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긴장과 단절, 공포가 일상화하면서 개인 삶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전염병은 경제·사회 시스템과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폭등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급여가 줄고 실업자들은 늘고 있다. 정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강남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가 꺾였다. 

그런 코로나19도 한국 사회 만악의 뿌리인 사교육에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집단감염 우려로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고 있다. 서울은 이달 중순만 해도 학원 10곳 중 3~4곳이 쉬었지만 대부분 다시 문을 열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고, 공급이 또다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대치동과 목동의 유명 단과학원과 오피스텔 교습소는 학교 수업 공백으로 오히려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대입 학원과 기숙학원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평시든 비상시든 호황이든 불황이든 사교육에 브레이크는 없다.

게임 이론의 고전적사례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서로 믿고 협력하면 모두에게 이익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해 모두 피해를 보는 상황을 일컫는다. 학생과 학부모가 바로 딜레마에 빠진 죄수 처지다. 

공범이 두 명 있다. 둘이 모두 범죄를 부인하면 무죄다. 둘 다 자백하면 유죄다. 한 사람만 자백하면 그 사람은 무죄이지만 부인한 사람은 더 큰 벌을 받는다. 둘 다 부인하는 게 최선이지만 상대방을 믿지 못해 둘 다 자백하고, 모두 감옥에 간다는 게 죄수의 딜레마 결론이다.


집단감염 우려에 학교 문 닫아도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는 중

남에게 뒤처질까 두려운 부모들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는데도

사교육에 돈 쏟아붓기 못 멈춰


사교육도 똑같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모두 약속을 하고 한날한시에 학원 수업이나 과외를 딱 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되면 사교육 경쟁은 끝난다. 부모는 돈을 아끼고, 아이들은 공부 부담을 덜 수 있다. 입시가 보다 공정해지고, 계층 이동 사다리가 복원된다. 하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물리적 거리 두기’ 총력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학원에 간다. 일부는 수강생이 줄어든 지금이 성적 올리기에는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사교육을 하기 때문에 사교육은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수도권 인기 대학에 합격한 상위 10% 정도만 본전을 건진다. 90%에겐 결과적으로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다. 사교육은 사회의 인재 선발도 방해한다. 입시는 사회에 필요한 우수 인재를 뽑는 기능이 있지만 부모의 경제력 덕분에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을 우수 인재로 잘못 뽑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교육의 폐해가 크고 당장 학생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지만 교육당국의 조치는 학원에 휴원을 권고하는 수준이다.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 학부모와 학생들을 강제로 말릴 수도 없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과외 금지령’은 민주화 이후 위헌 판결이 났다.

차선책은 학교 휴업 동안 정부가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도 공교육은 사교육에 밀렸다. 교육부가 지난 2월 중순 개학 연기 결정을 내리자 사교육업체들은 곧바로 온라인 특강을 편성했다. ‘일타’ 강사들은 2월 말부터 마치 개학한 것처럼 1교시 2교시 시간표를 짜서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인강이 호평을 받고 있지만 사교육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일선 학교는 당초 개학날인 3월2일 즈음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학생들에게 학습 계획표와 독서 목록 등을 배포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미 2~3주일 전 학원에서 수백장의 신학기 수학·영어 학습 자료와 과제물을 받은 터였다.

지난해 초·중·고교 학생은 545만명으로 1년 전보다 13만명(2.4%) 줄었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21조원으로 2018년(19조5000억원)보다 7.8% 늘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학벌 폐해와 학력 차별도 여전하고, 교육당국은 무기력하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신뢰다. 사교육 문제의 해답도 같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를 믿으란 말인가. ‘남이 안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남이 사교육을 안 할 때 나만 하면 대박인데’. 코로나19로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고 가장이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매월 수백만원씩 사교육에 쏟아붓는 현실이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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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그러니까 시각적 쾌락을 목적으로 타인의 무덤에 가본 적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나에게 무덤이란 국립묘지처럼 ‘참배’하거나, 부모님의 묘소처럼 ‘애도’하는 곳이었다. 관광객으로 나폴리에 오니 감히 무덤을 구경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관광 안내 책자에서 구한 나폴리의 ‘볼거리’ 정보에 따라 카타콤, 즉 지하무덤을 구경하기로 했다.

개별 관광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만 구경할 수 있다. 예약을 대행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카타콤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폴리 지하의 산 제나로 카타콤을 탐험하세요! 나폴리 수호성인 산 제나로와 도시 간 끈끈한 유대감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 이 초대장은 카타콤을 다소 경쾌하게 소개하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혹시라도 지하무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예약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도 카타콤이 제공하는 볼거리를 보다 유혹적으로 설명하는 다음 문장을 읽고 나면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된다. “시간을 거슬러 나폴리의 수호성인 산 제나로의 지하묘지로 여행해 보세요. 나폴리의 거리 아래로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비잔틴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하묘지로의 ‘여행’,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상에서 불가능한 일을 체험하는 것을 여행의 참맛이라고 느끼는 관광객은 이곳이야말로 여행 온 이유를 설명해주는 최적의 장소라 간주한다. 그리고 구경한다.

그랬다. 그곳엔 구경거리가 많았다. 아무리 지질적인 장점이 있다 하더라도 지하 땅굴을 다층으로 판 건축 솜씨는 신기했고,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는 프레스코 그림은 놀랍기만 했다. 관광객이 기대하는 구경에 대한 모든 욕구를 충실히 충족시키는 곳이었다. 지하세계 ‘탐험’이 끝나고 “지하묘지로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 탐험 여행을 안내했던 가이드가 폰타넬레 공동묘지 방문을 권했다.

전 세계 여행객의 인공지능인 구글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혹시 한국에 잘 알려진 곳인가 하여 네이버도 검색해봤다. 폰타넬레 공동묘지에 관한 블로그 포스팅이 거의 없다. 그곳에 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묘지를 향해 가는 동안 폰타넬레 공동묘지를 페이스북에 포스팅할 생각에 흐뭇했다. 남들이 모르는 나폴리의 ‘진정성’에 독점적으로 가까이 가는 느낌이었다.

폰타넬라 공동묘지는 카타콤과 달랐다. 입구부터 산처럼 쌓인 해골과 뼈 더미와 마주쳤다. 여긴 카타콤의 프레스코 그림처럼 시각적 안정을 유도하는 볼거리가 없다. 해골은 해골끼리, 뼈는 뼈대로 가지런히 분류되어 만들어진 기괴한 군집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1836년에서 37년 사이 당시 인구 35만7000명이었던 나폴리에서 3만2145명이 도시를 휩쓴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미처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시체가 폰타넬레 공동묘지에 무덤도 만들지 않은 채 쌓였다. 어디에도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표식이 없다. 뼈 위에 뼈가, 해골 옆에 해골이 쌓여 있으나 저 뼈는 어느 해골과 한때 한 사람의 것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날 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잠들어도 해골과 뼈가 꿈에 자꾸 나타났다. 깨어나면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날 밤 나폴리에서 겪었던 그 불편함의 이유를 17세기 영국 시인 존던의 산문에서 찾았다. “어떤 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가면 유럽은 줄어들 것이고, 갑(岬)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이며, 친구와 자신의 땅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어떤 사람이 죽어도 나는 줄어드니 이는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지 말지니, 그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 매일 뉴스에 숫자로 표기되는 사람, 그 죽음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해 제대로 울리지 않은 장례식의 종소리, 그 종소리는 나를 위해 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날 나폴리에서 나를 위해 울리는 3만2145번의 종소리를 들었으니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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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거리 두기를 위해 사람과의 만남을 가능한 한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그래서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온라인 모임을 했다. 일요일 밤 10시, 약속한 시간에 화상회의 채팅창에 접속하자 친구들의 일상 풍경들이 분할돼 한 화면에 펼쳐졌다. 한 친구는 안 자고 더 논다고 버티는 아이를 막 재우고 나왔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보는 부모의 고단한 기쁨’이 무언지 맥주 캔을 따는 친구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금주를 결심한 친구였고 그것은 맛없는 무알코올 맥주였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한 친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파가 없어서 부엌 안을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친구는 반려동물과 산책하고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굳이 나누지는 않았을 일상의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남의 잠옷을 구경할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놀겠다고 안 자고, 김치찌개를 끓여야 하는데 양파가 없고, 늦은 밤인데 반려동물이 산책하러 가자고 조르는 이런 소소한 고난이 사실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창밖의 사이렌 소리가 화상 채팅창을 통해 친구들의 공간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마포대교 근처에 살아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 소리는 누군가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사이렌 소리가 자주 들리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한강의 투신자 구조율은 97%다. 잦아진 사이렌 소리는 말한다. 이제 시작이라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서로 잘 잡아줘야 한다고.

업무, 경제, 생활 모든 영역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각자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되고 고맙다. 반복되는 하루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힘으로 어떻게든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두되 마음만은 가까이. 서로에게 더 다가가고자 한다. 필요할 땐 손을 내밀면서.

<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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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로 인해 아동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고 들려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동학대 근절을 위해 각계각층이 해 왔던 부단한 노력도 아이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동안 아동학대에 대한 조사와 사례관리는 공공이 아닌 민간 사회복지법인에 의해 운영되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담당해 왔다. 아동 보호에 대한 신념과 열정, 전문성을 겸비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은 일선 현장에서 아동학대 행위자의 폭언과 폭행 및 가용자원의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아동들을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하지만 민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아동학대 행위자가 문을 걸어 잠그고 개입을 끝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곤 했다. 그로 인한 보호의 공백 속에서 작년 10월 5세 아동이 계부의 잔혹한 폭행으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는 더 이상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특단의 변화가 요구되는 때다.

지난 3월 초, 아동학대 대응체계를 공공 중심으로 개편하는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번 법 개정으로 20년간 민간이 담당해 온 아동학대 조사와 응급보호를 지방자치단체의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담당하게 되었다. 기존의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심층사례관리전담기관으로서 아동학대 피해아동 및 가족에 대한 사례관리를 수행하게 되었다.

개정안은 국가가 아동학대 발생부터 사례관리와 종료까지 책임 있게 개입하여 피해아동 보호를 공백 없이 수행하겠다는 정책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는 앞으로 아동권리보장원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에 아동권리보장원은 정책 실현을 위해 하위 법령에 세부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내용을 고민하고 관계 부처에 의견을 전달하는 한편,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전문성 함양’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심층사례관리전담기관화’라는 과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먼저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현장에 투입되어 아동학대 조사와 응급보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매뉴얼 및 교육과정을 개발할 것이다. 또한 기존에 업무를 수행해 온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노하우를 빠짐없이 전수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한편 심층사례관리 기능을 수행하게 될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아동과 가정의 기능회복을 지원해 재학대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보다 전문적이고 구조화된 사례관리 모듈을 개발·보급할 예정이다. 더불어, 아동학대 대응체계 개편에 따른 변화의 시기에 실무적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공공과 민간의 효과적인 협력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동학대 대응체계 공공화가 ‘아동 안전 최우선 정책’으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한다. 공공과 민간의 협력과 공조를 통해 아동학대 대응체계 공공화가 아동권리실현의 꽃을 피우기를 기대한다.

<윤혜미 |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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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3월11일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실을 방문해 코로나19 대응에 분투 중인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국이 코로나19 사태 통제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신천지발’ 환자의 급속 확산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적극적인 대처로 진정 국면에 접어든 덕이다. 해외로부터 드라이브 스루 등 ‘한국 모델’의 노하우 전수 요청도 잇따른다. 한국의 성과는 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헌신적인 의료진, 성숙한 시민사회가 어우러진 결과다. 감염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해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끌어냈고, 이는 시민의 적극적인 정책 참여로 이어졌다. 그러나 방역 인력 및 시스템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코로나19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량 검사만 해도 숙련된 인력과 복잡한 위생 설비 및 검사 재료가 확보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날 필요성을 느낀 지도자가 “합시다”라고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대혼란은 코로나19 진압의 첫 단계에서 대량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검사에서 누락된 환자들은 감염병 확산의 매개체가 되기 십상이다.

질병관리본부를 차관급 조직으로 격상한 것도 ‘신의 한 수’라 할 만하다. 그 덕에 질본은 컨트롤타워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은경 본부장의 활약도 특별하다. 그는 차분하고 전문적인 발표와 설명으로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잠재워주고 있다. 그와 같은 방역 전문가가 ‘메르스 해고 폭풍’을 넘어 문재인 정부에서 방역 책임자로 올라선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사전 대비들은 의료공공성에서 나온다. 인터넷에 나도는 코로나19 치료비 명세서를 본 적 있는가. 900만원 넘는 치료비에 환자 부담은 4만원에 불과했다. 건강보험공단과 질본, 지자체 보건소가 치료비를 분담하기 때문에 이런 계산서가 가능해진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검사비는 국가 부담이지만 수천만원에 달하는 치료비는 환자가 내야 한다. 최근 미국 교민들의 ‘코로나19 귀국 행렬’은 한국의 저렴한 의료비가 배경에 있다.

현재의 의료공공성 수준은 반(反)시장이나 포퓰리즘으로 보는 보수와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의료민영화가 시행 중이었다면? 이번 사태는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다. 시민 다수가 대량 검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고가의 비용 탓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게 뻔하다. 의료서비스를 시장에 넘기자 구급차 한 번 타는 데 1000달러가 넘는 돈을 내야 하는 미국을 생각하면 당장 답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의료영리화 정책도 공공성을 해친다는 점에서는 의료민영화 정책 못지않다.

민영화든 영리화든 자본이 의료서비스를 장악하게 되면 의료 행위는 수익창출 수단으로 전락한다. 정상 체온의 아기를 열이 있다고 속이고, 가벼운 상처에도 입원시킨 미국 병원그룹 HMA의 사례는 영리병원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 이런 영리병원이 돈이 안되는 감염병에 관심을 갖겠는가. 감염내과 수가는 여타 진료에 비해 낮기 때문에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돈을 쓰기 일쑤다.

한국의 의료공공성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공공병원 비중은 전체 병원의 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꼴찌다(2016년 기준). 공공병원 병상 비율(10.3%)도 마찬가지다. 의료공공 정책이 보수에 의해 매번 발목이 잡힌 탓이 크다. 현 정부 들어서도 공공보건의료 핵심인력 양성을 위한 국립공공의대 설립법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고,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역시 첫 삽도 뜨지 못했다. 메르스 사태 때 190명이던 감염내과 전문의는 지금 270명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적자라며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논리가 아직도 한국 의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1만6000명이 숨지고 각국의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다. 이만큼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도 드물다. 따지고 보면 ‘감염병 전쟁’은 일반 전쟁보다 잦다. 일반 전쟁은 70년 넘게 발생하지 않았지만 감염병 전쟁은 2000년대 들어서만 벌써 4번째다.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 예방·검진·치료를 위한 의료 및 행정 인력과 시설, 조직을 육성해야 한다. 훈련과 교육도 빼놓으면 안된다.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들고, 평상시 손해를 보는 일이지만 위기 때는 진가를 발휘한다. 돈은 편의와 물질적 풍요를 제공한다. 의료공공성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 어디에 더 비중을 둬야 할지는 명백하다. 또다시 돈에 눈이 멀지 않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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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

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한, 용서를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피해자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얻는 기회가 되기 십상이다. 가해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처벌을 온전히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피해자로서 가해자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깊이 와 닿을 때, 비로소 피해자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용서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해 성 착취 동영상을 찍고 이를 인터넷에서 회원제로 유포한 사건이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말의 서(恕)라도 있다면 차마 할 수 없을 행위를 자행하는 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사이버라는 창문 너머의 익명성에 숨어 그것을 즐겨왔다는 사실에 치가 떨린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들은 이미 서(恕)의 대상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간과되어 온 문화 위에서 탄생한 괴물이라는 점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자괴와 참회를 금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한때 충격을 주었다가 잊히곤 해왔음을 상기한다. 이번에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이 괴물은 더 흉측한 몰골이 되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취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벌을 촉구한다. 추호의 용서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이번 일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서(恕)의 실현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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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어머니가 집에 계신다. 얼마 전 산소공급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출장 수리가 안된다고 한다. 또 큰 병원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추천받은 병원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전국 요양병원이 전수조사 중인 가운데 집에 모셔 다행이다 싶었지만 우리집도 이 역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멀리 있던 공포가 점차 내 집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역병의 위험을 비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질병도 위험하지만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실내체육시설과 유흥업소 등에 운영 중단 권고가 내려졌고 장사가 안돼 자진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10만명의 학교 비정규직은 개학 연기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고, 여행이나 관광운수업 등에서는 무급휴직에 이어 정리해고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 해외 공장이 멈추기 시작했고 세계 경제도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도 문제겠지만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큰 어려움이 됐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위험과 공포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다. 도시 봉쇄나 이동 금지, 생필품 사재기와 총기 구입 쇄도도 멀리 있는 다른 나라의 일이다. 정부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신속한 대처와 투명한 정보 공개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영업을 강행하는 곳이 있고 질병 예방보다 봄철 꽃구경에 취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국민은 차분하게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고 있다. 

참 훌륭한 국민들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식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과도한 자유의 제한이나 인권 침해 없이도 전파 속도가 제한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한 교민은 결국 따뜻한 환대 속에 입국했고 어느 정치인은 대구·경북 지역 봉쇄 발언으로 당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중국인이나 신천지 교인을 향한 혐오 발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 국민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질병관리본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국민들 덕분이다. 세월호 사건을 눈감지 않고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대대적으로 촉구한 결과다.

그런데 예외도 있다. 바로 정치인들이다. 지금 같은 비상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아니 오히려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데 가있는 틈을 타서 자기들끼리의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다. 정치권이 비례정당을 둘러싼 이전투구로 난장판이 됐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팬덤 정치만 남았다. 명분은 사라지고 이기는 것만이 지상과제가 됐다. 국민이 존중받지 못하고 상식과 대의가 실종되고 내일을 위한 비전에는 무심한 선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루소가 틀렸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국민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2020년 한국에서는 선거 때조차 국민이 주인이 될 수 없다. 정당과 정치인은 선거로써 심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심판도 무의미해졌다. 누가 차선이고 차악인지도 구분이 어렵게 됐다. 4·15 총선에서 주인은 정치인이고 국민들은 노예에 불과할 위기에 처했다. 노예가 어찌 주인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어느 주인을 고를까 고민하거나 고민도 없이 주인을 맞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 훌륭한 국민들은 어떤 잘못된 정권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던 적이 없다. 멀리 4월 혁명과 6월 항쟁을 들지 않더라도 불과 몇 년 전의 촛불집회가 증명한다. 달라진 것은 대상뿐이다. 과거에는 집권세력에 한정됐다면 지금은 여야를 망라해 기득권 정당 전체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지난가을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을 농락하는 정치집단이 과거 독재정권에 기반을 둔 정당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자유한국당에 이어 민주화운동을 뿌리로 해 탄생한 민주당까지 반민주적 권모술수로 헌정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성정당에 투표하지 말자고 한다. 또 누군가는 혐오를 양산하는 거대 양당에 표를 주지 말자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비례 ‘위장정당’ 해산을 위해 온라인 저항행동을 전개하자고 하고 선거 연기나 보이콧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느 게 좀 더 나은 방법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체념과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누가 승리하더라도 암수에 의한 것이지 국민과 함께 얻은 정당한 승리는 아니다. 현 정부도 앞으로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동력을 얻기는 어렵게 됐다. 코로나19보다 더한 역병이 지금의 한국 정치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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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외국에 알리는 포스터. 트위터 계정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갈무리 누리꾼들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다양한 외국어로 만든 포스터. 트위터 계정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갈무리

‘온라인 페르소나를 만들려 하던 초창기부터 나는, 가상의 남자가 되는 게 가상의 여자가 되는 것보다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년 전, 게임 연구를 통해 온라인시대의 자아정체성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던 MIT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연구 현장인 게임으로 뛰어들기 전 이런 고민을 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역할놀이 게임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로, 남자는 여자로 혹은 중성의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를 수 있었다. 성역할 바꾸기를 통해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성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연구결과를 정리한 터클의 책 <스크린 위의 삶(Life on the screen)>은 온라인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세계와는 달리 다중의 정체성을 경영하며 때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스스로에게 숨 쉴 틈을 주고, 때로는 현실에 저항할 힘을 기르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이 되었다.  

터클이 연구하던 시절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 온라인 세계와 실제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고, 스며들고, 분리되고 있을까? 이제 우리는 카톡 대화에서 이모티콘으로 웃음 짓는다고 해도 상대가 실제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으며, 인스타그램에 그림 같은 점심식사 사진을 올린다고 해도 그 사람의 하루가 그림같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날 갑자기 페이스북의 친구로부터 삭제를 당하면 세상 밖으로 떠밀려난 것 같은 고립감을 느끼고 메신저에서 모욕을 당하면 맞대면한 상태에서 뺨을 맞은 것 같은 분노감에 몸을 떤다. 온라인공간에서의 다툼이나 따돌림이 현실의 폭력사건으로 번지거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얘기들은 이제 낯설지 않다. 사이버공간과 현실의 삶은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우리의 생활세계가 된다. 사이버(cyber)를 가상(假想)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시기에, 엿새 만에 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 모였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성착취, 성폭력 사건의 용의자는 물론이고 가입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쏟아냈다. 이 분노는 밝혀진 미성년 피해자만 16명인 극악한 성착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일시적 폭발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무법천지처럼 방치되어왔던 사이버공간의 생존권에 대해 사람들이 힘을 합해 “그만!”이라는 경고음을 쏘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청원의 요구에서 두 가지에 주목한다. 첫 번째는 익명성 뒤에 숨어있는 모든 가담자들을 실제세계로 끌어내자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차마 다시 말로 옮기기도 끔찍한 성착취와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의 요구에 굴복했던 이유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알리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n번방, 박사방 등을 만든 사람은 물론이고, 거기에 모여들어 “잡히지 않는다” “현행법에 걸려도 처벌받을 가능성이 없다”며 희희낙락했던 26만명도 실제세계로 불려나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두 번째는 주범을 ‘박사’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몇몇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물다섯 살의 남성 용의자가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이라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내는 소비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수요를 잡지 않고 공급만을 잡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또한 알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 앞에 예측불허의 시간을 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후의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n번방 사건도 이전과 같을 수 없는 미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서 먼저 움직였고, 이제 실제세계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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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코로나19 관련 2차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가 24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2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100조원 상당의 긴급자금을 기업과 금융시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19 사태가 기업과 금융시장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가운데 내놓은 비상처방이다. 내역을 보면 중소기업·자영업자에 대한 대출·보증 등 금융지원이 58조3000억원, 회사채 및 단기자금시장에 공급되는 유동성이 31조1000억원, 증시안정자금 10조7000억원 등이다. 이번 대책은 특히 기업들의 자금경색을 푸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내달 말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가 6조5000억원에 달한다. 멀쩡하던 기업이 코로나19 사태로 매출이 끊기면서 자금난에 몰려 회사채를 상환하거나 차환(새로운 회사채로 갈아타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어음(CP) 등 단기자금 시장도 매기가 끊길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자칫 기업부도와 금융부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위기로 번질 위험도 있다. 기업의 도산은 대량 실직을 초래해 경제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그런 만큼 정부가 채권시장안정펀드를 2008년 금융위기의 2배 규모인 20조원으로 조성하는 등 규모를 대폭 키워 기업 자금경색을 풀기로 한 것은 바람직하다. 주식시장도 이날 코스피 지수가 8% 넘게 반등하는 등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문제는 이 위기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경영안정자금 지원 대상에 ‘필요하면 대기업도 포함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에 우량 대기업까지 휩쓸려 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호텔, 면세점, 항공사 등은 수요가 끊기다시피 한데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서비스업은 물론 제조업 등 주력산업 쪽으로도 여파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연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가 37조원, CP가 79조원에 달한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기업 도산이 속출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런 점까지 시야에 넣는다면 이번 대책으로 안심할 수 없다. 

미국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기업어음은 물론 회사채 직매입으로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고, 유럽중앙은행도 기업어음까지 매입하겠다고 나섰다. 한국은행도 좌시할 수 없는 처지다. 현행법상 회사채나 CP의 직접매입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정부가 지급보증을 한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문 대통령이 밝혔듯이 지금은 “전례 없는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대처 방식에도 획기적 변화가 필요하다. 타이밍을 놓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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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발 입국자 전원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진단검사를 시작한 22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 독일 프랑크푸르트발 항공기 탑승객들이 임시생활시설로 향하는 버스 탑승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들은 임시생활시설에 1박2일 머무르며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김창길 기자

해외에서 유입되는 코로나19 확진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 23일 신규 확진자 76명 가운데 해외유입 사례는 20명으로 29%를 차지했다. 22일은 22%(64명 중 14명), 21일은 15%(98명 중 15명)가 해외유입 사례였다. 최근 국내 확진자는 하루 100명 이하로 줄었지만, 해외유입 사례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본격화하면서 감염병 해외유입 차단이 급선무가 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일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조치로 전 세계 모든 입국자를 대상으로 특별입국절차 시행에 들어갔다. 22일에는 유럽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진단검사를 시작했다. 공항 검역이 강화되면서 코로나19 유입 사례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지난 20일까지 50명에 그쳤던 유럽발 확진자는 24일 기준으로 1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우려는 유럽보다 미주 쪽에 쏠려 있다. 지난 17일까지만 해도 미국 등에서 유입된 코로나19 확진자는 2명에 그쳤으나 22일에는 11배가 늘어난 22명이 됐다. 전체 해외 감염유입 사례에서도 미주는 중국을 제쳤다. 유럽에 이어 미국·캐나다를 포함한 미주지역이 새로운 위험지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4만명을 넘어 중국·이탈리아를 뒤쫓고 있다. 감염병을 피해 입국하는 교민들도 늘고 있다. 최근 미주발 입국자는 하루 3000여명으로 유럽발 입국자보다 3배 가량 많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방역망은 오히려 느슨하다. 유럽발 입국자에 대해서는 전원 진단검사를 시행하고 있지만, 미주발 입국자는 증상여부를 확인하는 특별입국절차를 밟을 뿐이다. 미주 지역의 감염자가 늘고 있는 만큼 검역을 유럽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22일 미국 등에서 들어오는 입국자가 유럽의 두 배가 넘는다며 검역 강화를 약속했지만 아직 구체적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유럽발 입국자 진단검사가 아직 순조롭지 않은 데다 검역 인력·장비 등이 충분치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코로나19 해외유입은 국내 감염병 확산의 새 뇌관이 될 수 있다. 방역 당국은 조속히 미주발 입국자에 대한 전수 진단검사에 나서야 한다. 검진 인력·시설의 효율 제고를 위해 공항 내 ‘워킹 스루’(도보 이동형 검진) 진료소 등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해외 입국자 검역 강화는 코로나19 유입 차단 조치이면서 국외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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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양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들이 비례대표 순번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총선경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목불인견 막장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소수정당의 원내진입을 돕기 위한 선거제 개편의 취지를 무력화하고 부실검증에 코드공천을 강행하더니 이제는 투표용지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의원 꿔주기’ 경쟁에 돌입했다. 정책과 비전 경쟁은 간데없고 온통 꼼수뿐이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인, 역대 최악의 비례공천이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윤호중 사무총장은 연일 총선 불출마 의원들을 만나 비례연합정당인 더불어시민당 파견을 종용하고 있다. 이종걸 의원 등 7명은 위성정당행이 결정됐고 다른 의원들의 추가 결단을 요청 중이다. 보수시민단체가 탈당 강요는 위법이라며 이 대표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원조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으로 현역의원 9명을 보낸 미래통합당도 뒤질세라 10여명 추가 파견을  추진 중이다. 모정당에서 꿔오는 방식으로 현역의원 숫자를 늘려 투표용지의 앞 번호를 차지하겠다는 꼼수다. 

이제 위성정당 막장정치의 사례는 더 지적하기도 지친다. 시민사회·소수정당과 함께 플랫폼정당을 표방했던 더불어시민당은 당선권 안에 소수정당 인사 2명만 배정하며 ‘비례민주당’ 본색을 드러냈다. 통합당의 편법을 막겠다는 명분이 무색하다. 여당의 또 다른 위성정당을 표방하는 열린민주당에서는 코드 공천이 도드라진다. 조국 전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증명서를 발급해준 혐의로 기소된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을 앞 순번에 배정했다. 미래한국당은 통합당 황교안 대표의 한마디에 비례 순번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렸다. 그것도 친황교안 인사들을 대거 앞세워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단언컨대, 역대 이런 선거는 없었다. 거대 양당이 초래한 혼선과 표심 왜곡은 총선과 정당정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당장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은 민주당과 통합당은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토론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의석수 제1, 2당이 정책과 비전 경쟁을 포기한 것이다. 급기야 모정당들은 선거자금 꿔주기 등 위성정당 선거운동 지원 꼼수 마련에 나섰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강력한 법 집행으로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 정치권도 선거 과정에서 이번 사태의 재현을 방지할 대책을 내놔야 할 것이다. 이런 후진적 정치가 계속돼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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