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코로나19 여파로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개학을 2주일 더 연기하기로 발표한 17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파장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교사들이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한 교과서와 선물 등을 정리하고 있다. 수원 _ 연합뉴스

교육부가 17일 전국 유치원과 어린이집, 초·중·고교의 개학을 다시 2주간 연기했다. 1주 연기(2·23), 2주 추가 연기(3·2)에 이어 세 번째 연기 조치로 개학은 4월6일로 미뤄졌다. 학교의 5주 휴업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소규모 집단감염이 이어지는 속에서 개학 연기는 학생의 안전을 위한 적절하고 불가피한 조치라 할 수 있다.

학교의 장기 휴업으로 학사 일정의 조정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연기 가능성까지 언급된다. 교육법에 3주 이상 휴업 시 법정 수업일수를 10% 이내에서 줄일 수 있다고 규정한 만큼 학교에서는 행사 등 재량 휴업일수를 줄여 수업일수를 최대한 확보하면 된다. 또 1학기 기말·중간 고사를 치르는 방법이나 방학을 단축하는 문제도 학교 자율로 정하면 된다. 수업일수를 보장하되 교사의 업무 부담을 덜 수 있는 합리적인 조정을 기대한다. 관건은 코로나19의 진행 상황이다. 감염병이 장기화하면 개학을 포함한 학사 일정이 전면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에 초·중·고와 유치원의 개학을 2주간 연기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학사일정 조정보다 더 염려스러운 점은 학습 결손과 돌봄 공백이다. 교육부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습콘텐츠를 무료로 공급하고 교사가 온라인 학습방을 통해 예습 과제와 학습 피드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학력 저하를 막겠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학습자료의 질적 수준, 온라인 수업의 참여도 저하 등에 대한 대책도 함께 강구해야 한다. 대학 온라인 강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접속 불안정과 같은 문제도 없어야 한다. 시청각 장애학생, 농어촌 학생, 기초학력 미달학생 등과 같은 교육 취약계층에 대한 맞춤형 학습 지원 방안도 빠져서는 안될 조치다. 

학교 장기 휴업 상황에서 돌봄 문제는 학습보다 더 중요하다. 학습 결손은 훗날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만, 돌봄 공백은 성인이 되어서도 큰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만 8세 이하를 대상으로 긴급돌봄을 실시하고 있으나 참여율이 매우 낮다. 돌봄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학부모들이 집단돌봄에 따른 감염 우려를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 학교 휴업 중에 학원을 찾는 학생들에 대한 방역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학교 휴업의 1차 목적은 감염 차단이다. 학교·유치원 방역 강화와 함께 학생에 대한 촘촘한 학습지원 및 돌봄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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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드러난 이 시대의 진짜 문제는 신천지도 중국도 아닌 가난과 불평등이라는 통찰이 실로 설득력 있다. 당장의 재난을 타개하는 것뿐 아니라 위기 탓에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하게, 약자가 더 약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모든 방책이 모색·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재난’은 재난 상황 그 자체와 ‘재난 이후’로 이뤄진다. ‘재난 이후’의 과제는 어쩌면 더 힘겹고 크다. 이를테면 신천지 같은 종교-네트워크에 빠진 소외된 젊은이들을 이 사회가 보듬고 다시 사회화시킬 만한 역량이 있는지?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노동자들과 늘 경제적으로 취약한 소상공업자들을 위한 인간적 작업환경과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이런 견지에서 사태의 와중에 (재난)기본소득과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는 것은 그나마 소망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대학도 다를 바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한국 대학의 취약함과 모순을 새삼스레 드러내고 있다. 이 위기를 거치며 또 ‘재난 이후’에 대학이라는 공룡이 멸종위기에 처할지, 도마뱀처럼 적응할지, 아니면 더 기괴한 괴물로 진화할지 알 수 없다. 대체로 불길하다. 사태로 드러난 대학의 문제점과 위기의 모습은 여러가지지만, 온라인 강의 대란은 대학의 근본적 존재론에 관련된다. 이번주부터 본격적으로 ‘웃프고’ 황당하고 답답한 사연들이 전국의 대학과 교강사와 학생들의 컴퓨터 화면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모두 처음 맞는 이 불가피한 상황이 당황스럽고 힘들다. 현상적으로는 교수·강사들이 비대면 수업과 동영상 강의에 익숙하지 않아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태의 실제 배경은 원격 수업에 필요한 인프라와 기준에 대한 대학의 준비가 없다는 데 있다. 특히 학교의 지원 없이 고용량의 장비, 제작과 업로드 등 기술적 문제가 교강사에게 떠맡겨진 경우나, 학생들에게도 추가 부담(각자 괜찮은 성능의 장비와 데이터를 사용해야 한다. 저소득 계층 학생들과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없는 유학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이 부여된 경우도 많다. 당장 교실 개강 전까지 대학들은 최선을 다해서 온라인 강의 환경을 개선하고 특히 저소득층 학생들과 비정규직 교강사를 배려해야겠다. 

그런데 등록금 반환 운동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학생들의 불만은 기실 비대면 수업 이상의 근본 문제에 닿아있는, 묵은 이야기다. 즉 한국 대학의 교육의 질과 ‘졸업장’의 ‘가성비’ 문제다.(대학생을 ‘청년’이 아닌 가성비 따지는 소비자로 바꿔놓은 책임은, 대학을 이념과 자치를 상실한 직업 훈련소로 만든 기성세대와 대학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다.) 가깝게는 강사법 시행 전후로부터 대학 교육의 질이 급격하게 나빠져왔고, 이에 대한 학생들로부터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대다수 원격수업은 대학이란 곳이 제공해야 할 최고 수준의 교육과 그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학원이나 실습·실험 수업은 물론 기초 교과에 속하는 것도 상호 작용과 상호 주체성이 없다면 부족하다. 일방적으로 트는 동영상 강의가 유튜브와 쉽게 비교되는 것은 당연하겠다. 거기엔 진정한 전문가나 전인적 삶의 주체가 되는 길이나, ‘교학상장’도 ‘해방을 위한 페다고지’도 없다. 원격수업은 지금처럼 비상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대학에 시간·공간·비용을 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채택되는 교육 서비스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 대학 논리에 찌들거나 미국식 대학교육의 ‘선진성’(?)을 오해하는 일부 대학 당국자가 온라인 수업이 마치 진리이자 대안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상상황에서 대규모로 급하게 진행되는 원격수업 실험이 성공적이라면? 오히려 현재의 대학체제와 그 근본에 더 큰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 대도시 한가운데 지어놓은 커다란 건물들은 무슨 소용이며, 정규직 교수의 권력 독점에 기반한 행정체계와 이사장·총장·학장들의 권위와 감투는 무슨 필요가 있겠나? 좋은 온라인 강의 솔루션과 유능한 데이터 관리자, 그리고 ‘일타 강사’ 그룹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하면 되지 않는가? 이미 이런 방향을 구상하는 대학 자본가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학은 그리 간단한 제도는 아니다. 

사실 지금 당장 한국 대학의 재정 부족을 해결하고 고등교육의 질을 한두 단계 높일 수 있는 쉬운(?) 대안은 이미 나와있다. 고등교육 재정을 확충하고 사학재단이 전입금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하며, 부실·부패한 사학을 공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 내부의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확장하면 된다. 다만 기득권과 정부와 교수들의 안일함이 철벽이기 때문에 못하고 있다.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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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몇 주째 실천하고 있다. 새로운 기억이 추가되지 않으니 예전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나란히’가 아니라 ‘마주 보고’ 밥을 먹었던 기억, 모임에서 함께 웃고 마셨던 기억, 함께 여행을 갔던 기억들을 꺼내어 추억 속을 산책하듯 거닐고 있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잠시나마 그 시간을 다시 사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92세이고 치매를 앓고 계신다. 얼마 전에는 딸인 이모에게 “뉘신데 우리 어머니를 꼭 닮았냐”고 하셨고, 대청마루에 누워 있는 아기들을 돌봐야 한다는 얘기도 자꾸 하신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크지만, 과거의 시간을 살고 계신 할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속상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외증조할머니를 뵌 적은 없지만 이모가 외증조할머니를 꼭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는 이모를 볼 때마다 잠시 외증조할머니를 마주한 기분이 든다. 대청마루에 누워 있다는 돌봐야 할 아기들은 나의 어머니와 큰외삼촌이시다. 큰외삼촌은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외할머니의 머릿속에선 대청마루에서 동생과 놀고 있고 어머니가 보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외할머니의 오늘엔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도 아직 살아계신다. 나는 이모를 보고 외증조할머니를 떠올렸듯 대청마루에서 외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는 아기였던 어머니와 외삼촌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외할머니 옆에서 잠시 그 시간을 살아본다. 그 시간은 겹쳐져 흐른다. 외할머니의 오늘이며 동시에 나의 오늘이기도 하다. 함께했던 기억들이 있는 한 무엇이든 견딜 수 있고 괜찮을 것이다.

함께한 기억들을 함께 떠올린다는 건 그 시간을 또 한 번 같이 사는 게 아닐까. 지금의 이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함께한 기억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는 동안 그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릴 것이다. 그 기억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예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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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한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비상저감조치 시행에 나서고 있다. 눈에 띄는 조치는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이다. 석탄화력발전은 대기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최대 배출원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빠른 속도로 퇴출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러한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발전설비 제조 기업인 두산중공업은 변화를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두산중공업의 이러한 ‘오판’은 주주뿐 아니라 한국 국민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매출 하락이 시작된 2013년 이후 한 번도 당기순이익을 기록하지 못했다. 발전설비 시장 트렌드가 달라지면서 수주잔액이 감소했고, 매출액은 지난 6년간 30.6% 감소했다. 지난 5년간 주가는 85% 하락했고, 신용등급은 A+에서 BBB까지 떨어졌다. 두산중공업이 당장 올해 재융자(refinance)해야 할 채권이 7090억원에 이른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산중공업 경영진은 세계 에너지 시장 동향을 진지하게 살펴봐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지난 한 해에만 미국에서 8개 석탄회사가 도산했고, 호주에서는 상장된 4대 석탄회사가 모두 큰 손실을 내면서 주식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반면 석탄 사업을 정리하고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한 회사들은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스페인 전력기업 이베르드롤라와 미국 넥스테라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산중공업은 여전히 석탄, 가스 등 화석연료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자와 9·10호기 석탄화력발전소 사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중에서도 복합화력 가스터빈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작년 가을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생산을 시작했지만, 후발주자인 두산중공업이 한국 가스터빈 시장은 확보할 수 있을지라도 지멘스나 GE, 미쓰비시와 같은 전통 강호들과 세계에서 경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설상가상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저장장치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시아 가스발전 시장의 잠재력은 점차 줄고 있다.

두산중공업과 거래하는 해외 전력회사, 금융기관, 바이어들은 두산중공업의 경쟁력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두산중공업을 통해 한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낼 목적으로 사업을 진행한다. 한국 정부가 거액의 정책금융을 유치한다는 조건하에서만 두산중공업과 거래하려 하는 이유다. 납세자 관점에서 이런 상황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두산중공업의 사업 판단 실패에 대한 대가는 누가 치를까? 대우조선해양의 사례에서 경험했듯 공적 자금으로 기업을 살리려는 시도는 국민 부담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정부 차원의 응원이 단기적으로 두산중공업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산중공업이 납세자들의 지원 없이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가 결코 그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멜리사 브라운 | 에너지경제·재무분석연구소(IEEFA) 아시아 담당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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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구를 줄이려면 사망률을 높여야 하고, 그러려면 빈민에게 청결교육을 하지 말고, 그들이 사는 도시의 골목길을 좁게 만들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북적대게 해 전염병이 돌게 해야 한다.” 맬서스 목사가 <인구론>에서 퍼부은 악담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선 그의 말을 뒤집으면 바로 질병관리본부의 대책이 된다. 청결을 유지하고, 사람이 북적대지 않게 하는 것, 곧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 된다. 

한국인은 연고주의와 집단주의, 체면의식이 유난히 강해 전염병을 다스리는 데 아주 취약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런 문화와 관습, 의식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국민의 삶을 옥죄는 전염병이 어쩌면 우리의 전근대적 삶을 성찰하고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다. 

결혼문화: 한 동창생은 3월의 딸 결혼식을 6월로 연기했다. 그는 이참에 가까운 친지만 모시고 ‘작은 결혼식’으로 치르고 싶었는데, 위약금 때문에 예식장 결혼식을 할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잔치는 원래 베푸는 자리였는데 과시용이 돼 버렸다. 한국은 세계에서 청첩장을 많이 보내고 결혼비용을 많이 지출하는 나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세계에서 신혼여행 가는 거리가 제일 먼 나라로 조사되기도 했다.

장례문화: 정치부 기자 출신 후배 문상을 하러 이대목동병원에 갔더니 “조문객이 준 것 같다”는데도 정치인 등 꽤 많은 이들이 왔다. 병원 곳곳에 ‘문병을 삼가달라’는 공지문이 붙어 있었지만 ‘문상을 삼가달라’는 건 없었다. 

회식문화: 한국 노동자는 일과 후에도 회식이 있는 날은 주야간 근무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2·3차로 이어지는 노래방문화는 술과 노래를 잘 못하는 이들에게는 고역이다. 직장이 서울이면 출퇴근에도 두세 시간 걸리니 가족과 어울리거나 독서와 취미생활을 할 여유가 거의 없다. 

예배문화: 유럽에 6년간 체류할 때 놀란 것은 성당과 교회 어디를 가봐도 많아야 100여명이고 수십명 신도가 예배를 보는 광경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도 수 기준 세계 최대 교회는 56만명의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줄줄이 서울에 있다. 성경에도 예수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했는데, 우리 개신교는 거대한 교회를 짓고 메가이벤트처럼 예배를 진행한다. 국민은 종교집회의 한시적 전면금지까지 76%가 찬성하는데, 연세중앙교회와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 등 서울에 있는 교회 33%는 교회당 예배를 강행했고, 중단했던 광림교회마저 15일 재개했다. 결국 성남 은혜의강교회는 목사 부부와 신도 5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신천지교회에 이어 개신교회들이 바이러스 배양접시가 되고 있다. 신천지는 교주의 영생론이나 포교방식 등에 문제가 많지만, 그런 ‘이단’에 청년들이 왜 의탁하는지 기성 교회는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선거문화 : 우리 선거제도는 대중 동원 능력이 월등한 거대 정당에 의석을 몰아준다. 정책보다는 이미지 정치에 치중하느라 ‘서민 코스프레’가 선거운동의 단골 메뉴다. ‘알바생’을 동원해 거리에서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세 과시를 하는 것이 우리 특유의 선거문화가 됐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살 때 시의원 후보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집집이 전단을 돌리는 걸 보고 감동한 적이 있다. 돈 안 드는 정치의 전형이 거기 있었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결혼과 장례에서 종교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몸에 밴 관습과 문화는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자연 파괴와 생태계 교란으로 신종 전염병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전근대적 삶의 방식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방역의 수단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자칫 ‘사회적 연대’나 공동체정신의 약화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빈부·지역 격차와 세대·성별·종교 갈등이 극심한 사회를 만들어 인간이 서로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것은 바이러스에 패하는 길이다. 전국의 의료진이 대구로 달려가고, 광주의 병원이 대구의 확진자들을 수용하고, 대기업이 연수원을 치료센터로 내주는 모습을 보면, 배제가 아닌 배려가 최고의 백신임을 느끼게 한다. 거리 두기와 연대는 둘 다 ‘배려’라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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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15일은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일이다. 4년간 국민을 대표하여 행정부와 사법부를 감시하고, 좋은 법률을 만드는 일꾼을 뽑는 날이다.

오랜 기간 선거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총선이 축제의 장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선거 전후 수많은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도 수사와 재판을 받고, 급기야 자격이 상실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이다(2020년 1월 기준 제20대 국회의원직 상실자는 14명, 제17대 18명, 제18·19대는 각 21명에 이른다).

이번 총선은 선거연령 하향,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 예정 등 예측이 어려운 변수들이 많아 그 어느 때보다 법 위반을 둘러싼 다툼이 크게 늘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현 정부 중간평가 성격도 띠고 있어 여야 간 치열한 경쟁으로 선거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검찰은 총선 대비 회의를 개최하고 3대 중점단속 대상을 발표했다. 여론조작과 금품수수, 공무원과 단체 등의 불법 개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최근 두 차례의 총선에서 다수 발생한 선거법 위반 유형은 거짓말, 금품, 불법 선전 순이었다. 이번에는 거짓말과 불법 선전을 합해 여론조작으로 분류하고, 공무원의 불법 선거개입을 중점단속 대상에 포함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예전에는 통반장이 여당 후보를 위하여 이웃들에게 고무신, 비누 등 생활필수품이나 돈 봉투를 돌리거나, 공개투표와 유사하게 군부대에서의 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공무원이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정보경찰이나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특정 후보에 대한 불법 선거운동 신고나 뚜렷한 첩보 등의 근거 없이 정보 수집이나 불법 선거운동 예방 명목으로 계속 따라다니며 밀착 감시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해당 후보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상대 후보의 당선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현 정권의 청와대 전 근무자, 전 지방경찰청장 등을 포함한 13명이 울산광역시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기소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소위 진박 후보자들을 위하여 제20대 총선 공천에 관여하였다는 등의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위 사례처럼 공무원이 선거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면 선거의 중립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고, 선거에 패한 후보는 결과를 승복하기 어려워지며,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비교적 발생 건수는 적지만, 선거 전체의 공정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공무원의 선거 불법 개입 행위를 중점단속 대상으로 선정하고, 이를 엄단하겠다는 대검찰청의 방침은 타당해 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오는 4월15일 열리는 제21대 총선이 깨끗한 선거로 치러져 국민에게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상진 |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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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 개혁을 향한 기나긴 도정을 돌이켜보면 너무도 허망한 결말이다. 천신만고 끝에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취지와 목표는 무너지고 증발했다. 연동형이 적용되는 비례대표 30석의 ‘도둑질’을 노린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전용 위성정당 때문이다. 기득권 거대 정당에 불리한 선거제 개혁을 꼼수와 변칙의 ‘위성정당’ 협공으로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더티한 승리’ 혹은 ‘원칙 없는 패배’만을 택한 나쁜 정치다.

선거제 개혁의 지향은 분명하다. 거대 정당의 과잉 대표성을 막고 정치생태계의 다양성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해 민의가 좀 더 온전히 반영하는 국회를 구성하자는 취지다. 선거제 개혁은 ‘노무현의 꿈’이었고, 고 노회찬 의원의 필생의 정치적 과제였다. 패스트트랙 충돌 과정에서 후퇴를 거듭한 끝에 제한적이나마 비례대표 30석에 연동형이 도입되었다. 30년 넘게 이어져온 기득권 정치의 성채를 허물 30석의 진지가 마련된 것이다. 정치를 바꿀 그 30석의 희망의 터전마저 유린하는 게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놀음이다.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과 비례연합정당의 등판은 선거제 개혁 이전보다 비례성을 더 악화시킬 게 뻔하다. 표의 등가성이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두 영역에서 거대 양당의 기득권과 독과점 구조가 강화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준연동형 비례의석을 훔치려 기어코 가설정당(미래한국당)을 만든 미래통합당이 정치흑역사의 막을 열었다면, 반칙에 반칙으로 맞선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 참여가 끝판이다. ‘원조 꼼수’와 ‘정당방위’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권영길 전 의원의 표현을 빌리면 ‘강도냐 도둑이냐’의 논쟁밖에 될 수 없다.

아무리 ‘연합’으로 포장한들 비례연합정당은 민주당의 사실상 위성정당이다. 빈약한 명분을 벌충하고, 연합의 의미가 최소한 보장받으려면 무엇보다 정의당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한데 ‘반동적 보복정치’ ‘부실 상정’ 등 도 넘은 공격으로 정의당의 참여를 압박하던 민주당의 표정이 돌변했다. 정의당을 빼고도 목표 의석이 나온다는 민주연구원의 계산서를 받고나서다. 어쩌면 민주당의 비례정당 개설은 애초 전체 진보개혁 블록의 의석 증가보다 정의당의 연동형 비례의석 줄이기를 전제한다. 여권의 비례정당이 의석수 늘리기의 목적을 이루게 되면 미래통합당의 1당 저지 못지않게 정의당의 부상을 막는 구실을 하기 십상이다. 기본적으로 거대 양당의 비례정당은 제3, 4당의 비례 몫을 가장 많이 빼앗아 오기 마련이다. ‘비례연합당 논리가 민주당 왼편 정당의 성장을 막는 데 활용된 민주대연합론의 2020년 버전’이라는 진단은 그래서 날카롭다.

코로나19가 모든 이슈를 흡수하면서 인물, 정책, 구도가 실종된 깜깜이 선거 양상이다. 희한한 선거판에서 비례위성정당 대결 구도만 뾰족하다. ‘비례정당 프레임’이 압도하면 진영 대결이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비례투표에서마저 위성정당의 대리전이 펼쳐지면, 선거의 의미는 거대 양당 간의 세력 다툼으로 협소해진다. 본디 선거제 개혁은 양당의 독과점 체제를 분산시키려는 것인데, 거꾸로 더 극단적인 양극 정치를 초대할 판이다.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이 비례위성정당을 만드는 순간 예견된 결말이다. 이제 ‘미래통합당을 막기 위해 민주당을 찍’거나 ‘민주당을 저지하기 위해 미래통합당을 찍’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강요할 터이다. 거대 양당 중심의 적대적 공존 체제와 대결 정치는 21대 국회에서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비관이 스멀거린다. 정녕 새로운 국회, 정치에 대한 희망의 다리는 끊긴 것인가.

개정 선거법의 준연동형이 처음 적용되는 총선이다. 거대 정당의 비례위성정당 꼼수로 정치개혁의 소중한 싹이 허망하게 꺾이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한 자릿수를 기록하던 국민의당이 선거에서 정당득표율 2위를 기록했다. 기득권 양당이 반칙에 반칙을 거듭하면 표심은 제3의 길을 찾게 된다. 

짓밟힌 선거제 개혁의 불씨를 살리고 정치변화의 초석을 놓기 위해서는 반칙의 위성정당을 위축시키는 길밖에 없다. 이대로는 지역구는 거대 양당이 나눠 먹고, 비례의석도 독과점이 불가피하다. 방도는 하나뿐이다. 비례대표를 뽑기 위한 정당투표에서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을 빼고 투표하면 된다. 정당투표 용지에는 꼭두각시 위성정당을 빼고도 긴 목록이 남아 있다.

<양권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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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은혜의 강 교회측이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 입에 분무기로 소금물을 뿌리고 있는 장면. 경기도 제공

세계는 지금 두 개의 전염병과 싸우고 있다. ‘코로나19’와 ‘인포데믹(정보전염병)’이다. 인포데믹은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의 합성어로, 잘못된 정보가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은 미국 전략분석기관인 인텔리브리지(Intellibridge)의 창립자인 데이비드 로스코프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으로 세계가 공포에 떨던 2003년 5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사용했다. 인포데믹의 매개체는 인터넷과 미디어다. 때로는 권위자, 전문기관의 외피를 쓰고, 참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대중의 마음에 파고든다. 물리적 전염병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지만, 정보전염병은 지구 반대쪽까지 빛의 속도로 도달해 비이성적인 행동을 유발하고 사회·경제적인 파국을 가져올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초 코로나19와 관련해 진위를 따질 수 없는 무분별한 정보가 범람하며 방역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일찌감치 ‘대형 인포데믹’을 경고했다.

지난 주말 성남의 한 교회에서 가짜정보로 인해 교인들이 무더기 코로나19 확진판정을 받으며 인포데믹의 위험을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예배 때 감염을 막는다며 신도들에게 차례대로 입안에 소금물을 분무했는데, 방역당국은 이를 인포데믹으로 규정했다. 충격적인 일은 ‘따뜻한 소금물로 자주 입안을 헹구면 예방 효과 있음’ ‘콧물과 가래가 나면 보통 감기’ 등의 가짜정보가 대한영양사협회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올라 있다는 것이다. ‘오염된 진실’에 단체의 권위까지 더해지면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5년 전 메르스 사태 후 ‘의료와 사회’ 잡지에 ‘어쩌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글이 실렸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공포와 불신의 감염이 더욱 위험하다며 정보의 공개 못지않게 바른 유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현 상황에서도 유효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전파되는 ‘서울의대 졸업생 의견’ 등 가짜 정보에 현혹되지 말고 방역당국이 강조하는 일관된 행동수칙만을 따르는 것이다. 가짜정보를 걸러내면서 바른 정보가 먼저 도달하도록 해야 인포데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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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통합당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4·15 총선 비례대표 후보자 공천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통합당 황교안 대표(왼쪽 사진)는 17일 다른 비례정당을 만들 수 있다고 ‘최후통첩’했고, 미래한국당 한선교 대표는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맞섰다. 연합뉴스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4·15 총선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두고 두 당이 갈등하고 있다. 미래한국당이 지난 16일 발표한 비례후보 명부 중 당선권 안에 모정당인 통합당이 비례대표 후보로 영입한 인사가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례 명부 40번 안에 통합당 영입 인사는 5명만 포함됐고 그나마 모두 20번 밖에 배치됐다. 통합당이 재공천을 요구하자 미래한국당 공병호 공천관리위원장은 “가장 독립적이고 중립적으로 공관위가 운영된 결과”라고 맞섰다. 그는 “결과를 부정하고 싶다면 날 자르고 다시 공관위를 만들라”고 반발했다. 비례전문 위성정당 창당도 문제였는데, 거기에 본당과 위성정당이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놓고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니 더욱 어이가 없다.

미래한국당의 공천을 둘러싼 잡음과 갈등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비례 명부 발표 후 태도를 보면 두 당의 동상이몽이 드러난다. 미래한국당은 서류심사부터 면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점수로 수치화한 뒤 집단합의로 결정했다며 공정한 공천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통합당은 자당 영입 인사들이 당선권 밖으로 밀려난 것을 문제 삼으며 “공천 쿠데타”, 한선교 대표의 ‘옥새파동’이라고 비판한다. 통합당 입장에서 미래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빈틈을 노려 비례대표 의석을 독식하려는 욕심으로 만든 일회용 정당일 뿐인데, 그 꼭두각시 정당이 주제넘게 자율공천을 하겠다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래한국당의 독립적인 공천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는데 이를 시도한 셈이다. 꼼수가 필연적으로 또 다른 배신을 부른, 막장정치의 전형이다.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17일 한 대표와 만나 “잘못된 부분들이 있으면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뜻으로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이후 한 대표는 “최고위에서 공천관리위원회에 재심의를 요청하겠다”고 물러섰다. 황 대표가 다른 정당 비례대표 공천에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현행 공직선거법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자를 추천하는 경우 정당은 민주적 심사절차를 거쳐 대의원, 당원 등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민주적 투표절차에 따라 추천할 후보자를 결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선관위는 지난달 이를 근거로 당 대표나 최고위원회의 등이 비례대표 후보자 전략공천은 위법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선거법 위반의 여지가 있는 만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미래한국당의 비례 공천 과정을 면밀히 짚어야 한다. 500명이 넘는 지원자들에 대한 3분 면접으로 이뤄진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 후보 심사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진행됐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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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 해안에서 멀지 않은 내륙에 자리한 모스타르는 한때 ‘발칸의 화약고’라 불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도시다. 오스만 제국의 걸작이라는 아름다운 석조 다리와 주변 경치로 유명하지만, 소박한 이슬람 사원의 첨탑과 교회의 십자가가 함께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내겐 더 인상 깊었던 곳이다. 숙박시설의 정취도 다양해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이슬람이 오랜 시간 오손도손 살아온 지역이었다고 한다.

관용과 화합을 상징하던 이 도시가 민족과 인종, 종교, 정치 문제가 얽히고설키며 역사에 남을 제노사이드의 비극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건물 곳곳에 남은 총탄 자국과 전투의 흔적, 희생자들의 묘지가 남 일 같지 않아 한동안 현대의 분쟁 역사들을 살펴봤었다. 21세기 언저리의 이야기라 믿기지 않을 만큼 원시적 잔혹사가 넘쳐나, 밤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

여행을 하며 깨닫게 된 국가 흥망의 원인은, 흔히 생각하듯 자원과 영토, 특정 이념이나 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 최빈국 중에는 평생 놀고 먹을 만큼의 자원 부국이나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 한때는 풍요롭게 살던 나라도 많다. 땅도 좁고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도 영리하게 잘 사는 나라도 많다. 북유럽을 비롯해 경제대국이나 복지국가들 다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장단점을 유연하고 적절하게 융합한 곳들이다.

외세의 침략이 확연히 줄어든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자중지란 즉 내전인데, 내전의 원인을 다시 살펴보면 ‘불관용 사회’라는 점이다. 사람 사는 세상엔 늘 다른 생각과 감정, 사상과 종교, 인종과 민족이 섞일 수밖에 없다.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가고 가치가 급변하는 현대는 더욱 그렇고 미래는 더할 것이다. 경험과 상식과 지향이 다를 때 불편한 감정이 들고 때로는 비난과 비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름에 대한 적의가 정도를 넘어선 사회는 결국 지옥으로 향한다.

지옥 문을 여는 자들은 다양하다. 자본주의 신봉자도 있고, 사회주의자도 있다.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있고, 원리주의자나 수정주의자도 있다. 그럼에도 공통점만은 선명하다. 자신과 생각과 연고가 다른 이들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증오를 퍼나르며 사회를 이간질하고 내분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망국의 매뉴얼’이라 할 만큼 모두 닮았다. 내분이 많은 사회의 또 다른 공통점 중 하나는 한때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겪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곡된 역사가 시야는 좁히고 불안은 증폭시켜 본능을 자극하는 선전·선동에 쉽게 동요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지구촌을 생각하다 보면 대한민국의 모습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인다. 고통스러운 근현대사를 겪었음에도, 이념 갈등과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다이내믹하고도 평화로운 민주주의를 정착해 가고 있다. 여전히 미국과 소수 주변국에 고착된 좁은 안목, 이분법적 갈등을 조장하는 이들로 인한 해결 과제도 많지만, 국민의 지식수준과 함께 변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유사한 경험을 가진 수많은 나라의 비극을 알게 될수록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아픔이 나의 위로가 되어서도, 일장춘몽 같은 성취에 자만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삶이 참으로 힘들다고 느낄 때 가끔은 눈을 돌려 세계를 보자. 이 순간에도 약에 취하고 증오에 취해 가족과 이웃을 살해하는 이들, 기아와 질병, 강대국들의 이권 놀음으로 난민이 되어 떠도는 이들이 수억명이다.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도 함께해 온 많은 이들이 고맙다고, 더 힘든 세계의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여력과 내공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것도 괜찮은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만든 어떤 사상도 완벽하지 않고, 완벽해서 잘 사는 나라도 없다는 것을 넓은 세계에서 배우고 또 배운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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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금까지 코로나19 사태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이곳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지방에 며칠 전 첫 확진자가 발생, 수도 리스본으로 이송되어 격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거의 휴양산업에 의존하는 이 지역의 경제가 심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니 어찌할 수 없고 그래도 이탈리아보다는 상황이 아직 양호하다는 안도감 속에서 이곳 주민들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같이 인간이 자초한 재앙도 잦지만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이 맞닥뜨리는 재해도 많다. 32만명의 사망자를 낸 아이티의 대지진(2010)이나 인도양 전역을 강타해서 23만명의 사망자를 낸 쓰나미(2004)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순전히 자연재해라고만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스스로가 여러 가지로 재난을 더 키웠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연재앙은 그 규모가 큰 만큼 정치나 경제는 물론 사회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1755년 11월1일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재앙도 그러한 예로 자주 이야기된다. 당시 쓰나미와 지진이 몰고 온 재난으로 리스본시의 거의 전역이 파괴되고 6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재난은 그러나 지진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인간 이성의 승리를 구가했던 계몽주의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대재앙을 지켜보았던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말년에 남긴 풍자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야말로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세계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리스본의 대재앙은 주인공 캉디드가 그의 선생 팡글로스가 입버릇처럼 말한 ‘모든 것이 잘될 거야’라는 식의 낙관주의와 결별하게 만들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신이 어떻게 그런 참극을 용인할 수 있느냐는 그의 솔직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리스본의 큰 성당들은 그때 거의 무너졌다. 지금은 관광의 명소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당시 창녀촌이었던 ‘알파마’ 구역은 그러나 무사했다. 그래서 신이 정말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결과를 내버려뒀겠느냐는 질문이 당시에도 나돌았다.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지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신천지’에도 해당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든 ‘평화의 궁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매개처가 되었으니 말이다.

리스본의 대재앙 못지않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도 여러 차원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최초의 글로벌 해양제국이었던 포르투갈은 이 대재앙으로 인해 식민주의적 팽창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지금의 글로벌 체제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자와 수많은 사람의 이동 그리고 정보의 빠른 흐름 때문에 모든 국가와 지역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코로나19의 충격은 당시의 재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중국 우한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이지만 지금은 지구 상에 이로부터 안전한 지역은 거의 없게 되었고 지구적 범위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 또한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손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루아침에 많은 제약을 받거나, 더는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른 불안과 공포감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팽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어려운 숙제를 제시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허락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이 되었다. 나 자신도 오래전에 계획한 여행을 취소할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쓰고 떠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다.

이런 상황을 독일 보수주의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르드는 ‘무능을 보상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다소 난해한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했다. 어떤 뚜렷한 철학적 원칙을 따르는 행동이 불가능하기에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대응하는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원칙과 결별하는 것만이 오늘날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냐는 의문도 뒤따르지만, 경청할 만한 시대진단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리스본의 대재앙이 본격적인 지진 연구를 가속했듯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을 항시적으로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면역과 치료의 연구에 추동력을 줄 것이다. 지금은 우선 감염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지금까지 전염병 하면 으레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병으로 여기고 부자 나라들은 이 지역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의 입국을 막거나 까다롭게 했지만 이제는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국가 입국이 어려워진 상황도 발생했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국가의 기능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도 마련했다.

중국의 초강도 방역전략에 이어 이탈리아도 ‘경찰국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전국을 봉쇄하고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자 비교적 빨리 긴급조치를 취한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책이라는 식의 논평이 가끔 보인다. 그러면 보건의료의 조건이 열악한 북한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코로나19 위기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너무 무리하게 해석한다.

위기 극복의 열쇠는 결국 시민들의 성숙한 자기책임에 근거한 삶의 방식에 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의 낙관도, 당장 지구의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불안에 떠는 공황(恐慌)도 답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처럼 연대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아니겠는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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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메르스 백서 작업을 맡아 1년 가까이 작업을 총괄했다. 그때 경험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중국의 우한 사태를 보고도 지역사회 감염이 온다는 상황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중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는 사스나 메르스와 비교할 때, 코로나19가 호흡기 증상을 일으킨다는 점은 같으나 주된 전파경로가 병원이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 유전자 분석 결과, 바이러스 표면의 스파이크가 사람 세포에 쉽게 달라붙도록 변이되었으며, 감염된 사람에서 증상이 늦게 나타나 스텔스급의 전파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미생물에도 전성기가 있는 걸까? 5~6년 주기로 유행하는 신종 감염병은 모두 RNA 바이러스에 의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RNA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서 복제되면서 쉽게 변이되는데, 그러다 전파력까지 갖추게 되면 신종 감염병으로 창궐하게 된다. 환경변화와 글로벌 트렌드가 교차하는 시대에 신종 감염병은 인류에게 기후변화와 같은 도전과제가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신종 감염병과의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최근 경험한 신종 감염병 유행을 짚어 보자. 사스는 검역 단계에서 차단됐고, 메르스는 지역사회보다는 병원에서 극성을 부렸다. 신종 인플루엔자는 처음부터 지역사회 감염이었고 확진자가 75만명이나 됐지만 타미플루라는 치료약이 있었다. 코로나19는 어떤가? 지역사회 감염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와 ‘개인위생 준수’가 중요한 대책이다. 이처럼 신종 감염병이 올 때마다 양상이 달라서 한 가지 시나리오만 가지고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메르스 이후 정부가 감염병 관리체계를 개혁한다고 했지만 ‘인프라 부족’은 여전하다.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역학조사관과 검역관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고 격리병상이 부족한 상황을 봐도 그렇다. 메르스 당시처럼 감염병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신종 감염병과의 장기전 대비’, 매번 달라지는 유행 양상에도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목표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신종 감염병과의 장기전에는 두 가지 시스템을 혁신해야 하는데, 하나는 전쟁을 이끄는 헤드쿼터인 질병관리본부, 다른 하나는 지역사회를 담당하는 공공의료다. 질병관리본부는 세계적 수준의 방역기관이 돼야 한다. 또한 질병관리청이 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충분한 인력을 확보해야 과학적 수단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미국의 CDC 기준을 적용하면 역학조사관만 현재보다 3배 이상 충원해야 한다. 공공의료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국공립병원에 있는 국가지정격리병상을 2배 이상 늘리고 감염병전문병원도 지역마다 증설해 이들 병원이 중증환자 치료를 담당케 해야 한다. 공공의료가 강화되면 감염환자 관리가 수월해질 뿐 아니라 일반 만성질환자에 대한 진료 공백이 발생할 위험이 줄어든다.

현재 시민들도 ‘신종 감염병과의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할 것으로 믿는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시민들도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다. 신종 감염병과의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과학적 방역과 역동적 방역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혁신하자는 정책적 논의가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김남순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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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며칠 전 외신에 ‘부자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다르게 대비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기사에 언급된 사례들은 호들갑이라고 할 만했다. 값이 100달러에 이르는 특별한 마스크, 피난용 제트기를 준비하는 사람, 지중해나 카리브해의 요트에서 자가격리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외출을 삼가며 온라인 주문과 텔레비전 시청으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유난스럽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훨씬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면, 간단히 치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대중과 접촉할 필요 없이 자가용에서 내리자마자 개인용 제트 터미널을 거쳐 개인용 제트기로 이동한다. 그리고 제트기로 도착한 바닷가에서 요트를 타고 먼바다로 떠난다. 이 기사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적사병 가면’을 떠올리게 했다.

적사병이 창궐한다. 감염되면 붉은 피로 물들며 반 시간 만에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다. 프로스페로 대공은 1000명의 귀족을 선별해 성처럼 지어진 외진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충분한 식량은 물론이고 광대, 음악가, 무희, 포도주 따위의 소일거리도 준비한다. 만일을 대비해 출입구는 모두 봉쇄한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대공은 화려한 가면무도회를 연다. 온갖 독특하고 기발한 가면과 복장이 등장한다. 이때 한 사람이 적나라하게 적사병 환자를 가장하고 나타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공이 대로하여 그를 칼로 쓰러뜨리려 할 때, 그 가면과 복장이 실재라는 것이 드러난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숨을 거두고 수도원에는 정적이 흐른다.

역병의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고 귀족과 민중이 유리된 중세에 있을 법한 괴담인데, 수십년 전 읽었을 때 으스스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다행히 과학이 발달한 민주공화국에 사는 우리는 호화롭게 자가격리하는 사람을 비웃을 여유마저 있다. 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평범한 사람조차 현대의학과 방역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성벽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온라인 주문은 끊임없이 식량을 공급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우리를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하는 동시에 안전하게 격리한다. 케이블TV와 넷플릭스는 가면무도회에 버금가는 즐거움을 쉬지 않고 보내준다. 이 시대에는 버려진 민중의 분노를 살 필요도 없고 성문이 뚫릴 걱정도 없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격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평민도 귀족처럼 살 수 있는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곳은 유토피아는커녕 디스토피아다. 천국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번 생은 안 되겠다고 포기한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은 혹세무민하는 무리에 빠져 다음 생을 기약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계급과 직업과 지역과 건강이라는 다층적인 균열을 따라 나뉜 듯 섞인 듯 공존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비슷하게 그러나 조금 다르게, 유토피아는 이미 왔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널리 퍼지지 않는다. 어떤 이의 유토피아는 다른 이의 디스토피아를 밟고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유토피아는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으로 다가왔지만, 내가 실제로 만나는 것은 디스토피아다. 손끝에 세상의 모든 정보가 주어졌지만, 실제로 유포된 것은 나의 프라이버시다. 인터넷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었지만, 실제로 들리는 것은 가짜뉴스와 거친 당파성과 조작된 여론이다. 스마트폰이 모든 음식을 집에서 맛볼 수 있게 했지만, 나는 빚을 얻어 연 식당의 문을 닫아야 한다.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가격리가 약간 답답할 뿐이지만, 하루의 일자리가 절박한 이에게는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경제적 파국이 기다린다. 포화를 견뎌온 레마르크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전사하는데, 사령부는 그날의 전황을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기록한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수많은 사람이 이 태평성대에 각자의 전투를 치르며 쓰러져 갈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유토피아는 허깨비다. 한 개인은 끝내 통계로 환원될 수 없다. 어차피 아주 오래도록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공존하겠지만, 다가온 유토피아를 더 빨리, 더 넓게 퍼뜨리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당신은 왜 정치를 하는가. 한국 정치는 소명에 응답하고 있는가.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역사의 발전을 낙관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빨간 뿔 달린 바이러스의 사진을 볼 때처럼 불길하다.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달라.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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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두 명의 대학생 동생이 있다. 한 명은 집에서 먼 대학에 다니느라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한 명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준비반에 주말에도 간다. 부모님도 모두 출근하고 나면, 5명이 사는 집의 적막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은 보통 나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럴 새가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대학교 개강이 2주나 연기되고, 학교 건물이 폐쇄되며 동생들은 갈 곳을 잃었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으로 부여된다면, 동생들은 지난 2주 본업을 잃어버렸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학생의 신분은 그렇게 쉽게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등교는 하지 않지만, 이미 등록금은 냈으니까. 수업도 들을 수 없고, 학교 건물도 사용할 수 없지만, 학생이 되기 위한 비용은 지불했으니 아직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교육부는 대학에 2주 개강 연기를 권고했고 대학들은 일제히 그 권고에 따랐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부터 나는 다시 우리 집의 적막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어렵게 됐다. 개강 후 2주는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부터 대학생들은 온라인으로 개강을 맞는다. 실질적으로 ‘등교’를 하는 개강은 3월 말, 4월이나 되어야 하는 셈이다.

온라인 강의에 대한 학생사회의 우려는 생각보다 크다. 대학생 단체인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가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1만2613명 중 62.5%가 ‘학사일정 조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피해 내용으로 ‘부실한 온라인 수업’과 ‘실험실습이 필요한 강의에 대한 대체 미비’를 꼽은 학생이 가장 많았다.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고 답한 학생은 80%가 넘었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청원도 등장했다. 등록 2주 만에 벌써 7만6000명이 청원에 동의했다.

대학은 난색을 보이는 모양이지만, 사실 대학이 학생을 대해온 태도로 봤을 때 이러한 요구는 정당하다. 대학은 지금껏 소비자부담주의를 고수해왔다. 대학 교육은 대학이 제공하는 하나의 서비스로,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학생, 다시 말해 ‘소비자’는 대학이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학생은 소비자로서, 질 낮은 상품에 분노하며 그 비용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육부 장관은 이 요구에 “총장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시 학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교육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 학생이라면, 그 교육받을 권리는 누가 부여하나? 교육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던데, 우리 사회에서 교육받을 권리는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돈과 교환해야만 얻을 수 있다. ‘등록금’이 있어야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다.

지난 정부가 반값등록금을 실현했다지만 2019년 기준 평균 사립대 등록금은 700만원대이며, 국가장학금 수혜율은 ‘신청’한 사람의 42%밖에 되지 않는다. 여전히 4개월에 350만원대의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 이렇게나 많다. 한 해 평균 대학 등록금이 700만원을 웃돌고, 대학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모녀가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교육부는 언제나 시장논리로 대학사회를 바라볼 뿐이다. 교육을 받고 싶다면 빚을 내서 받으라는 학자금 대출 제도와, 학생에게 직접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업을 키우듯 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며 반값등록금을 실현하려는 국가장학금 제도가 그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나는 내가 받은 대학 교육에 감사한다. 대학에서의 4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 위한 투쟁을 알려준 곳이 바로 학교다. 그래서 교육은 공공재여야만 한다. 더는 학교와 학생을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로 보지 말자. 국가와 대학, 대학과 학생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자.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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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 연기가 길어지고 있다. 학교만 문 닫으면 뭐하나. 학교를 제외한 아이들의 동선은 그대로다. 길어진 휴교에 지루한 청소년들은 학원, PC방, 코인노래방을 드나들며 외려 더 큰 위험에 처해 있다. 돌봄 공백이 커진 초등생과 영·유아 부모들은 애가 탄다.

수업 결손 걱정에 개학만 손꼽아 기다릴 게 아니라, ‘코로나 특별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코로나 수업을 한다면, 의사 이낙원의 한겨레 칼럼을 함께 읽겠다. 마스크도 안 쓰고 숱한 독감환자들을 만나온 의사가 왜 독감에 걸리지 않는지 알고 나면 바이러스 감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포비아도 사라질 거고, 스스로 부지런히 손을 씻게 될 거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그냥 쓱 나오던 남자아이들은 그 버릇을 평생 고치게 되지 않을까.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도 함께 읽고 싶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온 바이러스의 진화 과정으로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왜 전파력은 높은데 치사율은 낮은지, 왜 중국이 발원지가 되었는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기후변화와의 연관성도 깊다. 숲의 파괴로 인간과 동물의 생활영역이 가까워지면서 동물들의 바이러스가 쉽게 인간에게 전파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빙하가 녹으면 새로운 바이러스의 경계가 열릴 것을 우려한다. 이 인과를 알면 단순히 ‘방콕’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문제 해결의 본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마스크 대란을 두고 디지털 기술과 윤리, 시민성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볼 수 있다. 부족한 마스크를 왜 누구는 이웃과 나누고, 누구는 매크로 기술로 매점매석하는가. 공적 마스크를 살 수 있는 약국 앱이 보여주는 정보격차 사회의 단면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종차별과 혐오의 문제, 한순간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 문제도 중요한 공부거리다. 신천지 사태를 두고 종교와 신념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다. 재난기본소득 논의는 미래의 노동,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코로나19는 단순한 돌림병이 아니다. 발 딛은 오늘을 이해하고, 미래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꼭 배워야 할 하나의 ‘사건’이다.

전국의 학교는 개학과 동시에 일 년 내내 수업일수 맞추기에 허덕일 거다. 학교에서는 코로나19 따위 가르칠 시간이 없다고? 형식뿐이던 민주시민교육, 인성교육, 인권교육, 안전교육 등 의무교육과정 속에서 제대로 다루면 된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시간 때우느라 영화를 틀어주던 시간에 코로나19를 공부하자. 그래도 공교육에서는 어렵다면 대안학교가, 마을학교가,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안도의 숨을 쉬며 마스크를 벗고 나면 4월의 미세먼지와 6월의 이른 폭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새로운 재앙은 언제든 지구를 급습할 테고, 인류가 낯선 공포와 두려움 속에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질 것이다. 배움은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재난을 제대로 배워야 시민이 된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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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간절기에는 감기에 걸리기 쉽다. 이 때문에 콧물을 훌쩍이며 병원에 가면 ‘궁둥이’에 주사 한 방을 놓는다. 하지만 사실 궁둥이에 주사를 맞는 일은 거의 없다. 왜? 궁둥이는 바른말이 아니라서? 아니다.

궁둥이는 분명 표준어이고, 간호사가 그 부위에 주사를 놓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러자면 꽤 민망해진다.

또 많은 사람이 흔히 “그냥 아무 데나 엉덩이 깔고(대고) 앉아” 따위 표현을 쓰는데, 그렇게 하면 절대 앉을 수가 없다. 왜? 엉덩이는 깔거나 대는 것이 아니라서? 아니다.

‘깔다’에는 “무엇을 밑에 두고 누르다”라는 뜻이 있고, ‘대다’에는 “무엇을 어디에 닿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 다만 엉덩이를 바닥에 닿게 하면 절대 앉을 수가 없다.

우리 몸에서 허리 아래와 허벅지 위의 볼록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은 ‘볼기’다. 그 볼기에서 윗부분을 ‘엉덩이’, 볼기에서 바닥에 닿는 면적이 많은 부분을 ‘궁둥이’라고 한다. 즉 보통 주사를 맞는 부위가 ‘엉덩이’이고, 앉을 때 바닥에 닿는 면은 ‘궁둥이’다. 또 볼기를 영어로 말할 때 ‘힙’이라고도 하는데, 바른 외래어 표기는 ‘히프’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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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소망 1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한 건물 현관에 어린이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림 속에는 ‘모두 잘될 거야’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로마 _ EPA연합뉴스

이탈리아 사람들이 집집마다 발코니로 나왔다. 프라이팬이나 냄비 뚜껑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기타나 아코디언 같은 악기도 더러 보였다. 노래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금세 불어났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다음달 3일까지 전국에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이탈리아의 지난 주말 모습이다. 불가피하게 자가격리된 이탈리아인들은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코로나19에 대처하고 있다. 동네마다 시간 정해놓고 ‘발코니 합창’에 참여해 응원과 격려를 나누는 일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발라드와 가곡에서부터 국가까지, 그들의 노래는 다양하다. “비록 우리가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다고 느낄 방법을 말해주오”라는 가사를 담은 1990년대 유행가 ‘그라치에 로마(고맙다 로마)’가 인기라고 한다. 시에나에서는 “시에나여, 영원하라”는 가사를 담은 지역 전통가요 ‘베르베나의 노래’, 나폴리에서는 지역 출신 가수 안드레아 산니노의 곡인 “나를 안아주세요”라는 뜻의 ‘아브라치아메’가 불렸다. 지역마다 노래는 달라도 발코니 합창의 메시지는 같다. 위로와 응원과 연대다. 발코니에서 노래 부르며 “안드라 투토 베네”(Andra Tutto Bene)라는 글을 팻말이나 플래카드로 내건 집도 많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이다.

코로나19 이겨내기를 응원하는 노래는 세계 각지에서 유행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응원가로 불릴 만한 노래가 등장했다. “괜찮아, 잘될 거야”라는 가사를 담은 ‘슈퍼스타’라는 노래다. 

가수 이한철이 2005년 발표한 이 노래가 2020년 국민 격려가로 재탄생했다. 그와 17명의 동료 가수들이 한두 소절씩 나눠 부른 십시일반 협업곡 ‘슈퍼스타’의 음원이 16일 새로 나왔다. 음원 수익도 전액 기부한단다.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45명의 팝스타가 한데 모여 부른 자선곡 ‘위아더월드’가 연상될 만한데, 다른 점이 있다.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느라 각자의 공간에서 녹음했다고 한다. 이한철은 “음악이 가진 연결과 연대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슈퍼스타’ 가사의 응원이 이웃들의 마음에 퍼지길 바란다. “괜찮아 잘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괜찮아 잘될 거야, 우린 널 믿어 의심치 않아.”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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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장엄한 선언문처럼 <동의보감>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의 형상을 닮은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기침 안 하기도 힘들지만 주말을 지붕 아래에서 공글리기도 참 어렵다. 믿을 건 자유로운 공기 속의 계곡과 들판이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길을 나설 때 <동의보감>의 저 첫대목이 떠오르는 건 오늘 보러 가는 꽃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다.

봄은 아래에서부터 온다. 천하를 물큰하게 녹이며 나오는 꽃들. 텔레비전, 휴대폰 따위에 꽂혀 있던 시선을 아래로 구부려 바로 발밑을 보라고 꽃은 바닥에서 피어난다. 까맣게 잊고 지낸 찬란한 둘레를 한번이라도 살펴보라며 봄은 땅을 밀어올린다. 봄나물에 입맛을 다시는 요즘 눈으로 드는 꽃 하나를 들라면 단연 동강할미꽃(사진)이다. 무덤가의 할미꽃은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교를 맺은 꽃이다.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 꽃과는 달리 동강할미꽃은 사는 곳부터가 남다르다. 석회암 지대의 정선이나 영월, 그중에서도 아득한 바위틈에 간신히 뿌리를 내린다. 동강에 드리워진 아득한 뼝대에 고개를 내민 꽃. 보통의 야생화들이 저를 낳아준 고향을 그리워하듯 아래를 향하고 있다면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하는 게 특징이다.

몇 굽이를 지나 드디어 만난 올해의 동강할미꽃. 밤낮없이 흘러가는 동강을 귓전에 꽂고 아득한 바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열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꽃. 작년의 묵은 잎들을 수염처럼 수북하게 달고 있는 동강할미꽃에서 단군할아버지의 모습을 찾는 건 그리 무리한 상상도 아니겠다. 내친김에 나이를 모르겠는 바위의 침묵을 짚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나의 오른눈은 태양과, 왼눈은 달과 연결된다. 하늘에 구름이 있듯 얼굴에는 보조개가 있다. 하늘이 천둥과 번개를 부리듯 사람은 기침과 재채기를 할 권리가 있다. 언젠가 하늘에 대고 마음껏 기침하고 재채기하는 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동강할미꽃.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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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현실에서 실험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류가 어떻게 삶의 방식을 바꾸면 기후변화를 저지할 수 있는지를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실험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문제엔 수리(數理) 모델링을 사용한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소 간의 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식 속의 일부 요소는 인간이 바꿀 수 있어서, 특정 요소가 기후에 주는 영향을 실험해 볼 수 있다. 현재 인류가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정책 등은 이런 방식으로 효과성이 검증된 정책이다.   

감염병은 어떨까. 감염의 시작과 번져간 흔적은 빅데이터에 표현되고, 사후에 수학적 방식의 모델링으로 작동했던 방식을 드러낸다. 일단 수식이 생기면, 그 안에 포함된 일부 요소를 바꿔보는 방식으로, 정책적 대응이 감염 확산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실험해볼 수 있다.   

근대 역사에서 인류 최대의 재앙은 약 100년 전의 스페인 독감이다. 2년 동안 지구상에서 35명 중 1명이 사라졌다. 특히 심한 피해를 본 이란은 인구 5명 중 1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에서는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며 14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사망자 대부분이 청년층에서 발생했지만, 이번 코로나19의 사망자는 주로 노년층이다. 이전의 경험이 다음에도 적용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감염병을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는 17세기 페스트 대응에서 실마리가 보이지만, 18세기 스위스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천연두의 확산을 수식으로 표현한 게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의 수학 실험은 대규모의 예방 접종이 인류의 기대수명을 3년 늘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현대의 수리감염역학(mathematical epidemiology) 연구자들은 감염병의 확산 과정을 미분방정식이나 차분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수치적으로 푼다.   

이와는 다른 네트워크 이론의 접근도 있다. 할리우드의 배우들을 무작위로 분포된 점들로 표현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 걸 연상해보자. 수많은 점과 선이 있는 사회관계망에서, 선이 별로 없는 건 외톨이이고, 많은 사람과 이어진 건 ‘마당발’이다. 만약 많은 점 사이에 제멋대로(random) 선을 그으면 반드시 몇 개의 마당발이 나온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다. 상호 연결된 인터넷 접속지들의 네트워크에서도 이런 마당발 허브가 여럿 생기는데, 해커가 이런 허브를 공격하면 전체 인터넷의 심대한 접속 장애가 발생한다. 이번에 우리나라 코로나19의 확산을 점과 선으로 표현한다면, 특정 종교단체나 콜센터 등이 이런 ‘마당발’의 역할로 등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은옥 건국대 수학과 교수팀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개념까지 반영한 코로나19 수리모델링을 최근에 시도했다. 전통적인 SIR 방식에서는 31번째 확진자 발생 이후 급속도로 확진자가 증가해서 전 인구가 감염될 때까지 확산한다. 6개의 미분방정식으로 구성된 새 모델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행되면 일부 감염으로 끝난다. 행동 변화로 인해 감염전파율이 2%로 줄어들고, 증상발현 후 격리까지 평균 4일 걸리는 경우는 6월 중순에, 격리에 하루 더 걸린다면 10월 말에 종식된다. 3월14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의 훨씬 단순한 무작위성 실험도, 지역 격리는 전체 감염을 늦추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일부 감염만으로 종식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회문화적 요소를 모두 수식에 반영하기 힘들고 각종 상수 값은 기존 데이터로 추정한 것이라서 종료 시점의 예측 용도로 사용하긴 힘들다. 하지만 수학적 실험이 의미하는 대응 정책은 분명하다. 혹독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하고, 증상발현 후 최대한 신속히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리에서 하루를 단축하면, 코로나19 종식은 넉 달 빨라진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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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청 방역 관계자들이 16일 집단감염을 통해 이날까지 46명의 코로나19 확진환자가 발생한 경기 성남시 은혜의강 교회 주변을 약품으로 방역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성남 은혜의강 교회에서 16일 40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새로 나왔다. 지난 9일부터 교인 4명과 목사 부부가 잇따라 확진된 후 교인 135명 전수조사에 들어가자 집단감염이 포착된 것이다. 검사 중인 교인이 더 있고, 이 교회 교인과 접촉한 주민 1명이 확진돼 지역전파 비상벨도 울렸다. 이날까지 감염자가 무더기로 나온 전국의 종교시설은 교회 6곳(138명)과 성당 1곳(6명)이다. 부산에서 확진된 107명 중 34명이 온천교회 관련자이고, 구로콜센터 감염자가 예배에 참석한 부천 생명수교회 확진자도 15명까지 늘어났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이틀 연속 70명대로 줄었지만, 교회를 통한 집단감염은 이어지고 있다.

집단감염은 주로 중·소형 교회에서 나오고 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1시간 이상 바싹 붙은 채 예배 보고 식사하다 바이러스에 함께 노출된 것이다. 46명이 확진된 성남 은혜의강 교회도 상가 건물 3·4층에 각각 35평 규모의 예배당과 식당·휴게공간을 두고 있었다. 찬송·기도·성경 봉독 때 비말이 튈 수 있는 예배당에서 2m 이상 거리 두기는 지켜지지 않았고, 주중 소모임도 이어졌다. 더구나 이 교회는 지난 1·8일 일요 예배 때 100여명의 참석자 입에 분무기를 대고 소금물을 뿌렸다. 입에 닿은 분무기는 예배당 곳곳에서 소독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사용됐다. 예배 자제나 안전조치 권고도 지키지 않고, 잘못된 방역 행위까지 하다 일을 키운 것이다. 교회는 극장·지하상가·도서관 같은 다중이용 시설에서 법적으로 제외돼 있다. 24시간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기·청소나 감염관리에서 당국의 통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 것이다. 현재 전국 교회의 33%가 일요일 현장 예배를 보고 있다. 대다수가 온라인 예배 시설이 없거나 헌금이 줄면 운영이 어려워지는 중소·미자립 교회들이다. 교단마다 코로나19 경각심과 내부 협력을 최고 수위로 높일 때가 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단체 줄넘기’에 비유된다. 한명만 줄에 걸려도 모두 걸리고, 줄넘기는 멈춰서게 된다. 집단감염된 교회들이 폐쇄돼도 그 피해는 지역사회와 온국민이 입게 된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지만, 교회도 사회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15일 일요 예배를 재개한 일부 대형교회들은 잠시 멈춤을 앞장서 실천하고, 중소교회들도 예배를 녹화해 유튜브로 공유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 창궐로 초·중·고교의 개학까지 추가 연기를 고민하는 중차대한 시점이다. 행정당국의 자발적 협조 요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진화될 때까지 종교계의 더 큰 결단과 협조가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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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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