폭증 이후 패닉 모드로 바뀌고 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위험의 정치화는 하나의 논리로 모아지고 있고, 이번에는 상당히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 논리는 이런 것이다. “진즉에 중국인 입국금지를 했어야 했는데, 북한이나 러시아조차도 시행하는 대책을 한국 정부는 안 하고 있다가 일을 키우는 무능을 드러냈다. 그 이유는 3월로 예정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이 취소될까봐 두렵고, 그러면 시 주석의 도움을 얻어 꽉 막힌 대북관계의 실마리를 뚫어 총선에 승리하려는 전략이 망가지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청와대가 당연히 이런 고려를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은 다른 고려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을 기-승-전-굴욕외교, 기-승-전-종북으로 몰고 가는 기적의 논리는 어이없지만, 사람들이 패닉하기 시작했고 선거가 코앞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먹혀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내키지 않는 예측이지만, 정부·여당은 과학의 논리와 정치의 논리를 구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의 정치화라는 전략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더라도 몇 가지는 기록해두고 싶다. 나중에라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어야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북한이나 러시아 등이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는 이유는 그 나라들의 정부가 우리 정부보다 유능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의료수준과 인프라를 고려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중국인 입국금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고 있는 40여개국 중 미국, 일본 등 4~5개국만 선진국일 뿐 나머지는 북한, 러시아, 베트남, 파푸아뉴기니, 피지, 몰디브, 팔라우, 카자흐스탄, 모리셔스, 가봉 같은 나라들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이라 부르며 국경장벽을 세우기도 했는데 무역전쟁 상대국인 중국을 향해 입국금지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일본은 입국금지를 해놓고도 특유의 정보비공개 비밀주의로 인해 낭패를 보고 있다. 반면 한국처럼 아직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벨기에, 영국, 캐나다,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다. 앞으로 코로나19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이들도 중국인 입국금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까지 선진국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둘째, 지금까지 알려진 대량 확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메르스 사태 때 바이러스의 대량 확산은 삼성서울병원과 평택성모병원 두 곳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신천지 대구교회와 청도대남병원이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신천지 대구교회 관련자들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 지역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일이다. 확진자 수가 놀라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지만 신천지 관련자들을 제외하고 보면 아직까지 폭증 추세는 아니다. 이들을 찾기만 하면 아직 기회의 창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시기에 위험의 정치화에 몰두하는 이들은 수천명을 모아 정치집회를 열고 한때 야당의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사람은 거기에 숟가락을 얹고 있다. 정권에 대한 맹목적 증오가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고 있다.

이 대대적인 선전전에서 정부가 이기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역사회 감염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네트워크 전파의 특성상 패닉은 늘어나고 선전은 더 잘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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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하고 부르면 열에 여덟은 성난 얼굴로 돌아본다는 곳,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어디서든 빵하고 터져 나올 만큼, 그만큼 억압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불렀다. 누가 감염된 자인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된 혐오와 불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던 말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그 조선인은, 중국인이 되었고, 다시 대구 사람들이 되고, 이제 ‘신천지’가 되고 있다. 그들을 격리하고 제거하면 우리 모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위험한 존재를 ‘안전한 공간, 건강한 사회’로부터 제거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식은 소독과 방역, 의심과 격리, 배제와 추방이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무슬림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일 수도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전파를 알리면서 마스크를 쓴 사진과 함께 ‘메이드 인 차이나’를 표제어로 내걸었다. 미국의 CNN뉴스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복 입고 마스크 쓴 한국인들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극우정치의 공통 문법인 인종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불길한 신호다. ‘유색인종’은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도 있고,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전염병 이전에 이미 기피되었던 존재들은 다시 병리학의 법정으로 불려 나온다. 

내가 사는 강원도 접경지역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이후 멧돼지 포획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마을 전체가 멧돼지를 막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포수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입산금지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그럴 때 멧돼지의 심정이 되곤 한다. 멧돼지는 열병과도 싸우고 사냥꾼과도 싸워야 한다. 멧돼지를 막으면 돼지들이 안전해질까? 돼지들에게 살처분과 상품화를 위해 도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안전한 것일까?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마리, 닭은 무려 10억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 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막는 길은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때 정치의 물음이 필요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병든 닭을 10억마리씩 소비하고, 매년 500만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재난이 그 일상을 중단시키면 사람들은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시키는 ‘자연의 파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계속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우리 공동의 세계에 풀려진 독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 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었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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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경보가 최고 수준인 ‘심각’으로 높아진 가운데 하루 200명 이상으로 늘어나는 확진자 폭증세가 심상치 않다. 일부 지역에 몰린 환자 급증 상황이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을 막고 확산세를 꺾기 위해선 앞으로 몇 주간이 관건이다. 그 어느 때보다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역이 절실해졌다. 신천지 예배로 예상치 못한 감염의 둑이 무너지기 전까지, 국내의 안정적인 대처가 가능했던 것은 합심해서 위기를 극복하자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연대 덕분이었다. 정부는 더욱 엄중해진 상황에서, 한 단계 강화된 대국민 수칙을 발표할 예정이다. 

24일 코로나19 감염자는 800명을 넘어섰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환자 75% 이상이 신천지 대구교회와 청도대남병원 관련 확진자이고, 지역별로도 대구·경북 쪽에 몰려 있다. 그러나 17개 시·도 모두 확진자가 속출하며 타 지역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8000여건의 검사가 진행 중이어서 당분간 확산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등교와 출근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 개정되는 수칙에는 코로나19 의심 증상이 있는 경우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경과를 관찰해야 한다는 지침이 담긴다. 그동안 개인위생 중심의 수칙을 강조해 왔던 데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가격리로,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시민들의 대응을 한 단계 높이자는 것이다. 각급 학교의 개학 연기에 이어 대형 학원들도 속속 휴원을 발표하며 정부 권고에 동참하고 있다.

공공의료와 방역 전문가들은 현재 일부 지역과 신천지 대구교회 중심의 확산세가 다른 루트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방역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사회 확산이 시작된 상황에서 개개인의 행동이 감염병 추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지역사회 행정조직과 시민의 네트워크를 연결해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확산을 억제할 수 있는 체계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두 가지 핵심요소를 강조했다. 즉 불편함이 있더라도 확진자는 자가격리를 철저히 지켜야 하며, 초기 증상자의 경우 병원 내 감염을 막기 위해 4~5일 집에서 쉬면서 추이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증상이 있으면 격리와 휴식이 필요한데, 이를 주저하게 하는 요인도 없애야 한다. 

감염병 확산세 속에서 치료도 성과를 내고 있다. 이날 확진자 4명이 퇴원하면서 총 완치자는 22명이 됐다. 전문가들은 초기 진단만 되면 한국의 의료체계에서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와 정부의 당부대로 시민 개개인의 합리적인 행동이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의 적절한 행동이 나와 가족의 건강뿐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는 일임을 잊지 말자. 각자 방역의 주체로 최선을 다하되, 과도하게 책임을 물어선 안된다. 낙인을 찍다 보면, 숨기게 되고 시민참여형 방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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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임시휴업을 한 대구시 중구 서문시장에서 상가연합회 관계자들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진자 증가 속도만큼이나 대구·경북 지역 주민의 불편과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평소 북적대던 대구 칠성시장은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 18일부터 손님이 뚝 끊겼다. 24일에는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약국과 이마트에는 마스크와 소독제, 생필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유무 증상으로 자가격리 중인 시민들이 불안해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구·경북 주민들은 1주일째 코로나19와 전쟁 중이다.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 못지않게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 일각의 혐오와 기피 정서다. 서울의 일부 대형병원은 대구·경북 지역 환자들의 수술을 연기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등은 25일부터 일정기간 대구~제주 노선의 운항을 중단키로 했다. 다른 지역에서 대구·경북을 오가는 교통편도 크게 줄고, 택배 발송도 끊겼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의 출장을 중단하는 기업도 있다. 대구·경북에 대한 ‘공포증’이 과도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혐오 정서는 SNS에서 가짜뉴스 형태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24일 정례브리핑에서 가짜뉴스의 진위를 묻는 취재진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공개하며 “가짜뉴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물어봐라”라고 대답했다.    

정부는 감염병 경보를 ‘심각’으로 높이면서 대구·경북 지역 방역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선별 진료소를 확대하고 이동검체채취팀과 이동진료소를 가동했다. 감기증상이 있는 대구시민 2만8000명에 대한 전수조사도 실시한다. 이에 지역 의료진이 격리병원 파견을 자원하고 나서는 등 크게 호응하고 있다. 기업이나 연예인의 성금 기탁도 줄을 잇고 있다. 감염병과 같은 재난은 특정 지역의 탓도, 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재난 극복에서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 모두의 지원과 배려가 필요하다. 혐오와 차별, 기피는 상처를 덧낼 뿐이다. 대구·경북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 그리고 힘내라는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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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대구 남구 신천지 대구교회 부근에서 대구 남구청 보건소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이들이 잇따라 재판에 넘겨졌다. 춘천지검 속초지청이 지난 11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업무방해 협의로 ㄱ씨를 불구속 기소한 데 이어 대구지검도 지난 21일 ㄴ씨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두 사람이 “ㄷ병원 가지 마라, 신종바이러스 의심자 2명 입원 중” “ㄹ병원 신종 코로나 의심환자 검사 중, 응급실 폐쇄 예정”이라는 내용을 각각 카카오톡 단체방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뜨린 혐의 때문이다. 수사 결과 ㄱ·ㄴ씨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해당 병원이 입은 유·무형의 피해는 컸고 해당 지역 시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검경이 수사 중인 코로나19 관련 허위사실 및 개인정보 유포사건은 100건에 이른다. 허위사실유포는 주로 특정 병원과 관공서, 인물들을 겨냥한다. “코로나 확진자가 ○○에 격리됐다” “확진자 ○○가 ○○ 등지를 다녀갔다”는 식이다. 확진자를 방역요원이 뒤쫓는 상황을 꾸며낸 영상까지 유포됐다. 경찰·공무원이 확진자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일도 벌어졌다. 주변 사람에게 ‘조심하라’는 뜻에서 또는 ‘장난 삼아’ 하는 이런 행위들은 그러나 명백한 범죄행위다. 경범죄에 그칠 수도 있지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병원·관공서 등의 영업·공무를 방해했을 경우에는 실형을 살 수 있는 중범죄다. 사법당국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한 처벌로 이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처벌 이전에 성숙한 시민 의식 또한  요구된다.

허위사실 유포 등에 따른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병원·관공서 업무가 마비되면서 방역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지역의 경제·시설 등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 모두가 감내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특정 국가와 지역, 종교 등이 혐오와 차별,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일 역시 있어서는 안된다. 중국인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특정 지역을 오염원으로 폄훼하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킬 뿐이다. 이들 역시 코로나19의 피해자다. 위로와 응원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은 민주시민으로 할 짓이 아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더 필요한 것은 신뢰와 협력이다. 국민 모두가 정부와 의료진을 믿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이번 사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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