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

“유튜브를 해야 할까?” 질문을 가끔 받는다. “해야 할 것 같다”고 나는 대답한다. 유튜버로 대박날 꿈을 꾸는 건 아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었고, 한국어 시장에서 여러 해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도 어렵다. “그럼 왜 하나?” 질문을 받으면 “명함처럼 유튜브 채널을 이용하는 시대가 온다”고 나는 답한다. 말만 이렇게 할 뿐 나도 아직 유튜브에 내 작업 영상을 올리지 않았다. 이게 나의 문제다.

‘명함처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명함은 공짜로 뿌리는 것이다. “제 명함입니다”라고 드리고 “오십원입니다”라고 돈을 받으면 좋겠으나, 그런 꿈같은 일은 없다. 명함을 건네며 명함값을 받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럼 왜 돈 들여 명함을 찍나? 명함을 뿌려 자기를 알리고 그래서 돈을 벌 기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수익을 바라긴 하지만 명함 자체가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창작물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창작물은 공짜로 풀고 창작자는 다른 방식으로 먹고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몇 해 전부터 널리 읽히는 <콘텐츠의 미래> 책에 나왔다. 어쩌면 이미 그런 시대인지도 모른다. 상어가족과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그 가운데 하나로 ‘유튜브를 영리하게 이용했다’는 점이 자주 거론된다.

오해를 피하고 싶다. 나는 이런 변화가 싫다는 것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창작자가 돈을 더 벌 기회이기도 하고 창작물 판매에 마음 쓰지 않고 창작할 기회이기도 하다. 다만 규칙이 바뀔 때마다 새로 배워야 할 것도 많다는 점에서, 나같이 옛날 규칙에 익숙한 사람은 적응하기 만만치 않구나 생각한다.

나로 말하자면 명함 없이 다니는 습관이 있다. 별 뜻은 없고 젊을 때부터 방구석에서 일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런데 예전에 강연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명함 좀 하나 주세요.” “명함이 없는데요.” “허허, 명함도 안 들고 다니다니,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에요?” 농담이지만 뼈가 있는 말씀이었다. 명함 없이 다니는 나의 습관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시면 오분 정도 짬을 내 직접 찾아보세요’라는 태도로 받아들이셨나 보다. 앞으로는 “유튜브 채널도 없고 블로그도 안 해요”라고 하면 비슷한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유튜브 운영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또 어디서 어떻게 짜낼지 나는 고민해본다.

<김태권 만화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내가 고통의 계산법이라고 부르는 게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내릴 때 여자들은 보통 비슷한 선택을 한다. 한 집단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할 때, 자신의 고통이 최소화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대다수 여자는 그 결정이 가져올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따져본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고통이 아닌 고통의 총합을 줄일 수 있는 결정에 따른다. 주로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말로 포장돼온 선택들이 그런 예다. “여자인 네가 이해하고 참아라”라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아오면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남의 고통에도 민감해진다.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로 길러진다. 남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본인의 고통에 무감해지는 건 문제다. 무감해진다고 해서 그 고통이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젠가부터 다른 여자들의 고통엔 가중치를 두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통에 가중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0으로 두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야 비교적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3월8일은 세계여성의날이었다. 1908년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노동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 그리고 참정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해서 유엔에서 공식 지정했다. 참정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고통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충분히 기념할 만한 날이다. 여성의날에 빵과 장미를 사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성인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빵’은 생계를 위해 일할 권리를, ‘장미’는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살아가는 권리를 말한다고 한다. 여성의 고통을 줄이는 것은 여성이 아닌 사람들의 고통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고통의 총합을 줄이는 일이다. 자신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전 세계의 보다 더 많은 여성에게 빵과 장미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정은 |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얼마 전 배우 이시언씨가 코로나19 피해 이웃을 위해 100만원을 기부하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인증을 했다가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연예인치고 너무 적은 액수를 기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해프닝이라고 보기엔 씁쓸하다. ‘기부는 부자나 하는 것’ ‘많은 돈을 기부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기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일상적으로 기부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많다. 2017년 기준 개인기부자는 약 560만명으로, 한국 인구의 약 11%다. 집계되지 않은 기부나 자원봉사를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연예인의 선행이 의미 있는 이유는 본인의 영향력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나눔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나눔을 접하도록 하는 것도 기부문화에 대한 큰 기여다. 

용돈, 급여, 재능 등 ‘가진 것의 1%를 나누자’는 아름다운재단의 1% 나눔 캠페인이 많은 호응을 받은 이유는, 작더라도 나누고자 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실천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액수를 잣대로 나눔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한다.

코로나19 피해 복구를 위한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배우 이시영씨의 기부 이후 방송인 김나영·송은이씨와 배우 김무열씨 등이 동참했다. 일반인 기부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기부에 대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며 더 많은 사람이 나눔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든 이시언씨에게 따뜻한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김아란 | 아름다운재단 나눔사업국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어의 개념은 임의적, 임시적이다. 특히 성별(性別) 이슈를 다루는 이 글은 작은따옴표가 점철되거나 생략된 비문(非文)이다. 

어떤 여성이 여자대학에 합격했으나 여성의 반대로 입학이 좌절되었다. 전자는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후자는 비(非)트랜스젠더 여성이다. 일부 비트랜스젠더 여성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며 그녀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냈고, 대학 당국은 방관했다. 심지어 성별 정정을 허가해 준 법원을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묻고 싶다. 당신은 여성이고 그녀는 여성이 아닌지.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지. 해부학? ‘여성·남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일시적 구호이다.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당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정상적인 남녀’로 구별한다. 즉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표시되는 것뿐이다. 성별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별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실체도, 실재도 아닌 지배 규범(‘성역할 사회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한 여성만 여성으로 간주된다. 나이, 인종, 계급, 외모, 직업 등에 따라 여성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는 제3의 성이고, 나이 들고 뚱뚱한 데다 옷차림이 추레한 여성이 짐을 들고 돌아다니면 ‘노숙인, 좀도둑, 정신질환자’로 간주되기 쉽다. 

여성주의 사상의 핵심은 ‘차이’이고, 이는 현대 철학 전반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여성이라고 간주되는 집단 내부의 차이. 흑인 노예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은 성별보다 인종의 차이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에서 출발한 여성주의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허명으로 다른 여성을 차별, 배제, 타자화하기도 한다. 정체성(正體性)은 “우리는 같다”는 팩트가 아니다. 오히려 같지 않기 때문에 동일시(同一視) - ‘여성임을 자각’ -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등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 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일단, 이 ‘진정한 여성’ 기획은 불가능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여성 개념은 이미 ‘오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기는 작은 차이다. 작은 다름을 본질로 만드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 자궁이 있어서 출산을 하고 저절로 육아 전문가가 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여성이나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가족부의 영어 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다. 젠더가 여성으로, 여성이 양성평등으로 ‘편의상’ 오역된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자웅동체(雌雄同體), 양성구유(兩性具有), 간성(間性·intersex) 등 다양한 형태의 성별이 존재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간성과 관련된 남성의 여성화를 촉진하는 클라인펠터증후군을 보이는 아기가 매년 400~500명 정도 태어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사방지(舍方知)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떤 이들은 사춘기, 임신, 사망 시 양성구유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성애 제도는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기 위한 강력한 장치다. 이성애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동성애, 무성애(無性愛), 범성애(凡性愛) 등 인간의 성적 실천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성별 정체성도 달라진다. 성별은 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강제를 거부하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의 인권을 빼앗아간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 누구도 타인의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운동은 민족·민중·시민 등의 개념을 독점하면서 인권의 위계에 따른 순서(“여성 문제는 나중에”)를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운동에 저항해왔다.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 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 강원도 선거구 획정과 관련돼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중앙정부와 국회가 강원도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서울 면적의 11배가 넘는 5개 시·군을 하나로 묶어 1석을 주겠다는 것, 문화적 특성이 확연히 다른 영동과 영서를 섞는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특히 강원 남부 광산지역은 광업의 흥망과 함께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며 폐광지 특유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영월을 정선, 태백에서 떼어놓았다. 단일 선거구는 단일 생활권과 문화권이어야 함은 상식이다.

이런 일들은 인구 중심, 수도권 중심 사고에 기인한다고 본다. 서울 등 수도권의 집값과 임대료는 치솟은 반면, 강원도 농촌에는 빈집과 폐교, 잡초밭만 늘고 있다. 강원도는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서 인구절벽을 만나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다. 국가는 국토와 국민으로 구성된다. 국토의 20%, 인구의 3%를 차지하는 강원도에 배정된 의석수는 고작 8석이다. 강원도의 존재감이 약할 수밖에 없다.

탄광이 성업한 1970년대만 해도 태백 18만명, 영월과 정선은 각 13만명과 10만명 등 총 41만명이 살았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도 이곳에서 공급한 석탄, 텅스텐, 석회석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그후 1980~1990년대 진행된 석탄합리화사업 추진에 이은 대대적인 폐광 조치로 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국가 산업화에 온 힘을 쏟은 강원지역에는 1990년대에 폐광산과 흉가만 남은 것이다. 재기를 위해 1995년 폐광지역지원특별법을 만들고 광해공단을 설립했다. 광부들이 석탄을 캘 때마다 푼돈을 모아 만든 360억원을 자본금으로 강원랜드를 설립하며 대체산업을 일구기 시작했다. 리조트와 호텔, 골프장과 레저 관광 시설들이 생겼고 폐광기금으로 조성한 농공단지들에도 기업들이 찾아왔다.

이러한 노력에도 중앙정부와 국회는 지역 정서를 무시한 정책들을 내놓기 일쑤다. 압권은 최근 한국광물자원공사와 한국광해관리공단을 통합하기 위한 법률안 상정이다. 강원랜드 1대 주주인 광해공단의 주 수입원은 강원랜드 배당금이다. 이 배당금으로 광해공단은 설립 취지에 맞게 광해 방지 사업과 폐광에 따른 대체산업 육성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광해공단을 부실덩어리인 광물공사와 통합하려 하는데 왜 지역 주민의 의견은 구하지도 않는가. 한때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을 되돌아보아 달라.

지역 경기를 살리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치솟은 서울의 부동산 가격도 잡을 수 있다. 대기업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지방 도로와 물류를 개선하고 지방 의료와 문화 시설에 투자하고 지방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강원도 국회의원 수를 20명으로 늘려 달라. 지방에 일자리가 늘고 문화·의료 시설이 개선되면 서울 인구도 지역으로 분산될 것이다. 이게 서울 집값을 잡고 수도권과 지방 간 균형발전을 이루는 게 아니겠는가.

중앙정부와 국회는 지역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 지역이 미래며, 강원도가 미래다.

<조영백 | 강원 영월군 연합번영회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햇볕 받으며 걷다 보니 땀이 차오른다. 얼굴을 덮은 마스크 때문인가 싶었는데, 여전히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경이 온통 코로나19에 가 있어서일까. 3월이 벌써 중순으로 넘어간 것도 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가득 차서 시끌벅적했을 대학 교정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매화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거무튀튀하고 딱딱해 보이는 나무둥치 여기저기에 거짓말처럼 화사하게 꽃잎이 맺혀 있다. 봄이다.

퇴계 이황은 임종하던 날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화시만 해도 100여 수를 남긴 퇴계에게, 매화는 그리움을 멈출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찾아가곤 하는 벗이었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정신적 가치를 함께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르는데/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앉은 채로 일어나길 잊었더니/ 매화 향기 옷에 가득, 달빛이 몸에 가득.” 매화와 한 몸이 된 퇴계는 “매화 너는 고고하여 고산이 어울리건만/ 어쩌다가 이 번화한 도성에 옮겨왔나”라며 자신을 매화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설중매라는 말이 운치를 자아내듯이 매화의 장처는 조매(早梅), 즉 누구보다도 일찍 핀다는 점에 있다. 퇴계는 눈 속에 피어난 매화를 보며 “어떡하면 이대로 달을 잡아두고/ 매화 지고 눈 녹는 것 멈출 수 있을까”라며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때로 퇴계는 “늦게 핀 매화여 자네 참뜻 내 알겠네/ 병든 이 몸 추위 겁내는 걸 알아서 그런 거지”라며 다른 매화보다 늦게 피어준 매화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이르든 늦든 매화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매화꽃 피면 벗들을 불러 모아 술과 시를 즐기곤 하던 매화음(梅花飮)의 낭만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때다. 이 긴 터널이 언제 끝날지, 터널을 지난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은 어떠할지 참으로 우려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코로나19 걱정으로 몸살을 앓는 동안에도 자연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봄을 피워내고 있다. 봄과 함께 이유 없는 희망이 단단한 나무껍질을 가르며 고개를 내민다. 그 희망을 나눌 사람이 매화보다 더 그립다. 다시 봄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쑥국을 먹으며  (0) 2020.04.08
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이유  (0) 2020.03.25
매화를 만나다  (0) 2020.03.11
포용과 돌봄이 필요한 때  (0) 2020.02.26
누가누가 못하나  (0) 2020.02.12
나에게 건네는 덕담  (0) 2020.01.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해 12월 말 중국 우한시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을 때만 해도 감염병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중국 언론은 ‘원인 불명 폐렴’이나 ‘우한 중증 폐렴’으로 보도했다. 외국에서는 ‘우한 폐렴’이라 불렀다. 감염병이 이름을 얻기까지에는 한 달 넘게 걸렸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지난달 8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폐렴’으로 명명하자 사흘 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2019(Corona Virus Disease 2019,COVID19)’로 확정했다.

COVID19는 ‘2019년에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 질병’이라는 뜻이다. 중국어 공식 명칭은 ‘신형관상병독폐렴(新型冠狀病毒肺炎·신형폐렴)’이다. ‘관상병독’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뜻. 한국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약칭 ‘코로나19’)으로 부른다. 일본어 명칭은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이며, 약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신형폐렴’이다. 하나의 감염병을 놓고 한·중·일이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 정명(正名)은 중요하다. 이름을 보면 특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외래어를 번역하는 일은 또 다른 정명이다. 번역어의 생명은 정확한 의미와 함께 언중의 눈높이 그리고 시의성이다. 초창기 영어사전에서는 발코니(balcony)를 ‘툇마루’, 치즈(cheese)를 ‘소젖메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발코니, 치즈일 뿐이다. ‘hot potato’의 번역어는 ‘뜨거운 감자’다. 그러나 의미가 불분명하다. ‘골치 아픈 문제’로 의역하는 게 옳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팬데믹, 코호트 격리, 진단 키트 등 감염병 관련 외래어가 유행하고 있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의학 용어들이다. 어렵고 생소한 어휘의 사용은 국민을 정보에서 소외시킬 수 있다. 다행히 국립국어원의 새말모임에서 발 빠르게 우리말 번역어·대체어를 내놓았다. 팬데믹(pandemic)은 ‘감염병 세계적 유행’, 에피데믹(epidemic)은 ‘감염병 유행’, 인포데믹(infodemic)은 ‘악성 정보 확산’, 코호트(cohort) 격리는 ‘동일 집단 격리’, 진단 키트는 ‘진단 도구’,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는 ‘승차진료’로 다듬었다. 쓰기도 쉽고 이해도 잘된다.

<조운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난 지 어제로 50일이 지났다. 국내 확진자의 증가세가 꺾이고 있는 건 다행스럽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 확진자가 늘어가는 상황은 결국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갈 거라는 우려를 갖게 한다. 전염병의 발생과 방역은 전문가의 식견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비전문가인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전염병이 의학적 현상이자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의 사회적 코드로 지난 50일을 돌아보고자 한다.

첫째, 코로나19 사태의 위험사회학. 코로나19 사태는 ‘글로벌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을 생생히 증거한다. 바이러스 전문가 네이션 울프는 도시화, 동물과의 교류 증가, 세계화 등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바이러스 폭풍’ 시대에 들어서 있다고 분석한다. 21세기를 돌아봐도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 그리고 올해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져 왔다. 2020년대에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언제든 폭풍처럼 밀려올 가능성은 안타깝게도 활짝 열려 있다. 세계화된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인류는 이미 진입해 있다고 봐야 한다.

둘째, 코로나19 사태의 사회심리학. 코로나19 사태는 앞선 전염병 사례들과 비교할 때 공포가 더욱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울리히 벡이 강조하듯, 위험사회가 강화되면 될수록 안전에 대한 의식과 열망은 더 높아진다. 또 개인에 따라 안전 감수성과 이와 연관된 공포 체감 지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더하여, SNS 등 사회적 네트워크들은 수많은 정보 공유를 통해 공포를 외려 배가시키기도 한다. 위험사회가 정보사회의 진전과 결합해 ‘공포사회’로 진화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셋째, 위험사회의 언론학. 위험사회의 계몽에 대해선 언론과 지식인을 포괄한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의 대처에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지만, 전염병은 기본적으로 탈정치적 이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지난 50일 동안 코로나19 사태의 공론장은 양극화돼 있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양극화된 정치와 양극화된 공론장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정부의 대응에 대한 지나친 비난과 옹호라는 이 양극화된 공론장에 국민들은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인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넷째, 코로나19 사태의 경제학. 코로나19 사태가 지구적 현상으로 전환되면서 ‘경제적 공포’를 강화시키고 있다. 유가와 주가의 급락이 진행되고, 글로벌 경기 침체가 예고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갈 최악의 경우 미국·유럽·일본 모두 올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당장 우리 사회의 경우 자영업자, 중소상공인, 항공·여행업계, 저소득층은 코로나19 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추경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세계경제로부터 오는 충격을 어떻게 완충할 것인지의 중대한 과제에 당면해 있다.

다섯째, 코로나19 사태의 정치학. 결국 이 모든 문제들에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주체는 정부와 지자체다. 지난 50일 동안 질병관리본부를 위시해 우리 정부가 방역과 대처에 최선을 다해 왔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예기찮은 마스크 대란과 입국 제한 국가들의 증가 등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마스크 수급을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은 적지 않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줬다. 정부의 대응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현재의 과제는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하고 전국적 지역감염의 제3차 피크를 예의 주시면서 방역과 안전 그리고 약자 보호에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지난 50일 동안 일상화된 공포 속에서 발견한 희망이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대구를 찾아간 자원봉사 의료진과 이들에게 속옷, 양말, 도시락을 전달한 대구 서문시장과 칠성야시장 상인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산과 진천의 성숙한 시민의식, 광주 ‘달빛연대’의 손길, 마스크 양보운동의 전개 등은 위험사회에 맞선 관심과 배려와 연대의 공동체의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일깨워줬다.

다른 하나는 ‘팬데믹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의 성찰이다. 앞으로 바이러스는 더욱 진화하고 팬데믹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묵시론적 미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과학 및 공공의료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투자, 정부의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 공론장의 탈정치적인 성숙한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코로나 광풍이 어서 빨리 멈춰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3월3일 (출처:경향신문DB)

작금의 신천지 사태처럼 신흥종교 혹은 유사종교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교리와 말도 안되는 개인에 대한 숭배에 빠질 수 있는지 의아하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이 그들이 이론과 포교 방법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를 증명한다. 그들의 이론을 종말이나 구원 혹은 영생불사 같은 한두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런 종교의 교리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라. 종말, 구원, 영생불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교리에 얼마나 많은 인문학과 과학을 촘촘히 논리적으로 심어놓았는지 말이다. 그 교리를 배우며 그들은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유대감과 친밀감도 주고받는다. 지도자에 대한 믿음은 사실 가장 나중에 생겨난다.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함께 속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이들이 믿고 의지하는 대상을 나도 따르겠다는 결속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우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교리는 뜻밖에도 종말이나 구원이 아니라 ‘이단론’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이단이라고 비판과 모함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그 선두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신의 아들임을 고백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있고,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며 종교를 개혁한 마르틴 루터가 있고, 심지어 지구가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일과 묘비를 세우는 일까지 금지당해야 했던 갈릴레오도 있다. 그러한 사례를 끝없이 열거한 후에 그들은 마지막 줄에 자신을 세운다. 세속적인 기준에서 리더의 외연에 못 미치는 그들의 종교지도자도 그 줄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세상이 볼 때 약하면 약할수록 못나면 못날수록 극복의 상징이자 대속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이단’은 억울한 누명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사실 명예이자 자랑스러운 정체성이다. 신이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핍박받고 외로운 이들을 구원한다는 종교의 기본 논리를 그들도 믿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들의 구원이 어떤 믿음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든, 어떤 대상을 통해 이루어지든, 그것이 종교일 때는, 살아 있는 신을 믿든, 길가의 돌멩이를 믿든 그것이야말로 종교의 영역이고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종교로서 사회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자신의 종교 안에 편입시키려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그 야망을 위해 권력과 결탁하여 사회 근간의 시스템을 흔든다면 그때도 종교를 종교라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십자가를 광장에 세우고 신의 이름을 부른다 한들 오직 정치 구호만 외칠 때, 우리가 그 간절함을 기도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 확산의 빌미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단체 유지를 위해 방역을 방해하고 혼선을 주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종교적 박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천지의 경우 방역 방해 이상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설명 불가한 방식으로, 입주 자격이 제한된 임대아파트에 모여 산다든가, 특정 정당의 정치행사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을 종교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이러스는 그들이 발생시킨 것이 아니지만 바이러스를 막는 과정에서 드러난 그들의 실체는 종교로만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정치를 넘보았든 정치가 그들을 끌어들였든 간에 결탁에 대한 의혹이 생기고, 그 의혹이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면 사회정의와 공공성의 이름으로 투명하게 밝혀내야 할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먼저 종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입힌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구원을 찾아야 할까.” 옴진리교 사건 이후를 취재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르포집 <언더 그라운드>에 쓴 문장이다.

<한지혜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0일 콜센터 직원들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서울 신도림동 코리아빌딩 앞 선별진료소에서 해당 건물 입주자들이 검진을 받으려고 길게 줄지어 서 있다. 권도현 기자

서울 구로구의 한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60명 이상의 직원이 무더기로 코로나19에 감염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서울에서는 은평성모병원(14명)과 성동구 주상복합아파트(13명) 등에서 소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했지만 한 직장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확진자가 나온 사례는 없었다. 대구와 경북 지역의 코로나19 확산세가 잡히는 상황에서 수도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감염 사례가 나타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코로나19에 끝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10일 오후 현재 콜센터 감염 확진자 수는 64명이다. 그런데 해당 건물은 19층 규모 오피스텔로, 콜센터는 환자들이 발생한 11층(207명)을 포함해 4개층에서 총 600~700명이 근무하고 있다.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직원들이 상당수여서 확진자가 늘어날 수 있다. 이들의 거주지가 수도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데다 같은 건물엔 웨딩홀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도 많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드는 상황에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콜센터는 업무 환경이 감염에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직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1m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고객과 통화했다고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콜센터의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당국은 그 감염 경로와 접촉자들을 신속히 조사해 밝히는 한편 확진자가 거주하는 인천, 경기 등 지자체와 협조해 확산을 차단해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콜센터처럼 많은 인원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업체 등을 긴급점검하겠다고 밝혔다. 기업은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 코로나19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밀집도 높은 근무 환경의 사업장은 직장 내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지침을 준수할 필요가 있다.

집단감염에 취약한 시설은 비단 콜센터뿐이 아니다. 학원과 각종 강습소, 노래방, PC방 등 밀집 사업장도 감염 확산 위험이 높다. 이들 사업장의 감염은 언제든 지역사회 감염으로 번질 수 있다. 대규모 주말 연합예배 등도 마찬가지다. 방역 당국은 콜센터 감염처럼 연결고리가 분명치 않은 집단감염이 인구가 많은 수도권에서 확산되지 않도록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모든 시민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한시라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후위기는 이미 발등의 불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 현상과 기상재해가 빈발하고 있다. 지난해 아마존 산불·호주 산불로 한국 국토 면적의 숲이 잿더미로 변했다. 기후위기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탓에 일어난 인재였다. 폭염·가뭄이 날로 심각해지는데도 인위적인 개발과 화석연료 사용을 억제하지 않았다. 한국 역시 기후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지난겨울 전국 평균기온 3.1도로 역대 가장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한국의 대응 노력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기후위기 대응지수’가 OECD 국가 중 미국에만 앞섰고, 4대 기후 악당국가로 불린다. 

시민사회단체가 기후위기 대처를 촉구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그린피스가 4·15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을 상대로 기후위기 정책에 대해 질의한 결과에서 정치권의 무신경이 새삼 확인됐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온실가스 감축 등 11가지 대응책에 대해 대개 즉답을 피하거나 유보하고 난색을 표했다. 기후위기 대처에 미흡한 정도를 넘어서 외면 또는 무시하는 지경이다. 

‘2050년 내 온실가스 배출 제로 실현’에 대해서 민주당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확답을 피했고, 통합당은 “목표 수치를 정해 참여를 강제하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기후위기 정책 재원 확보에 필요한 탄소세 도입에 대해서는 두 당 모두 조세저항 등을 이유로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기후비상사태 선언과 당론채택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유보’ 입장이었다. 국가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당이 이렇게 기후변화에 무신경하니 문제가 제대로 풀릴 수가 없다. 두 정당은 2016년 20대 총선 때 기후위기 관련 공약을 내지 않았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환경의제가 기본정책으로 가시화되지 못한 채 당장의 당리당략에 매몰돼 있다는 시민사회의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린피스는 기후위기 대책을 내놓은 곳은 정의당뿐이라고 평가했다. 정의당은 10일 ‘2030년 이내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지’ 등을 포함한 기후위기대응·에너지전환 공약을 발표했다. 그린피스가 유권자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4%가 “기후위기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나 정당에 투표하겠다”고 답했다. 기후위기를 절감하는 대다수 유권자는 미래가 아니라 눈앞의 표만 바라보는 후보들을 분명히 가려낼 것이다.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공공위생과 청결은 근대교육의 산물이었다. 갑오개혁 이후 한성사범학교에서 가르친 ‘체육’의 핵심은 스포츠가 아니라 위생과 청결이었다. 이후 100여년이 흐른 지금, 온 국민은 다시 최선을 다해 손 씻기를 배우고 있다. 

국경차단을 최소화하고, 시민권을 제한하지 않는 우리의 방역시스템은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빨리 학습하며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왔다. ‘드라이브 스루’와 같은 혁신모형도 선보였다. 그래도 한국의 대처방식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문을 걸어 잠근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바로 이 놈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 마리아 반 케르크호베 세계보건기구(WHO) 신종질병팀장은 “우리는 여전히 이 바이러스에 대해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 변이속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 눈에 보이는 증상들 이면에 숨어 있는 우리의 무지와 상상, 공포와 두려움이 오히려 우리를 마비시키는 최대의 적이다. 예배로 인해 확진자가 나온 광주 어느 교회의 목사는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배를 드렸겠나.” 우스갯소리로 하나님의 종도 모르는 일을 대통령이라고 어찌 알았겠나. 바이러스가 이렇게도 영악하고 교활할 수 있다는 걸 계산에 넣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거대 종교단체들이 바이러스를 실어나르는 매개체였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었고, 우리는 거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배워나가면 된다. 과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결코 학습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다.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 증거 없는 추측이나 억측도 피해야 한다.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되, 비관하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학습에는 늘 실패가 따를 수밖에 없고, 차선책을 적용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매일 최전선에서 사투하는 의료진과 공포를 참아내며 현재를 견뎌내는 대구·경북 및 전국의 모든 국민들은 모두 새로운 학습을 하고 있다. 생존과 극복을 위한 학습이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매일 더 강해진다. 이제 차분히 새로운 적응방식을 익혀나가야 한다. 

인류 문명이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학습이다. 학습은 전대미문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 원래 가진 지혜나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어서게 해준다. 아무도 몰랐던 상황이고, 아무도 몰랐던 해법이었지만, 인류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놀라운 학습의 순발력을 통해 그 위기를 탈출해왔다. 한국인은 빠른 학습력을 가진 시민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코로나19를 완전히 박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놈은 올해를 버틸 것이고, 신종플루처럼 토박이로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겨울마다 이런 양상이 되풀이될 수 있고, 이를 대항하는 우리의 생활방식도 새로운 표준에 적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뉴노멀’, 즉 새로운 생활표준은 이미 시작되었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든가, 혼밥을 해도 쑥스럽지 않다는 등. 혹은 클라우드 라이프의 확장, 비대면 생활패턴의 증가, 집단주의의 쇠퇴, 재택근무와 원격교육의 일상화 등등. 

교육 분야에서 뉴노멀 가운데 하나는 원격교육이다. 대학마다 허겁지겁 온라인 화상강의를 준비 중이지만 어색하고 서투르다. 비록 IT강국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원격교육은 철저히 교실집합수업에 대한 보조적 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제작비 또한 터무니없이 비쌌다. 이제 뉴노멀로서의 새로운 원격교육의 표준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얼마든지 저렴하게 제작하고 공유하며 교육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 정규대학에서도 원격강좌로만 학위를 주는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데 거부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산업 4.0시대에 남들은 미네르바 대학 같은 교육기관도 만들어서 가르치는데 우리는 너무 수구적이다. 

어쨌든 코로나19 사태는 지나갈 거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은 언제든지 또 찾아올 거다. 메르스사태를 겪으며 만들어놓은 표준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온 나라의 교육이 원격교육에 의존하는 이 초유의 사태를 하나의 기회로 삼아보자. 온라인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더 친근해야 하고, 값이 싸야 하고, 일상학습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어색하던 손 씻기가 버릇이 된 것처럼, 이제 화상 스트리밍강의, 동영상 제작, 플립러닝, 온라인학습공동체 등도 그저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 같은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교육의 새 표준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