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Z>라는 소설이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좀비 영화 &lt;월드워Z&gt;의 원작으로 맥스 브룩스의 작품이다. 어느 날 좀비 바이러스가 출현을 하고 세계와 인류가 존재의 운명을 걸고 그 바이러스와 맞서 싸운다는 내용은 소설과 영화가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설은 영화와 달리 좀 특별한 구성과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서사의 기승전결을 인터뷰로 모두 채웠다는 점이 그렇다. 

소설은 바이러스 사태가 모두 종식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어 원작에는 부제 자체가 ‘구전하는 좀비 전쟁의 이야기’로 되어 있기도 하다. 화자는 유엔의 전후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좀비 전쟁의 실태 조사가 그 임무인 바, 우리는 ‘인간적인 요소’에 가려지지 않은 분명한 사실과 수치를 원한다는 위원장의 말에 반하여 이렇게 응답한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요소야말로 우리를 과거와 강렬하게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과학적인 분석이나 정치적인 평가, 혹은 통계 자료가 아니라 경험의 기록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는 것이다. 기록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당연히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어쩔 수 없이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싸워 이기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라고 하겠다. 그들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소설은 구성의 방식으로만 본다면 매우 건조하다. 오직 인터뷰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다.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피해의 참상들, 그 와중에 국민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는 부패한 정권, 기업의 사리사욕….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어가는 사람들의 슬픔이 생생해서 더욱 참혹하다. 

소설 대신 영화를 관람한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저런 일이 가능하겠는가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은 소설 속에서 더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 현재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물론 현재의 상황을 좀비 바이러스의 출현과 비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과장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처음 겪는 세계적 재난이든

개인적으로 겪는 고난이든

역경은 모두 교훈을 남긴다


그러니까, 이런 때. 아침마다 재난 문자 알람으로 눈을 뜨고, 확진자 수를 파악하기 위해 수도 없이 클릭을 하고,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 다니고…. 가족은 재택근무를 하고, 지인이 자가격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섭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사스를 직접 겪어봤음에도 그렇다. 

사스가 창궐하던 시기에 나는 중국에서 살고 있었고, 내가 살던 도시가 폐쇄되는 것을 겪었다. 기숙사가 있는 현지 중학교를 다니던 아이는 통학이 금지되고 학생 모두가 기숙사에 수용되었다. 가족 간의 면회도 되지 않았다. 

그런 무서운 경험을 겪어보았음에도 이 상황이 익숙지는 않다. 또 새삼스럽고 또 무섭다. 물론 코로나19는 극복하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갖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에는 더 강한 바이러스가 올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세계대전Z>를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재난이든, 개인적인 고난이든 역경은 교훈을 남긴다. 그래야만 한다. 상처는 흉터를 남기기도 하지만 치유의 과정을 통해 더 굳은 살로 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처는 흉터가 되기도 하지만

치유를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더 굳은 살로 변하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서 난생처음의 일도 해봤다. 뉴스에 달린 댓글에 신고를 눌렀다. 댓글을 잘 읽지도 않거니와 ‘좋아요’ ‘싫어요’도 눌러본 적이 없다보니 신고 클릭을 해놓고 혹시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오나 한동안 기다려보기까지 했다. 왜 신고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분명했다. 이런 때일수록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어지는 악의, 특정 나라나 지역에 대한 끔찍한 폄하, 무책임한 선동, 형편없고 근거 없는 비난, 인간이 인간을 무서워하게 만드는 말들. 아니다. 그건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익명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익명 속에 숨은 치기와 무책임과 비겁함의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용인되면, 무시되면, 그것 또한 바이러스다. 무섭게 전염되고, 누군가는 심하게 다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자꾸 ‘싫어요’를 누른다. ‘싫어요’를 연속해서 클릭하면 그게 두번 세번 싫은 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자꾸 누른다. 바이러스가 무서운 만큼 건강한 마음,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이 소중해서이다.

<김인숙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달 23일 코로나19 위기경보가 ‘심각’으로 격상된 이후, 방역당국과 전문가의 한목소리를 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핵심 전략으로 등장했다. 대형 종교·기업·교육기관이 포문을 열고, 중앙과 지방정부가 지원책을 공급하고, 시민사회가 동참하며 성과가 이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고대한 상황, 즉 확진자가 줄고 사흘째 완치자가 신규 확진자를 앞지르게 되자 현 상황에 맞는 사회적 거리두기 동력을 챙기는 도전이 시작된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확진자 폭증 때만 잠시 쓰고 폐기하는 전략이 아니고, 학교·직장의 ‘일상 셧다운’ 형태의 초강력 사회적 거리두기는 무한정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헌과 조사결과를 종합해보면, 우선 사회적 거리두기 그 자체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방역 전문가에게는 교과서적 표현이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신종’ 감염병 대응법일 수 있다. 따라서 더 와닿도록 소통해야 하는데, 문헌들은 이때 정치인보다는 전문가, 특히 지역 ‘인플루언서’를 통해 편한 눈높이로 사회적 거리두기의 목표가 ‘공유’되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지자체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원책 우선순위도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조사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외출 자제’에 비해 ‘진단서 없이’ 병가를 요청할 때 돌아올 불이익 두려움이 16%포인트 높았다. 한편 ‘대중교통 이용 자제’ 실천율이 상대적으로 낮은데, 20대와 노무직·판매·영업·서비스직이 더욱 낮다. 사회적 거리두기 전략에 지역 인구와 고용 특성이 구체적으로 담긴다면 참여 동기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참여·연대·학습’을 촉진하는 디테일을 챙기는 것이다. 조사를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 자가격리나 확진 상황에 대한 두려움 등 미충족 정보 수요를 확인했다. 캠프에 참여하면 프로그램을 주듯이, 무기력과 스트레스 경험을 줄이고, 비(非)대면으로나마 이웃을 보살피고, 신종 감염병을 합리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쑥과 마늘’로 연명하는 동굴 생활이 아니라 학습과 연대의 의미를 살리도록. 끝으로, 조심스러운 ‘사회적 거리두기’ 소통이 필요하다. 사회적 거리를 두자는 목소리는 우리 지역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막는 공포탄일 수 있다. 정보 전달과 소통에서 배제나 차별 같은 폐해를 최소화하는 세심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최근에 소규모 집단감염을 ‘잔불’로 표현하는데, 대가가 따를 수 있다고 본다. 나를 기준으로 하면 뜨겁기는 매한가지 불이고, 특정 지역 집중성을 벗어났기에 사실 내 지역과 나 자신의 더 큰 경각심이 필요한데, 그와 달리 ‘더 조심하자’보다 ‘이제 그만하자’는 요구를 높이게 만들 수 있으니까. 사회적 거리두기는 ‘센’ 방역 활동이다. ‘우리’가 주체라야 성과가 나오는 실천이고, 지역사회 감염 확산 현황과 ‘팬데믹’ 선언의 의미를 소통하면서 동력을 계속 확보해야 승산이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우리 서로 이 점을 유념하면 좋겠다.

<유명순 |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너! 고소.” 몇 년 전 어느 변호사가 사무소 인근에 붙인 포스터의 광고 문구다.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가 수

사기관에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고 고하는 행위다. 고소권 없는 사람이 처벌을 바라며 고하는 행위는 고발이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연간 55만건쯤 된다. 일본의 경우 대략 1만건인 데 비하면, 절대수로 50배이고 인구비를 감안하면 100배를 상회한다. 공직자와 공조직도 고소 대열에 끼어 있다. 검찰총장이 신문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민간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정당 대표가 칼럼을 쓴 교수와 이것을 게재한 신문사를 고발한다. 고소는 일단 고소한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고 고소당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든다. 이 구도에서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형사사법의 과잉은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바야흐로 ‘소송사회’다. 코로나19 확산에 책임이 있다고 알려진 신천지 대구교회의 교인 명단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일각에서는 바로 압수수색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긴급하게 명단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는 해도, 압수수색을 하려면 우선 범죄 혐의에 대한 소명이 있어야 하고 또 검찰이든 경찰이든 종교단체를 상대로 한 수사라는, 좀 거북한 일을 벌여야 한다. 그 교회의 최고책임자는 곧 명단을 제공했고, 명단의 정확성에 의심스러운 데가 있기는 해도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는 강제수사가 오히려 방역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뜻을 검찰에 전달했다.

택시업계가 타다를 운영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검찰이 이들을 기소했다가 무죄판결이 선고된 사건도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타다는 승합렌터카를 임차해 이용자에게 운전자를 연결(알선)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 영업이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서 말하는 “자동차대여사업자가 승차정원 11인승 이상 15인승 이하인 승합자동차를 임차하는 사람에게 운전자를 알선하는 행위”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가려야 유무죄의 판단이 나온다. 그런데 소송은 대립당사자주의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소송의 당사자는 둘이다 보니, 제3자나 넓게는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 또는 견해를 절차에 반영하거나 이들을 참여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타다 사건에서는 법조문 적용 여부를 넘어 택시업계의 기득권, 플랫폼 운송사업이라는 업태의 등장과 시장 진입에 대한 관리, 그에 따른 이해관계의 조정 내지 상생 방안의 강구, 교통서비스의 개선 등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다. 물론 소송에서도 이런 고려사항을 놓고 쌍방의 변론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소송이라는 장은 문제가 된 행위의 위법 여부를 따질 뿐 해결책을 제시하는 절차가 아니다.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 대신

각자도생의 길을 찾거나  

형사사법에 무작정 기댈 때  

그 결과는 ‘소송사회’가 된다


공론장에서 토론과 타협을 통해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해결할 문제가 소송이라는 비생산적 절차 속에 함몰되어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구조적 시각에서 여러 정책적 고려사항을 찾아 공론장에 올리고,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해 전문적 지식의 힘으로 분석하고, 대립되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토론과 대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합의를 이루거나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 할 일이, 소송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면 증거재판주의와 절차적 정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두 당사자가 힘을 겨루는 게임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세 사람 또는 한 사람의 판사가 사건을 맡아 이런 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적절할까. 유무죄 판단으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어렵사리 판결을 내렸더니, 이번엔 국회가 일사천리로 타다 영업을 사실상 봉쇄하는 입법을 내놓았다.  

사회적 공론이나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를 기존의 법이라는 잣대로만 판단하거나 사법적 처리방식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시도는 공동체의 지적 게으름과 역량 부족을 보여 준다. 검찰 권력이 비대화한 배경에는 이렇게 사회적 이슈를 성급하게 형사사법으로 처리하려는 풍조가 있다. 정치권도 자기들이 할 일을 해결하지 못한 채 고소·고발로 검찰을 불러내기 일쑤고, 결국 검찰이 사태의 해결사로 나선다. 그러다가 너는 범죄자이고 나는 너를 단죄해 정의를 실현하는 공익의 대표자라는 구도에서, 정작 문제의 실체와 해결책은 실종되고 별 의미 없는 승부만 덩그러니 남는 것이다. 

‘너! 고소’와 ‘너! 기소’는 함부로 할 일이 못 된다. 포스터 속의 변호사는 성난 표정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가락의 주인이 피해자든 검사든 손가락질은 사회적 공론이 필요한 이슈를 제대로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다.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 대신 각자도생의 길을 찾거나 형사사법에 무작정 기댈 때 그 결과는 소송사회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1번째 확진자’ ‘3번째 확진자’ ‘5번째 확진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초기에 ‘1번 환자’ ‘3번 환자’라고 불렀다가 마치 수감번호를 매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지적에 따라 ‘1번째 확진자’로 표기를 바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째’를 넣고 안 넣고가 큰 차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은 아마도 문법적 형식을 알리바이 삼은, 작은 자기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표현을 어떻게 바꾼다 한들 사람을 숫자로 기록하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이다. 번호표가 붙는 순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에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는 단지 국내에서 몇 번째로 바이러스 보유자임을 확인받았는지만이 의미가 있는, ‘감염자’로서의 존재로만 기록에 남는다.

누군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박하게 오갔을 삶의 동선은 오로지 바이러스의 이동경로가 되어 실험대 위에 올려진 실험동물처럼 낱낱이 해부당하고, 그럴 때마다 “마트는 왜 간 거지” “도대체 버스는 왜 탄 거야” 같은 원망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숫자로 객체화된 그는 N번째 확진자로서 바이러스를 실어 나른 매개체일 뿐이다.

누적 확진자가 세 자릿수를 넘어서면서 손가락으로 세기 어려워진 순간부터는 숫자 대신 그들을 규정하는 다른 꼬리표가 생겼다. 예를 들어 ‘신천지’ ‘콜센터’ ‘줌바댄스’ 같은 것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한 어린이집 관련 커뮤니티에는 자신을 어린이집 원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이 와중에 콜센터 취직했다는 학부모’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한 원아 엄마가 보험사 콜센터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교사들이 그 집 아이를 못 보겠다고 난리”라는 내용이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조합원에 포함된 희망연대노조는 “어떤 공공기관 콜센터는 상담원을 대상으로 대중교통 이용 여부를 전수조사하고, 앞으로 대중교통 대신 다른 (출퇴근)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상상력은 때로 ‘불필요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확진자와 연관된 모든 단어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 바이러스화되어서, 콜센터 상담원은 모두 싸잡아 어린이집과 대중교통을 위협하는 ‘잠재적 감염원’처럼 다뤄진다. 확진자가 다녀간 곳은 방역당국이 즉시 소독을 하기 때문에 늦어도 이틀 후면 안전한 곳이 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가 공중에 떠다니는 상상을 하면서 확진자의 동선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 역시 바로 상상력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공감력’이라는 다른 말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드러낼 수 없기에 지워져버린 이야기와 구조적인 맥락을 읽어내는 힘 말이다.

확진자들은 숫자가 아니다.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고, 대중교통을 타야 이동할 수 있으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우리와 똑같은 일상에 발 딛고 서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살아가기 위한 일상의 조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바이러스를 선택해 감염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의 녹즙 배달원이 집단감염이 발생한 구로구 콜센터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어떤 사람들은 “이제 위험해서 녹즙도 못 시켜 먹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겁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바이러스의 연쇄 고리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같은 사실을 놓고도 다른 현실을 떠올렸다. 새벽 5시30분에 여의도로 출근해 증권가 사무실마다 녹즙을 배달하고 오전 7시50분쯤 다시 구로구의 콜센터로 두번째 출근을 한 그의 고된 삶의 동선 속에서, 감염병이 확산되는 와중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열악한 사회적 현실을 읽어낸다.

대구에서 구급차로 확진자를 이송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소방교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확진자들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들도 피해자인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구급차에 오를 때는 (제가) 되레 미안해진다”고 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확진자와의 싸움이 아니라 바이러스와의 싸움이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싸움을 우리는 함께 버텨내야 한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균형발전은 국가의 의무이고 권리다. “국가는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지닌다.”(헌법 제123조 2항), “국가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헌법 제122조) 이러한 헌법 정신에 따라 역대정부는 균형발전정책을 이어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개발시대에는 ‘균형’보다 ‘발전’이 중시되었다. 국토를 고루 키우는 대신 성장거점을 집중 육성했다. 거점을 키우면 그 효과가 주변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이론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경부축과 비경부축,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도시와 중소도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졌다.

민주화 이후 국가정책의 중점이 ‘발전’에서 ‘균형’으로 옮겨졌다. 김영삼 정부는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법을 만들고 수도권 공장총량제와 과밀부담금제를 실시했다. 김대중 정부는 수도권을 규제하던 방식에서 한발 나아가 지역산업을 육성하고 경쟁력을 키우는 지역발전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외환위기에 대응하느라 균형발전에 충분히 힘쓸 겨를이 없었다.

균형발전이 최상위 국정과제로 강조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다. 후보시절에 수도 이전을 공약했고, 정부 출범 첫해에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서울과 과천에 있던 9부 2처 2청의 정부기관들이 세종특별자치시로 옮겨갔다. 행복도시 건설에 버금가는 또 하나 참여정부의 획기적 균형발전 정책은 공공기관 지방이전이다. 논란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전국 11개 시·도에 혁신도시가 건설되었고,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수도권에 있던 345개 공공기관 가운데 153개 기관의 지방이전이 완료되었다.

국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참여정부가 취한 특단의 균형발전 의지와 전략에 공감하면서 딱 하나 아쉬움이 남는 옥에 티가 있다. 혁신도시의 ‘입지’다. 수도를 옮긴다는 웅대한 뜻에서 시작된 행복도시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혁신도시는 도시 바깥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신 도시 안의 텅 빈 원도심에 들일 수는 없었을까? 도청이 옮겨가 휑해진 전주 원도심에 지방자치인재개발원과 농촌진흥청 등 12개 기관이 들어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도시 밖으로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를 짓는 대신 공공기관과 기업을 원도심 안으로 초대했다면 지금 원주는 어떤 모습일까? 원도심에 혁신도시를 들이는 ‘혁신도시@원도심’ 전략으로 공공기관 이전과 원도심 재생을 함께 묶어 풀 수는 없었을까?

인구감소시대에 짓는 신도시는 블랙홀과 같다. 주변에서 사람과 활력을 빼앗아 제 자신을 채운다. ‘윈-윈’이 아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겨루는 ‘제로섬’ 게임이다. 원도심은 스스로 쇠락한 게 아니다. 뺏기고 털린 것이다. 참여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 이제 더는 신도시를 짓지 말자. 수도권에도, 비수도권에도. 그 어떤 명분으로도. 비어가는 걸 방치한 채 자꾸 새로 짓는다면 균형도 발전도 헛된 꿈이고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청소년기후행동 청소년들이 13일 서울 광화문 센터포인트에서 정부의 소국적 기후대응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을 시작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기후변화’가 미국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를 처음 장식한 때가 1988년 6월24일(현지시간)이다. 제목은 ‘지구온난화는 시작됐다, 전문가 상원에서 말하다’였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임스 핸슨 박사는 전날 미 상원에서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에 의해 강화된다고 99% 확신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대중들에게 지구온난화·기후변화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미래세대의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경종이었다. 하지만 정부를 움직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5년은 기후변화의 또 다른 이정표가 세워진 해였다. 그해 12월에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됐다. 195개국이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합의했다. 기후변화 소송에서도 새 역사가 쓰였다. 그해 6월24일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네덜란드 헤이그지방법원은 환경단체 위르헨다와 시민 900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항소법원(2018년 10월)과 대법원(2019년 12월)을 거쳐 확정됐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5% 감축해야 한다.

그해 8월 미국에서도 의미 있는 기후변화 소송이 제기됐다. 눈에 띄는 점은 원고들이다. 원고 21명은 8~19세의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핸슨 박사의 손녀 소피 키블리핸(당시 16세)도 있었다. 이 소송은 뒷날 스웨덴의 10대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미래세대 환경운동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기후변화로부터 보호받을 헌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했지만 제9항소법원은 지난 1월 청구를 기각했다. “원고의 당사자 적격 사유 부족”이 이유였다.

청소년기후행동 소속 청소년 19명이 지난 13일 “정부의 소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정책이 생명권·환경권 등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한국 미래세대의 첫 기후소송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구온난화 위험에 놓여 있는 다음 세대 청소년들”이라고 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유독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이다. 이 소송의 결말이 궁금하다.

<조찬제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하루 식전엔 누가 대문 밖을 서성거리기에 문 빼꼼 열고 봤더니 그 눈치 없는 것, 봉두난발에 흙발로 샐쭉 깡통 내밀데요 언제 동네를 한바퀴 돌았는지 흰쌀에 노랑 조, 분홍 수수, 자주 팥 없는 것이 없는데 그냥 보내기 뭣해서 보리 싹 한줌 얹어주었지요 고것이 인사도 없이 뒤꿈치를 튀기며 가는데 멀어질수록 들판은 무거워지고 하늘은 둥둥 가벼워지고 먼 개울가에선 버들강아지 눈 틔우는 소리 들려왔어요 참 염치도 없지, 몽당숟갈 하나 들고 따라가고 싶더라니까요

이정훈(196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시에서는 구걸을 하러 온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의 추레한 행색보다는 그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얻어온 것들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흰쌀과 조와 수수와 팥 그리고 보리 싹 한 줌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아마도 파종을 하는 봄이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노는 땅 없이 땅을 갈고, 종자를 파종하고, 또 여기저기서 새순이 푸른빛으로 움트는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몽글몽글한 버들강아지에 봄볕이 곱고, 뒷산에 진달래가 피고, 들에 쑥이 돋는 봄이다.

봄이 왔지만 새싹과 꽃을 볼 여유가 도통 없는 요즘이다. 하지만 봄은 우리 앞에 쌓인, 불안과 고통의 언덕을 넘어 우리의 마음으로도 머잖아 들어올 것이다. 우리의 마음 바구니에도 파릇파릇하고 향긋한 봄이 얼른 담겼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다들 저마다 과거로의 퇴행을 막기 위해 선거 전망과 다양한 비례위성정당 제안을 내놓았다. 난 이 곤혹스러운 고민이 가지는 절실함과 진정성을 믿는다. 다만 그중 일부 논객들은 과거 조국, 지소미아, 코로나19 사태에서 일관되게 일주일 앞도 못 내다본 걸 기억한다. 이분들이 스스로 가장 자랑하는 게 정치 윤리가 아니라 정치 현실주의라는 게 나에겐 기이한 퍼즐이다. 왜냐하면 자주 현실 예측에 실패하는 현실주의는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떡하든 정치연합을 확대하려 하기보다는 비생산적으로 감정을 건드리고 진보정당의 핵심 지역구 기반을 위협하는 등 정치연합을 축소하는 데 매진하는 건 현실주의가 아니다. 이번엔 이들의 수학적 시뮬레이션 능력이 맞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균열이 선거 이후 복합위기의 비상조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확장된 연합의 걸림돌이 될까 난 두렵기만 하다. 어느덧 현실지형이 되어버린 비례위성정당 추가 논쟁은 비생산적이다. 어떤 선거 참여 형태이든 이제는 시민들의 판단에 과감히 맡기자. 오히려 남은 기간 및 선거 이후엔 다음 공동 행동에 힘을 모으면 어떨까 제안한다.

첫째, 균형예산론 거부 선언과 재난 뉴딜 정치연합을 결성하자.  

오늘날 균형예산은 무책임하고 보수의 철 지난 패러다임이다. 이번 행정부가 보수 정부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 ‘재난 자본주의’ 단계는 팽창이 아니라 수축 국면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넘어 심지어 ‘현대화폐이론’의 완전 일자리 보장을 위한 국가 책임론까지 논쟁이 되는 세상이다. 이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만큼 현 단계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국면은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청와대는 그저 전례 없는 대책을 주문하는 곳이 아니라 전례 없는 대책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당장 추가 추경의 폭에 대한 기술적 논쟁을 넘어 균형예산론자들 및 이와 다른 관점의 진보 경제학자들의 근본적 패러다임 토론부터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당장의 한시적인 재난 안정소득에서부터 총선 직후 기본소득과 청년 사회상속제에 이르기까지 ‘뉴노멀과 (그린) 뉴딜 정치연합’을 성사시켰으면 한다. 그린 뉴딜? 그렇다. 앞으로 더욱 악화될 감염병 시대는 자연 생태계 파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린 뉴딜에 모른 척하는 건 곧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행동에 다름 아닌 반(反)생명 행위이다.    

둘째, 코로나19 사태 직후 다가올 복합위기 예방 TF를 초당적으로 구성하자.

정부가 해외 체류 시민 한명 한명의 생명까지 철저하게 신경을 쓰는 미국을 보며 부러웠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질병관리본부 전문가 및 의료진들의 세계적 수준과 민주 정부의 투명성, 지자체의 창의성을 가진 대한민국에 사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21세기 정치는 위기를 뒤쫓아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미리 예방적 개입을 하는 소명을 가진다. 지금 청와대와 정치권이 할 일 중 하나는 감염병, 기후파국, 식량 위기, 경제 대위기 등에 대한 전문가 TF를 통해 코로나19 사태 종료 직후부터 닥쳐올 새롭고 더 비극적인 복합위기 개입 패러다임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상조치가 일상인 시대에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사회적 거리 ‘줄이기’(특히 장애인, 노인, 외국인 노동자 및 취약 직종 노동자 등과의 강한 연결 확대) 사이에 새로운 균형을 발명해야 한다. 때로는 거리두기가 이들의 각자도생과 안전한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및 정치권이 이 거리두기와 거리 줄이기의 동시병행 담론을 주도해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전혀 차원이 달라진 국제 정치경제 맥락에 대한 적응과 새 패러다임을 준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김석현 인텔리전스코 파트너가 지적하듯이 기존 경제 가치사슬 파괴와 새로운 재난 보호주의를 극복할 비전과 리더십 말이다. 과거 메르스 직후 백서의 가장 핵심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정치권과 달리 이번에는 청와대와 뉴노멀 정치연합이 끈질기게 대비책을 만들고 실행을 조기 완료하길 절실히 호소한다.   

시간이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다가올 거대한 복합위기와 파국의 전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제발 이제 남은 에너지는 현재 긴급 과제와 파국적 미래 예방을 위한 넓고 단단하고 안전한 연결망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으면 한다. 이 과정을 잘 관리하면 음험한 탄핵 음모는 감히 발붙일 틈이 없을 것이다. 영화 <활>의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은가?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는.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휴업중인 서울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 모습 10일 서울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 입구에 휴업을 알리는 공고문이 붙어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코로나19의 창궐로 두 차례 연기된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개학 예정일이 1주일 앞(23일)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집단감염 사례가 계속되면서 또다시 개학을 연기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십명의 학생이 밀폐된 공간에서 장시간 수업과 집단 급식을 하는 학교가 바이러스 확산의 온상이 되기 쉽다는 우려 때문이다. 교육부는 이번주 초 개학 연기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현실적인 문제는 많지만 그 어느 것도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에 우선할 수 없다. 개학을 재연기하고 보완대책을 시급히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 

교육부는 지난 13일 시·도교육감 협의와 14일 감염병 예방 전문가 간담회 등을 통해 개학 연기를 숙고하고 있다. 교육당국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초 계획대로 23일에 개학할 경우 수업일수 감축 없이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줄이는 정도로 학사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개학을 추가로 연기하면 수업일수 단축이 불가피해진다. 초·중·고교의 경우 법정 수업일수 190일의 10% 범위에서 수업을 줄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전체 수업과정을 가르치기 어렵고, 1학기 중간고사 일정 등 고입과 대입에 중요한 학생들의 내신 성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개학 연기가 장기화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등 대입 일정 조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방역당국은 15일 “소아·청소년 연령층이 발병이나 중증도는 매우 낮아도 오히려 전파 과정에서는 증폭 집단으로 또는 조용한 전파집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인정했다. 학생들을 통해 가정과 지역사회로 전파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개학을 언제 하느냐보다 학교가 철저한 생활방역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각급 학교의 개학은 학생들이 안심하고 학교에 갈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 0~18세 확진자는 총 343명에 이른다. 섣부른 개학이 부를 위험성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교육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협의해 이르면 16일 개학 연기 여부를 발표한다. 추가 개학 연기가 결정된다면, 3주간의 개학 연기 기간 드러났던 문제점에 대한 보완이 시급하다. 당장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재택 학습이 가능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장비가 없어서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내신 평가 계획을 수정하고 수업일수 조정에 대한 법률적 검토도 서둘러야 한다. 수능을 포함한 대입 일정 등도 속히 결정해야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초유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하게 대응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5일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선거운동이 예전처럼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에서 맞붙게 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가 방역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21대 총선이 30일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져 시선 밖으로 밀려났던 총선이 어느덧 한 달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것이다.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을 겨루는 선거는 오는 26~27일 후보 등록을 하고 내달 2일부터 13일간 공식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감염병 유행 속에서 치르는 첫 전국 선거로 기록될 총선은 예전과 사뭇 풍경이 다르다. 후보들은 지하철역·거리·시장을 누비는 대신 조용히 인터넷과 유튜브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방역 봉사가 새로운 선거운동으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 거리유세 여부도 코로나19 진정세에 달려 있다. 처음 투표권을 부여받은 18세 표심의 향배도 주목된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선관위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코로나19는 승부를 가를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확산세를 잡은 정부 방역, 혼선 부른 마스크 대책, 경기 급랭과 추경 규모까지 국민들이 체감하고 평가하는 코로나19 민심은 표로 옮겨질 것이다. 막말·실언이나 선 넘은 정치공세도 유권자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례없는 비례대표 위성정당의 출현도 선거구도와 표심의 가변성을 높인다. 보수쪽 미래한국당에 이어 여당과 소수정당들이 참여할 비례연합당도 출범하는 까닭이다. 표의 비례성을 높이고 소수정당 진출 문턱을 낮춘 정치개혁 취지가 허물어지면서 꼼수가 맞서는 퇴행적 선거는 불가피해졌다. 독자 행보에 나선 정의당·국민의당 득표율, 첫 원내 진출을 노리는 소수정당들의 선택, 중도층 표심에도 위성정당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코로나19, 경제와 부동산, 공수처와 검찰개혁, 20대 국회 충돌을 두고 유권자 심판이 정권·야당 중에 어느 쪽으로 향할지도 관심사다.

4·15 총선 성적에 따라 여야, 범진보·범보수의 정국 주도권은 갈림길을 맞는다. 그럼에도 선거에서 정책이나 쇄신은 뒷전에 밀려 있다. 마무리 단계인 양대 정당의 지역구 공천도 당초 약속과 달리 2030세대 비율은 한 자릿수, 여성 공천율은 10%대에 머물러 있다. 코로나19가 이대로 선거를 압도하면 이번 총선은 자칫 선거홍보물만 보고 찍는 ‘깜깜이 선거’로 흐를 수 있다. 선관위는 후보들의 공약과 자질을 드러낼 수 있도록 TV토론을 활성화하고, 유권자들이 쉽게 그 영상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들도 출마자의 정책·공약과 됨됨이를 꼼꼼히 따져가며 한 표의 가치와 방향을 차분히 정하기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연합뉴스

‘사법농단 사건’ 핵심 피고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3일 법원의 보석 허가로 풀려났다. 그의 석방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연루 피고인 전원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앞서 1심 재판이 끝난 법관 5명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비위 통보한 66명 중 대법원이 징계를 청구한 법관은 10명뿐이고, 그마저 1년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재판을 받는 현직 법관 7명은 진작 재판업무에 복귀했다. 법원이 ‘사법농단 판사 구하기’에 나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정신이며 불구속 재판 역시 피고인의 권리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은 사법농단 전 과정을 시행한 핵심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범죄를 시인하고 반성하기는커녕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검찰 주장대로 구속 당시와 비교할 때 보석을 허가할 아무런 사정의 변경이 없다. 풀려나면 말을 맞추거나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구속기간도 4개월이 남아있다. 그런데 법원은 ‘참고인에 미칠 영향력 감소’ ‘일부 증언완료’ 등을 이유로 보석을 허가했다. “서약서, 주거제한, 보증금 등 조건을 부가하면 죄증인멸을 방지할 수 있다”며 그를 풀어줬다. 법을 수호해야 할 법원이 조직보호에 법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3월 16일 (출처:경향신문DB)

시민들은 사법농단 재판이 정의 실현의 과정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개혁을 통해 국민신뢰를 회복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이다. 사법농단 법관들이 아무 일 없는 듯 재판을 계속하고, 핵심 피고인들은 풀려났다. 이런 식이라면 남은 재판과 징계 결과도 뻔하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일들이 사법부의 신뢰에 미칠 영향이다. 이렇게 제 식구를 감싸는 사법부의 결정에 시민들이 얼마나 수긍하고, 또 사법농단 법관들이 내놓을 재판 결과를 당사자들이 얼마나 승복할지 걱정된다. 더 이상 법원에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여론이 나온다. 신속한 재판과 법관 탄핵으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재판 지연으로 정의 실현이 늦춰져서는 안된다. 법관 탄핵은 119명의 각급 법원 대표판사들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제시한 바 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연대조직도 출범한 터다. 국회는 법관 탄핵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사법부 신뢰회복은 물론 법과 원칙·증거에 따라 국민 모두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되찾는 길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