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3월28일자에 게재된 기고문 ‘아동음란물 정의 세분화해 양형기준 세워야’에 대한 반론을 쓰고자 한다. 기고문은 실존아동 성착취물에 대한 실제 형량이 낮은 이유로 ‘가상아동’을 대상으로 한 다수 음란물과 ‘실존아동’에 대한 성착취물이 동일하게 취급되니, 둘을 구분해 실존아동에 대한 성착취물 양형을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착취물에 대한 형량 문제는 성착취물에 경각심 없는 사법체계의 관행을 고쳐야 할 문제지, 가상과 실존의 구분 문제가 아니다.

애니메이션 등으로 이뤄진 가상아동 성착취물은 온라인의 공유형태와 만나 실존아동에게 치명적 악영향을 끼친다. 온라인에서의 공유는 특정한 상황을 여러 사람에게 전파해 콘텐츠와 관련된 인식 혹은 의식을 강화한다. 가상아동을 성적대상화하는 콘텐츠의 공유행위는 실제 피해 아동이 없어서 다행인 게 아니다. 실제 아동에 대한 성학대를 가정하는 데 쓰이며, 아동 착취를 쾌락으로 여기는 행위를 강화할 수 있어 해악을 끼친다.

‘n번방’ 사건을 보면 성착취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자들을 초대하여 영입했는데, 초대조건 중 하나로 ‘일본 애니메이션 여아 사진으로 프로필을 변경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비누 사용을 촉진하겠다는 의도로 아동의 누드 그림을 불투명 형태로 비누 안에 넣어 판매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동 성착취라는 행위에 가상아동은 적극적으로 사용되며, 실존아동을 다루는 것만이 성착취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가상아동을 다룬 음란물이 하위문화(서브컬처)로서 유행한 것은 커뮤니티 안에서만 통제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이것이 커뮤니티 밖으로 무절제하게 벗어난다면 범죄행위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음란물은 특정 소재를 감각적 쾌락수단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비판과 제한을 받아야 한다. 실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상아동을 성욕의 수단으로 삼아 쾌락의 소재로 쓰는 것이 아동의 존엄성이란 개념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명백하다.

가상아동과 실존아동을 구분하여 두 대상에 대한 처벌을 달리하자는 주장은 두 경우 다 성착취에 아동이 이용된다는 본질을 호도한다. 이렇게 양자에 대한 처벌을 구분하면 실존아동 성착취물 처벌 양형이 증가할 것이란 의견은 그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사회가 아동을 성인과의 성행위 상호합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아동을 다룬 음란물은 존재할 수 없다. 유엔아동인권이사회의 아동권리위원회는 2019년 9월 성착취물의 규정에 가상아동과 실존아동을 같이 처리하는 권리협약 선택의정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미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아동포르노그래피의 제작, 배급, 수출, 전송, 수입, 의도적 보유 및 광고를 전 세계적인 범죄로 다룰 것을 강조했다.

음란물의 대상이 가상아동이냐, 실존아동이냐에 따라 형량의 기준을 달리하자는 주장은 자칫 가상아동을 실존아동 성착취의 대안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는 역효과가 우려된다. 무엇보다 법 집행자들이 가상이든 실존이든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심각한 범죄라는 것에 대한 인식부터 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남명희 | 자유기고가·<팬픽션의 이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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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정이 많다. 물건을 사면 뭐라도 하나 끼워준다. 최근엔 이 ‘정을 나누는 임무’를 마스크가 도맡은 것 같다.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할 때마다 마스크가 감사카드처럼 등장한다. 식당에서 서로 밥값을 계산하겠다며 카드를 1㎝라도 더 내미는 것처럼 서로 마스크를 양보하는 풍경도 종종 목격된다. 대중교통 이용 시간이 10분 더 기니까, 집에 노약자가 있으니까, 네가 운동을 더 안 하니까 등 다양한 양보의 핑계가 개발된다. 마스크는 서로 거리를 두기 위한 도구인데, 네가 더 거리를 두라며 마스크를 서로 양보하는 풍경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훈훈하다.

마스크가 일종의 자원이 된 시대에 각자 이 한정된 자원의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얼마 전부터 면 마스크를 사서 매일 빨아서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줄 서서 사 모은 KF94 마스크는 가족 중 노약자에게 가져다드렸다. 역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네가 더 필요하지 않겠냐며 도로 가져가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마스크라는 사물에 점점 정이 쌓이고 사랑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마스크를 도로 가져가라며 내미는 손에서 시선을 떼서 둘러보니 햇볕에 소독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일회용 마스크 열 장이 집 안 여기저기 걸려 있다. 아마 다른 집들도 비슷한 풍경이리라.

날이 풀려 마스크로 인해 덥고 답답해질 만도 한데, 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모두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풍경은 당연하지 않다. 각자 애를 써야만 가능한 풍경이다. 마스크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로부터 당신이 안전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타인에게 주는 배려와 예의 차원일 것이다. 단기간에 이런 사회적 합의를 거치고 함께 실천한 시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마스크로 가려서, 또 물리적 거리 두기로 애써서 서로 멀어지고 있지만, 오히려 노력한 만큼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진다.

<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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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부가 의료협회, 전문가의 권고에 따라 빗장을 걸어 잠그고 방역망을 강화했었다면 우한 코로나는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3월28일 미래통합당 대표 황교안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윗글은 미래통합당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우한 코로나’라는 시대착오적 명칭을 쓰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더 안타까운 일은 코로나19를 물고 늘어지는 게 그들의 유일한 선거전략이라는 점이다. 현 정부가 코로나19에 대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데는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막지 않아 감염을 확산시켰고, 코로나19가 곧 종식된다는 대통령의 발언도 적절치 못했다. 종주국인 중국을 제외했을 때 우리나라가 한동안 확진자 수 1위를 달렸으니, 황 대표가 ‘아몰랑 코로나19!’ 전략에 올인한 것도 이해는 간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하다.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뒤, 차기 대선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는 거야. 으하하하….’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이탈리아의 확진자 수가 급증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 나라의 확진자 수가 우리나라를 앞질렀다. 뒤늦게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 미국은 확진자 14만명을 넘어 종주국인 중국을 제치고 1위가 됐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부에 대한 평가는 180도 바뀌었다. ‘저 나라들을 보면 우리나라가 그래도 대처를 잘한 거네?’ 3월30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52.6%에 달하며, 총선 여론조사에서도 여당 후보들이 죄다 선전하고 있다. 2주 남짓한 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미래통합당의 승리는 비관적이다. 위기에 몰린 황 대표는 지난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었던 김종인을 선거 사령관으로 영입했지만, 자신의 정적에게 사정하는 모양새가 영 구차해 보이는 데다, 81세의 고령인 김종인이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쯤 되면 황 대표의 선거전략은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이 보기에 지금의 미래통합당은 전쟁에 버금가는 국가적 위기에서 정부 비판만 하고, 민생 부문에서마저 초당적인 협력을 안 하는 당에 불과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재난기본소득 같은 대책을 미래통합당이 먼저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현 정부가 경제에 무능할지라도, 국민이 미래통합당을 현 집권당을 대체할 수권정당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처절한 반성이 뒤따라야 하지만, 황 대표는 대권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공천 과정에서 무리수를 뒀고, 자신들의 위성정당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망신을 당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한물간 이슈인 중국인 입국 금지에 매달리는 걸 보면, 개선의 여지도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 황 대표는 운이 제법 따른 정치인이다. 시작은 ‘두드러기’였다. 하필 입대를 앞두고 두드러기가 도져 병역이 면제됐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특출난 이력도 없이 박근혜 정부의 법무장관이 된 것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지만, 그가 국무총리가 된 데는 그보다 더한 운이 따랐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들을 계속 낙마시켜 국민의 피로감이 쌓여갈 때 총리로 지명된 이가 바로 황교안이었으니 말이다. 그 후 어마어마한 운이 그에게 찾아오니, 그건 바로 헌정사상 딱 한 번밖에 없는 대통령의 탄핵&파면이었다. 총리가 된 이가 별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건만, 황 대표는 무려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오른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지만, 그는 국정농단 특별검사팀의 청와대 압수수색과 수사기간 연장을 거부하는 등 민심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다. 그래도 권한대행을 하면서 이름을 알린 덕에 아직도 대권후보로 미약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에게 매력을 느껴 지지하는 사람을 난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다. 

정치인 황교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정도로 기회를 받았음에도 이룬 게 없다는 건 능력이 없다는 얘기고, 그 결과가 국회의원 당선마저 위태로운 작금의 현실이라고. 물론 그가 잘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9대 대선 때 했던 황교안의 불출마 선택은 그나마 평가할 만한데, 욕심은 그만 내려놓고 20대 대선에서도 같은 선택을 해주길 권한다. 그래야 정권교체를 바라는 절반 가까운 국민이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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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어야 한다!” 100년 전 근대 도시 운동을 이끌었던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말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전 세계의 도시들은 도시에 나무를 심고 공원을 조성해왔다. 현재 서울의 1인당 공원 면적은 16.80㎡다. 런던의 33.4㎡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뉴욕의 14.7㎡와 유사하며 도쿄의 4.5㎡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1963년 서울의 1인당 공원 면적은 7.7㎡에 불과했다. 그동안 확보한 공원녹지는 한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녹색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서울의 여유로운 공원녹지에 대한 인상과 수치에는 착시효과가 있다. 자연공원과 하천변을 제외하면 1인당 공원 면적은 11.82㎡로 줄어든다. 게다가 오는 7월 미집행공원이 실효(일몰)됨에 따라 현재 공원 면적의 79%가 다른 용도로 개발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1인당 공원 면적은 2.5㎡ 정도로 쪼그라든다. 단순히 수치의 착시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의 공원 분포를 보면 지역적 불평등이 크다. 몇몇 대형 공원이 있어 공원 전체 면적이 커 보이지만 실제로 걸어서 넓은 공원을 만날 수 있는 동네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는 공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미집행공원을 살리기 위한 예산과 시간을 확보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소외된 지역을 돌아보고 남아 있는 공간적 가능성을 시민과의 협업을 통해 찾아내야 한다. 학교와 등굣길을 녹색의 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옥상과 벽면을 새로운 형태의 녹지로 바꿀 수 있다. 방치돼 있던 도로변의 거대한 빈 땅들을 돌아보고 과감히 도로와 철도를 지하화해 경의선 숲길과 같은 공간을 더욱 늘려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가 진행 중인 ‘3000만그루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어느 도시 부럽지 않은 공원녹지를 확보하면 나무를 그만 심어도 될까? 세계 최고의 공원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런던은 2019년 ‘국립공원도시 런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런던의 목표는 도시 내에 더 많은 공원, 더 좋은 공원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이는 도시 전체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즉 도시의 100%가 공원인 도시를 구상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국립공원도시’는 개념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공원을 주거와 다른 공간으로 나누기보다는 주거를 공원 안의 집으로 보자는 개념이다. 이런 발상은 전체가 공원인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도시, 전체가 학교인 도시로 확장될 수 있다.

런던이 제시한 공원녹지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나무를 다시 심어야 한다.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푸르른 도시가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나무를 심어야 한다. 일상이 비일상적인 염원이 되어버린 시기에, 꿈처럼 다시 피어난 벚꽃과 목련 아래서 마스크를 쓴 채 연녹색 신록을 만져보려는 아이의 손이 왜 우리가 이 순간에도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김영민 |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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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가 서유럽과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공공의료 수준, 사생활 중시의 개인주의 문화, 정부의 대처 역량에 따라 나라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지구적 공포가 최소한 여름까지 계속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지난 세기 스페인 독감에 필적한다.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인 1918~1919년에 발생했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보다 많은 5000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세 페스트 이후 서구사회에 큰 시련을 안긴 전염병이었다.

지난 100년의 의료기술 발달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사망자는 스페인 독감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팬데믹이 야기한 사회적 불안은 정보사회가 만개한 현재 외려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지구사회를 규정짓는 일차적 요소는 ‘초연결’이다.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불안과 각자도생은 더욱 확산되며 강화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다. 먼저, 그렇다면 이 팬데믹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의 의학적 질문이 하나다. 결국 관건은 증상을 완화시키는 항(抗) 바이러스 치료제와 완전히 퇴치시키는 백신의 개발이다. 그런데 백신 개발에 1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때까지 방역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의료와 과학 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한편, 이렇게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의 사회적 질문이 다른 하나다. 팬데믹을 신속히 저지하는 게 일차적 목표이지만, 이 가공할 팬데믹이 가져올 우리 삶과 사회의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2003년 사스가, 2009년 신종플루가, 2015년 메르스가, 올해 코로나19가 나타났다. 특히 코로나19는 지구적 혼돈을 결과함으로써 이제 인류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의 문턱 위에 올라서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인류는 ‘이중적 뉴노멀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뉴노멀의 이중성은 경제의 불확실성과 위험의 불확실성이다. 이 두 뉴노멀은 긴밀히 결합돼 있다. 당장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적 불안을 넘어 경제적 위기를 낳고 있다. 전염병의 지구적 확산은 실물 경제를 정지시키고, 실물의 위기는 금융시장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취약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예견되며, 이 구조조정이 실업의 공포를 불러옴으로써 ‘의학적 공포’는 ‘경제적 공포’로 진화할 것이다.

일군의 비관주의자들은 코로나19가 격발하는 위기에 1929년 대공황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이 경제가 아닌 전염병에 있는 만큼 그 누구도 코로나19가 촉발시킬 파장을 예측하긴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위험의 뉴노멀이 경제의 뉴노멀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과 이 인과과정을 통해 불확실성이 더욱 증가할 경제에 대한 ‘위험의 경제학’의 정책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처에서 우리나라는 서구사회보다 우수한 대응 역량을 선보였다. 정부의 최선을 다한 방역, 의료진의 헌신적 희생, 국민 다수의 높은 공공의식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위험의 세계화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더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의 대응 역량이다. 의학적·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맞서는 국가의 능력과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구된다.

셋째, 사회의 변화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코로나19 광풍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 엄격히 말하면 ‘물리적 거리 두기’가 사회생활의 기본 양식이 됐다. 이 과정에서 상품 구매와 학교 수업까지 온라인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이 광풍이 그치면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옛날에 있던 그 자리는 아닐 것이다. 가상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더욱 중첩되는 제3의 자리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초연결 아래 오프라인과 온라인, 개인주의와 협력주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코로나 이후 사회에서 우리 인류는 사회제도와 의식 모두 적잖이 새롭게 혁신해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인간이 지니는 가장 위대한 힘인 이성과 과학을 부정하라. 그러면 나는 너를 내 손아귀에 넣게 될 것이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성과 과학의 힘에 기대어 이 지구적 위기를 넘어서길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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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의 리벳구조 ⓒ이영준

지금은 웬만한 철구조물은 용접하거나 볼트로 체결하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리벳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항공기는 지금도 리벳을 써서 조립하지만 20세기 초에는 배나 교량 등 큰 구조물을 만들 때 주로 리벳으로 조립했다. 리벳을 써서 조립하려면 두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먼저 조립할 두 장의 철판의 같은 위치에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관통하여 빨갛게 달군 리벳못을 집어넣고 반대편의 작업자가 해머로 쳐서 못대가리를 납작하게 만들면 식은 리벳은 수축하여 두 장의 철판을 강하게 물고 있게 된다. 20세기 초 리벳은 강력한 조립수단이었으나 단점도 있었다. 1911년에 건조된 타이태닉은 빙산과 부딪치면서 선체 외벽이 충격으로 뜯어졌고 두 철판을 붙들고 있던 리벳은 단추가 뜯어져 나가듯이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타이태닉은 그 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가라앉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타이태닉이 요즘의 용접기술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가라앉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

사실 타이태닉은 첫 출항 때 침몰한 비극의 배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은 근대성의 총아이기도 했다. 타이태닉에 사용된 철판이나 리벳은 당시로서는 최고 품질의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빙산이라는 복병을 견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리벳은 근대 초기 산업이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도시의 모습을 급격히 바꾸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뉴욕이나 런던같이 당시 활발하게 발달한 도시에서는 아직도 리벳으로 조립된 구조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뉴욕의 많은 지하철역 안에 있는 쇠기둥은 다 리벳으로 조립돼 있으며 교량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근대성의 흔적을 재빨리 지워버린 한국에선 리벳으로 된 구조물을 보기 어렵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곳은 1917년 준공된 한강대교, 남영역 교차로의 철교이고, 부산의 영도대교 일부가 기념으로 남아 있는 정도다. 타이태닉과 비슷한 시기에 준공된 한강대교는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때 한 번 끊겼었고, 한국전쟁 때 폭파됐으나 지금은 복구되어 리벳구조를 뽐내며 굳건히 서 있다.

<이영준 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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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도든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그 틈을 파고들어 이익을 챙기려는 부류도 늘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개정된 선거제도의 허점을 노린 편법과 꼼수 경연이 펼쳐지고 있다. 양당제 한계를 극복하고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기 위한 선거법 개정의 취지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 등장으로 빛이 바랜 것은 시작일 뿐이다. 의원 꿔주기에 이어 선거공영제를 위한 선거보조금 제도의 존재 이유를 회의하게 만드는 선거보조금 농단(壟斷)까지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때마다 후보자를 낸 정당에 선거보조금을 지급한다. 직전 선거 유권자 총수에 물가상승을 반영한 계상단가(올해 1047원)를 곱해 총액을 산정하고 정해진 원칙에 따라 배분한다. 올 총선에선 12개 정당에 440억7000여만원이 지급됐다. 지금까지 선거보조금 논란은 주로 ‘먹튀’가 문제였다. 2012년 대선에선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27억원의 선거보조금을 받은 후 선거 3일 전에 사퇴하면서 먹튀 논란이 불거졌다. 2014년 6·4 지방선거 때도 32억원의 보조금을 받은 통진당이 후보 단일화를 위해 광역단체장 후보 3명을 사퇴시키자 비난이 쏟아졌다. 먹튀방지법 제안도 나왔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이 의원 꿔주기로 선거보조금 논란에 또다시 불을 댕겼다.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선거보조금 지급 전날인 지난 29일 모정당에서 3명의 의원을 더 꿔와 원내 교섭단체 기준인 20석을 채웠다. 오직 선거보조금 55억원을 더 받기 위한 꼼수였다. 시민사회에선 정당 민주주의에 반하는 위성정당에 대한 보조금 지급은 위헌이란 주장까지 나오고 있지만 막상 위성정당들은 귀를 막은 채 잇속 챙기기에 바쁘다. ‘축지법’에 ‘공중부양’ 능력을 자랑하는 허경영 대표의 국가혁명배당금당도 동참했다. 배당금당은 지역구의 30%(76명) 이상에 여성후보를 공천한 유일한 당이 되면서 여성추천보조금 8억4200여만원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이내 청소년 성폭행과 아동·청소년 강제추행 전과자들을 지역구 후보로 공천한 게 확인되면서 비판이 쏟아진다. 정치권이 꼼수에 집착한다면 결국 시민들이 투표권 행사라는 채찍을 드는 수밖에 없다.

<박영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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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 도넛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길모퉁이와 기차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점이다. 근처에 다른 카페나 빵집이 없다보니 출근길에 종종 거기 들른다. 커피와 함께 도넛 두개를 포장해 하나로 아침요기를 하고 다른 하나는 오후 공강 시간에 간식으로 먹곤 한다. 여러 해 이어진 일상이라 계절별 신제품도 꿰고 있다. 초봄엔 딸기우유크림 들어간 네모난 도넛, 늦가을에는 밤잼 넣은 동그란 도넛, 한겨울이 되면 초코쿠키 얹은 링도넛, 이런 식으로.

작년 이맘때까지 거기서 일했던 분은 내 또래로 짐작되는 여자점원이었다. 바쁜 시간대엔 아르바이트생과 함께였지만 아침엔 주로 그분 혼자 점포를 지켰다. 새침한 인상에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는 걸 보면 주문하기 전에 늘 먹던 ‘샷 추가하고 물 적게 넣은 아메리카노’를 제조해주셨다. 

이 섬에서 맞이한 첫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다. 함박눈 쏟아지던 어느 아침, 커피를 내리던 그분이 갑자기 말을 건넸다. “오늘 미리 장 봐두세요.” 이제껏 커피와 도넛 이외의 대상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 없었기에 놀라서 “예?”하고 되묻자 “여기 겨울 처음 겪죠?” 하셨다. 이곳은 중산간 지대라 폭설 시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날 이후 사흘 밤낮으로 눈폭풍이 치더니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가 무너졌다. 이듬해 겨울 다시 큰눈이 내린 날엔 보아하니 이번엔 길이 파묻힐 정도는 아니라 하셨고, 하룻밤 지나자 과연 차들이 쌩쌩 다녔다. 그렇게 난 요긴한 기상 정보를 ‘네이버 날씨’ 앱 아닌 단골 도넛집에서 구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멀리서 사온 레몬케이크 같은 걸 잘라 갖다드리면 “빵 파는 사람한테 빵 주네?”하고 웃으셨다.

그렇게 차츰 가까워지며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다. 결제 후 카드를 돌려줄 때 그분은 항상 테이블 위에 두셨는데, 그때마다 예전에 친구한테 들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는 카운터에서 결제할 때 카드나 현금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는 것은 무례함의 발로라 했다. 돈은 손에서 손으로 직접 건네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었다. 그때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 후 계산대에 서면 의식적으로 ‘손에서 손으로’를 기억했다. 짐작건대 그분 역시 이제껏 그런 생각 못 해보셨을 텐데, 혹여나 일부 손님이 오해하면 어쩌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해졌다 해도 ‘손에서 손으로’가 예의라더라 전하는 건 무례한 참견 같았다. 더욱이 그게 보편화된 에티켓인지 확신도 없었기에 말하지 않는 편이 옳을 듯했다. 아무튼 나는 계속 카드를 상대의 손으로 건넸고, 상대는 계산 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턴가 이에 대해 잊었다.

몇 계절 더 지나 봄이 되었다. 가게로 들어서자 그분이 “앞으론 정석대로 주문하셔야 해요. 샷 추가하고 물 적게 넣은 아메리카노” 하셨다. 그날이 본인의 마지막 근무일이라 했다. “3년 넘게 뵈어왔는데 아쉬워요.” 발끝을 보던 나는 다음 순간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계산 후 카드를 내미는 상대의 손끝이 그날은 테이블 위가 아닌 내 손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게 뭐라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손님의 숨은 생각을 읽어내 마지막 만남에서 감동을 주자’고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다. 그건 아마 부지불식간에 우연히 나온 몸짓이었을 테고 어쩌면 그날의 사소한 ‘실수’였을지 모른다. 다만 그 우연성 안 어딘가엔 날마다 커피와 도넛 두개씩 사가는 고객이 손에서 손으로 뭔가 건넸던 3년간의 아침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말하자면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었다. 그러니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때론 상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말하는 대신, 당신의 길을 그대로 걸으며 시간의 선물에 신뢰를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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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나온 이슈 중 하나는 한국의 처리과정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의 방역과 치료가 세계 수준으로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고, 야당은 초기 방역 실패를 호도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외 인정에 대한 갈구는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 뿌리는 역사적으로 항상 주변세력의 영향권 밑에서 신음했던 국제정치적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겠지만, 보다 가깝게는 경제발전 후발 주자로서 산업화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다.

후발 산업화는 한국뿐 아니라 소련, 독일, 일본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배엘리트들이 자국의 극심한 상대적 후진성과 이에 기반한 열등의식을 갖는 데에서 출발했다. 러시아는 오랜 기간 서구에 대한 후진성을 안고 있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서구와 비교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처방이었다. 일본 메이지유신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이 서구보다 적고, 독일의 닭들은 일본 닭들보다 많은 달걀을 낳는다”고 일본의 열등성을 표현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 역사에 대한 평가에는 열등의식과 후진성 인식이 가득 차 있다. 역사만 길지 침략의 역사 속에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정도라고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5000년 역사 속에 항상 외침만 당했다고 한탄했다.

후발 주자들의 후진성과 열등의식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촉매제로 활용됐다. 한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각국이 연평균 1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뿌리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적 산업화는 국제적으로 강한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스탈린은 대공황에 싸인 서구에 대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해 대등한 지위를 요구했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은 서구와의 대등성을 보이려는 열망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은 성공적 산업화를 바탕으로 일본이 했던 것처럼 대외적인 팽창이 어려웠다. 이미 국제정치가 제국주의 패러다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지 점령 같은 제국주의적 행위를 통해 대외 인정을 추구했다면 한국이 개진할 수 있는 것은 통일 문제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시작으로 나타난 적극적인 통일정책은 이의 발현에 불과했다. 그러나 통일 문제는 대외팽창을 통한 인정보다 내부 가슴앓이만 심화시켰다.

한국의 대외인정 결핍증의 극치를 나타낸 사례는 역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였다. 세계화의 목표는 선진국 진입이었고, 이의 상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었다. 제도적·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한 세계화 추진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대외인정을 갈구했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조급한 선진국병은 급기야 나라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오히려 대외 종속성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이 사례는 선진국 대열에 서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실적에만 있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열등의식에서 출발한 일들은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고 방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누가 나를, 우리나라를 우습게 혹은 업신여기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국가 내부의 문제를 침착하고 계획적으로 성찰하고 해결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가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심리적 불안감은 개인에게서 나타날 때 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국가적으로는 전쟁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한국은 누구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충분히 되었다. 남은 과제는 한국인에게 편한 제도와 가치를 창출하여 자족감을 높이는 일이다. 더 이상 서구의 제도나 가치를 지향점으로 놓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시아에서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서구적 제도와 한국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모두가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일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처리과정은 바로 이런 것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과 성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한 정권, 한 세대에서 이뤄질 문제가 아니다. 영화 <기생충>이든, BTS든, 코로나19 방역이든 그저 하나의 벽돌을 쌓는 것뿐이다. 초조한 대외인정 추구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한국적 근대성이 완성될 때 우리가 기대하지 않아도 세계의 주목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대외인정 결핍증에서 벗어날 때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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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31일 온라인개학과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연기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가 4월9일부터 전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에 대해 순차적으로 온라인개학을 하기로 했다. 4월9일 중·고교 3학년을 시작으로, 16일 중·고교 1~2학년, 초등 4~6학년, 20일 초등 1~3학년 순으로 원격수업을 실시한다. 유치원도 등원개학 기준이 충족될 때까지 휴업을 연장하기로 했다. 교육부는 아울러 수능일과 수시 학생부 작성 마감일 등 대입 일정도 각각 2주일가량 늦췄다. 코로나19로 등교개학이 학생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과 학습 공백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고려해 정부가 온라인개학이라는 절충안을 낸 것이다. 온라인개학은 초유의 일이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이제라도 철저히 준비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다. 온라인수업을 제대로 하려면 디지털 인력과 장비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조사결과를 보면 지역별·소득별 컴퓨터 보유율 차이가 크며, 일선 교사들의 원격수업 경험에도 격차가 많다. 원격수업이 효율적·안정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들 기기와 수업자료부터 서둘러 확충해야 한다. 디지털 접근성이 학교별, 계층별 교육 격차·소외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질 낮은 온라인수업으로 인해 학생들이 사교육을 찾으며 또 다른 교육격차가 벌어지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개학이 5주 이상 늦춰지면서 고3 수험생이 빠듯한 입시 준비 기간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학교가 학생부 마감 등 수시 일정을 맞추는 데 지장이 없도록 교육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장기화된 아이들의 돌봄 대책도 시급하다. 특히 저학년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기기를 다루지 못하는 문제까지 겹쳐 교사 혼자 아이들을 모두 관리하는 온라인수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초등 저학년의 개학 전까지 재택근무, 유급휴가 확대, 긴급돌봄 시스템 마련 등 대책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 

교육당국은 이번에 온라인개학과 학사 일정 연기 등에 대한 큰 틀만 마련하고 교육 내용과 평가 등 구체적인 시행방안은 각 학교에 맡겨 놓았다. 교육당국은 현장 교사들과 공통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혼란을 최소화하고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육부는 이달 말에는 등교개학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장기적인 대비책도 준비해야 한다. 법정 일정에 쫓겨 우왕좌왕 대책을 내놓는다면 고3 입시생을 비롯한 학생들의 피해와 혼란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앞으로 벌어질 다양한 가능성에 모두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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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DB)

정부가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발표한 30일 오후 2시 공공복지서비스와 소득인정액 셈법을 안내하는 포털 ‘복지로’가 다운됐다. 지급기준인 ‘소득 하위 70% 가구’에 자신이 포함되는지 알아보려고 접속자가 몰린 탓이다. 접속 지연 장애는 31일에도 이어졌다. 복지로의 마비·장애는 두 갈래로 읽힌다. 중앙정부가 지급하는 첫 재난지원금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크다는 것이고, 세부 지급 기준을 명확히 내놓지 않은 답답함이 표출된 것일 수 있다. 정부는 중위소득 150%(4인 가구 712만원) 밑으로만 지급 범위를 추산하고, 소득산정에 부동산·금융 재산도 포함할지는 추후 발표키로 했다. 어느 쪽이든 1400만으로 예견된 가구수는 비슷할 것이다. 정부는 소득산정 방식의 늑장 공개로 자초한 혼선을 무겁게 돌아보고, 합리적으로 그은 기준선을 조속히 내놓아야 한다.

더 시급히 교통정리해야 할 일은 정부·지자체 간에 벌어지는 혼선이다. 정부는 재난지원금 9조1000억원 중 80%(7조1000억원)를 부담하고, 20%는 지자체가 맡도록 했다. 경기도는 1인당 10만원씩 주는 기본소득과 14개 시·군이 발표한 긴급생계비는 중복 지원하되 긴급재난지원금은 정부 몫 80%만 지급하기로 했다. 별도 지원이 없는 시·군만 10% 예산을 부담토록 했다. 경기도와 시·군이 1인당 10만원씩 주기로 한 저소득 4인 가구라면 160만원(정부 80만+도 40만+시·군 40만원)을 받고, 재난지원이 없던 시·군민은 130만원(80만+40만+시·군 10만원)을 받는 식이다. 다른 광역지자체들도 엇갈리고 있다. 서울·대전은 지자체 몫 재난지원금 20%와 이미 발표한 재난생계비를 유지키로 했고, 부산·울산·세종·충북은 정부 재난지원금으로만 일원화하기로 했다. 정부가 약속한 100만원을 하한선으로 해 지자체별 재난지원금 크기나 지급 방식이 달라지는 셈이다.

정부는 31일 지자체가 쌓아온 재난관리기금 3조8000억원을 취약계층·소상공인에게 쓸 수 있도록 열어줬다. 1차 추경 때 소비쿠폰을 주고, 전날 4대보험료를 감면·유예한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약자를 보듬는 긴급재난지원은 중복 여부를 따지기보다 안전망부터 촘촘히 세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할 게 복지정책이다. 긴급지원에 지역 간 혼선과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예산을 협의하고, 시민들과도 진솔하게 소통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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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4월 1 (출처:경향신문DB)

박형준 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은 31일 정부가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한 데 대해 “총선을 앞두고 돈 풀기로 표를 구걸하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후 사정을 살펴본 결과 명백히 총선을 겨냥한 매표 욕망에 의해 결정됐다는 것”이라며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신세돈 공동위원장은 “앞으로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선거용 퍼주기’ ‘매표 행위’라는 것이다. 통합당은 전날엔 “선거 유불리만을 저울질한 임시방편, 임기응변식 대응”이라며 비난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중하위 소득 가구에 생계 보장과 소비진작 효과를 내기 위해 마련된 대책이다. 정부가 재난을 맞아 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처음이다. 통계청이 이날 발표한 통계에서도 산업생산과 소비가 9년 만에 최대 폭으로 떨어졌다. 그만큼 지금의 위기가 엄중하다는 의미다. 상황이 절박하다는 점에선 야당도 동의하고 있다. 소득 하위 70% 가구에 4인 가구 기준으로 가구당 100만원을 지급하는 데에는 9조1000억원가량이 들어간다. 통합당 내에선 지원 규모를 더 늘리자는 얘기도 나왔다. 황교안 대표는 40조원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은 정부 예산의 세출 20%를 조정해 지원 규모를 100조원으로 대폭 늘리자고 했다. 같은 당 지도부에서도 한쪽에선 지원을 더 늘리자고 하고, 한쪽에선 ‘표 구걸’이라고 한다. 도대체 주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정부는 긴급재난지원을 위한 추경안이 4월 총선 직후 국회에서 통과되면 5월 중순 지급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총선 전에 국회를 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 제1야당이 각 가정에 하루라도 빨리 지원금이 전달될 수 있도록 당장 ‘원 포인트 국회’를 열어 추경안을 처리하자고 했으면 많은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또 지원 규모 증액 등을 놓고 여야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보자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번 대책은 코로나19 위기에 맞선 ‘민생 심폐소생술’과 다를 바 없다. 한데 함께 힘을 모으기는커녕 ‘매표 행위’라고 한다. 아무리 총선을 앞두고 정부를 견제하는 게 야당의 선거 전략이라고 해도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있다. 야당은 정부를 때렸지만, 멍은 시민들의 가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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