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3년 전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벌써 두 달째 홍역을 치르고 있고, ‘성착취 n번방 사건’으로 세상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요즘 3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맞는 최대의 위기인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고,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올해 안에 종식되지 않을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런 매우 위중한 상황임에도 3년 전의 오늘, 그러니까 2017년 3월31일의 일을 기억해보려고 한다.

봄날이 가까워오면 잠 못 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다. 벚꽃이 활짝 피던 봄날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을 실었던 세월호는 3년 뒤 금요일에 돌아왔다.

3년 전 오늘 새벽에 안산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버스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그날 새벽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날 점심 무렵에는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들어왔다. 3년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어서 시뻘겋게 녹이 슬고, 선체에는 따개비를 비롯한 조개류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고, 인양 작업 과정에서 파이고, 긁히고, 곳곳에 뚫린 구멍들… 처참하게 훼손된 모습이었다.

목포신항에 들어오는 배를 보자, 엄마들이 통곡했다. 부두의 바닥을 치면서 이 세상 사람들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로 울어댔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한 엄마가 “아이들이 금요일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켰어요”라고 말했다.

그 뒤에 선체는 다시 훼손되었다. 차량과 짐들로 엉켜 있고, 거기에 개흙이 들어차 있어서 안의 차량과 짐들을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시 우현 쪽을 뚫고 잘라내서 작업공간을 만들었다. 미수습자를 수색했고, 다음해에는 선체를 바로 세웠다.       

바로 세워진 선체에 처음 들어갈 때, 선체 안의 벽들은 대부분 뜯어지고 철거되었지만, 방의 흔적들은 남았다. 구조를 기다렸던 승객들, 창을 두드리면서 살려달라고 했을 당시의 상황들이 떠올라서 쉽게 그 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올해 세월호 참사 6주기는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추모행사는 생략하고, 유가족과 관련 단체 관계자들로 조용하게 치러진다. 그런다고 세월호 참사를 잊을 수는 없다. 아직 우리는 세월호 참사 당시 왜 승객을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아서 304명이 죽었는지, 세월호는 왜 J자를 그리며 침몰했는지 모른다. 왜 그토록 지독하게 박근혜 정부는 진상규명을 방해했을까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다.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고, 검찰이 특별수사단을 만들어 수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런 핵심적인 진실들이 밝혀질 것인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3년 전 오늘, 지구 반대쪽 남대서양에서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했다. 브라질에서 2500㎞나 떨어진 곳이고, 그 바다의 깊이는 3000m도 넘는다. 그 배는 26만t의 철강을 싣고 중국으로 향하던 중에 변을 당했다. 24명의 선원 중 필리핀 선원 2명만 탈출해서 목숨을 구했고, 한국인 8명을 포함한 22명은 지금까지 실종 상태다.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침몰한 여객선을 인양해서 미수습자를 수색하고 침몰 원인을 지금까지 밝히는 게 세월호 참사가 처음이었는데 스텔라데이지호는 너무 먼 바다에 침몰했다. “유가족이 될 수조차 없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은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10만명 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고, 지금은 매일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문재인 정부 1호 공약으로 등재된 이 사건에 대해서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2월에는 심해수색 작업이 단행되었다. 다른 나라의 해역에서 침몰한 배에 대한 대한민국 최초의 심해수색이 이루어졌다. 심해수색에 나선 업체는 해역에 다가간 지 3일 만에 선체를 발견했다. 유골로 보이는 뼈도 발견했고, 작업화와 작업복으로 보이는 물체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업체는 블랙박스만 회수한 채 그냥 철수했다. 유해 수습 등은 과업지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업체와 계약을 잘못 맺은 탓이다.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침몰 원인 규명과 유해 수습을 위한 2차 심해수색 예산을 요구하여 마침내 100억원의 예산 투입을 약속받았다. 그렇지만 막판에 기재부의 반대로 예산은 0원이 되고 말았다. 100억원에서 0원, 정부 관료들은 지구 반대편의 먼바다, 심해에 가라앉은 화물선의 침몰 원인 분석과 유해 수습의 선례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난 2월에는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사인 폴라리스쉬핑 소속의 화물선 스텔라배너호가 광탄석을 싣고 브라질 해역을 항해하던 중 선수 부위가 침수되는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폴라리스쉬핑사 소속의 화물선들은 노후 선박을 일본에서 들여와 화물선으로 개조해 운항하면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음에도 선사는 선체보험금으로 440억원을 수령했고, 선사 회장은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을 뿐이다. 안전사고에 대해서는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으려는 이런 대응 태세, 그리고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이런 관행들이 결국 우리나라를 재난 공화국으로 머물게 하고 있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절절한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스텔라데이지호와 같은 화물선과 승객을 실은 세월호와 같은 여객선들이 언제 다시 침몰할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러고도 안전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안전은 비용이 아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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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성착취 가담자 전원을 엄중처벌하고, 피해자를 지원·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호욱 기자

최근 텔레그램 ‘n번방’에서 ‘박사방’을 운영하며 미성년자 다수를 포함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성착취물을 촬영, 공유하고 부를 취득한 20대 운영자 조주빈이 적발되었다. 그는 성착취 행위를 노골화하기 위해 고액의 모델 알바나 온라인 데이트 같은 감언이설로 피해자가 신상노출을 하게 한 다음 협박은 물론 노예나 다름없는 관계를 설정하는 등 치밀한 전략을 이용했다.

조주빈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국민청원이 불같이 일어났던 것을 보면 이번 사건에 대한 일반 시민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n번방의 최초 운영자는 아직 검거되지 않았으며, 만약 계속해서 불법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면 고통받을 피해자의 인권과 삶은 어떨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하루빨리 최초 운영자를 검거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가 왜 청소년 보호에 사회적 가치를 크게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아동청소년성보호법률은 11조부터 15조까지 19세 미만자의 성보호를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음란물의 제작과 배포, 성매매행위, 성을 사는 행위, 강요행위, 알선영업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이 모든 법률적 요소를 위반하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n번방’을 이용한 유료회원이 1만명에 이르고, 텔레그램 전체 성착취물 공유방 이용자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가 26만명에 달한다는 점이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과 도덕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이들도 함께 신상을 공개하고 처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들 역시 운영자의 행위를 방조하거나 조력했다는 점에서 공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신고해 피해를 줄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이들이 불법적 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성적 불법과 탈법적 행위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성년자 성매매가 대부분 랜덤채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결국 사회적 감시를 통한 예방과 불법적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인식 개선이 매우 중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성에 대한 무지와 비정상적 사고를 마치 정상인 것처럼 호도하는 잘못된 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성년자 성매매나 텔레그램을 통한 관음증적 행위는 결국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비인권적 행동이기에 착각을 정당화하는 자에게 절대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성년자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처벌의 강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가 ‘n번방’ 사태와 같은 행위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통과 연결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므로 사회적 관계망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SNS가 불법행위의 온상이 되도록 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미래를 건설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모두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청소년 보호를 위해 눈을 크게 뜰 때 청소년들이 안심하고 밝게 자랄 수 있는 긍정적 사회혁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권일남 |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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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강인한 신체에 몰두하는 미국 사회의 욕망을 읽었다. 이유 없이 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프랑스의 사상가가 보기에 ‘뉴욕 마라톤은 물신주의적이며 공허한 승리의 망상’이었다. 레이건의 애국주의가 지배하던 때였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나는 해냈다’고 외치는 1만여명의 마라토너에게서 강력한 물신주의를, 그리고 피트니스센터에서 뛰는 사람들에게서 ‘창백한 고독’을 읽었다.

글쎄, 우연히도 나는 1995년 11월, 센트럴파크에 있었다. 뉴욕 마라톤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대회가 시작된 지 예닐곱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내가 본 주자들은 매우 느린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인도 있었고 휠체어 장애인도 있었고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들의 환한 표정에서 ‘물신주의’나 ‘고독’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센트럴파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우린 할 수 있다’는 캠페인도 한편 압도적인 미국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시민들의 소박한 성취에 보내는 따스한 찬사로 들렸다.

한 개인의 신체 활동은 스스로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집합적 사회 행위다. 특히 큰 사태를 겪고 나면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는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미국 사회에서 ‘강인한 신체 신드롬’이 크게 유행했듯이, 사태의 한복판에 뚫고 나온 자신의 몸,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자신의 육체, 마침내 신선한 공기 속으로 걸어가게 된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사람들은 더욱 사랑하게 된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가 그 증거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공포스럽게 경험한 이후 사람들은 마라톤을 하게 되었고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평의 험준한 대부산에서 유명산으로 달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마도, 현재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5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짓눌렸던 몸과 마음의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야외 활동을 많이 할 것이다. 그때, 5월의 따스한 봄바람을 즐기며 걷거나 달릴 때, 더불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게 있다. 한 개인의 건강한 신체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 전체가 건강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차분히 소박한 일상을 견지하면서 나름대로 우애를 나누고 있다. 사태의 종식 이후, 우리가 더욱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연대다.

그것의 실질적인 구현에 있어 스포츠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신체를 보다 더 건강하게 단련하면서 미증유의 사태를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 전체가 그러한 마음 상태를 온전히 공유해야 한다. 아픈 사람, 약한 사람, 뒤처진 사람을 서로 돌보고 배려하는 사회 관계망의 재구성! 바로 그 소중한 일상성의 회복에 스포츠는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전국에 수많은 인프라가 있고 스포츠 전문가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가치를 국가 정책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21대 총선에 임하는 주요 정당의 정책을 보면, 스포츠 정책은 대부분 후순위로 밀려 있고 그것도 오래된 자료집에서 슬쩍 표지갈이만 한 듯 천편일률적이다. 스포츠계의 숙원 사업인가 봤더니 실은 지역 건설 사업에 가까운 것인가 하면 아예 스포츠 정책 자체가 포함되지 않은 정당도 있다. 후보들 중에서 스포츠의 사회적 가치와 미래적 가치를 표명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물론 현실 여건에서 스포츠가 국가 정책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보다 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경제, 노동, 복지 등이 우선 중요하다. 거꾸로 말하면, 스포츠는 아직 보편의 의제가 아니며 어떤 점에서는 특정 직능 분야에 머물러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스포츠의 사회적 가치와 그 아름다운 영향력이 공기처럼 퍼질 텐데, 그에 대한 관점이나 정책이 태부족한 상황, 그것이 안타깝다. 

아직은 한가로운 소리지만, 대규모 전염병에 대비하여 사전에 방역체계를 구축했듯이, 코로나19 이후의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위해 스포츠와 사회를 다양하게 재구성하고 연결하는 체계를 상상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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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어. 뛰면 안된다고 했지. 요즘은 더 조용히 있어야 해.”

오늘도 사자후 같은 아내의 잔소리가 집 안을 뒤흔든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집사람 목소리가 저렇게 큰 줄 몰랐다. 예전에는 한없이 애교가 넘쳤는데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지금은 논산훈련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목청이 커졌다. 딸만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사람이 아들 둘을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까. 아이들도 수시로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에 입이 잔뜩 나왔다. 기운 넘치는 나이에 집 안에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좀이 쑤실까. 그래서 잠시만 방심해도 소란을 피우고 이를 놓칠세라 엄마의 잔소리가 날아든다. 코로나19로 집 안에 갇힌 우리 아이들 모습이다.

아파트 생활이 대중화되며 층간소음 피해를 토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아이들이 집에 있는 요즘은 층간소음이 절정이다. 우리 윗집에도 유치원생이 사는데 어찌나 기운차게 뛰는지 하루 종일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참다못해 윗집에 양해를 구했으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다며 면박만 받았다. 작은 아이가 머리가 울린다며 우는 바람에 큰아이가 뛰쳐 올라간 적도 있지만, 여전히 윗집 아이는 매트도 안 깔린 바닥을 우사인 볼트처럼 질주한다. 윗집 아빠가 퇴근하면 발망치 소리가 몇 배로 커진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아이와 잘 놀아주는 좋은 아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사 가야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빠, 우리 아랫집도 시끄럽다고 할까요?”

“당연하지. 아랫집에는 고등학생 누나도 있잖아.”

“아! 그럼, 더 조용히 해야겠네요.”

공자님 말씀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 집 아이들은 배려를 배우고 있다.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고, 남을 불편하게 했다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사과하고 멈춰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스스로 느낀 덕분인지 우리 집 아이가 아랫집 식구들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사과는 나의 몫이었는데 아이 스스로 사과하는 모습에 대견한 기분이 든다. 체험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없다더니 윗집 발망치 소리가 우리 아이에게 좋은 교육이 된 것이다. 이런 걸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까? 내 아이가 딱 한 가지만 배워야 한다면 그것이 예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나부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니까.

창밖의 나무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딱 좋은 시기가 왔구나. 코로나19에 빼앗긴 운동장에도 곧 봄이 오겠지. 그때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 수 있도록 축구공과 자전거에 바람을 채워놔야겠다.

<강명규 스터디홀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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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vote counts.” 영어권 국가에서 투표 참여를 독려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자는 독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므로 “나 하나쯤이야” 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표현을 들자면 ‘투표는 신성한 권리’라는 말이 있겠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말들이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의미의 ‘count’에는 ‘계산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두 번째 의미로 말을 약간 변형하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이다. 이렇게 말할 때 ‘투표’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데이터다. 당선자의 득표수와 투표율뿐만 아니라 낙선자 득표수와 무효표 수, 기권율도 기록에 남는다. 이러한 데이터에 해석이 더해지면 여론이 된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믿음이 만드는 것이 당선자라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는 생각은 선거가 끝나고 난 뒤에도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론을 만든다.

모든 투표가 계산되므로 사표(死票)도 아쉬울 게 없다. 낙선자가 기대보다 많은 표를 받았다면 하나의 정치적 신호가 된다. 2014년 지방선거가 좋은 예시다. 당시 새누리당의 철옹성처럼 여겨지던 대구시장 선거에서 김부겸 후보가 낙선했지만 기대 이상의 표를 얻었다. 이는 대구 지역 유권자들에게 ‘민주당 계열도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가 됐고, 그 결과 2016년 총선에서 김부겸 후보가 수성구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사표는 한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버니 샌더스가 그랬다. 자본주의의 대장국가인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나온 그가 그토록 돌풍을 일으킬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샌더스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졌다. 그는 스스로 깃발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냈고, 미국의 청년들은 비로소 같은 정치적 열망을 공유하는 동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본선 진출도 못한 정치인이 만들어낸 결과다.

심지어 무효표와 기권율도 정치적 신호가 될 수 있다. 어떤 선거에서 눈에 띄게 무효표가 나온다면 이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올 것이다. 기권율도 마찬가지다. 직전 선거 대비 기권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면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보통 유권자들의 실망 내지 무관심으로 해석되겠지만, 선거를 앞두고 어떤 이슈가 있었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무산됐을 때 가시적인 투표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어 해석의 틀을 제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슈를 만드는 것이 선거만큼이나 중요하다. 선거는 어떤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구체적인 숫자로 환산함으로써 공론을 만드는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다. 그 누가 뽑힌들 해석되지 못한다면 선거는 단지 사람을 교체하는 행정적 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무기력한 투표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기권보다 무의미하다. 그러니 사표심리에 지배받지 말고 당당하게 투표하자. 뽑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도 꼭 투표해야 한다고 갈등하지 말자. 선거에 참여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촛불정신’의 지속을 결정하는 선거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촛불정신’이야말로 선거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지 않았던가.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탄핵소추안에 동참하게 만든 힘은 선거가 아니라 거대한 운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이 두렵나. 선거 다음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다. 유권자로서 우리는 단 한 표를 행사할 뿐이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권리를 지닌다. 정치와 선거는 동의어가 아니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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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참 많다. ‘쏘다’와 ‘쓰다’가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이 “야, 오늘은 내가 쏜다”라거나 “야, 오늘은 네가 쏴라”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하지만 이때의 ‘쏘다’는 참 이상한 표현이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쏘다’를 찾아보면 “활이나 총·대포 따위를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발사하다” “말이나 시선으로 상대편을 매섭게 공격하다” “벌레가 침과 같은 것으로 살을 찌르다” “매운맛이나 강한 냄새가 사람의 입안이나 코를 강하게 자극하다” 등의 뜻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을 내다”라는 뜻은 전혀 없다는 소리다.

‘한턱 쏘다’는 ‘한턱 쓰다’로 써야 하는 말이다. ‘쓰다’가 “(흔히 ‘한턱’이나 ‘턱’ 따위와 함께 쓰여) 다른 사람에게 베풀거나 내다”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 이를 ‘내가 낼게’나 ‘내가 살게’로 써도 된다.

다만 현재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쏘다’를 “여럿이 함께 먹은 음식 따위의 값을 치르다”라는 뜻으로도 다루고 있으므로, ‘쏘다’의 의미가 확장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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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리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물리적 접촉을 줄이는 것이 전염병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 하기에 모두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지난 27일 저녁(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도 텅 빈 바티칸 베드로 광장에서 전 세계를 위해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적막이 가득한 광장 사진을 본 모든 사람들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심각함을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3월2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스페인 언론인과 인터뷰하면서 “각국은 각자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 해법을 찾아야 하지만, ‘각자도생’은 절대 해법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물리적 거리 두기가 서로를 배려하며 전염병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로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쟁 시스템은 생산력을 높여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도 병원도 종교도 경쟁을 받아들였다. 이 경쟁은 효율성과 생산력의 힘으로 막대한 성장을 이루어주었지만, 그만큼 나와 타인을 나누고, 이웃마저도 경쟁의 상대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시대가 눈부신 풍요로움을 살고 있는 것만큼, 우리는 역사상 최고로 삭막한 세상에서 살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는 이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리 첨단 장비로 무장을 하고, 담장을 높이 쌓아 내 집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우리는 언제 어떻게 바이러스에 감염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장비를 구입할 수 있고, 마스크를 쌓아놓고 살며, 전문적인 의료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 공포는 줄일 수 없다. 결국 나와 남을 구분해서 나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것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이웃이 건강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건강을 위협한다. 이웃이 불쌍하기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훌륭한 마음이지만, 나와 이웃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마음이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살아왔던 성장의 시대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내 주변 어디까지를 방역해야 내가 안전해질까?’ 혹은 ‘나로부터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 차단해야 내가 병에 걸리지 않을까?’라고 질문해봐야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는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그들 가운데 지금 아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로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배척과 차단이 아닌 연대와 동참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이 건강해야 우리가 건강하다. 대구가 아프지 않아야 내가 아프지 않게 된다. 어디까지가 나의 이웃인지 의심하고 선을 긋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웃의 건강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연대한다면, 그는 나에게 건강한 이웃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 주변을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수용 | 가톨릭 신부,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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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 급한 걸음을 옮기는데 손바닥만 한 사무실 화단에 탁 걸리는 게 있다. 하늘에서 추락한 구름일 리는 없겠고 웬 눈뭉치인가 싶었다. 우수 경칩을 지난 지가 언제인가. 눈에게 눈이 깜빡 속았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다시 보니 하얀 꽃이다. 그간 내 몰랐을 뿐 오늘 갑자기 핀 건 아니었다. 벌써 뭉개지는 것도 있으니 세상 구경한 지 여러 날 되는 미선나무의 꽃송이들. 대견한 미선나무 꽃잎에 무작스럽게 코를 들이대니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이름에서 벌써 우람한 느티나무를 품고 있는 괴산은 과연 나무의 고장다웠다. 모텔의 어두컴컴한 복도는 물론 식당의 자투리땅마다 미선나무가 있어 은은한 향을 풍겼다. 중학교 어느 교과서에서 배운 이래 조금 특별하게 생각했던 미선나무. 열매가 부채 모양을 닮아서 유래한 저 미선이라는 이름은 나무를 지나 사람으로까지 쉽게 연결된다. 축제가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이름이 미선인 모든 분들께 미선나무 묘목을 선물하였다. 미선씨랑 동행할걸, 여운을 삼키며 어린 묘목을 업고 와 화분에 심었다. 미선나무에 얽힌 다소 싱거운 이야기를 어느 술자리에서 했더니 강화도에서 나무와 함께 나무 속에서 나무 같은 생활을 가꾸는 분이 선뜻 마음을 내주셨다. 우리집 정원의 미선이 하나 시집보내 드릴게요. 

무언가 큰 위로가 필요한 이 시절에 눈을 깜짝 놀래키면서 나에게 사정없이 달려든 게 바로 강화도 출신의 저 미선나무였다. 잠시 소홀했던 사무실의 화분도 확인해 보았다. 괴산의 어린 미선도 키가 훌쩍 자라 통통해진 겨드랑이마다 잎을 꼬박꼬박 내놓고 있다. 겨울을 이겨낸 새 가지를 만져보면 나무젓가락처럼 네모진 특징이 뚜렷하다. 내년에는 꽃도 피울 것이란 즐거운 예감이다.

어수선한 경자년의 봄. 꽃은 당장의 치료약은 아니겠지만 길게 보면 보약 이상이다. 괴산댁과 강화댁을 오가는 벌이라도 되는 양 나는 화단과 화분을 분주히 오르내리며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미선나무 곁에서 미선씨와 함께!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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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막을 최고의 방책은 ‘고립’과 ‘격리’다. 전 세계가 물리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는 이유다. 하지만 사람이 매개체이다 보니 확진자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지난해 12월31일 첫 환자가 보고된 이후 석 달 만인 30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는 72만명을 넘었다. 사망자도 3만4000명에 이른다. 실시간 코로나 자료를 제공하는 사이트 월도미터에 따르면 199개 나라와 지역, 2척의 크루즈선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 실제로 ‘고립’의 대명사로 통하는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마저 코로나 침투를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감염자가 한 명도 없는 ‘코로나 청정지역’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남극이다. 28개국이 과학기지를 운영 중이지만 엄격한 입국 통제 덕분에 확진자가 없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되기 전에 겨울로 접어들면서 많은 나라가 기지를 폐쇄한 것도 한몫했다. 지금은 가장 안전한 곳이지만 코로나 감염자 방지는 이곳의 최우선 과제다. 만에 하나 확진자가 발생하면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데다,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환자를 빼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외부인이 몰려들 교체기를 생각하면 긴장의 끈을 놓지도 못한다. 기지를 둔 대부분 나라가 확진자 다발국이어서다. 결국 고립과 격리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태평양의 섬나라 팔라우·나우루·바누아투·투발루·통가·사모아·키리바시 등과 인도양의 코모로 같은 곳에서도 아직 감염자가 보고되지 않았다. 엄격한 입국 금지 덕택이다. 대륙에서는 북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중동의 예멘, 아프리카의 남수단·시에라리온·부룬디·보츠와나·레소토·말라위·서사하라가 확진자 ‘0’ 상태다. 하지만 이 통계를 신뢰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식적으로 감염자 수를 밝히지 않은 북한에서도 국경지대 군부대에서 100명 이상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다. 나머지 국가에서는 전쟁이나 내전 탓에 집계가 불가능한 상태다.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의료 시설이 열악한 이곳에 코로나19가 침투하면 대재앙이 될 것이 뻔하다. 코로나 청정국이 아니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코로나 사각지대’일 뿐이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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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비상경제회의 결과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30일 제3차 비상경제회의를 열고 소득·자산 환산 하위 70% 가구에 대해 최대 100만원(4인 이상)의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원금은 1400만가구에 가구원 수에 따라 40만~100만원을 지역사랑상품권이나 전자화폐 등으로 지급된다. 집행은 이르면 5월 초쯤이다. 정부는 재원 마련을 위해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다음달 안에 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일회성 지원이다. 정기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과는 다르다. 그러나 지급 대상이 전 국민의 70%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기본소득 취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지원금이 소비를 통해 자영업자·소상공인을 거쳐 기업으로 흘러들어 무너져가는 경제를 되살리는 선순환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취업포털 인크루트 등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자영업 점포 10곳 중 9곳은 매출이 줄고 매출액은 평균 63%가 감소했다. 손님이 없어 3곳 중 1곳은 휴업 상태다. 기업들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경기를 더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총선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지금은 정치적 목적의 집행으로 비판만 할 상황이 아니다. 경향신문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5%가 기본소득 지급에 찬성했다. 재원 마련에 대한 정부의 접근도 유의할 대목이다. 정부는 긴급재난지원금 재원 10조3000억원 중 1조2000억원은 이미 조성한 저소득층소비쿠폰 등으로 충당하고, 2조원은 지방정부에서 부담토록 했다. 나머지 7조1000억원의 ‘2차 추경’은 사회간접자본 등 예산을 재조정해 조성했다. 코로나19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재정 여력을 남겨둔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이제 긴급재난지원금의 큰 틀이 마련됐다. 정부는 구체적인 지급 액수나 대상을 둘러싼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재정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지급하고 목적에 부합하는 곳에 쓰이도록 해야 한다. 휴직·실직 등으로 소비 자체가 불가능한 취약계층에게 지원금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인공호흡기’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전자화폐나 지역상품권이 편법적으로 현금화돼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럴 경우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부양의 마중물 효과는 반감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도 2차 추경 통과와 예산 구조조정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도입된 긴급재난지원금 실험은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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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4월1일 0시부터 국내 입국자에 대해 2주간 자가격리를 의무화하는 조치에 들어간다. 이번 조치는 출발지와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입국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관광 목적 등의 단기 체류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다. 입국자 자가격리 의무화는 ‘고강도 물리적 거리 두기’의 한 방편이자 코로나19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검역대책이다. 

정부의 입국자 자가격리 방침은 국내 신규 확진자의 30~40%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현실에 따른 것이다. 현재까지 코로나19의 해외 유입사례는 476건. 29일 신규 확진자 78명 가운데 29명(37.2%), 28일에는 146명 중 41명(28.1%)이 해외 입국자였다. 문제는 유럽·미국 등지의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국내 유입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정부는 앞서 해외 입국자 특별입국절차(3·19), 유럽 입국자 진단검사(3·22), 미국 입국자 자가격리(3·27) 등으로 검역을 강화해왔다. 이번 조치는 사실상 해외 입국금지 단계로 대응 수준을 높인 것이다. 

현재 코로나19 의심 증상자와 해외 입국자 등 자가격리 중인 사람은 1만4000명에 달한다. 여기에 다음달부터 입국하는 하루 7000~8000여명이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대상자는 최대 1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자가격리 수칙에 따르면, 모든 입국자는 2주간 자가주택이나 격리시설과 같은 지정 장소에서 1인1실 기준으로 자가격리해야 한다. 호텔과 같은 숙박시설 이용은 안된다. 격리 대상자는 휴대전화에 자가진단 앱을 설치하고 방역당국에 매일 전화로 증상 유무를 알려야 한다. 입국자 전면 격리 조치 시행을 앞두고 격리 대상자를 관리하는 인력과 시설을 확보하는 일은 중요하다. 특히 하루 외국인 입국자가 1500~2000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이들을 수용할 격리시설도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자가격리 위반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며 수칙 준수를 당부했다. 외국인에게는 강제추방 또는 입국금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가격리 수칙을 위반한 자는 무관용으로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수칙 엄수다. 격리 대상자의 수칙 위반은 자신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사회방역망에 큰 구멍을 낼 수 있다. 자가격리는 개인에게 불편하지만, 코로나19를 잠재울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자발적인 동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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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시민들의 참정권이 침해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0일 코로나의 세계적 확산으로 인해 주미국 한국대사관 등 미국의 12개 공관을 포함해 총 40개국 65개 재외공관의 재외선거사무를 다음달 6일까지 중단하기로 했다. 4·15 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다음달 1~6일 실시되는 만큼 이 지역 유권자들은 투표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전체 재외 선거인 17만1959명 중 46.8%에 해당하는 8만500명이 투표를 할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다. 코로나19 확산세를 볼 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재외국민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재외국민들이 투표를 못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해당 국가에서 외출제한과 통행금지 등을 시행하고 있고 위반 시 처벌도 받을 수 있어 투표를 실시할 방법이 없다는 게 선관위의 설명이다. 재외공관을 찾아가 투표하고 투표함을 국내로 옮기는 방식의 재외국민 투표는 거주국의 이동금지 조치나 항공 노선 중단에 취약하다는 점도 드러났다. 선관위는 해외 상황을 고려하되 투표권 제약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선거사무 중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내 거주자에게만 우편을 통한 거소투표를 허용하는 공직선거법의 개정 등 제도적 보완도 필요해 보인다. 

국내 유권자 일부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 확진자 중 일부는 거소투표나 4월10~11일 실시되는 사전투표를 통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4월1일 이후 귀국했거나 확진자와의 접촉으로 선거 당일까지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이들은 투표권을 행사할 길이 없다. 28일 거소투표 신청이 마감된 후 입원한 환자들도 투표가 불가능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내 일반 유권자들의 투표 상황이다. 유권자들이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투표를 외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갤럽의 지난 17~19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9%가 투표소 감염 우려를 표명했다. 선관위는 철저한 방역과 물리적 거리 두기 등의 안전장치 도입으로 유권자들의 불안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시민의 투표권 보장은 민주주의 실현의 요체다. 정치권은 안전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 전반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투표율 제고를 위해 선거일과 사전투표 기간을 늘리자는 제안도 나왔다. 전자투표 도입과 함께 재외국민 투표나 거소투표에 대한 규정을 유연하게 해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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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생 개선이 그 어떤 사회적 조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청결과 (위생)예절이 먼저 확립되지 않는다면, 교육과 종교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

1851년, 찰스 디킨스가 런던 보건국 홍보 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런던은 그리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5세 이하 어린아이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다. 어린이는 으레 ‘소아병’에 걸리는 법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더럽고 비좁아졌고, 아이들이 쏟아져나왔다. 어린이는 매일 12시간을 공장에서 일했다. 13세 디킨스도 주급 6실링을 받고 구두약 공장에서 온종일 일해야 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장의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수백명의 학생이 좁은 곳에서 수업을 받았고, 모진 체벌을 받았다. 19세기 초에야 교사가 학생을 때려죽일 수 없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공장을 따라 교실의 창문을 없앴다.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려 팔다리가 휘어졌다. 당시 18세 청소년의 평균 신장은 152㎝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일자리는 주로 도시에 있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공장 혹은 공장형 학교 중 하나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항아리손님(유행성 이하선염)이 찾아오고 호열자(콜레라)가 도시를 덮쳐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일부 부유층만이 냄새나고 답답한 도시를 떠나 교외로 향했다. 햇빛이 드는 가정에서 공부하고, 숲과 들판에서 뛰놀 수 있는 어린이는 많지 않았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출석하여 책상 앉기를 견뎌내는 과정은 미래의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에게 아주 중요한 훈육이다. 하지만 디킨스는 생각이 달랐다. 실질적 지식 전달이 학교의 목적이며, 사회적 순응을 위한 훈육은 부차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첫 문장은 이렇다. “저 아이들에게 사실만 가르치시오. 삶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사실이오.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소. 다른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오.”

개학 연기는 단지 물리적 거리 두기의 일환만은 아니다.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등교를 강요당한다면 산업혁명 당시 영국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감염병을 무릅쓰고 출석한 학생에게 보건과 위생을 가르칠 수는 없다.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과 기만을 배울 것이다. 혹시 맞벌이 부모의 출근을 위해서라면 더 슬픈 일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도 부모는 일터로, 아이는 학교로 가야 한다면 19세기의 런던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디킨스는 공공 보건의 선구자였다. 위생 개선, 병원 설립, 의무적 백신 접종에 앞장섰다. 상이군인 지원과 장애아동 교육도 제안했다. 슬럼가를 개선하자며, 빈민층의 높은 사망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그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올리버 트위스트의 시대에는 어린이가 넘쳐났다.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어 나가도 세상은 무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노인이 넘쳐난다. 코로나19는 노인에게 몇 배나 더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몇 배나 되는 것 같진 않다. 학교는 휴교 중이라지만, 요양원은 그대로 괜찮은 것일까? 노인들이 대거 퇴소하여 가족 곁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류사를 통틀어 어느 때보다도 오래 산다지만, 이래서는 그 빛이 바랜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하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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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가 보았다. 골목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건너편 건물 지하에 있는 교회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목소리의 질감을 고려했을 때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인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굳이, 이 와중에, 기어이. 분노보다 공포가 먼저 엄습했다. 노랫소리에 공포라니. 공포 두려움 위축, 분노는 뒤늦게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이 호흡하는 공기에서 최대한 떨어지는 것. 내 안전한 공간으로 피신해 숨어 있는 것.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으니 굴욕감이 공포를 대신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 면전에 침을 뱉은 것 같았다. 침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두려워졌다. 대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란 말인가.(*문장은 브레히트의 시 ‘이후에 태어난 자들을 위하여’가 인용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제목 ‘이것은 어떤 종류의 시대란 말인가’를 변형한 것임) 

3월 한 달은 거의 방에서 지냈다. 부득이한 볼일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삼갔다. 약속들은 거의 다음 달로 미루어 두었다. 자발적 격리 상태는 종종 있는 일인 데다, 어차피 마쳐야 할 마감도 있었고, 미처 풀지 못한 짐들도 잔뜩 쌓여 있었으므로, 물리적 거리 두기는 아주 모범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고 진척은 바쁜 와중만큼을 따라가지 못했고, 격리가 아니라 감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때때로 억울하고 숨이 막혔다.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지난 한 달 내내 방 하나를 온전한 집으로 구성하는 데 매진하게 되고 말았는데,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선순위를 매겨 제거해 나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낯선 물건들을 찾아 들이느라 우왕좌왕했다. 빼고 빼도 넘쳐났고, 더하고 더해도 필요한 무언가가 생겨났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 방이란 무엇이고 집이란 무엇이고 장소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떤 방에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아버렸다 

우리의 목구멍에서 나와야 할 

소리는 찬송이 아니라 

결기의 목소리다


방.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이나 칸막이로 막아 조성한 내부 공간. 들고 나기 위한 문과 채광 환기를 위한 창이 설치된 독립된 공간. 

최초의 방은 불을 들이는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불을 지펴 추위를 피하고 요리를 해 먹고, 불을 중심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충 쓰러져서 자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부엌이자 거실이자 침실인 안전한 하나의 공간. 

이제 보통의 주거공간에서 방이란 취침이나 휴식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하나의 방이자 주거공간을 획득했다. 여성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였던가. 

그런데 나는 언제 처음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나.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틈만 나면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아지트 같은 곳. 다락방. 그곳에는 쿠오바디스나 목로주점 같은 책들이 쌓여 있고, 아버지와 엄마의 결혼식 사진이 든 앨범이 있고, 고개 하나 겨우 내밀 수 있는 창으로 이웃집 부엌이나 마당을 훔쳐볼 수도 있었다. 그곳은 내게 은신처이자 놀이터였고, 기록보관소이자 도서관이었고, 창고이자 전망대였다. 그곳에 있으면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가족을 피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부재를 잊기 위해 그곳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 몇 걸음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누군가와 함께할 것이 보장되므로, 그곳은 고립이 아니라 고유한 장소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방들이 존재한다. 사용하는 주체와 형식과 용도에 따라, 안방 건넛방 사랑방 셋방 다락방 옥탑방 빨래방 노래방 찜질방, 심지어 방탈출방까지. 어떤 방들은 따스하고 어떤 방들은 선언적이고 어떤 방들은 유용하고 또 어떤 방들은 문제적이다. 

방은 이제 더 이상 벽과 천장과 문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떤 방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아버렸다. 이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세상이냐, 라며 눈 질끈 감고 저마다의 방으로 도망갈 일이 아니다. 

여기서 느껴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는 브레히트의 고백처럼, 범죄에 대한 침묵 또한 범죄나 다름없다는 브레히트의 자기반성처럼,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조금이라도 듣게 하는 것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처럼. 우리의 목구멍에서 나와야 할 소리는 찬송이 아니다. 이후에 태어난 자들을 위한 결기의 목소리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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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30일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착취 영상이 유포된 텔레그램 n번방 관련자 전원의 처벌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명 ‘박사방’ 운영자 검거와 ‘n번방’ 성착취 사건이 알려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멘털이 무너지고’ ‘잠을 잘 수가 없다’ 한다. 충격은 컸고 분노는 관련 국민청원의 사상 최다 동의로 표출되었다. ‘n번방’ 얘기로 온·오프라인이 뜨거웠고 여론을 의식한 국회, 청와대, 정당, 법무·검찰, 법원까지 앞다투어 대책을 내놓고 있다. 

맘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빠르게’도 중요하지만 절박함과 다급함에 쫓겨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모든 범죄자에 대한 분명한 처벌과 피해자 지원 등 당연한 눈앞의 대책 외에 우리 사회는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지, 공동체 가치와 원리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n번방 성착취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 기제와 공론화 과정에서 떠오른 핵심 키워드는 일치한다. n번방 성착취의 시작은 불법 취득한 개인정보와 성적 이미지였다. 가해자는 여성의 성적 행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작동 방식, 피해자의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 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건 공론화 이후 국민청원의 내용은 ‘가해자 신상정보 공개’였고 일탈계, 조건만남 등 피해자를 탓하는 얘기도 어김없이 나왔다.

피해자를 탓하고 피해자에게 주목하는 것은 철저히 가해자 중심 서사다. 모든 사람은 결함이 있다. 피해자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강조도 피해자를 구분, 피해자의 결함 여부를 따지는 맥락에서 같은 말이다. 폭력은 ‘누가’ 당했는지 관계없이 폭력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주목하는 가해자 중심 서사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범죄를 ‘축소’하고 ‘정당화’한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위축시키는 담론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물론 여성들이 폭력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든다. 제2, 제3의 n번방 사건, 무수한 성폭력범죄를 가능케 하는 자양분이 될 뿐이다. 

많은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경찰은 공식 절차를 통해 신상공개를 결정했다. 그러나 하루 전날 ‘국민의 알권리’를 내걸고 SBS가 단독 보도했고 이후 가해자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영원히 사회적 낙인을 찍어버리겠다는 집단이 나타나 수백명에 이르는 가해자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가해자의 협박 무기였던 ‘신상공개’가 ‘공익’과 ‘처벌’의 수단이 되었다. 사적 구제방식까지 등장한 현실에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 ‘신상공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폭력’의 방식으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무엇이 폭력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회가 폭력을 만든다. 여성시민권 관점에서 ‘폭력’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한다. 국가도 언론도 ‘폭력’에 자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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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장애인들은 ‘420공동투쟁단’이라는 걸 꾸린다. ‘장애인의날’인 4월20일에 맞춰 장애인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고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투쟁단은 매년 3월26일 출범해서 4월20일까지 활동한다. 올해도 3월26일, 지난주 목요일에 출범식을 가졌다. 코로나19 때문에 간격을 유지한 채 간소하게 진행되었지만 날짜가 바뀌지는 않았다. 

도대체 3월26일이 무슨 날이기에 그럴까. 이날은 장애해방열사 최옥란의 기일이다. 생전에 나는 그를 TV에서 보았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었던 그가 12월의 칼바람을 맞으며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는 사정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 이것이 그가 내건 요구였다.

사정은 이랬다.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경제력이 없는 국민들에게 최저생계비가 지급되었다.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하던 최옥란도 28만원 남짓의 생계비를 받았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이 돈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했다. 임대주택 관리비와 공과금 16만원, 병원을 다닐 때 드는 교통비 12만원, 근육이완주사비의 월별 환산액수 13만원. 다른 비용은 고려할 것도 없었다. 서너 개의 지출 항목으로도 생계비가 넘었다. 노점을 해서 생활비에 보태고 싶었지만 일정 소득이 발생하면 수급권을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의료비 혜택의 상실을 의미했다. 매주 병원을 이용해야 하는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명동성당 앞 농성에 나선  이유였다.


장애인 차별에 저항한 운동가

마지막에 택한 건 ‘한 줌의 약’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우리

열여덟 번째 봄, 그를 떠올린다


사실 당시 최옥란은 또 다른 싸움의 와중에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어렵게 낳은 아이였다. 병원의 미흡한 대처로 최옥란의 장애는 이때 경증에서 중증으로 변했다. 이후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혼했고 남편과 아이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벌였다. 판결은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내려져 있었다. 그에게는 ‘돈 없는 중증장애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월 2회의 면접시간을 인정받은 게 전부였다. 생계가 불가능한 생계비처럼 면접시간도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방송 중 그는 무언가를 황급히 감추었다. 한 줌의 약이었다. “정말 힘들 때…”라며 그는 울먹였다. 노트에 적어둔 유서도 있었다. 그해 겨울의 싸움에 생명을 걸었다는 게 분명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방송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정부도, 사람들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싸움을 벌이는 사람에게 죽음 이외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사형선고문이 전달되었다. 아이와 살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입증할 통장 잔액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주변에 도움을 청해 얼마간의 돈을 넣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돈 때문에 수급권이 박탈되었다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정해진 일이 정해진 대로 일어났다. 방송에서 말한 ‘정말 힘들 때’가 오고 만 것이다. 그는 약을 먹었다.

그는 참 가난했다. 미군기지촌에서 태어난 빈민이었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양육권을 빼앗긴 중증장애인 이혼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 열심히 싸웠다. 일찍부터 직업재활원에 들어가 생계를 꾸렸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밟았으며, 1980년대 말부터 장애인 운동에 뛰어든 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했다.

3월26일, 나는 지금도 그날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처음에는 모든 가난을 응집한 한 사람의 비극적 죽음이 슬펐고, 다음에는 예고된 죽음을 그대로 지켜본 나 자신과 사회에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운동가로서 그의 삶을 알고서 너무 부끄러웠다. 이듬해 나는 어느 신문에 고정 칼럼을 실을 기회를 얻었다. ‘최옥란을 기억하며’, 이것이 내 생애 첫 칼럼의 제목이다. 내가 생전의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부끄러운 침묵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18년 전 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생면부지의 장애인 운동가들을 만났을 때 느낀 까닭 모를 반가움이나 머뭇머뭇 걸어 들어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느낀 푸근함은 모두 내 안의 그가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여느 학교들처럼 노들야학도 지금 휴교 상태다. 휴교 전 개학식 날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가장 많이 바꾼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차별과 배제, 억압, 가난을 누구보다 철저히 겪고 있기에 세상이 바뀌어야 할 이유를 그 어느 곳보다 많이 알고 있는 학교. 모두가 개학을 기다리는 오늘, 최옥란이 떠오른다.

<고명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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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매출이 100만원 가까이 줄었다. 9평짜리 작은 편의점엔 큰 타격이다. 편의점주 카페에선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하락에 야간영업 중단, 임금 보조, 신선식품 폐기 지원 등 본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다. 야간 알바생 둘의 월급을 빼고 나니 하루 15시간씩 도는 가족들의 시급은 3000원이 채 되지 않는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프랜차이즈 계약이라 휴업도, 폐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버티는 것만이 최선이다.

이미 코로나19의 여파로 여기저기서 일자리를 잃거나 가게를 휴·폐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회가 서서히 마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물리적 거리 두기는 더욱 치명적이다. 우수한 의료자원과 시민들의 협조 등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한국의 명성은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지만, 그 사이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그저 필요한 조치임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견딜 뿐이다.

본사에서는 물류비용을 효율적으로 개선한다는 이유로 세 번에 나눠 보내던 물건을 한 번에 전부 쏟아놓고 갔다. 혼자서는 정리할 수 없는 양이 작은 가게를 가득 채웠다. “이걸 어떻게 한 번에 다 정리하라는 거예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울상 짓는 기사님에게 말해본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화가 난다. 물건들로 입구를 막아놓고 어떻게 장사를 하라는 건지. 며칠 전 본사에서 보낸 ‘우리 함께 코로나19를 극복하자’는 홍보물이 생각났다. 우리 함께 극복하자고? 대체 그들이 말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수고하세요.” 

교대하러 온 야간 근무자분께 새 마스크 한 장을 챙겨드리며 가게를 나왔다. 퇴근길에 있던 국밥집 입구엔 ‘당분간 개인 사정으로 휴업합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종이 위에 써 있었다. 늘 같은 전자담배를 사가는 곱창집 사장님은 웬일로 바깥 의자에 앉아 끊었다던 연초를 태우고 있었고, 그 옆의 왁자지껄하던 생맥줏집은 불빛만이 조용히 반짝였다. 항상 주차할 자리가 모자라던 갓길은 텅 비어 있었다. 비로소 우리가 거리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작은 가게가 휴업하면 일자리 두세 개가 사라진다. 폐업이라도 하면 어제의 사장은 오늘의 백수다.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다. 임대료는 없으니까. 빚이 있으면 상황은 더 끔찍해진다. 일손이 모자란 물류센터에 가서 택배라도 옮기면 다행인데, 이젠 그것도 젊고 힘 좋은 사람들이 먼저다. 카드값, 통신비, 대출금 같은 것들은 기다려 주지 않고, 잠에서 깨면 허기진 배가 원망스럽다. 하루하루 통장 잔액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빚에 허덕여 죽나, 병으로 아파 죽나, 굶어서 죽나. 무엇을 고르든 비극이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시로 청소를 한다. 주기적으로 하는 관공서의 방역소독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만 최선을 다해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희망을 얻기 어렵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들이 손톱 다 깨져가며 피투성이로 버틴다 한들, 손 내미는 이 없이는 결국 추락할 뿐이다.

최근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고위 공직자들이 고통 분담의 의미로 월급 일부를 반납했다. 미담은 될지언정 효과적이지 않다. 지금은 시장에 수요를 일으켜야 한다. 재난기본소득, 세제혜택, 위생용품 지원, 정기소독 및 안내, 로열티와 임대료의 할인, 의무영업시간의 완화, 대출과 금융문제에 대한 연기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 도움이 된다. 특히 국민 다수에게 소비용 체크카드나 지역상품권을 제공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는 무척 바람직하다고 느껴진다.

정부와 기업의 최선이 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을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마스크 끈에 쓸린 귓등이 따끔거렸지만 꽉 조여 매며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우리의 노력이 일상으로 돌아올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하게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박진웅 | 편의점 및 IT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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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시가 청계천·을지로 지역 재개발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재정비사업을 재생사업으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은 다수 상인들의 고통을 담보로 시행사만 이득을 보는 잘못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공공성을 위해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오랫동안 일해온 세입자들만이 아니라 우리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건물주조차도 원하지 않는 사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됐다면 이미 행정 절차가 진행됐더라도 당장 멈추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금의 대책은 말 그대로 방향 전환일 뿐이고,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개발사업이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생태계 활성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 없이, 철거되는 업체들을 인근의 대체부지로 이주시킨다고 한다. 심지어 재개발구역 해제로 인해 발생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방지책도 없다. 이렇게만 보면 결국 주상복합아파트를 짓고 주변 지역은 민간에서 알아서 개발하게끔 두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청계천·을지로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허용하고 남은 비좁은 땅에 아파트식 공장을 짓는다면 과연 산업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대체부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현 골목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는 리모델링형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산업생태계를 살리고자 했다. 한발 물러나 재개발을 인정하고 대체부지를 받아들인다고 한들,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는 한 우리에게 대체부지는 의미 없다.

청계천·을지로 일대는 오랜 협업관계로 이루어진 제조 특화 지역이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60년 동안 이 지역에서 거래를 하면서 축적된 유통 경로와 신뢰 관계가 지금의 협업체계를 형성했다. 정밀 가공을 중추로 해서 공구, 철물, 기계부품, 조명, 귀금속, 시계, 인쇄, 전자부품 등 여러 제조·유통 업종들이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시장을 이끌어왔다. 이렇게 특화된 점포 하나하나가 특수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한 점포만 사라져도 지역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산업생태계의 구조도 이해 못한 채로 우선 이주부터 하라고 한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 다른 곳에 붙이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가든파이브 사태가 반복될까 우려된다. 

이곳은 제조업 르네상스의 발상지다.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산업생태계는 맞춤형 소량 생산에 특화되어 있고, 자원과 정보의 유통과 접근이 용이한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기업 및 공공 연구소, 학교 연구실, 창업가, 예술가 등 창의적인 생산활동을 하는 곳에서 많이 이용한다. 이 같은 산업생태계가 파괴되면 제조업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산활동 전체를 떠받치고 있던 토대가 무너진다.

아직 늦지 않았다. 방향 전환의 용기를 보여준 만큼, 서울시가 상인들과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고민과 연구를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재개발로부터 산업생태계와 상인들의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 마련은 지역 주체인 상인들과 머리를 맞댈 때에만 가능하다. 도시 제조업의 미래를 위해 서울시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조무호 | 청계천생존권사수비상대책위원회 정밀지구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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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선거 한번 치르면 어김없이 이가 하나씩 부러졌다. 요즘엔 선거 끝나면 체중이 늘어서 나온다고 한다. 이가 부러지고 살이 찌는 것 모두 스트레스의 결과일 것이다. 선거 실무라는 것이 열악한 업무조건에서 짧은 기간,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싹 비워내야 하는 일이다. 화려하고 멋진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심지어 선거 실무를 하면 큰돈을 만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통념이다. 과거 한국 정치의 현실이 반영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상적인 통념일 뿐이다. 선거에 대한 일반인들의 통념 말고도 선거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도 있다. 통념은 현상이 주는 느낌이 확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1. 투표율이 낮으면 통합당이 유리하다. 1987년부터 2016년까지 역대 선거 결과로 적극 지지자 규모를 보면 민주당 19%, 통합당 33%. 투표율이 낮은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대체로 지는 이유다. 적극 지지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심지어는 후보 이름을 몰라도 지지 정당에 투표하는 계층이다. 그런데 광화문 촛불의 동기가 누적되었던 2012년부터 2018년까지로 압축해 보면 적극 지지자 규모는 민주당 27%, 통합당 24%로 역전되었다. 오히려 투표율이 낮으면 민주당이 유리하거나 통합당과 대등한 구조다.

#2. 광화문 촛불 때문에 민주당 지지자가 증가했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소극 지지자를 투표장으로 동원하고, 교차투표자를 설득해야 한다. 소극 지지자는 후보 이미지, 정당 행태, 정책 방향 등 중에 한두 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지만, 투표장에 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교차투표자는 실제 투표하는 부동층이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48%를 득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역대 선거 결과로 보면 민주당 적극 지지자 19%, 소극 지지자 20%, 교차투표자 8%. 이를 더하면 47%다. 그러니까 2012년 문재인 후보는 동원과 설득에 성공하여 얻을 수 있는 최대 득표값을 얻었다. 반면 2017년 대선에선 41%를 얻었다. 적극 지지자와 소극 지지자에게만 표를 받은 셈이다. 광화문 촛불로 치러진 대선임에도 불구하고 소극 지지자 동원엔 성공했지만, 교차투표자 설득엔 실패했다.

#3. SNS 선거가 승패를 좌우한다. 내일이 투표일이라면, 나의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 SNS 친구들은 어느 정당에 투표할까.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있다면, SNS 친구 중 상당수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할 것이다. SNS도 비슷한 성향끼리 묶인다. SNS 효과는 찻잔 속 태풍일 가능성이 있다.

#4. 골목 선거는 과거의 선거운동방식이다. 후보와 캠프의 선거운동을 본 후, 투표를 결정하겠다는 유권자는 26%(2017년 갤럽조사). 이들은 대부분 소극 지지자와 교차투표자이다. 직접 보여주고 들려주면 동원당하고 설득당하겠다는 방증. 미국은 50%에 육박한다. 특정 의류브랜드에 열중하는 소비자가 아니라면, 구매 시 매장에서 물건을 직접 살펴보고 인터넷에서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투표든 소비든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는 흐름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미디어 선거 이후, 찾아가는 골목 선거 즉, 직간접적인 대면 선거가 중요해졌다. 우리가 아는 사실. 실은 통념일 수 있다.

<최정묵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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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심상정 상임선대위원장이 30일 국회에서 ‘21대 총선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심 위원장은 ‘이번 선거는 거대양당의 대결정치를 극복하는 선거’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은 한국 정치의 개혁 원년이었다. 10석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했고, 국회 곳곳에는 그동안 듣지 못했던 약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16년이 지났다. 4·15 총선 후보자 등록 결과 정의당은 비례대표 정당기호 6번을 받았다. 법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면 단 하나의 방법이 선거법 개정이라고, 그래서 원내교섭단체를 꾸리겠다고 장담했던 정의당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어찌 정의당의 비극이기만 하랴. 진보정당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6’이라는 숫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정의당 안팎에선 후보 등록 전후로 심상정 대표 결단설이 흘러나왔다. 대표직 사퇴, 지역구 불출마 선언 등 꽤 구체적인 내용으로 확산됐다. 심 대표 결단이 당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노회찬 정신’을 되살릴 거란 기대까지 섞여 있었다. 심상정 책임론은 선거제 개정 협상부터 시작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비례 의석수를 줄였고 캡까지 씌웠다. 미래통합당은 협상장 밖에서 위성정당 창당을 압박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거대 양당의 기득권 사수용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심 대표는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이었다. 대비책을 마련하든지, 협상장을 박차고 나와 시민들의 힘을 빌렸어야 했다. 당 비례대표 선출 과정도 도마에 올랐다. 진보 대표성은 차치하고라도 음주운전 전력이 드러난 후보를 사퇴시켰다면 대리게임으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진 후보도 사퇴시켰어야 맞다. 하지만 한 후보만 물러났다. 근본적인 문제는 진보 정체성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정의당은 조국 대전에서 민주당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참회 기자회견을 했다. 또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면서 민주당과 단일화 불가 방침을 선포했다. 그러더니 심 대표는 비례위성정당을 놓고 통합당은 비난하면서도 민주당은 안타깝다고 했다. 최근 정의당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다. 선거제 개정을 안 했을 때보다 혼탁해진 상황이다. 심 대표의 정치적 명운을 건 결단이 국면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권영길 초대 민노당 대표에게 물었다. 내 생각에 확신을 더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권 전 대표는 “정치가 없어진 마당에 정의당이 몇 석 더 얻겠다고 애쓰면 뭐하나. 대표 사퇴 외칠 때가 아니야. 선거 기술로 표가 올 거 같아? 안 와. 김종인 등장이 정의당에 남은 마지막 기회야. 또 경제민주화 외칠 텐데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고 혼내야지. 진보정당이 16년 전 외쳤던 경제민주화, 부유세, 무상 시리즈를 10년 전부터 보수 정당도 따라 하잖아. 그땐 진보정치가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단 걸 보여줬어. 지금은 그런 각오가 필요한 때야. 우리가 품었던 꿈만 빼고 다 내려놔야지. 그래야 부활이라도 할 수 있어.” 

정의당은 당장의 생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진보는 선명성만으론 안돼. 삶이 고달픈 사람들 곁에서 오래 같이 있을 각오를 해야지. 공중전, 그만하자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보정치 원로는 구로동맹파업을 이끌었던 심상정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꿈을 당연한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최장기 여성 수배자라는 고통을 감내했던 그 정신을 다시 새기라는 충고였다.

맞다. 진보 지지층이 무당파로 돌아서는 마당에 정치공학이 무슨 해법이 되랴. 위성정당까지 들어선 이상 기득권 정치는 더 공고해질 것이다. 오히려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속 ‘토끼’처럼.

지난 대선 ‘최후의 1분’이 떠오른다. 심 대표는 TV 토론에서 동성애자 찬반 논란에 빠진 여야 후보들에게 맞서 “성소수자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로 1분을 채웠다.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회가 어디서 썩고 있는지 정치가 짚어낸 순간이었다. 대선 결과, 정의당은 패했지만 심상정의 1분은 이겼다. 이번에도 ‘심상정의 1분’을 기대한다. n번방 사태였으면 좋겠다. n번방 사태는 모든 젠더 모순들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점까지 왔고, 인류 절반인 여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회가 어디서 썩고 있는지 정치가 짚어내야 할 순간이다. 심 대표는 중대 결단을 앞두고 청계천 전태일 거리를 찾는다. 30일 정의당 일정이 기자들에게 고지됐다. 심 대표는 전태일 거리가 아닌 국회 본관에 선다. ‘심상정의 1분’을 기다린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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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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